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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1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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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아버지! 이제 아버지가 계시니까 둘째 아버지는 안 오시는 거죠?”
“부친, 아무리 도려라 해도 가둬놓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음.”

양쪽에서 소매를 당기며 지저귀는 자식들의 목소리에 남희신은 귀가 다 따가웠다. 맞은편에 아소를 무릎 위에 앉히고 차만 마시고 있는 동생을 건너보자 새침하게 눈을 피했다. 아무래도 깨어나자마자 후취니 소실이니 소리가 나온 바람에 마음이 단단히 상한 듯 싶었다. 아니면 도망다니던 회상을 잡아 섭가에게 돌려준 것이 문제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심 둘이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조금 미루고 싶었던 희신은 아영과 아희의 손을 잡아 도려에게 밀었다.

“그래, 너희 아버지가 밖에 나오신지 오래되었으니 가서 구경을 좀 시켜드려라. 채의진까지 나가도 된다.”
“정말요? 새 아버지! 우리 얼른 나가요!”
“새 아버지가 뭐야! 아버지지!”
“악! 아프다니까! 그리고 아버지라고 부르면 헷갈리잖아!”

남희가 제 오라비의 말액을 잡아당기며 꾸짖자 남영이 악 소리를 내고는 분한 듯 투덜거렸다.

“가주님은 부친이라고 부르면 되잖아!”
“그건 싫어! 너무 먼 거 같잖아! 아버지는 아버지야!”
“또또 억지 부리지! 소종주가 그렇게 체통이 없어서 어떡해!”
“헹, 난 아직 여덟 살인 걸! 위숙부가 너야말로 그렇게 조부님 흉내만 내면 수염날 거라고 그랬다!”
“….너어! 잡히기만 해봐!”
“잡아봐라!”

이를 악문 남희가 제 오라비를 따라가자 남영이 남망기가 앉은 의자 뒤로 뛰어갔다. 남망기는 늘 그랬듯이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지만 남희신은 동생이 제법 당혹한 기색을 눈치챘다. 그들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남망기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이번에는 남희신이 시선을 피했다. 남망기가 그렇게 된 후로, 그도 숙부도 아이들에게 엄격하게 대하지 못 했다. 가규도 조금 줄였을 정도였다. 굳이 남망기 앞에서 그 일을 언급하고 싶지 않았던 남희신은 손을 휘저어 영력으로 남매를 남망기 곁으로 살짝 밀어냈다.

“아버지가 정신이 없으시니 좀 조용히 하고, 너무 늦지 말거라.”
“네!”
“…아,”

남희신은 동생이 자신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듯이 손을 움직이는 것을 못 본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아버지, 떡 먹으러 가요! 그리고 인형극도 보러가요!”
“…그래, 아영.”



그리고 사흘이 흘렀다. 남희신은 결코 의도적으로 자신의 도려를 따돌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종무가 너무 바빴고, 아이들은 드디어 종무에 쫓기지 않고 자신들과 계속 있어줄 부친을 얻은 것에 흥분한 상태라 둘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없었고, 설명을 요구하는 숙부와 장로들에게 붙잡혀 있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 남희신도 알고 있었다. 그는 8년 전 자신이 한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사실 그는 8년 전 남망기가 무슨 생각에 그런 짓을 벌였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 끔찍한 날, 그가 정실 정원에서 피에 젖은 남망기를 목격한 직후의 기억은 흐릿했다. 겨우 남망기를 목숨만 붙여놓은 위태로운 상태에서 벗어났을 때, 그는 몸소 정실을 정리했다.
다른 이들을 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우연히 바닥 한 구석에 숨겨진 상자를 발견했다. 물건은 많지 않았다. 그들의 어린 시절, 숙부 몰래 아잠에서 선물했던 낡은 장난감 몇 개, 처음 글자를 가르쳐주었을 때 쓴 그와 자신의 이름을 연습한 글씨, 그가 선물로 그려준 어린 시절 그림 몇 점. 쓰디쓰게 그것들을 살펴보던 남희신은 문득 몇 가지 이름이 써진 것을 보았다. 남영, 남희, 남소…. 처음에 그는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장 처음 쓰여진 것으로 보이던 글씨는 이미 색이 바래고 있었고, 필체도 지금만큼 정갈하지 못했다. 두 번째는 조금 덜 흔들렸고, 그리고…. 남희신은 동생의 서체를 알았다. 그 자신이 가르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같이 있으나 서로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던 때조차 그의 글씨는 익숙했다. 간결한 일지, 편지, 보고…
그는 그 이름들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느꼈던 통증을 기억했다. 그들의 태어나지 못한 아이들…
그것이었을까? 그들이 이름뿐인 관계가 아니라 진정한 도려가 되기를 바란 것일까? 어째서? 아주 단순한 답이 떠올랐지만 남희신은 그것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이 처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을 때, 남망기는 고작 열 살이었고 그는 열 셋이었다. 그들 사이에 무엇이 태어날 수 있었단 말인가? 짐승같은 본능으로 인한 착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열 아홉의 남망기는 죽음으로써 그가 주려고 했던 모든 것을 거부했다. 남가 가주의 도려라는 족쇄도, 제 친형을 짝으로 맞는 수치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부부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들의 슬픔도 보지 않게 해주고 싶었던 그의 노력을, 그의 마음을.
남망기가 피에 젖은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남희신이 느낀 것은 분명 분노였다. 그것은 그가 원한 남망기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좀더 자유롭게, 좀더 행복하게, 좀더… 너만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니라, 내가 아니라, 너만은…그렇게 살 수 있기를 바랬다…
이런 지저분하고 비참한 운명이 아니라.
처음 남영을 가진 것을 깨달았을 때 그가 의원의 은근한 권유를 거부한 것은 복수심이었을 것이다. 네가 그렇게 원한 것을 줄 테니, 어디 가져보라고 하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날카로운 감정은 뭉툭해지고, 아잠만큼은 아니라 해도 아이들이 조금씩 애틋해졌다. 아무런 계산도 없이, 음양의 도리 따위는 모르고, 정을 배운 적이 없어 뻣뻣한 그에게도 그저 피붙이라고 정을 붙이는 아이들을 냉정하게 대할 수 없어졌다. 어쩌면 망기가 그에게 품었던 것도 이러한 정일까. 그가 미처 보지 못하고 이곳에서 밀어내는 것만이 최선이라 생각한 것은 오만이었을까. 하지만 동생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의 품안에 있는 동생을 돌보며 그의 가슴에서 부모가 낸 상처도 서서히 아물어갔다. 평생 이리 산다 해도 괜찮다, 생각했는데.
그리고 그것은, 무엇 하나 남망기의 뜻이 아니었다. 남희신은 냉정하게 자신이 한 짓을 되돌아보았다. 멋대로 아이들을 낳고, 멋대로 종주의 도려로서 족보에 올리고, 멋대로…

“일어나셨습니까.”

아직 어두운 천정을 올려다보고 있던 남희신은 정확히 묘시가 되자 닫힌 장지문 너머로 들려온 동생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천천히 침상에서 일어났다. 이제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은 다한 것이다. 아실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아이의 원망어린 눈을 떠올리고 그는 소리없이 한숨을 흘렸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것에 익숙했다. 마지막 남은 동생의 원망이나 책망도 견뎌낼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8년 전 자신이 바란대로 동생을 자유롭게 해주게 되더라도.

“…들어오너라.”

침의 차림으로 일어나 병풍 뒤에서 자신도 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그의 뒤에서 작게 옷감 스치는 소리가 들려 동생이 따라들어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관을 올리고 그는 병풍 밖으로 나가 제 자리에 앉았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깔끔한 모습이었지만 그가 골라 입혔던 관이나 화려한 비단옷, 패옥이 눈에 띄지 않았다. 8년 전의 동생이 그대로 돌아온 것 같은 착각에 남희신은 저도 모르게 직시하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잠시 차를 끓일까 생각했지만 그렇게 오래 끌 일은 아니라 고쳐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아직 몸이 편치 않을 텐데 좀더 쉬지 않고.”
“…….괜찮습니다.”

한실의 서늘한 공기 속을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남희신은 자신이 도려라기 보다 형으로서 행동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그는 제 아우의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는 못난 형이었을 뿐, 도려다운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는 남망기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형장을 뵙고 싶어 합니다. 아직 많이 바쁘십니까.”
“음… 오늘 명결형님이 오실 터이니 곧 괜찮아질 거다.”
“……”

문득 동생의 기분이 가라앉은 것을 느끼고 남희신은 의아하게 동생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8년 전에도 동생은 섭명결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서로 가문의 후계자로서 만났을 때부터 섭명결은 보기 드물게 호쾌하고 표리가 다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그가 음인임을 밝혔을 때도 음인이 종주가 못 될 이유가 없다고 대놓고 다른 이들을 비웃었고, 소문이 무성한 남희신을 가까이 하면 자신도 좋지 않은 소문이 날 것을 알면서도 신경쓰지 않았다. 자주 만나지는 못 하지만 아이들도 귀여워했다. 어쩌면 망기의 차분한 성격에는 명결의 시원한 태도가 너무 거칠게 느껴지기 때문은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섭가 일이 동생에게 기분 좋은 화제는 아닐 것이다.

“너무 신경쓰지 말아라. …섭종주가 오시면 함께 돌려보내기로 했다.”
“숙부님이 장로들 중에 아직도 반대하는 이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신들이 종주의 뜻을 굽히게 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도 있지.”

남희신이 무심히 말했다. 8년 전의 어린 종주였다면 어쩌면 일말의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이미 충분히 존경받는 종주였고, 장로들의 뜻을 일일이 살펴야 할 위치는 아니었다. 아직도 그것을 모르는 이가 있다면 그것을 알게 해주는 것은 종주로서의 책임이기도 했다. 남망기의 시선이 조금 놀란 듯이 느껴져 그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비록 혼례는 제대로 치르지 못했지만 족보에 네 이름을 올렸고 아이들은 모두 적자이니 걱정할 것 없다. 만약 네가 불편하다면 잠시 남가를 떠나 있어도 괜찮다. 아이들에게는 내 단단히 일러놓을 터이니 너무 신경쓸 것 없다.”
“…제게 어디로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남망기가 문득 그에게 손을 뻗었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미처 손을 피하지 못한 남희신의 손을 잡으며 남망기가 그를 똑바로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곳은, 제 가족이 있는 제 집입니다.”
“……”
“아무리 밀어내셔도 당신 곁에 있을 것이고, 함께 아이들을 기를 것이고, 죽은 뒤에는 함께 사당에 들어갈 겁니다.”

이번에는.
남희신은 남망기가 입밖에 내지 않은 말을 들었다. 수백 수천 가지의 상념의 그의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러나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은 단 하나의 질문뿐이었다.

“왜?”
“…? 당신을, 연모하기 때문입니다.”

남망기가 의아한 듯이 눈썹을 모으며 답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자명한 진실이라는 듯이.

“하지만…우리는 형제인데.”

이것은, 네 운명이 아닐 텐데.

“열 살의 제가 왜 형장을 찾아갔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때, 제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네, 운명이 아니었는데.

“그리고…”

남망기가 그의 손을 잡은 제 손에 힘을 주며 천천히 말했다.

“설령 제가 음인이 되었다 해도, 형장이 양인이 되었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

남희신은 눈을 깜빡였다. 남망기가 문득 눈썹을 내리깔았다.

“열 아홉의 저는 어리석었습니다. 아이들을 보고,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 저는…형장에게 화가 나 있었습니다. 왜 저를 보아주지 않는지, 왜…가족이 되어주지 않는지. 늘…받는 것에만 익숙했습니다.”
“…..”

남희신은 갑자기 자신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는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진심이나 진실을 감추라고 훈련받았다. 나약함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마음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남가의 가주로서, 세가의 종주로서, 형으로서, 부친으로서. 하지만 남망기는 그의 손을 놓치지 않았다.
탁자가 삐걱거렸다. 동등한 힘이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었다. 문득 희신의 머릿속에 잊고 있던 말이 떠올랐다. 고소쌍벽. 세상에 단 하나뿐인, 동등한, 그의 반쪽.
남망기가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내뱉었다.

“저를 사랑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두 번 다시 놓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을.

나의 유일한 운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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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기희신
Bgm<beyond> https://youtu.be/NEBWxp6G3wY?si=RtTByhWn4MGvSC3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