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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4 19:23
도와주세요. 케이타의 말에 대한 하치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소라는 그 즉시 하치의 등에 업혀 스즈키 가 저택으로 옮겨졌다. 저택엔 최고의 의사라는 사람들이 몰려왔다. 케이타는 소라를 돌보는 의사와 가복들에 휩쓸려 소라를 볼 수 없었다. 소라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자 케이타는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숨이 꺽꺽 막힐 정도로 울며 소라를 찾는 케이타를 하치는 한없이 다정하게 달랬다. 괜찮을 거라고, 지금 치료하고 있다고 아무리 말해 줘도 듣지 못하는 듯한 케이타를 안고 얼렀다. 그러나 케이타는 결국 울다 지쳐 쓰러졌다. 케이타는 깨고 나서야 제가 처음 보는 방 안에 있다는 것, 그리고 하치가 제 손을 잡고 제 옆 의자에 앉아 잠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케이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 침실보다도 넓은 방에 제가 아주 부드러운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보니 중요한 사람의 방인 듯했다. 케이타는 퉁퉁 부은 눈을 억지로 뜨며 일어났다. 그러자 케이타의 손을 잡고 있던 하치는 즉각 일어나 고개를 털었다. 케이타는 화들짝 놀라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하치가 케이타를 멈춰세우고 낮고 다정하게 말했다.
"마음고생을 많이 해서 몸이 지치셨을 겁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지금은 쉬세요."
“소, 소라는요?"
"같이 오신 분은 아직 깨어나진 않았지만 안정을 찾으셨다 합니다. 몸이 다친 것보다도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아 정신을 잃으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케이타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꼬박 하루를 주무셨습니다. 시장하실 테니 뭐라도 드시지요."
하치는 그렇게 말하며 가복을 불러 죽을 가져오라고 했다. 금방 도착한 죽은 뜨끈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이 아주 맛있어 보였다. 그러나 케이타는 심한 탈력감과 떨어진 체력에 손을 너무 떠는 탓에 숟가락을 죽에 담그기도 어려워했다. 보다 못한 하치가 죽그릇과 숟가락을 가져갔다.
"아 하십시오."
케이타는 불안하게 눈알을 굴리다 입을 벌렸다. 하치는 죽을 한 술 떠서 후후 불어 케이타의 입에 넣어 주었다. 죽은 아주 맛있었지만 손수 죽을 떠먹여주는 하치에 케이타는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것은 걱정하지 말고 일단 드십시오."
하치의 말에 케이타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배가 고픈지도 몰랐던 케이타는 죽을 전부 해치웠다. 그제야 정신이 차려진 케이타가 우물쭈물하다 물었다.
"저...여기가 어딘가요?"
"제 침실입니다."
케이타는 하얗게 질렸다. 그러면 그렇지. 제 몸을 원하는 거였구나. 하치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으니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했지만 소라에게 불과 이틀 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본 케이타는 지금 도저히 다리를 벌려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하치를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케이타는 생각했다. 결국 케이타는 하치의 눈치를 보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치는 황급히 그런 케이타를 제지했다.
"오해입니다. 그러려고 제 침대에 눕힌 것이 아닙니다. 푹 쉬게 해드리려고 했을 뿐입니다."
하치의 말에 안심하면서도 케이타는 경계했다. 도망간 저를 잡아오기까지 했으면 그럴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러나 밥을 먹자 다시 쏟아지는 졸음에 케이타는 결국 하치가 시키는 대로 누웠다. 혹여 제가 잠든 사이 무슨 짓을 할까봐 잠들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케이타의 눈 위를 큰 손이 가볍게 덮었다. 놀란 케이타가 눈을 깜빡이자 속눈썹에 걸리는 남자의 손바닥이 느껴졌다. 하치가 작게 웃었다.
"걱정 말고 푹 쉬세요. 아침이 오면 깨워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들으며 케이타는 결국 눈을 감았다. 곧 하치의 손이 제 눈가를 떠나는 것을 느끼며 케이타는 조금 아쉬워했다가 그런 제 자신을 속으로 혼냈다. 어쩔 수 없었다. 케이타는 본래 손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손은 케이타 곁을 완전히 떠나는 대신 케이타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안심하고 푹 주무세요. 하치가 속삭이는 말을 들으며 케이타는 절로 편안해지는 기분에 잠에 빠져들었다.
케이타가 다시 깼을 때는 아침이었다. 소라도 깨어났으니 함께 조식을 먹자며 하치는 나갈 것을 권했다. 스즈키 가에 오고 나서 둘쨋날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자의로 방 밖을 나가본 적이 없는 케이타는 무척 긴장했다. 그러나 하치를 뒤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우물쭈물하며 케이타는 하치를 따라갔다. 하치가 케이타를 이끈 곳은 커다란 상이 놓인 방이었다. 상 주위에는 이미 소라와 무섭게 생긴 남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소라!"
케이타는 소라에게 달려들어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다. 소라는 그런 케이타를 받아 안으며 다정하게 등을 쓰다듬어 달랬다.
"난 이제 정말 괜찮아."
소라의 말에도 케이타는 한참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소라에게서 떨어지고도 훌쩍거리는 케이타에게 하치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케이타는 어색하게 받아 얼굴을 닦았다.
"제가 남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동안 나나를 돌봐주신 것에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소라는 케이타를 케이타 대신 나나라고 부르는 하치의 말에 눈썹을 살짝 들어올렸지만 케이타의 간절한 시선을 마주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라는 멋쩍은지 큼큼, 헛기침을 하고 말을 꺼냈다.
"저야말로 치료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정신도 차렸으니 돌아가겠습니다."
"뭐? 안 돼 소라, 그 남자가 또 오면 어쩌려고 그래!"
케이타는 질색팔색을 하면서 말렸지만 소라는 한숨을 푹 쉴 뿐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케이타는 그 말에 하치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하치는 흔들리는 눈으로 케이타를 바라보다가 결국 눈을 꾹 감고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계속 함께 사시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첩을 들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또 혼기가 넘은 사람을 들이는 것은 좋지 않아."
"시시오. 나도 알아. 그렇지만..."
"잘 생각해."
하치는 생각에 잠겼다. 케이타는 발을 동동 굴렀다.
"정말 방법이 없어요?"
케이타가 또 울려고 하는 것을 보자 하치가 황급히 케이타를 달랬다.
"울지 마십시오. 다 괜찮습니다. 형, 그럼 형이 들이면 되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형, 한번만 생각해 보라니까? 집이 저분께 안전하지 않다잖아!"
"다들 그만!"
케이타는 훌쩍훌쩍 울고, 시시오라던 사람은 반발하고, 하치는 화를 내는 와중에 소라가 벌떡 일어났다.
“케...나나 같은 경우도 아니고, 얄팍한 동정심으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 첩 자리로 들어가는 것은 싫습니다."
"그거 잘 됐군요. 저도 당신 같은 첩은 싫습니다."
소라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하자 시시오는 그런 소라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며 나가 버렸다. 결국 소라는 다른 대안을 찾을 때까지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스즈키 가에서 지내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소라는 마음이 복잡해 보였지만 케이타는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보고 하치가 웃었다. 하치의 웃음에 케이타가 즉각 눈치를 보았지만, 하치는 그저 기뻐하는 모습이 좋았다고 했다. 케이타는 여전한 어색함과 경계심에 눈을 굴렸지만 하치는 케이타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케이타와 눈을 마주쳤다.
"지금까지 제가 좋은 남편은 아니었지만, 이제부터는 부족함 없는 남편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금은 서로 아무것도 몰라 믿기 힘드시겠지만 차차 더 알아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나나 씨가 마음을 열 수 있게 노력할 테니 천천히 마음 가는 대로 따라와주세요."
하치의 말에 케이타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치는 환하게 웃었지만 소라는 복잡한 눈으로 그 둘을 바라보았다. 그 후부터의 하치의 행동은 그 말 그대로였다. 하치는 식사 때마다 시시오와 하치, 케이타와 소라가 함께 밥을 먹도록 권했다. 첩에게는 이미 분에 넘치는 처사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하치는 식사 때마다 케이타를 못 챙겨서 안달이었다. 케이타가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케이타 앞에 반찬을 끌어다 놓고 식사 시중을 들며 아예 케이타에게 밥을 떠먹여줄 기세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치는 케이타가 잠들기 전 밤마다 케이타에게 와서 잘 자란 인사를 했고, 낮이면 케이타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처음엔 케이타는 쌀쌀했던 하치의 첫인상을 떠올리고 하치의 행동 하나하나에 눈치를 보며 겁을 먹었다. 그러나 하치는 그런 케이타를 매번 어르고 달래어 점점 마음을 열게 했다. 케이타가 결정적으로 하치를 믿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제가 또 도망치면 어쩌시려고요? 친절하게 정원과 스즈키 가 저택의 길을 알려주는 하치에게 케이타는 어느 날 물었다. 그 말에 하치가 지은 슬프기 그지없는 표정에 케이타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저를 떠나고 싶으시다면 막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를 떠나 나나 씨가 편안히 살 수 있도록 금전적인 지원은 하게 해주십시오. 그 말에 하치의 감정의 무게를 깨달은 케이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치는 마치 케이타에게 다정하게 굴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 같았다. 케이타는 정에 고픈 사람이었다. 노부를 마음속에 품으면서도 하치란 사람에게 끌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케이타는 밤이면 밤마다 노부의 얼굴과 하치의 얼굴이 하나로 어지럽게 뒤섞이는 꿈을 꾸었다. 싱숭생숭한 마음에 하치에게 쌀쌀맞게 대해도 하치는 케이타에게 한없이 너그러웠다. 하치는 케이타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 주었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
그렇게나 간질간질하게 케이타를 대하면서도 하치는 케이타를 안지 않았다. 케이타는 그에 대한 불안감이 조금씩 커져 갔다. 하치는 언제나 정중했지만 케이타에게 조금도 성적인 접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케이타에게 관심이 없다기에는 하치가 케이타를 보는 눈빛엔 다정함만이 가득했다. 혼란스러워하며 케이타는 결국 소라의 방을 찾아갔다.
"소라아..."
"응?"
케이타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소라는 생각에 잠겼다가 케이타에게 유혹을 해보라는 조언을 주었다. 케이타는 아연실색했다. 유곽에 있을 때조차도 케이타는 유혹이나 아양떠는 것을 잘 못했다. 그러나 내쳐지지 않기 위해서는, 하치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케이타는 첫날 이후 처음으로 화장을 하고 옷매무새를 느슨하게 한 채 하치를 기다렸다. 여느 때처럼 밤인사를 하러 온 하치는 화장을 하고 어깨를 드러낸 케이타를 보고 우뚝 멈춰섰다. 케이타는 쿵쾅쿵쾅 뛰는 가슴을 억지로 누르며 하치에게 다가가 최대한 관능적으로 그의 손을 이끌어 제 다리 사이에 얹었다. 얼어붙은 듯 서 있던 하치는 케이타의 몸과 제 손이 닿자 기겁을 했다. 하치는 더듬더듬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 있다고 해명하며 급하게 케이타의 방을 나갔다. 그 후로 하치는 자연스럽게 케이타에게서 멀어졌다. 여전히 말과 행동은 녹을 만큼 다정했지만 이전과 달리 케이타의 곁에 바짝 붙어있어야 할 상황이 오면 슬그머니 멀어졌다. 그런 하치를 보며 케이타는 밤마다 몰래 울었다.
매일 밤 울고 나면 다음날 아침이면 항상 배가 고팠다. 그런데 어느 날 눈을 뜨자 케이타는 속이 안 좋은 것을 느끼고 인상을 찌푸렸다. 하치와 소라를 괜히 걱정시키기 싫어 여느 때와 같이 아침을 먹으러 간 케이타는 음식 냄새에 올라오는 쓴 침을 삼켰다. 그러나 기껏 차려준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했다간 미운털이 박힐 것 같다는 공포가 여전히 남아, 케이타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나나 씨."
"좋은 아침이네요, 하치 씨."
케이타는 대꾸하며 조심조심 음식을 떠서 한 입 먹었다. 그러나 채 씹을 새도 없이 우욱 하고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케이타는 입을 막고 안절부절못했지만 속이 요동쳐 도저히 삼킬 수 없었다.
"뱉으십시오, 괜찮습니다."
케이타는 결국 하치가 턱 아래에 대어준 손에다 입에 든 것을 뱉어냈다. 그제야 속이 조금 가라앉았다. 당황하고 겁먹은 케이타는 연신 하치에게 사과했지만 하치는 살짝 미간을 좁히고 케이타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하치가 제 사과를 바로 받아주지 않은 것은 처음이기에 잔뜩 긴장했던 케이타는 그날 오후 의사가 방문해서 저를 보려 한다는 말에 어리둥절했다.
"축하드립니다, 회임입니다."
케이타는 피가 차게 식었다. 최근에 관계를 가진 것은 히트의 절정, 그리고 히트 직후 두 번이었다. 대체 누구 아이일까. 혹여라도 하치의 아이가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나를 범한 그 놈의 아이를 가진 것이면 어떻게 해야 하나. 케이타는 순식간에 공포가 극에 달해 숨을 헐떡였다. 하치는 걱정스럽게 케이타를 품에 안아 달랬다.
"우리 아이는 잘 키울 수 있을 겁니다. 예측하지 못한 임신이지만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어요."
하치가 한참을 달래 줘도 케이타는 진정을 하지 못했다. 정말 무서운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그때부터 케이타는 눈치를 심하게 보기 시작했다. 더 이상 하치의 애정을 편안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 유녀 때뿐만 아니라 하치의 첩이 된 다음에도 낯선 남자에게 몸을 내주었다는 것을 알면, 하치가 지금처럼 저를 대할 리 없다고 케이타는 생각했다. 그런데다 임신 가능성은 희락기의 절정 때보다 그 직후가 더 높았다. 생각하기도 끔찍했지만 만약 제가 품은 아기가 하치의 자식이 아니라면...케이타는 그런 상황에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케이타는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케이타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자 하치는 케이타를 아예 제 방에 데려다 두고 수발을 들어 주었다. 케이타는 그게 악몽을 더 심하게 한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꿈에는 하치를 전혀 닮지 않은 아기가 나왔다. 아기야 제발, 너는 하치를 닮아야 해, 케이타가 속삭여도 소용이 없었다. 곧 꿈 속에서는 하치가 나와 불같이 화를 내며 케이타를 마구 때렸다. 케이타가 죄송하다고, 무엇이든 하겠다고 울면서 빌어도 하치는 종내에는 더러운 것에 눈이 멀었던 제 자신이 한심하다며 침을 뱉고 차갑게 돌아섰다. 그러면 그 뒷모습은 노부가 되었다. 케이타는 항상 누구에게랄 것 없이 애원하다가 잠에서 깼다. 악몽에서 깨면 항상 속이 뒤집혔다. 구토를 참지 못하고 하치의 이불을 더럽힌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러면 현실의 하치는 꿈 속의 하치와 달리 파리하게 질려 울며 죄송하다 비는 케이타를 꼭 안아주고 묵묵히 더러워진 이불을 치워 주었다.
"우욱, 욱!"
"쉬...잘하고 있어요. 다 뱉어요."
케이타가 입덧을 할 때면 하치는 늘 케이타 곁에 머물렀다. 그러나 마음이 편하지 않자 몸도 덩달아 편하지 않았다. 입덧은 심해져만 갔고 결국 케이타는 물도 제대로 넘기지 못하게 되었다. 하치는 쉴새없이 욱욱대는 케이타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달랬다. 케이타는 그럴수록 제가 이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며 움츠러들었다. 어느 날 케이타는 또다시 꿈 속에서 하치가 저를 때리고 차는 것을 견디다가 하치에게 애원할 새도 없이 급작스럽게 깼다. 숨을 헐떡이며 왜 깼는지 몰라 가만히 누워 있던 케이타는 코끝에 피비린내가 도는 것을 느꼈다. 케이타는 급하게 이불을 치웠고 덩달아 깬 하치는 케이타의 엉덩이 아래 짙게 물든 피를 보며 얼어 있다가 급하게 뛰쳐나갔다. 한밤중에 의사가 불려왔다. 케이타는 엉엉 울며 진찰을 받았다. 다행히 유산은 아니었다. 그러나 차라리 유산이었으면 조금 나았을까 생각하는 자신을 보며 케이타는 또 자기혐오에 떨었다. 하치의 다정한 눈길 아래에서도, 한없이 따뜻하게 땀에 젖은 제 머리칼을 넘겨 주고 배를 쓸어주는 손길을 받으면서도, 케이타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제가 진실을 밝히면 하치가 얼마나 저를 혐오하고 경멸할지 뿐이었다. 나날이 얼굴이 퀭해지고 표정이 어두워지자 하치가 눈치를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나나 씨가 괴로워하는 건 입덧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뭐가 나나 씨를 이렇게 힘들게 하고 있는지, 제게 말해줄 수 없을까요?"
부드럽게 물어보는 하치의 말에 케이타는 눈을 크게 뜨고 하치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점점 눈물이 고이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는 케이타를 보며 하치는 황급히 케이타의 등을 쓸어내렸다.
"대답하기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다 괜찮아요."
그날 케이타는 평소보다 더 심한 악몽을 꾸고 위액까지 토하다 하치의 품 안에서 쓰러졌다. 하치는 다시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하치가 무엇인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는 것을 알게 된 케이타는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결국 케이타는 덜덜 떨면서 소라에게 갔다.
“케...나나! 몸은 좀 괜찮아?"
"소라, 소라아..."
"응, 왜? 내가 뭐 도와 줘?"
"소라, 나는 나쁜 사람이야, 더럽고 역겨운 사람이야..."
"무슨 소리야, 전혀 그렇지 않아."
"나, 나, 뱃속의 이 아이, 누가 아버지인지 모르겠어..."
케이타는 울음을 터뜨렸다. 소라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멈춰섰다. 봇물처럼 터진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다. 케이타는 소라가 저를 발견했던 그날 길에서 범해졌음을, 그리고 그때 희락기 직후였음을 실토했다. 그 전에 하치와 관계를 가진 것은 단 한 번 뿐이었음도 이야기했다. 엉엉 울며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는 케이타를 보며 소라는 창백해졌지만 곧 침을 꿀꺽 삼켰다.
"케이타, 괜찮아."
"하지만, 하지만 하치가 알면..."
"하치는 몰라도 돼. 아무도 몰라도 돼. 만에 하나 하치의 아기가 아니라도, 아이가 자라면 널 닮은 거라고 하면 돼. 우리만 아는 비밀인 거야. 괜찮아, 알았지?"
케이타는 겨우겨우 울음을 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평화는 길지 않았다. 간신히 한숨 돌린 케이타가 한숨을 쉬며 진정하려는데 등 뒤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하얗게 질린 케이타는 주저앉았다. 노부와의 만남이 들켰을 때가 떠올랐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던 어린 시절 그 날이 떠올랐다. 소라는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고개를 돌린 케이타는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가는 시시오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케이타는 그대로 공황 상태에 빠졌다. 케이타, 케이타! 저 멀리서 소라가 시시오를 붙잡은 채 케이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케이타는 도저히 대답할 수 없었다. 케이타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우욱 속을 쏟아냈다. 뛰쳐나가 시시오를 붙잡았던 소라는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는 케이타를 보고 동생을 데려오겠다는 시시오를 말릴 수 없었다. 시시오는 아무 말 없이 하치를 데려왔다. 하치가 케이타를 안아올려 제 방으로 향하는 동안 시시오는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음고생을 많이 해서 몸이 지치셨을 겁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지금은 쉬세요."
“소, 소라는요?"
"같이 오신 분은 아직 깨어나진 않았지만 안정을 찾으셨다 합니다. 몸이 다친 것보다도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아 정신을 잃으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케이타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꼬박 하루를 주무셨습니다. 시장하실 테니 뭐라도 드시지요."
하치는 그렇게 말하며 가복을 불러 죽을 가져오라고 했다. 금방 도착한 죽은 뜨끈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이 아주 맛있어 보였다. 그러나 케이타는 심한 탈력감과 떨어진 체력에 손을 너무 떠는 탓에 숟가락을 죽에 담그기도 어려워했다. 보다 못한 하치가 죽그릇과 숟가락을 가져갔다.
"아 하십시오."
케이타는 불안하게 눈알을 굴리다 입을 벌렸다. 하치는 죽을 한 술 떠서 후후 불어 케이타의 입에 넣어 주었다. 죽은 아주 맛있었지만 손수 죽을 떠먹여주는 하치에 케이타는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것은 걱정하지 말고 일단 드십시오."
하치의 말에 케이타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배가 고픈지도 몰랐던 케이타는 죽을 전부 해치웠다. 그제야 정신이 차려진 케이타가 우물쭈물하다 물었다.
"저...여기가 어딘가요?"
"제 침실입니다."
케이타는 하얗게 질렸다. 그러면 그렇지. 제 몸을 원하는 거였구나. 하치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으니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했지만 소라에게 불과 이틀 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본 케이타는 지금 도저히 다리를 벌려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하치를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케이타는 생각했다. 결국 케이타는 하치의 눈치를 보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치는 황급히 그런 케이타를 제지했다.
"오해입니다. 그러려고 제 침대에 눕힌 것이 아닙니다. 푹 쉬게 해드리려고 했을 뿐입니다."
하치의 말에 안심하면서도 케이타는 경계했다. 도망간 저를 잡아오기까지 했으면 그럴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러나 밥을 먹자 다시 쏟아지는 졸음에 케이타는 결국 하치가 시키는 대로 누웠다. 혹여 제가 잠든 사이 무슨 짓을 할까봐 잠들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케이타의 눈 위를 큰 손이 가볍게 덮었다. 놀란 케이타가 눈을 깜빡이자 속눈썹에 걸리는 남자의 손바닥이 느껴졌다. 하치가 작게 웃었다.
"걱정 말고 푹 쉬세요. 아침이 오면 깨워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들으며 케이타는 결국 눈을 감았다. 곧 하치의 손이 제 눈가를 떠나는 것을 느끼며 케이타는 조금 아쉬워했다가 그런 제 자신을 속으로 혼냈다. 어쩔 수 없었다. 케이타는 본래 손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손은 케이타 곁을 완전히 떠나는 대신 케이타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안심하고 푹 주무세요. 하치가 속삭이는 말을 들으며 케이타는 절로 편안해지는 기분에 잠에 빠져들었다.
케이타가 다시 깼을 때는 아침이었다. 소라도 깨어났으니 함께 조식을 먹자며 하치는 나갈 것을 권했다. 스즈키 가에 오고 나서 둘쨋날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자의로 방 밖을 나가본 적이 없는 케이타는 무척 긴장했다. 그러나 하치를 뒤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우물쭈물하며 케이타는 하치를 따라갔다. 하치가 케이타를 이끈 곳은 커다란 상이 놓인 방이었다. 상 주위에는 이미 소라와 무섭게 생긴 남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소라!"
케이타는 소라에게 달려들어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다. 소라는 그런 케이타를 받아 안으며 다정하게 등을 쓰다듬어 달랬다.
"난 이제 정말 괜찮아."
소라의 말에도 케이타는 한참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소라에게서 떨어지고도 훌쩍거리는 케이타에게 하치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케이타는 어색하게 받아 얼굴을 닦았다.
"제가 남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동안 나나를 돌봐주신 것에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소라는 케이타를 케이타 대신 나나라고 부르는 하치의 말에 눈썹을 살짝 들어올렸지만 케이타의 간절한 시선을 마주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라는 멋쩍은지 큼큼, 헛기침을 하고 말을 꺼냈다.
"저야말로 치료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정신도 차렸으니 돌아가겠습니다."
"뭐? 안 돼 소라, 그 남자가 또 오면 어쩌려고 그래!"
케이타는 질색팔색을 하면서 말렸지만 소라는 한숨을 푹 쉴 뿐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케이타는 그 말에 하치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하치는 흔들리는 눈으로 케이타를 바라보다가 결국 눈을 꾹 감고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계속 함께 사시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첩을 들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또 혼기가 넘은 사람을 들이는 것은 좋지 않아."
"시시오. 나도 알아. 그렇지만..."
"잘 생각해."
하치는 생각에 잠겼다. 케이타는 발을 동동 굴렀다.
"정말 방법이 없어요?"
케이타가 또 울려고 하는 것을 보자 하치가 황급히 케이타를 달랬다.
"울지 마십시오. 다 괜찮습니다. 형, 그럼 형이 들이면 되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형, 한번만 생각해 보라니까? 집이 저분께 안전하지 않다잖아!"
"다들 그만!"
케이타는 훌쩍훌쩍 울고, 시시오라던 사람은 반발하고, 하치는 화를 내는 와중에 소라가 벌떡 일어났다.
“케...나나 같은 경우도 아니고, 얄팍한 동정심으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 첩 자리로 들어가는 것은 싫습니다."
"그거 잘 됐군요. 저도 당신 같은 첩은 싫습니다."
소라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하자 시시오는 그런 소라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며 나가 버렸다. 결국 소라는 다른 대안을 찾을 때까지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스즈키 가에서 지내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소라는 마음이 복잡해 보였지만 케이타는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보고 하치가 웃었다. 하치의 웃음에 케이타가 즉각 눈치를 보았지만, 하치는 그저 기뻐하는 모습이 좋았다고 했다. 케이타는 여전한 어색함과 경계심에 눈을 굴렸지만 하치는 케이타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케이타와 눈을 마주쳤다.
"지금까지 제가 좋은 남편은 아니었지만, 이제부터는 부족함 없는 남편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금은 서로 아무것도 몰라 믿기 힘드시겠지만 차차 더 알아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나나 씨가 마음을 열 수 있게 노력할 테니 천천히 마음 가는 대로 따라와주세요."
하치의 말에 케이타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치는 환하게 웃었지만 소라는 복잡한 눈으로 그 둘을 바라보았다. 그 후부터의 하치의 행동은 그 말 그대로였다. 하치는 식사 때마다 시시오와 하치, 케이타와 소라가 함께 밥을 먹도록 권했다. 첩에게는 이미 분에 넘치는 처사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하치는 식사 때마다 케이타를 못 챙겨서 안달이었다. 케이타가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케이타 앞에 반찬을 끌어다 놓고 식사 시중을 들며 아예 케이타에게 밥을 떠먹여줄 기세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치는 케이타가 잠들기 전 밤마다 케이타에게 와서 잘 자란 인사를 했고, 낮이면 케이타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처음엔 케이타는 쌀쌀했던 하치의 첫인상을 떠올리고 하치의 행동 하나하나에 눈치를 보며 겁을 먹었다. 그러나 하치는 그런 케이타를 매번 어르고 달래어 점점 마음을 열게 했다. 케이타가 결정적으로 하치를 믿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제가 또 도망치면 어쩌시려고요? 친절하게 정원과 스즈키 가 저택의 길을 알려주는 하치에게 케이타는 어느 날 물었다. 그 말에 하치가 지은 슬프기 그지없는 표정에 케이타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저를 떠나고 싶으시다면 막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를 떠나 나나 씨가 편안히 살 수 있도록 금전적인 지원은 하게 해주십시오. 그 말에 하치의 감정의 무게를 깨달은 케이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치는 마치 케이타에게 다정하게 굴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 같았다. 케이타는 정에 고픈 사람이었다. 노부를 마음속에 품으면서도 하치란 사람에게 끌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케이타는 밤이면 밤마다 노부의 얼굴과 하치의 얼굴이 하나로 어지럽게 뒤섞이는 꿈을 꾸었다. 싱숭생숭한 마음에 하치에게 쌀쌀맞게 대해도 하치는 케이타에게 한없이 너그러웠다. 하치는 케이타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 주었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
그렇게나 간질간질하게 케이타를 대하면서도 하치는 케이타를 안지 않았다. 케이타는 그에 대한 불안감이 조금씩 커져 갔다. 하치는 언제나 정중했지만 케이타에게 조금도 성적인 접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케이타에게 관심이 없다기에는 하치가 케이타를 보는 눈빛엔 다정함만이 가득했다. 혼란스러워하며 케이타는 결국 소라의 방을 찾아갔다.
"소라아..."
"응?"
케이타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소라는 생각에 잠겼다가 케이타에게 유혹을 해보라는 조언을 주었다. 케이타는 아연실색했다. 유곽에 있을 때조차도 케이타는 유혹이나 아양떠는 것을 잘 못했다. 그러나 내쳐지지 않기 위해서는, 하치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케이타는 첫날 이후 처음으로 화장을 하고 옷매무새를 느슨하게 한 채 하치를 기다렸다. 여느 때처럼 밤인사를 하러 온 하치는 화장을 하고 어깨를 드러낸 케이타를 보고 우뚝 멈춰섰다. 케이타는 쿵쾅쿵쾅 뛰는 가슴을 억지로 누르며 하치에게 다가가 최대한 관능적으로 그의 손을 이끌어 제 다리 사이에 얹었다. 얼어붙은 듯 서 있던 하치는 케이타의 몸과 제 손이 닿자 기겁을 했다. 하치는 더듬더듬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 있다고 해명하며 급하게 케이타의 방을 나갔다. 그 후로 하치는 자연스럽게 케이타에게서 멀어졌다. 여전히 말과 행동은 녹을 만큼 다정했지만 이전과 달리 케이타의 곁에 바짝 붙어있어야 할 상황이 오면 슬그머니 멀어졌다. 그런 하치를 보며 케이타는 밤마다 몰래 울었다.
매일 밤 울고 나면 다음날 아침이면 항상 배가 고팠다. 그런데 어느 날 눈을 뜨자 케이타는 속이 안 좋은 것을 느끼고 인상을 찌푸렸다. 하치와 소라를 괜히 걱정시키기 싫어 여느 때와 같이 아침을 먹으러 간 케이타는 음식 냄새에 올라오는 쓴 침을 삼켰다. 그러나 기껏 차려준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했다간 미운털이 박힐 것 같다는 공포가 여전히 남아, 케이타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나나 씨."
"좋은 아침이네요, 하치 씨."
케이타는 대꾸하며 조심조심 음식을 떠서 한 입 먹었다. 그러나 채 씹을 새도 없이 우욱 하고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케이타는 입을 막고 안절부절못했지만 속이 요동쳐 도저히 삼킬 수 없었다.
"뱉으십시오, 괜찮습니다."
케이타는 결국 하치가 턱 아래에 대어준 손에다 입에 든 것을 뱉어냈다. 그제야 속이 조금 가라앉았다. 당황하고 겁먹은 케이타는 연신 하치에게 사과했지만 하치는 살짝 미간을 좁히고 케이타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하치가 제 사과를 바로 받아주지 않은 것은 처음이기에 잔뜩 긴장했던 케이타는 그날 오후 의사가 방문해서 저를 보려 한다는 말에 어리둥절했다.
"축하드립니다, 회임입니다."
케이타는 피가 차게 식었다. 최근에 관계를 가진 것은 히트의 절정, 그리고 히트 직후 두 번이었다. 대체 누구 아이일까. 혹여라도 하치의 아이가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나를 범한 그 놈의 아이를 가진 것이면 어떻게 해야 하나. 케이타는 순식간에 공포가 극에 달해 숨을 헐떡였다. 하치는 걱정스럽게 케이타를 품에 안아 달랬다.
"우리 아이는 잘 키울 수 있을 겁니다. 예측하지 못한 임신이지만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어요."
하치가 한참을 달래 줘도 케이타는 진정을 하지 못했다. 정말 무서운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그때부터 케이타는 눈치를 심하게 보기 시작했다. 더 이상 하치의 애정을 편안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 유녀 때뿐만 아니라 하치의 첩이 된 다음에도 낯선 남자에게 몸을 내주었다는 것을 알면, 하치가 지금처럼 저를 대할 리 없다고 케이타는 생각했다. 그런데다 임신 가능성은 희락기의 절정 때보다 그 직후가 더 높았다. 생각하기도 끔찍했지만 만약 제가 품은 아기가 하치의 자식이 아니라면...케이타는 그런 상황에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케이타는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케이타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자 하치는 케이타를 아예 제 방에 데려다 두고 수발을 들어 주었다. 케이타는 그게 악몽을 더 심하게 한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꿈에는 하치를 전혀 닮지 않은 아기가 나왔다. 아기야 제발, 너는 하치를 닮아야 해, 케이타가 속삭여도 소용이 없었다. 곧 꿈 속에서는 하치가 나와 불같이 화를 내며 케이타를 마구 때렸다. 케이타가 죄송하다고, 무엇이든 하겠다고 울면서 빌어도 하치는 종내에는 더러운 것에 눈이 멀었던 제 자신이 한심하다며 침을 뱉고 차갑게 돌아섰다. 그러면 그 뒷모습은 노부가 되었다. 케이타는 항상 누구에게랄 것 없이 애원하다가 잠에서 깼다. 악몽에서 깨면 항상 속이 뒤집혔다. 구토를 참지 못하고 하치의 이불을 더럽힌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러면 현실의 하치는 꿈 속의 하치와 달리 파리하게 질려 울며 죄송하다 비는 케이타를 꼭 안아주고 묵묵히 더러워진 이불을 치워 주었다.
"우욱, 욱!"
"쉬...잘하고 있어요. 다 뱉어요."
케이타가 입덧을 할 때면 하치는 늘 케이타 곁에 머물렀다. 그러나 마음이 편하지 않자 몸도 덩달아 편하지 않았다. 입덧은 심해져만 갔고 결국 케이타는 물도 제대로 넘기지 못하게 되었다. 하치는 쉴새없이 욱욱대는 케이타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달랬다. 케이타는 그럴수록 제가 이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며 움츠러들었다. 어느 날 케이타는 또다시 꿈 속에서 하치가 저를 때리고 차는 것을 견디다가 하치에게 애원할 새도 없이 급작스럽게 깼다. 숨을 헐떡이며 왜 깼는지 몰라 가만히 누워 있던 케이타는 코끝에 피비린내가 도는 것을 느꼈다. 케이타는 급하게 이불을 치웠고 덩달아 깬 하치는 케이타의 엉덩이 아래 짙게 물든 피를 보며 얼어 있다가 급하게 뛰쳐나갔다. 한밤중에 의사가 불려왔다. 케이타는 엉엉 울며 진찰을 받았다. 다행히 유산은 아니었다. 그러나 차라리 유산이었으면 조금 나았을까 생각하는 자신을 보며 케이타는 또 자기혐오에 떨었다. 하치의 다정한 눈길 아래에서도, 한없이 따뜻하게 땀에 젖은 제 머리칼을 넘겨 주고 배를 쓸어주는 손길을 받으면서도, 케이타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제가 진실을 밝히면 하치가 얼마나 저를 혐오하고 경멸할지 뿐이었다. 나날이 얼굴이 퀭해지고 표정이 어두워지자 하치가 눈치를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나나 씨가 괴로워하는 건 입덧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뭐가 나나 씨를 이렇게 힘들게 하고 있는지, 제게 말해줄 수 없을까요?"
부드럽게 물어보는 하치의 말에 케이타는 눈을 크게 뜨고 하치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점점 눈물이 고이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는 케이타를 보며 하치는 황급히 케이타의 등을 쓸어내렸다.
"대답하기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다 괜찮아요."
그날 케이타는 평소보다 더 심한 악몽을 꾸고 위액까지 토하다 하치의 품 안에서 쓰러졌다. 하치는 다시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하치가 무엇인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는 것을 알게 된 케이타는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결국 케이타는 덜덜 떨면서 소라에게 갔다.
“케...나나! 몸은 좀 괜찮아?"
"소라, 소라아..."
"응, 왜? 내가 뭐 도와 줘?"
"소라, 나는 나쁜 사람이야, 더럽고 역겨운 사람이야..."
"무슨 소리야, 전혀 그렇지 않아."
"나, 나, 뱃속의 이 아이, 누가 아버지인지 모르겠어..."
케이타는 울음을 터뜨렸다. 소라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멈춰섰다. 봇물처럼 터진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다. 케이타는 소라가 저를 발견했던 그날 길에서 범해졌음을, 그리고 그때 희락기 직후였음을 실토했다. 그 전에 하치와 관계를 가진 것은 단 한 번 뿐이었음도 이야기했다. 엉엉 울며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는 케이타를 보며 소라는 창백해졌지만 곧 침을 꿀꺽 삼켰다.
"케이타, 괜찮아."
"하지만, 하지만 하치가 알면..."
"하치는 몰라도 돼. 아무도 몰라도 돼. 만에 하나 하치의 아기가 아니라도, 아이가 자라면 널 닮은 거라고 하면 돼. 우리만 아는 비밀인 거야. 괜찮아, 알았지?"
케이타는 겨우겨우 울음을 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평화는 길지 않았다. 간신히 한숨 돌린 케이타가 한숨을 쉬며 진정하려는데 등 뒤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하얗게 질린 케이타는 주저앉았다. 노부와의 만남이 들켰을 때가 떠올랐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던 어린 시절 그 날이 떠올랐다. 소라는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고개를 돌린 케이타는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가는 시시오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케이타는 그대로 공황 상태에 빠졌다. 케이타, 케이타! 저 멀리서 소라가 시시오를 붙잡은 채 케이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케이타는 도저히 대답할 수 없었다. 케이타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우욱 속을 쏟아냈다. 뛰쳐나가 시시오를 붙잡았던 소라는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는 케이타를 보고 동생을 데려오겠다는 시시오를 말릴 수 없었다. 시시오는 아무 말 없이 하치를 데려왔다. 하치가 케이타를 안아올려 제 방으로 향하는 동안 시시오는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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