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ㅇㅈㅇ


https://hygall.com/584083605 1편
- 직장인인 나, 미연시 게임의 주인공이 되어 최애와 재회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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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인 내가 공략불가 악역 캐릭터와 친해져 버린 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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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역 캐릭터를 너무 좋아해 쓰러뜨릴 수 없어 곤란한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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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 속 주인공으로 환생해 버린 내가 공략 불가였던 히든 루트를 개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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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 속의 주인공입니다만, 이런 엔딩은 싫으니까 바꿔 보려 합니다





6편
위기일발! 드래곤 씨의 방문이 전혀 반갑지 않은 ‘나’는 악역캐릭터와 함께합니다






모두의 염려와 반발을 협박(…)으로 찍어 눌렀던 아다치는 의외로 별다른 방해 없이 견학에 함께할 수 있었다.
물론, 말 그대로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의 반발심보다도 대처하기 까다로웠던 것은 교사들의 존재, 역시나 견학 갈 국가의 정체성을 들먹이며 아다치에게 겐세이를 놓으려 들었으나 적절하게 쿠로사와가 땡깡을 부리며 흐지부지되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다치가 빠지면 저도 빠질게요. 안 가요, 안 가. 학생을 차별하는 학교의 행사는 참여하기 싫습니다.“ 라는 뉘앙스로 버티고, 열심히 우겼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진 조미료.

“친구와 떨어져서 다시 혼자가 된다면…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겠죠. 어차피 다시 혼자가 되어야 한다면 이딴 세계는 사라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라며 우울해하는 아다치의 피처링이 극적인 효과를 발휘해 결국에는 허가를 받아냈다.
참고로 이딴 세상은 사라지는 게 나을 것 같다는 발언은 농담이 아니었다. 만약 쿠로사와랑 함께할 수 없게 된다면….

어쨌든 두 사람은 견학을 앞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었다. 가끔은 히로인들도 어울리고는 했는데, 아다치와 쿠로사와는 그녀들에게서 견학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발이 넓은 이들이기에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된 것은 좋은 일.
한편, 사과를 받았다고는 해도 이성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 본 적이 없어 여전히 그녀들이 어려웠던 아다치를 보며 쿠로사와는 내심 안심하기도 했다. 히로인들이 나타나면 어김없이 쿠로사와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겁 많은 강아지마냥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왜 그리도 귀여운지.
이러한 뜻밖의 소소한 이벤트가 벌어지기도 하니 쿠로사와로서는 히로인들의 등장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한편, 쿠로사와는 견학을 앞두고 좀 더 강해지기 위한 수련에 돌입했다. 언제까지고 아다치에게만 의지할 수도 없는 일이고, 결정적으로 위기 상황에서 아다치가 자신을 믿고 뒤를 맡길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기 때문.
수련은 쉽지 않았다. 히로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아다치가 그의 상대가 되어 주었으나 쿠로사와가 그를 공격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어차피 때려도 안 맞아 줄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음에도…. 그에 히로인들의 비난이 쇄도했지만 마법 수련에 돌입하면서 비난은 쏙 들어갔다.

빛으로 만들어낸 화살을 과녁에 쏘자마자 놀랍게도 화살이 커브를 틀어 아다치에게 직격했기 때문.
예로부터 빛과 어둠은 상성이 좋지 않아 어둠을 물리치는 데에는 빛이 최고라고 했던가….
말 그대로 퇴치당한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제대로 화살을 맞아 버린 아다치, 화살에 맞고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 아다치에 기겁한 쿠로사와가 다급하게 그를 향해 달려가 생사를 확인하려 했지만 당연히 별일은 없었다.
설정상 아다치의 레벨이 아득하게 높다는 것을 증명하듯 이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났으니까.
교복은 흙먼지가 묻어 더러워지고 말았지만….


“… 아다치, 괜찮아? 다치지 않았어? 미안해, 이런 실수를 하다니. 그쪽으로 갈 줄은 몰랐어. 정말 미안해.“

”응, 괜찮아. 아직 마력이 불안정해서 그런가 봐. 이 정도로는 다치지 않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역시 아다치에게 맡기길 잘했네! 우리가 맞았으면 무사하지 못했을지도….”


하나비의 말에 다른 히로인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쿠로사와가 강해지게 도와주고는 싶다만, 아무래도 난데없이 오발탄을 얻어맞기는 싫었기에 좀처럼 시도가 어려웠던 와중 아다치는 그야말로 딱 좋은 상대였다.
일단 레벨이 굉장히 높으니 저 정도의 공격으론 기스조차 안 날 정도로 내구도가 튼튼하고, 본인도 마법을 잘 다루니 요령을 알려 주기에도 적절했으니까.
뭐, 그건 히로인들 생각이고 쿠로사와는 이미 울먹이는 중이었다. 나 때문에 아다치가…! 귀하디 귀한 내 최애이자 하나뿐인 내 남친이…!

하지만 수련은 계속되었고, 그동안 아다치는 급커브를 도는 쿠로사와의 마법에 많이도 얻어맞았다.
쿠로사와는 그때마다 아작나는 멘탈과 함께 미안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별수 있나, 그렇다고 포기해 버리면 아다치는 괜히 얻어터진 모양새가 되어 버리는 만큼 차차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 주는 수밖에 없었다.
아다치의 조언을 따라 마력을 조절하는 방법에 익숙해지며 점차 마법을 다룬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되려던 찰나, 쿠로사와가 쏘아 올린 빛의 구체가 또 다시 아다치의 뒤통수를 때린다.
딱콩- 아무래도 반대 상성이니만큼 얻어맞는 것 자체로 기분이 더러울 수밖에 없다. 이번이 벌써 몇 번째 오발인가, 아무리 악의는 없었다지만 쿠로사와는 이미 마법이고 뭐고 전부 관두고 싶어졌다. 이쯤이면 눈치도 보이니까.


“저기, 쿠로사와… 혹시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니지?”


애써 웃고는 있지만 쿠로사와는 알 수 있다.
아다치, 지금 짜증 났구나…. 아마 쿠로사와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마 곱게는 말이 안 나왔을 수도 있었다.
게임 속에서는 이 정도까지 폐급은 아니었는데… 미래를 바꾸는 것은 둘째치고 가장 기본적인 마법마저 이 지경이니 결의를 다졌던 것이 민망할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노답 에임에 익숙해져가는 아다치에게 제일 미안했다. 마법에 계속해서 딱총을 맞고, 후려쳐지다 보니 어느 정도 각도 계산이 되는지 아다치는 이제 불시에 커브를 돌아 버리는데도 무빙으로 피해 버린다.
뭐, 이번에는 타겟에 제대로 꽂힌 것이 튕겨져 나와 뒤통수를 때렸다는 변수가 있었지만….


“… 아다치, 아무래도 난 마법에 재능이 없는 것 같아. 기껏 네가 도와주는데도 나아지질 않고 계속 민폐만 끼치고 있네. 미안해서 도저히 못 견디겠어.“

”쿠로사와? 아니야, 그렇지 않아! 조금 변덕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마력량은 좋으니까 조금만 더 노력해 보자.“


나는 쓰레기야…. 결국 쿠로사와가 제 얼굴을 감싸며 우는 소릴 내자 아다치는 황급히 그를 안아 준다.
그래, 제일 답답한 사람은 본인일 텐데 제멋대로 구는 마법애 몇 번 얻어맞은 것이 대수인가… 어차피 다치지도 않았을뿐더러 다쳤다고 해도 아다치는 그를 책망할 수 없었다.
큰 덩치를 구겨 아다치에게 안기다시피 한 쿠로사와는 그에게 위로를 받으며 깨진 멘탈을 회복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심상치 않은 스킨십에 당황한 이들이 있었으니, 둘을 바라보던 다섯 명의 여자들은 제각기 황당한 표정을 지은 채 저게 맞나 싶을 뿐이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아다치는 그저 제게 안겨 징징거리는 쿠로사와가 귀여울뿐. 그래도 남들 앞에선 늘 자상하고 어른스러운 모습이었던 그인데 제 앞에서는 그런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솔직해지곤 하는 것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정작 쿠로사와 본인은 이러다가도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급하게 체면을 차리려 들지만 그는 모르겠지, 자신의 이런 허술한 면모가 아다치에게 매번 웃음을 준다는 사실을.
그렇게 훈훈한 기분으로 쿠로사와를 위로해 주던 아다치의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원거리 마법이 어렵다면 근거리 마법은 괜찮지 않을까?


“쿠로사와,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너는 검을 더 잘 다루니까 그쪽을 응용해 보면 어떨까?”

“… 검을? 응용한다고?”

“응. 빛을 말이야, 음… 검을 다룬다는 느낌으로. 굳이 어딘가를 조준해서 발사하지 않아도 되니까.”

“아다치, 너는 정말 천재야! 언제나 곤란할 때마다 늘 최선의 방법을 찾아 주는구나. 대단해.“

”아? 아니, 그렇게 칭찬하지 않아도….“


쓰담쓰담쓰담쓰담, 이번에는 쿠로사와가 아다치를 귀여워하고 있었다. 작은 강아지를 보는 것마냥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헤실거리는 웃음과 함께 연신 제 머리를 쓰디듬는 쿠로사와의 손길에 부끄러워지는 아다치, 그러나 그를 거부하지는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이긴 해도 기분 좋으니까.
아무리 동성간의 연애 개념이 없는 세계라고 해도 두 사람의 핑크빛 기류는 여간 심상치 않은 것이었던지라 같은 자리에 모인 다섯 명의 여자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이에 당혹감과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키노코가 기어이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 뭔데, 둘이….? 무슨 관계인 거야? 뭔가 수상한데.“

”응? 뭐가 수상해? 아다치는 귀엽잖아?“

뭐, 178cm 짜리 건장한 남자를 두고 귀엽지 않냐며 당연스럽게 물어본다 해도…. 안 귀엽다고 하면 엄청나게 항의할 것만 같은 맑은 눈의 광인 쿠로사와의 기세에 눌린 그녀들이 차마 말을 잇지 못했지만 눈치가 조금 부족한 키노코는 건드려선 안 될 것을 건드리고야 말았다.


“… 글쎄, 대체 어떤 점이…?”

“그걸 설명하자면 지금부터 밤을 새도 모자라. 일주일, 아니, 한 달, 1년이 걸리더라도 전부 설명할 수 없을 거야. 우선 이 칠흑 같은 머리와 새벽하늘 같이 맑고 새카만 눈동자가 중요한 매력 포인트라고 할까…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는 눈동자에 시선을 마주치고 있으면 빠져들어 헤엄치고 싶어지고, 차가운 밤바다 같은 무표정 뒤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있어.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어 버린다고. 하지만 외적인 것 이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건 내면이야. 시종일관 조용하고 차분한 듯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상냥하고, 순수하고-“

”쿠로사와! 그만해! 부탁이야. 창피해서 죽을 것 같으니까 제발 그만해!!“


키노코의 질문에 제대로 버튼이 눌린 쿠로사와가 폭주하기 시작하자 얼굴이 벌겋게 익어 버린 아다치가 기겁하며 그를 진정시키기 시작한다. 말이 진정이지 경악하며 그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아직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았던 쿠로사외는 한동안 읍읍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땐 자신을 향해 극혐이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히로인들이 있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뭐 이런 변태 새끼가 다 있냐는 듯한 느낌.
장담하는데 쿠로사와는 여자에게서 이런 경멸 어린 시선을 받아 본 것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아무튼 아다치의 조언을 토대로 쿠로사와는 본인만의 시그니처 스킬을 익힐 수 있었다. 그것이 무어냐, 빛으로 만든 검의 이미지를 상상하며 마력을 사용해 보라는 아다치의 말대로 완성된 빛의 검.
푸슝- 하는 소리와 함께 눈부신 빛의 기둥이 만들어지며 휘두를 때마다 웅웅거리는 기묘한 효과음과 함께 현란한 잔상이 남는 모습, 그렇다. 쿠로사외는 스타O즈의 라이트세이버를 만들어냈다. 과학을 무시하고 순수한 빛으로 광선검을 만들 수 있다니, 마법은 대단하군!
어쨌든 스타O즈 세계관 내에서도 대단한 절삭력을 자랑했던 라이트세이버는 주인공다운 마력에 힘입어 가공할 만한 위력을 자랑했다. 빛 자체에서 엄청난 초고열을 발생시켜 물질을 절단하는 원리이기에 공격 자체도 깔끔하다.

앞으로 쿠로사와의 주력 스킬이 될 광선검은 생긴 것 자체도 기본적으로 간지가 난다. 처음 완성되어 휘둘러 보았을 때, 특유의 효과음과 현란한 잔상을 마주한 아다치와 히로인들의 얼굴에는 말 그대로 “개쩐다!!!”라고 쓰여 있었으니까.
실험 삼아 인스턴트 던전에 들어가 사용해 보았을 때도 꽤 만족스러운 사용감과 공격력을 지녔으니 이 정도면 완벽했다.
앞으로는 쿠로사의 레벨이나 마력에 따라 라이트세이버도 함깨 강해질 테니 드디어 한 고비를 넘긴 셈.
그동안 쿠로사와가 쏜 빛덩어리 딱총에 수도 없이 얻어맞았던 아다치는 그 감격스러움을 따따블로 느낀 듯했다. 오죽하면 히로인들보다 더 울먹거리는 듯한 얼굴을 하고 진심으로 그의 성장을 축하해 주었으니까.


“쿠로사와에게 공격 스킬이 생기는 걸 지켜볼 수 있어서 정말 기뻐. 게다가 이런 멋진 형태라니….”

“이건 전부 아다치 덕분이야. 나 때문에 무척이나 고생하고, 아다치가 아니었다면 나는….“

”또 시작이네. 둘이 껴안기만 해 봐, 아주 시도 때도 없어.“


쌍으로 울먹거리며 당장이라도 서로를 부둥켜안을 것만 같은 둘의 염병에 질려 버린 하나비가 호통을 쳤다.
그에 뜨끔한 둘은 괜히 눈치를 보긴 했지만 아무튼 잘된 일은 잘된 일, 앞으로는 광선검의 사용에 익숙해질 일만 남았다.

쿠로사와는 예전의 세상에서 스타O즈 시리즈를 감상한 적이 몇 번 있었다. 남자라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왕도적인 전개를 지닌 스패이스 오페라, 쿠로사와도 나름 재미있게 보았던 만큼 재탕도 여러 번 했었다.
그 기억을 바탕으로 등장인물들의 검식을 흉내내 보기도 하며 점차 사용감을 익혀갔고, 아다치와 함께 던전을 돌며 열심히 레벨을 올려 마력을 성장시키기도 했다. 앞으로의 위기는 여태까지와 차원이 다를 것이기에 전례없이 빡센 수련을 통해 실력을 쌓아가던 쿠로사와는 당장 게임 속에 들어가도 원래의 주인공에게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강해지고 있었다.








***







쿠로사와를 긴장에 설치게 만들었던 견학 이벤트, 그날이 드디어 오고야 말았다. 이 이벤트를 기점으로 지금까지 노력한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다.
죽을지도 모르는 이벤트를 굳이 회피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쿠로사와가 가든, 안 가든 드래곤은 무조건 나타날 것이고 신성 국가는 무조건 멸망한다. 애초에 그렇게 일방적으로 짜여진 스토리이기에 가지 않으면 당장 목숨은 멀쩡히 지킬 수 있겠지만 옆에 있는 아다치가 위험해진다.
제 소중한 최애가 미쳐가는 모습을 게임 외 비하인드 영상에서만 접했을 때도 찢어지는 가슴에 눈물을 줄줄 흘렸는데 연인이 되어 제 옆에 있는 지금, 고통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차마 자신의 손으로 아다치를 벨 순 없으니…. 결국 아다치와 자신 모두 파멸하는 길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쿠로사와가 매일매일 지독하게 수련을 거친 까닭은 단 하나, 드래곤의 침략으로 인한 신성 국가의 멸망을 막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스케일이 큰 목표, 솔직히 드래곤을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세계관 내 설정상 드래곤과 맞짱을 뜰 수 있는 존재는 마왕뿐이다.
마왕은 세계의 파괴와 멸망을 부를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 그러니까 드래곤은 그만한 위상과 무력을 가졌다는 소리이니 그 강력함 때문에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정과 서사가 디테일한 체리마왕이지만 의의로 인물들간의 서사 외의 영역에서는 부가적인 이야기를 과감하게 생략한다는 점이 있다. 그래서 아다치가 왜 치한 누명을 썼는지, 드래곤이 왜 신성 국가를 침략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안 나온다.
그저… 목숨을 걸어서라도 도박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동은 숙박 시설이 갖추어진 초호화 유람선을 타고. 원래의 게임 속에선 아다치가 등장하지 않으니 몰랐지만 아다치는 사실 배멀미가 있었던 모양이다.
출발 직후부터 서서히 안색이 안 좋아지기 시작하더니만 점점 심해지는 두통과 메스꺼움에 결국에는 드러누워 버리고 말았다. 이 세계에도 멀미약이 있다면 좋을 텐데, 쿠로사와는 그토록 보고 싶다던 바다 구경을 하지도 못하고 끙끙 앓아누운 아다치가 그저 안쓰러울뿐….
세계관 내 최강자도 멀미 앞에서는 무력하구나! 약이 없으니 점점 심해져만 가는 멀미 증상에 아다치는 벌써 3번이나 토했다. 창백한 얼굴로 화장실에 달려가는 게 안 그래도 불쌍하기 짝이 없는데 반복되는 구토에 탈진하면서 시체가 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쿠로사와의 속도 바싹 타들어갔다.


“아다치, 이럴 때는 일단 잠을 자면 좀 나아질 거야. 많이 힘들지? 오랫동안 항해를 하진 않을 테니까 잠깐 잘까?“

”쿠로사와… 너무 힘들어서 잠이 안 와…. 차라리 기절이라도 시켜 주면 안 될까.”


그렇게 쿠로사와에게 안겨 울먹이던 아다치, 걱정되는 마음에 그를 꼬옥 안아 줄 수밖에 없던 쿠로사와까지 분위기는 거의 초상집이었다. 그나마 주기적으로 쿠로사와가 아다치에게 힐을 부어 주고는 있다지만 멀미에는 딱히 효과가 없다.
그랬던 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존재가 있었으니, 약초학의 달인이자 식물의 마법사인 키노코의 등장이었다.
아다치가 멀미에 시달리며 죽어가는 것을 봤던 그녀가 선실 내부를 수소문해 멀미에 효과가 있는 약초를 찾아 약을 달여 왔던 것. 다른 네 명의 히로인들도 각각 죽이나 초콜릿 등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들고 병문안을 왔다.
탈진 상태에 이르러 쿠로사와의 힐을 받으며 근근이 버티고 있던 아다치는 멀미약을 건네 주는 그녀의 한마디에 순간적으로 멀미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아다치는 이미 강한 마법사면서 배 따위에 지는 건 말이 안 되잖아? 다들 걱정하고 있으니까 어서 기운 차려.“


레벨이 높고 마법의 실력이 어찌 됐든 아다치도 사람이다. 그도 얼마든지 질병에 걸릴 수 있을 뿐더러 아프면 서럽고, 누군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것이 당연.
그러나 늘 혼자 참아내야 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사랑하는 연인의 품에 안겨서 자신을 위해 약을 가져다 준 친구의 배려를 받고는 마음이 울렁울렁거렸다.
다들 걱정해 주고 있었구나…. 결국 그동안의 서러움을 위로받은 마음에 울컥 북받친 아다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터져나오는 눈물 탓인지 차마 고맙다는 말도 못 꺼내고 잉잉 울기 시작하는 그의 모습에 모두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내 아다치가 돌연 울음을 터뜨린 이유를 다들 깨달았다. 지독한 무관심과 혐오 속에서 살아왔던 그에게 주변의 걱정과 애정이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을 테니까.

약을 먹고서도 한동안 훌쩍훌쩍 눈물을 그치지 못하던 아다치는 쿠로사와의 품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다 이내 잠들었다.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는 아다치는 처음이었던지라 쿠로사와 역시도 현기증이 도는 기분이었다. 아프니까 무방비해지고, 감정에 더욱 솔직해진 그의 약한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고 안쓰러웠으니까. 눈물젖은 그의 얼굴을 닦아 주며 다정하게 어르고 달래던 쿠로사와는 아다치가 잠들고 나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짧은 소감을 전하는 하나비에 쿠로사와는 약간의 씁쓸함을 담아 대답해 주었다.


“… 남자가 우는 건 처음 보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네.”

“그동안은 항상 모두의 눈을 피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었을 거야. 앞에서 드러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을 테니까.”


아다치의 눈물은 모두의 마음을 찡하게 울렸다.
태어날 때부터 오랜 시간을 모두에게 미움받고 배척의 대상이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이토록 당연하고 사소한 관심조차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게 그저 안타까운 일이다.
그나마도 쿠로사와를 통해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다지만 그렇다고 이전까지 겪었던 참혹한 삶이 없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쿠로사와는 더 간절하게 바랄 수밖에 없었다. 비참했던 만큼… 아니, 과거의 아픔이 조금은 무뎌지도록 앞으로는 행복한 일만 가득하기를.
그리고 다른 히로인들 역시, 과거의 편견을 반성하고 그의 미래를 조용히 응원해주었다.



그렇게 배멀미에 고생했던 아다치가 눈을 떴을 때 즈음, 어느덧 해질녘이 되어 항해는 끝에 임박해 있었다.
객실 내를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불러 모으던 교사가 그들을 발견했을 때는 곤히 잠든 아다치의 옆에서 쿠로사와가 함께 누워 그를 끌어안고 있었으니. 우정이라기엔 너무 간질간질한 그들의 분위기가 퍽 수상했지만 그런 것을 따질 시간이 없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같이 잠들었던 만큼 배를 나올 때도 함께였던 둘, 울다가 잠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아다치의 얼굴은 평소보다 부어서는 훨씬 둥글둥글해져 있었다. 이에 웃음을 감출 수 없었던 쿠로사와는 당장이라도 그의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어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

이후로는 염려했던 것과 다르게 생각보다는 별일이 없었다. 신성 국가라고 해서 뭐 특별한 장소는 아니고, 그냥 신전이나 관광 목적의 구조물들이 꽤 많은 정도였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사이 히로인들이 아다치가 울었던 걸 가지고 짓궂게 놀리기도 했지만 놀림의 대상자인 아다치가 진심으로 쪽팔려하니 반응이 찰지고 타격감이 좋아 더 꿀잼인 듯했다.
가장 걱정했던 차별의 문제, 그 때문에 아다치와 쿠로사와도 긴장은 했다만… 검은 머리와 눈동자애 흠칫하는 시민들은 종종 있어도 쿠로사와랑 꽁냥꽁냥 해맑게 놀고 있는 그의 모습이 적대적인 느낌은 아니기도 하고, 위협적이지도 않으니 조금 겁먹은 채로 지나칠 뿐이다.


“아다치, 아까 멀미를 하느라 배고플지도 모르겠네. 간식이라도 먹을까? 여기, 이 크레페 맛있어 보여.”

“응! 나는 햄치즈로 먹을래. 쿠로사와는?”

“난 초콜릿바나나로 할까. 음료는 어떤 걸로?”


도란도란 이야길 주고받는 둘, 상인은 아다치의 검은 머리칼과 눈동자가 신경 쓰이는 듯했다. 크레페를 만들면서도 자꾸만 힐끔힐끔 아다치를 곁눈질로 바라보았으니까.
“… 미안하지만, 그쪽 학생은 혹시….” 상인의 질문에 잠시 웃음이 멈춘 쿠로사와, 그러나 쿠로사와랑은 다르게 아다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 어둠의 마법사예요. 하지만 괜찮아요. 이 친구는 빛의 마법사이고, 무척 의지가 될 만큼 좋은 사람이니까 제가 피해를 끼칠 일은 없을 거예요.” 어쩌다 빛과 어둠이 세트로 돌아다니게 된 건지는 몰라도 아다치의 평온한 대답에 상인의 긴장이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쿠로사와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아다치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칠 만한 성격도, 이유도, 그럴 사람도 아닌데 굳이 자신의 존재를 내세워야만 정당화가 되는 것이 퍽 불편하게 만들었으니까. 초코바나나크레페를 받아든 쿠로사와는 상인에게 단호한 한마디를 했다.

“그는 어둠의 마법을 다루지만 그 힘으로 몇 번이나 절 구해 주고, 성장을 도와줬어요. 결국 마법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위험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거죠.”

그러니까 쫄지 마, 새꺄. 라는 본심은 숨긴 채 적절히 정중하게 의견을 펼치는 쿠로사와에게 상인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아다치의 크레페에 햄과 치즈를 두 장씩 서비스로 넣어 주는 걸로 대신했을 뿐.
아마도 쿠로사와의 실드가 먹힌 것이 컸겠지만 자신이 무례했음을 어느 정도 인정은 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착한 아다치는 더블햄치즈크레페를 받아들고 내밀어 주는 쿠로사와에게 환하게 웃어 주며 보란듯이 한입 크게 베어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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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어!!”

쭈욱 늘어나는 모짜렐라치즈에도 아랑곳않고 복스럽게 먹는 모습에 상인도 자신이 만든 크레페를 아주 맛있게 먹어 줘서 기분이 좋고, 쿠로사와도 그런 그가 사랑스러워서 기분 좋다.

그렇게 소소한 해프닝이 있던 것 말고는 대놓고 시비를 거는 이들은 딱히 없었다. 워낙 둘이 딱 붙어 있기도 하고, 본인들만의 세상에 빠져 있었기에 정확히는 다른 이들을 살필 여유가 없었던 덕분이 더 컸지만.






위기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쿠로사와가 알기로 드래곤이 침략하기 시작할 때는 견학 시작 이튿날, 저녁 즈음이다. 당장 오늘밤은 별일이 없을지 몰라도 다음 날이 다가오면 위험을 피할 수 없다.
닥칠 위험이 가까워질수록 조바심에 안절부절하게 되는 쿠로사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도무지 어떻게 극복헤야 하는지 감이 오질 않는다. 그도 그럴 게, 정치적인 문제도 아니고 다짜고짜 재앙이 닥치는 것과 비슷하다.
갑작스레 닥치는 자연재해를 인간이 단신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대비는 할 수야 있겠지만 지금 쿠로사와가 온 나라를 휘젓고 다니며 드래곤이 올 거라고 광고를 한다 한들, 그것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떻게 알았냐에 대한 근거가 아무것도 없으니까.

한편, 아다치는 묘하게 어딘가 근심이 있어 보이는 쿠로사와의 기분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어떤 고민이 있는 건지 제게 말을 하진 않지만 뭔가 복잡해 보이는 모습에 자신이 도움이 될 일은 없을까 덩달아 고민에 빠지게 된다.
무슨 문제인지 속 시원하게 말해 주는 건 어려울까? 그저 묵묵히 그의 곁을 지키던 아다치는 수줍게 쿠로사와의 손을 부여잡으며 물었다.


“… 저기, 쿠로사와. 괜찮으면…. 오늘 같이 잘까?”

“같이? 단둘이?”

“응. 모처럼 여행도 왔고, 쿠로사와랑 좀 더 함께하고 싶-”

“나는 환영이야! 정말 기뻐. 쭉 같이 있을 수 있다니, 꿈만 같아.”


그렇게 저녁 식사를 마치고서도 끈덕지게 붙어 다니던 둘은 길거리를 돌아다녔던 감상을 주고받았다. 색다른 데이트 같다던 쿠로사와의 한마디에 아다치가 얼굴을 붉히기도 했고, 부끄러워서 파닥거리는 그의 반응에 쿠로사와는 참지 못하고 빵 터지기도 했다.


깊어지는 밤, 쿠로사와의 객실로 향한 잠옷바람의 아다치는 도착하자마자 그에게 안겨 침대로 배달당했다. 호텔에서 침대에 단둘이 누워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던 두 사람 사이의 기류는 그야말로 위험.
이미 키스는 여러 번 나누다 보니 이제는 익숙해졌다지만 그 이상의 진도는 아직까지 나간 적이 없었기에 아다치도, 쿠로사와도 이 순간만큼은 기분 좋은 긴장감에 사로잡혀 점점 달아오르는 분위기와 함께 생각을 비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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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지 못하고 겹쳐지는 입술과 함께 점점 깊어지는 키스, 처음 나누었던 그때처럼 쾅쾅 가슴을 두들기는 심장과 뜨거워지는 체온은 점점 흥분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입술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아다치의 얼굴 곳곳에 입맞춤을 남기던 쿠로사와는 결국 그의 목덜미를 탐하기 시작했고, 야릇한 간질임에 목구멍에서부터 튀어나온 짧은 탄식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알고는 있었지만 아다치는 목이 약한 부위인 걸까, 목덜미를 시작으로 귓가와 쇄골에 이르기까지 진득하게 핥으며 가볍게 빨아 올리니 자신의 어깻죽지를 한껏 부여잡는 아다치의 손길이 느껴진다.

서두르지 않기로 했는데 장소가 바뀌어 들뜬 건지, 조금 긴장한 것 같으면서도 저를 밀어내지 않고 달라붙는 아다치의 움직임이 유혹적이라서 그런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쿠로사와는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성적인 것보다도 자신의 욕심에도 물러나지 않고 착실히 흥분을 느끼는 듯한 아다치의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자극적이었던 것이 상당히 크게 느껴졌고, 여기서 더 나아갔다간 도저히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 오늘따라 자제가 안 되는 것 같아. 무리하게 밀어붙일 생각은 아니었는데도.”

“무리… 라니. 밀어붙인다거나 그런 느낌은 아니었으니까 괜찮아.”

“나는 아다치를 깊이 사랑하고 있어. 그렇기에 절대로 너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아다치는 살짝 거칠어진 호흡을 진정시키며 쿠로사와의 대답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자신이 긴장한 탓에 쿠로사와가 이토록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걸까 하고.
그러나 아무리 긴장되어도, 전부가 생소해서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라도 자신의 마음을 그에게 전하고 싶었다.
물러나지 않아도 괜찮다고, 좀 더 욕심을 드러내도 자신에게 부담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아다치 또한 쿠로사와를 사랑하고, 그를 원한다.
쿠로사와가 말하는 부담이란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다치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이 괜찮았다. 그의 키스가, 손길이, 속삭이는 고백이,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이 나아간대도 두려운 마음보다는 묘한 흥분과 설렘이 더 컸으니까.

“… 아다치?”
침을 꼴딱 삼킨 아다치는 숨을 가다듬으며 떨리는 손끝으로 쿠로사와의 셔츠 단추를 서투르게 하나씩 느릿느릿 풀어나가며 애써 용기를 내어 중얼거리듯 그의 부름에 대답했다.

“그, 나, 나는… 이런 건 처음이라, 잘 모르지만. 별로 부담이 된다거나 그런 건 아니라고 할까, 괜찮아! 그러니까….”

“… 응. 그러니까?“

”그러니까…. 쿠로사와가 가르쳐 주는 건… 안 될까 싶어서. 이런 건 너한테 배우고 싶다고 할까….”

부끄러움을 가득 담은 이 말이 쿠로사와에게 얼마나 큰 자극으로 받아들여질지를 알았다면 아마 하지 않았을 텐데….
”아“ 하는 탄식과 함께 잠시 제 이마를 짚은 쿠로사와가 아다치에게 달려드는 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서투른 손길로 자신의 옷을 벗기며 한다는 말이…. 평소 경박한 언어습관을 가지지 않아 반사적으로라도 쌍욕을 뱉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일 정도였다.
미칠듯한 고자극에 잠시 정신이 나갔다 돌아온 쿠로사와는 정말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했다. 하마터면 아다치의 잠옷의 단추가 전부 뜯어져 나가도록 거칠어질 뻔한 것을 꾹꾹 눌러 참았기 때문.

그 후로는 꿈 같은 순간의 연속이었다. 입술에, 혀끝에 닿는 아다치의 살결과 제 밑에서 부끄러움을 삼키면서도 충실하게 움찔거리는 반응. 그리고 흥분감이 감돌아 붉어진 눈가마저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색기가 넘친다.
처음엔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올랐고, 대화를 하는 순간순간이 황홀했다. 그러다 손끝에 만져지는 그를 느끼고 나서는 한없이 욕심이 끓어올랐다. 최애를 앞둔 덕후답지 않은 욕심. 거짓말 같은 기적의 연속으로 자신의 사랑을 전하고 나서도 갈증이 가시지 않음에 스스로 한심하게 여기기도 했었지만 그 또한 한때의 내적 갈등이었을 뿐이다.
보란듯이 아다치의 온기가, 부드러운 살결에서 느껴지는 향기, 자신과 같이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아다치의 뽀얗던 속살에는 어느덧 울긋불긋한 반점이 군데군데 피어나 마치 꽃잎을 뿌려놓은 것과도 같이 보일 지경이었다. 물론 전부 쿠로사와의 작품.
조금 더 은밀한 곳까지 쿠로사와의 손길이 닿았을 때, 익숙하지 않은 쾌감과 저릿한 감각 탓에 아다치는 때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주체할 수 없이 허리가 들썩이고 자꾸만 민망한 소리를 토해내게 되지만 그것이 거부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 감당하기 힘든 흥분이 굉장히 좋았기 때문도 있었고.


“아다치, 난 죽을 때까지 이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거야.”

“… 나도 그래. 이렇게나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도, 사랑하게 될 줄도 몰랐거든.“


살짝 붉어진 눈시울 속 말갛게 반짝이는 새카만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도 고혹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희끄무레하게 빛을 퍼뜨리는 약한 전등빛에 닿아 있는 얼굴은 반쯤 어둠에 덮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붉게 달아 올라 있던 뺨의 색채는 유난히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뺨을 아주 소중하게 어루만지며 전해지는 따스함을 손끝으로 느끼던 쿠로사와는 너무나도 순진한 제 최애이자 연인에게 가르쳐 줄 것들이 참으로 많음을 떠올린다.

”이젠 도망치고 싶다 해도 놔주지 않을 거야.“
쿠로사와의 속삭임에 용기를 내어 그를 끌어안는 아다치, 절대 도망갈 일은 없을 거라는 듯이 야무지게도 안아 오는 모양새가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아다치가 아파하지 않도록 그의 반응에 온 신경을 쏟으며, 그리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를 안았지만 버거운 듯한 숨소리와 아픔을 참는 듯한 신음 소리가 들려올 때면 쿠로사와는 흥분이고 뭐고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움찔하는 쿠로사와를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괜찮다며 놓아 주지 않았던 아다치는 어쩌면 꿈 속에서만 보았던 순간보다 더욱 아름다웠고, 야했다.
쿠로사와도, 아다치도 가쁜 호흡을 내뱉느라 틈틈이 사랑 고백을 속삭일 만한 틈은 없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이 겹쳐지고 이어진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애절한 고백 대신 깊고 진한 키스를 나누었고, 쿠로사와의 부드러운 허릿짓을 받아낼 때마다 아다치는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로 아찔한 자극에 휩싸이곤 했으니까.

그렇게 뜨겁고 묵직한 쾌감이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와 제정신이 아니게 될 것만 같을 즈음, 아다치는 자신도 모르게 교성을 내뱉으며 애타게 쿠로사와를 불러대기도 했다. 상상 이상으로 야릇한 고백, 앙앙대는 소리와 함께 수줍음도 잊고 좋아한다 말하는 이 때의 아다치는 쿠로사와로 하여금 잠시라도 움직임을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말 그대로 사랑, 서로를 더 깊게 알아가는 교감의 순간은 아주 황홀했다. 점점 달아오르다 마침내 아찔한 절정을 맞이했을 때, 쿠로사와는 온몸을 바르르 떨며 고꾸라지려는 아다치에게 어느 때보다도 깊고 욕정에 물든 키스를 퍼부었다.

깊은 밤, 오로지 서로에게 취한 채 더욱 깊게 빠져들었던 두 사람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주고받는 애정에만 정신이 쏠려 있었을지도 몰랐다. 침대를 떠나 함께 샤워를 하면서도 모자란 갈증을 채워넣듯 서로를 만지고, 이어지길 반복했으니까.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와 터져 나오는 신음 소리가 물소리에 가려진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어느덧 늦어진 새벽, 한결 후련해진 얼굴 속에 무언가 꿈을 꾸는 둣한 기분에 취해 있던 쿠로사와는 제 옆에 자리잡은 아다치의 존재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꿈에 그리던 최애와 이렇게까지 진정으로 사랑을 나누게 될줄은 몰랐으니까. 강하고 사랑스러운 최애가 저를 향해 사랑한다 속삭이며 마음도, 몸도 주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이 전개가 사실은 꿈이 아니려나 싶을 만큼 거짓말 같았다.
쿠로사와는 괜히 손끝으로 아다치의 뺨을 쓸어내린다. 부드럽고 보송보송한 감촉, 따뜻한 체온. 분명 이렇게 실제하고 있는데도 믿기지가 않는다.
그런 쿠로사와의 속내를 알 리가 없던 아다치는 그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 주며 수줍게 웃어 줄 뿐, 쿠로사와는 게임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다치의 다양한 모습들을 많이 보아 왔다. 지금의 이 수줍은 웃음과 부끄러워하는 태도 역시도 그러했다. 이런 그를 지키고 싶다.
여태까지 해왔던 것처럼 보란 듯이 파멸 플래그를 박살내고 더 많은 웃음과 즐거운 추억들을 그에게 선물하고 싶다.


“아다치, 나는 오늘밤 같은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어.”

“나도 같은 마음이야. 앞으로도 계속 쿠로사와랑 함께하면서… 그것만으로도 좋으니까.“

”… 내일 당장 뭔가 큰 위기가 닥쳐온다 해도 말이야. 보란듯이 이겨내고, 아다치의 말대로 계속 둘이 함께할 수 있다면 그것 외에 다른 바람은 없을 텐데.“


심란한 마음에 중얼거리는 쿠로사와, 아다치는 살짝 고개를 돌려 허공을 응시 중인 쿠로사와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쿠로사와는 뭔가 불안한 게 있는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같이 나누고 싶다는 마음.
아다치는 잡고 있던 쿠로사와의 손에 깍지를 껴 단단히 맞잡아 주며 대답했다. 꽤나 씩씩하게.


”쿠로사와에게 힘겨운 일이 생긴다면 난 얼마든지 힘이 되어 줄 거야. 어떤 위기가 온다 해도, 그게 쿠로사와에게 걱정되는 일이 아닐 수 있도록.“

”… 아다치?“

”전부 괜찮아. 쿠로사와의 곁에는 내가 있으니까.“


아다치의 반짝거리는 눈망울을 마주한 쿠로사와의 눈빛이 일순간 흔들렸다. 자신의 곁에는… 아다치가 있지.
게임 속과는 다른 상황이 아니던가. 주인공도, 히로인들도, 모든 학생들을 비롯한 평범한 마법사들은 드래곤에게 대항할 만한 힘이 없었기에 무력하게 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다치가 함께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쿠로사와가 죽을 위기에 처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그가 아니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드래곤을 저지하려 들겠지.
‘체리마왕’의 세계관 설정, 이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게임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아다치는 명실상부 최강의 힘을 보유한 캐릭터. 그가 개입하게 된다면….
미래를 바꿔나갈 수 있는 주체는 쿠로사와뿐만이 아니었다.
물론 아다치를 위험에 처하게끔 만들고 싶지는 않지만 그가 적극적으로 돕는다면 해 볼 만한 상황이니까. 쿠로사와는 그만큼 그의 강함을 믿고 있었다.

그제서야 쿠로사와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그늘이 걷어져나간다. 자신의 연인, 아다치와 함께 만들어나갈 미래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그리고 머지 않은 미래, 쿠로사와는 자신에 품에 안겨 무력하게 쓰러진 아다치를 보며 어느 때보다도 망연자실한 심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배에 뚫려진 커다란 구멍에서는 아무리 틀어막아도 계속해서 피가 솟구치고, 아무리 회복 마법을 써 보아도 나아지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마법의 효과보다 죽음이 다가오는 속도가 더 빨랐으니까. 언제나 따스하게 전해지던 온기는 점점 식어가고, 발그레하던 두 뺨은 창백하게 색을 잃는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함께 도망갈걸, 구할 수 없을 거라면 도전이나 하지 말걸, 적어도 그의 파멸만큼은… 막았어야 했다. 아다치를 구하리라는 자신의 목표도, 그의 파멸 엔딩도,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









마치아카 쿠로아다 동정마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