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86604808
view 1762
2024.03.04 21:35
"저기, 키쿠."
 
이즈미상은 귀엽다. 7살 연상의 남자에게 귀엽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이 그런걸 어떡한가. 리쿠도우 키쿠노스케는 자신의 앞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남자를 보며 자못 진지하게 생각했다. 경찰 학교에서 교관일 때부터 그는 귀여웠다. 하도 학생들을 엄하게 대해서 호랑이 교관이라는 별명까지 붙은 그 이즈미 코우가 사실은 지독한 컴맹이라 다른 교관에게 은근슬쩍 프린트하는 법을 물어본다든지, 음식을 먹을 때 살짝 입가에 묻히고 먹는 버릇이 있다든지, 자신이 모르는 것을 솔직하게 물어볼 때의 얼굴은 또 의외로 부드럽다든지.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것 같은 저 남자에게 그런 의외의 면들이 있다는 걸 알아챈 학생들 사이에서 이즈미 교관 좀 귀엽지 않냐는 둥의 말이 나왔던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튼 저 인간이 빌어먹게 귀여운 게 사실이니까. 
 
"키쿠. 듣고 있어?"
"... 아.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 중이었어요."
 
생각이 폭주하는 바람에 정작 이즈미가 자신을 부르는 것을 듣지 못했다. 키쿠는 겸연쩍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즈미는 자신의 술잔의 밑동을 양손으로 꼭 잡은 채 꼼지락 거리고 있었다. 저건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선뜻 입을 열지 못할 때 하는 행동이다. 정말이지, 마흔 다섯살의 남자가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대책없이 귀여울 건데. 차라리 밖에 나가서 동네 다섯 바퀴 쯤 뛰고 오면 날뛰는 심장도 좀 진정하지 않을까, 하고 헛생각을 하던 키쿠는 머리를 한 번 젓고는 다시 이즈미에게 말문을 넘긴다. 
 
"왜요?"
"... 너.... "
 
무슨 말을 하고 싶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실까.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솟았지만 이내 참는다. 기다리는 데는 이골이 난 키쿠다. 아무렴 앞의 남자를 몇 년이나 옆에서 봐왔는데 이정도 기다리는 거야 아무 일도 아니다. 앞에서 계속 술잔을 만지작 거리던 이즈미가 결국 젠장, 하고 버릇처럼 욕설을 내뱉더니 눈을 질끈 감고는 주문을 외우듯 다다다 쏟아냈다.
 
"언제부터 날 좋아했어?"
"에?"
 
이즈미가 투척한 폭탄에 시끄러웠던 키쿠의 머릿속이 단번에 가라앉았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동그래졌던 키쿠의 눈이 이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제 와서 새삼 그걸 묻습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의 술잔에 술을 채우는 키쿠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린다. 이즈미는 그런 질문을 한 본인 스스로도 쑥스러운지 뒷머리를 머쓱하게 쓸어 올린다.
 
"예전에 키쿠가, .. 쭉 좋아했습니다. 라고 말했잖아. 그게 언제부터인지 신경쓰였다고 할까...."
 
말하면서도 면목이 없는지 띄엄띄엄 말하는 목소리가 아주 기어들어간다. 키쿠가 술잔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죄송합니다. 쭉 좋아했습니다. 수 년간 짊어지고 있던 그 무거운 감정에 안녕을 고하기 위한 고백이었어야 했다. 가망 없는 사랑은 이제 그만 놓아주자고, 소리를 내어 입 밖으로 떠나 보내면 어디로든 흘러갈테니 이 짝사랑도 가벼워지길 바라며. 
 
그런데 부상을 입은 그를 만나러 병원에 기어코 몰래 들어온 이즈미의 얼굴이 너무나 반가워서. 결국 제 손으로 복수를 끝내지 못한 허탈함에 눈물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그 얼굴이 너무나 슬퍼서. 갑자기 찾아온 자유에 억지로 끌어 올린 입술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그의 시선을 눈치채고 마주보는 그 얼굴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내내 억눌러왔던 감정이 치밀어 올라서, 닫아 두었던 뚜껑이 들썩거려서, 결국 술렁이는 마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북받치는 감정이 갑자기 술기운과 함께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아 키쿠는 말을 쉬이 잇지 못한다. 가만히 키쿠의 얼굴을 보던 이즈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이내 술잔으로 시선을 떨군다.
 
"... 쓸데 없는 걸 물었네. 신경쓰지 마."
"신경쓰지 말라니..."
 
키쿠가 중얼거렸다. 신경쓰지 않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래, 언제부터였을까. 학생들이 이즈미 교관의 이름을 수군대기 시작할 때보단 그래도 조금은 앞서지 않았을까. 날선 눈빛으로 쳐다보지만 사실은 학생 모두를 세심하게 살피고 있다는 것도, 엄격한 말투로 꾸짖는 것은 학생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분주히 돌아다니는 이즈미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애달파서, 옆에 서서 그 등을 지탱해주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그 때쯔음이었을 거다.

"...."
 
키쿠의 침묵이 무겁다. 이즈미는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했나 싶어 자책하며 눈앞에 놓인 카키노타네만 묵묵히 박살내고 있었다. 바삭. 바사삭. 손에 쥐고 먹는 거라고 해도 크기가 저렇게 작으면 역시 입가에 묻히지는 않는가. 키쿠는 오물오물 움직이는 이즈미의 입술을 보며 상념에 빠져들었다. 마흔다섯이나 되는 남자가 저렇게 귀여운 건 죄다. 
 
형태가 잡히지도 않았던 그 감정에 이름이 붙은 날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공부하던 아키토가 갑자기 키쿠를 돌아보며 이즈미 교관을 체포하겠어, 하고 80년대 영화 대사같은 말을 멋대로 내뱉은 그 날,  바로 그 날. 키쿠가 이즈미를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감정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알아차린 것은 키쿠 본인도 시선을 받는 이즈미도 아닌, 바로 제 3자인 아키토였다. 선전포고나 다름 없는 선언에 키쿠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또 아키토에게 질 것을 알았다. 키쿠는 혀에 맴도는 쓴맛을 삼키며 촌스러워, 하고 대꾸하는 게 전부였다. 그때를 생각하니 패배감이 다시 밀려오는 것 같아 키쿠는 저도 모르게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핥았다. 
 
"안 가르쳐 줄 거예요."
"에?"
 
불쑥 튀어나온 키쿠의 대답에 이즈미의 눈이 동그래졌다. 평소엔 잠겨있기 일쑤인 눈이 이럴 때 커진 게 또 귀여워서 괜히 짓궂은 마음이 든 키쿠는 이즈미의 손에 들려 있던 감씨과자 하나를 쏙 빼서 낼름 먹어버렸다. 
 
 
**
"키쿠. 나 샤워 끝났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거실로 들어선 이즈미는 소파에 누워있는 키쿠를 보고 손을 잠시 멈추었다. 
 
"...키쿠, 자?"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이즈미는 발소릴 죽이고는 조심히 다가갔다. 키쿠는 소파 위에 엎드린 자세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같이 산지 꽤 오래 됐어도 거실에서 선잠에 든 키쿠를 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거실에 웅크려 아키토의 녹음된 목소리를 하염없이 듣다가 쓰러져 잠에 들었던건 보통 자신이었기에. 지금 생각해보니 키쿠에게 큰 민폐를 끼쳤구나 싶어 쓴웃음이 났다. 그를 깨울까 잠시 망설이던 이즈미는 이내 방에서 담요를 가져온다. 조금 자게 놔두자. 어차피 내일은 휴일이고, 술도 많이 마셨으니 조금 자고 일어나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
 
조심스레 키쿠의 등에 담요를 덮은 이즈미는 키쿠 옆 소파 밑에 자리를 잡았다. 이즈미의 고백 같지 않은 고백 이후로 당연한듯이 키쿠의 집에 같이 살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같은 방을 쓰고 있지는 않았다. 이사 온 이즈미에게 싱글침대가 준비된 방으로 안내해 준 것도 키쿠였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이즈미가 짐을 어디에 둘지 망설일 것이라는 것을 미리 꿰뚫어 본 것처럼. 
 
이렇게 곤히 자는 모습을 볼 일은 드물기에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기는 아까웠다. 이즈미는 조금은 사심을 채워도 되겠지, 생각하며 키쿠의 얼굴을 앞에 두고 감상하기 시작한다. 음, 잘생긴 얼굴이다. 이즈미는 솔직하게 감탄한다. 고만고만한 학생들 사이에 서있던 키쿠를 처음 봤을 때도 그렇게 느꼈다. 훤칠하게 키가 크고 잘생긴 놈이 사내 냄새 그득한 경찰학교에서 뭐하나 했었지. 수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잘생겼다. 아니, 오히려 더 잘생겨진것 같기도 하다. ..이건 혹시 콩깍지인가. 이즈미의 미간이 잠시 좁아졌다 풀어진다. 아니다, 객관적으로도 더 잘생겨진 게 맞다. 
 
감겨있는 속눈썹이 부드럽게 그림자를 드리운 밑으로 시원한 콧날이 자리잡고 있다. 그 아래는 의외로 부드러운 입술이 있다. 멋대로 남의 소매를 꽉 잡고 잡아당겨 다가와서 입을 맞추곤, 죄송합니다 하고 고백하는 그런 입술.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고백일텐데, 사죄의 말이 그 뒤를 따라오는 고백은 대체 어떤 종류의 것인가. 키쿠를 바라보는 이즈미의 눈빛이 복잡해진다.  그 죄송합니다는 키스에 대한 사과였을까, 아니면 자신이 숨겨온 감정을 속죄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결국 그런 고백을 하게 될 때까지 키쿠는 대체 몇 년을 혼자 끌어안고 있었던 것일까. 
 
이즈미는 얼굴을 숙인채 손을 뻗어 키쿠의 입술을 살짝 만진다. 손끝에 닿는 입술의 감촉이 부드럽다. 머리를 기울여 키쿠의 얼굴에 한없이 다가간 이즈미는 입술을 맞추려다 이내 도로 몸을 떨어뜨린다. 아무리 그래도 도둑키스는 좀 그렇지. 하하. 이즈미는 머쓱하게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키스 안해요?"
 
뒤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즈미의 몸이 파드득 튄다. 화들짝 놀란 이즈미가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몸을 돌려 제대로 누운 키쿠가 그를 올려보며 웃고 있었다. 
 
"뭐야, 깨어있었으면 있었다고 말을 하지."
"사람 얼굴을 너무 진지하게 보길래."
 
처음부터 깨어있었단 얘기다. 괜히 남의 입술을 만지작 거린게 들통난 이즈미의 귓불이 빨개진다. 젠장, 하고 작게 내뱉는 이즈미를 보고 웃음을 터뜨린 키쿠가 이즈미의 손목을 확 잡아당겼다. 키쿠보다 덩치도 큰 이즈미였지만 연하의 힘에 맥없이 밀린 남자는 무릎을 꿇으며 키쿠의 위로 안착했다. 여유있게 연상의 연인을 품에 안은 키쿠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렇게 덮쳐주는 줄 알고 한껏 기대했는데 말이죠."
"...건방지긴.“
 
이즈미가 투덜거렸다. 그는 바로 코앞에 있는 키쿠를 내려 본다. 술냄새가 났지만 키쿠가 전혀 취하지 않은 것을 이즈미는 안다. 키쿠의 입가에서 장난기 어린 미소가 어느새 사라지고 그는 진지한 얼굴로 이즈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즈미상."
"...응."
 
이즈미상. 이즈미는 키쿠가 자신을 그렇게 부를 때의 목소리가 좋다. 네에, 이즈미상. 자신의 이름을 발음할 때 살짝 섞인 비음이 귀에 울리는 것을. 이즈미가 대답하자 키쿠의 눈동자가 떨린다.
 
"좋아합니다."
 
이즈미는 말없이 키쿠를 내려 본다.

"...정말로요."
 
키쿠는 꺼져갈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뒤따라오는 말이 죄송합니다가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알아.”
 
말주변이 없는 이즈미가 돌려줄 수 있는 말이라곤 그런 말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즈미의 그런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키쿠다. 키쿠가 설핏 웃자 이즈미는 얼굴을 내려 키쿠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키쿠는 눈을 감고 이즈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