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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9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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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 https://hygall.com/579519972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진 후로 주자서는 약 기운에 취해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잠을 자며 보냈는데 꿈 속엔 늘 온객행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

...서...아서...미안해...

로온...! 가지마 제발...!

백발이 된 온객행이 부서지듯 웃으며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꿈은 몇천번을 꾸어도 익숙해지지 않았어.

"흑..."

아이처럼 울며 꿈 속을 헤매이던 주자서는 제 곁을 떠나는 그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잡히는 건 차게 식은 공기 뿐이었지.

"흐으..."

그때 누군가 커다란 손으로 그의 손에 깍지를 껴 마주 잡았어. 그리고 다른쪽 손으로는 눈물로 엉망이 된 주자서의 얼굴을 다정하게 닦아주었지. 익숙한 온기와 손길에 주자서가 로온...? 하고 눈을 뜨자 흐릿한 시야가 점차 선명해지며 눈 앞의 인영이 보였어.

"일어났어요?"

온객행과 같은 얼굴을 한 공준이 주자서가 눈을 뜬 걸 확인하고 잡고 있던 손을 놓으려 하자 주자서가 다급히 그의 손을 다시 마주 잡으며 울먹였지.

"가지마...로온..."

고열과 약 기운에 취해 몽롱한 의식 사이로 주자서가 그를 로온이라 착각하자 공준이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어. 하지만 늘 저를 밀어내기만 하던 그가 제게 먼저 내민 손을 차마 거부할 수 없었지. 비록 다른 사람과 저를 착각하였다 할 지라도.

"울지마요."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주자서에겐 한없이 약해지는 공준은 그 옛날 술에 취한 주자서를 달래듯 그를 품에 안아 한쪽 손으론 주자서의 뒷머리를 감싸고 다른쪽 손으로는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어.

"나 어디 안가...안갈테니까 그만 울어요."

"로온...흑..."

매번 세상사를 다 짊어진 얼굴로 차갑게 저를 대하던 주자서는 사라지고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 여리고 연약해진 그가 제게 안겨 아이처럼 울자 공준은 그가 영영 자신을 로온이라 착각해도 좋으니 이 순간이 영원토록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내가 로온이라는 사람이었다면...내가 그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나는 안돼요...? 당신을 아프게 하는 그 사람보다 내가 당신을 더 사랑해줄 수 있는데..."

나 좀 봐줘요...

주자서의 잠옷이 구겨질 만큼 그를 꽉 껴안은 공준이 애원하듯 그에게 속삭이며 울음을 삼켰어.



타는 갈증에 주자서가 눈을 뜨자 늦은 오후인 듯 방 안이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지. 오늘은 또 얼마나 잔 거야...약을 바꾸던가 해야겠군...이대로는 산 송장이나 마찬가지...응?

"...뭐야?"

주자서가 물을 마시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는데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아 아래를 내려다 보자 누군가 제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지.

"허..."

고개를 돌려 팔의 주인을 확인하니 예상대로 공준이였어. 하긴...이 저택에서 겁도 없이 제 방에 들어와 이런 짓을 할 사람은 그 뿐이였지.

"야...공준."

이것 좀 놔...성가신 얼굴로 주자서가 그의 팔을 풀으려는데 공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릴 뿐. 눈을 감은 채로 팔에 힘을 더 줄 뿐이었어.

"윽...야 임마..."

주자서가 끙끙대며 공준의 팔을 밀어내고 꼬집기 까지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 결국 그의 품에서 벗어나길 포기한 주자서는 한숨을 내쉬곤 멍하니 창밖을 쳐다봤어.

"눈 오네..."

주자서와 공준이 함께 누워있는 따뜻하고 아늑한 방과 달리 창밖에는 새하얀 눈이 겨울바람에 휘날리고 있었지.

"준아...눈 와..."

공준은 어렸을 적부터 눈이 오는 날을 좋아했어.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면 저택 정원으로 뛰쳐나가 행복한 표정으로 눈사람을 만들곤 했지. 그리고는 서재 창문에 동그랗게 뭉친 눈덩이를 던져 눈이 오는 줄도 모르고 서류에 파묻힌 제 관심을 끌고는 뿌듯한 얼굴로 눈사람을 자랑했어. 아저씨...! 이거 봐요...! 하며 추운 날씨에 볼을 빨갛게 물들인 그가 참 귀여웠는데...

옛날 생각에 뭉클해진 주자서가 슬쩍 고개를 돌리자 언제 깬 건지 공준이 저를 쳐다보고 있었지.

"뭐야...언제 일어났어?"

"...좀전에."

일어났으면 기척이라도 내지...못마땅한 얼굴로 주자서가 공준을 뚫어져라 보니 공준은 난감한 듯 슬쩍 제 시선을 피하는 거야. 하여튼 이거...어렸을 땐 그리 순하고 착하더니 크니까 은근 버릇 없어졌어...하며 혀를 찬 주자서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자 그제서야 공준이 갈 곳 잃은 시선을 동글동글한 주자서의 뒷통수로 고정했지.

"너...내가 평범한 사람이 아닌 건 알고 있지?"

주자서가 창밖을 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그에게 그리 말하자, 공준은 주자서의 어깨에 이마를 대곤 고개를 끄덕였어.

"하긴...모르는게 더 이상하지...세월이 흘러도 나는 늘 같은 모습이니까."

자조섞인 미소를 지은 주자서가 허탈하게 웃자 공준이 불안한 듯 그의 몸에 제 몸을 더 가까이 밀착시켰어.

"준아...나는 곧 죽는다."

로온을 다시 만나기 위해 오랜 세월을 버텼는데...이제 그 끝이 보이는 듯 해...먹먹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는 주자서를 돌려 눕힌 공준이 화가 난 듯 그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지.

"안죽어. 당신."

"준아..."

"당신은 못 죽어. 내 허락없인."

악에 받친 듯 처절하게 그리 말하는 공준이 안쓰러워진 주자서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쓰다듬었어.

"9년 전...내가 널 떠난 건. 내가 죽고 홀로 남겨질 네가 걱정됐기 때문이야." 

난 알아...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진 세상이 얼마나 춥고 괴로운 지...

"난 네가 나를 그리워 하기 보다는 원망하고 미워하길 바랬어."

그러다...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 나를 잊고 행복하게 살 길 바랬지...

"그런데 너는..."

주자서가 아프게 저를 보며 속마음을 털어놓자 공준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어.

"준아..."

"...응."

"약속해."

내가 죽어도 울지 않겠다고. 네 목숨을 소중히 하고 충실히 살아가겠다고.

"그리 약속하면 더이상 네게서 도망가지도...너를 밀어내지도 않을게..."

약속할 수 있겠니...?

그 말에 기어코 눈물을 떨어뜨린 공준이 제게 잔인한 말을 내뱉는 주자서를 원망과 애증이 섞인 눈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어.

"당신이 미워."

"미안해...준...읍...!"

더이상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주자서의 입술을 집어삼킨 공준이 그의 입안을 파고들며 거칠게 키스하자 주자서가 숨을 헐떡이며 공준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어. 그러자 공준이 화가 난 듯 넥타이를 풀더니 발버둥치는 주자서의 몸을 허벅지로 누르며 주자서의 손목을 침대 기둥에 묶었지.

"공준...지금 뭐하는...!"

"좋아. 당신이 말한대로 그리 살게. 그니까 당신도 날 밀어내지 않겠다는 약속 지켜."

그 말에 주자서가 반항을 멈추자 공준이 쓰게 웃으며 그의 윗옷을 찢듯이 벗겼어.

"이제 당신은 죽을 때까지 내 거야."

울어도 내 품에서 울고
죽어도 내 품에서 죽어.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니까...후회하지마.



객행자서 준저 사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