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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7 19:13
처음엔 농담으로 착각했던 것도 같다. 설마 그 흑안경이 목숨이 위험할 수가 있을까. 늘 티격태격 싸워대긴 하나 진심으로 그의 실력을 인정하는 해우신이었기에 그 착각은 당연하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우릴 먼저 도망시키다가..."
죄책감에 휩싸인 오사의 얼굴이 볼품없이 일그러졌다. 흑안경이 아니었다면 아마 우리도 지금쯤 목숨줄이 끊기기 직전이었을 거야. 팡즈가 으르렁대듯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 또한 착잡함이 잔뜩 묻어있었다.
도망치던 중 전투를 하다 부상을 당했다는 장기령의 꼴만 봐도 그 현장이 어떤 지옥도였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엉망진창인 셋의 모습을 차례로 훑던 해우신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정확히 어떤 놈들인지 하나도 빠짐없이 세세하게 말해봐."
달이 빛나기 시작한 시간이었다. 긴 여정과 부상으로 지칠대로 지친 철삼각을 의료실로 보낸 해우신이 책상 앞에 앉아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딱- 딱- 반듯한 손톱이 연신 책상을 두드리며 일정한 소리를 울렸다. 붕 떠올랐던 손톱이 또다시 고요를 울린 순간 해우신이 휴대폰을 꺼냈다. 뚜르르 뚜르르 울리던 연결음이 이내 뚝 끊기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리 좀 한번 만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까만 천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문으로 시선을 돌리며 해우신이 말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창문 하나 없는 곳에 갇혀 먹을 것, 마실 것 하나 없이 고문만 당한 탓이었다. 그래도 중간중간 기절한 척을 했을 때 정신을 차리라며 얼굴에 때려주는 찬물 덕에 어느 정도의 갈증은 해결할 수가 있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 물세례에도 제 안경이 벗겨지지 않은 게 두 번째 다행이고. 하지만 그 고문마저도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을 때 흑안경은 본능적으로 제 처형이 눈앞에 다다랐단 걸 알아차렸다. 이것 참...이렇게 죽는 건 썩 맘에 들지 않는데. 살만큼 살았으니 큰 미련은 없다..는 아니었다만 그래도 이렇게 볼품없는 죽음은 내키지 않았다. 무엇보다...적어도 얼굴 한번은 보고 죽으면 좋을 텐데 말이지.
씁쓸한 웃음이 작게 터져나왔다. 잔뜩 터진 입꼬리가 얼얼하게 아려왔다. 꽃이 한창 예쁠 때인데. 어느 꽃인지 모를 대상을 감긴 눈 뒤로 그려보는 그의 귀에 끼익 녹슨 문이 뻑뻑하게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끌어내. 간결한 말소리에 저벅저벅 두 명의 발이 다가오더니 두 손목을 묶여 데롱데롱 매달려 있는 흑안경을 끄집어 내렸다. 피와 상처로 얼룩덜룩한 몸은 땅에 닿자마자 크게 휘청였다. 하지만 양팔을 단단히 붙잡아 오는 손에 넘어지지는 않았다.
"살살 잡아. 어차피 배가 고파서 도망칠 힘도 없어."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타박을 던졌으나 대꾸해 주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더 거칠게 잡아끌었다면 모를까. 긴다리가 질질 끌려가며 다리보다 훨씬 더 긴 두 줄을 만들었다.
끌려갈수록 더 어두워지는 공간에 되려 두눈은 더 선명해졌다. 그래서 피가 덕지덕지 말라붙은 험상궂은 대검도 무척이나 잘 보였다. 주변으론 아직 썩어가고 있는 머리통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것 또한.
"적어도 칼 소독은 좀 해주지 그래? 아님 그 피딱지들이라도 닦아내든가. 피 때문에 날이 무뎌져서 내 모가지가 한방에 잘리지 않으면 그쪽이나 이쪽이나 피차 힘든 거 아냐?"
"잘라라."
"하여튼 요즘 젊은애들은 영 사람 말을 귀 기울여 듣질 않는다니깐."
투덜대는 흑안경의 앞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무거운 대검이 바닥을 긁으며 가까워졌다. 흑안경의 입꼬리가 또한번 씁쓸하게 올라갔다. 혹시 귀신으로라도 한번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무리 오래 살았다 해도 사후세계는 미지의 것인지라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리 잠깐 생각하는 사이 흐읍 짧은 기합소리와 함께 대검이 높게 치켜들어졌다. 정말..딱 한번만 더- 그대로 흑안경의 목을 향해 칼날이 달려든 순간이었다.
"잠깐!!!!!!"
후웅- 목에 닿는 서늘한 기운이 바람과 함께 흩어졌다. 처형 집행을 방해받은 이들이 성가신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보스의 비서가 손짓을 했다.
"놔줘."
흑안경은 여전히 얼떨떨했다. 빼앗겼던 짐을 고대로 품안에 안겨 바깥으로 내쫓아졌을 때도, 오랜만에 보는 햇빛이 눈을 찔러대 고통스러웠을 때도, 달려든 오사와 팡즈가 몸을 껴안아 상처가 눌려 비명을 질렀을 때도, 그는 계속 얼떨떨해 했다.
"진짜 천만다행이야.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날 뻔 했어."
"운 하나는 끝내주는데 샤즈!"
운전대를 잡고 호탕하게 웃는 팡즈에 차체가 흔들렸다. 끄응 몸이 흔들려 약간의 통증은 있긴 했으나 승차감 하나는 끝내주는 비싼 차의 시트가 워낙 푹신해 참을만은 하였다. 돈이 없는 이 녀석들에게 이리 좋은 차가 있을리는 없고..역시나.
"화얼예야?"
"응! 탈출하자마자 바로 샤오화에게 갔거든. 샤오화가 약속이 있다고 잠깐 나갔다 오더니 차키를 주면서 널 데려오라 하더라고!"
그냥 한번 보고싶다고만 바랐을 뿐인데 역시나 늘 기대 이상으로 절 놀라게 하는 그는 제 목숨까지 살려주었다. 더는 씁쓸함을 담지 않은 입꼬리가 잔잔하게 올라갔다. 빨리 보고싶네. 뒤로 머리를 기댄 흑안경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꼴이 볼만 하네.
제 얼굴을 보자마자 그토록 그려왔던 그 얼굴은 딱 그 한마디만 던졌다. 차가운 말과는 다르게 기다렸다는듯 제게 달려드는 의사들을 보며 흑안경이 실실 웃었다.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화얼예."
"목숨값이니 꽤 비싸게 청구해도 되겠지?"
"에엑- 나처럼 착한 사람을 살린 거면 절대 네게도 손해는 아니지 않아?"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 마. 동전 하나 빠짐없이 다 받아낼 테니까."
"화얼예에-"
흥 콧방귀를 뀐 해우신은 아파도 되니 빨리 낫게만 하라며 툭 말을 던지고는 도도하게 뒤돌아 사라졌다. 그 연분홍빛 뒷모습을 보며 씨익 웃던 흑안경은 이내 상처 위로 콸콸 쏟아부어지는 소독약에 아악 소리를 질렀다.
상처가 치료될 동안 흑안경은 해우신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물론 혼자는 아니었다. 장기령의 상처도 나으려면 시간은 어느정도 필요했기에 철삼각까지 해우신의 집에서 편히 뒹굴대며 포동포동 살을 찌워갔다.
안 그래도 치유가 빠른 몸인데 이리 최상의 대접까지 받으니 흑안경과 장기령의 몸은 곧 새것처럼 멀끔해져 가고 있었다. 뭐가 그리 바쁜지 하루에 얼굴을 한번 보여줄까 말까하는 해가 당주가 귀가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해우신에게 가고 있던 중이었다.
지잉-짧게 울리는 진동에 휴대폰을 꺼냈다. 퉈바? 이 놈이 무슨 일이지? 그에게서 온 문자엔 영상이 하나 첨부되어 있었다. 일단 영상은 건너뛴 흑안경이 문자 내용을 읽었다.
[이걸 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정말 많이 했는데 아무래도 숨기는 건 아닌 거 같아서...아는 동생놈이 보낸 건데-]
건성건성 문자를 읽은 흑안경이 영상을 재생시켰다. 큰 보폭으로 움직이던 발이 이내 우뚝 멈춰섰다.
"그럼 이제 다시 떠나는 거야?"
"응. 샤오거도 다 나았고 아직 일이 해결되지 않았으니 떠나야지."
"샤즈도 다시 데려가는 건가?"
"아니. 이제 갈 곳은 우리끼리만으로도 충분해. "
"그래. 필요한 장비가 있다면 챙겨줄 테니까 조심히,"
해우신의 말이 채 끝을 맺기 전이었다. 쾅!! 걷어차인 듯 세차게 열린 문이 굉음을 내며 그의 말을 잘라냈다. 놀란 오사와 해우신이 방어 자세를 잡았다가 문을 연 사람이 흑안경인걸 확인하고는 긴장된 몸을 풀었다. 성큼성큼 몇 걸음만에 해우신의 책상 앞에 닿은 흑안경이 그를 내려다 보았다.
"뭐야. 이제껏 쌓인 빚으로는 성에 안 차는 거야?"
해우신이 쏘아붙이듯 농담을 던졌으나 흑안경은 받아치지도, 웃지도 않았다. 그 반응에 해우신의 미간도 움찔했다.
"무슨 일-"
"얘기 좀 해."
"나 지금 오사랑 대화하고 있던 거 안 보여? 이따가 다시,"
"얘기 좀 하자고!!!"
버럭 지른 고함에 이번엔 몸이 크게 움찔했다. 중간에서 눈동자를 굴려가며 눈치를 보던 오사가 슬금슬금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그으...내가 이따가 다시 올 테니까 먼저 얘기 나눠, 응..."
꽃게걸음으로 자리를 뜬 오사가 조심히 문을 닫고 후다닥 도망쳤다. 서재에는 이제 해우신과 흑안경 둘 뿐이었다. 인상을 쓴 해우신이 팔짱을 끼고 뒤로 기대었다.
"도대체 무슨 얘기가 하고 싶어서 이렇게 매너없이 구는 거야?"
못마땅한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평소 달고 다니던 실없는 미소도 없고, 화난 기운을 풀풀 풍기는 흑안경은 거의 처음 보는 것이었다. 저 새까만 안경 뒤로 전혀 보이지 않는 눈 때문에 안 그래도 늘 속을 알 수 없는 그가 더 어렵게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두 눈을 마주 노려보고 있자 흑안경이 무언갈 내밀었다. 눈앞으로 들이밀어진 휴대폰 화면으로 시선을 내린 해우신의 얼굴이 이내 굳어졌다. 조금 당황한 듯도 했다.
"왜 이렇게까지 했어."
휴대폰 속에는 해우신이 있었다. 꼿꼿하게 앉은 그의 주변엔 시끄러운 인간들이 뱅뱅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그를 조롱하고, 또 희롱했다. 깔깔깔 웃던 화면 밖의 누가 립스틱을 건네주자 그를 희롱하던 놈 중 하나가 그를 받아들고 해우신의 입술에 치덕치덕 발라댔다.
-이리 곱게 칠해놓으니 정말 여자라 해도 믿겠네!
-저렇게 생겼으니 경극에서도 여역만 맡는 거겠지!
-해어화, 어디 노래라도 한 곡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게 아니면 사내와의 침대 위에서만 부르나?
푸하하하 터지는 웃음소리가 스피커를 찢었다. 그 가운데 해우신은 가만히 앉아있었다. 충분히 그들을 모두 때려눕힐 수 있는 힘이 있으면서도 가만히, 마치 한 떨기 꽃처럼 있을 뿐이었다. 머리 위로 술이 부어져 젖어가면서도 그저 가만히. 머리카락과 속눈썹에 맺힌 술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렇게 가만히.
그렇게 영상은 끝이 났다. 왈왈대던 목소리들이 사라지자 곧바로 고요가 빈자리를 메꿨다. 흑안경은 해우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해우신은 책상 위만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내 목숨 하나 살리자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었어."
"이미 다 끝난 일이야."
마치 가면이라도 쓴듯 한순간에 굳은 얼굴을 갈무리한 해우신이 대답했다. 그 담담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흑안경은 되려 더 큰 분노가 차올랐다.
"그냥 무시했어야지. 왜 나때문에 네가 이런 수치를 당해야 하는데!!"
"덕분에 살았잖아. 네 그 머리통 온전히 몸뚱이에 붙어서 땅에 두 발 붙이고 서있잖아. 그럼 됐지 뭐가 문제야?"
"문제? 세상 콧대 높은 네가 고작 나때문에 이런 짓까지 당했다는데 내가 목숨줄 붙어있어서 다행이다 이러고 넘어가라고?"
"그래. 그냥 다행이라 생각해. 그 목숨값이나 갚으면서 그냥 살던 대로 살라고."
"해우신!!"
"고작 8살에 당주가 됐던 나야!"
쾅 책상을 내리친 주먹은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충격으로 흔들린 찻잔이 넘어지며 차가 쏟아졌다. 진하게 우려낸 꽃향이 퍼졌다.
"지켜줄 어른 하나 없고, 나이도 힘도 뭣도 없던 내가 여지껏 살면서 그런 더러운 꼴 한두 번 당해본 줄 알아? 그보다 더한 짓도 셀 수 없이 겪었어. 호시탐탐 내 몰락을 바라는 것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 스스로 진흙탕까지 떨어져서 굴렀다 기어올라온 나야."
고작 저정도로는 내게 흠집 하나 내지 못해.
짓씹듯 말하는 그의 눈은 독기가 가득했다. 그런 그의 두 눈에 흑안경은 제가 지금 진흙탕 속에 가라앉은 것만 같았다.
"넌 아무렇지 않을지 몰라도.."
"..."
"난 비참해."
제가 고작 마지막으로 그를 한번만 더 보고싶다며 태평한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티끌 하나 묻지 않게 지켜주고 싶었던 그는 다시 제발로 진흙탕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런 주제에 그를 더 바랄 자격이 있는가.
"차라리 거기서 죽는 게 더 나았을지도.."
나직하게 중얼인 흑안경이 해우신을 등졌다. 터벅터벅 멀어지는 등은 회색빛이었다. 문고리로 손을 뻗는 흑안경의 뒤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내 턱 어깨가 붙잡혀 강제로 뒤돌려지는가 싶더니 퍽 얼굴로 묵직한 통증이 일었다. 쿠당탕 넘어진 흑안경의 위로 올라탄 무게가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 손을 거칠게 떼어내려던 흑안경은 그의 눈을 마주한 순간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 모든 더러운 일들을 겪으면서도 내가 가장 미칠 것 같았던 건."
그의 눈은 더이상 독기가 어려있지 않았다. 다만,
"끝까지 난 혼자였다는 거야."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은 듯 텅 비어있었다.
더는 혼자이기 싫어. 그 누구도 이제 더는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 이제 나는 힘도 있고, 돈도 많고, 더 잃을 수치도 없어 그러니까, 이제 진짜 더는 누구도 떠나보내기 싫어. 혼자이기 싫어.
중얼중얼 말을 쏟아내는 해우신을 와락 품에 안았다. 이 작고 여린 꽃에게 감히 제가 무슨 짓을 한건지 끔찍했다. 그가 안쓰러워 심장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샤오화. 울지마. 내가 잘못했어."
"...안 울어.."
실제 그는 울고 있지 않았으나 흑안경은 저멀리 쓰러진 찻잔에서 뚝뚝 떨어지는 꽃향기가 마치 그의 눈물처럼 보여 괴로웠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절대 널 떠나지 않을게, 널 혼자 두지 않을게, 끝까지 네 곁에 있을게.
흑안경은 품 안에 안긴 해우신을 토닥이고 귓가에 약속을 속삭였다. 그리곤 절대 그를 놓지 않겠다는 듯 꽉 껴안았다. 밀쳐내지도 않고 얌전히 온기를 느끼고 있는 그가 가여웠다. 그래서 흑안경은 그가 제 온기를 언제까지나 느낄 수 있도록, 절대 그를 남겨두고 죽지 않겠다 맹세했다.
종극필기 흑화 흑안경해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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