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99353874
view 199
2024.08.06 12:18
https://hygall.com/598887047







-




모두에게 좋은 날, 웃으며 안녕인 날인데도 돌아보면 왜 모든 게 이리도 아쉬울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을 3년의 고등학교 생활을 마무리 지을 마지막 등굣길. 기숙사 짐 빼는 날 이미 다 같이 한바탕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허심탄회하게 얘기 잘 했지만, 졸업식이라고 하니 괜히 또 코가 시큰시큰한 거지.

졸업식날 까지도 두발규정이 엄격하게 적용되는 학교 덕에 방학 동안 좀 길었던 머리를 며칠 전에 다시 바짝 밀었는데 이것도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니 최동오 싱숭생숭해서 죽겠음.
엄마아빠 차 타고 강원도로 가는 길에 창밖만 내다보면서 한마디도 안 하는 아들래미 보고 동오네 엄빠는 좀 귀여운데 얘기하면 아들이 자존심 상해할까 봐 조용히 둘이 웃참하며 갈 듯ㅋㅋㅋ




그렇게 혼자 청춘 드라마 남주라도 된 양 사연 가득한 표정으로 등교하는 최동오...

하 애들 얼굴 어떻게 보냐...보자마자 눈물 터짐 어떡하지ㄷㄷㄷ 똑같은 3년인데 중학교 때랑 왜 이렇게 느낌이 다른 거냐고ㅠㅠ 기숙사 생활을 해서 그런가...매일 보던 놈들 이제 다 전국 각지로 흩어진다고 생각하니 너무 아쉽다...농구부 후배들이랑도 정 진짜 많이 들었는데ㅠㅠ
으휴 맘 여린 놈들 많은데 우리 졸업한다고 애들 울면 어떡함? 와...걔네 울면 나도 못 참을 거 같은데ㅠㅠㅠㅠ성구 얼굴은 또 어떻게 본담? 분명 어제 밤에 통화할 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얘랑도 이제 떨어진다고 생각하니까 슬퍼....으어어......

아침부터 이런 생각 잔뜩 하느라 바쁜 동오였으나....







"와하하하 야 웃어 웃어!!"




눈물은 개뿔 막상 친구들 다시 만나고 보니 그냥 방학 전이랑 다를 것도 없고 윈터컵도 우승한 데다가 벤치애들까지 대학도 다 잘 가서 분위기 너무 좋은 거임ㅋㅋ 거의 축제인 듯? 혼자 별생각 다하면서 창조 슬픔을 파고들던 최동오도 '아 그러네. 슬퍼할 일이 아니다...!' 라고 급히 노선 변경해버림ㅋㅋㅋ
그냥 빵긋빵긋 웃으면서 여기저기 부르는 카메라 보고 쁘이도 해보고 '선배 다음에 연습 게임 하러 꼭 와주셔야 해요!!!' '저도 꼭 대학도 선배 후배 될 거니 기다리세요!!!' 하는 후배들 머리도 복복 긁어주고 그냥 행복 만땅하게 즐기는 중임~

매년 선배들 졸업식 보며 올해도 그렇겠거니 예상은 했지만 유독 황금세대라 불리는 기수라 그런지 농구부 애들 보러 온 외부 손님들도 많아 보였고, 후배들이나 가족들 중에서도 농구부 주전들 단추 하나 받아보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을 듯.
근데 뭐...단추가 무한 생성도 아니고 개수에 한정이 있다 보니 달라고 먼저 찾아오는 후배들한테만 하나씩 줬는데도 남은 단추가 거의 없는 거지. 게다가 자기 단추를 주겠다고 오는 사람도 있고, 꽃다발 주는 사람 있고, 사진을 같이 찍자, 번호 교환하자, 주소 교환하자...동오 정신이 하나도 없겠지. 그렇게 한참을 얼레벌레 이 사람 저 사람하고 얘기하다가 정신 차려 보니 웬 처음 보는 여자애한테 팬이랍시고 러브레터까지 받는 중이었음.
아...그니까, 나를 어느 경기에서 봤다고 했더라??




"...그래서 그때부터 최동오 선수 팬이었어요!"
"아..네, 응원 해주셔서 감사해요..!"
"혹시...실례가 아니라면 단추......"




분홍색 봉투에 담긴 편지와 함께 자기 단추를 내밀면서 내 단추를 받고 싶다고 하는데 이걸 어찌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음. 대답을 쉽게 못 하고 우물쭈물 난감해하고 있었는데 누가 동오 어깨를 툭 치며 어깨동무를 하는 거야.




"얘기 한참 걸리냐?"
"아, 현철아."
"농구부 단체 사진 찍는대."
"응, 바로 갈게! 그...제가 자켓은 남은 단추가 없어서...이거라도 괜찮으심..."




자켓은 이미 펄럭펄럭 잠그는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라 바지 안쪽 택에 붙어 있던 여분 단추를 툭 떼서 그 여자애한테 줬음. 이거라도 좋다며 얼굴이 발그레해져선 인사를 꾸벅 하고 가는 뒷모습을 보곤 현철이랑 체육관으로 가는데 얘가 그러는 거야.




"너 저거 줘도 되는 거냐?
"응? 뭘?"
"뭐긴 뭐야 단추 말이야 단추."
"...그게 왜? 너도 내 단추 필요하냐?"
"아니, 너는....하! 됐다, 됐어. 말을 말자."




뭐야, 왜 성질이람. 현철이도 주변에 부탁받은 거 있었나?

얼마 안 걸어 도착한 체육관으로 들어가니 이미 사람이 바글바글했지. 운동복을 입고 있던 평소와 달리 모두가 교복을 입고 꽃다발을 들고 있는 풍경이 낯설었음. 우글우글한 빡빡이들 사이에서 한 눈에 시선이 꽂히는 우뚝 솟은 머리 하나.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괜히 웃음이 지어지기도 하고...
그렇게 후배 몇 명과 사진을 찍고 있는 정성구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성구가 한 순간 고개를 슥 돌리더니 최동오를 딱 쳐다보는 거지. 동오 좀 놀랐는데 곧 살짝 웃으면서 한 손 살짝 들어 흔들흔들 인사했을 듯.







-




정성구는 사실 일주일 전부터 묘하게 들뜬 기분이었음.

잘먹으면 좀 귀엽고 신기하던 그 편식쟁이 동기 놈이 뭘 안 먹고 있어도 귀여워진 지는 오래였고, 그 귀여운 놈 데리고서 이것저것 해보며 신세계도 경험했단 말이지?
그러고 얼마 안 돼서 바로 방학을 해서 몇 달 동안 떨어져 있으려니 아쉽기도 하고 그랬지. 3년 내내 가족들보다 산왕 애들과 더 붙어 지냈는데 기숙사 짐까지 다 빼고 나니 이제 졸업이라는 게 실감도 나고 말이야. 그래도 동오랑은 집 주소랑 연락처를 교환해서 꾸준히 편지도 쓰고 매일 통화도 하고, 1-2주에 한 번 정도는 만나기도 했음.

밤마다 자기 전에 통화를 했는데 둘 다 이런 식의 통화(?)는 처음이라 그런지 첫날은 정적만 가득하고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임. 그래서 저녁 뭐 먹었냐, 오늘 언제 잘 거냐 이런 얘기만 좀 하다가 말았겠지. 그래도 점점 익숙해져서 서로의 일상 이야기를 하거나 다음에 만나면 뭘 하고 싶다거나 그런 대화들을 주고받았음.

이렇게 통화도 매일 하고 만나기도 하는데 편지가 굳이 필요한가? 싶었지만 최동오 글씨 보는 재미와 가끔은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동봉하기도 하는 귀여운 짓들을 하는 동오 덕에 편지도 나름 열심히 주고 받았지ㅋㅋ 굳이 우체통에 부치지는 않고 만나는 날 모아뒀던 편지를 교환하곤 했는데 집에 와서 지난 1-2주간의 일들이 빼곡히 적혀 있는 편지를 읽으면 '아..그날 통화하면서 기분이 유독 좋아 보였던 게 이거 때문이구나. 이날은 가족들하고 놀러 갔었다더니 이런 옷 입고 갔구나.' 하고 알 수 있었어.

그러다가 만나면 특별한 걸 하지는 않았지만 늘 학교에서 교복 아님 운동복 입은 모습만 보다가 밖에서 사복을 입고 만나니 괜히 낯설고, 그래봐야 그냥 니트나 맨투맨 입은 건데도 이상하게 설레기도 하고...부끄럽기도 하고...아무튼 알콩달콩 나름 재밌게 방학을 보냈지.

그런데 한 일주일 전 즈음인가...
최동오가 입이 닳도록 얘기하는 게 있었음.




[야 너 졸업식날 졸업식 끝나고 바로 가면 안 된다?]
[너 안 잊어버렸지? 가족들한테 꼭 미리 얘기해둬야해? 이제 며칠 안남았다?!]




졸업식날 이후에 일정이 있냐길래 근처에서 가족들 다 같이 점심 먹기로 한 거 말고는 없다고 했더니, 그 이후로 매일 통화의 끝에 저런 말을 붙이는 거임.
그날 꼭 데이트하고 싶은 건가? 했는데...어제 밤 마지막 통화에서 하는 말이,




[나 너한테 따로 꼭!!!줄 거 있단말이야! 꼭 나 보고 가기야 정성구!]







두 번째 단추...주려고 하나 보네. 싶은 거지.







근데,
그렇게 졸업식 졸업식 졸업식무새 마냥 외워대던 놈이,

대화라도 나누려 하면 여기 끌려다니고 저기 끌려다니고...뭐 사실 그거야 예상은 했으니까. 그리고 성구 쪽 상황도 별로 다를 거 없이 정신이 없었고...
근데 쟤 지금...저건 좀 아니지 않나...???
지금 뭐 하는 거임 저게?????
저걸...받는다고? ㅋ

농구부 후배들한테 단추 주는 거야 선배만큼 키 크고 싶다며 성구 단추 받아 가는 후배들도 있었고, 우정의 의미로 하나씩 교환하자는 친구도 있었음. 그런 거야 성구도 흔쾌히 줬으니까~ 단추를 주는 걸 뭐라 하는 건 아닌데, 지금 최동오 녀석이 하는 꼬라지는...(두통)
농구부 후배도 아닌 웬 2학년이 와서는 누가 봐도 얼굴을 붉히며 단추 가지고 싶다 하는데 그냥 떼서 줘 버리고...다른 학교 교복 입은 여자애가 와서 꽃다발 주는 거 쑥스럽게 웃으며 받고, 그러더니 지금은 또 뭔 팬레터인지 러브레터인지까지 받고 있음;;

쟤 성격을 모르는 거 아니니 그냥 별 생각 없이 예의로, 배려로 웃으며 받는 거는 아는데...정성구 묘하게 심사가 뒤틀리는 거지. 와중에 동오 표정이 ㄹㅇ별생각 없어 보여서 더 짜증남ㅠㅠ
성구 미묘한 표정이랑 정성구 시선 읽은 현철이가 어깨 토닥토닥 두드리며 '성구, 괜찮냐?' 했을 듯...




"그럼. 쟤 원래 인기 많잖아."
"하여간, 잘생긴 놈들이란~"




그러고선 신현철 씨익 웃고 최동오 데리러 갔겠지.
정성구 굳이 뭘 저걸 계속 보나 싶어서 먼저 체육관으로 갔음. 같이 사진 찍자는 후배들하고 몇 장 찍다가 고개를 돌렸는데 최동오가 딱 있네? 참...좀전까지 기분이 영 미묘했는데 쟤가 나 보면서 저렇게 웃으니까 그게 뭐라고 또 기분이 다 풀리는 거 있지.




"야, 정성구."
"응."
"...오랜만이네."
"그러게. 일주일만인가?"
"응..9일."
"머리 다시 깎았네?"
"그치...그저께 밀었어."
"왜 통화할 때 얘기 안 했어?"
"어차피 오늘 보면 아는데 뭘...근데 너도 얘기 안 했잖아!"
"아, 맞네...쌤쌤이네 우리."




진짜 짜증 나. 하루종일 하나하나 마음에 안 들던 최동오.
뭐가 그렇게 매번 부끄러운지 귀 끝은 발그스름 해가지곤 눈동자 굴러가는 게 다 보이는데 얘 매번 이러는 거에 매번 시선 뺏기고 쳐다보는 나도 참...




"...졸업 축하해 정성구."
"응. 너도 축하해."
"...그게 다야?"
"...?"




뭐지?
뭔지 모르겠어서 그냥 와락 안아버렸음.




"야아...! 사람들 있잖아..!"
"여기 지금 시장통이라 우리 신경도 안 써. 그리고 원래 졸업식은 포옹하는 거거든?"




만날 때마다 그렇게 부벼댔는데도 여전히 몸 닿을 때마다 당황하는 게 참 신기함. 재밌어 늘. 귀여운 최동오.




"너한테 축하받으니까 기분 이상하다."
"별로라는 거야?"
"아니이..좋다고! 이제 아쉬운 거 하나도 없다!"













.
.
.

ㅅㅂ귀엽다 취소야. 존나 짜증 나.
뭐하는 인간이지 저거...?




최동오 그렇게 쾌남처럼 와하하 웃고는 언제 부끄러워 했냐는 듯 성구 등짝 팡 치더니 단체 사진 찍자며 정성구 끌고 3학년 모여있는 쪽으로 가는 거지.
1학년부터 졸업생들까지 다 모여서 한 컷, 졸업생들만 한 컷, 마지막 윈터컵 멤버로 한 컷. 그렇게 사진 예쁘게 찍고서 또 여기저기 그룹 지어서 찍고, 각자 가족들이랑 같이 서서 체육관 배경으로 찍고...정신 없이 셔터 소리만 듣다 지나갔음. 성구는 사실 동오한테 둘이서도 같이 찍자 하려 했는데 그런 말 할 새도 없이 부모님이랑 사진관에 가족사진 예약했다 하곤 먼저 가 버리는 거 있지.

진짜 너무하네 최동오...




정성구 지난 일주일간 좀 설렜던 기분이 푸쉬쉬 사그라드는 거지.
그러고보니 저놈 아까 이미 단추는 다 어디 줘버린 건지 자켓이 펄럭펄럭 날리고 있었잖아?
...아니지 최동오? 설마...아닐거야....
따로 빼둔 거겠지...그렇겠...지......?
줄 거 있다는 게 단추가 아니었나? 하......

성구 원래 졸업식 단추에 목매고 큰 의미를 두는 편 아니었는데, 온갖 사람들한테 다 주는 그 단추를 정작 자기만 못 가지게 되면 조금..아니 사실 많이...짜증이 날 것 같은 거지.




막둥이 고등학교 졸업한다고 연차까지 내고 온 부모님이랑 큰형에 둘째 누나까지. 온 가족 다 출동해서 외식하러 왔는데 밥 먹는 내내 애 기분이 영 그래보이는 거임. 형이 졸업하니 싱숭생숭해서 그러냐며 물어 보는데도 별 말이 없고...누나가 얘가 그렇게 섬세한 놈인 줄 아냐고 놀리는데도 반응이 밍숭맹숭...결국 '가족들이 다 너 축하해주러 왔는데 네가 그러고 있으면 되냐'며 아빠한테 살짝 혼났을 듯. 한 소리 듣고 잘못해씀다 하곤 돈까스 우걱우걱 먹는데, 철딱서니 없는 아들램...
다들 미워. 내 맘도 모르고ㅠㅠ 최동오는 더 미워ㅠㅠㅠ




가족들한테 미리 이따가 농구부 친구들 몇 명이랑 학교에서 졸업선물 교환하기로 했다고 말해둬서 잠깐 학교 들르기로 했음. 학교 올라가는 언덕에 성구 내려주고 가족들은 동네 산책로 걷고 오겠다며 갔는데 혼자 나머지 언덕길 오르며 점점 교문이 보이니 진짜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거임. 짜증 나서 최동오 얼굴 보기 싫은데 또 보고 싶기도 함. 그래서 더 짜증 나ㅠ
어쨌든 아직 쟤가 나 줄 단추까지 다 다른 사람 줘 버렸다는 게 확정은 아니니까. 일단 따지더라도 줄 거라는 게 뭔지 보고 나서 결론 땅땅 나면! 그 때 따지던 하자. 라고 생각했음. 열심히 걸어서 교문을 통과하고 운동장에 들어서니 익숙한 뒷모습이 보이는 거임. 동글동글한 뒤통수에 언제나 곧은 자세.




최동오!




이름을 부르니 돌아보는 얼굴 가득 웃음이 띄워지는데 정성구 자기도 모르게 따라 웃게 되겠지. 가족사진을 찍는다더니 평소랑 다르게 셔츠에 코트랑 구두까지...이러니까 좀 낯서네.




"나 좀 어색하지.."
"...아니."
"괜찮아?"
"응. 너랑 잘 어울린다."
"..부모님이 교복 입은 거 말고도 하나 찍자고 해서..."
"잘했네."
"...다음에 너랑 만날 때도 이렇게 입고 갈까..?"




저런 말을 하면서 또 귀가 빨개지는 최동오.
...내가 아는 최동오 맞네.




노을진 빈 학교 운동장, 낮의 그 붐비던 곳이랑 같은 장소인지 모를 정도로 고요했음.
괜히 베베 꼬였던 마음은 그새 잊기라도 한 건지, 이런 최동오가 지금 자기 옆에 있다는 게 참 좋은 거야.
그래서 손도 잡았어.
이 시간에, 학교에서는 처음 잡아 보는 거였지.
아니다 다를까 흠칫하는 최동오 때문에 또 웃겨.

그래, 다 무슨 소용이겠어.
만약 내 걸 잊어버린 거라도 상관 없어.
그깟 단추가 뭐라고.

그렇게 운동장을 한 바퀴 크게 함께 걸으며 이제 마지막일 학교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지.




"...야 성구야."
"응."
"..고마워."
"응? 갑자기?"




나 네 덕분에 올겨울이 진짜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아. 아니..사실 여름부터 쭈욱...가을도, 겨울도. 다 행복했어. 1학년 때, 입학식 날 너 보고서 우와...쟤는 키 진짜 크다. 혹시 농구부려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진짜 그래서 다행이야.
우리 함께 뛴 3년이 꿈 같았어.
3년 전에, 산왕에 오면서 나 되게 다짐을 많이 했었다?
꼭 주전이 돼야지, 꼭 전국대회 우승 트로피 따야지, 꼭...잘 해야지. 물론 결과적으로는 그걸 다 이룬 것도 뿌듯하지만 그게 아니어도 그냥 좋은 친구들과 동료들을 만나고, 같이 코트 위에 서고, 함께 울고 웃고 했던 그 모든 게...그 자체로 되게 감사한 것 같아. 그리고 너를 알게 된 것도.




오래 걸려서 미안해.




사실 윈터컵 끝나고...그...우리...
네 방에서...
으아아..암튼, 그날!
그날 얘기하고 싶었는데, 너도 알잖아 내 성격.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인 거 아는데...이제 다 알았는데...
그런데도 이런저런 걱정이 되게 많이 들더라고.
근데 그렇게 계속 걱정하고 있는 상태로 너한테 얘기할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얘기 못 했어.

미안.

내가 좀 더 결단력 있고 괜찮은 사람이었다면 훨씬 이전에 얘기할 수 있었을 텐데...

그니까...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사귀자고!
나 너 없으면 안될 거 같아 이제!






끝까지 신기하고 귀여운 최동오.
최동오 얼굴이 새빨간 게 붉게 지는 저녁노을 때문이 아니란 걸 알고 있어.

화는 풀린지 오래야.

사랑스러운 입술에 입을 맞췄지.







-




"근데 이건...네가 만든 거라고 그래서?"
"그...그게 말이지..."




'이건'이 뭐냐고?

냅다 고백 갈긴 최동오,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지고선 또 안절부절못하더니 냅다 뭔가를 내미는 거임.




"이게 뭐...야....?"




이게 곰인지 코알라인지 물개인지...알 수 없는 형상의 무언가의 짐승 모양...?
삐뚤빼뚤한 바느질이 누가 봐도 어디서 사 온 건 아님. 엉성하게 붙은 귀와(게다가 크기도 짝짝이) 옆구리는 원래 저런 건지 터진 건지 모를 요상한 모양...꼬리인지 똥을 싸다 만 건지 모르겠는 뒤태...

그리고 콕콕 박힌 눈알 두 개.


단추.




"아니이...내가..분명 책을 보고 똑같이 만든다고 만든건데...이게 참..."




사실 성구한테 졸업식 날 꼭 자기 보고 가라며 주문을 외워대던 일주일 동안 동오는 팔자에도 없던 바느질을 하는 중이었음ㅋㅋ 사실 그냥 두 번째 단추만 하나 주면서 고백하려고 했는데, 안 그래도 하도 미루느라 이미 볼 장 못 볼 장 다 본 뒤에 하는 고백이고...괜히 그 작은 거 하나 주려니 밋밋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런 거지. 뭔가 좀 특별하게 줄 수 없나 싶어서 고민하던 끝에 겁도 없이 서점에서 '초보자를 위한 곰 인형 만들기' 책을 산 건데......

뭐, 결과야 알지? ㅎ




방학해서 학교도 안 가~훈련도 없어~남는 게 시간이니 매일 저녁 먹고 자기 전까지 바느질만 했지만 안되는 건 안 되는 건가봄ㅋㅋㅋ
신이 최동오에게 피지컬도 외모도 농구 실력도 다 주셨지만 농구를 제외한 모든 분야의 똥손을 함께 선물하셨음...!
그래도 나름 성구 주는 인형 어떻게든 살려 보겠다고 목에 빨간 리본도 하나 묶고 단추 눈알도 두 개나 달았다고...! (그럼 눈알을 한 개만 다니..)




"너 주려고 진짜 열심히 만들었는데...결과물이 영 그래서...그냥 단추만 주는 게 나으려나 싶었거든? 근데 내가 바느질을 뭘 어떻게 한 건지...단추가 다시 안 뽑히는 거야. 그래서 그냥..."
"..."
"...너무 못생겼지?""
"......"
"야아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
이렇게 신기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어디 있을까?
최동오는 이 허술한 곰인형 만큼이나 허술하지만 정말 사랑스러운 사람이야. 그러니까 이 곰인형이 사랑스럽지 않을 이유가 있겠어?

이건 단연코, 정성구 19년 인생 통틀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근사한 선물이야!










동오야 근데,



우리 사귀는 사이 아니었냐?

...어?

......

어어어???

...뭐, 괜찮아. 어쨌든 이제 사귀는 거니까.

우...우리 한 번도 사귀자고 안 했잖아...!

...너는 안 사귀는 사람이랑 키스하고 섹ㅅ

야! 미쳤어 너?! 조용히 해!!!

..알았다.

정성구 너는...밖에서 그런 소리를......

네 목소리가 훨씬 컸어 방금.

....그래?

풉...저녁은 먹었어?

...아니.

어머니 아버지랑 먹을 거지?

응..그치이.

너랑 같이 저녁 먹고 싶다.

너희 가족들 먼저 갔어?

아니. 형이랑 누나랑 엄마, 아빠 전부~ 나 기다리는데?

너는 근데 그런 소리가 나오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오늘은 말고...내일 같이 먹자.

그래.

이번엔 내가 너희 집 근처로 갈게.

응.

...얼른 가. 가족들 기다리겠다. 나도 엄마아빠 저기 아래 커피숍에 계셔.

그래. 가서 맛있는 거 먹어.

엉~알았다!

갈비는 꼭 어머니께 발라달라 하고.

이씨...

귤도 꼭 아버지한테 까달라고 하고.

...야 너 자꾸 나 놀릴래!!

놀리는 거 아닌데?

그럼 뭔데!

귀여워 하는 거.

야!!!!!!







맞잡은 손을 흔들며 언덕을 내려가는 길쭉한 인영이 둘,
큰놈 주머니 속의 작은 단추 하나.
더 큰놈 손에 들려 있는 못생긴 곰인형도 하나.

당근 못 먹어서 연애하게 됐다는 걸 누가 믿겠어?
그치만 그게 사실인걸ㅋㅋ




우리 공주님 최동오! 편식하다가 왕자 만났다!












술램덩크 성구동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