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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7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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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양인 음인 차별 없는 세계관

션웨이와 웨이터의 도움으로 자리에 무사히 착석한 윈란은 우선 약을 먹었다. 더는 향이 나지도, 머리가 어지럽지도 않았다. 션웨이는 이제 더는 향이 나지 않도록 주머니 안의 약을 삼키는 윈란을 바라보았다. 약을 삼킨 그는 잠깐 침묵을 지키다가 곧 멍청하게 션웨이를 쳐다보았다. 션웨이는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윈란은 션웨이에게 말을 걸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션웨이가 먼저였다.

"자오윈란."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 이름 한 글자를 말하는데, 흰 전류가 찌릿하게 머리까지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겨우 그 한 마디를 간신히 속에서 끄집어내 답하면서 션웨이는 이제 더는 향이 나지 않도록 주머니 안의 약을 삼키는 윈란을 바라보았다. 그 찰나의 시간 동안 그는 재회의 윈란을 자리에 앉혔던 방금을 다시 한 번 곱씹었다. 그의 몸에 닿은 손의 혈맥이 심장까지 연결되어 쉴새없이 고동치고 있었다. 션웨이가 생각했다. 앉힐 때 그의 눈에 자신이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았을까. 고등학교 때보다 더 마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 가벼운 몸이라서 의자에 앉히는 것 자체는 동떨어진 퍼즐 한 조각을 제자리에 끼워넣을 정도로 쉬운 일이었다. 문제는 표정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흐트러진 표정을 윈란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했다. 윈란에게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니 다행히 감정 제어가 성공한 듯 했지만 말이다. 

"할 말이 있어."
"말해. 션웨이."

아까의 소동은 순전한 우연이었지만 동시에 기회였다. 자신에게 더는 향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윈란은 어느 새 매우 냉정한 눈으로 션웨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냉정할 때는 매우 냉정한 인간이었다. 션웨이는 그 표정에 잠시 질식하고 싶었지만 곧 체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그는 용서를 빌어야 했다. 원래 절대 마주칠 일이 없을 테니 용서 따위의 생각은 한 적조차 없었지만 어쨌거나 빌어야 하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미안해. 그 말을 하려던 찰나, 섬찟한 느낌이 션웨이에게 훅 끼쳐왔다. 당연히 윈란에게서였다. 그의 눈이 천천히 윈란의 행색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를 훑는 날카로운 시선은 넥타이에서 멈췄다.  션웨이가 눈썹을 찌푸리며 윈란을 바라보았다. 그가 한숨을 쉬며 말미를 청했다.

"잠시만."
"뭘?"

반대로 윈란은 생각보다 매우 인내심 넘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일에서도  않는 인내심을 션웨이 한정으로 기다리다 지쳐 살짝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윈란의 모습을 본 션웨이는 헛기침을 하며 흐트려졌을 자신의 표정을 억지로 가다듬었다. 깎고 다듬어 유한 척 하게 보이는 것은 자신에게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지만 윈란에게만은 예외였다. 잠시나마 윈란을 안고 있었던 두 손이 아직까지 데인 듯 뜨겁게 느껴지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는 숨을 가다듬은 뒤 손을 뻗어 윈란의 넥타이에 손을 가져갔다. 이번에는 무방비하던 윈란도 순간 얼어붙었다. 간질거리는 심장의 정체가 설레임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로 윈란이 그대로 굳었다. 손을 뻗은 션웨이는 잠시 한숨을 쉬었다가, 넥타이에 붙어 있는 핀을 떼어냈다. 션웨이? 윈란이 잠깐 놀라며 이름을 부르자 션웨이의 손이 어렵지 않게 안에 있는 부적을 집었다. 그를 단박에 이해한 윈란이 멍하니 혼잣말을 했다.

"방금 일어난 일 때문에 잠깐 옆으로 밀어놓고 있었는데."
"앞으로 이런 건 갖고 있지 않는 게 좋아."
"...어떻게 알았어?"

션웨이는 물음에도 대답 없이 화가 난 듯 부적을 갈갈이 찢더니 거의 가루로 보일 정로로 만들어 허공에 뿌렸다. 지금 이 순간만은 에티켓과 규범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습관을 깡그리 잊은 듯 싶었다. 윈란은 션웨이가 저 부적에게 얼마나 화가 나 있는 건지 따위를 생각하다가 새삼 그의 감에 조금 놀랐다. 기운 때문인가. 영기가 느껴지는 건 아닌데. 기억을 지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윈란이 그를 만난 첫날 션웨이의 기억을 지우지 않은 건 본인의 자의였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그에게는 좋은 기운이 느껴졌다. 영기는 없었지만 여태껏 그와 함께 있었을 때 불안하거나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가족보다 편했다. 수천 년을 같이 산 인물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래서 윈란이 유독 그에게만은 둔하게 굴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윈란의 표정은 금새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며. 얼른 해."

당연하지만 그는 상당히 짜증이 나 있기도 했고, 실제로 상당히 분노한 상태이기도 했다. 잠시나마 궤도를 이탈했던 션웨이는 도로 돌아온 상황에 다시 죽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혀를 깨물고 싶었지만 그는 결국 묵묵히 진심을 밝히는 쪽을 택했다.

"나를 책망해도 좋아. 그 말이 뭐든... 받아들일게. 잘못을 한 건 내 쪽이니까. "
"...션웨이."

아마 그를 다시 마주하면 화부터 내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적어도 고운 소리는 나오지 않을 거라고 분명히 생각했건만, 실제 상황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마 자신이 먼저 화를 내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실제는 생각과 달랐다. 실제로는 그가 먼저 사과했다. 먼저 펀치를 때리고 가더니 다시 와서 메스를 들고 수술을 하겠단다. 실로 뻔뻔한 마음가짐이라 여길 만도 했지만 적어도 그는 자신에게 진심인 것 같았다.

"진심이야?"
"...진심이야."

그리고 지금, 윈란은 장장 12년 만에 션웨이를 앞에 두고 아주 천천히 자신을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션웨이는 귀부터 목, 얼굴까지 전부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 모습이었다. 윈란이 고개 숙인 미인을 천천히 뜯어보니, 역시 그 아름다운 이목구비는 그대로였다. 더 아름다운 미인이 되었는걸. 이 상황에서도 미색에 미쳐있던 윈란은 새삼 그를 보고 다시 한 번 감탄하며  재회한 션웨이에게 말을 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한 번 부르며 조용히 속삭였다. 션웨이? 눈을 내리깐 윈란은 언뜻 순진무구한 듯 보였지만 모든 정황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입꼬리는 자연스럽게 올라가 여유로운 미소를 띄고 있었다. 그래.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았다. 자오윈란이 아는 션웨이다운 정중하고 깍듯한 사과의 표현이었다.

"정말?"
"......."
"정말 뭐든 받아들일 수 있어?"

"...그래."

받아주기로 할까. 슬쩍 넘어가는 척 하면서. 윈란은 이미 거의 풀려 있는 자신의 마음을 알았지만 여전히 화가 난 척 다시 되물었다. 반대로 반쯤 체념한 상태의 션웨이는 자신의 마음을 전혀 모른 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은 상당히 괴로워 보였다. 윈란은 새삼 저 표정도 섹시하다고 생각했지만 색에 미친 자기 자신을 다시 돌아보고 싶지는 않아 그 마음을 조용히 넘겼다. 우선 그는 무엇보다 잘 알 것 같지만 정작 당사자가 알려주지 않았던 "아란"에 대해 질문했다.

"아란이라는 애칭의 의미가 뭐야?"
"......"
"내가 생각한 그 뜻이 맞아?"

그 모습은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션웨이의 두 눈에 박힌 그 모습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악마로 보였다. 션웨이? 션웨이. 윈란이 그 이름을 부르며 질문했지만 상대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버텼다. 정확히는 못했다는 게 맞겠지만. 눈치 빠른 윈란이 이미 그 의미를 진작 눈치채고도 남았다는 사실을 윈란 본인도 션웨이도 알았다. 윈란은 다시 한 번 그의 모습을 살폈다. 미인의 얼굴과 뺨은 여전히 붉어져 있었다. 그 의미를 모른다면 자신은 사람도 아니리라. 그 모습이 아름다워 관찰하듯 고개 숙인 얼굴을 보고 있는데, 순간 귓가에 들리는 한 마디에 윈란의 얼굴이 그대로 차갑게 굳었다.

"미안해."

뒤늦게 말을 꺼내는 그 목소리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에 자신은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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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백 웨이란 진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