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연갤 - 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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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8 00:50
불길한 사이렌 소리가 고막을 울리고 어둠이 빛을 가리울 때, 춤을 추리라. 검은 장막 속에서 두 팔을 들고 덩실덩실 춤을 추리라. 그는 가장 처음 잡아먹히는 제물이리니 머리가 뜯기고 팔다리 없이도 춤을 추리라. 생애 마지막 춤을.
“좀비 달팽이 같군. 이 또한 운명인가.”
“뭐?”
‘온다’는 반 오거의 말에 사법의 탑 망루에서 정면을 응시했던 시류의 눈에도 먼 바다 위로 매연같은 구름이 점처럼 보일 때였다. 반 오거의 혼잣말이 들려온 것은. 옆에서 포좌에 총을 올리고 앉아쏴 자세를 유지했던 반 오거의 조준경은 아래를 향해 있었다. 또한 그는 숙명론자로 운명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으며 이럴 때 시류는 대개 무시하는 쪽이었다. 그리고 반 오거는 조준경을 통해 신임 재판소장이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을 본 뒤였다. 신임 재판소장의 숙소는 본섬을 가로지르는 큰길에 위치했다. 커튼이 나부끼는 창문을 통해 보인 이층 침실에서 남자는 안대도 벗지 않은 채 좀비처럼 움직였다. 어그적대는 모양새가 마치 줄에 매달린 인형과 같았으니. 그사이 하늘 위 검은 점은 확연한 모양새가 보일만큼 가까워졌으니 떼구름처럼 몰려든 놈들에 본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쿵!
전방에서 한차례 터진 포탄에 지축이 진동하니 이를 시작으로 경계령을 발동하는 사이렌이 울려퍼졌다. 놈들의 규모는 본섬을 덮어씌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에 이런 대규모 움직임을 저희가 모를 리 없다 생각한 시류는 드물게 당황한 얼굴이었고. 하지만 반 오거는 이런 순간에도 한 지점에 몰두할 따름이었다. 안대를 쓴 잠옷 차림의 남자는 큰길 한가운데서 두 팔을 들고 어깨춤을 덩실대는 중이었다. 안대 밑으로 드러난 얼굴이 겁에 질려 고래고래 소리치듯하던 모양새는 인형극을 보는 듯했고.
“죽음의 춤사위로군. 마치 기생충에 감염된 달팽이가 잡아먹히기 위해 높은 곳에 오르는 것 같아.”
“…….”
임명식을 앞둔 남자가 큰길에서 덩실댄 건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그는 서서히 본섬 상공을 뒤덮기 시작한 마물의 첫 먹이감이 돼 사라졌으니까. 때문에 시류는 오거의 혼잣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사이 무엇에 이끌리듯 몰려든 놈들은 족히 수백마리는 됐는데 닥치는 대로 사냥에 들어갔다. 탑에서 내려다본 사법 섬이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우리도 슬슬 움직일 때가 왔군. 나도 아래층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어.”
“그래. 원호는 네게 맡기지.”
“문제 없다, 그럼.”
이제야 드디어 뜻이 통하는 대화를 나누게 된 시류의 태도는 극히 사무적이었다. 그리고 역시 차분한 태도로 일관하던 총잡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류가 사라졌다. 반 오거는 사실 워프워프 열매를 먹은 능력자로 무엇이든 순간이동시킬 수 있었다. 이로써 시류를 남은 두 재판소장이 머무는 숙소로 이동시킨 뒤 그 또한 건물 내로 피신해 다시 자리를 잡을 때였다.
“내 밀짚모자 어딨어!!! 밀짚모자 내놔!!”
“우아아악! 도망쳐! 탈옥범이랑 칼잡이 살인마다! 지하 보초병들 전멸한 거 내가 다 봤어!”
“기절 시킨 거야, 기절. 아무도 안 죽였다고!”
“됐으니까 내 밀짚모자 내놔!!!”
사방에서 울리는 비명보다 사법의 탑 아래층이 더 시끄러웠다.
지난날 알라바스타로 가는 길에 몸소 실험해본 바, 마물이 특별한 신체에 반응하는데는 유효한 거리가 있다는 점이었다. 비록 외양은 조금씩 다를지언정 도피는 마물이 최후의 전투에도 있었고 플레반스에도 있었으며 또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차를로스의 열세번째 부인을 쫓던 베르고를 습격한 자리에도 있었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라프텔에서 벌어진 최후의 전투 이후 정식으로 마물이라는 명칭이 붙고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무리와 앞의 세 가지 사건이 조금 다르다는 걸 도피는 눈치챘다. 이 세 가지 사건은 마물들이 군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개중 플레반스 건은 덜떨어진 대장과 오합지졸을 연상케 했다지만 도피는 이 또한 같은 경우에 포함시켰다. 그러다 크로커다일을 미끼로 받은 특별한 마물 신체 덕에 이번에도 좋은 수를 내지 않았나. 움직이는 열차를 이용해 유효 거리를 최대로 늘린다는. 이를 위해 도플라밍고가 열차에서도 만들었던 실 인형, 즉 분신은 일부지만 실실 열매 능력의 모방도 가능했다. 물론 단점도 있었는데 약한 내구성이나 모방 능력의 한계였다. 반대로 이점이라면 실로 만든 인형이기에 물리적 피해가 본체에 전가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역시 실로 연결돼 분신이 보고 들은 모든 상황 파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도피는 분신이 열차에서의 마물 팔도, 저녁식사 자리에서의 대리 역도 모두 훌륭히 완수했음을 알고 있었다. 임무 수행의 완벽함이야 본체 역시 마찬가지였고. 이런 이유로 일을 마치고 돌아온 도피는 악어가 없다는 것에 한번, 그리고 망할 놈의 왕세자비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또 한번 속이 뒤집혔다.
“훗… 후훗… 훗…… 하아…….”
긴 한숨이 흐르고 텅 빈 침대 옆에 선 3미터 장신의 구부정한 등에는 처량함이 치덕치덕했다. 밤이 도래한 창밖으로 마물의 기괴한 울음과 비명이 난무하건만 분홍 깃털코트를 걸친 사내를 감싸는 공기는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계산대로면 악어는 먼저 이곳에 와 있어야 했다. 망할 왕세자비는 세상 모르고 곯아떨어진 채여야 했고.
“눈만 떼면 일을 치는군, 망할 왕세자비께서는.”
짧은 금발머리를 나른하게 쓸어넘기던 도피의 이마에 핏줄이 올라왔다.
“키에엑!”
창밖에는 총포 소리와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듯한 마물의 울음이 뒤섞였다. 그 사이로 남자의 붉은 빛 도는 선글라스 위, 반사된 불빛이 번쩍였다. 침대 옆 창밖을 돌아보니 불바다를 연상케 하는 풍경이 매혹적이다. 도피는 언제나 이와 같은 난장판을 사랑했다. 라프텔에서의 밤낮 없이 괴수를 도륙했던 지난날을. 그럴 때면 베르고는 소년이 저보다 수십배나 큰 괴수를 겁없이 썰어대는 걸 보면서도 도피 걱정에 마음 졸이고는 했다. 일년 중 맑은 날이 없는 라프텔에서는 맨 눈으로 다녀 편하다던 그야말로 냉혈함의 대명사였지만 그런 남자가 도피한테만은 온마음 다해 충성했지 않나. 언제든 소년을 대신해 위험에 뛰어들 준비가 돼있던 남자. 이렇듯 베르고는 가장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날 뛰던 시기의 도피를 지탱해준 존재였다. 그 덕분에 지금의 자신이 있음을 도피는 잊지 않는다.
“그러니 왕세자비를 찾아야 겠지.”
악어라면 실력을 믿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었다. 만일 문제가 있다면 이쪽에 연락할 터. 실로 두 사람은 사법 섬 정도는 커버 가능한 소형 전보벌레를 갖고 있었다. 때문에 도피가 신경쓰는 건 약에 흠뻑 절여진 쪽이었다. 이런 이유로 젊은 왕은 왕세자비가 제 발로 걸어갔을 리 없다 생각했다. 침대 위를 유심히 관찰하던 중 발견한 주사기만 아니었다면. 도피가 손끝에서 실을 뽑아 낚아챈 그것은 볼펜과 흡사한 모양의 내용물이 빈 주사기였다. 그리고 주사기 한쪽에 음각으로 새겨진 제르마 더블식스까지. 이를 확인한 뒤 도피의 손에서 주사기가 맥없이 부러졌다. 바닥으로 떨어지던 조각들 사이, 붉은 피가 섞여들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쾅! 콰광!
“키엑! 켁! 꺽!”
또 한번 창밖에서 들려온 포탄 소리에 지축이 울릴 때, 창문을 뚫고 날아온 마물이 있었다. 이미터도 되지 않는 어린 개체였지만 놈은 그새 잡아먹은 병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피는 한 팔을 뻗어 단숨에 목을 움켜쥐었다.
“이것들은 꼭 제일 엿같을 때 찾아온다니까.”
놈이 벗어나려 발버둥치는데도 젊은 왕은 구둣발로 조각난 주사기를 자근자근 밟아댈 뿐이었다.
의무실을 나온 루피가 제 목에 달린 폭탄 제거보다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밀짚모자 되찾기다. 라프텔로 향하기 전, 루피에게 다시 만나는 날 돌려달라고 했던 밀짚모자의 원주인은 샹크스였다.
샹크스는 손주가 해군에 영 관심없다며, 그러니 네가 나 대신 손주놈을 꼬드겨보라던 가프 중장의 떠밀림에 약 일년간 루피와 주기적인 만남을 가진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이 일년은 곧 샹크스가 심적으로 해군에서 내몰리던 시기였다. 그가 갓난아이였을 때부터 친부나 다름없이 돌봐준 골 D. 로저의 죽음 이후, 기다렸다는 듯 후임으로 나선 건 츠루 중장이었다. 샹크스는 골 D. 로저와 가프, 츠루 이 세 명 사이에 모종의 얘기가 오갔으리라 예상했고. 총명한 붉은머리 소년은 하나를 알려주면 서넛을 깨우쳤으니 때로 츠루는 그런 샹크스를 착잡한 눈으로 보고는 했다. 총명한 소년은 어른들이 말해주지 않는 것들도 혼자 깨닫고는 했으니까. 때문에 그는 로저가 살아생전 제 출신지에 대해 함구했음에도 자연스레 알게 됐다. 공교롭게도 소년이 태어난 해의 3월 말일에만 특이점이 있었으니까.
3월 말일은 본디 늙은 왕의 탄신일이 있었고 그날을 중심으로 일주일간 열리는 행사는 마리조아의 가장 큰 명절이었다. 그런데 소년이 태어난 해의 3월 말, 마리조아를 거쳐간 대형 함선들에 당시 왕세자가 기쁨을 나눈다며 친히 선물을 하사한 것이다. 내용물은 간소한 먹거리와 비단 옷감, 그리고 늙은 왕의 옆얼굴이 새겨진 소정의 보석이었다는데 로저는 이 말을 할 때면 화통하게 웃고는 했다. 자신이 왕세자에게 받은 함 안에는 그런 것과는 비교도 안 될 큼지막한 금덩이가 들어있었다고. 그리고는 금덩이를 놀고먹는 데 다 써버렸다나. 하지만 샹크스는 그 당시 왕세자가 나눠준 나무함이 갓난아이 하나 들어갈 크기였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나무함을 건낸 왕세자가 늙은 왕에게 떠밀려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건 샹크스가 루피를 만나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모자를 너한테 맡기마. 내겐 아주 소중한 모자야. 잘 간직해라. 약속이다, 루피.’
샹크스는 어린 루피에게 밀짚모자를 씌워주며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그때쯤 루피를 구하려다 해왕류에게 내준 한 팔의 상처는 거의 나은 때였다고. 하지만 왼손잡이 검사가 그 팔을 잃었으니 당시 출정하던 모습은 꼭 죽으러 가는 것 같았다고 했다, 루피는. 밀짚모자를 애지중지하는 녀석에 나미를 비롯한 친구들이 궁금해했을 때, 루피는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얼굴로 얘기했었다. 그래서 조로는 밀짚모자부터 찾아야 한다는 루피의 말에 묵묵히 뒤를 따랐다. 로저에게서 샹크스로, 그리고 루피에게로 이어진 계보를 잘 알던 스팬담이 제일 먼저 빼앗은 게 밀짚모자였으니 말이다.
“휴, 겨우 찾았네. 그래도 입에 지퍼 달린 놈이랑 변신 코끼리는 착한 녀석이었어, 조로. 내 모자를 찾게 도와줬잖아. 그치?”
루피는 밀짚모자가 멀쩡하다는 사실에 기분이 매우 좋은 듯했다. 그런 녀석을 따라 사법의 탑 계단을 내려오던 조로 주위는 싸움이 벌어졌던 흔적만 있을 뿐이다. 밀짚모자를 찾으려 건물 내를 들쑤셨던 두 사람이 스팬담의 사무실에서 만난 건 펑크프리드라는 코끼리였다. 녀석은 본디 검이었으나 스팬담이 동물계 악마의 열매인 코끼리코끼리 열매를 먹이며 탄생했다. 덕분에 검과 코끼리 두 가지 모습 변환이 가능하며 자아와 능력도 겸비한 무기였다. 스팬담이 나름 아끼는 반려 코끼리이기도 했고. 그래선지 펑크프리드도 스팬담에게 순종했는데 사무실로 들이닥친 루피에게는 바로 밀짚모자를 상납하고 만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루피와 눈이 마주친 순간 누가 위인지 한눈에 알아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끼눈을 하고 밀짚모자를 부르짖는 루피 앞에 스팬담이 숨겨둔 것을 대령할 때의 코끼리는 부들부들 떨었더랬다. 루피가 모자를 받은 뒤에는 꼬리를 말듯 검으로 변하기도 했는데 이를 보고 신기해하던 조로의 말에 또 한번 겁을 집어먹기도 했다.
‘오, 검으로 변하다니 신기한데? 내가 데려갈까?’
‘빠우ㅡ웅!’
루피의 눈빛에 심장이 얼어붙듯 압도됐다면 그 뒤에 있던 남자는 인상 자체가 야차처럼 사나웠다. 때문에 바로 다시 코끼리화 된 녀석은 식은땀을 흘리며 항의했고 이를 회상한 두 사람이 다시 킬킬거릴 때였다. 아래층에서의 소란을 전부 듣고 있던 오거의 총구는 이미 사법의 탑 정문을 정조준 중이었다. 몰려든 마물은 아직 본섬을 넘지 못했다. 떼로 나타난 마물에 사법 섬 병력 대부분이 본섬으로 몰렸기도 하고. 때문에 비교적 한적한 사법의 탑 내부에서 연거푸 밀짚모자를 외치던 소리는 선명히 울려퍼졌고 오거는 저희 왕의 비밀을 알아버린 놈의 탈주를 방치할 수 없었다. 지금이라면 녀석을 죽일 명분도 있지 않던가. 그래서 오거는 도개교로 향하던 루피의 등에 대고 방아쇠를 당긴 거였다.
탕! 지옥도나 다름없던 본섬의 소란에 총소리가 묻히고 정확히 루피의 머리통을 날릴 총알이 음속으로 쏘아졌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놓는 동작이 끝나기도 전에 상황은 종료됐어야 했다. 놈은 제가 죽는 것도 모르고 머리통이 터져나갔을 테니까.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지상에는 도개교 앞에서 경계하듯 멈춰선 두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오거는 목표에 못 미친 뒤쪽 땅바닥에 껌처럼 눌러붙은 총알을 발견했다.
“누구냐!!!”
조로가 검의 손잡이, 도파에 손을 올리고 루피가 경계 태세를 갖추며 소리쳤다. 이 둘은 조금 전 닥친 위험을 전혀 몰랐음이다. 오거 역시 내심 놀람을 금치 못할 때 흙먼지 자욱한 도개교 너머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초지종은 모두 믿을만 한 정보원에게 들었다. 죄없는 한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리오. 나도 너희들을 도우마. 내 이름은 저격왕!”
흙먼지가 걷히며 드러난 가면 쓴 남자는 사람 키만한 거대 새총을 품에 안고 있었다.
에니에스 로비는 사방에 포탄이 떨어지고 불바다가 만연했다. 그럼에도 머리 위로 수백마리가 우글대는 마물은 수가 줄어들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이 위기의 가장 큰 이유는 지휘관 및 핵심 전력의 부재를 들 수 있었다. 지휘관인 스팬담은 속이 좁고 편협한 자로 시시콜콜한 것까지 제 허가를 거치도록 했으며 핵심 전력인 CP9은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이 전부 본섬 앞 작은 섬의 차량기지에 매몰됐으니 말이다. 에이스에게 대패한 두 명은 움직이지 못할만큼의 큰 부상을 입어 사법의 탑 내 본인 숙소에 있었고 그나마 나은 경우인 재브라마저 이곳에 있었다. 루치가 만일에 대비해 본섬에 남겨둔 블루노까지 데리고서. 그래도 사법의 탑에는 스팬담과 마젤란이 있어 안심했건만 사이렌이 울리고 마물의 습격을 받은 현재 그는 동료의 연락을 받고 인상을 찌푸렸다. 루치는 웨이브진 검은 머리를 하나로 내려묶었는데 거친 움직임에 흐트러진 모양새마저 그림같은 미남이었다. 2미터를 넘는 키에 각진 어깨, 다부진 몸은 조각상을 연상케 했으며 긴 팔다리로 내뻗는 공격의 깔끔함은 행위 예술을 보는 듯했다.
“녀석이 탈옥을?”
루치가 물었다.
“스팬담이 밀짚모자를 어디에 숨겨놨는지 내가 다~ 말해버렸다! 짜바랍!”
“어이, 루치! 갑자기 멈추면 위험하잖나!”
“키엑!”
전보벌레를 통해 동료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뒤에서 튀어나온 카쿠는 우뚝 서버린 루치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마물을 날려버렸다. 공중에서 시원하게 내뻗은 발차기에 삼미터쯤 되는 마물이 벽에 깊숙이 처박힌다. 척 봐도 흉골이 망가져 가슴이 움푹 들어간 놈은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박힌 몸을 빼내려 괴성을 지를 때 근처에 있던 두엇이 놈에게 달려들었다. 이어 고막이 찢어질 듯 끔찍한 괴성과 함께 벽에 박힌 놈은 산 채로 다른 마물에게 뜯어먹혔다. 그중에서도 머리는 더 힘센 놈이 차지했으니 단단한 두개골이 한번에 으깨지는 소리가 유독 선명했다.
“끄…으…어…아악!”
머리, 정확히는 그 안의 것을 전부 게걸스레 먹어치운 녀석의 얼굴이 괴상한 변형을 일으켰다. 턱, 광대, 이마 등이 각기 다른 이의 것으로 변하다 사라지길 반복하더니 여러 사람의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처음 목소리가 트인 양 쥐어짜내는 소리의 향연과 변화는 눈 깜짝할 새 끝나버렸다. 놈은 곧바로 열차 꼬리칸을 둘러싼 무리에 합류했다. 이로써 차량기지에 들어찬 마물은 대략 이십여마리. 하지만 전부 삼미터를 오가는 성체였다. 놈들이 노리는 건 짐칸에 있던 마물 팔인 듯했는데 한발 늦게 이를 깨달은 루치는 블루노의 부재가 아쉬워졌다. 블루노는 사이렌이 울린 직후 재브라, 칼리파와 함께 보낸 참이었다. 그라면 아공간을 통해 다친 동료를 보호할 수 있고 칼리파와 함께 스팬담 경호 및 사법의 탑 사수도 가능할 테니까. 대신 이쪽은 짐칸 안에서 카쿠가, 그리고 밖에서 루치가 방어할 뿐인데도 놈들의 태도가 신중했다. 바꿔 말하면 꼬리칸을 중심으로 둘러싸인 이쪽에서도 쉽게 치고 나가기 어려운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나미를 비롯한 레이주 일행이 막 건물을 빠져나온 자리도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레이주가 머무는 숙소는 재판소 근처라 제일 먼저 공격당했으니까. 그럼에도 강화인간의 전력은 확실했으니 이쪽에 지원을 온 해군 병사들이 오히려 도움 받을 정도였다. 특히 장차 제르마를 이끌 후계자는 독에 특화된 인간으로 이독치독이라, 자신의 몸을 맹독으로 중무장해 마물 독을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터득했다. 물론 이 방법은 레이주 본인만 쓸 수 있었고 말이다. 덕분에 가장 맹렬하게 활약하던 포이즌 핑크는 170 초반의 키에 낭창거리는 외모와 달리 맨손으로 마물을 때려잡고 있었다. 방금도 이미터쯤 되는 마물 하나를 손으로 찢어죽인 뒤 속 시원한 미소를 지으니 얼굴만 보면 쾌녀가 따로없었다. 그래선지 마물은 물론 동생들까지도 물 만난 고기처럼 활개치는 누이의 기세에 움츠러들었다지만 말이다.
“아, 맞아요! 크로커다일 경, 돈키호테 폐하는요? 설마 아직도 저 안에 있는 건……!”
욘디가 레이주에게 정신이 팔린 틈에 뒤로 빠지려 한 이를 붙잡은 건 비비였다. 이층짜리 건물은 한참 전에 무너졌건만 젊은 왕을 걱정한 건 비비가 처음이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폭삭 내려앉은 건물을 보던 그녀는 금방이라도 젊은 왕을 찾으려 뛰어들려 했다. 때문에 크로커다일은 비비의 팔을 붙잡았고 이는 간발의 차였다.
“우리 왕은 죽여도 살아날 인간이니 쓸데없는 짓은 마라.”
“하지만 마물한테 목이 뜯겼잖아요! 그런 중상을 입고 혼자 빠져나왔을 리 없어요! 아직 늦지 않았다고요! 지금이라도 저 안을 뒤져보면 살아있을지 몰라요!”
흙먼지를 뒤집어쓴 공주의 외침은 필사적이었다. 잡힌 팔을 풀려 애쓰던 공주의 두 눈에는 진정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담겼음이다. 그 사이에도 건물 위로 떼지어 내려앉은 놈들은 호시탐탐 지상 위 먹이감을 노리고 있었다. 비비는 수많은 눈이 저를 노림에도 아랑곳 않고 다른 이를 구하고자 진심을 다했다. 덕분에 이목이 집중됐으니 크로커다일의 뒤로 묵직한 바람이 일었다. 총알처럼 몸을 날린 욘디에 건물 잔해가 돌무더기처럼 흩어졌다. 그 결과 엄청난 흙먼지가 일고 시야가 가로막히니 주변 건물에서 내려다보던 마물들이 일제히 날아들었다. 레이주의 기세에 눌려 접근치 못하던 어린 개체들이 틈을 노린 거였다.
“키에엑!”
하지만 기세 좋게 울려퍼진 괴성은 먼지가 가라앉은 뒤 처참한 광경으로 바뀌었다. 끽해야 이미터 남짓의 어린 놈들이었다. 떼로 덤벼도 단순 강화인간이 아닌 제르마의 과학력이 총망라된 빈스모크들을 이길 수는 없다는 소리다. 그렇다고 보다 약한 상대를 고른다 한들 말처럼 쉽겠는가. 놈들에게는 손쉬운 먹이감일 나미, 비비조차 빈스모크들이 있는 한 절대 손대선 안 되는 성역이었다. 상디가 있는 한 특히 더.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요리사.”
“아니, 당신이 왜?! 난 비비를 구할 생각이었는데!”
흙먼지가 완전히 가라앉은 뒤 보인 현장은 나미를 공격하려던 마물을 로빈과 레이주가 처리했고 비비는 어느새 건물 잔해 가운데 있던 욘디에게 가 있었다. 그 중간에서 아직 숨이 붙어 날뛰는 마물의 목덜미를 발로 눌러 부러트린 상디는 사실 비비의 새삼 반했다는 발그레한 얼굴을 예상했음이었다.
“고마워, 로빈. 나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별말씀을.”
뒤쪽에서 들려오는 나미와 로빈의 아름다운 대화처럼 말이다. 이어 나미가 레이주에게도 잊지 않고 감사를 전할 때 이치디와 니디는 다시금 주위를 에워싸는 마물을 잡으러 나섰다. 어쩌다보니 남자를 구한 상디나 구해짐 당한 크로커다일은 떨떠름한 얼굴로 걸음을 옮길 따름이었다. 지금으로서는 건물 잔해를 파해치는 두 사람을 말려야 했으니까. 크로커다일은 유심히 이쪽을 지켜보는 나미가 신경쓰였다. 그 시선은 단순한 호기심 이상이었으니까. 경험상 이런 예감은 좋지 못한 쪽임을 크로커다일은 알고 있었다.
“비비, 너는 이제 그만 몸을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뭐? 아니야, 나미. 너희들만 두고 갈 수는 없…! 근데 우리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거야?”
“걱정할 거 없어. 크로커다일 경이라면 이해해줄 거야. 굳이 우리 진실을 파헤치지도 않을 거고. 그렇죠? 크로커다일 경.”
나미가 뛰어서 앞으로 나긴 건 욘디가 잔해더미에서 크로커다일의 코트자락을 발견했을 때였다. 이때 로빈을 포함해 레이주와 다른 형제들은 주변 마물을 처리 중이었다. 상디는 비비를 보호하듯 곁에 있었는데 욘디는 크로커다일에게 멋져보이기 위해 나름 열심히였다. 이곳의 모두는 쓰러진 젊은 왕을 크로커다일이 코트로 감쌌던 걸 기억했고 말이다. 그에 욘디가 박차를 가하던 순간 살며시 다가와 다정한 말로 일을 중단시킨 건 나미였다.
‘역시 이 여자, 눈치챘군.’
크로커다일은 공주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며 돌아보던 이의 눈웃음이 교활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는 진한 씁쓸함을 삼키며 답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을 뒤덮은 마물에 달도 뜨지 않는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한조각
“좀비 달팽이 같군. 이 또한 운명인가.”
“뭐?”
‘온다’는 반 오거의 말에 사법의 탑 망루에서 정면을 응시했던 시류의 눈에도 먼 바다 위로 매연같은 구름이 점처럼 보일 때였다. 반 오거의 혼잣말이 들려온 것은. 옆에서 포좌에 총을 올리고 앉아쏴 자세를 유지했던 반 오거의 조준경은 아래를 향해 있었다. 또한 그는 숙명론자로 운명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으며 이럴 때 시류는 대개 무시하는 쪽이었다. 그리고 반 오거는 조준경을 통해 신임 재판소장이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을 본 뒤였다. 신임 재판소장의 숙소는 본섬을 가로지르는 큰길에 위치했다. 커튼이 나부끼는 창문을 통해 보인 이층 침실에서 남자는 안대도 벗지 않은 채 좀비처럼 움직였다. 어그적대는 모양새가 마치 줄에 매달린 인형과 같았으니. 그사이 하늘 위 검은 점은 확연한 모양새가 보일만큼 가까워졌으니 떼구름처럼 몰려든 놈들에 본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쿵!
전방에서 한차례 터진 포탄에 지축이 진동하니 이를 시작으로 경계령을 발동하는 사이렌이 울려퍼졌다. 놈들의 규모는 본섬을 덮어씌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에 이런 대규모 움직임을 저희가 모를 리 없다 생각한 시류는 드물게 당황한 얼굴이었고. 하지만 반 오거는 이런 순간에도 한 지점에 몰두할 따름이었다. 안대를 쓴 잠옷 차림의 남자는 큰길 한가운데서 두 팔을 들고 어깨춤을 덩실대는 중이었다. 안대 밑으로 드러난 얼굴이 겁에 질려 고래고래 소리치듯하던 모양새는 인형극을 보는 듯했고.
“죽음의 춤사위로군. 마치 기생충에 감염된 달팽이가 잡아먹히기 위해 높은 곳에 오르는 것 같아.”
“…….”
임명식을 앞둔 남자가 큰길에서 덩실댄 건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그는 서서히 본섬 상공을 뒤덮기 시작한 마물의 첫 먹이감이 돼 사라졌으니까. 때문에 시류는 오거의 혼잣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사이 무엇에 이끌리듯 몰려든 놈들은 족히 수백마리는 됐는데 닥치는 대로 사냥에 들어갔다. 탑에서 내려다본 사법 섬이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우리도 슬슬 움직일 때가 왔군. 나도 아래층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어.”
“그래. 원호는 네게 맡기지.”
“문제 없다, 그럼.”
이제야 드디어 뜻이 통하는 대화를 나누게 된 시류의 태도는 극히 사무적이었다. 그리고 역시 차분한 태도로 일관하던 총잡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류가 사라졌다. 반 오거는 사실 워프워프 열매를 먹은 능력자로 무엇이든 순간이동시킬 수 있었다. 이로써 시류를 남은 두 재판소장이 머무는 숙소로 이동시킨 뒤 그 또한 건물 내로 피신해 다시 자리를 잡을 때였다.
“내 밀짚모자 어딨어!!! 밀짚모자 내놔!!”
“우아아악! 도망쳐! 탈옥범이랑 칼잡이 살인마다! 지하 보초병들 전멸한 거 내가 다 봤어!”
“기절 시킨 거야, 기절. 아무도 안 죽였다고!”
“됐으니까 내 밀짚모자 내놔!!!”
사방에서 울리는 비명보다 사법의 탑 아래층이 더 시끄러웠다.
지난날 알라바스타로 가는 길에 몸소 실험해본 바, 마물이 특별한 신체에 반응하는데는 유효한 거리가 있다는 점이었다. 비록 외양은 조금씩 다를지언정 도피는 마물이 최후의 전투에도 있었고 플레반스에도 있었으며 또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차를로스의 열세번째 부인을 쫓던 베르고를 습격한 자리에도 있었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라프텔에서 벌어진 최후의 전투 이후 정식으로 마물이라는 명칭이 붙고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무리와 앞의 세 가지 사건이 조금 다르다는 걸 도피는 눈치챘다. 이 세 가지 사건은 마물들이 군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개중 플레반스 건은 덜떨어진 대장과 오합지졸을 연상케 했다지만 도피는 이 또한 같은 경우에 포함시켰다. 그러다 크로커다일을 미끼로 받은 특별한 마물 신체 덕에 이번에도 좋은 수를 내지 않았나. 움직이는 열차를 이용해 유효 거리를 최대로 늘린다는. 이를 위해 도플라밍고가 열차에서도 만들었던 실 인형, 즉 분신은 일부지만 실실 열매 능력의 모방도 가능했다. 물론 단점도 있었는데 약한 내구성이나 모방 능력의 한계였다. 반대로 이점이라면 실로 만든 인형이기에 물리적 피해가 본체에 전가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역시 실로 연결돼 분신이 보고 들은 모든 상황 파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도피는 분신이 열차에서의 마물 팔도, 저녁식사 자리에서의 대리 역도 모두 훌륭히 완수했음을 알고 있었다. 임무 수행의 완벽함이야 본체 역시 마찬가지였고. 이런 이유로 일을 마치고 돌아온 도피는 악어가 없다는 것에 한번, 그리고 망할 놈의 왕세자비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또 한번 속이 뒤집혔다.
“훗… 후훗… 훗…… 하아…….”
긴 한숨이 흐르고 텅 빈 침대 옆에 선 3미터 장신의 구부정한 등에는 처량함이 치덕치덕했다. 밤이 도래한 창밖으로 마물의 기괴한 울음과 비명이 난무하건만 분홍 깃털코트를 걸친 사내를 감싸는 공기는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계산대로면 악어는 먼저 이곳에 와 있어야 했다. 망할 왕세자비는 세상 모르고 곯아떨어진 채여야 했고.
“눈만 떼면 일을 치는군, 망할 왕세자비께서는.”
짧은 금발머리를 나른하게 쓸어넘기던 도피의 이마에 핏줄이 올라왔다.
“키에엑!”
창밖에는 총포 소리와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듯한 마물의 울음이 뒤섞였다. 그 사이로 남자의 붉은 빛 도는 선글라스 위, 반사된 불빛이 번쩍였다. 침대 옆 창밖을 돌아보니 불바다를 연상케 하는 풍경이 매혹적이다. 도피는 언제나 이와 같은 난장판을 사랑했다. 라프텔에서의 밤낮 없이 괴수를 도륙했던 지난날을. 그럴 때면 베르고는 소년이 저보다 수십배나 큰 괴수를 겁없이 썰어대는 걸 보면서도 도피 걱정에 마음 졸이고는 했다. 일년 중 맑은 날이 없는 라프텔에서는 맨 눈으로 다녀 편하다던 그야말로 냉혈함의 대명사였지만 그런 남자가 도피한테만은 온마음 다해 충성했지 않나. 언제든 소년을 대신해 위험에 뛰어들 준비가 돼있던 남자. 이렇듯 베르고는 가장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날 뛰던 시기의 도피를 지탱해준 존재였다. 그 덕분에 지금의 자신이 있음을 도피는 잊지 않는다.
“그러니 왕세자비를 찾아야 겠지.”
악어라면 실력을 믿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었다. 만일 문제가 있다면 이쪽에 연락할 터. 실로 두 사람은 사법 섬 정도는 커버 가능한 소형 전보벌레를 갖고 있었다. 때문에 도피가 신경쓰는 건 약에 흠뻑 절여진 쪽이었다. 이런 이유로 젊은 왕은 왕세자비가 제 발로 걸어갔을 리 없다 생각했다. 침대 위를 유심히 관찰하던 중 발견한 주사기만 아니었다면. 도피가 손끝에서 실을 뽑아 낚아챈 그것은 볼펜과 흡사한 모양의 내용물이 빈 주사기였다. 그리고 주사기 한쪽에 음각으로 새겨진 제르마 더블식스까지. 이를 확인한 뒤 도피의 손에서 주사기가 맥없이 부러졌다. 바닥으로 떨어지던 조각들 사이, 붉은 피가 섞여들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쾅! 콰광!
“키엑! 켁! 꺽!”
또 한번 창밖에서 들려온 포탄 소리에 지축이 울릴 때, 창문을 뚫고 날아온 마물이 있었다. 이미터도 되지 않는 어린 개체였지만 놈은 그새 잡아먹은 병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피는 한 팔을 뻗어 단숨에 목을 움켜쥐었다.
“이것들은 꼭 제일 엿같을 때 찾아온다니까.”
놈이 벗어나려 발버둥치는데도 젊은 왕은 구둣발로 조각난 주사기를 자근자근 밟아댈 뿐이었다.
의무실을 나온 루피가 제 목에 달린 폭탄 제거보다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밀짚모자 되찾기다. 라프텔로 향하기 전, 루피에게 다시 만나는 날 돌려달라고 했던 밀짚모자의 원주인은 샹크스였다.
샹크스는 손주가 해군에 영 관심없다며, 그러니 네가 나 대신 손주놈을 꼬드겨보라던 가프 중장의 떠밀림에 약 일년간 루피와 주기적인 만남을 가진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이 일년은 곧 샹크스가 심적으로 해군에서 내몰리던 시기였다. 그가 갓난아이였을 때부터 친부나 다름없이 돌봐준 골 D. 로저의 죽음 이후, 기다렸다는 듯 후임으로 나선 건 츠루 중장이었다. 샹크스는 골 D. 로저와 가프, 츠루 이 세 명 사이에 모종의 얘기가 오갔으리라 예상했고. 총명한 붉은머리 소년은 하나를 알려주면 서넛을 깨우쳤으니 때로 츠루는 그런 샹크스를 착잡한 눈으로 보고는 했다. 총명한 소년은 어른들이 말해주지 않는 것들도 혼자 깨닫고는 했으니까. 때문에 그는 로저가 살아생전 제 출신지에 대해 함구했음에도 자연스레 알게 됐다. 공교롭게도 소년이 태어난 해의 3월 말일에만 특이점이 있었으니까.
3월 말일은 본디 늙은 왕의 탄신일이 있었고 그날을 중심으로 일주일간 열리는 행사는 마리조아의 가장 큰 명절이었다. 그런데 소년이 태어난 해의 3월 말, 마리조아를 거쳐간 대형 함선들에 당시 왕세자가 기쁨을 나눈다며 친히 선물을 하사한 것이다. 내용물은 간소한 먹거리와 비단 옷감, 그리고 늙은 왕의 옆얼굴이 새겨진 소정의 보석이었다는데 로저는 이 말을 할 때면 화통하게 웃고는 했다. 자신이 왕세자에게 받은 함 안에는 그런 것과는 비교도 안 될 큼지막한 금덩이가 들어있었다고. 그리고는 금덩이를 놀고먹는 데 다 써버렸다나. 하지만 샹크스는 그 당시 왕세자가 나눠준 나무함이 갓난아이 하나 들어갈 크기였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나무함을 건낸 왕세자가 늙은 왕에게 떠밀려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건 샹크스가 루피를 만나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모자를 너한테 맡기마. 내겐 아주 소중한 모자야. 잘 간직해라. 약속이다, 루피.’
샹크스는 어린 루피에게 밀짚모자를 씌워주며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그때쯤 루피를 구하려다 해왕류에게 내준 한 팔의 상처는 거의 나은 때였다고. 하지만 왼손잡이 검사가 그 팔을 잃었으니 당시 출정하던 모습은 꼭 죽으러 가는 것 같았다고 했다, 루피는. 밀짚모자를 애지중지하는 녀석에 나미를 비롯한 친구들이 궁금해했을 때, 루피는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얼굴로 얘기했었다. 그래서 조로는 밀짚모자부터 찾아야 한다는 루피의 말에 묵묵히 뒤를 따랐다. 로저에게서 샹크스로, 그리고 루피에게로 이어진 계보를 잘 알던 스팬담이 제일 먼저 빼앗은 게 밀짚모자였으니 말이다.
“휴, 겨우 찾았네. 그래도 입에 지퍼 달린 놈이랑 변신 코끼리는 착한 녀석이었어, 조로. 내 모자를 찾게 도와줬잖아. 그치?”
루피는 밀짚모자가 멀쩡하다는 사실에 기분이 매우 좋은 듯했다. 그런 녀석을 따라 사법의 탑 계단을 내려오던 조로 주위는 싸움이 벌어졌던 흔적만 있을 뿐이다. 밀짚모자를 찾으려 건물 내를 들쑤셨던 두 사람이 스팬담의 사무실에서 만난 건 펑크프리드라는 코끼리였다. 녀석은 본디 검이었으나 스팬담이 동물계 악마의 열매인 코끼리코끼리 열매를 먹이며 탄생했다. 덕분에 검과 코끼리 두 가지 모습 변환이 가능하며 자아와 능력도 겸비한 무기였다. 스팬담이 나름 아끼는 반려 코끼리이기도 했고. 그래선지 펑크프리드도 스팬담에게 순종했는데 사무실로 들이닥친 루피에게는 바로 밀짚모자를 상납하고 만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루피와 눈이 마주친 순간 누가 위인지 한눈에 알아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끼눈을 하고 밀짚모자를 부르짖는 루피 앞에 스팬담이 숨겨둔 것을 대령할 때의 코끼리는 부들부들 떨었더랬다. 루피가 모자를 받은 뒤에는 꼬리를 말듯 검으로 변하기도 했는데 이를 보고 신기해하던 조로의 말에 또 한번 겁을 집어먹기도 했다.
‘오, 검으로 변하다니 신기한데? 내가 데려갈까?’
‘빠우ㅡ웅!’
루피의 눈빛에 심장이 얼어붙듯 압도됐다면 그 뒤에 있던 남자는 인상 자체가 야차처럼 사나웠다. 때문에 바로 다시 코끼리화 된 녀석은 식은땀을 흘리며 항의했고 이를 회상한 두 사람이 다시 킬킬거릴 때였다. 아래층에서의 소란을 전부 듣고 있던 오거의 총구는 이미 사법의 탑 정문을 정조준 중이었다. 몰려든 마물은 아직 본섬을 넘지 못했다. 떼로 나타난 마물에 사법 섬 병력 대부분이 본섬으로 몰렸기도 하고. 때문에 비교적 한적한 사법의 탑 내부에서 연거푸 밀짚모자를 외치던 소리는 선명히 울려퍼졌고 오거는 저희 왕의 비밀을 알아버린 놈의 탈주를 방치할 수 없었다. 지금이라면 녀석을 죽일 명분도 있지 않던가. 그래서 오거는 도개교로 향하던 루피의 등에 대고 방아쇠를 당긴 거였다.
탕! 지옥도나 다름없던 본섬의 소란에 총소리가 묻히고 정확히 루피의 머리통을 날릴 총알이 음속으로 쏘아졌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놓는 동작이 끝나기도 전에 상황은 종료됐어야 했다. 놈은 제가 죽는 것도 모르고 머리통이 터져나갔을 테니까.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지상에는 도개교 앞에서 경계하듯 멈춰선 두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오거는 목표에 못 미친 뒤쪽 땅바닥에 껌처럼 눌러붙은 총알을 발견했다.
“누구냐!!!”
조로가 검의 손잡이, 도파에 손을 올리고 루피가 경계 태세를 갖추며 소리쳤다. 이 둘은 조금 전 닥친 위험을 전혀 몰랐음이다. 오거 역시 내심 놀람을 금치 못할 때 흙먼지 자욱한 도개교 너머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초지종은 모두 믿을만 한 정보원에게 들었다. 죄없는 한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리오. 나도 너희들을 도우마. 내 이름은 저격왕!”
흙먼지가 걷히며 드러난 가면 쓴 남자는 사람 키만한 거대 새총을 품에 안고 있었다.
에니에스 로비는 사방에 포탄이 떨어지고 불바다가 만연했다. 그럼에도 머리 위로 수백마리가 우글대는 마물은 수가 줄어들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이 위기의 가장 큰 이유는 지휘관 및 핵심 전력의 부재를 들 수 있었다. 지휘관인 스팬담은 속이 좁고 편협한 자로 시시콜콜한 것까지 제 허가를 거치도록 했으며 핵심 전력인 CP9은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이 전부 본섬 앞 작은 섬의 차량기지에 매몰됐으니 말이다. 에이스에게 대패한 두 명은 움직이지 못할만큼의 큰 부상을 입어 사법의 탑 내 본인 숙소에 있었고 그나마 나은 경우인 재브라마저 이곳에 있었다. 루치가 만일에 대비해 본섬에 남겨둔 블루노까지 데리고서. 그래도 사법의 탑에는 스팬담과 마젤란이 있어 안심했건만 사이렌이 울리고 마물의 습격을 받은 현재 그는 동료의 연락을 받고 인상을 찌푸렸다. 루치는 웨이브진 검은 머리를 하나로 내려묶었는데 거친 움직임에 흐트러진 모양새마저 그림같은 미남이었다. 2미터를 넘는 키에 각진 어깨, 다부진 몸은 조각상을 연상케 했으며 긴 팔다리로 내뻗는 공격의 깔끔함은 행위 예술을 보는 듯했다.
“녀석이 탈옥을?”
루치가 물었다.
“스팬담이 밀짚모자를 어디에 숨겨놨는지 내가 다~ 말해버렸다! 짜바랍!”
“어이, 루치! 갑자기 멈추면 위험하잖나!”
“키엑!”
전보벌레를 통해 동료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뒤에서 튀어나온 카쿠는 우뚝 서버린 루치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마물을 날려버렸다. 공중에서 시원하게 내뻗은 발차기에 삼미터쯤 되는 마물이 벽에 깊숙이 처박힌다. 척 봐도 흉골이 망가져 가슴이 움푹 들어간 놈은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박힌 몸을 빼내려 괴성을 지를 때 근처에 있던 두엇이 놈에게 달려들었다. 이어 고막이 찢어질 듯 끔찍한 괴성과 함께 벽에 박힌 놈은 산 채로 다른 마물에게 뜯어먹혔다. 그중에서도 머리는 더 힘센 놈이 차지했으니 단단한 두개골이 한번에 으깨지는 소리가 유독 선명했다.
“끄…으…어…아악!”
머리, 정확히는 그 안의 것을 전부 게걸스레 먹어치운 녀석의 얼굴이 괴상한 변형을 일으켰다. 턱, 광대, 이마 등이 각기 다른 이의 것으로 변하다 사라지길 반복하더니 여러 사람의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처음 목소리가 트인 양 쥐어짜내는 소리의 향연과 변화는 눈 깜짝할 새 끝나버렸다. 놈은 곧바로 열차 꼬리칸을 둘러싼 무리에 합류했다. 이로써 차량기지에 들어찬 마물은 대략 이십여마리. 하지만 전부 삼미터를 오가는 성체였다. 놈들이 노리는 건 짐칸에 있던 마물 팔인 듯했는데 한발 늦게 이를 깨달은 루치는 블루노의 부재가 아쉬워졌다. 블루노는 사이렌이 울린 직후 재브라, 칼리파와 함께 보낸 참이었다. 그라면 아공간을 통해 다친 동료를 보호할 수 있고 칼리파와 함께 스팬담 경호 및 사법의 탑 사수도 가능할 테니까. 대신 이쪽은 짐칸 안에서 카쿠가, 그리고 밖에서 루치가 방어할 뿐인데도 놈들의 태도가 신중했다. 바꿔 말하면 꼬리칸을 중심으로 둘러싸인 이쪽에서도 쉽게 치고 나가기 어려운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나미를 비롯한 레이주 일행이 막 건물을 빠져나온 자리도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레이주가 머무는 숙소는 재판소 근처라 제일 먼저 공격당했으니까. 그럼에도 강화인간의 전력은 확실했으니 이쪽에 지원을 온 해군 병사들이 오히려 도움 받을 정도였다. 특히 장차 제르마를 이끌 후계자는 독에 특화된 인간으로 이독치독이라, 자신의 몸을 맹독으로 중무장해 마물 독을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터득했다. 물론 이 방법은 레이주 본인만 쓸 수 있었고 말이다. 덕분에 가장 맹렬하게 활약하던 포이즌 핑크는 170 초반의 키에 낭창거리는 외모와 달리 맨손으로 마물을 때려잡고 있었다. 방금도 이미터쯤 되는 마물 하나를 손으로 찢어죽인 뒤 속 시원한 미소를 지으니 얼굴만 보면 쾌녀가 따로없었다. 그래선지 마물은 물론 동생들까지도 물 만난 고기처럼 활개치는 누이의 기세에 움츠러들었다지만 말이다.
“아, 맞아요! 크로커다일 경, 돈키호테 폐하는요? 설마 아직도 저 안에 있는 건……!”
욘디가 레이주에게 정신이 팔린 틈에 뒤로 빠지려 한 이를 붙잡은 건 비비였다. 이층짜리 건물은 한참 전에 무너졌건만 젊은 왕을 걱정한 건 비비가 처음이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폭삭 내려앉은 건물을 보던 그녀는 금방이라도 젊은 왕을 찾으려 뛰어들려 했다. 때문에 크로커다일은 비비의 팔을 붙잡았고 이는 간발의 차였다.
“우리 왕은 죽여도 살아날 인간이니 쓸데없는 짓은 마라.”
“하지만 마물한테 목이 뜯겼잖아요! 그런 중상을 입고 혼자 빠져나왔을 리 없어요! 아직 늦지 않았다고요! 지금이라도 저 안을 뒤져보면 살아있을지 몰라요!”
흙먼지를 뒤집어쓴 공주의 외침은 필사적이었다. 잡힌 팔을 풀려 애쓰던 공주의 두 눈에는 진정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담겼음이다. 그 사이에도 건물 위로 떼지어 내려앉은 놈들은 호시탐탐 지상 위 먹이감을 노리고 있었다. 비비는 수많은 눈이 저를 노림에도 아랑곳 않고 다른 이를 구하고자 진심을 다했다. 덕분에 이목이 집중됐으니 크로커다일의 뒤로 묵직한 바람이 일었다. 총알처럼 몸을 날린 욘디에 건물 잔해가 돌무더기처럼 흩어졌다. 그 결과 엄청난 흙먼지가 일고 시야가 가로막히니 주변 건물에서 내려다보던 마물들이 일제히 날아들었다. 레이주의 기세에 눌려 접근치 못하던 어린 개체들이 틈을 노린 거였다.
“키에엑!”
하지만 기세 좋게 울려퍼진 괴성은 먼지가 가라앉은 뒤 처참한 광경으로 바뀌었다. 끽해야 이미터 남짓의 어린 놈들이었다. 떼로 덤벼도 단순 강화인간이 아닌 제르마의 과학력이 총망라된 빈스모크들을 이길 수는 없다는 소리다. 그렇다고 보다 약한 상대를 고른다 한들 말처럼 쉽겠는가. 놈들에게는 손쉬운 먹이감일 나미, 비비조차 빈스모크들이 있는 한 절대 손대선 안 되는 성역이었다. 상디가 있는 한 특히 더.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요리사.”
“아니, 당신이 왜?! 난 비비를 구할 생각이었는데!”
흙먼지가 완전히 가라앉은 뒤 보인 현장은 나미를 공격하려던 마물을 로빈과 레이주가 처리했고 비비는 어느새 건물 잔해 가운데 있던 욘디에게 가 있었다. 그 중간에서 아직 숨이 붙어 날뛰는 마물의 목덜미를 발로 눌러 부러트린 상디는 사실 비비의 새삼 반했다는 발그레한 얼굴을 예상했음이었다.
“고마워, 로빈. 나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별말씀을.”
뒤쪽에서 들려오는 나미와 로빈의 아름다운 대화처럼 말이다. 이어 나미가 레이주에게도 잊지 않고 감사를 전할 때 이치디와 니디는 다시금 주위를 에워싸는 마물을 잡으러 나섰다. 어쩌다보니 남자를 구한 상디나 구해짐 당한 크로커다일은 떨떠름한 얼굴로 걸음을 옮길 따름이었다. 지금으로서는 건물 잔해를 파해치는 두 사람을 말려야 했으니까. 크로커다일은 유심히 이쪽을 지켜보는 나미가 신경쓰였다. 그 시선은 단순한 호기심 이상이었으니까. 경험상 이런 예감은 좋지 못한 쪽임을 크로커다일은 알고 있었다.
“비비, 너는 이제 그만 몸을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뭐? 아니야, 나미. 너희들만 두고 갈 수는 없…! 근데 우리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거야?”
“걱정할 거 없어. 크로커다일 경이라면 이해해줄 거야. 굳이 우리 진실을 파헤치지도 않을 거고. 그렇죠? 크로커다일 경.”
나미가 뛰어서 앞으로 나긴 건 욘디가 잔해더미에서 크로커다일의 코트자락을 발견했을 때였다. 이때 로빈을 포함해 레이주와 다른 형제들은 주변 마물을 처리 중이었다. 상디는 비비를 보호하듯 곁에 있었는데 욘디는 크로커다일에게 멋져보이기 위해 나름 열심히였다. 이곳의 모두는 쓰러진 젊은 왕을 크로커다일이 코트로 감쌌던 걸 기억했고 말이다. 그에 욘디가 박차를 가하던 순간 살며시 다가와 다정한 말로 일을 중단시킨 건 나미였다.
‘역시 이 여자, 눈치챘군.’
크로커다일은 공주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며 돌아보던 이의 눈웃음이 교활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는 진한 씁쓸함을 삼키며 답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을 뒤덮은 마물에 달도 뜨지 않는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한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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