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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7 05:09
미야무라에게 연락을 해 보니, 안 그래도 케이가 걱정돼서 바로 기숙사로 오고 있다고 해서 미야무라가 오면 같이 아점을 먹으러 가기로 하고, 둘이 노닥노닥거리고 있을 때였다. 노부가 케이를 뒤에서 끌어안고 앉아서 그동안 꿈에서조차 간절히 바랐던 따뜻한 체온의 케이를 만끽하며 미야무라가 오면 못할 이야기들을 조금 할까 해서 가볍게 꺼낸 질문이었다.
"쿠로사와 선배나 미야무라 선배, 츠지무라는 저도 봤어요. 다른 사람들도 다 있어요?"
"응. 다이나 류세이도 있고, 이치로, 코타로, 야마토랑 노보루도 다 봤어. 아, 코타로는 경찰 됐다. 이치로도 경찰 비슷한 거."
그때 아몬은 쿠로사와 집안의 기사단에 속해 있었다. 미야무라와 쿠로사와는 귀족이었고 미야무라는 쿠로사와의 친척이었으며 아몬은 쿠로사와 집안 기사단장의 아들이어서 셋이서 함께 자랐다고 들었었다. 그래서 기사단 같은 게 없어진 21세기에 아몬이 경찰이 됐다는 건 이상하지 않은데. 그때 쿠니시타 이치로는 과연 은행가일 뿐이기만 할까 싶을 정도로 수상한 구석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은행가였는데. 이젠 경찰 비슷한 거라고?
"경찰 비슷한 건 뭔데요."
노부가 웃으며 묻자, 케이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노부의 손가락을 가지고 장난치며 대답했다.
"일단 경찰이기는 한데, 뭔가 위험한 일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치로는 과거에도 은행 일만 하는 거 맞나 싶을 정도로 수상한 구석이 많았잖아. 수상함은 계속 타고나는 건지 이번에도 뭔가 좀 수상한 게 많아."
"케이가 그렇게 좋아하는 류세이는요?"
케이가 옛날에 류세이를 유독 귀여워했던 게 떠올라서 조금 심술궂게 묻자, 케이는 키득거리며 웃더니 폰을 열어서 인터넷에서 영상을 하나 찾아서 띄워줬다. 류세이가 치명적인 척하면서 (물론 아주 치명적이고 매력적이긴 했다. 노부가 조금 심술궂은 시선으로 봐서 그렇지) 향수를 들고 나른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영상이었다.
"뭐예요? 이런 영상이 왜 있어요?"
"모델이야."
"모델이요?"
류세이는 아몬과 같이 검사 아카데미를 졸업했음에도 기사단에 들지 않고 수상한 용병단에 속해 있었다. 케이와 함께 있을 때는 한껏 귀여움을 뽐내며 장난도 잘 치는 녀석이었지만 어딘가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녀석이었던 걸 생각하면 사람들을 매혹시켜야 하는 일을 한다는 게 의외는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야마토에 대해서 묻기는 조금 꺼려졌다. 야마토는 당시 1황자가 자신의 저택을 확장하겠다고 백성들의 토지를 무단으로 몰수하면서 벌어진 사건의 피해자였고, 케이는 그 사건을 직접 보고 1황자와 대립했었다. 결국 일이 커져서 황제가 직접 개입하면서 1황자는 벌을 받고 토지를 빼앗긴 이들에겐 배상금이 소액 주어졌지만, 토지를 되찾지는 못했었다. 케이는 그걸 보고 충격받아서 혁명을 꿈꾸게 됐었다. 단풍 혁명의 시초가 됐던 사건이었기에 그때 일을 떠올리게 해도 될지 몰라서 머뭇거리고 있자, 케이는 노부의 손가락을 꾹꾹 누르며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야마토는 지금 대학가 근처에서 바이크샵 운영하니까 나중에 같이 가 보자. 어엿한 사장님이라고."
케이의 자연스러운 언급에 마음이 조금 놓인 노부는 노부의 품에 기댄 채로 노부의 손가락을 가지고 노는 케이의 어깨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그 녀석, 노보루하고는 아직도 잘 지내고요?"
야마토의 죽마고우이자 연인이었고 용병이었던 노보루는 그때 1황자가 야마토를 향해 휘두르는 채찍을 막으며 나섰다가 1황자의 미움을 사서 감옥에 갔었다. 야마토도 노보루도 1황자의 채찍질에 숨이 넘어갈 뻔했기에 케이가 뛰어들어서 1황자의 채찍을 빼았으면서 맞선 탓에 일이 커졌었지. 나중에 황제가 개입하면서 야마토는 금방 풀려났지만 노보루는 감히 황족에게 대들었다는 죄로 한동안 감옥 생활을 해야 해서 케이가 노보루를 꺼내기 위해 동분서주하기도 했었다. 지금도 그럴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의 감옥은 그야말로 지옥이었기에 노보루도 케이가 최대한 손을 썼음에도 감옥에서 고생을 많이 해서 몸도 마음도 많이 망가진 상태로 나와야 했었다. 노보루가 감옥에서 구타를 당하며 다리를 심하게 다쳐서 다시 걷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야마토가 1황자를 죽이겠다고 격분하기도 했었고. 다행히 츠지무라가 노보루를 다시 걷게 만들었지만.
"응. 노보루는..."
케이의 어깨가 잠깐 튀었다가 내려갔다. 케이가 긴장해서 어깨가 튀는 걸 보는 노부가 같이 긴장했지만 케이의 어조는 평탄했다.
"나랑 같은 과 동기야."
"노보루가 이 대학에 다닌다고요?"
"응. 그때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공부하고 싶어했는데도 공부를 못하고 류세이랑 같은 용병단에 들어갔었잖아."
"...네."
케이는 몸을 틀어서 노부를 끌어안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8번이나 다시 만나도 삶의 궤적이나 성격이 크게 바뀌지 않은 녀석들도 있긴 한데, 다시 만날 때마다 크게 휙휙 변하는 녀석들도 있었어. 유이치나 코타로는 크게 변한 게 없거든. 야마토도 바이크샵을 운영하고 있어도 그때도 여관에서 마차나 말 대여도 했었으니까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 볼 수 있고, 성격도 비슷하고. 류세이는 내 앞에서나 귀엽게 굴었지 사실 그때부터 좀 위험한 느낌의 녀석이었으니까 지금도 비슷하다고 보면 비슷한데..."
'그런데'가 나올 타이밍이라서 노부는 케이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면서 케이의 얼굴 곳곳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괜찮아요, 괜찮아. 이제 다 괜찮게 해 줄게요. 괜찮아요...
"그런데 츠지무라가 우리보다, 아니 나보다 10살이나 많아진 거 알아? 옛날엔 소라보다 2살 어렸잖아. 그런데 지금은 10살이나 많아졌지. 이치로도 다시 만날 때마다 점점 더 수상함이 과해지고 있고, 소라는..."
케이는 노부를 더 꽉 끌어안고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이며 물었다.
"내가 떠나고 난 뒤에, 소라가 많이 힘들어했었어?"
노부는 케이가 그렇게 떠나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상태였기 때문에 케이를 해친 이들에게 복수를 하고 난 뒤에는 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채로 케이와의 추억에만 빠져 있었지만, 미야무라가 그때 얼마나 무너졌었는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해 줄 수 없어서 케이를 꽉 끌어안기만 했고, 케이는 그것만으로도 대답이 됐는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소라를 처음으로 다시 만났을 때는 마음이 심하게 부서져 있었어. 예민하고 겁많고 늘 불안에 시달리고... 소라가 그렇게 무너져 있으니까 네가... 네가... 날 떠나고 세상이 다시 리셋돼서 새로운 시대에서 다시 만날 때마다... 츠지무라가 달라지더라. 나이가 점점 많아지고, 소라를 점점 더 과보호하고... 지금은 둘 다 비교적 안정적이지."
"...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미야무라 선배는 많이 보잖아요. 같은 방이라 매일 보니까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미야무라 선배는 이제 잘 지내고 있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케이는 노부의 어깨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고 노부의 입술에 길게 입을 맞춘 후 노부와 눈을 마주치며 속삭였다.
"응. 고마워."
노부가 케이의 얼굴에 쪽쪽 입을 맞추고 있는 동안 케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노보루는 그때 힘이 없어서 쓰레기 같은 황족에게 짓밟힌 게 상처가 되고 영혼에도 그 상처가 새겨졌는지 네 번째로 만났을 때부터 계속 나랑 같은 과 동기로 나타나더라. 공부도 잘해. 지금 우리 과 탑이 노보루인걸."
그때도 용병단은 대부분 전쟁에 투입되거나 군대에 고용되긴 했지만 현대의 용병단은 민간군사기업이니, 그때처럼 용병단에 들어가는 것보단 훨씬 나은 상태라, 노부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하며 케이의 마음을 달랬다.
"우리 케이를 성적으로 이기다니, 진짜 똑똑한가 보네."
케이는 마음에 안 드는지 노부의 가슴을 꾹꾹 눌렀지만 진심으로 마음이 상한 건 아닌 듯 또 종알거렸다.
"그래도 다이는 귀여워졌어. 다행이지."
가루베 다이키치는 그때 술집의 사장이었는데 어릴 때부터 뒷골목에서 고아로 자라서 험한 일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처음에 만났을 때는 성격이 상당히 거칠었었다. 그런데 용병으로 일하던 류세이와 친해서 노부와 케이, 그리고 다른 사람들하고도 친해졌었지. 세상이 자신에게 잔인했던 만큼 세상과 모두에게 까칠했던 그 어린 사장은 혁명단에 함께하면서 마음이 많이 너그러워지고 사람들에게도 마음을 열게 됐었는데, 다행히 마음의 상처가 많이 옅어진 그때 그 상태로 계속 다시 만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이는 뭐해요?"
"지금은 바텐더. 대학가에 있는 바니까 나중에 같이 가 보자. 안주도 맛있는데 다이가 칵테일을 기가 막히게 잘 만들어."
"기대되네요. 나중에 꼭 같이 가 봐요."
수상함을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다는 이치로가 조금 걸리긴 하지만, 미야무라도 많이 안정된 것 같고, 노보루도 긍정적으로 삶을 개척하고 있는 모양이고, 영혼이 상처를 기억하고 있든 아니든 모두가 조금씩 나아진 모양이라 노부는 한숨을 삼키며 케이의 귓가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음... 타다오미 빼곤 다 있긴 하네요."
"타다오미는 대체 누구... 아, 료이치로도 봤다."
정말로 그때 혁명을 같이 준비했던 사람들이 전부 다 같이 환생해 있다는 말이니까 머리가 복잡해지긴 했다. 정말로 타다오미가 한 짓인지 뭔지 그때 동료들을 전부 한꺼번에 환생시키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미간을 지푸리던 노부는 '료이치로'가 있다는 말에 그대로 굳었다.
"... 아마미야 료이치로요?"
"응."
물론 아마미야 료이치로라는 사람이 실제로 있을 수는 있다. 문제는 아미미야 료이치로는 케이가 혁명을 준비할 때 황자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 썼던 가명이라는 점이었다. 그때 우리가 알고 있던 아마미야 료이치로는 실존인물이 아니라 케이를 지키기 위해 내걸었던 가명이었다. 이건 고토 타다오미의 존재처럼 아는 사람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혁명단의 부단주를 맡았던 아마미야 료이치로의 본명이 마치다 케이타였으며, 그가 전 황제의 5번째 아들이자 8번째 자식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아마미야 료이치로가 케이가 썼던 가명이란 사실은 고토 타다오미의 회고록처럼 숨겨진 야사도 아니었다. 쿠로사와는 당시 케이가 사망한 이후 케이가 역사에 억울하게 기록되는 것을 막고 싶어했기 때문에 혁명정부 명의로 아마미야 료이치로가 가명이었던 것은 맞으나, 가명을 쓴 이유도 황족으로서 보다 자유롭게 혁명에 가담하기 위해서였지, 나쁜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니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었다. 이 혁명정부의 발표문은 정사에도 분명히 포함돼 있는 내용인데? 아마미야 료이치로라는 가명을 직접 사용했었던 케이가 이걸 기억하지 못한다고...?
노부는 케이가 자신의 굳은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꽉 끌어안으며 혼란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때 노부와 케이 주위에는, 혁명단에는... 아마미야 료이치로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아마미야 료이치로는 어디서 나온 거야...?
고토 타다오미... 너야? 네가 아마미야 료이치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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