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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5 06:27
리스가 뇌종양 수술 받은 이후 기억 잃은거 보고싶다 ㅅㅈㅈㅇ
터미널리스트 ㅅㅍㅈㅇ, 긴글ㅈㅇ
1.
신화 속 영웅이 탔었다는 배의 낡고 썩은 판자를 모두 교체해 버린 뒤에는, 그 배가 처음의 그 배와 같다고 할 수 있는가? 벼락에 맞아 죽은 인간과 동일한 기억을 공유하며 원자 단위의 구성까지 모두 똑같은 인간이 늪에서 솟아나온다면, 그 인간은 앞서 죽은 이와 동일인물인가?
제임스 리스의 대학 시절 전공은 철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이 유명한 논제들에 대해서 지나가듯 들어본 바는 있었다. 어쩌면 잠들지 못하는 밤에 자장가 대신 틀어 놓았던 유튜브 자동 재생 목록에 은밀하게 섞여 있던 TED 영상 중 하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고백컨대, 여태까지의 리스는 그것을 그저 '흥미롭지만 누군가와 저녁식사를 하며 언급하기에는 조금 부적절한 화제' 정도로만 여겨 왔었다. 다른 사람과의 평화로운 저녁식사 자리에서 뒤탈 없이 무난하게 꺼낼 만한 이야깃거리란 결국 날씨와 정원 가꾸기, 반려동물, 혹은 새롭게 시작한 취미 생활과 같은 것들이기 마련이므로.
그러나 이 순간, 거울 속에 비치는 쉐이빙 크림이 아직 덕지덕지 묻어 있는 자신의 지친 얼굴을 면도칼을 든 채 냉담하게 들여다보면서 현재의 리스는 같잖게도 아마추어 철학자 흉내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용케 면도하는 방법은 잊지 않았으나 지난 몇 년 간의 기억을 거의 대부분 잃어버린 지금의 제임스 리스는, 과연 아직도 그 ‘제임스 리스’인가?
이대로 수염을 어중간하게 깎은 채 외출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관성적인 손놀림으로 마저 면도를 이어가며 리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관조하듯 정리했다. 실패한 실험, 끔찍한 폭발 사고, 완전히 망쳐 버린 임무, 돌이킬 수 없어진 죽음들과 이미 끝나 버린 복수들, 장시간의 수술, 재활, 그리고…
시퍼렇게 빛나는 면도날이 젖은 살갗 표면을 아슬하게 긁는 오싹한 소리가 그의 잡념을 잘라냈다. 리스는 가볍게 혀를 차면서 제 턱을 손끝으로 한 번 쓸었으나 걱정했던 새빨간 색은 비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살갗까지 잘라내진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날붙이를 손에 든 상태로 딴 생각을 하다니, 이전의 ‘제임스 리스’라면 결코 하지 않을 행동이다. 어딘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긴 한 것이 분명했다. 리스는 이제는 습관이 되어 버린 긴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면도칼을 든 오른손을 움직였다.
난생 처음 면도를 해 보는 십대마냥 굼뜬 속도로 몸단장을 마친 리스는, 아직 물기가 남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으며 욕실 문 밖을 나서다 말고 멈칫했다. 지난 몇 달 동안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지냈으면서도 통 익숙해지지 못한 남자가 욕실 근처에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물론 고작 단 두 명이 사는 이 집에서 그가 ‘기다리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보스.”
남자의 거대한 몸에 걸치고 있는 볼캡과 작업용 점퍼는 깔끔하게 관리된 것으로 보이긴 했지만, 옷감 여기저기가 자잘하게 헤지고 볕에 바랜 탓에 어쩔 수 없이 오랫동안 입은 티가 났다. 자세는 평균보다 키가 큰 이들이 으레 그러듯 살짝 구부정했으나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몇 블록 떨어진 장소에서 처음 마주친 사람도 잘 훈련된 군인 출신임을 금방 알아볼 수가 있을 것 같은 차림새와 몸짓이었다.
크리스 카일. 리스는 조금 전까지 제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던 원흉의 이름을 속으로 웅얼거리며, 이유 모를 언짢음과 불편함을 담아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가 여태껏 살면서 봐 온 홍채의 색깔 중 가장 흠 없이 밝고 또렷한 파란색이 거기에 있었다. 지나치게 맑아 바닥까지 비치는 연못이 보는 이에게 영문 모를 꺼림칙함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비슷하게, 그 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행위는 마음 어딘가를 켕기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 리스의 시선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는 몰라도, 카일의 눈썹이 난감하게 누그러졌다.
“…또 거기서 주무시기라도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 말에 이전보다 훨씬 짧아진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벅벅 문질러 닦던 리스의 손길이 조금 느려졌다. 과거의 나는 한심하게 욕실에서 씻다 말고 잠든 적이 있나 보군. 리스는 좁아터진 욕조 안에 알몸으로 늘어져 있을 제 모습을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듣듯이 떠올리며 다시금 혀를 찼다가, 이미 닦은 얼굴을 괜히 젖은 수건으로 한 번 더 훔쳤다.
“잠들었던 건 아니야.”
리스는 불편한 기색을 최대한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이제 와서 욕조 물에 빠지거나 하진 않으니까.”
“그런 걸 걱정했던 건 아니지만…”
카일은 여전히 미덥지 못하다는 표정이었으나 더 이상 이 화제를 이어갈 생각은 없는 듯 했다. 대신 손목에 찬 시계를 흘끗 들여다보더니 표정을 다시 침착하게 가다듬었다.
“병원에 제 시간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리스 또한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작은 시계를 확인했다. 그 말대로, 이동 시간을 생각하면 여기서 더 이상 시시덕거릴 수가 없었다.
“알았어. 나도 곧 준비해서 나갈게.”
“예.”
카일은 고개를 가볍게 주억거리나 싶더니,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쓰고 있는 모자의 챙을 잠시 만지작거렸다. 조금 멋쩍고 쑥스러워 보이는 태도였다.
“보스 짐은 제가 다 챙겨 놨으니, 그냥 옷만 입고 나오시면 됩니다.”
그 투박한 호의에 자신이 감사 인사를 하기도 전에, 미련 없이 돌아서서 성큼성큼 차고로 향하는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면서 리스는 문득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이런 걱정을 받아본 게 대체 언제였지? 곧이어 리스는 제가 아는 ‘마지막 기억’과 실제 ‘마지막’이 다를 것이라는 씁쓸한 사실을 자각하곤 메마른 입안에 큼직한 암염 조각을 쑤셔넣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착잡한 심정을 새삼스럽게 곱씹으며 젖은 수건을 근처의 빨래바구니에 내던져 둔 뒤에 잰걸음으로 침실로 향했다.
제임스 리스의 지난 몇 년 간의 기억이, 수술대 위에서 징그러운 종양 덩어리와 함께 도려내져 의료폐기물로 처분된 지 벌써 삼 개월이 넘어가고 있었다.
***
리스는 자신이 석 달 전 병원에서 눈을 뜬 직후 벌어졌던 일들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사실 잊어버리기가 더 어려운 사건이기도 했다. 당시 그의 마지막 기억은 초등학교 첫 등교일 전날 들뜰 대로 들떠 있는 루시의 책가방 싸는 일을 함께 도와주고 잠들 때까지 침대 곁에 앉아 로런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던 시점에서 부러진 나무 막대기마냥 뚝 끊겨 있었으므로― 눈을 뜨자마자 ‘낯선 병원 천장’을 마주하며 전신마취의 모든 끔찍한 부작용이 신체로 몰아닥치는 것을 무력하게 느끼는 일이란, 느긋하게 물에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잊어버리기엔 지나치게 강렬한 종류의 것이었다. 불유쾌함은 당연하게 딸려 온 덤이었고.
누군가 날이 무딘 도끼로 정수리를 쪼개 놓고 둔기로 사지를 늘씬하게 두들겨 팬 듯한 둔통 속에서 리스는 신음하며 병실 침대 위에서 온몸을 뒤틀었다. 아니, 뒤틀었다기보단 꿈틀거리는 것에 더 가까웠다. 그는 평생동안 제 육체적인 능력을 갈고 닦아온 사람이었고, 제 육신을 자신의 의지로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엔 익숙하지 않았다. 아직 온전하게 돌아오지 않은 시야 속에서 시선을 집중할 만한 피사체를 찾아내기 위해 안구가 필사적으로 굴러가느라 안와 안에서 소리가 난다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기어코 희끄무레한 사람 모양의 형상이 제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을 때, 리스는 헛손질을 하는 와중에 간신히 얼굴에 부착되어 있던 인공호흡기를 뜯듯이 떼어내고는 밭은 숨을 연거푸 몰아쉬었다.
‘여기, 여기가 어디죠? 혹시 내가 공격을, 당한 겁니까?’
침착함을 가장할 여력조차 없었기에 입 밖으로 나온 문장은 형편없었고 더듬거리는 목소리에는 가래 거품이 끓는 것 같은 소리가 섞여서 났다. 리스에게 다가와 그를 내려다보는 상대는 무언가 말을 걸며 그의 신체 반응을 주의 깊게 살피는 기색이었지만, 리스의 고막에 와닿는 그 목소리는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불분명했다. 분명 로런이 크게 걱정할 텐데. 루시도. 리스는 공황 상태에 가까운 혼란 속에서 오직 두 개의 이름만을 번갈아가며 떠올렸다. 루시의 첫 등교니까 아침에 같이 가 주기로 했었는데……
‘제 가족한테 연락해 주세요. 제 휴대폰 연락처에, 로런……’
고작 몇 마디의 말을 띄엄띄엄 내뱉는 것만으로 모든 힘을 소진한 직후, 리스는 다시금 제 코와 입 위로 인공호흡기의 마스크가 씌워지는 것을 느끼며 까무룩 눈을 감고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에도 로런은 그의 곁에 없었다. 대신 리스를 맞이한 것은 군복보다는 좀 나은,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농장 일을 하다 급한 연락을 받고 그대로 뛰쳐나온 인부가 입을 법한 체크무늬 셔츠를 걸친 남성이었다.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침대에 누워 있는 리스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리스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대뜸 손을 뻗어 리스의 손목 부근을 가볍게 붙잡았다. 굳은살로 뒤덮인 손이었지만 피부 위에 닿는 손길은 어딘가 낯간지러울만큼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보스,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그 물음 앞에서 제임스 리스가 가장 또렷하게 떠올린 문장은 단 한 가지였다. 대체 누구길래 나를 보스라고 부르는 거지?
리스는 제 눈 앞의 남자가 왜 자신을 보면서 그렇게 애달프기까지 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 친밀함을 전제한 염려와 영문 모를 안도감이 뒤섞인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타인 앞에서 리스가 제일 먼저 느꼈던 것은 두려움에 가까운 당혹감이었다.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 군복을 입은 상대가 와 있었다면 더 나았을까? 리스는 여전히 혼란스럽고 멍한 정신으로 가볍게 숨을 몰아쉬면서, 제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인명부를 재빠르게 뒤적거렸다. 자신과 엇비슷한 나잇대로 보이는 백인 남성, 짙은 갈색 머리카락에 밝은 벽안, 남부 억양의 말투를 사용하는… 군인, 해군, 네이비 씰… 3팀, 포지션은…… 저격수.
‘……크리스… 크리스 카일?’
아예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완벽한 초면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 순간 가장 모순적인 불행이었을 것이다. 네이비 씰의 그 ‘크리스 카일’이란 이름은 같은 팀에 소속된 적이 없었던 리스에게조차 익숙했다. 심지어 같은 팀만 아니었을 뿐, 소속된 팀끼리 합동 작전을 한두 번 정도 같이 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 독특한 입대 이전 커리어와 과분한 무게감의 별명, 그리고 이를 증명해 보이던 정직한 실력은 한 팀의 리더를 맡은 입장에선 내심 눈도장을 찍지 않고 넘어가기 불가능했다.
‘자네가… 지금 왜 여기에 있나? 내 가족들은?’
그 때 리스는 누군가의 안색에서 그토록 순식간에 핏기가 가실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상황이 그렇지만 않았더라면 리스는 지금 당장 카일이 입고 있는 옷을 들추고 몸 어딘가에서 끔찍한 출혈이라도 발생한 것인지 확인해야 하나 걱정했을 것이다. 이 순간 그를 상처 입히고 피 흘리게 하는 것이 방금 제 입에서 경황 없이 튀어나온 어수선한 단어들의 날카로운 모서리 탓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로.
리스는 카일이 떨리는 제 아랫입술을 통째로 물어뜯듯이 꽉 깨물었다가 다시 놓는 것을 보았다. 혹사당해 표면이 너덜거리는 입술은 죽은 자의 것처럼 불길하게 새하얬다. 리스의 팔 위에 얹혀져 있던 카일의 손은 어느새 슬그머니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제임스 리스 소령님.’
짧고 힘겨운 침묵 끝에 다시금 흘러나온 카일의 음성은 사막의 마른 모래를 뭉친 것보다도 힘없이 부스러져 공기 중에 흩어졌다. 리스는 어째서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실시간으로 절망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여전히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많이 혼란스러우신 상황이란 거 압니다.’
카일은 목이 메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병실 밖을 나섰던 카일은, 곧 병원 복도에서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은 모조리 붙들고 오기라도 한 건지 한 무리의 의료진을 끌고 다시 돌아왔다. 리스는 그 중 제일 나이 지긋해 보이는 의사가 제 눈에다 불빛을 비추거나 의례적으로 물어오는 신체 증상과 관련된 질문들에 다소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금 어두운 표정을 한 채 조용히 병실 밖으로 나가 버린 카일의 빈 자리를 불안하게 곁눈질했다. 의사와 간호사들 모두가 리스가 던진 질문에(‘제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저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이상하리만치 말을 아끼는 태도인 것 또한 그의 내면의 불안을 아슬아슬한 선까지 부추기는 데 한 몫 했다. 어쩌면 크리스 카일이 이 사람들한테 미리 뭔가를 귀띔한 걸지도 모르겠어. 리스는 애써 막연한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생각했다.
카일은 의료진이 썰물마냥 병실을 빠져나가고 난 뒤에도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른 후에야 다시 병실로 들어섰다. 그 옆에 함께 나타난 사람은 리스의 사랑하는 가족도, 동료도 아닌 리즈 라일리였다.
벤도 아니고 리즈라고? 리스가 아는 그녀는 몹시 활동적이었고 그만큼 바쁜 사람이었다. 그의 가장 최근 기억 속에서 막 화물 비행 사업을 시작한 상태였던 그녀는 이러다간 곧 있을 하나뿐인 대녀의 생일 파티에 최초로 참석하지 못하게 생겼다면서 리스에게 모든 연락수단으로 푸념을 늘어놓았었다. ‘처음 그 시기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하다못해 나나 로런을 통해 화상 전화를 하면 되니까…’ 리스는 자신이 그녀에게 판에 박힌 소리를 어떻게 진부하게 늘어놓았는지를 아직도 ‘어제 일처럼’ 기억했다. 리스는 그녀가 제 침대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까지 의자를 끌고 와 천천히 자리에 앉는 것을 슬로우 모션 영상을 보듯 지켜보았다.
‘기분은 좀… 어때?’
어색한 미소와 함께, 좀 전의 카일과 똑같은 질문을 하는 라일리의 모습에 리스는 그만 긴장이 탁 풀려 맥빠진 웃음을 지어야 했다.
‘처음 일어났을 때보다는 괜찮아.’ 리스는 이 순간 어쩐지 자신이 그녀를 위로하는 입장이 되었다고 느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기억 손상을 입은 거지?’
라일리의 표정이 잔뜩 흐려지는 걸 보면서, 리스는 제 짐작이 제대로 들어맞았다는 사실을 확답받았음을 눈치챘다. 그는 다시 한 번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지금 제 얼굴 근육이 제대로 일을 하고 있을지는 차마 확신하지 못했다. 라일리는 그녀답지 않게 그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눈을 굴리면서, 다소 소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확히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어?’
‘내가 마지막으로 달력을 봤을 때는, 분명 루시의 초등학교 입학 전날 밤이었는데.’ 리스는 이 모든 것이 그저 가벼운 농담처럼 들리길 바라며, 제 어조를 아까보다 더욱 밝게 꾸미려 애썼다. ‘젠장, 대체 내가 얼마나 시간 여행을 한 거야?’
리스는 라일리가 제 말을 듣자마자 앓는 신음이 섞인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는 것을 지켜보며 멋쩍게 생각했다. 아무래도 내 유머감각을 조금 재고해 볼 필요가 있겠어. 그는 잠자코 라일리가 침착함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렸다. 한참만에 다시 얼굴을 든 라일리의 눈가는 아까보다 충혈되어 있었다.
‘제임스, 놀라지 말고 잘 들어.’
‘……날 얼마나 겁먹게 만들고 싶어서 이래?’
‘당신한테 중요한 이야기야.’
라일리의 태도는 마치 전쟁이라도 선포하는 것처럼 비장했다.
‘지금 당신 나이는 마흔 두 살이야. 시간이 그만큼 흘렀어.’
여기까지는 놀랍지만 여전히 예상 내에 있던 상황이었다. 리스는 일정 수준의 침착함을 되찾자마자 제 신체가 기억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제일 먼저 알아차렸다. 거의 비정상적으로 빠져 있는 체중과 몸 여기저기 남아 있는 잔 흠집 같은 흉터들은 그의 기억에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왼손 약지가 허전하다는 사실이, 이것이 거대하고 질 나쁜 만우절 장난이 아니란 사실을 증명했다. 차라리 그 손가락이, 아니, 왼손 전체가 잘려 나가 뭉툭한 흔적만 남아 있었대도 그만큼 간담이 서늘해지진 않았을 터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한 일이었지만 그의 기억에서 장기간 유실된 부분이 발생했고, 그 사이에 굉장히 많은 일들이 있었던 듯 보였다.
‘그리고,’
직후 라일리는 아주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뜸을 들였다. 그보다 좀 떨어진 자리에서 고해성사를 보러 온 사람마냥 접의식 의자에 어정쩡하게 앉아 몸을 수그린 채 꿈쩍도 않고 있던 카일은, 갑자기 화재 경보라도 들은 것처럼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곧 병실 문 근처를 경계심 많은 사냥개처럼 서성거렸다. 그리고, 그리고? 리스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심장에 바늘로 찌른 작은 구멍이 나 있고, 거기서부터 뜨거운 핏물이 아주 천천히 새어 나오는 듯한 불길한 고통을 느꼈다. 아까 육체에서 느꼈던 둔통과는 또 다른 출처 모를 통증이었다. 동시에 그의 본능이 두 귀를 막고 싶다고, 귀를 막을 수 없다면 그녀의 입을 지금 당장 틀어막아야만 한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로런이랑 루시는—’
한참 뒤, 깨진 수액병에서 흘러나온 액체와 핏물로 끔찍한 난장판이 된 일인실 병실에 널브러진 채 정신을 차린 리스는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높이의 두툼한 서류철을 하나 받아들었다. 서류철의 표지에 적혀 있던 것은 어떤 뜻이 있는 단어조차 아니었다.
「RD4895」
리스는 그 두 개의 알파벳과 네 개의 숫자가 제 인생을 송두리째 파괴한 주범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는 제 팔뚝에 꽂혀 있던 링거의 바늘을 무식하게 잡아 빼는 것을 시작으로 병실의 모든 물건을 때려부수느라 다 찢어져버린 오른손을 벌벌 떨면서 서류철의 표지를 넘겼다.
리스가 사랑하고 아꼈던 모든 이름들이 가장 최악의 형태로 그 안에 기록되어 있었다. 바위 표면에 끌과 정으로 새겨 넣어 영원히 지워지지 않게 된 글자들처럼.
그렇게 서른 여섯 살의 제임스 리스는 마흔 두 살의 신체 안에서 눈을 떠, 자신의 인생을 이루고 지탱해 왔던 것들이 모두 물거품처럼, 덧없는 환상처럼 사라졌음을 선고받아야만 했다. 손쓸 수도 없이 머리 위에서부터 들이닥친 집채만한 해일과 같은 진실 앞에서 그의 뇌종양 투병이나 몇 년 간의 기억이 거의 대부분 유실되었다는 사실 따위는 모두 하찮고 사소한 것이 되었다. 지금에 와서 제 옆자리에 집 지키는 개처럼 머물고 있는 사람이, 이전까진 특별히 인연이랄 것이 거의 없었던 네이비 씰 3팀 출신의 중사 크리스 카일이란 점까지도.
***
“다행히 수술 이후 예후가 좋은 편이니, 분명 기억도 금방 회복될… 리스 씨?”
리스는 얕은 오수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반짝 고개를 들고, 제 짧은 상념을 깨뜨린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를 담당하는 담당의가 작은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둔 채 그를 마주하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또 얼마나 오래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지? 리스는 제 겸연쩍음을 무마하기 위해 괜시리 마른세수를 하면서 익숙한 착잡함을 느꼈다. 동시에 습관적으로 제 담당의의 표정과 옷차림, 자세, 억양에서 특정한 신상 정보들을 읽어내려다 기계의 전원 버튼을 강제로 끄듯이 의식적으로 관두었다. 지금 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적대적인 인물이 아니었고 해코지를 할 의향도 없었으니 집중력을 불필요하게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좀 피곤해서요. 뭘 한 것도 아닌데.”
“원래 수술 이후에는 몸이 내 마음같지가 않죠.”
제임스 리스라는 인간의 머리통을 문자 그대로 ‘열어 본’ 당사자는, 리스가 여태까지 만나 본 의료계 종사자 중 환자에게 꽤나 친절하게 구는 축에 속했다. 제 업무의 부담감을 환자에게 떠넘기며 신경질을 부리거나 귀찮아하는 내색을 일절 보이지 않고, 최대한 긍정적인 대답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티가 났다. 그야 대낮에 도시 한복판에서 사제 폭탄을 터뜨리고 총을 갈겨댄 미치광이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리스는 스스로에게 코웃음을 치며 냉소적으로 반박했다. 어떤 친절은 결코 이유나 조건 없이 주어지지 않는 법이다. 리스는 자신이 이 병원에서 가장 골칫거리 환자일 게 분명함을 알고 있었다. 그는 문득 꼴보기 싫은 신하에게는 하얀 코끼리를 하사했다던 옛 왕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리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가 없는 담당의는 제 환자의 무례한 침묵을 예사롭게 받아 넘기면서 검사 결과가 띄워진 모니터를 향해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정작 리스에게는 어떠한 흥미도 느껴지지 않는 결과들이었다. 그는 제 건강 상태에 대해 초연하다 싶은 수준으로 무관심한 환자에게 크게 언짢아하는 기색은 아니었으나, 마치 할 말이 있으면 털어놓으라는 듯이 침묵을 고수했다. 결국 짧은 침묵을 견디지 못한 리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저와 같은 경우가 다른 뇌종양 환자들에게도 흔하게 발생합니까? 그러니까, 수술 후에 이렇게… 되는 거 말입니다.” 리스는 ‘기억 상실’이란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을 주저하며 어물쩍 말끝을 흐렸다. “이런 일은 영화에서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뇌종양 수술 이후에 나타나는 부작용은 몹시 다양합니다. 뇌는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하고 민감한 기관이고, 수술적 요법은 바로 그 기관을 직접 건드리는 거니까요. 불행하게도 기억 상실 또한 종종 보고되는 부작용 중 하나죠… 물론, 리스 씨처럼 특정 기간의 기억만 통째로 유실되는 경우는 결코 흔한 일이 아니지만요.”
리스는 모니터에 띄워져 있는 MRI 검사 결과 사진을, 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제 것이 아닌 것처럼 새삼 생경하게 바라보았다. 밤바다 위의 섬 같은 창백한 대뇌 피질 한복판에 찍혀 있는 큼직한 붉은 점이 마치 지도에 표시해 둔 공략 지점 같았다. 이제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공략 지점.
“그래도 그 시기의 기억들 중 일부는 돌아오고 있다고 하셨죠. 맞습니까?”
“네, 뭐… 드문드문이긴 합니다만.” 리스는 드물게 자신감 없는 태도로 대꾸했다.
“보통 기억 상실을 경험한 환자들은 ‘잃어버린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사실 자체에 몹시 초조해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초조해한다고 해서 기억이 빨리 돌아오는 것은 아니죠. 오히려 그런 불안이 환자 본인의 정신 건강에 더 악영향을 미치기도 하고요.” 그는 리스를 격려하고 싶은 것처럼 살짝 미소지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리스 씨가 오직 회복하는 일에만 집중해 주셨기에 역설적으로 기억 또한 순조롭게 돌아올 조짐이 보이는 것이겠지요. 전부 리스 씨가 매우 강인한 분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저는 강인한 게 아닙니다. 그냥 구제불능의 멍청이인 거지.’ 리스는 퉁명스런 말대꾸가 용수철처럼 무례하게 튀어나가려는 것을 억누르기 위해 가볍게 목을 가다듬는 척 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상대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힘든 수술도 잘 이겨내셨잖습니까. 앞으로는 쭉 좋아질 일만 남았죠.”
의사가 하는 일이란 자신이 담당하는 환자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고, 따라서 환자가 ‘회복’의 조짐이 보인다면 기뻐하고 축하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리스는 그 낙관적 사고에 도무지 함께할 수 없었다. 리스는 이 선량하고 모범적인 의사의 얼굴에 침을 뱉고 고래고래 고함치고 싶은 충동을 참아 내기 위해 허벅지 위에 놓았던 두 주먹을 움켜쥐어야만 했다. 당신이 만약 내 입장에 처했다면 그딴 기억들을 되찾고 싶겠어? 리스는 모든 모진 말들을 간신히 속으로 삼켜냈다. 불에 바싹 달군 자갈과 모래알의 크고 작은 알갱이들 하나하나가 울렁거리며 식도를 타고 위장까지 넘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거 참……” 리스는 제 혀에 스며든 해묵은 독을 언어의 형태로 뿜어내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참 다행이군요.”
이 이상 쥐어짜낼 이야깃거리가 있을 리 만무했으므로, 그 이후의 대화는 모두 틀에 박힌 순서대로 흘러갔다. 리스는 복용약의 처방전 발급과 다음 검사 일자에 대한 얘기들에 모두 건성으로 대꾸한 뒤 진료실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평일 낮 시간대의 병원 로비 풍경은 꽤나 한산했다. 복도의 한쪽 면이 온통 통유리로 되어 있는 덕분에, 복도를 천천히 오가는 몇몇 사람들의 머리 위로 햇빛이 쏟아지는 광경은 꽤나 온화하고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결국 병원이란 오랜 시간 머물기엔 즐거운 장소가 아닌 법이다. 리스는 모자의 챙을 보다 깊이 눌러쓰면서 로비 쪽을 훑듯이 살폈다.
크리스 카일은 로비에 마련된 대기 공간에서 가장 햇빛과 먼 자리에 앉아 골똘한 얼굴을 한 채 얄팍한 팜플렛 몇 가지를 신문 기사라도 읽듯이 진지하게 들여다 보고 있었다. 차분한 색상의 팜플렛에 적혀 있는 몇 개의 문장들이 리스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대한 이해」
「가까운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세요: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재향 군인들을 위한 위기 상담 전화는 24시간 전국 핫라인을 제공하며…」
카일은 리스의 ‘보호자’로서 병원에 방문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환자 본인이기도 했다. 본의 아니게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생활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리스는 카일이 챙겨 먹던 몇 가지 알약들을 우연히 본 적이 있었다. 대개 수면제나 항우울제 계열의 것들. 리스는 파병을 다녀 온 뒤 PTSD를 앓게 된 군인들이 병원에서 어떠한 약을 처방받게 되는지에 대해서 싫을 만큼 알았다. 비록 카일의 자존심은 지금의 리스에게 제 ‘약점’을 먼저 자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듯 보였지만, 딱히 필사적으로 숨긴 것도 아니었으니 알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제임스 리스는 헛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그러니까 여태껏 환자가 환자를 돌보고 있었다는 거군. 뇌종양 환자를 홀로 보살피는 PTSD 환자라니. 눈 먼 개의 목줄을 다리 저는 개가 입에 물고 용케 여기까지 질질 끌고 온 셈이다.
다만 오히려 그것이 리스의 머릿속을 개운하리만치 명료하게 만들기도 했다. 마치 한여름의 햇볕에 뜨겁게 익은 정수리 위에 차디 찬 얼음물을 끼얹는 것처럼, 이 모든 상황이 어떠한 환각도 섞이지 않은 현실임을 그에게 절절하게 상기시켰다. 가장 최악의 방식으로 모든 걸 잃은 후에 새롭게 선택한 동거인이 PTSD 때문에 주기적인 상담을 받고 약을 먹어야 하는 텍사스 출신의 전직 해군 중사라는 것을 환상이나 착각으로 빚어낼 만큼 제임스 리스는 상상력이 풍부하거나 유연한 사고방식을 지니지는 못했으므로.
하지만 동시에 리스는 자신이 어째서 그러한 선택을 했는지를 의심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만큼 그 당시의 자신은 외롭고 절박했던 것일까? 어쩌면 마흔 두 살의 제임스 리스는 서른 여섯 살의 제임스 리스가 감히 상상도 못할 짓을 벌일 만큼 단단히 미쳐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지난 2년 가까이 대뇌 안쪽에 들어차 있었다던 그 망할 종양 덩어리가 정신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친 거겠지.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가설이었다. 미친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제 와서 다른 누군가를 곁에 두는 삶을 또 다시 선택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일들을 겪고도?
리스가 다가가 말을 걸기 전에 인기척을 느낀 카일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리스는 그가 자신을 보자마자 굳어 있던 눈매를 부드럽게 누그러뜨리는 것을 눈치챘다.
“벌써 다 끝났습니까? 저번보다 훨씬 빠른 것 같은데요.”
“이번엔 간단한 검사 뿐이었으니까.” 리스는 자신을 향해 솔직하게 미소짓는 카일 앞에서 어쩐지 쑥쓰러운 기분을 느꼈다. “그러는 자네는?”
“저야 뭐… 여긴 보스 볼일 때문에 온 건데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카일은 손목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는 미련 없이 떠날 채비를 했다. 리스는 그가 손에 들고 있던 팜플렛을 바로 옆 자리에 두었던 가방 안에 집어넣는 것을 못본 척 하면서 슬그머니 눈길을 돌렸다. 아예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는 것보다야 훨씬 나을 터였다.
카일이 병원 프론트 데스크에서 체크아웃 절차를 마무리하는 동안 몇 걸음 뒤에서 가방을 든 채 멀뚱멀뚱 서 있던 리스는, 곧장 돌아온 카일이 제 손에서 가방을 다시 가져갈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먼저 성큼성큼 앞서 나간 그가 야외 주차장이 아닌 정문으로 향하는 것을 눈치챘을 땐 살짝 눈살을 찌푸려야만 했다.
“이 쪽은 주차장으로 가는 길이 아닌 것 같은데.”
“오늘 해야 할 일은 다 끝냈잖습니까. 외식 정도는 해도 괜찮겠죠.”
“…밥은 집에 가서 먹으면 되잖아.”
“하지만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도요?” 카일은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진다는 사실에 대해 말하는 듯한 태도로 대꾸하며 탁 트인 푸른 하늘을 향해 가볍게 턱짓했다. “이대로 집에 가면 또 제가 만든 칠리나 데워 드셔야 할 겁니다.”
꽤나 넉살을 부리고는 있었지만 결국 곧장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다는 이야기였다. 정작 리스는 칠리든 뭐든 상관없으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지금 카일이 어째서 답지 않게 철 없는 어린애처럼 구는지 그 의도를 아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리스는 지난 석 달 동안 자신이 집 밖을 나간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이며(그나마도 한 번은 수술 이후 첫 진료를 받기 위한 병원 방문이었으니 반쯤 타의였다), 집안에서도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방안에 틀어박힌 채로 흘려보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상기했다. 결국 리스는 한숨을 쉬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이 리스를 데리고 간 식당은 병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있는 캐주얼한 델리였다. 지저분하진 않았지만, 간판과 건물에서 오래된 티가 역력하게 드러나는 곳이었다. 리스는 카일을 뒤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서 습관적으로 내부의 이동 경로와 손님들의 면면을 살폈다. 다소 아담한 규모의 식사 공간에는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노부부 한 쌍과 세 명 정도의 어린 학생들이 각자의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그는 대번에 이 식당이 지역 내에서 갖고 있는 입지를 파악했다. 오가는 길에 간단한 음식을 포장해 가거나 주머니가 가벼운 상황에서 끼니를 떼울 만한 장소로는 적절하되, 첫 데이트 상대를 데리고 근사한 저녁식사를 하기에는 조금 부적절한 장소.
익숙한 태도로 가장 안쪽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은 카일이 직원에게 두 명 분의 메뉴를 시키는 동안 ‘난 아무거나 상관 없어.’ 라는 한 마디를 제외하곤 꼭 입이 없는 사람처럼 침묵했던 리스는, 제 몫의 음식 그릇이 앞에 놓이고 나서야 다시금 말문을 열었다.
“내가 자네랑 여기 자주 왔었나?”
카일은 포크를 집어들다 말고 눈을 빠르게 두어 번 깜빡거렸다.
“처음 온 것은 아닙니다.”
“몇 번이나?”
“……예전엔 진료가 끝났을 때마다 왔던 것 같네요. 아무래도 병원에서 가까운 데라서.” 카일은 멋쩍은 표정으로 변명하듯 덧붙였다. “예약 없이 와도 되고, 음식도 빨리 나오고, 가격대도 적당하고요.”
리스는 지극히 소소한 이유로 결정된 이 선택지가 악의라곤 한 톨도 없는 무신경함과 장기적으로 숙련된 익숙함이 절묘하게 혼합된 ‘일상적’인 것임을 눈치챘다. 아마 수술을 받기 이전의 제임스 리스는 통원 치료를 끝낸 뒤 매번 크리스 카일과 함께 이 곳을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샌드위치나 베이글, 혹은 갓 튀긴 치킨과 감자 따위를 시켜 놓고 이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커피에다 크림을 넣고 있었겠지…
다시금 시작된 리스의 침묵을 부정적인 감상으로 받아들였는지, 카일은 아까보다 훨씬 더 주눅이 든 표정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 마음에 안 드시면 다음 번에는 다른 데로 가죠.”
“아냐. 괜찮아, 여기도.”
리스는 아무렇지 않게 빈말로 대꾸하며 제 몫의 베이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물고 오랫동안 씹어 삼켰다. 그 사이 카일은 슬쩍 리스의 물잔을 그의 오른손과 가까운 쪽으로 밀어두었다.
“의사는 이번에 뭐랍니까?”
“예후가 괜찮다더군.” 리스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기억 문제는… 이대로 지내다 보면 곧 회복할 가능성이 높다고도 했어.”
“……뭔가 또 기억나신 게 있습니까?”
“음, 루시가 이쪽 젖니가 빠졌던 일.” 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제 입을 살짝 벌려 위쪽 송곳니 부분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그날 밤에는 자기 전까지 이빨 요정이 나오는 책을 같이 읽었지.”
리스는 그 책의 표지에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지, 제 어깨에 기댔던 루시의 머리카락이 얼마나 가늘고 부드러웠는지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사라졌던 기억이 드문드문 되돌아오는 과정은 마치 말라붙은 개울에서 사금을 채취하는 것과 같았다. 두통이나 기절 같은 극적인 신체 반응은 없었다. 그저 흙탕물 속에서 조용하게 반짝거리는 알갱이들처럼 불분명한 의식 사이에서 불현듯 그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다. 다만 한 번 그 반짝임을 인식하고 나면, 어째서 여태껏 잊고 있었는지 의아해질만큼 자연스럽게 기억의 공백을 메꿔놓곤 했다. 마침내 올바른 위치에 놓인 직소 퍼즐의 조각처럼.
“그리고 그 애가 2학년 때 교내 철자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았던 것도 기억이 나.” 루시에 대한 기억을 얘기하며 리스는 제 얼굴 근육이 녹은 크림처럼 서서히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따스한 기분이었다. “내 딸이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정말로 영리한 아이였어.”
“대단하네요. 전 그 나이 때 그냥 밖에 나가 놀기에만 바빴던 것 같은데. 책 읽는 것도 엄청 싫어했었고요.”
“흠, 루시도 수학은 싫어했었지.”
“그건 좋아하는 애가 더 드물지 않습니까?” 카일이 장난스럽게 킬킬거렸다.
“하지만 루시의 친구 중 한 명은 수학을 좋아했는걸. 그 애 이름이, 뭐였더라—”
크리스 카일은 리스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태도의 청자였다.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다소 두서없이 나열되는 모든 팔불출같은 이야기에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며 성의껏 맞장구를 쳐 주는 사람. 그는 마치 리스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얘기들은 그게 뭐든 자신이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다는 듯이 굴었다.
“2년 전부터 수술 전까지 있었던 일들은 아직 기억나지 않아.”
그 성실한 태도 앞에서 그만 긴장이 지나치게 풀려 버린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먼저 번개가 치고 난 후 천둥 소리가 뒤따라오는 것처럼, 리스는 목소리를 내뱉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를 뒤늦게 의식했다. 카일의 얼굴에 내내 머물러 있던 웃음기가 조금 사라졌다. 이미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으므로 리스 또한 그저 눈을 조금 내리깔고 시선을 낮췄다. 카일이 입고 있는 점퍼의 손목 소매 끝이 닳고 헤진 것이 보였다.
“자네한테는 정말 미안하게 됐어.”
“아닙니다. 보스가 왜 사과를 하십니까?”
카일의 목소리가 당혹감으로 조금 높아졌다.
“억지로 기억해 내려 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저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전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의사도 그렇게 말했다면서요?” 다급하게 말을 쏟아내느라 카일의 말투에서 남부 억양이 더욱 두드러졌다. “보스한테 꼭 필요한 기억이라면, 분명 알아서 다시 회복될 겁니다.”
“그럼, 만약 이러다 내가 앞으로도 영영 그 기억들을 떠올리지 못하면 자넨 어쩔 셈이야?”
카일의 입술이 잠시 일자로 다물렸다가 천천히 열렸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모두 보스에게 필요 없는 기억이었다는 뜻이겠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카일은 못을 박듯이 조금 더 힘주어 말했다.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리스는 시선을 들어 새삼스럽게 카일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흠 없이 밝은 파란색 눈동자는 산들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날씨의 호수 표면처럼 잔잔했다.
“참 이상한 일이군.” 리스는 카일이 들을 수 있을 만큼만 작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네는 그 누구보다도 내 기억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 같아.”
그 말이 정곡을 찌르기라도 한 것인지, 카일의 입은 다시금 이물질을 삼킨 조개마냥 굳게 닫혔다. 리스는 문득 그런 카일의 태도가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숨을 쉬면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자네 이야기를 해 줘.”
카일의 두 눈이 다시금 둥그렇게 커졌다.
“뭐든지 좋아. 자네 고향 얘기든, 군에 있을 때 있던 얘기든, 아무거나 좋으니…” 리스는 하던 말을 멈추고, 곤란한 얘기를 들었을 때 지을 법한 종류의 미묘한 미소를 얼굴에 띄운 카일을 향해서 새삼스럽게 미심쩍은 눈길을 보냈다. “갑자기 왜 그렇게 웃어?”
“아, 아닙니다.” 카일은 멋쩍어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냥, 예전엔 제게 그런 걸 별로 묻지 않으셨는데 싶어서요.”
이번에는 리스가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을 지을 차례였다. 정말로, 이 순간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해서였다. 뒤늦게 몰려든 부끄러움 탓에 양쪽 귀의 귓불이 달군 쇠다리미를 갖다댄 것처럼 순식간에 뜨거워지는 것리 느껴졌다. 빌어먹을 제임스 리스, 인간관계 한 번 끝내주게 쌓아 놨군. 리스는 짧게 마른세수를 파며 구겨진 미간을 손끝으로 꾹꾹 문질렀다.
“……난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무심한 사람이었군그래.”
혹은 이미 알고 있는 게 많으니 딱히 물을 것이 없었던 걸지도 모르지. 리스는 과거의 자신이 진작 카일의 가계도며 초등학교 성적표까지 탈탈 털어 모조리 찾아냈을 것이란 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리스는 ‘제임스 리스’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잘 알았다. 그런 끔찍한 일을 겪은 이후의 제임스 리스라면, 제 곁에 새로운 누군가를 위한 자리를 만들 생각이 들었을 때 제일 먼저 그렇게 했을 터였다. 단순한 하우스메이트를 구하는 것이라기엔 지나칠 정도로 꼼꼼한 뒷조사와 평가가 동반되었겠지. 리스는 카일이 이러한 사실을 과연 짐작이나 하고 있을지 조금 걱정스러웠다.
“죄송합니다. 보스를 탓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나도 자네한테 면박을 주려 한 건 아니야.” 리스는 겸연쩍음을 감추기 위해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애초에 내가 자네한테…”
내가 자네한테 어떻게 싫은 소리를 하겠나?
리스는 결국 하려던 말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 그는 목구멍에 작은 생선 가시가 걸린 사람처럼 애꿎게 물을 들이켰다.
‘회복’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의 빈 시간이 대책 없이 주어진 동안, 리스는 몇 번이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과 스스로의 상태를 평가했다. 지금도 썩 보기 좋은 몰골은 아니었지만, 수술 이전에는 더 심한 상태였을 것이다. 몸도 마음도 중병이 든 환자의 뒷수발을 드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그 중환자가 제임스 리스라면 더욱 그렇다. 그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이었을 것이 뻔했다.
애초에 리스는 카일이 대체 어떻게 자신에게 종양 제거 수술을 받도록 설득했는지 도통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는 동시에 리스의 또 다른 의문과 연결된 것이기도 했다. 자신은 대체 어째서 모든 복수를 끝낸 뒤에도 병든 몸뚱이를 비에 젖은 외투마냥 질질 끌고 다니다 여기까지 다다른 것일까?
물론 리스는 사실 정답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단지 그게 정답임을 애써 부정하고 싶어, 사냥꾼의 눈을 피해 수풀에 머리를 처박은 순진하고 어리석은 초식동물마냥 굴고 있을 뿐.
“카일.”
문득 리스는 그의 이름 일부를 소리내어 부르는 일이 너무나도 어렵다고 생각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흔한 이름에 불과한데도, 낚싯바늘에 꿰인 물고기처럼 혓바닥에 무게추라도 달린 듯한 기분이었다. 묵묵히 유리창 바깥의 풍경을 향해 시선을 주던 카일이 리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네는 로런이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도니나 부저 같은 입장조차 아니었지.”
이번엔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리스는 다음 말들을 잇기 전 두 눈을 조금 오래 감았다 떴다.
“과거의 나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자네를 절대 그들 대신으로 삼을 수 없어. 난 계속해서 그 빈 자리를 의식할 거야. 그건 자네에게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닐 거고.”
큰 수술을 한 탓에 위장도 덩달아 줄어들었는지, 고작해야 베이글 샌드위치를 한 입 먹었을 뿐인데도 속이 얹힌 것처럼 명치께가 불편했다. 리스는 메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불안하게 핥으면서 다시금 시선을 내려 자신의 그릇 위를 바라보았다. 베이글의 부스러기가 그릇 위에 조금 떨어져 있었고, 무심코 테이블 위에 올라온 왼손 약지에는 너무나 익숙한 결혼 반지가 천연덕스럽게 끼워져 있었다. 이것과 짝을 이루는 반지를 나누었던 상대는 이제 더는 이 세상에 없는데도.
“그러니까… 내 생각엔 자네가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 줘야 할 어떠한 의무도 없어. 설사 자네가 나한테 빚을 진 게 있었대도, 여기까지 왔으면 이미 모두 청산되고도 남았을거야.”
리스는 그간 카일이 자신을 돌본 것에 대해 다리 저는 개가 눈 먼 개를 서툴게 끌고 다닌 꼴이라고 빈정거리긴 했으나, ‘눈 먼 개’의 입장에선 그마저도 없으면 아쉬운 소중한 도움의 손길인 법이다. 제임스 리스에게 최소한의 양심과 염치란 것이 아직 존재한다면, 지금 이 순간 크리스 카일에게 표현해야 할 것은 추궁도 의심도 아닌 감사의 인사 한 마디였다.
“그 동안 날 도와줬던 건 정말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자네의 호의에 내가 돌려줄 수 있는 건―”
“저는 대가를 원해서 당신 곁에 있었던 게 아닙니다.”
드물게도 리스의 말을 중간에 끊어낸 카일의 목소리는 끝이 조금 갈라져 있었다. 리스는 그 말이 완전히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조건 없는 희생이란 그리 쉽게 성립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과거의 내가 대체 얼마나 어마어마한 보상을 약속했길래 자네가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어. 리스는 주먹을 꾹 움켜쥔 채로 마저 튀어나오려던 말을 씹어 삼켰다.
“……도저히 이해가 안 돼.”
리스는 끝내 푸념하듯 말했다.
“내가 자네한테 무슨 가치가 있어서 이렇게까지 해?”
카일은 햇빛에 눈이 시린 사람처럼 눈살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지난 석 달 동안 리스가 파악했던 ‘크리스 카일’은 결코 포커 페이스에 능숙한 편이 아니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그의 표정을 쉽게 읽어낼 수 없었다. 리스는 카일의 뺨 위에 드리운 속눈썹의 긴 그림자가 간헐적으로 떨리다가 잠잠해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랫입술을 몇 번 달싹거린 끝에 나온 카일의 목소리는 리스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퍽 침착했으며, 내용 또한 단순했다.
“그런 걸 일일이 생각하면서 행동하지 않는 편이라서요.”
두 사람의 시선이 한동안 허공에서 불안하게 맞물렸다. 그러나 결국 그걸 먼저 힘겹게 끊어낸 것은 리스 쪽이었다. 그는 카일을 외면하듯 시선을 돌리고 여태까지 중 가장 냉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생각해 보는 편이 좋을 거야.”
카일은 이번에도 침묵하는 것으로 자신의 대답을 대신했다. 정확히는, 그는 이제 제 입을 오로지 식사를 하는 용도로만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듯 싶었다. 카일은 리스에게 더 말을 건네는 대신 묵묵히 제 몫의 치즈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리스는 그가 음식을 모두 다 먹을 때까지 물조차 입에 대지 않은 채 단지 유리창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터미널리스트 ㅅㅍㅈㅇ, 긴글ㅈㅇ
1.
신화 속 영웅이 탔었다는 배의 낡고 썩은 판자를 모두 교체해 버린 뒤에는, 그 배가 처음의 그 배와 같다고 할 수 있는가? 벼락에 맞아 죽은 인간과 동일한 기억을 공유하며 원자 단위의 구성까지 모두 똑같은 인간이 늪에서 솟아나온다면, 그 인간은 앞서 죽은 이와 동일인물인가?
제임스 리스의 대학 시절 전공은 철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이 유명한 논제들에 대해서 지나가듯 들어본 바는 있었다. 어쩌면 잠들지 못하는 밤에 자장가 대신 틀어 놓았던 유튜브 자동 재생 목록에 은밀하게 섞여 있던 TED 영상 중 하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고백컨대, 여태까지의 리스는 그것을 그저 '흥미롭지만 누군가와 저녁식사를 하며 언급하기에는 조금 부적절한 화제' 정도로만 여겨 왔었다. 다른 사람과의 평화로운 저녁식사 자리에서 뒤탈 없이 무난하게 꺼낼 만한 이야깃거리란 결국 날씨와 정원 가꾸기, 반려동물, 혹은 새롭게 시작한 취미 생활과 같은 것들이기 마련이므로.
그러나 이 순간, 거울 속에 비치는 쉐이빙 크림이 아직 덕지덕지 묻어 있는 자신의 지친 얼굴을 면도칼을 든 채 냉담하게 들여다보면서 현재의 리스는 같잖게도 아마추어 철학자 흉내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용케 면도하는 방법은 잊지 않았으나 지난 몇 년 간의 기억을 거의 대부분 잃어버린 지금의 제임스 리스는, 과연 아직도 그 ‘제임스 리스’인가?
이대로 수염을 어중간하게 깎은 채 외출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관성적인 손놀림으로 마저 면도를 이어가며 리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관조하듯 정리했다. 실패한 실험, 끔찍한 폭발 사고, 완전히 망쳐 버린 임무, 돌이킬 수 없어진 죽음들과 이미 끝나 버린 복수들, 장시간의 수술, 재활, 그리고…
시퍼렇게 빛나는 면도날이 젖은 살갗 표면을 아슬하게 긁는 오싹한 소리가 그의 잡념을 잘라냈다. 리스는 가볍게 혀를 차면서 제 턱을 손끝으로 한 번 쓸었으나 걱정했던 새빨간 색은 비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살갗까지 잘라내진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날붙이를 손에 든 상태로 딴 생각을 하다니, 이전의 ‘제임스 리스’라면 결코 하지 않을 행동이다. 어딘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긴 한 것이 분명했다. 리스는 이제는 습관이 되어 버린 긴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면도칼을 든 오른손을 움직였다.
난생 처음 면도를 해 보는 십대마냥 굼뜬 속도로 몸단장을 마친 리스는, 아직 물기가 남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으며 욕실 문 밖을 나서다 말고 멈칫했다. 지난 몇 달 동안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지냈으면서도 통 익숙해지지 못한 남자가 욕실 근처에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물론 고작 단 두 명이 사는 이 집에서 그가 ‘기다리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보스.”
남자의 거대한 몸에 걸치고 있는 볼캡과 작업용 점퍼는 깔끔하게 관리된 것으로 보이긴 했지만, 옷감 여기저기가 자잘하게 헤지고 볕에 바랜 탓에 어쩔 수 없이 오랫동안 입은 티가 났다. 자세는 평균보다 키가 큰 이들이 으레 그러듯 살짝 구부정했으나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몇 블록 떨어진 장소에서 처음 마주친 사람도 잘 훈련된 군인 출신임을 금방 알아볼 수가 있을 것 같은 차림새와 몸짓이었다.
크리스 카일. 리스는 조금 전까지 제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던 원흉의 이름을 속으로 웅얼거리며, 이유 모를 언짢음과 불편함을 담아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가 여태껏 살면서 봐 온 홍채의 색깔 중 가장 흠 없이 밝고 또렷한 파란색이 거기에 있었다. 지나치게 맑아 바닥까지 비치는 연못이 보는 이에게 영문 모를 꺼림칙함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비슷하게, 그 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행위는 마음 어딘가를 켕기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 리스의 시선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는 몰라도, 카일의 눈썹이 난감하게 누그러졌다.
“…또 거기서 주무시기라도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 말에 이전보다 훨씬 짧아진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벅벅 문질러 닦던 리스의 손길이 조금 느려졌다. 과거의 나는 한심하게 욕실에서 씻다 말고 잠든 적이 있나 보군. 리스는 좁아터진 욕조 안에 알몸으로 늘어져 있을 제 모습을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듣듯이 떠올리며 다시금 혀를 찼다가, 이미 닦은 얼굴을 괜히 젖은 수건으로 한 번 더 훔쳤다.
“잠들었던 건 아니야.”
리스는 불편한 기색을 최대한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이제 와서 욕조 물에 빠지거나 하진 않으니까.”
“그런 걸 걱정했던 건 아니지만…”
카일은 여전히 미덥지 못하다는 표정이었으나 더 이상 이 화제를 이어갈 생각은 없는 듯 했다. 대신 손목에 찬 시계를 흘끗 들여다보더니 표정을 다시 침착하게 가다듬었다.
“병원에 제 시간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리스 또한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작은 시계를 확인했다. 그 말대로, 이동 시간을 생각하면 여기서 더 이상 시시덕거릴 수가 없었다.
“알았어. 나도 곧 준비해서 나갈게.”
“예.”
카일은 고개를 가볍게 주억거리나 싶더니,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쓰고 있는 모자의 챙을 잠시 만지작거렸다. 조금 멋쩍고 쑥스러워 보이는 태도였다.
“보스 짐은 제가 다 챙겨 놨으니, 그냥 옷만 입고 나오시면 됩니다.”
그 투박한 호의에 자신이 감사 인사를 하기도 전에, 미련 없이 돌아서서 성큼성큼 차고로 향하는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면서 리스는 문득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이런 걱정을 받아본 게 대체 언제였지? 곧이어 리스는 제가 아는 ‘마지막 기억’과 실제 ‘마지막’이 다를 것이라는 씁쓸한 사실을 자각하곤 메마른 입안에 큼직한 암염 조각을 쑤셔넣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착잡한 심정을 새삼스럽게 곱씹으며 젖은 수건을 근처의 빨래바구니에 내던져 둔 뒤에 잰걸음으로 침실로 향했다.
제임스 리스의 지난 몇 년 간의 기억이, 수술대 위에서 징그러운 종양 덩어리와 함께 도려내져 의료폐기물로 처분된 지 벌써 삼 개월이 넘어가고 있었다.
***
리스는 자신이 석 달 전 병원에서 눈을 뜬 직후 벌어졌던 일들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사실 잊어버리기가 더 어려운 사건이기도 했다. 당시 그의 마지막 기억은 초등학교 첫 등교일 전날 들뜰 대로 들떠 있는 루시의 책가방 싸는 일을 함께 도와주고 잠들 때까지 침대 곁에 앉아 로런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던 시점에서 부러진 나무 막대기마냥 뚝 끊겨 있었으므로― 눈을 뜨자마자 ‘낯선 병원 천장’을 마주하며 전신마취의 모든 끔찍한 부작용이 신체로 몰아닥치는 것을 무력하게 느끼는 일이란, 느긋하게 물에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잊어버리기엔 지나치게 강렬한 종류의 것이었다. 불유쾌함은 당연하게 딸려 온 덤이었고.
누군가 날이 무딘 도끼로 정수리를 쪼개 놓고 둔기로 사지를 늘씬하게 두들겨 팬 듯한 둔통 속에서 리스는 신음하며 병실 침대 위에서 온몸을 뒤틀었다. 아니, 뒤틀었다기보단 꿈틀거리는 것에 더 가까웠다. 그는 평생동안 제 육체적인 능력을 갈고 닦아온 사람이었고, 제 육신을 자신의 의지로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엔 익숙하지 않았다. 아직 온전하게 돌아오지 않은 시야 속에서 시선을 집중할 만한 피사체를 찾아내기 위해 안구가 필사적으로 굴러가느라 안와 안에서 소리가 난다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기어코 희끄무레한 사람 모양의 형상이 제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을 때, 리스는 헛손질을 하는 와중에 간신히 얼굴에 부착되어 있던 인공호흡기를 뜯듯이 떼어내고는 밭은 숨을 연거푸 몰아쉬었다.
‘여기, 여기가 어디죠? 혹시 내가 공격을, 당한 겁니까?’
침착함을 가장할 여력조차 없었기에 입 밖으로 나온 문장은 형편없었고 더듬거리는 목소리에는 가래 거품이 끓는 것 같은 소리가 섞여서 났다. 리스에게 다가와 그를 내려다보는 상대는 무언가 말을 걸며 그의 신체 반응을 주의 깊게 살피는 기색이었지만, 리스의 고막에 와닿는 그 목소리는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불분명했다. 분명 로런이 크게 걱정할 텐데. 루시도. 리스는 공황 상태에 가까운 혼란 속에서 오직 두 개의 이름만을 번갈아가며 떠올렸다. 루시의 첫 등교니까 아침에 같이 가 주기로 했었는데……
‘제 가족한테 연락해 주세요. 제 휴대폰 연락처에, 로런……’
고작 몇 마디의 말을 띄엄띄엄 내뱉는 것만으로 모든 힘을 소진한 직후, 리스는 다시금 제 코와 입 위로 인공호흡기의 마스크가 씌워지는 것을 느끼며 까무룩 눈을 감고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에도 로런은 그의 곁에 없었다. 대신 리스를 맞이한 것은 군복보다는 좀 나은,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농장 일을 하다 급한 연락을 받고 그대로 뛰쳐나온 인부가 입을 법한 체크무늬 셔츠를 걸친 남성이었다.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침대에 누워 있는 리스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리스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대뜸 손을 뻗어 리스의 손목 부근을 가볍게 붙잡았다. 굳은살로 뒤덮인 손이었지만 피부 위에 닿는 손길은 어딘가 낯간지러울만큼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보스,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그 물음 앞에서 제임스 리스가 가장 또렷하게 떠올린 문장은 단 한 가지였다. 대체 누구길래 나를 보스라고 부르는 거지?
리스는 제 눈 앞의 남자가 왜 자신을 보면서 그렇게 애달프기까지 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 친밀함을 전제한 염려와 영문 모를 안도감이 뒤섞인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타인 앞에서 리스가 제일 먼저 느꼈던 것은 두려움에 가까운 당혹감이었다.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 군복을 입은 상대가 와 있었다면 더 나았을까? 리스는 여전히 혼란스럽고 멍한 정신으로 가볍게 숨을 몰아쉬면서, 제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인명부를 재빠르게 뒤적거렸다. 자신과 엇비슷한 나잇대로 보이는 백인 남성, 짙은 갈색 머리카락에 밝은 벽안, 남부 억양의 말투를 사용하는… 군인, 해군, 네이비 씰… 3팀, 포지션은…… 저격수.
‘……크리스… 크리스 카일?’
아예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완벽한 초면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 순간 가장 모순적인 불행이었을 것이다. 네이비 씰의 그 ‘크리스 카일’이란 이름은 같은 팀에 소속된 적이 없었던 리스에게조차 익숙했다. 심지어 같은 팀만 아니었을 뿐, 소속된 팀끼리 합동 작전을 한두 번 정도 같이 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 독특한 입대 이전 커리어와 과분한 무게감의 별명, 그리고 이를 증명해 보이던 정직한 실력은 한 팀의 리더를 맡은 입장에선 내심 눈도장을 찍지 않고 넘어가기 불가능했다.
‘자네가… 지금 왜 여기에 있나? 내 가족들은?’
그 때 리스는 누군가의 안색에서 그토록 순식간에 핏기가 가실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상황이 그렇지만 않았더라면 리스는 지금 당장 카일이 입고 있는 옷을 들추고 몸 어딘가에서 끔찍한 출혈이라도 발생한 것인지 확인해야 하나 걱정했을 것이다. 이 순간 그를 상처 입히고 피 흘리게 하는 것이 방금 제 입에서 경황 없이 튀어나온 어수선한 단어들의 날카로운 모서리 탓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로.
리스는 카일이 떨리는 제 아랫입술을 통째로 물어뜯듯이 꽉 깨물었다가 다시 놓는 것을 보았다. 혹사당해 표면이 너덜거리는 입술은 죽은 자의 것처럼 불길하게 새하얬다. 리스의 팔 위에 얹혀져 있던 카일의 손은 어느새 슬그머니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제임스 리스 소령님.’
짧고 힘겨운 침묵 끝에 다시금 흘러나온 카일의 음성은 사막의 마른 모래를 뭉친 것보다도 힘없이 부스러져 공기 중에 흩어졌다. 리스는 어째서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실시간으로 절망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여전히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많이 혼란스러우신 상황이란 거 압니다.’
카일은 목이 메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병실 밖을 나섰던 카일은, 곧 병원 복도에서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은 모조리 붙들고 오기라도 한 건지 한 무리의 의료진을 끌고 다시 돌아왔다. 리스는 그 중 제일 나이 지긋해 보이는 의사가 제 눈에다 불빛을 비추거나 의례적으로 물어오는 신체 증상과 관련된 질문들에 다소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금 어두운 표정을 한 채 조용히 병실 밖으로 나가 버린 카일의 빈 자리를 불안하게 곁눈질했다. 의사와 간호사들 모두가 리스가 던진 질문에(‘제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저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이상하리만치 말을 아끼는 태도인 것 또한 그의 내면의 불안을 아슬아슬한 선까지 부추기는 데 한 몫 했다. 어쩌면 크리스 카일이 이 사람들한테 미리 뭔가를 귀띔한 걸지도 모르겠어. 리스는 애써 막연한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생각했다.
카일은 의료진이 썰물마냥 병실을 빠져나가고 난 뒤에도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른 후에야 다시 병실로 들어섰다. 그 옆에 함께 나타난 사람은 리스의 사랑하는 가족도, 동료도 아닌 리즈 라일리였다.
벤도 아니고 리즈라고? 리스가 아는 그녀는 몹시 활동적이었고 그만큼 바쁜 사람이었다. 그의 가장 최근 기억 속에서 막 화물 비행 사업을 시작한 상태였던 그녀는 이러다간 곧 있을 하나뿐인 대녀의 생일 파티에 최초로 참석하지 못하게 생겼다면서 리스에게 모든 연락수단으로 푸념을 늘어놓았었다. ‘처음 그 시기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하다못해 나나 로런을 통해 화상 전화를 하면 되니까…’ 리스는 자신이 그녀에게 판에 박힌 소리를 어떻게 진부하게 늘어놓았는지를 아직도 ‘어제 일처럼’ 기억했다. 리스는 그녀가 제 침대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까지 의자를 끌고 와 천천히 자리에 앉는 것을 슬로우 모션 영상을 보듯 지켜보았다.
‘기분은 좀… 어때?’
어색한 미소와 함께, 좀 전의 카일과 똑같은 질문을 하는 라일리의 모습에 리스는 그만 긴장이 탁 풀려 맥빠진 웃음을 지어야 했다.
‘처음 일어났을 때보다는 괜찮아.’ 리스는 이 순간 어쩐지 자신이 그녀를 위로하는 입장이 되었다고 느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기억 손상을 입은 거지?’
라일리의 표정이 잔뜩 흐려지는 걸 보면서, 리스는 제 짐작이 제대로 들어맞았다는 사실을 확답받았음을 눈치챘다. 그는 다시 한 번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지금 제 얼굴 근육이 제대로 일을 하고 있을지는 차마 확신하지 못했다. 라일리는 그녀답지 않게 그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눈을 굴리면서, 다소 소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확히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어?’
‘내가 마지막으로 달력을 봤을 때는, 분명 루시의 초등학교 입학 전날 밤이었는데.’ 리스는 이 모든 것이 그저 가벼운 농담처럼 들리길 바라며, 제 어조를 아까보다 더욱 밝게 꾸미려 애썼다. ‘젠장, 대체 내가 얼마나 시간 여행을 한 거야?’
리스는 라일리가 제 말을 듣자마자 앓는 신음이 섞인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는 것을 지켜보며 멋쩍게 생각했다. 아무래도 내 유머감각을 조금 재고해 볼 필요가 있겠어. 그는 잠자코 라일리가 침착함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렸다. 한참만에 다시 얼굴을 든 라일리의 눈가는 아까보다 충혈되어 있었다.
‘제임스, 놀라지 말고 잘 들어.’
‘……날 얼마나 겁먹게 만들고 싶어서 이래?’
‘당신한테 중요한 이야기야.’
라일리의 태도는 마치 전쟁이라도 선포하는 것처럼 비장했다.
‘지금 당신 나이는 마흔 두 살이야. 시간이 그만큼 흘렀어.’
여기까지는 놀랍지만 여전히 예상 내에 있던 상황이었다. 리스는 일정 수준의 침착함을 되찾자마자 제 신체가 기억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제일 먼저 알아차렸다. 거의 비정상적으로 빠져 있는 체중과 몸 여기저기 남아 있는 잔 흠집 같은 흉터들은 그의 기억에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왼손 약지가 허전하다는 사실이, 이것이 거대하고 질 나쁜 만우절 장난이 아니란 사실을 증명했다. 차라리 그 손가락이, 아니, 왼손 전체가 잘려 나가 뭉툭한 흔적만 남아 있었대도 그만큼 간담이 서늘해지진 않았을 터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한 일이었지만 그의 기억에서 장기간 유실된 부분이 발생했고, 그 사이에 굉장히 많은 일들이 있었던 듯 보였다.
‘그리고,’
직후 라일리는 아주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뜸을 들였다. 그보다 좀 떨어진 자리에서 고해성사를 보러 온 사람마냥 접의식 의자에 어정쩡하게 앉아 몸을 수그린 채 꿈쩍도 않고 있던 카일은, 갑자기 화재 경보라도 들은 것처럼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곧 병실 문 근처를 경계심 많은 사냥개처럼 서성거렸다. 그리고, 그리고? 리스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심장에 바늘로 찌른 작은 구멍이 나 있고, 거기서부터 뜨거운 핏물이 아주 천천히 새어 나오는 듯한 불길한 고통을 느꼈다. 아까 육체에서 느꼈던 둔통과는 또 다른 출처 모를 통증이었다. 동시에 그의 본능이 두 귀를 막고 싶다고, 귀를 막을 수 없다면 그녀의 입을 지금 당장 틀어막아야만 한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로런이랑 루시는—’
한참 뒤, 깨진 수액병에서 흘러나온 액체와 핏물로 끔찍한 난장판이 된 일인실 병실에 널브러진 채 정신을 차린 리스는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높이의 두툼한 서류철을 하나 받아들었다. 서류철의 표지에 적혀 있던 것은 어떤 뜻이 있는 단어조차 아니었다.
「RD4895」
리스는 그 두 개의 알파벳과 네 개의 숫자가 제 인생을 송두리째 파괴한 주범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는 제 팔뚝에 꽂혀 있던 링거의 바늘을 무식하게 잡아 빼는 것을 시작으로 병실의 모든 물건을 때려부수느라 다 찢어져버린 오른손을 벌벌 떨면서 서류철의 표지를 넘겼다.
리스가 사랑하고 아꼈던 모든 이름들이 가장 최악의 형태로 그 안에 기록되어 있었다. 바위 표면에 끌과 정으로 새겨 넣어 영원히 지워지지 않게 된 글자들처럼.
그렇게 서른 여섯 살의 제임스 리스는 마흔 두 살의 신체 안에서 눈을 떠, 자신의 인생을 이루고 지탱해 왔던 것들이 모두 물거품처럼, 덧없는 환상처럼 사라졌음을 선고받아야만 했다. 손쓸 수도 없이 머리 위에서부터 들이닥친 집채만한 해일과 같은 진실 앞에서 그의 뇌종양 투병이나 몇 년 간의 기억이 거의 대부분 유실되었다는 사실 따위는 모두 하찮고 사소한 것이 되었다. 지금에 와서 제 옆자리에 집 지키는 개처럼 머물고 있는 사람이, 이전까진 특별히 인연이랄 것이 거의 없었던 네이비 씰 3팀 출신의 중사 크리스 카일이란 점까지도.
***
“다행히 수술 이후 예후가 좋은 편이니, 분명 기억도 금방 회복될… 리스 씨?”
리스는 얕은 오수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반짝 고개를 들고, 제 짧은 상념을 깨뜨린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를 담당하는 담당의가 작은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둔 채 그를 마주하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또 얼마나 오래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지? 리스는 제 겸연쩍음을 무마하기 위해 괜시리 마른세수를 하면서 익숙한 착잡함을 느꼈다. 동시에 습관적으로 제 담당의의 표정과 옷차림, 자세, 억양에서 특정한 신상 정보들을 읽어내려다 기계의 전원 버튼을 강제로 끄듯이 의식적으로 관두었다. 지금 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적대적인 인물이 아니었고 해코지를 할 의향도 없었으니 집중력을 불필요하게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좀 피곤해서요. 뭘 한 것도 아닌데.”
“원래 수술 이후에는 몸이 내 마음같지가 않죠.”
제임스 리스라는 인간의 머리통을 문자 그대로 ‘열어 본’ 당사자는, 리스가 여태까지 만나 본 의료계 종사자 중 환자에게 꽤나 친절하게 구는 축에 속했다. 제 업무의 부담감을 환자에게 떠넘기며 신경질을 부리거나 귀찮아하는 내색을 일절 보이지 않고, 최대한 긍정적인 대답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티가 났다. 그야 대낮에 도시 한복판에서 사제 폭탄을 터뜨리고 총을 갈겨댄 미치광이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리스는 스스로에게 코웃음을 치며 냉소적으로 반박했다. 어떤 친절은 결코 이유나 조건 없이 주어지지 않는 법이다. 리스는 자신이 이 병원에서 가장 골칫거리 환자일 게 분명함을 알고 있었다. 그는 문득 꼴보기 싫은 신하에게는 하얀 코끼리를 하사했다던 옛 왕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리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가 없는 담당의는 제 환자의 무례한 침묵을 예사롭게 받아 넘기면서 검사 결과가 띄워진 모니터를 향해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정작 리스에게는 어떠한 흥미도 느껴지지 않는 결과들이었다. 그는 제 건강 상태에 대해 초연하다 싶은 수준으로 무관심한 환자에게 크게 언짢아하는 기색은 아니었으나, 마치 할 말이 있으면 털어놓으라는 듯이 침묵을 고수했다. 결국 짧은 침묵을 견디지 못한 리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저와 같은 경우가 다른 뇌종양 환자들에게도 흔하게 발생합니까? 그러니까, 수술 후에 이렇게… 되는 거 말입니다.” 리스는 ‘기억 상실’이란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을 주저하며 어물쩍 말끝을 흐렸다. “이런 일은 영화에서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뇌종양 수술 이후에 나타나는 부작용은 몹시 다양합니다. 뇌는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하고 민감한 기관이고, 수술적 요법은 바로 그 기관을 직접 건드리는 거니까요. 불행하게도 기억 상실 또한 종종 보고되는 부작용 중 하나죠… 물론, 리스 씨처럼 특정 기간의 기억만 통째로 유실되는 경우는 결코 흔한 일이 아니지만요.”
리스는 모니터에 띄워져 있는 MRI 검사 결과 사진을, 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제 것이 아닌 것처럼 새삼 생경하게 바라보았다. 밤바다 위의 섬 같은 창백한 대뇌 피질 한복판에 찍혀 있는 큼직한 붉은 점이 마치 지도에 표시해 둔 공략 지점 같았다. 이제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공략 지점.
“그래도 그 시기의 기억들 중 일부는 돌아오고 있다고 하셨죠. 맞습니까?”
“네, 뭐… 드문드문이긴 합니다만.” 리스는 드물게 자신감 없는 태도로 대꾸했다.
“보통 기억 상실을 경험한 환자들은 ‘잃어버린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사실 자체에 몹시 초조해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초조해한다고 해서 기억이 빨리 돌아오는 것은 아니죠. 오히려 그런 불안이 환자 본인의 정신 건강에 더 악영향을 미치기도 하고요.” 그는 리스를 격려하고 싶은 것처럼 살짝 미소지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리스 씨가 오직 회복하는 일에만 집중해 주셨기에 역설적으로 기억 또한 순조롭게 돌아올 조짐이 보이는 것이겠지요. 전부 리스 씨가 매우 강인한 분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저는 강인한 게 아닙니다. 그냥 구제불능의 멍청이인 거지.’ 리스는 퉁명스런 말대꾸가 용수철처럼 무례하게 튀어나가려는 것을 억누르기 위해 가볍게 목을 가다듬는 척 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상대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힘든 수술도 잘 이겨내셨잖습니까. 앞으로는 쭉 좋아질 일만 남았죠.”
의사가 하는 일이란 자신이 담당하는 환자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고, 따라서 환자가 ‘회복’의 조짐이 보인다면 기뻐하고 축하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리스는 그 낙관적 사고에 도무지 함께할 수 없었다. 리스는 이 선량하고 모범적인 의사의 얼굴에 침을 뱉고 고래고래 고함치고 싶은 충동을 참아 내기 위해 허벅지 위에 놓았던 두 주먹을 움켜쥐어야만 했다. 당신이 만약 내 입장에 처했다면 그딴 기억들을 되찾고 싶겠어? 리스는 모든 모진 말들을 간신히 속으로 삼켜냈다. 불에 바싹 달군 자갈과 모래알의 크고 작은 알갱이들 하나하나가 울렁거리며 식도를 타고 위장까지 넘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거 참……” 리스는 제 혀에 스며든 해묵은 독을 언어의 형태로 뿜어내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참 다행이군요.”
이 이상 쥐어짜낼 이야깃거리가 있을 리 만무했으므로, 그 이후의 대화는 모두 틀에 박힌 순서대로 흘러갔다. 리스는 복용약의 처방전 발급과 다음 검사 일자에 대한 얘기들에 모두 건성으로 대꾸한 뒤 진료실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평일 낮 시간대의 병원 로비 풍경은 꽤나 한산했다. 복도의 한쪽 면이 온통 통유리로 되어 있는 덕분에, 복도를 천천히 오가는 몇몇 사람들의 머리 위로 햇빛이 쏟아지는 광경은 꽤나 온화하고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결국 병원이란 오랜 시간 머물기엔 즐거운 장소가 아닌 법이다. 리스는 모자의 챙을 보다 깊이 눌러쓰면서 로비 쪽을 훑듯이 살폈다.
크리스 카일은 로비에 마련된 대기 공간에서 가장 햇빛과 먼 자리에 앉아 골똘한 얼굴을 한 채 얄팍한 팜플렛 몇 가지를 신문 기사라도 읽듯이 진지하게 들여다 보고 있었다. 차분한 색상의 팜플렛에 적혀 있는 몇 개의 문장들이 리스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대한 이해」
「가까운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세요: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재향 군인들을 위한 위기 상담 전화는 24시간 전국 핫라인을 제공하며…」
카일은 리스의 ‘보호자’로서 병원에 방문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환자 본인이기도 했다. 본의 아니게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생활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리스는 카일이 챙겨 먹던 몇 가지 알약들을 우연히 본 적이 있었다. 대개 수면제나 항우울제 계열의 것들. 리스는 파병을 다녀 온 뒤 PTSD를 앓게 된 군인들이 병원에서 어떠한 약을 처방받게 되는지에 대해서 싫을 만큼 알았다. 비록 카일의 자존심은 지금의 리스에게 제 ‘약점’을 먼저 자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듯 보였지만, 딱히 필사적으로 숨긴 것도 아니었으니 알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제임스 리스는 헛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그러니까 여태껏 환자가 환자를 돌보고 있었다는 거군. 뇌종양 환자를 홀로 보살피는 PTSD 환자라니. 눈 먼 개의 목줄을 다리 저는 개가 입에 물고 용케 여기까지 질질 끌고 온 셈이다.
다만 오히려 그것이 리스의 머릿속을 개운하리만치 명료하게 만들기도 했다. 마치 한여름의 햇볕에 뜨겁게 익은 정수리 위에 차디 찬 얼음물을 끼얹는 것처럼, 이 모든 상황이 어떠한 환각도 섞이지 않은 현실임을 그에게 절절하게 상기시켰다. 가장 최악의 방식으로 모든 걸 잃은 후에 새롭게 선택한 동거인이 PTSD 때문에 주기적인 상담을 받고 약을 먹어야 하는 텍사스 출신의 전직 해군 중사라는 것을 환상이나 착각으로 빚어낼 만큼 제임스 리스는 상상력이 풍부하거나 유연한 사고방식을 지니지는 못했으므로.
하지만 동시에 리스는 자신이 어째서 그러한 선택을 했는지를 의심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만큼 그 당시의 자신은 외롭고 절박했던 것일까? 어쩌면 마흔 두 살의 제임스 리스는 서른 여섯 살의 제임스 리스가 감히 상상도 못할 짓을 벌일 만큼 단단히 미쳐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지난 2년 가까이 대뇌 안쪽에 들어차 있었다던 그 망할 종양 덩어리가 정신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친 거겠지.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가설이었다. 미친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제 와서 다른 누군가를 곁에 두는 삶을 또 다시 선택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일들을 겪고도?
리스가 다가가 말을 걸기 전에 인기척을 느낀 카일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리스는 그가 자신을 보자마자 굳어 있던 눈매를 부드럽게 누그러뜨리는 것을 눈치챘다.
“벌써 다 끝났습니까? 저번보다 훨씬 빠른 것 같은데요.”
“이번엔 간단한 검사 뿐이었으니까.” 리스는 자신을 향해 솔직하게 미소짓는 카일 앞에서 어쩐지 쑥쓰러운 기분을 느꼈다. “그러는 자네는?”
“저야 뭐… 여긴 보스 볼일 때문에 온 건데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카일은 손목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는 미련 없이 떠날 채비를 했다. 리스는 그가 손에 들고 있던 팜플렛을 바로 옆 자리에 두었던 가방 안에 집어넣는 것을 못본 척 하면서 슬그머니 눈길을 돌렸다. 아예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는 것보다야 훨씬 나을 터였다.
카일이 병원 프론트 데스크에서 체크아웃 절차를 마무리하는 동안 몇 걸음 뒤에서 가방을 든 채 멀뚱멀뚱 서 있던 리스는, 곧장 돌아온 카일이 제 손에서 가방을 다시 가져갈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먼저 성큼성큼 앞서 나간 그가 야외 주차장이 아닌 정문으로 향하는 것을 눈치챘을 땐 살짝 눈살을 찌푸려야만 했다.
“이 쪽은 주차장으로 가는 길이 아닌 것 같은데.”
“오늘 해야 할 일은 다 끝냈잖습니까. 외식 정도는 해도 괜찮겠죠.”
“…밥은 집에 가서 먹으면 되잖아.”
“하지만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도요?” 카일은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진다는 사실에 대해 말하는 듯한 태도로 대꾸하며 탁 트인 푸른 하늘을 향해 가볍게 턱짓했다. “이대로 집에 가면 또 제가 만든 칠리나 데워 드셔야 할 겁니다.”
꽤나 넉살을 부리고는 있었지만 결국 곧장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다는 이야기였다. 정작 리스는 칠리든 뭐든 상관없으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지금 카일이 어째서 답지 않게 철 없는 어린애처럼 구는지 그 의도를 아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리스는 지난 석 달 동안 자신이 집 밖을 나간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이며(그나마도 한 번은 수술 이후 첫 진료를 받기 위한 병원 방문이었으니 반쯤 타의였다), 집안에서도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방안에 틀어박힌 채로 흘려보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상기했다. 결국 리스는 한숨을 쉬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이 리스를 데리고 간 식당은 병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있는 캐주얼한 델리였다. 지저분하진 않았지만, 간판과 건물에서 오래된 티가 역력하게 드러나는 곳이었다. 리스는 카일을 뒤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서 습관적으로 내부의 이동 경로와 손님들의 면면을 살폈다. 다소 아담한 규모의 식사 공간에는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노부부 한 쌍과 세 명 정도의 어린 학생들이 각자의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그는 대번에 이 식당이 지역 내에서 갖고 있는 입지를 파악했다. 오가는 길에 간단한 음식을 포장해 가거나 주머니가 가벼운 상황에서 끼니를 떼울 만한 장소로는 적절하되, 첫 데이트 상대를 데리고 근사한 저녁식사를 하기에는 조금 부적절한 장소.
익숙한 태도로 가장 안쪽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은 카일이 직원에게 두 명 분의 메뉴를 시키는 동안 ‘난 아무거나 상관 없어.’ 라는 한 마디를 제외하곤 꼭 입이 없는 사람처럼 침묵했던 리스는, 제 몫의 음식 그릇이 앞에 놓이고 나서야 다시금 말문을 열었다.
“내가 자네랑 여기 자주 왔었나?”
카일은 포크를 집어들다 말고 눈을 빠르게 두어 번 깜빡거렸다.
“처음 온 것은 아닙니다.”
“몇 번이나?”
“……예전엔 진료가 끝났을 때마다 왔던 것 같네요. 아무래도 병원에서 가까운 데라서.” 카일은 멋쩍은 표정으로 변명하듯 덧붙였다. “예약 없이 와도 되고, 음식도 빨리 나오고, 가격대도 적당하고요.”
리스는 지극히 소소한 이유로 결정된 이 선택지가 악의라곤 한 톨도 없는 무신경함과 장기적으로 숙련된 익숙함이 절묘하게 혼합된 ‘일상적’인 것임을 눈치챘다. 아마 수술을 받기 이전의 제임스 리스는 통원 치료를 끝낸 뒤 매번 크리스 카일과 함께 이 곳을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샌드위치나 베이글, 혹은 갓 튀긴 치킨과 감자 따위를 시켜 놓고 이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커피에다 크림을 넣고 있었겠지…
다시금 시작된 리스의 침묵을 부정적인 감상으로 받아들였는지, 카일은 아까보다 훨씬 더 주눅이 든 표정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 마음에 안 드시면 다음 번에는 다른 데로 가죠.”
“아냐. 괜찮아, 여기도.”
리스는 아무렇지 않게 빈말로 대꾸하며 제 몫의 베이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물고 오랫동안 씹어 삼켰다. 그 사이 카일은 슬쩍 리스의 물잔을 그의 오른손과 가까운 쪽으로 밀어두었다.
“의사는 이번에 뭐랍니까?”
“예후가 괜찮다더군.” 리스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기억 문제는… 이대로 지내다 보면 곧 회복할 가능성이 높다고도 했어.”
“……뭔가 또 기억나신 게 있습니까?”
“음, 루시가 이쪽 젖니가 빠졌던 일.” 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제 입을 살짝 벌려 위쪽 송곳니 부분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그날 밤에는 자기 전까지 이빨 요정이 나오는 책을 같이 읽었지.”
리스는 그 책의 표지에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지, 제 어깨에 기댔던 루시의 머리카락이 얼마나 가늘고 부드러웠는지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사라졌던 기억이 드문드문 되돌아오는 과정은 마치 말라붙은 개울에서 사금을 채취하는 것과 같았다. 두통이나 기절 같은 극적인 신체 반응은 없었다. 그저 흙탕물 속에서 조용하게 반짝거리는 알갱이들처럼 불분명한 의식 사이에서 불현듯 그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다. 다만 한 번 그 반짝임을 인식하고 나면, 어째서 여태껏 잊고 있었는지 의아해질만큼 자연스럽게 기억의 공백을 메꿔놓곤 했다. 마침내 올바른 위치에 놓인 직소 퍼즐의 조각처럼.
“그리고 그 애가 2학년 때 교내 철자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았던 것도 기억이 나.” 루시에 대한 기억을 얘기하며 리스는 제 얼굴 근육이 녹은 크림처럼 서서히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따스한 기분이었다. “내 딸이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정말로 영리한 아이였어.”
“대단하네요. 전 그 나이 때 그냥 밖에 나가 놀기에만 바빴던 것 같은데. 책 읽는 것도 엄청 싫어했었고요.”
“흠, 루시도 수학은 싫어했었지.”
“그건 좋아하는 애가 더 드물지 않습니까?” 카일이 장난스럽게 킬킬거렸다.
“하지만 루시의 친구 중 한 명은 수학을 좋아했는걸. 그 애 이름이, 뭐였더라—”
크리스 카일은 리스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태도의 청자였다.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다소 두서없이 나열되는 모든 팔불출같은 이야기에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며 성의껏 맞장구를 쳐 주는 사람. 그는 마치 리스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얘기들은 그게 뭐든 자신이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다는 듯이 굴었다.
“2년 전부터 수술 전까지 있었던 일들은 아직 기억나지 않아.”
그 성실한 태도 앞에서 그만 긴장이 지나치게 풀려 버린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먼저 번개가 치고 난 후 천둥 소리가 뒤따라오는 것처럼, 리스는 목소리를 내뱉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를 뒤늦게 의식했다. 카일의 얼굴에 내내 머물러 있던 웃음기가 조금 사라졌다. 이미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으므로 리스 또한 그저 눈을 조금 내리깔고 시선을 낮췄다. 카일이 입고 있는 점퍼의 손목 소매 끝이 닳고 헤진 것이 보였다.
“자네한테는 정말 미안하게 됐어.”
“아닙니다. 보스가 왜 사과를 하십니까?”
카일의 목소리가 당혹감으로 조금 높아졌다.
“억지로 기억해 내려 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저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전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의사도 그렇게 말했다면서요?” 다급하게 말을 쏟아내느라 카일의 말투에서 남부 억양이 더욱 두드러졌다. “보스한테 꼭 필요한 기억이라면, 분명 알아서 다시 회복될 겁니다.”
“그럼, 만약 이러다 내가 앞으로도 영영 그 기억들을 떠올리지 못하면 자넨 어쩔 셈이야?”
카일의 입술이 잠시 일자로 다물렸다가 천천히 열렸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모두 보스에게 필요 없는 기억이었다는 뜻이겠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카일은 못을 박듯이 조금 더 힘주어 말했다.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리스는 시선을 들어 새삼스럽게 카일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흠 없이 밝은 파란색 눈동자는 산들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날씨의 호수 표면처럼 잔잔했다.
“참 이상한 일이군.” 리스는 카일이 들을 수 있을 만큼만 작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네는 그 누구보다도 내 기억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 같아.”
그 말이 정곡을 찌르기라도 한 것인지, 카일의 입은 다시금 이물질을 삼킨 조개마냥 굳게 닫혔다. 리스는 문득 그런 카일의 태도가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숨을 쉬면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자네 이야기를 해 줘.”
카일의 두 눈이 다시금 둥그렇게 커졌다.
“뭐든지 좋아. 자네 고향 얘기든, 군에 있을 때 있던 얘기든, 아무거나 좋으니…” 리스는 하던 말을 멈추고, 곤란한 얘기를 들었을 때 지을 법한 종류의 미묘한 미소를 얼굴에 띄운 카일을 향해서 새삼스럽게 미심쩍은 눈길을 보냈다. “갑자기 왜 그렇게 웃어?”
“아, 아닙니다.” 카일은 멋쩍어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냥, 예전엔 제게 그런 걸 별로 묻지 않으셨는데 싶어서요.”
이번에는 리스가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을 지을 차례였다. 정말로, 이 순간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해서였다. 뒤늦게 몰려든 부끄러움 탓에 양쪽 귀의 귓불이 달군 쇠다리미를 갖다댄 것처럼 순식간에 뜨거워지는 것리 느껴졌다. 빌어먹을 제임스 리스, 인간관계 한 번 끝내주게 쌓아 놨군. 리스는 짧게 마른세수를 파며 구겨진 미간을 손끝으로 꾹꾹 문질렀다.
“……난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무심한 사람이었군그래.”
혹은 이미 알고 있는 게 많으니 딱히 물을 것이 없었던 걸지도 모르지. 리스는 과거의 자신이 진작 카일의 가계도며 초등학교 성적표까지 탈탈 털어 모조리 찾아냈을 것이란 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리스는 ‘제임스 리스’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잘 알았다. 그런 끔찍한 일을 겪은 이후의 제임스 리스라면, 제 곁에 새로운 누군가를 위한 자리를 만들 생각이 들었을 때 제일 먼저 그렇게 했을 터였다. 단순한 하우스메이트를 구하는 것이라기엔 지나칠 정도로 꼼꼼한 뒷조사와 평가가 동반되었겠지. 리스는 카일이 이러한 사실을 과연 짐작이나 하고 있을지 조금 걱정스러웠다.
“죄송합니다. 보스를 탓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나도 자네한테 면박을 주려 한 건 아니야.” 리스는 겸연쩍음을 감추기 위해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애초에 내가 자네한테…”
내가 자네한테 어떻게 싫은 소리를 하겠나?
리스는 결국 하려던 말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 그는 목구멍에 작은 생선 가시가 걸린 사람처럼 애꿎게 물을 들이켰다.
‘회복’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의 빈 시간이 대책 없이 주어진 동안, 리스는 몇 번이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과 스스로의 상태를 평가했다. 지금도 썩 보기 좋은 몰골은 아니었지만, 수술 이전에는 더 심한 상태였을 것이다. 몸도 마음도 중병이 든 환자의 뒷수발을 드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그 중환자가 제임스 리스라면 더욱 그렇다. 그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이었을 것이 뻔했다.
애초에 리스는 카일이 대체 어떻게 자신에게 종양 제거 수술을 받도록 설득했는지 도통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는 동시에 리스의 또 다른 의문과 연결된 것이기도 했다. 자신은 대체 어째서 모든 복수를 끝낸 뒤에도 병든 몸뚱이를 비에 젖은 외투마냥 질질 끌고 다니다 여기까지 다다른 것일까?
물론 리스는 사실 정답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단지 그게 정답임을 애써 부정하고 싶어, 사냥꾼의 눈을 피해 수풀에 머리를 처박은 순진하고 어리석은 초식동물마냥 굴고 있을 뿐.
“카일.”
문득 리스는 그의 이름 일부를 소리내어 부르는 일이 너무나도 어렵다고 생각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흔한 이름에 불과한데도, 낚싯바늘에 꿰인 물고기처럼 혓바닥에 무게추라도 달린 듯한 기분이었다. 묵묵히 유리창 바깥의 풍경을 향해 시선을 주던 카일이 리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네는 로런이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도니나 부저 같은 입장조차 아니었지.”
이번엔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리스는 다음 말들을 잇기 전 두 눈을 조금 오래 감았다 떴다.
“과거의 나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자네를 절대 그들 대신으로 삼을 수 없어. 난 계속해서 그 빈 자리를 의식할 거야. 그건 자네에게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닐 거고.”
큰 수술을 한 탓에 위장도 덩달아 줄어들었는지, 고작해야 베이글 샌드위치를 한 입 먹었을 뿐인데도 속이 얹힌 것처럼 명치께가 불편했다. 리스는 메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불안하게 핥으면서 다시금 시선을 내려 자신의 그릇 위를 바라보았다. 베이글의 부스러기가 그릇 위에 조금 떨어져 있었고, 무심코 테이블 위에 올라온 왼손 약지에는 너무나 익숙한 결혼 반지가 천연덕스럽게 끼워져 있었다. 이것과 짝을 이루는 반지를 나누었던 상대는 이제 더는 이 세상에 없는데도.
“그러니까… 내 생각엔 자네가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 줘야 할 어떠한 의무도 없어. 설사 자네가 나한테 빚을 진 게 있었대도, 여기까지 왔으면 이미 모두 청산되고도 남았을거야.”
리스는 그간 카일이 자신을 돌본 것에 대해 다리 저는 개가 눈 먼 개를 서툴게 끌고 다닌 꼴이라고 빈정거리긴 했으나, ‘눈 먼 개’의 입장에선 그마저도 없으면 아쉬운 소중한 도움의 손길인 법이다. 제임스 리스에게 최소한의 양심과 염치란 것이 아직 존재한다면, 지금 이 순간 크리스 카일에게 표현해야 할 것은 추궁도 의심도 아닌 감사의 인사 한 마디였다.
“그 동안 날 도와줬던 건 정말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자네의 호의에 내가 돌려줄 수 있는 건―”
“저는 대가를 원해서 당신 곁에 있었던 게 아닙니다.”
드물게도 리스의 말을 중간에 끊어낸 카일의 목소리는 끝이 조금 갈라져 있었다. 리스는 그 말이 완전히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조건 없는 희생이란 그리 쉽게 성립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과거의 내가 대체 얼마나 어마어마한 보상을 약속했길래 자네가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어. 리스는 주먹을 꾹 움켜쥔 채로 마저 튀어나오려던 말을 씹어 삼켰다.
“……도저히 이해가 안 돼.”
리스는 끝내 푸념하듯 말했다.
“내가 자네한테 무슨 가치가 있어서 이렇게까지 해?”
카일은 햇빛에 눈이 시린 사람처럼 눈살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지난 석 달 동안 리스가 파악했던 ‘크리스 카일’은 결코 포커 페이스에 능숙한 편이 아니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그의 표정을 쉽게 읽어낼 수 없었다. 리스는 카일의 뺨 위에 드리운 속눈썹의 긴 그림자가 간헐적으로 떨리다가 잠잠해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랫입술을 몇 번 달싹거린 끝에 나온 카일의 목소리는 리스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퍽 침착했으며, 내용 또한 단순했다.
“그런 걸 일일이 생각하면서 행동하지 않는 편이라서요.”
두 사람의 시선이 한동안 허공에서 불안하게 맞물렸다. 그러나 결국 그걸 먼저 힘겹게 끊어낸 것은 리스 쪽이었다. 그는 카일을 외면하듯 시선을 돌리고 여태까지 중 가장 냉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생각해 보는 편이 좋을 거야.”
카일은 이번에도 침묵하는 것으로 자신의 대답을 대신했다. 정확히는, 그는 이제 제 입을 오로지 식사를 하는 용도로만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듯 싶었다. 카일은 리스에게 더 말을 건네는 대신 묵묵히 제 몫의 치즈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리스는 그가 음식을 모두 다 먹을 때까지 물조차 입에 대지 않은 채 단지 유리창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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