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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3 12:24
전편 https://hygall.com/607684194
검시를 마친 뒤 나와 보니 적비성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 상태였음.
이윽고 방다병과 이연화는 유가문의 대접도 사양하고 여관으로 돌아왔음. 얼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그 집에서 하기에는 내용이 껄끄러웠거든.
그리고 여관으로 돌아와 점심상이 날라져 오는 중에 적비성이 돌아왔음.
“어딜 갔다 온 거야?”
사실 금원맹주가 이런 사건에 신경 쓸 의무는 없으니까. 이연화는 여상하게 물었음. 방다병은 그 곁에서 다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적비성을 살폈는데, 보기에는 평소의 무심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아 보였어.
다만 이연화가 꼿꼿하게 앉은 적비성의 목 뒤에서 한줄기 땀이 흐른 것을 보았음.
적맹주가 땀을 흘릴 정도로 힘을 빼고 오다니, 하지만 이연화는 그가 연화루에 너무 오래 머무르는 바람에 몸이 근질근질했나보다고 생각하고 말았음.
검시로 확인한 시체의 사인은 처음 발견했던 모습에서 크게 다른 부분은 없었어.
자다 죽었든 수면약이라도 먹었든, 아무튼 잠을 자던 상태에서 찔린 게 분명했지. 아무런 저항의 흔적이 없었고, 침상에는 가슴을 관통한 칼끝이 박힌 자국까지 깨끗하게 남아 있었어.
방 안에도 아무런 단서가 없었음.
그런데 아무 단서가 없다는게 하나의 단서가 되어 주었지.
처녀의 방은 2층에 있었고, 유일하게 밖으로 나가는 1층의 정문은 밤마다 보초가 지키고 서 있다고 했거든.
그렇다면 창으로 들어왔다는 얘기인데, 창문이야 부주의하게 열어놨을 수도 있지만 창틀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들어왔다면 무공을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면 안 되는 얘기였음.
“역시 치정 문제인가...?”
여인은 곱게 키워져 사람을 별로 만나고 다니지 않는다 했지만, 그 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 가문의 안에서는 섣불리 말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어.
상대가 여인이었지만, 아니 오히려 여인이었기 때문에 이연화는 매우 꼼꼼하게 검시를 했음.
그리고는 그녀의 음부에서 달갑지 않은 상흔을 발견했어.
“양음인의... 뭐? 그게 뭐야?”
방다병이 반문하자, 이연화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스쳤음.
“양음인의 교합흔. 백천원의 교본을 읽지 않았어?”
이연화가 나무라듯 말하자, 방다병이 욱하며 말했음.
“읽... 많이 읽었어! 바빠서 다 보지 못한 것뿐이지! 그리고 그런 건 의서 편에 있는 거잖아. 그쪽은 마지막에 읽으려고 했거든?”
이연화의 잔소리에는 열등감이 강한 방다병이 흥분하자, 이연화가 실수했다는 듯 손을 들어 진정시켰음.
“너는 평인이라 모르겠지만, 양인의 고환에는 결착으로 부풀어오르는 부분에 단단한 조직이 있어서 교통을 거칠게 하면 음인의 입구에 생길 수 있는 흔적이야. 알아둬...”
가능한 품위 있는 단어를 선택하여 설명하며 이연화는 뺨이 살짝 달아올랐음. 이때쯤 적비성이 심술궂은 눈빛이라도 던지겠다 싶었지. 하지만 적비성은 눈을 내리깐 채 차만 마실 뿐이었음.
-묘하게 조용하네. 뭔가 알아낸 거라도 있나?
“이상한걸. 주변에 물어봐도 낭자는 외출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라 했고, 부친의 태도로 봐도 함부로 나돌아다니게 할 것 같진 않았어.”
“범인은 무공을 할 수 있는 것 같으니, 일방적으로 표적으로 삼았거나... 아니면 밀회를 하고 있었다는 것도 완전히 말이 안 되는 일은 아니지.”
“그럼 낭자를 바로 옆에서 모시는 여종이나 몸종은 어디에 있었을까?”
번뜩 생각이 난 방다병이 말하는데, 때마침 누군가가 손을 휘두르며 정원을 달려들어왔음.
그는 전날 방다병을 만나러 왔던 유가문의 하인이었음. 그가 헐떡거리며 뛰어들어와, 금방 언급되었던 여인의 몸종이 사라졌다고 고했음.
주인이 시체로 발견되자, 몸종은 문초까지는 당하지 않아도 당연히 집안에 가두어놓은 상태였음. 집안이 어지러운데다 몸종은 나어린 소녀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빗장만 걸어 가둬두고는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어. 그런데 오늘 보니 몸종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고, 심지어 마을 변두리에서 살고 있던 그녀의 일가까지 밤새 몽땅 사라져버렸다는게 아니겠음.
“설마 그 몸종이...?”
방다병이 눈살을 찌푸리며 당장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중얼거리자, 이연화가 받아서 고개를 저었음.
“아니야. 범인은 확고한 살해 의지가 있었어. 그런 소녀가 살인을 저지를 정도로 괴물이라면, 살해한 후에 하루나 지나서 부랴부랴 식구들을 챙겨서 도주하는 행동은 앞뒤가 맞지 않아. 내가 보기엔 또다른 피해자인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혼인 상대자의 집안이, 이 근방에서 가장 큰 표국이라 했었지?”
“그래. 범인이 무공을 안다면, 그 쪽이 제일 의심스러워. 그럼 어떻게 할까?”
그러자 이연화가 방다병을 바라보면서 말했음.
“네가 결정해야지.”
살풋, 시험하는 듯한 느낌에 아이처럼 이연화만 바라보고 있던 방다병이 긴장을 탔음.
“...몸종 일가의 행방을 쫓게 하는 일은 이 곳 사람들이 더 잘 할 거야. 하지만 관아도 완전히 믿을 순 없으니까 백천원 사람을 붙여두지. 이럴 줄 알고 몇 사람 불러뒀어. 그럼, 우리는 상대 남자의 집에 가보자. 빨리 움직여야겠는걸.”
이연화는 가만히 방다병의 말을 듣고 있다가 웃음을 지으며 잘했다는 듯 그의 어깨를 두드렸음.
“또 어린애 취급이야.”
방다병은 투덜거렸지만 과히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어.
상대 남자의 집안은 이 마을에서는 몇 개의 산을 넘어가야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음.
산이라 말을 타면 오히려 느릴 것 같다고, 경공으로 이동하자는 말에 방다병이 걱정스레 물었음.
“너 괜찮겠어?”
이연화가 피식 웃었어. 그러고 보니 내력을 거진 되찾았지만 방다병에게는 보여줄 틈이 없었지.
“잘 따라오기나 해.”
마을의 출구까지 나오자 하인이 길을 설명해 주었음.
그런데 하인이 말을 마치자마자 적비성이 몸을 돌리더니 휙하니 날아올랐음.
“아비, 같이-!”
이연화가 두 마디도 하기 전에 적비성은 벌써 점이 되어 멀어져가고 있었어. 놀란 이연화가 그의 뒤를 따르자 방다병도 힘껏 발을 굴려 숲 쪽으로 날아올랐음.
적비성은 마치 쳐들어가기라도 할 듯한 기세와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어. 그 뒤를 이연화가 차츰 따라잡기 시작하자, 방다병은 두 사람과 상당히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지.
이연화가 두어번 소리쳐 불렀지만 적비성이 말없이 속력만 내자 포기하고 바싹 뒤를 쫓아갔음.
적맹주과, 마침내 회복한 이연화의 경공은 대단하여 한 시진도 되기 전에 마을 사이에 놓인 산을 다 넘어갔음.
산비탈에서 내려다보니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어.
마을은 양쪽으로 솟은 산의 안쪽으로 들어앉은 듯한 모양으로 지나온 마을보다 훨씬 규모가 컸고, 그 중 서편의 산에 반쯤 묻힌 큼직큼직한 군채가 바로 죽은 여인의 시가가 될뻔한 표국인 듯했음.
적비성은 잠시 멈추어 표국의 위치를 확인했을 뿐, 그가 곧장 경공을 재개하려는 것처럼 발을 내딛자 이연화가 얼른 소매를 붙잡았음.
“적맹주, 뭔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
시체가 우연히 저를 닮았던 사실은 알지도 못했지만, 이연화도 이제 적비성의 둔한 감정변화를 읽을만치 친숙해져 있었지. 어쩌면 몸을 섞은 후 더 예민해진 걸지도 모르지만.
적비성은 이연화에게 잡히자 뿌리치지도,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 어쩐지 피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 이유야 어쨌든 그런 태도가 맘에 들지 않은 이연화가 그의 손목을 지그시 움켜쥐며 말했음.
“이상하게 굴지마. 왜 그래?”
“...빨리 범인을 잡고 싶다. 그뿐이야.”
이연화가 의심스럽다는 듯 쳐다보자, 적비성이 또 시선을 피하며 건조한 말투로 대꾸했음.
분명 뭔가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금원맹주와 같은 사내가 마음을 숨긴다면, 대체 어떤 방법으로 털어놓게 만들 수 있을 것인지 이연화는 감도 오지 않았어.
“...좀 기다려. 방소보가 오면 같이 들어가야지.”
말 끝에 적비성을 잡은 손을 놓아주려고 하는데, 커다란 손이 이연화의 손을 되잡으며 힘을 주었음. 적비성은 손을 잡은 채 말없이 이연화를 바라보았음.
그 눈빛이 참 뭐라 말할 수 없이 이상하다, 싶은 이연화가 입을 열려는 순간 슥 손을 놓아버린 적비성이 마을을 향해 걷기 시작했음.
산을 내려가 들어선 마을은 성이라고 불러도 될만한 크기였음.
중앙 시장은 반듯하게 길도 잘 닦여져 있었고, 한참을 걸어 도착한 표국도 산 위에서 조그마하게 내려다볼 때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당당해 보였음.
입구에도 시원시원한 옷차림에 검을 들고 있는 자들이 서 있어서 다른 곳과는 분위기가 달랐음. 거기서 방다병이 표찰을 내밀자 그들을 들여보내는 동시에 한 사람이 빠르게 들어가 안쪽에 전갈을 보냈음.
이연화가 주위를 둘러보니 정문에서 멀리 떨어진 양 옆의 문으로 많은 수레나 짐마차들이 분주하게 드나들고 있었음. 지방에서 이만한 규모의 표국이라면 하나의 방파 정도의 행세는 할 수 있을 수준이었어.
세 사람이 마당을 지나기도 전에 한 떼의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마중을 나왔음.
그 중에 가장 앞에 선 중년의 사내는 언뜻 보아도 풍채가 좋고 강인해 보였는데, 그가 바로 표국의 주인인 여씨였어.
총표두 여씨는 세 사람에게 예를 표하고 내실로 안내했음.
손님들에게 자리를 권한 표두가 옆에 서 있던 아들을 소개하자 여태까지 가만히 있던 적비성이 눈을 들어 쳐다보았음.
죽은 여인의 약혼자였다는 장자는 검을 차고 있었지만 얼굴이 하얗고 몸이 가늘어보여 검만 떼놓고 보면 마치 문인같은 인상이었음. 그는 적비성이 험상궂은 얼굴로 쳐다보자 당황하며 눈을 피했음.
방다병이 제법 의젓하게 흉사에 대해 유감스럽다는 말을 늘어놓자 이연화는 내심으로 웃음을 지었음. 그는 가능하면 방다병의 앞에 나서지 않기로 했어. 사실 방다병은 적비성이나 이연화와 함께 있을때만 어리고 미숙해 보이는 것이지, 밖에서는 나무랄 데 없이 처신했지.
이윽고 사건 이야기가 나오고, 범인이 무공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이 언급되자 여씨가 말했음.
“설마 내 아들을 의심하는 것이오?”
그는 반쯤 무림에 몸담은 사람답게 직선적이고 걸걸했음.
“유씨의 따님은 몸가짐이 바른 처녀였고, 큰애와는 한 번도 면식이 없었소.”
“한 번도요?”
방다병이 묻자 그가 대답했음.
“그렇소. 이 혼사는 오로지 부모들끼리 정한 것이었으니까요.”
“그는 양인인가?”
그때 갑자기 적비성이 불쑥 내뱉자 방 안의 시선이 죄다 그에게 몰렸음. 그는 여태 뒤에 서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어딜가나 차분한 살기가 섞여 나오는 위압감을 숨길 수 없어서, 입을 열자마자 단숨에 주변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들었음.
특히 여씨의 큰아들은 은근히 본인을 찌르는 말들이 나오고 적비성이 자꾸만 뚫어져라고 쳐다보자 더 몸둘바를 몰랐음.
“내 아들들은 전부 양인이라오. -너희들은 그만 나가보거라.”
총표두는 무척 거북했지만 대놓고 불평하하지는 못하고, 대신 아들들을 밖으로 내보냈음.
총표두를 따르고 있던 사람들 중 세 사람이 그의 아들이었음. 그들이 방다병들을 향해 공손히 인사하고 물러갈 때 무엇에 발이 걸렸는지 아니면 마음이 흐트러져서 그랬는지 큰아들이 비틀하면서 뒤에 따라오던 동생에게 부딪혔음.
부딪힌 동생이 같이 허우적대자, 그순간 적비성이 손을 내밀어 가볍게 허리를 밀어서 제자리로 돌려놓았어.
양측은 꽤 거리가 있었는데도 적비성은 가만히 앉은 상태에서 출수하듯 손을 뻗었다가 거두어들여, 마치 팔이 길어졌다가 되돌아온 것처럼 보였음. 이 곳에 모인 자들은 대부분 무예를 익혔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지를 알아보고 각자의 얼굴에 경외심이 스쳤음.
“감사합니다.”
장자에 비하면 비교적 수수한 옷을 입고 있어서 표두의 수하려니 싶었던 청년이 자세를 다잡고 다시 한 번 깊숙이 허리를 숙이자 이연화가 겁주지 말라는 듯 은근히 적비성의 허리를 찔렀음.
예상은 했지만 이후의 대화에서도 이렇다할 수확은 없었어.
혼약자끼리 내왕도 없었다 하니. 게다가 마을끼리 이만큼 멀리 떨어져있고, 또한 여염집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표국이고 보니 특별한 흔적을 찾아내기도 어려울 것 같았음.
일단 표국 안에서 거처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에 세 사람은 다시 둘러앉아 탁상공론부터 펼칠 도리밖에 없었음.
“그 큰아들은 무공이 얼마나 되는 걸까?”
방다병이 슬쩍 이연화에게 기대하듯 물었음.
“걸음이 산란해 보여서 알아보기 힘들었어. 하지만 그가 고수라면 그정도 눈속임쯤이야 일도 아니겠지.”
“집안 사람들에게 묻긴 힘들겠는데. 여표두의 태도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아. 밖으로 나가서 수소문해봐야 되겠어.”
그 때 하인이 들어오더니 이전 마을에서 온 전갈을 건네주었음.
전서구가 매달고 온 서신을 읽은 방다병이 말했음.
“사라진 여종과 일가족 말인데, 목격자도 찾지 못했다나 봐. 사람이 여섯이나 되고, 그리 큰 마을도 아닌데 감쪽같이 사라지다니.”
그러자 무언가를 가만히 생각하던 이연화가 중얼거렸음.
“이 표국이 상당히 크지...”
“응?”
“방소보. 그쪽 마을에도 여가 표국의 거점이 있었나?”
“응...? 아, 맞아. 시장에 나갔다가 봤는데, 그러고 보니 여씨의 패가 달려 있었던 것 같기도 해.”
“전날부터 표국에서 들고 난 화물을 죄다 조사해야겠어. 방형탐, 네가 돌아가서 백천원 사람들을 데리고...”
“내가 가겠다.”
갑자기 옆에서 묵직하게 끊는 말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란 두 사람이 쳐다보았음.
그때까지 적비성은 한 마디의 의견도 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둘은 그의 존재도 잊고 있었어.
“네가??”
“맹의 수하들이라면 한나절도 되기 전에 도착할 것이다.”
본디 말도 행동도 간결한 적비성이 한 마디에 요지를 다 채워넣자 가감의 여지도 없었음.
단지 거만하게 들리는 말투가 백천원 사람들은 그보다 느리다는 뜻으로 들려서 방다병이 불만을 갖는 사이, 이연화가 얼른 대답했음.
“좋아, 그럼 그쪽은 너에게 맡기고 우리는 여기서 움직일게.”
이연화가 말을 마치자마자 적비성은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밖으로 나갔음.
“거참, 묘하게 협력적이네...”
그가 밀어젖히고 나간 문으로 휑하니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이연화가 중얼거리자 방다병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어.
방다병과 이연화는 계획대로 밖으로 나가 마을을 전전하며 이런저런 정보를 긁어모았음.
문제의 큰아들은 무인 집안이지만 시서화를 더 좋아해서 무공은 형편없다고 소문이 나 있었음. 둘째 아들은 본래 총표두의 친우의 아들인데, 친우가 죽자 양아들로 삼았고, 그는 어디에도 흥미가 없어서 나돌아다니기만 좋아한다고 함.
외려 막내 아들이 뜻도 있고 무공도 제법 강해 어린 나이부터 표국의 주요한 일들을 맡아 보며 부친의 일을 돕고 있다고 했지.
사건 당시의 밤에 큰아들은 시내에서 문예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새벽까지 지새웠다고 하니 두 사람은 그에 대한 조사를 하러 다니다가 저녁이 되자 표국으로 돌아왔음.
여표두는 물론 방다병의 일행을 기분좋게 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대접에 소홀하지는 않았어.
저녁상을 물리고 방다병이 씻으러간 새 이연화가 잠시 앉아 있으려니 하녀가 들어와 손님께서 원하신다면 시원한 정자에 주안상을 차리겠다고 말했음. 그리고 주인께서는 바쁘셔서 짬을 낼 수가 없으니 손님들의 양해를 바란다고, 대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해 달라고 공손하게 말함.
표국은 밤에도 짐이 나가는지 사방에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사람들이 계속 오가고 있었음. 술상을 차린 정자는 층이 높은 누각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빛 아래 바쁘게 일을 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자 시장통에 온 것처럼 들뜨면서도 안락한 기분이 느껴졌어.
“이연화.”
뒤늦게 방으로 돌아와 이연화를 쫓아온 방다병이 다가왔음.
“또 술? 내가 준 보약은 잘 먹고 있는 거야?”
방다병이 따박따박 잔소리를 해도, 해독할 당시에 애지중지 보살핌을 받은 기억을 떠올리면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이연화가 잠자코 웃었음.
하지만 그가 술을 따라주자 방다병도 슬며시 웃음을 지으며 잔을 받았지.
이윽고 방다병이 한숨을 쉬며 말했음.
“아비가 더 이상하게 굴지도 모르니 말해두는게 좋겠어.”
“?”
이연화가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자, 방다병이 거푸 한숨을 쉬면서 유소저의 시체가 이연화와 닮았던 사실을 털어놓았음.
“뭐... 내 얼굴이 그렇게 생겼다고?”
의아해하는 이연화는 역시 남이 본 것만큼 와닿지는 않는 듯했어.
“물론 쌍둥이처럼 빼박았느니 하는 수준은 아냐. 하지만 이목구비가 상당히 닮아서 마음에 걸릴 정도는 돼. -그래서 아비가 굉장히 기분이 나빠졌나봐.”
그제야 이연화는 적비성이 이상하게 굴었던 이유를 알았음.
“...하긴, 나도 너나 아비를 닮은 시체를 본다면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
“쓸데없는 상상은 하지 마! 말이라고 해?”
방다병이 버럭거리자 이연화는 웃으며 술잔을 그의 술잔에 부딪혔음.
떨떠름한 얘기를 듣긴 했지만, 두 사람과 함께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상황이 예전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서 기분이 좋았어.
그리고 저와 닮은 시체를 보고 기분이 나빠졌다는 적비성을 생각하니, 은근히 속이 간지러워지며 그가 보고 싶어졌어.
오늘은 정말로 오지 못할 텐데.
이제서야 이연화는 밤일을 참느라고 성이 난 그의 불만도 이해할 것 같았고. 또 두 잔 세 잔 흠뻑 술에 취하며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짙어지더니.
마침내 진한 행복감과 함께,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할 수 있게 되었어.
비성연화
검시를 마친 뒤 나와 보니 적비성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 상태였음.
이윽고 방다병과 이연화는 유가문의 대접도 사양하고 여관으로 돌아왔음. 얼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그 집에서 하기에는 내용이 껄끄러웠거든.
그리고 여관으로 돌아와 점심상이 날라져 오는 중에 적비성이 돌아왔음.
“어딜 갔다 온 거야?”
사실 금원맹주가 이런 사건에 신경 쓸 의무는 없으니까. 이연화는 여상하게 물었음. 방다병은 그 곁에서 다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적비성을 살폈는데, 보기에는 평소의 무심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아 보였어.
다만 이연화가 꼿꼿하게 앉은 적비성의 목 뒤에서 한줄기 땀이 흐른 것을 보았음.
적맹주가 땀을 흘릴 정도로 힘을 빼고 오다니, 하지만 이연화는 그가 연화루에 너무 오래 머무르는 바람에 몸이 근질근질했나보다고 생각하고 말았음.
검시로 확인한 시체의 사인은 처음 발견했던 모습에서 크게 다른 부분은 없었어.
자다 죽었든 수면약이라도 먹었든, 아무튼 잠을 자던 상태에서 찔린 게 분명했지. 아무런 저항의 흔적이 없었고, 침상에는 가슴을 관통한 칼끝이 박힌 자국까지 깨끗하게 남아 있었어.
방 안에도 아무런 단서가 없었음.
그런데 아무 단서가 없다는게 하나의 단서가 되어 주었지.
처녀의 방은 2층에 있었고, 유일하게 밖으로 나가는 1층의 정문은 밤마다 보초가 지키고 서 있다고 했거든.
그렇다면 창으로 들어왔다는 얘기인데, 창문이야 부주의하게 열어놨을 수도 있지만 창틀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들어왔다면 무공을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면 안 되는 얘기였음.
“역시 치정 문제인가...?”
여인은 곱게 키워져 사람을 별로 만나고 다니지 않는다 했지만, 그 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 가문의 안에서는 섣불리 말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어.
상대가 여인이었지만, 아니 오히려 여인이었기 때문에 이연화는 매우 꼼꼼하게 검시를 했음.
그리고는 그녀의 음부에서 달갑지 않은 상흔을 발견했어.
“양음인의... 뭐? 그게 뭐야?”
방다병이 반문하자, 이연화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스쳤음.
“양음인의 교합흔. 백천원의 교본을 읽지 않았어?”
이연화가 나무라듯 말하자, 방다병이 욱하며 말했음.
“읽... 많이 읽었어! 바빠서 다 보지 못한 것뿐이지! 그리고 그런 건 의서 편에 있는 거잖아. 그쪽은 마지막에 읽으려고 했거든?”
이연화의 잔소리에는 열등감이 강한 방다병이 흥분하자, 이연화가 실수했다는 듯 손을 들어 진정시켰음.
“너는 평인이라 모르겠지만, 양인의 고환에는 결착으로 부풀어오르는 부분에 단단한 조직이 있어서 교통을 거칠게 하면 음인의 입구에 생길 수 있는 흔적이야. 알아둬...”
가능한 품위 있는 단어를 선택하여 설명하며 이연화는 뺨이 살짝 달아올랐음. 이때쯤 적비성이 심술궂은 눈빛이라도 던지겠다 싶었지. 하지만 적비성은 눈을 내리깐 채 차만 마실 뿐이었음.
-묘하게 조용하네. 뭔가 알아낸 거라도 있나?
“이상한걸. 주변에 물어봐도 낭자는 외출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라 했고, 부친의 태도로 봐도 함부로 나돌아다니게 할 것 같진 않았어.”
“범인은 무공을 할 수 있는 것 같으니, 일방적으로 표적으로 삼았거나... 아니면 밀회를 하고 있었다는 것도 완전히 말이 안 되는 일은 아니지.”
“그럼 낭자를 바로 옆에서 모시는 여종이나 몸종은 어디에 있었을까?”
번뜩 생각이 난 방다병이 말하는데, 때마침 누군가가 손을 휘두르며 정원을 달려들어왔음.
그는 전날 방다병을 만나러 왔던 유가문의 하인이었음. 그가 헐떡거리며 뛰어들어와, 금방 언급되었던 여인의 몸종이 사라졌다고 고했음.
주인이 시체로 발견되자, 몸종은 문초까지는 당하지 않아도 당연히 집안에 가두어놓은 상태였음. 집안이 어지러운데다 몸종은 나어린 소녀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빗장만 걸어 가둬두고는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어. 그런데 오늘 보니 몸종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고, 심지어 마을 변두리에서 살고 있던 그녀의 일가까지 밤새 몽땅 사라져버렸다는게 아니겠음.
“설마 그 몸종이...?”
방다병이 눈살을 찌푸리며 당장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중얼거리자, 이연화가 받아서 고개를 저었음.
“아니야. 범인은 확고한 살해 의지가 있었어. 그런 소녀가 살인을 저지를 정도로 괴물이라면, 살해한 후에 하루나 지나서 부랴부랴 식구들을 챙겨서 도주하는 행동은 앞뒤가 맞지 않아. 내가 보기엔 또다른 피해자인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혼인 상대자의 집안이, 이 근방에서 가장 큰 표국이라 했었지?”
“그래. 범인이 무공을 안다면, 그 쪽이 제일 의심스러워. 그럼 어떻게 할까?”
그러자 이연화가 방다병을 바라보면서 말했음.
“네가 결정해야지.”
살풋, 시험하는 듯한 느낌에 아이처럼 이연화만 바라보고 있던 방다병이 긴장을 탔음.
“...몸종 일가의 행방을 쫓게 하는 일은 이 곳 사람들이 더 잘 할 거야. 하지만 관아도 완전히 믿을 순 없으니까 백천원 사람을 붙여두지. 이럴 줄 알고 몇 사람 불러뒀어. 그럼, 우리는 상대 남자의 집에 가보자. 빨리 움직여야겠는걸.”
이연화는 가만히 방다병의 말을 듣고 있다가 웃음을 지으며 잘했다는 듯 그의 어깨를 두드렸음.
“또 어린애 취급이야.”
방다병은 투덜거렸지만 과히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어.
상대 남자의 집안은 이 마을에서는 몇 개의 산을 넘어가야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음.
산이라 말을 타면 오히려 느릴 것 같다고, 경공으로 이동하자는 말에 방다병이 걱정스레 물었음.
“너 괜찮겠어?”
이연화가 피식 웃었어. 그러고 보니 내력을 거진 되찾았지만 방다병에게는 보여줄 틈이 없었지.
“잘 따라오기나 해.”
마을의 출구까지 나오자 하인이 길을 설명해 주었음.
그런데 하인이 말을 마치자마자 적비성이 몸을 돌리더니 휙하니 날아올랐음.
“아비, 같이-!”
이연화가 두 마디도 하기 전에 적비성은 벌써 점이 되어 멀어져가고 있었어. 놀란 이연화가 그의 뒤를 따르자 방다병도 힘껏 발을 굴려 숲 쪽으로 날아올랐음.
적비성은 마치 쳐들어가기라도 할 듯한 기세와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어. 그 뒤를 이연화가 차츰 따라잡기 시작하자, 방다병은 두 사람과 상당히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지.
이연화가 두어번 소리쳐 불렀지만 적비성이 말없이 속력만 내자 포기하고 바싹 뒤를 쫓아갔음.
적맹주과, 마침내 회복한 이연화의 경공은 대단하여 한 시진도 되기 전에 마을 사이에 놓인 산을 다 넘어갔음.
산비탈에서 내려다보니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어.
마을은 양쪽으로 솟은 산의 안쪽으로 들어앉은 듯한 모양으로 지나온 마을보다 훨씬 규모가 컸고, 그 중 서편의 산에 반쯤 묻힌 큼직큼직한 군채가 바로 죽은 여인의 시가가 될뻔한 표국인 듯했음.
적비성은 잠시 멈추어 표국의 위치를 확인했을 뿐, 그가 곧장 경공을 재개하려는 것처럼 발을 내딛자 이연화가 얼른 소매를 붙잡았음.
“적맹주, 뭔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
시체가 우연히 저를 닮았던 사실은 알지도 못했지만, 이연화도 이제 적비성의 둔한 감정변화를 읽을만치 친숙해져 있었지. 어쩌면 몸을 섞은 후 더 예민해진 걸지도 모르지만.
적비성은 이연화에게 잡히자 뿌리치지도,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 어쩐지 피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 이유야 어쨌든 그런 태도가 맘에 들지 않은 이연화가 그의 손목을 지그시 움켜쥐며 말했음.
“이상하게 굴지마. 왜 그래?”
“...빨리 범인을 잡고 싶다. 그뿐이야.”
이연화가 의심스럽다는 듯 쳐다보자, 적비성이 또 시선을 피하며 건조한 말투로 대꾸했음.
분명 뭔가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금원맹주와 같은 사내가 마음을 숨긴다면, 대체 어떤 방법으로 털어놓게 만들 수 있을 것인지 이연화는 감도 오지 않았어.
“...좀 기다려. 방소보가 오면 같이 들어가야지.”
말 끝에 적비성을 잡은 손을 놓아주려고 하는데, 커다란 손이 이연화의 손을 되잡으며 힘을 주었음. 적비성은 손을 잡은 채 말없이 이연화를 바라보았음.
그 눈빛이 참 뭐라 말할 수 없이 이상하다, 싶은 이연화가 입을 열려는 순간 슥 손을 놓아버린 적비성이 마을을 향해 걷기 시작했음.
산을 내려가 들어선 마을은 성이라고 불러도 될만한 크기였음.
중앙 시장은 반듯하게 길도 잘 닦여져 있었고, 한참을 걸어 도착한 표국도 산 위에서 조그마하게 내려다볼 때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당당해 보였음.
입구에도 시원시원한 옷차림에 검을 들고 있는 자들이 서 있어서 다른 곳과는 분위기가 달랐음. 거기서 방다병이 표찰을 내밀자 그들을 들여보내는 동시에 한 사람이 빠르게 들어가 안쪽에 전갈을 보냈음.
이연화가 주위를 둘러보니 정문에서 멀리 떨어진 양 옆의 문으로 많은 수레나 짐마차들이 분주하게 드나들고 있었음. 지방에서 이만한 규모의 표국이라면 하나의 방파 정도의 행세는 할 수 있을 수준이었어.
세 사람이 마당을 지나기도 전에 한 떼의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마중을 나왔음.
그 중에 가장 앞에 선 중년의 사내는 언뜻 보아도 풍채가 좋고 강인해 보였는데, 그가 바로 표국의 주인인 여씨였어.
총표두 여씨는 세 사람에게 예를 표하고 내실로 안내했음.
손님들에게 자리를 권한 표두가 옆에 서 있던 아들을 소개하자 여태까지 가만히 있던 적비성이 눈을 들어 쳐다보았음.
죽은 여인의 약혼자였다는 장자는 검을 차고 있었지만 얼굴이 하얗고 몸이 가늘어보여 검만 떼놓고 보면 마치 문인같은 인상이었음. 그는 적비성이 험상궂은 얼굴로 쳐다보자 당황하며 눈을 피했음.
방다병이 제법 의젓하게 흉사에 대해 유감스럽다는 말을 늘어놓자 이연화는 내심으로 웃음을 지었음. 그는 가능하면 방다병의 앞에 나서지 않기로 했어. 사실 방다병은 적비성이나 이연화와 함께 있을때만 어리고 미숙해 보이는 것이지, 밖에서는 나무랄 데 없이 처신했지.
이윽고 사건 이야기가 나오고, 범인이 무공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이 언급되자 여씨가 말했음.
“설마 내 아들을 의심하는 것이오?”
그는 반쯤 무림에 몸담은 사람답게 직선적이고 걸걸했음.
“유씨의 따님은 몸가짐이 바른 처녀였고, 큰애와는 한 번도 면식이 없었소.”
“한 번도요?”
방다병이 묻자 그가 대답했음.
“그렇소. 이 혼사는 오로지 부모들끼리 정한 것이었으니까요.”
“그는 양인인가?”
그때 갑자기 적비성이 불쑥 내뱉자 방 안의 시선이 죄다 그에게 몰렸음. 그는 여태 뒤에 서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어딜가나 차분한 살기가 섞여 나오는 위압감을 숨길 수 없어서, 입을 열자마자 단숨에 주변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들었음.
특히 여씨의 큰아들은 은근히 본인을 찌르는 말들이 나오고 적비성이 자꾸만 뚫어져라고 쳐다보자 더 몸둘바를 몰랐음.
“내 아들들은 전부 양인이라오. -너희들은 그만 나가보거라.”
총표두는 무척 거북했지만 대놓고 불평하하지는 못하고, 대신 아들들을 밖으로 내보냈음.
총표두를 따르고 있던 사람들 중 세 사람이 그의 아들이었음. 그들이 방다병들을 향해 공손히 인사하고 물러갈 때 무엇에 발이 걸렸는지 아니면 마음이 흐트러져서 그랬는지 큰아들이 비틀하면서 뒤에 따라오던 동생에게 부딪혔음.
부딪힌 동생이 같이 허우적대자, 그순간 적비성이 손을 내밀어 가볍게 허리를 밀어서 제자리로 돌려놓았어.
양측은 꽤 거리가 있었는데도 적비성은 가만히 앉은 상태에서 출수하듯 손을 뻗었다가 거두어들여, 마치 팔이 길어졌다가 되돌아온 것처럼 보였음. 이 곳에 모인 자들은 대부분 무예를 익혔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지를 알아보고 각자의 얼굴에 경외심이 스쳤음.
“감사합니다.”
장자에 비하면 비교적 수수한 옷을 입고 있어서 표두의 수하려니 싶었던 청년이 자세를 다잡고 다시 한 번 깊숙이 허리를 숙이자 이연화가 겁주지 말라는 듯 은근히 적비성의 허리를 찔렀음.
예상은 했지만 이후의 대화에서도 이렇다할 수확은 없었어.
혼약자끼리 내왕도 없었다 하니. 게다가 마을끼리 이만큼 멀리 떨어져있고, 또한 여염집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표국이고 보니 특별한 흔적을 찾아내기도 어려울 것 같았음.
일단 표국 안에서 거처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에 세 사람은 다시 둘러앉아 탁상공론부터 펼칠 도리밖에 없었음.
“그 큰아들은 무공이 얼마나 되는 걸까?”
방다병이 슬쩍 이연화에게 기대하듯 물었음.
“걸음이 산란해 보여서 알아보기 힘들었어. 하지만 그가 고수라면 그정도 눈속임쯤이야 일도 아니겠지.”
“집안 사람들에게 묻긴 힘들겠는데. 여표두의 태도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아. 밖으로 나가서 수소문해봐야 되겠어.”
그 때 하인이 들어오더니 이전 마을에서 온 전갈을 건네주었음.
전서구가 매달고 온 서신을 읽은 방다병이 말했음.
“사라진 여종과 일가족 말인데, 목격자도 찾지 못했다나 봐. 사람이 여섯이나 되고, 그리 큰 마을도 아닌데 감쪽같이 사라지다니.”
그러자 무언가를 가만히 생각하던 이연화가 중얼거렸음.
“이 표국이 상당히 크지...”
“응?”
“방소보. 그쪽 마을에도 여가 표국의 거점이 있었나?”
“응...? 아, 맞아. 시장에 나갔다가 봤는데, 그러고 보니 여씨의 패가 달려 있었던 것 같기도 해.”
“전날부터 표국에서 들고 난 화물을 죄다 조사해야겠어. 방형탐, 네가 돌아가서 백천원 사람들을 데리고...”
“내가 가겠다.”
갑자기 옆에서 묵직하게 끊는 말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란 두 사람이 쳐다보았음.
그때까지 적비성은 한 마디의 의견도 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둘은 그의 존재도 잊고 있었어.
“네가??”
“맹의 수하들이라면 한나절도 되기 전에 도착할 것이다.”
본디 말도 행동도 간결한 적비성이 한 마디에 요지를 다 채워넣자 가감의 여지도 없었음.
단지 거만하게 들리는 말투가 백천원 사람들은 그보다 느리다는 뜻으로 들려서 방다병이 불만을 갖는 사이, 이연화가 얼른 대답했음.
“좋아, 그럼 그쪽은 너에게 맡기고 우리는 여기서 움직일게.”
이연화가 말을 마치자마자 적비성은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밖으로 나갔음.
“거참, 묘하게 협력적이네...”
그가 밀어젖히고 나간 문으로 휑하니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이연화가 중얼거리자 방다병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어.
방다병과 이연화는 계획대로 밖으로 나가 마을을 전전하며 이런저런 정보를 긁어모았음.
문제의 큰아들은 무인 집안이지만 시서화를 더 좋아해서 무공은 형편없다고 소문이 나 있었음. 둘째 아들은 본래 총표두의 친우의 아들인데, 친우가 죽자 양아들로 삼았고, 그는 어디에도 흥미가 없어서 나돌아다니기만 좋아한다고 함.
외려 막내 아들이 뜻도 있고 무공도 제법 강해 어린 나이부터 표국의 주요한 일들을 맡아 보며 부친의 일을 돕고 있다고 했지.
사건 당시의 밤에 큰아들은 시내에서 문예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새벽까지 지새웠다고 하니 두 사람은 그에 대한 조사를 하러 다니다가 저녁이 되자 표국으로 돌아왔음.
여표두는 물론 방다병의 일행을 기분좋게 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대접에 소홀하지는 않았어.
저녁상을 물리고 방다병이 씻으러간 새 이연화가 잠시 앉아 있으려니 하녀가 들어와 손님께서 원하신다면 시원한 정자에 주안상을 차리겠다고 말했음. 그리고 주인께서는 바쁘셔서 짬을 낼 수가 없으니 손님들의 양해를 바란다고, 대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해 달라고 공손하게 말함.
표국은 밤에도 짐이 나가는지 사방에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사람들이 계속 오가고 있었음. 술상을 차린 정자는 층이 높은 누각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빛 아래 바쁘게 일을 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자 시장통에 온 것처럼 들뜨면서도 안락한 기분이 느껴졌어.
“이연화.”
뒤늦게 방으로 돌아와 이연화를 쫓아온 방다병이 다가왔음.
“또 술? 내가 준 보약은 잘 먹고 있는 거야?”
방다병이 따박따박 잔소리를 해도, 해독할 당시에 애지중지 보살핌을 받은 기억을 떠올리면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이연화가 잠자코 웃었음.
하지만 그가 술을 따라주자 방다병도 슬며시 웃음을 지으며 잔을 받았지.
이윽고 방다병이 한숨을 쉬며 말했음.
“아비가 더 이상하게 굴지도 모르니 말해두는게 좋겠어.”
“?”
이연화가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자, 방다병이 거푸 한숨을 쉬면서 유소저의 시체가 이연화와 닮았던 사실을 털어놓았음.
“뭐... 내 얼굴이 그렇게 생겼다고?”
의아해하는 이연화는 역시 남이 본 것만큼 와닿지는 않는 듯했어.
“물론 쌍둥이처럼 빼박았느니 하는 수준은 아냐. 하지만 이목구비가 상당히 닮아서 마음에 걸릴 정도는 돼. -그래서 아비가 굉장히 기분이 나빠졌나봐.”
그제야 이연화는 적비성이 이상하게 굴었던 이유를 알았음.
“...하긴, 나도 너나 아비를 닮은 시체를 본다면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
“쓸데없는 상상은 하지 마! 말이라고 해?”
방다병이 버럭거리자 이연화는 웃으며 술잔을 그의 술잔에 부딪혔음.
떨떠름한 얘기를 듣긴 했지만, 두 사람과 함께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상황이 예전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서 기분이 좋았어.
그리고 저와 닮은 시체를 보고 기분이 나빠졌다는 적비성을 생각하니, 은근히 속이 간지러워지며 그가 보고 싶어졌어.
오늘은 정말로 오지 못할 텐데.
이제서야 이연화는 밤일을 참느라고 성이 난 그의 불만도 이해할 것 같았고. 또 두 잔 세 잔 흠뻑 술에 취하며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짙어지더니.
마침내 진한 행복감과 함께,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할 수 있게 되었어.
비성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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