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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8 15:21
ㅅㅇㅈ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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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인인 나, 미연시 게임의 주인공이 되어 최애와 재회하게 되었습니다
2편
- 주인공인 내가 공략불가 악역 캐릭터와 친해져 버린 건에 대하여
아다치와의 기적 같은 첫만남 이후, 쿠로사와는 현재 자신이 처해진 상황에 대한 확인을 먼저 거쳤다.
시간대는 마법학교 입학 후 반년이 지난 시기, 이때의 주인공 캐릭터는 속성이 빛이라 기대주일 뿐이지 약해 빠진 허접이지만 아다치의 마법 실력과 레벨은 이미 학생 수준을 아득히 초월해 있는 상태이다.
주문 영창 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물론, 성격이 내성적이라 그렇지 검술이나 무술 실력 또한 뛰어나다.
이건 설정상 아다치가 마왕이 될 인물이기에 압도적인 강함이 부여된 것이고, 쿠로사와는 성장형 주인공이라 서서히 강해지면서 인물들과의 관계를 쌓는 방식이었다.
반면에 아다치와의 친밀도를 가장 올리기 힘든 구간이기도 했다. 접점이 없으니 아다치가 따돌림을 당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고, 게임 내에선 아다치에게 말을 걸더라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라는 주인공의 독백과 함께 대화 시도가 무참하게 씹혀 버린다.
그때마다 주인공에게 쌍욕을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던 쿠로사와, 이제는 그런 수모를 겪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아무튼 이 시기는 초반 튜토리얼 구간을 지나 본격적으로 게임에 적응하는 때이다. 던전을 돌며 레벨을 올리고, 스킬을 익혀 강해지지 않으면 후반부의 전투까지 가지도 못한다.
아다치는 보스에 걸맞게 이미 말도 안 되는 강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연애에만 집중하느라 수련을 게을리하면 후반부에 가까워질수록 제약이 많아진다.
쿠로사와는 플레이 중 빠른 레벨업을 위해 빡센 던전을 위주로 돌면서 파티에 아다치를 참여시켜 딜러를 맡겼고, 존나 치사한 방법이긴 하지만 아다치가 마물들을 공격해 피를 깎아놓으면 자신이 막타를 쳐서 경험치를 뺏었다.
그럴 때마다 말없이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2등신짜리 SD 버전의 아다치에게 죄책감이 들었지만… 아다치는 굳이 던전에 오지 않아도 강하잖아! 미안해! 하며 합리화했었지.
지금 느끼는 거지만 어쩌면 이후에 아다치가 파티 초대를 씹었던 건 쿠로사와의 행동이 띠꺼워서인지도 몰랐다.
게임의 내적으로는 본격적으로 주인공과 아다치의 대립 각이 세워지는 시기. 둘이 대놓고 적대는 안 하는데, 주변에서 상황을 그렇게 만든다.
아다치가 듣는 데서 주인공과 비교하며 그를 깎아내리는 것은 기본, 지들이 대련하라고 일대일로 붙여놓고 아다치가 이기면 역시 사악한 녀석이라며 매도하질 않나, 교사들도 대놓도 주인공만 띄워 주며 차별하고 히로인들도 얘한테만 지랄한다. 아다치도 상당히 개같았겠지.
여기까지 상황을 파악한 쿠로사와는 자신과 아다치를 둘러싼 분위기를 바꾸고, 누구든 아다치에게 함부로 대하며 상처를 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삼았다.
그렇게 등교한 쿠로사와, 그리고 그를 반기는 여러 명의 히로인들… 쿠로사와는 그녀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교실 구석 쪽에 홀로 앉아 맹한 얼굴로 책을 들여다보는 중인 아다치에게로 시선이 머무를 뿐, 자신의 최애답게 저런 사소한 순간조차 빛이 난다.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리는 기분, 첫 만남 때는 어떻게 그를 껴안을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환영하는 히로인들을 무시하고 지나쳐 아다치에게로 향하기 시작하자 그에게 가까워질수록 시끌벅적하던 교실이 조용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꼈는지 쿠로사와를 올려다보는 아다치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비친다.
당황스러워하는 것도 귀엽다. 어떻게 사람이 하나부터 열까지 귀여울 수 있는 것인지…. 속으로 시끄럽게 주접을 떨어대던 쿠로사와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안녕, 아다치.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 아침부터 독서에 집중하고 있길래. 어떤 책을 읽는 걸까, 하고 궁금했어.“
”… 어, 안녕. 이건 그냥 마물에 관한 책이야. 도감 같은….“
어색하게 인사를 받아 주던 아다치는 이내 쿠로사와의 주위에 몰려든 히로인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숨만 쉬어도 이 지랄을 하는데 아침부터 괜히 물어뜯기는 건 싫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쿠로사와는 아다치에게 무안만 주고 끝낼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히로인들의 반응 따윈 쿨하게 무시하고 자연스럽게 아다치의 옆에 앉아 버렸고, 모두가 당황하는 가운데 쿠로사와는 붙임성 좋게 스몰토크를 이어갔다.
사실은 눈만 마주쳐도 심장이 멎을 것 같았지만.
“아다치에게 인상깊은 마물은 어떤 녀석이었어? 아무래도 아다치라면 강한 만큼 여러 개체를 만나 봤을 것 같아서.“
”에? 나, 나는… 그러니까…. 역시 케르베로스… 려나.“
”케르베로스를 잡았어? 역시 대단하네, 아다치는. 그때의 경험이 더 듣고 싶은데,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원래대로라면 이런 상황은 만들어질 일이 없었다.
플레이어들은 히로인 여럿을 간보며 어장을 놓기 바쁘고, 애초에 아다치는 스토리 전개상 욕을 먹고 다녀야 하는 입장이라 주인공은 이쪽에 신경쓰지 않는다.
하지만 쿠로사와는 더 이상 그런 시스템적인 제약에 묶여 있지 않다. 혼자 있는 아다치에게 다가가 계속해서 친근하게 굴 수 있으니 주저하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
아다치가 횡설수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쿠로사와는 정말이지 흐뭇한 시선으로 듣고 있었다. 아니, 사실 아다치가 하는 이야기는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다. 쿠로사와는 ‘아다치 키요시’의 덕후지, 판타지 덕후는 아니었으니까….
그저 아다치가 제 눈앞에서 앙큼하게 입술을 오물거리며(그런 적 없음) 열심히 말하는 걸 보는 게 행복할뿐이다.
“저기, 쿠로사와군. 그런 애랑 친하게 지낼 필요 없어.”
“정말이지,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라니까.”
물론 이렇게 히로인들이 신경을 긁어대긴 했지만 쿠로사와는 단호하게 그녀들을 차단했다. 애초에 이들이 얼마나 쿠로사와에게 매력을 어필하든지 쿠로사와의 짝사랑은 아다치니까.
그리고 유일무이한 자신의 최애를 비난하는 건 절대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너희들이 뭘 아는데? 아다치와 제대로 대화를 해 본 적도 없으면서, 누구보다 속이 깊고 상냥한 그의 내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
“미안하지만 나는 아다치와 둘이 대화하고 싶어. 아다치를 욕하고 싶은 거라면 안 들리는 곳에서 해 줄래? 아무리 감정이 좋지 않아도 당사자의 앞애서 그러는 건 굉장히 무례한 짓이라고 생각하는데.“
”쿠로사와군….“
”화난 거야? 미안해, 쿠로사와군.“
”왜 나한테 사과해? 너희가 실례를 저지른 상대는 아다치야.”
쿠로사와의 차가운 대답에 히로인들은 각자 걱정을 핑계로 들었으나 쿠로사와는 그것들을 가만히 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자신과 그녀들의 눈치를 살피는 아다치에게 다정한 미소를 보여 주며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 버렸으니.
아다치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쿠로사와에게 이끌렸다. 평소 같으면 자신을 상대조차 하지 않았을 그 쿠로사와의 변화에 좀처럼 상황 판단이 힘든 모양.
쿠로사와는 아다치를 교실에서 빼내 비교적 한적한 복도로 그를 데리고 갔고,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의 아다치에게 정중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아까 벌어진 일에 대해 사과하고 싶어. 나였다면 틀림없이 상처받았을 거야.”
“… 아, 나는 괜찮아! 이젠 익숙하기도 하고, 그 애들도 쿠로사와가 걱정돼서 그랬을 거야. 나 같은 녀석이랑 어울리는 건 아무래도 좋지 않을 테니까.”
“아니, 그 말엔 동의 못하겠어. ‘나 같은 녀석’이라거나 어울리기 좋지 않다거나 하는 평가는 그만둬. 아다치는 이곳의 누구보다도 좋은 사람이니까.”
“쿠로사와….”
눈빛이 떨리던 아다치가 이내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부드러워지는 분위기, 평소의 어두운 인상과는 딴판이 되어 버린다.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귀엽다, 단순히 웃고 있는 것뿐인데도 심장이 미친듯이 날뛴다. 이런 아다치가 미움받는 게 공식이라는 이 세계관이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이어지는 둘의 담화,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웃고 떠드는 동안 쿠로사와는 치솟는 행복감에 죽을 것만 같았다. 아다치가 내 눈앞에서 웃고 있다니, 아다치가 실제로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어!
여담이지만 아다치는 게임 내 일러스트상에서도 동글동글한 인상으로 그려지는 편이었다. 일러스트를 꼭 빼다 박은 귀여운 인상과 순간순간 마주치는 눈망울은 강아지마냥 크고 맑은 느낌이라 자꾸만 쿠로사와의 심장을 떨리게 만드는 중이었으니, 어떻게 이런 애가 세계를 파괴할 마왕이 된다는 것인지 결말을 알면서도 믿기지가 않는 기분.
언뜻 무뚝뚝한 느낌이었던 아다치는 생각보다 웃음이 많았다. 쿠로사와가 제 이야기에 반응해 줄 때마다 방긋방긋 웃었고, 그런 웃음 하나하나가 쿠로사와의 마음에 불을 질러댄다는 것도 모르면서 그저 신이 나는지 서투른 말주변으로 열심히 썰을 풀었다.
게임에선 드러난 적이 없었던 숨겨진 캐릭터성일까,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고통 속에서 끝내 타락하게 된다는 미래가 더욱 비참하게 다가와 자꾸만 속이 쓰라려오는 기분.
둘은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아다치가 대화하다 렉이 걸리면 쿠로사와가 요령 좋게 끼어들어 주제를 이어갔던 덕분이다.
교실로 돌아가던 도중, 아다치는 쿠로사와에게 이런 소감을 전했다. 쿠로사와가 기쁠 수밖에 없는 한마디를.
“… 저기, 쿠로사와. 날 신경 써 줘서 고마워. 덕분에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같아.”
그렇게 말하는 아다치의 양쪽 뺨에는 발그스레한 홍조가 물들어 있었고, 그에 쿠로사와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에게 손을 뻗어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해 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품에 안고 싶었지만 마지막 남은 한 줄기 이성으로 간신히 참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다치와 단둘이 대화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겐 고자극이었으므로.
“앞으로도 이런 시간을 자주 만들자. 아다치만 괜찮다면 말이야. 나는 언제든 좋으니까.”
수줍게 미소지은 아다치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귀여웠다. 쭈뼛대며 감사를 전하는 모습도, 사람을 상대하는 게 서툴러 부끄러움을 참고 용기를 내는 모습도. 그리고 별을 따다 박은 듯 동그랗게 반짝거리는 저 눈동자도.
쿠로사와의 다정한 손길에 아다치는 물러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타인의 손을 타는 것이 낯설 텐데도 껄끄러워하거나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특별히 관리를 하는 건 아닐 텐데도 그의 머릿결은 부드러웠다. 다른 색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검정색, 칠흑과도 같은 그런 머리카락이 마치 비단처럼 느껴질 지경.
쿠로사와는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해 버리고 말았다. 아다치는 위험하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이렇게 손길을 받고 있는 수줍은 모습조차도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견디기가 힘들었으니까. 그리고 감히 그에게 손끝이라도 닿을 수 있는 이 순간에 무한한 감사를 올렸다.
즐거운 시간을 자주 만들자는 약속은 했지만 실제로 지켜지기까지에는 생각보다 장애물이 많았다.
아다치와의 만남에 집중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이 게임의 주인공은 설정상 대단히 인기 많은 녀석.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맴도는 히로인이 다섯이나 되는 것만 봐도 그렇지만 학교의 모든 이들이 그에게 호의적이고, 필요로 한다.
때문에 쿠로사와는 좀처럼 아다치와 둘만의 시간을 마련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빠르게 가까워지고 싶다고는 해도 어떤 명분으로 주변인을 떼어놓고 다가가야 할지를 고민하다 아다치에게 시선이 향하면 그 시점에는 어딜 갔는지 사라져 있을 때도 부지기수, 둘이 대화를 나누던 때외는 달리 여전히 어두운 표정으로 홀로 돌아디니는 그를 신경 쓰느라 속이 바짝 타들어갔다.
한편, 쿠로사와가 아다치에게 좋은 감정을 보이는 것에 대해 고깝게 생각하는 이들도 당연히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아다치는 악의 씨앗이나 다름없는 존재, 불길히며 위험하기에 절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쿠로사와는 정반대, 세계를 구원할 영웅인 만큼 친해져서 나쁠 게 없는데다 동경의 대상이 되기 충분하다.
그런 쿠로사와가 상냥하게 대하는 사람이 아다치라는 사실은 많은 이의 질투를 불러왔다.
그것을 증명하듯 얼마 지나지 않아 아다치에게 지랄하기 시작하는 이가 나타났으니까. 그는 원래 주인공의 절친 포지션에 위치한 남학생이었다. 때문에 쿠로사와를 끈덕지게 따라다니던 중, 마침내 불만이 터져 버린 것.
“야, 솔직하게 말해. 쿠로사와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 내가 뭘.”
“최면이라거나, 기억을 왜곡한다거나, 그런 기분 나쁜 마법이라도 쓴 거 아니냐고.“
”정신 나간 소리 좀 적당히 해. 지금 시비 거는 거야?“
참고로, 아다치는 소심하다는 설정이긴 하지만 성깔이 없진 않았다. 시비 걸고 갈궈도 가만히 있는 건 여학생들 한정이고, 같은 남자가 상대라면 절대 안 봐준다.
게임 내에서도 일일이 참교육을 시전하는 것까진 아니지만 대놓고 경고는 하는데, 세 번 정도는 참아 주다가 그 이상 건드리면 물리 치료에 들어간다.
애초에 게임의 분위기 자체가 이성과의 관계만을 신경 쓰는 만큼 남성끼리는 대체로 우정이 아니면 이러한 대립을 이루는 게 기본이었으니 아다치라고 안 그럴 이유는 없으니까.
아다치가 표정을 굳히며 정색하자 당황하는 남학생, 진작 끼어들어 중재하려 했던 쿠로사와는 애써 차분하게 그들을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두 사람 다 진정해. 아다치는 나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오히려 도움받은 게 전부고, 고맙기도 하지만 정말 좋은 애라서 멋대로 내가 친하게 구는 것뿐이야.“
”… 농담이지? 저번 달까지만 해도 저 녀석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잖아. 부자연스럽다고. 갑자기 좋은 애라느니, 상냥하다느니, 이상한 소리만 하고.“
”그건….“
”됐으니까 그만해. 더 이상 쿠로사와를 곤란하게 만들지 마. 쿠로사와가 어떻게 행동하든 그건 본인 자유야. 이상하다는 듯이 취급할 이유는 없어.“
아다치, 역시 넌 최고야….!
마음속으로 기립박수를 친 쿠로사와는 감격한 얼굴로 아다치를 바라보았다. 쿠로사와가 곤란해질 타이밍에 기가 막히게 커버를 친 아다치의 눈빛은 전에 없이 단호한 느낌, 그에 말문이 막힌 상대 남학생은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더니 억지를 부리기 시작한다.
“흑마법이지? 이상한 마법이라도 써서 쿠로사와를 조종하고 있는 게 분명해. 그런 게 아니고서야 너 같은 놈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
이 새끼, 말 존나 심하게 하네… 왜 이렇게 오버해?
순식간에 당혹스러워진 쿠로사와가 황급히 아다치를 돌아보자 평소 동그랗던 눈매가 약간 가늘게 좁혀진 것이 보였다.
이건 아다치가 빡쳤을 때 나오는 표정. 쿠로사와가 보기엔 여전히 매력적이고 귀엽지만 남들에겐 아니다.
여기서 더 건드렸다간 아다치는 상대 남학생과 현피를 뜰 것이며, 그가 패배할 일은 없겠지만 본인도 상처받은 채 우울해할 게 분명했다.
쿠로사와는 자신의 몸으로 아다치의 시야를 가렸다. 그에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듯 쿠로사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다치, 뒤지고 싶지 않으면 비키란 의미가 아니다.
그저 자신을 위해 나선 쿠로사와에게 미안할 뿐, 조금씩 떨려오는 눈가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네가 미안해할 이유는 없잖아? 쿠로사와는 아다치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어 살살 달래듯 다독이며 자신의 진심을 전하기 시작했다.
“아다치, 너는 제대로 알고 있잖아? 내가 마법 같은 것에 걸려서 너에게 다가온 게 아니라는 걸.”
“… 응.”
“너는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야. 흑마법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타인을 구하기 위해 당연하게 자신이 상처입는 쪽을 선택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야. 적어도 나는… 너의 강인함이나 따뜻한 면도, 성실한 점도 모든 것이 좋다고 생각해. 진심이야.”
멍하니 쿠로사와를 바라보는 아다치, 할 말을 잃은 사람은 아다치뿐만이 아니었다. 교실의 모두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져 버렸으니까.
보통의 사람이라면 절대 다가가지 않을 녀석에게 위로라니…. 황당을 넘어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전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쪽 사정이고, 쿠로사와는 아다치가 자신의 눈앞에서 매도당하고 상처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정말로 아무런 짓도 안 한 아다치의 입장에선 괜히 불똥을 쳐맞게 된 억까일 수밖에 없는데다 자신의 편을 들어 줄 사람조차 없으니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결국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존재하는 상황, 그런 흐름을 처음으로 깨부순 사람이 쿠로사와였다.
아다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지금까지 자신을 이렇게나 좋게 봐 준 사람이 있었던가?
덕담은커녕, 비난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일 지경이었다. 숨만 쉬어도 쌍욕을 얻어먹는 것이 일상인 나날, 쿠로사와가 전한 진심은 그에게 있어 어둠을 잔잔하게 밝히기 시작하는 달빛과도 같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먹먹해져 버린 가슴에 무어라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는 아다치, 쿠로사와는 그런 그에게 따스한 미소를 지어 줄 뿐이었다. 죽기 전에는 아다치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떠올린다면 밤을 새도 모자랄 지경이었는데, 막상 때가 닥쳐 오니 생각만큼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결국 쿠로사와의 중재로 인해 아다치와 다른 남학생이 맞다이를 까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게임 속이라면 이 또한 하나의 이밴트겠지만 실제가 된 이상 아다치의 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그가 상처받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해졌으니.
그렇게 쿠로사와가 아다치를 감싸니 더 이상 말을 보태는 이는 없었다. 시비를 걸었던 남학생은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으나 그런 사소한 부분 같은 건 누구도 신경 쓸 분위기는 아니었고, 아다치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치밀던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아니, 사그라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쿠로사와를 향한 무한한 감사인지, 아니면 동경인지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따뜻한 무언가가 일렁이는 느낌이 가슴 속에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
그날 이후, 아다치와 쿠로사와는 정식으로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는 정도까지 가까워졌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반사적으로 미소를 보였고, 보통은 혼자 있는 아다치에게 쿠로사와가 가까이 다가가는 모양새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쩌다 시선이 마주치면 어색해하며 눈치를 보다 시선을 내리까는 정도에서 이제는 곧잘 자연스럽게 반응하니까.
쿠로사와는 행복에 겨워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자신의 최애와 닿은 것도 모자라 그와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다니.
이에 그가 아다치에게 워낙 호의적으로 구니 그를 따라다니는 히로인들도 대놓고 아다치에게 뭐라고 하지는 않는다.
짜증은 좀 나지만 괜히 한마디 했다가 쿠로사와에게 미움을 사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
쿠로사와는 아다치와 더욱 가까워질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전투 요소를 적극 이용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둘이 통하는 점이 딱히 없으니 공통된 대화 주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함께 추억할 만한 순간을 자주 만드는 것이 중요하므로 선택한 방법.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어쨌든 쿠로사와는 기존의 주인공이 아니라 생각지도 못하게 전생을 해 버린 입장이기에 이 세계의 마법이란 것을 사용할 줄 알아야만 했다.
아직까지는 기존의 주인공도 마법의 사용을 어려워하니 스토리상 어색하진 않겠지만 이대로 있다간 다른 문제로 번져나갈 가능성이 높다.
“… 그렇게 되어서 말이야. 아다치가 마물을 상대하는 모습을 좀 더 관찰해서 배우고 싶다고 할까.”
“배운다니… 나한테? 난 누굴 가르치거나 그럴 만큼 대단하지 않아.”
“아다치는 너무 겸손해. 더 자신감을 가져도 돼. 네가 전투를 위해 힘을 드러낼 때의 모습은 정말로 아름ㄷ… 아니, 멋있다고 할까… 좋은 귀감이 되니까!”
마법 사용이 어렵다는 핑계를 대고 함께 인스턴트 던전 탐험을 하자며 꼬시던 중, 자꾸만 스스로를 낮추는 아다치에 쿠로사와는 답지 않게 다소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대단하지 않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아다치야 말로 이 세계에서 가장 빛나고, 강하고, 사랑스러운 존재 아니던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설령 아다치 본인이라고 해도.
쿠로사와가 이렇게 칭찬을 해 주거나 그를 인정해 줄 때면 아다치는 어김없이 뺨을 붉히곤 했다. 좋은 말엔 익숙하지 않기에 쿠로사와의 이런 한마디 한마디가 굉장히 부끄럽게 느껴지는 모양.
물론 그럴 때면 쿠로사와는 마음 속으로 외친다.
‘아다치, 귀여워!!!’
아다치가 쿠로사와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생애 처음으로 자신을 인정해 주고, 제대로 봐 주는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는 만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라도 무조건 함께하는 것이 당연.
“나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같이 갈게. 쿠로사와랑 함께라면 분명 즐거울 것 같고.”
“설마 둘이서만 가려는 건 아니겠지? 나도 같이 갈 거니까.”
“저도요. 이 멤버로는 저번에도 함께였으니까요.”
그리고 바로 견제를 시도하는 하나비와 후우라.
물론 히로인들은 아다치가 좋아서 따라가는 게 아니다. 그냥 질투가 나서 잽싸게 달라붙는 것뿐, 그렇다고 아다치가 얘네한테 빠지라고 할 것도 아니니까….
아다치는 이전에 하나비에게 따끔한 질책을 들었던 탓인지 조금은 껄끄러워하는 기색이긴 하나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쿠로사와도 웬만하면 그녀들을 떼어놓고 싶다. 애초에 관심도 없고, 주는 호의도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쿠로사와는 게임을 셀 수 없이 플레이해 본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히로인들과의 관계가 나빠지면 모든 엔딩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이벤트, 마법학교 경연 대회에서 엄청난 불이익을 받게 된다.
난이도가 쉬운 것도 아닌데다 가뜩이나 조별과제, 게다가 무조건 히로인들과 한 팀이 된다. 그런데 관계가 나쁘면 얘들이 말을 안 듣는 건 물론이고 지들끼리 싸움이 나기도 한다.
그렇게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 졸업 실패. 이후로 아다치랑 만날 일이 없어지게 되고, 배드 엔딩이다.
혼자서라도 극복해 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했지만 언제나 결과는 같았다. 애초에 여러 명의 히로인들과의 아슬아슬한 관계 유지와 발전이 인기 요소인 게임이었던 만큼 솔로 플레이는 택도 없는 전략.
그렇기 때문에 미래를 위해서라도 친구 정도의 관계는 유지하고 있어야 훗날의 배드 엔딩을 예방할 수 있다.
아다치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지금의 쿠로사와로서는 싫어도 히로인들과 붙어 다녀야 하는 이유가 있었기에 이 부분은 어쩔 수가 없는 점이 아쉬울 뿐.
“함께 가는 건 좋지만 아다치도 배려해 줘. 아다치는 엄연히 나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가는 거니까.”
“… 알겠어. 별로 믿음은 안 가지만 쿠로사와가 그렇게 말한다면 노력해 볼게.”
대답하는 하나비의 표정에는 영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설정상 츤데레 캐릭터라 데레가 나오기 전까진 말하는 싸가지가 이 모양이라 걱정은 되지만….
아다치도 이 정도의 까칠함은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이다. 이런 사소한 반감 정도는 간지럽지도 않다는 거겠지. 역시 아다치는 귀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이런 쿨한 모습이 정말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쿠로사와의 숨결을 자꾸만 거칠어지게끔 만들었다.
한편, 던전에 가기로 약속한 날이 다가올수록 쿠로사와는 밤에 잠을 이루기가 힘들어졌다.
꿈에 그리던 자신의 최애와 떠나는 첫 번째 모험이다. 원래의 주인공이야 경험이 있겠지만 전생한 쿠로사와로서는 처음.
게임에서는 아다치의 액션씬이 그다지 큰 비중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고급 스킬을 쓸 때나 설정된 일러스트가 띄워지는 것뿐, 별다른 모션이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라 단순히 2등신 남짓 되는 조그만 캐릭터가 빨빨거리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만 구경할 수 있는 정도였으니까.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귀엽다. 최대한 단순화되어 동글동글 데포르메가 된 그의 캐릭터는 넨도로이드 피규어처럼 미친 귀여움을 자랑한다. 실제로 넨도로이드, 키링, 인형 등으로 굿즈가 발매되었을 때 쿠로사와는 부리나케 관련 상품을 모조리 쓸어담아 결제했다.
지금도 방에 전시되어 있을 텐데, 생각해 보니 그것들을 놓고 오게 된 건 정말로 아쉽기 짝이 없다. 모처럼 아다치가 현실이 되어 나타났는데, 심지어 빼닮았다는 사실을 눈으로 직접 되새길 수 없는 것이 괴로웠다.
짧뚱한 대두 캐릭터 버전의 아다치, 아~ 다시 보고 싶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보고 싶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했던가, 기껏 게임 속 주인공으로 전생해서 최애와 닿게 된 쿠로사와는 예전의 귀여운 캐릭터 버전의 아다치를 또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렇게 잠을 설쳐 버린 쿠로사와는 던전 탐험 당일, 꽤나 푸석해진 얼굴을 하고 등장해서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어디 아픈 게 아니냐며 걱정을 연발하는 히로인들, 그리고 무언가 한마디 걱정의 말을 해 주고 싶지만 히로인들의 기에 눌려 우물쭈물하고 있는 아다치까지….
물론 쿠로사와는 저를 보며 안절부절하는 아다치의 애달픈 표정을 보고 코피가 쏟아질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위험해,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 아다치… 정말 귀여워. 저 안달난 눈빛… 엄청 두근두근거려!
조용히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는 쿠로사와,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 같아 보이는 기세였기에 걱정을 부르지 않을 수 없다.
”… 저기, 쿠로사와?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리하지 말고 쉬는 편이….“
”그래, 쿠로사와군. 탐험은 또 할 수 있으니까 무리하지 마.“
“아니, 절대 그럴 수 없어! 난 오늘만을 기다렸으니까. 난 정말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렇다. 쿠로사와는 하루하루 잠을 설쳐 메말라가면서도 아다치와의 첫 탐험을 간절히 고대했다.
아다치도 자신의 시간을 내서 와 줬는데 그를 헛걸음하게 만들 수는 없다. 결정적으로 오늘 탐험할 던전은 좀처럼 찾기 힘든 고레벨의 던전, 학생들 수준에선 크게 다치거나 잘못하면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의 위험도를 지닌 곳이다.
평범한 학생들도 클리어할 정도로 약한 던전으로 가게 되면 아다치의 능력상 30분도 안 걸려서 쓸어 버릴 것이 분명하기에 탐험 시간이 매우 짧아진다. 그래서 웬만하면 나타나지 않는 장소를 힘들게 찾아낸 것.
히로인들이 많이 걱정하긴 했지만 의외로 아다치가 그녀들을 정리해 줬다. 조금 조심스러운 태도였지만.
“거긴… 예전에 이미 공략한 적이 있어. 마물들의 패턴도 알고 있으니까 어렵지 않게 레벨을 올릴 수 있을 거야.”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단언하는 아다치의 모습에 차마 그녀들도 핀잔을 주긴 어려웠던 것 같았다.
네 레벨에서야 쉽겠지…. 라는 황당한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미칠듯한 고인물 포스에 말문이 막혀 버린 모양.
아무튼 그러한 사정이 있었던 만큼 쿠로사와는 절대 오늘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내 최애가 멋지게 활약하는 모습을 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쿠로사와는 이들을 이끌고 던전 탐험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들어가기 전, 아다치는 쿠로사와를 포함한 모두를 자신의 뒤로 보내고 본인이 선두에서 들어갔다. 아무래도 이미 경험이 있는 만큼 다른 파티원들이 다치지 않도록 앞에서 보호해 주려는 거겠지.
그런 박력 있는 모습에 쿠로사와는 돌아 버릴 것 같았다.
귀엽고 사랑스러운데다 멋있기까지 하다. 게다가 당연하다는 듯이 해 주는 이 배려는 얼마나 상냥한가?
히로인들도 이때는 아다치의 말을 잘 듣는다. 본인들의 수준에 비해 턱없이 위험한 던전이니 경력자의 말을 들어야 안전한 것이 당연, 반항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들어가자마자 쿠로사와를 포함한 모두가 처음으로 본 것은 이들에게 달려드는 거미 형태의 마물을 자비없이 걷어차 날려 버리는 아다치의 모습이었다.
볼품없이 날아가 벽에 처박혀 버리는 커다란 타란튤라, 원래 이 마물은 아주 질긴 거미줄을 쏘아 사냥감을 포박한 뒤 강력한 산으로 이루어진 체액으로 녹여 식량으로 삼는 놈이다.
아다치는 그런 녀석이 뱉은 침에도 아무렇지 않게 “앗 따거“ 정도의 반응으로 그치곤 싸커킥을 갈겨 치워 버렸다.
물리 공격을 하는 아다치의 모습,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박력 있잖아….! 엄청 멋있어!
엄청난 감격을 겨우 참아낸 쿠로사와가 넋이 나간 채 멍하니 아다치를 구경했고, 다른 히로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전 탐험 때는 주인공이 선두에서 빠르게 리타이어당하는 바람에 싸우는 모습을 제대로 보질 못했으니 놀랄 만도.
이후로는 사실상 걱정이라는 걸 할 게 없었다.
떼거지로 몰려드는 커다란 거미떼에 겁먹은 히로인들, 그리고 쿠로사와도 사람이기에 이런 광경이 무서울 수밖에 없다.
아다치는 바로 거미떼에게 광역 저주를 걸었다. 그들의 생명력과 공격 의지를 빼앗으며 잠들게 만들었고, 거미떼가 시들시들 주저앉으며 잠들어 버리자 쿠로사와를 포함한 파티원들에게 짙은 보랏빛의 작은 마법진이 연달아 뜨더니 놀랄 새도 없이 빠르게 스며들었다.
모두에게 공격력을 증폭시키는 버프를 걸어 준 것.
‘이 스킬들은… 죽음의 자장가, 어둠의 은총! 이걸 실제로 보게 되다니….‘
아다치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다. 당연히 그가 사용하는 마법들에 대해서도 꿰고 있던 쿠로사와는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펙트도 게임과 똑같다….!
잔뜩 흥분해서 넋이 나가 버린 쿠로사와, 그리고 버프는 받았지만 어쩔 줄을 몰라 우왕좌왕하는 히로인들을 돌아본 아다치는 매번 쿠로사와의 가슴을 요동치게 만드는 상냥한 미소와 함께 태연하게 말했다.
“이 정도라면 무리는 없을 것 같아. 천천히 해도 괜찮으니까 한 마리씩 죽이면 돼.”
“… 이대로? 그냥 공격해도 되는 거야? 중간에 깨어나기라도 하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다른 위험이 생기면 내가 막을게.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안심해.“
쿠로사와는 하마터면 탄성을 내뱉으며 박수까지 칠 뻔했다.
아다치, 정말 최고! 저 여유와 상냥함은 정말이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쿠로사와는 아다치의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아니,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을 사람이었기에 망설임 없이 나아가 챙겨 온 검으로 사정없이 거미를 패기 시작했다.
마법을 쓰는 세계인데 왜 검으로만 조지냐고 묻는다면… 전생자인 쿠로사와는 아직 마력을 다룰 줄 몰랐으니까. 게다가 주인공은 기본적으로 검사 캐릭터라 문제없다.
쿠로사와가 먼저 나서서 잠든 거미들을 족치기 시작하자 히로인들도 하나둘씩 꺼림칙한 표정으로 마법을 쓴다.
소심하게 마법을 쓰면서도 어째 불안하다는 듯 힐끗힐끗 아다치의 눈치를 보는데, 쿠로사와는 그 광경이 신선했다.
게임 속 전투에서는 아다치가 아무리 잘해도 히로인들은 꾸준하게 그에게 쿠사리를 놓는다. 시스템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겠지만 현실이 되니 좀 달라진 듯했다.
“아다치, 제대로 보고 있는 거지? 도망가거나 하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니까.”
“… 네가 상대 중인 거미가 늙어 죽는 것까지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마냥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 두려움에 떨면서도 괜히 아다치에게 짜증을 내는 키노코에 아다치도 상당히 언짢았는지 꽁한 얼굴을 하고는 키노코를 돌려깐다.
이내 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며 분위기가 싸늘해졌지만 쿠로사와는 절대적으로 아다치의 편이었다. 저 정도면 충분히 신사적인 대응이지….
본인은 여기서 얻는 것도 딱히 없는 입장인데 기껏 도와주러 왔더니 저딴 식으로 굴면 누구라도 기분 나쁘다.
막말로 아다치가 기분 상해서 니들끼리 알아서 하라며 혼자 나가 버리기라도 하면 쿠로사와나 히로인들이나 거기서 바로 사망 엔딩인데 적당히 해야지.
물론 아다치의 성격상 진짜로 이들을 버리고 가진 않겠지만 그만큼 아쉬운 건 이쪽이라는 소리.
다른 히로인들도 그걸 모르는 건 아니었는지 평소와 다르게 아다치에게 굳이 뭐라 하지 않고 키노코를 내버려두었다.
그렇게 세 마리 정도를 썰고 나자 환한 빛이 쿠로사와의 전신을 감쌌다가 사라진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이건 레벨이 올랐다는 신호!
던전 초입에 등장하는 최약체 마물임에도 세 마리만 잡고 레벨이 올랐다는 건 그만큼 이 던전의 적정 레벨이 높은 수준이라는 뜻.
아다치가 저주를 걸어놓은데다 파티원들의 공격력까지 올려 주었기에 생각보다는 쉽게 처리할 수 있었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거미 한 마리에 파티원 전부가 몰살당했을 것이다.
“쿠로사와군, 축하해!”
“이렇게 빠른 레벨업이라니, 역시 대단해!”
5명의 히로인들이 각각 쿠로사와를 축하했다. 쿠로사와도 그녀들의 축하에 가벼운 미소로 화답해 주었으나 그의 시선이 빠르게 향한 곳은 아다치, 아다치는 쿠로사와에게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입모양으로 전했다.
‘축하해.’
자신의 최애가 성장을 축하해 준다. 전부 아다치가 배려해 준 덕분이라고, 하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을 맴돌았으나 좀처럼 진정하지 않는 심장 때문에 전부 전하지도 못하고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웃을 뿐.
이내 히로인들도 레벨이 오른다. 적극적으로 공격해도 거미가 깨어나지 않는다는 걸 확신했기도 했고, 시간이 좀 지나자 아다치도 지루한 표정으로 사냥을 구경 중이었으니…
빨리빨리 좀 하지 못하겠냐는 듯한 무언의 압박감을 느낀 것인지 이들도 최선을 다 해 거미들을 공격했다.
거미떼의 수가 워낙 많다 보니 전부 잡다간 반나절이 걸려도 모자랄 판, 다음 스테이지로 이동하기 위해 나머지는 아다치의 손짓 한 번에 피어난 검은 불꽃에 휩싸여 바싹 구워졌다.
이 압도적인 강함, 고급 광역 스킬로 단 3초만에 모든 거미떼를 처리한 아다치를 바라보던 쿠로사와는 피곤했던 것도 잊은 채 잔뜩 흥분에 휩싸였다.
이후, 던전을 도는 동안 아다치는 다양한 스킬을 구사하며 마물들의 피를 깎아놓고 막타는 파티원들에게 양보해 주었다.
마치 게임 속에서 함께 던전을 공략했던 때와 비슷했지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게임 내에서는 쿠로사와가 일방적으로 사냥감을 뺏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쿠로사와에게 나쁜 의미로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듯한 아다치의 캐릭터였다.
차이점은 또 있었다. 이번에는 아다치에게 제대로 고맙다는 진심을 전할 수 있었다는 것.
“정말 어려운 던전인데도 이렇게나 안전하게 공략할 수 있게 되다니… 전부 아다치 덕분이야. 네가 있어 줘서 정말 든든하고 안심이 된다고 할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 나, 나는 딱히… 대단한 일을 한 적도 없지만…. 그래도 쿠로사와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정말 기뻐.”
진심을 담아 아다치에게 감사를 전하는 쿠로사와, 그리고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지둥하며 부끄러워하는 아다치.
두 남학생의 묘한 분위기에 히로인들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무엇보다 의지가 되는 것을 떠나 아다치가 동행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공략할 수 없는 곳임은 맞는 말인지라 태클을 걸기에도 좀 그랬으니까.
아다치는 시간이 갈수록 마치 이 공간에는 쿠로사와랑 둘만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안내를 하는 것도 쿠로사와만 보며 쭈뼛쭈뼛 말한다거나, 죽지 않을 정도로만 마물을 패놓고는 쿠로사와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은근 칭찬을 바라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본다거나….
물론 쿠로사와는 그런 아다치의 행동 하나하나가 귀여워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원래가 이성과의 사랑을 다룬 게임이니만큼 혹시나 아다치가 히로인들을 의식하는 듯한 눈치였다면 당연한 일이라며 납득은 하겠지만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러나 아다치는 히로인들을 의식하긴커녕, 어쩌다 그녀들이 자신에게 말을 걸면 ‘아, 맞다. 니들도 있었지?’ 정도의 뉘앙스로 적당히 응대하고 마는 정도의 성의뿐이었다.
바야흐로 보스전이 시작되었을 때, 쿠로사와는 결국 자신을 자제하는 데에 실패했다.
강력한 보스급 마물이 나타나자마자 성큼성큼 다가가 멱살을 잡더니 마법을 쓸 필요도 없다는 듯 주먹으로 직접 패서 빈사 상태로 만들어놓고는 내심 뿌듯한 얼굴로 뒤돌아 어서 칭찬해 달라는 듯 쿠로사와를 바라보는 아다치에 쿠로사와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소리를 내며 크게 웃어 버리는 쿠로사와, 그리고 갑작스러운 웃음에 당황하는 파티원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쿠로사와의 행동은 당황을 넘어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아다치에게로 다가간 쿠로사와가 대뜸 아다치를 품에 끌어안고는 그의 복슬복슬한 뒤통수를 쓰다듬기 시작했던 것.
내가 어떻게 너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좋은 말 몇 번 해 주었다고 해서 금세 마음을 열고 제게 인정과 애정을 바라는 아다치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반짝반짝 빛나는 새카만 눈망울도, 묘하게 상기되어 있는 뺨도, 수줍은 미소도. 굳이 이러지 않아도 주접을 참지 못해 반사적으로 감탄을 쏟아낼 터인데 하필이면 자신만을 올곧게 바라봐 주는 것이 쿠로사와로 하여금 벅차오르게 한다.
“… 아다치, 너는 정말….”
“응…?“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는 사람이야.“
하마터면 사랑스럽다는 고백을 토해낼 뻔했다. 그것을 겨우 감추고 꺼낸 대답이 이것이다.
쿠로사와의 심장이 미친듯이 두근거리며 날뛰고 있었다. 게임 속에선 몰랐던 아다치만의 좋은 향기, 따스한 체온, 목덜미에 느껴지는 그의 숨결. 모든 것이 상상 이상의 행복감을 안겨다 주고 있었다.
한편, 생각지도 못한 포옹과 함께 자신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는 쿠로사와에 아다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을 느끼며 굳어 버렸다.
같은 남자가 자신에게 스킨십을 해서? 아니, 그런 부정적인 느낌은 아니다. 그저 처음으로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사람,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 주고 따뜻하게 바라봐 준 사람의 품은 정말로 기분 좋았다. 모든 것을 잊고 잠시나마 몽롱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리고 이어진 그의 한마디가 아다치의 가슴 속에 파고들어 온기를 번져나가게 만든다.
당황스러웠지만 이 상황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 역시도 미약하게 느껴지는 쿠로사와의 심장 박동을 따라 점점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으니까.
쿠로사와… 너는 절대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야. 사랑받는 게 당연한 사람이며 세상 모든 만물을 감싸고 비추는 태양 같은 존재, 순간 울컥하는 무언가를 겨우 참아낸 아다치는 떨리는 손을 들어 서서히 쿠로사와를 마주안았다.
“… 쟤네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러게요…. 뭔가 잊혀진 기분이에요.”
“남자끼리지만 뭔가 위험한 느낌이 드는데… 괜찮은 건가?“
그렇게 서로를 꼬옥 껴안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내는 두 사람을 직관 중인 히로인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경악 그 자체였다. 던전 공략하는 도중에 이게 무슨….
뭐, 그러거나 말거나 아다치와 쿠로사와는 이를 계기로 서로에게 한 층 더 가까이 닿을 수 있게 되었다. 어쩐지 간질간질하지만 기분 좋은 감정, 그것이 서로 눈을 마주치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아카 쿠로아다 동정마법
다른 필모 짤 있음
https://hygall.com/584083605 1나더
- 직장인인 나, 미연시 게임의 주인공이 되어 최애와 재회하게 되었습니다
2편
- 주인공인 내가 공략불가 악역 캐릭터와 친해져 버린 건에 대하여
아다치와의 기적 같은 첫만남 이후, 쿠로사와는 현재 자신이 처해진 상황에 대한 확인을 먼저 거쳤다.
시간대는 마법학교 입학 후 반년이 지난 시기, 이때의 주인공 캐릭터는 속성이 빛이라 기대주일 뿐이지 약해 빠진 허접이지만 아다치의 마법 실력과 레벨은 이미 학생 수준을 아득히 초월해 있는 상태이다.
주문 영창 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물론, 성격이 내성적이라 그렇지 검술이나 무술 실력 또한 뛰어나다.
이건 설정상 아다치가 마왕이 될 인물이기에 압도적인 강함이 부여된 것이고, 쿠로사와는 성장형 주인공이라 서서히 강해지면서 인물들과의 관계를 쌓는 방식이었다.
반면에 아다치와의 친밀도를 가장 올리기 힘든 구간이기도 했다. 접점이 없으니 아다치가 따돌림을 당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고, 게임 내에선 아다치에게 말을 걸더라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라는 주인공의 독백과 함께 대화 시도가 무참하게 씹혀 버린다.
그때마다 주인공에게 쌍욕을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던 쿠로사와, 이제는 그런 수모를 겪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아무튼 이 시기는 초반 튜토리얼 구간을 지나 본격적으로 게임에 적응하는 때이다. 던전을 돌며 레벨을 올리고, 스킬을 익혀 강해지지 않으면 후반부의 전투까지 가지도 못한다.
아다치는 보스에 걸맞게 이미 말도 안 되는 강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연애에만 집중하느라 수련을 게을리하면 후반부에 가까워질수록 제약이 많아진다.
쿠로사와는 플레이 중 빠른 레벨업을 위해 빡센 던전을 위주로 돌면서 파티에 아다치를 참여시켜 딜러를 맡겼고, 존나 치사한 방법이긴 하지만 아다치가 마물들을 공격해 피를 깎아놓으면 자신이 막타를 쳐서 경험치를 뺏었다.
그럴 때마다 말없이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2등신짜리 SD 버전의 아다치에게 죄책감이 들었지만… 아다치는 굳이 던전에 오지 않아도 강하잖아! 미안해! 하며 합리화했었지.
지금 느끼는 거지만 어쩌면 이후에 아다치가 파티 초대를 씹었던 건 쿠로사와의 행동이 띠꺼워서인지도 몰랐다.
게임의 내적으로는 본격적으로 주인공과 아다치의 대립 각이 세워지는 시기. 둘이 대놓고 적대는 안 하는데, 주변에서 상황을 그렇게 만든다.
아다치가 듣는 데서 주인공과 비교하며 그를 깎아내리는 것은 기본, 지들이 대련하라고 일대일로 붙여놓고 아다치가 이기면 역시 사악한 녀석이라며 매도하질 않나, 교사들도 대놓도 주인공만 띄워 주며 차별하고 히로인들도 얘한테만 지랄한다. 아다치도 상당히 개같았겠지.
여기까지 상황을 파악한 쿠로사와는 자신과 아다치를 둘러싼 분위기를 바꾸고, 누구든 아다치에게 함부로 대하며 상처를 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삼았다.
그렇게 등교한 쿠로사와, 그리고 그를 반기는 여러 명의 히로인들… 쿠로사와는 그녀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교실 구석 쪽에 홀로 앉아 맹한 얼굴로 책을 들여다보는 중인 아다치에게로 시선이 머무를 뿐, 자신의 최애답게 저런 사소한 순간조차 빛이 난다.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리는 기분, 첫 만남 때는 어떻게 그를 껴안을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환영하는 히로인들을 무시하고 지나쳐 아다치에게로 향하기 시작하자 그에게 가까워질수록 시끌벅적하던 교실이 조용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꼈는지 쿠로사와를 올려다보는 아다치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비친다.
당황스러워하는 것도 귀엽다. 어떻게 사람이 하나부터 열까지 귀여울 수 있는 것인지…. 속으로 시끄럽게 주접을 떨어대던 쿠로사와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안녕, 아다치.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 아침부터 독서에 집중하고 있길래. 어떤 책을 읽는 걸까, 하고 궁금했어.“
”… 어, 안녕. 이건 그냥 마물에 관한 책이야. 도감 같은….“
어색하게 인사를 받아 주던 아다치는 이내 쿠로사와의 주위에 몰려든 히로인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숨만 쉬어도 이 지랄을 하는데 아침부터 괜히 물어뜯기는 건 싫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쿠로사와는 아다치에게 무안만 주고 끝낼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히로인들의 반응 따윈 쿨하게 무시하고 자연스럽게 아다치의 옆에 앉아 버렸고, 모두가 당황하는 가운데 쿠로사와는 붙임성 좋게 스몰토크를 이어갔다.
사실은 눈만 마주쳐도 심장이 멎을 것 같았지만.
“아다치에게 인상깊은 마물은 어떤 녀석이었어? 아무래도 아다치라면 강한 만큼 여러 개체를 만나 봤을 것 같아서.“
”에? 나, 나는… 그러니까…. 역시 케르베로스… 려나.“
”케르베로스를 잡았어? 역시 대단하네, 아다치는. 그때의 경험이 더 듣고 싶은데,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원래대로라면 이런 상황은 만들어질 일이 없었다.
플레이어들은 히로인 여럿을 간보며 어장을 놓기 바쁘고, 애초에 아다치는 스토리 전개상 욕을 먹고 다녀야 하는 입장이라 주인공은 이쪽에 신경쓰지 않는다.
하지만 쿠로사와는 더 이상 그런 시스템적인 제약에 묶여 있지 않다. 혼자 있는 아다치에게 다가가 계속해서 친근하게 굴 수 있으니 주저하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
아다치가 횡설수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쿠로사와는 정말이지 흐뭇한 시선으로 듣고 있었다. 아니, 사실 아다치가 하는 이야기는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다. 쿠로사와는 ‘아다치 키요시’의 덕후지, 판타지 덕후는 아니었으니까….
그저 아다치가 제 눈앞에서 앙큼하게 입술을 오물거리며(그런 적 없음) 열심히 말하는 걸 보는 게 행복할뿐이다.
“저기, 쿠로사와군. 그런 애랑 친하게 지낼 필요 없어.”
“정말이지,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라니까.”
물론 이렇게 히로인들이 신경을 긁어대긴 했지만 쿠로사와는 단호하게 그녀들을 차단했다. 애초에 이들이 얼마나 쿠로사와에게 매력을 어필하든지 쿠로사와의 짝사랑은 아다치니까.
그리고 유일무이한 자신의 최애를 비난하는 건 절대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너희들이 뭘 아는데? 아다치와 제대로 대화를 해 본 적도 없으면서, 누구보다 속이 깊고 상냥한 그의 내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
“미안하지만 나는 아다치와 둘이 대화하고 싶어. 아다치를 욕하고 싶은 거라면 안 들리는 곳에서 해 줄래? 아무리 감정이 좋지 않아도 당사자의 앞애서 그러는 건 굉장히 무례한 짓이라고 생각하는데.“
”쿠로사와군….“
”화난 거야? 미안해, 쿠로사와군.“
”왜 나한테 사과해? 너희가 실례를 저지른 상대는 아다치야.”
쿠로사와의 차가운 대답에 히로인들은 각자 걱정을 핑계로 들었으나 쿠로사와는 그것들을 가만히 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자신과 그녀들의 눈치를 살피는 아다치에게 다정한 미소를 보여 주며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 버렸으니.
아다치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쿠로사와에게 이끌렸다. 평소 같으면 자신을 상대조차 하지 않았을 그 쿠로사와의 변화에 좀처럼 상황 판단이 힘든 모양.
쿠로사와는 아다치를 교실에서 빼내 비교적 한적한 복도로 그를 데리고 갔고,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의 아다치에게 정중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아까 벌어진 일에 대해 사과하고 싶어. 나였다면 틀림없이 상처받았을 거야.”
“… 아, 나는 괜찮아! 이젠 익숙하기도 하고, 그 애들도 쿠로사와가 걱정돼서 그랬을 거야. 나 같은 녀석이랑 어울리는 건 아무래도 좋지 않을 테니까.”
“아니, 그 말엔 동의 못하겠어. ‘나 같은 녀석’이라거나 어울리기 좋지 않다거나 하는 평가는 그만둬. 아다치는 이곳의 누구보다도 좋은 사람이니까.”
“쿠로사와….”
눈빛이 떨리던 아다치가 이내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부드러워지는 분위기, 평소의 어두운 인상과는 딴판이 되어 버린다.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귀엽다, 단순히 웃고 있는 것뿐인데도 심장이 미친듯이 날뛴다. 이런 아다치가 미움받는 게 공식이라는 이 세계관이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이어지는 둘의 담화,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웃고 떠드는 동안 쿠로사와는 치솟는 행복감에 죽을 것만 같았다. 아다치가 내 눈앞에서 웃고 있다니, 아다치가 실제로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어!
여담이지만 아다치는 게임 내 일러스트상에서도 동글동글한 인상으로 그려지는 편이었다. 일러스트를 꼭 빼다 박은 귀여운 인상과 순간순간 마주치는 눈망울은 강아지마냥 크고 맑은 느낌이라 자꾸만 쿠로사와의 심장을 떨리게 만드는 중이었으니, 어떻게 이런 애가 세계를 파괴할 마왕이 된다는 것인지 결말을 알면서도 믿기지가 않는 기분.
언뜻 무뚝뚝한 느낌이었던 아다치는 생각보다 웃음이 많았다. 쿠로사와가 제 이야기에 반응해 줄 때마다 방긋방긋 웃었고, 그런 웃음 하나하나가 쿠로사와의 마음에 불을 질러댄다는 것도 모르면서 그저 신이 나는지 서투른 말주변으로 열심히 썰을 풀었다.
게임에선 드러난 적이 없었던 숨겨진 캐릭터성일까,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고통 속에서 끝내 타락하게 된다는 미래가 더욱 비참하게 다가와 자꾸만 속이 쓰라려오는 기분.
둘은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아다치가 대화하다 렉이 걸리면 쿠로사와가 요령 좋게 끼어들어 주제를 이어갔던 덕분이다.
교실로 돌아가던 도중, 아다치는 쿠로사와에게 이런 소감을 전했다. 쿠로사와가 기쁠 수밖에 없는 한마디를.
“… 저기, 쿠로사와. 날 신경 써 줘서 고마워. 덕분에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같아.”
그렇게 말하는 아다치의 양쪽 뺨에는 발그스레한 홍조가 물들어 있었고, 그에 쿠로사와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에게 손을 뻗어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해 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품에 안고 싶었지만 마지막 남은 한 줄기 이성으로 간신히 참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다치와 단둘이 대화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겐 고자극이었으므로.
“앞으로도 이런 시간을 자주 만들자. 아다치만 괜찮다면 말이야. 나는 언제든 좋으니까.”
수줍게 미소지은 아다치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귀여웠다. 쭈뼛대며 감사를 전하는 모습도, 사람을 상대하는 게 서툴러 부끄러움을 참고 용기를 내는 모습도. 그리고 별을 따다 박은 듯 동그랗게 반짝거리는 저 눈동자도.
쿠로사와의 다정한 손길에 아다치는 물러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타인의 손을 타는 것이 낯설 텐데도 껄끄러워하거나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특별히 관리를 하는 건 아닐 텐데도 그의 머릿결은 부드러웠다. 다른 색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검정색, 칠흑과도 같은 그런 머리카락이 마치 비단처럼 느껴질 지경.
쿠로사와는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해 버리고 말았다. 아다치는 위험하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이렇게 손길을 받고 있는 수줍은 모습조차도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견디기가 힘들었으니까. 그리고 감히 그에게 손끝이라도 닿을 수 있는 이 순간에 무한한 감사를 올렸다.
즐거운 시간을 자주 만들자는 약속은 했지만 실제로 지켜지기까지에는 생각보다 장애물이 많았다.
아다치와의 만남에 집중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이 게임의 주인공은 설정상 대단히 인기 많은 녀석.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맴도는 히로인이 다섯이나 되는 것만 봐도 그렇지만 학교의 모든 이들이 그에게 호의적이고, 필요로 한다.
때문에 쿠로사와는 좀처럼 아다치와 둘만의 시간을 마련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빠르게 가까워지고 싶다고는 해도 어떤 명분으로 주변인을 떼어놓고 다가가야 할지를 고민하다 아다치에게 시선이 향하면 그 시점에는 어딜 갔는지 사라져 있을 때도 부지기수, 둘이 대화를 나누던 때외는 달리 여전히 어두운 표정으로 홀로 돌아디니는 그를 신경 쓰느라 속이 바짝 타들어갔다.
한편, 쿠로사와가 아다치에게 좋은 감정을 보이는 것에 대해 고깝게 생각하는 이들도 당연히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아다치는 악의 씨앗이나 다름없는 존재, 불길히며 위험하기에 절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쿠로사와는 정반대, 세계를 구원할 영웅인 만큼 친해져서 나쁠 게 없는데다 동경의 대상이 되기 충분하다.
그런 쿠로사와가 상냥하게 대하는 사람이 아다치라는 사실은 많은 이의 질투를 불러왔다.
그것을 증명하듯 얼마 지나지 않아 아다치에게 지랄하기 시작하는 이가 나타났으니까. 그는 원래 주인공의 절친 포지션에 위치한 남학생이었다. 때문에 쿠로사와를 끈덕지게 따라다니던 중, 마침내 불만이 터져 버린 것.
“야, 솔직하게 말해. 쿠로사와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 내가 뭘.”
“최면이라거나, 기억을 왜곡한다거나, 그런 기분 나쁜 마법이라도 쓴 거 아니냐고.“
”정신 나간 소리 좀 적당히 해. 지금 시비 거는 거야?“
참고로, 아다치는 소심하다는 설정이긴 하지만 성깔이 없진 않았다. 시비 걸고 갈궈도 가만히 있는 건 여학생들 한정이고, 같은 남자가 상대라면 절대 안 봐준다.
게임 내에서도 일일이 참교육을 시전하는 것까진 아니지만 대놓고 경고는 하는데, 세 번 정도는 참아 주다가 그 이상 건드리면 물리 치료에 들어간다.
애초에 게임의 분위기 자체가 이성과의 관계만을 신경 쓰는 만큼 남성끼리는 대체로 우정이 아니면 이러한 대립을 이루는 게 기본이었으니 아다치라고 안 그럴 이유는 없으니까.
아다치가 표정을 굳히며 정색하자 당황하는 남학생, 진작 끼어들어 중재하려 했던 쿠로사와는 애써 차분하게 그들을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두 사람 다 진정해. 아다치는 나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오히려 도움받은 게 전부고, 고맙기도 하지만 정말 좋은 애라서 멋대로 내가 친하게 구는 것뿐이야.“
”… 농담이지? 저번 달까지만 해도 저 녀석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잖아. 부자연스럽다고. 갑자기 좋은 애라느니, 상냥하다느니, 이상한 소리만 하고.“
”그건….“
”됐으니까 그만해. 더 이상 쿠로사와를 곤란하게 만들지 마. 쿠로사와가 어떻게 행동하든 그건 본인 자유야. 이상하다는 듯이 취급할 이유는 없어.“
아다치, 역시 넌 최고야….!
마음속으로 기립박수를 친 쿠로사와는 감격한 얼굴로 아다치를 바라보았다. 쿠로사와가 곤란해질 타이밍에 기가 막히게 커버를 친 아다치의 눈빛은 전에 없이 단호한 느낌, 그에 말문이 막힌 상대 남학생은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더니 억지를 부리기 시작한다.
“흑마법이지? 이상한 마법이라도 써서 쿠로사와를 조종하고 있는 게 분명해. 그런 게 아니고서야 너 같은 놈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
이 새끼, 말 존나 심하게 하네… 왜 이렇게 오버해?
순식간에 당혹스러워진 쿠로사와가 황급히 아다치를 돌아보자 평소 동그랗던 눈매가 약간 가늘게 좁혀진 것이 보였다.
이건 아다치가 빡쳤을 때 나오는 표정. 쿠로사와가 보기엔 여전히 매력적이고 귀엽지만 남들에겐 아니다.
여기서 더 건드렸다간 아다치는 상대 남학생과 현피를 뜰 것이며, 그가 패배할 일은 없겠지만 본인도 상처받은 채 우울해할 게 분명했다.
쿠로사와는 자신의 몸으로 아다치의 시야를 가렸다. 그에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듯 쿠로사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다치, 뒤지고 싶지 않으면 비키란 의미가 아니다.
그저 자신을 위해 나선 쿠로사와에게 미안할 뿐, 조금씩 떨려오는 눈가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네가 미안해할 이유는 없잖아? 쿠로사와는 아다치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어 살살 달래듯 다독이며 자신의 진심을 전하기 시작했다.
“아다치, 너는 제대로 알고 있잖아? 내가 마법 같은 것에 걸려서 너에게 다가온 게 아니라는 걸.”
“… 응.”
“너는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야. 흑마법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타인을 구하기 위해 당연하게 자신이 상처입는 쪽을 선택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야. 적어도 나는… 너의 강인함이나 따뜻한 면도, 성실한 점도 모든 것이 좋다고 생각해. 진심이야.”
멍하니 쿠로사와를 바라보는 아다치, 할 말을 잃은 사람은 아다치뿐만이 아니었다. 교실의 모두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져 버렸으니까.
보통의 사람이라면 절대 다가가지 않을 녀석에게 위로라니…. 황당을 넘어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전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쪽 사정이고, 쿠로사와는 아다치가 자신의 눈앞에서 매도당하고 상처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정말로 아무런 짓도 안 한 아다치의 입장에선 괜히 불똥을 쳐맞게 된 억까일 수밖에 없는데다 자신의 편을 들어 줄 사람조차 없으니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결국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존재하는 상황, 그런 흐름을 처음으로 깨부순 사람이 쿠로사와였다.
아다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지금까지 자신을 이렇게나 좋게 봐 준 사람이 있었던가?
덕담은커녕, 비난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일 지경이었다. 숨만 쉬어도 쌍욕을 얻어먹는 것이 일상인 나날, 쿠로사와가 전한 진심은 그에게 있어 어둠을 잔잔하게 밝히기 시작하는 달빛과도 같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먹먹해져 버린 가슴에 무어라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는 아다치, 쿠로사와는 그런 그에게 따스한 미소를 지어 줄 뿐이었다. 죽기 전에는 아다치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떠올린다면 밤을 새도 모자랄 지경이었는데, 막상 때가 닥쳐 오니 생각만큼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결국 쿠로사와의 중재로 인해 아다치와 다른 남학생이 맞다이를 까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게임 속이라면 이 또한 하나의 이밴트겠지만 실제가 된 이상 아다치의 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그가 상처받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해졌으니.
그렇게 쿠로사와가 아다치를 감싸니 더 이상 말을 보태는 이는 없었다. 시비를 걸었던 남학생은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으나 그런 사소한 부분 같은 건 누구도 신경 쓸 분위기는 아니었고, 아다치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치밀던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아니, 사그라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쿠로사와를 향한 무한한 감사인지, 아니면 동경인지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따뜻한 무언가가 일렁이는 느낌이 가슴 속에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
그날 이후, 아다치와 쿠로사와는 정식으로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는 정도까지 가까워졌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반사적으로 미소를 보였고, 보통은 혼자 있는 아다치에게 쿠로사와가 가까이 다가가는 모양새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쩌다 시선이 마주치면 어색해하며 눈치를 보다 시선을 내리까는 정도에서 이제는 곧잘 자연스럽게 반응하니까.
쿠로사와는 행복에 겨워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자신의 최애와 닿은 것도 모자라 그와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다니.
이에 그가 아다치에게 워낙 호의적으로 구니 그를 따라다니는 히로인들도 대놓고 아다치에게 뭐라고 하지는 않는다.
짜증은 좀 나지만 괜히 한마디 했다가 쿠로사와에게 미움을 사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
쿠로사와는 아다치와 더욱 가까워질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전투 요소를 적극 이용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둘이 통하는 점이 딱히 없으니 공통된 대화 주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함께 추억할 만한 순간을 자주 만드는 것이 중요하므로 선택한 방법.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어쨌든 쿠로사와는 기존의 주인공이 아니라 생각지도 못하게 전생을 해 버린 입장이기에 이 세계의 마법이란 것을 사용할 줄 알아야만 했다.
아직까지는 기존의 주인공도 마법의 사용을 어려워하니 스토리상 어색하진 않겠지만 이대로 있다간 다른 문제로 번져나갈 가능성이 높다.
“… 그렇게 되어서 말이야. 아다치가 마물을 상대하는 모습을 좀 더 관찰해서 배우고 싶다고 할까.”
“배운다니… 나한테? 난 누굴 가르치거나 그럴 만큼 대단하지 않아.”
“아다치는 너무 겸손해. 더 자신감을 가져도 돼. 네가 전투를 위해 힘을 드러낼 때의 모습은 정말로 아름ㄷ… 아니, 멋있다고 할까… 좋은 귀감이 되니까!”
마법 사용이 어렵다는 핑계를 대고 함께 인스턴트 던전 탐험을 하자며 꼬시던 중, 자꾸만 스스로를 낮추는 아다치에 쿠로사와는 답지 않게 다소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대단하지 않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아다치야 말로 이 세계에서 가장 빛나고, 강하고, 사랑스러운 존재 아니던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설령 아다치 본인이라고 해도.
쿠로사와가 이렇게 칭찬을 해 주거나 그를 인정해 줄 때면 아다치는 어김없이 뺨을 붉히곤 했다. 좋은 말엔 익숙하지 않기에 쿠로사와의 이런 한마디 한마디가 굉장히 부끄럽게 느껴지는 모양.
물론 그럴 때면 쿠로사와는 마음 속으로 외친다.
‘아다치, 귀여워!!!’
아다치가 쿠로사와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생애 처음으로 자신을 인정해 주고, 제대로 봐 주는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는 만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라도 무조건 함께하는 것이 당연.
“나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같이 갈게. 쿠로사와랑 함께라면 분명 즐거울 것 같고.”
“설마 둘이서만 가려는 건 아니겠지? 나도 같이 갈 거니까.”
“저도요. 이 멤버로는 저번에도 함께였으니까요.”
그리고 바로 견제를 시도하는 하나비와 후우라.
물론 히로인들은 아다치가 좋아서 따라가는 게 아니다. 그냥 질투가 나서 잽싸게 달라붙는 것뿐, 그렇다고 아다치가 얘네한테 빠지라고 할 것도 아니니까….
아다치는 이전에 하나비에게 따끔한 질책을 들었던 탓인지 조금은 껄끄러워하는 기색이긴 하나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쿠로사와도 웬만하면 그녀들을 떼어놓고 싶다. 애초에 관심도 없고, 주는 호의도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쿠로사와는 게임을 셀 수 없이 플레이해 본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히로인들과의 관계가 나빠지면 모든 엔딩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이벤트, 마법학교 경연 대회에서 엄청난 불이익을 받게 된다.
난이도가 쉬운 것도 아닌데다 가뜩이나 조별과제, 게다가 무조건 히로인들과 한 팀이 된다. 그런데 관계가 나쁘면 얘들이 말을 안 듣는 건 물론이고 지들끼리 싸움이 나기도 한다.
그렇게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 졸업 실패. 이후로 아다치랑 만날 일이 없어지게 되고, 배드 엔딩이다.
혼자서라도 극복해 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했지만 언제나 결과는 같았다. 애초에 여러 명의 히로인들과의 아슬아슬한 관계 유지와 발전이 인기 요소인 게임이었던 만큼 솔로 플레이는 택도 없는 전략.
그렇기 때문에 미래를 위해서라도 친구 정도의 관계는 유지하고 있어야 훗날의 배드 엔딩을 예방할 수 있다.
아다치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지금의 쿠로사와로서는 싫어도 히로인들과 붙어 다녀야 하는 이유가 있었기에 이 부분은 어쩔 수가 없는 점이 아쉬울 뿐.
“함께 가는 건 좋지만 아다치도 배려해 줘. 아다치는 엄연히 나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가는 거니까.”
“… 알겠어. 별로 믿음은 안 가지만 쿠로사와가 그렇게 말한다면 노력해 볼게.”
대답하는 하나비의 표정에는 영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설정상 츤데레 캐릭터라 데레가 나오기 전까진 말하는 싸가지가 이 모양이라 걱정은 되지만….
아다치도 이 정도의 까칠함은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이다. 이런 사소한 반감 정도는 간지럽지도 않다는 거겠지. 역시 아다치는 귀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이런 쿨한 모습이 정말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쿠로사와의 숨결을 자꾸만 거칠어지게끔 만들었다.
한편, 던전에 가기로 약속한 날이 다가올수록 쿠로사와는 밤에 잠을 이루기가 힘들어졌다.
꿈에 그리던 자신의 최애와 떠나는 첫 번째 모험이다. 원래의 주인공이야 경험이 있겠지만 전생한 쿠로사와로서는 처음.
게임에서는 아다치의 액션씬이 그다지 큰 비중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고급 스킬을 쓸 때나 설정된 일러스트가 띄워지는 것뿐, 별다른 모션이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라 단순히 2등신 남짓 되는 조그만 캐릭터가 빨빨거리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만 구경할 수 있는 정도였으니까.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귀엽다. 최대한 단순화되어 동글동글 데포르메가 된 그의 캐릭터는 넨도로이드 피규어처럼 미친 귀여움을 자랑한다. 실제로 넨도로이드, 키링, 인형 등으로 굿즈가 발매되었을 때 쿠로사와는 부리나케 관련 상품을 모조리 쓸어담아 결제했다.
지금도 방에 전시되어 있을 텐데, 생각해 보니 그것들을 놓고 오게 된 건 정말로 아쉽기 짝이 없다. 모처럼 아다치가 현실이 되어 나타났는데, 심지어 빼닮았다는 사실을 눈으로 직접 되새길 수 없는 것이 괴로웠다.
짧뚱한 대두 캐릭터 버전의 아다치, 아~ 다시 보고 싶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보고 싶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했던가, 기껏 게임 속 주인공으로 전생해서 최애와 닿게 된 쿠로사와는 예전의 귀여운 캐릭터 버전의 아다치를 또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렇게 잠을 설쳐 버린 쿠로사와는 던전 탐험 당일, 꽤나 푸석해진 얼굴을 하고 등장해서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어디 아픈 게 아니냐며 걱정을 연발하는 히로인들, 그리고 무언가 한마디 걱정의 말을 해 주고 싶지만 히로인들의 기에 눌려 우물쭈물하고 있는 아다치까지….
물론 쿠로사와는 저를 보며 안절부절하는 아다치의 애달픈 표정을 보고 코피가 쏟아질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위험해,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 아다치… 정말 귀여워. 저 안달난 눈빛… 엄청 두근두근거려!
조용히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는 쿠로사와,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 같아 보이는 기세였기에 걱정을 부르지 않을 수 없다.
”… 저기, 쿠로사와?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리하지 말고 쉬는 편이….“
”그래, 쿠로사와군. 탐험은 또 할 수 있으니까 무리하지 마.“
“아니, 절대 그럴 수 없어! 난 오늘만을 기다렸으니까. 난 정말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렇다. 쿠로사와는 하루하루 잠을 설쳐 메말라가면서도 아다치와의 첫 탐험을 간절히 고대했다.
아다치도 자신의 시간을 내서 와 줬는데 그를 헛걸음하게 만들 수는 없다. 결정적으로 오늘 탐험할 던전은 좀처럼 찾기 힘든 고레벨의 던전, 학생들 수준에선 크게 다치거나 잘못하면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의 위험도를 지닌 곳이다.
평범한 학생들도 클리어할 정도로 약한 던전으로 가게 되면 아다치의 능력상 30분도 안 걸려서 쓸어 버릴 것이 분명하기에 탐험 시간이 매우 짧아진다. 그래서 웬만하면 나타나지 않는 장소를 힘들게 찾아낸 것.
히로인들이 많이 걱정하긴 했지만 의외로 아다치가 그녀들을 정리해 줬다. 조금 조심스러운 태도였지만.
“거긴… 예전에 이미 공략한 적이 있어. 마물들의 패턴도 알고 있으니까 어렵지 않게 레벨을 올릴 수 있을 거야.”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단언하는 아다치의 모습에 차마 그녀들도 핀잔을 주긴 어려웠던 것 같았다.
네 레벨에서야 쉽겠지…. 라는 황당한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미칠듯한 고인물 포스에 말문이 막혀 버린 모양.
아무튼 그러한 사정이 있었던 만큼 쿠로사와는 절대 오늘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내 최애가 멋지게 활약하는 모습을 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쿠로사와는 이들을 이끌고 던전 탐험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들어가기 전, 아다치는 쿠로사와를 포함한 모두를 자신의 뒤로 보내고 본인이 선두에서 들어갔다. 아무래도 이미 경험이 있는 만큼 다른 파티원들이 다치지 않도록 앞에서 보호해 주려는 거겠지.
그런 박력 있는 모습에 쿠로사와는 돌아 버릴 것 같았다.
귀엽고 사랑스러운데다 멋있기까지 하다. 게다가 당연하다는 듯이 해 주는 이 배려는 얼마나 상냥한가?
히로인들도 이때는 아다치의 말을 잘 듣는다. 본인들의 수준에 비해 턱없이 위험한 던전이니 경력자의 말을 들어야 안전한 것이 당연, 반항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들어가자마자 쿠로사와를 포함한 모두가 처음으로 본 것은 이들에게 달려드는 거미 형태의 마물을 자비없이 걷어차 날려 버리는 아다치의 모습이었다.
볼품없이 날아가 벽에 처박혀 버리는 커다란 타란튤라, 원래 이 마물은 아주 질긴 거미줄을 쏘아 사냥감을 포박한 뒤 강력한 산으로 이루어진 체액으로 녹여 식량으로 삼는 놈이다.
아다치는 그런 녀석이 뱉은 침에도 아무렇지 않게 “앗 따거“ 정도의 반응으로 그치곤 싸커킥을 갈겨 치워 버렸다.
물리 공격을 하는 아다치의 모습,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박력 있잖아….! 엄청 멋있어!
엄청난 감격을 겨우 참아낸 쿠로사와가 넋이 나간 채 멍하니 아다치를 구경했고, 다른 히로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전 탐험 때는 주인공이 선두에서 빠르게 리타이어당하는 바람에 싸우는 모습을 제대로 보질 못했으니 놀랄 만도.
이후로는 사실상 걱정이라는 걸 할 게 없었다.
떼거지로 몰려드는 커다란 거미떼에 겁먹은 히로인들, 그리고 쿠로사와도 사람이기에 이런 광경이 무서울 수밖에 없다.
아다치는 바로 거미떼에게 광역 저주를 걸었다. 그들의 생명력과 공격 의지를 빼앗으며 잠들게 만들었고, 거미떼가 시들시들 주저앉으며 잠들어 버리자 쿠로사와를 포함한 파티원들에게 짙은 보랏빛의 작은 마법진이 연달아 뜨더니 놀랄 새도 없이 빠르게 스며들었다.
모두에게 공격력을 증폭시키는 버프를 걸어 준 것.
‘이 스킬들은… 죽음의 자장가, 어둠의 은총! 이걸 실제로 보게 되다니….‘
아다치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다. 당연히 그가 사용하는 마법들에 대해서도 꿰고 있던 쿠로사와는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펙트도 게임과 똑같다….!
잔뜩 흥분해서 넋이 나가 버린 쿠로사와, 그리고 버프는 받았지만 어쩔 줄을 몰라 우왕좌왕하는 히로인들을 돌아본 아다치는 매번 쿠로사와의 가슴을 요동치게 만드는 상냥한 미소와 함께 태연하게 말했다.
“이 정도라면 무리는 없을 것 같아. 천천히 해도 괜찮으니까 한 마리씩 죽이면 돼.”
“… 이대로? 그냥 공격해도 되는 거야? 중간에 깨어나기라도 하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다른 위험이 생기면 내가 막을게.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안심해.“
쿠로사와는 하마터면 탄성을 내뱉으며 박수까지 칠 뻔했다.
아다치, 정말 최고! 저 여유와 상냥함은 정말이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쿠로사와는 아다치의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아니,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을 사람이었기에 망설임 없이 나아가 챙겨 온 검으로 사정없이 거미를 패기 시작했다.
마법을 쓰는 세계인데 왜 검으로만 조지냐고 묻는다면… 전생자인 쿠로사와는 아직 마력을 다룰 줄 몰랐으니까. 게다가 주인공은 기본적으로 검사 캐릭터라 문제없다.
쿠로사와가 먼저 나서서 잠든 거미들을 족치기 시작하자 히로인들도 하나둘씩 꺼림칙한 표정으로 마법을 쓴다.
소심하게 마법을 쓰면서도 어째 불안하다는 듯 힐끗힐끗 아다치의 눈치를 보는데, 쿠로사와는 그 광경이 신선했다.
게임 속 전투에서는 아다치가 아무리 잘해도 히로인들은 꾸준하게 그에게 쿠사리를 놓는다. 시스템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겠지만 현실이 되니 좀 달라진 듯했다.
“아다치, 제대로 보고 있는 거지? 도망가거나 하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니까.”
“… 네가 상대 중인 거미가 늙어 죽는 것까지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마냥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 두려움에 떨면서도 괜히 아다치에게 짜증을 내는 키노코에 아다치도 상당히 언짢았는지 꽁한 얼굴을 하고는 키노코를 돌려깐다.
이내 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며 분위기가 싸늘해졌지만 쿠로사와는 절대적으로 아다치의 편이었다. 저 정도면 충분히 신사적인 대응이지….
본인은 여기서 얻는 것도 딱히 없는 입장인데 기껏 도와주러 왔더니 저딴 식으로 굴면 누구라도 기분 나쁘다.
막말로 아다치가 기분 상해서 니들끼리 알아서 하라며 혼자 나가 버리기라도 하면 쿠로사와나 히로인들이나 거기서 바로 사망 엔딩인데 적당히 해야지.
물론 아다치의 성격상 진짜로 이들을 버리고 가진 않겠지만 그만큼 아쉬운 건 이쪽이라는 소리.
다른 히로인들도 그걸 모르는 건 아니었는지 평소와 다르게 아다치에게 굳이 뭐라 하지 않고 키노코를 내버려두었다.
그렇게 세 마리 정도를 썰고 나자 환한 빛이 쿠로사와의 전신을 감쌌다가 사라진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이건 레벨이 올랐다는 신호!
던전 초입에 등장하는 최약체 마물임에도 세 마리만 잡고 레벨이 올랐다는 건 그만큼 이 던전의 적정 레벨이 높은 수준이라는 뜻.
아다치가 저주를 걸어놓은데다 파티원들의 공격력까지 올려 주었기에 생각보다는 쉽게 처리할 수 있었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거미 한 마리에 파티원 전부가 몰살당했을 것이다.
“쿠로사와군, 축하해!”
“이렇게 빠른 레벨업이라니, 역시 대단해!”
5명의 히로인들이 각각 쿠로사와를 축하했다. 쿠로사와도 그녀들의 축하에 가벼운 미소로 화답해 주었으나 그의 시선이 빠르게 향한 곳은 아다치, 아다치는 쿠로사와에게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입모양으로 전했다.
‘축하해.’
자신의 최애가 성장을 축하해 준다. 전부 아다치가 배려해 준 덕분이라고, 하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을 맴돌았으나 좀처럼 진정하지 않는 심장 때문에 전부 전하지도 못하고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웃을 뿐.
이내 히로인들도 레벨이 오른다. 적극적으로 공격해도 거미가 깨어나지 않는다는 걸 확신했기도 했고, 시간이 좀 지나자 아다치도 지루한 표정으로 사냥을 구경 중이었으니…
빨리빨리 좀 하지 못하겠냐는 듯한 무언의 압박감을 느낀 것인지 이들도 최선을 다 해 거미들을 공격했다.
거미떼의 수가 워낙 많다 보니 전부 잡다간 반나절이 걸려도 모자랄 판, 다음 스테이지로 이동하기 위해 나머지는 아다치의 손짓 한 번에 피어난 검은 불꽃에 휩싸여 바싹 구워졌다.
이 압도적인 강함, 고급 광역 스킬로 단 3초만에 모든 거미떼를 처리한 아다치를 바라보던 쿠로사와는 피곤했던 것도 잊은 채 잔뜩 흥분에 휩싸였다.
이후, 던전을 도는 동안 아다치는 다양한 스킬을 구사하며 마물들의 피를 깎아놓고 막타는 파티원들에게 양보해 주었다.
마치 게임 속에서 함께 던전을 공략했던 때와 비슷했지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게임 내에서는 쿠로사와가 일방적으로 사냥감을 뺏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쿠로사와에게 나쁜 의미로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듯한 아다치의 캐릭터였다.
차이점은 또 있었다. 이번에는 아다치에게 제대로 고맙다는 진심을 전할 수 있었다는 것.
“정말 어려운 던전인데도 이렇게나 안전하게 공략할 수 있게 되다니… 전부 아다치 덕분이야. 네가 있어 줘서 정말 든든하고 안심이 된다고 할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 나, 나는 딱히… 대단한 일을 한 적도 없지만…. 그래도 쿠로사와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정말 기뻐.”
진심을 담아 아다치에게 감사를 전하는 쿠로사와, 그리고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지둥하며 부끄러워하는 아다치.
두 남학생의 묘한 분위기에 히로인들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무엇보다 의지가 되는 것을 떠나 아다치가 동행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공략할 수 없는 곳임은 맞는 말인지라 태클을 걸기에도 좀 그랬으니까.
아다치는 시간이 갈수록 마치 이 공간에는 쿠로사와랑 둘만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안내를 하는 것도 쿠로사와만 보며 쭈뼛쭈뼛 말한다거나, 죽지 않을 정도로만 마물을 패놓고는 쿠로사와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은근 칭찬을 바라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본다거나….
물론 쿠로사와는 그런 아다치의 행동 하나하나가 귀여워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원래가 이성과의 사랑을 다룬 게임이니만큼 혹시나 아다치가 히로인들을 의식하는 듯한 눈치였다면 당연한 일이라며 납득은 하겠지만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러나 아다치는 히로인들을 의식하긴커녕, 어쩌다 그녀들이 자신에게 말을 걸면 ‘아, 맞다. 니들도 있었지?’ 정도의 뉘앙스로 적당히 응대하고 마는 정도의 성의뿐이었다.
바야흐로 보스전이 시작되었을 때, 쿠로사와는 결국 자신을 자제하는 데에 실패했다.
강력한 보스급 마물이 나타나자마자 성큼성큼 다가가 멱살을 잡더니 마법을 쓸 필요도 없다는 듯 주먹으로 직접 패서 빈사 상태로 만들어놓고는 내심 뿌듯한 얼굴로 뒤돌아 어서 칭찬해 달라는 듯 쿠로사와를 바라보는 아다치에 쿠로사와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소리를 내며 크게 웃어 버리는 쿠로사와, 그리고 갑작스러운 웃음에 당황하는 파티원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쿠로사와의 행동은 당황을 넘어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아다치에게로 다가간 쿠로사와가 대뜸 아다치를 품에 끌어안고는 그의 복슬복슬한 뒤통수를 쓰다듬기 시작했던 것.
내가 어떻게 너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좋은 말 몇 번 해 주었다고 해서 금세 마음을 열고 제게 인정과 애정을 바라는 아다치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반짝반짝 빛나는 새카만 눈망울도, 묘하게 상기되어 있는 뺨도, 수줍은 미소도. 굳이 이러지 않아도 주접을 참지 못해 반사적으로 감탄을 쏟아낼 터인데 하필이면 자신만을 올곧게 바라봐 주는 것이 쿠로사와로 하여금 벅차오르게 한다.
“… 아다치, 너는 정말….”
“응…?“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는 사람이야.“
하마터면 사랑스럽다는 고백을 토해낼 뻔했다. 그것을 겨우 감추고 꺼낸 대답이 이것이다.
쿠로사와의 심장이 미친듯이 두근거리며 날뛰고 있었다. 게임 속에선 몰랐던 아다치만의 좋은 향기, 따스한 체온, 목덜미에 느껴지는 그의 숨결. 모든 것이 상상 이상의 행복감을 안겨다 주고 있었다.
한편, 생각지도 못한 포옹과 함께 자신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는 쿠로사와에 아다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을 느끼며 굳어 버렸다.
같은 남자가 자신에게 스킨십을 해서? 아니, 그런 부정적인 느낌은 아니다. 그저 처음으로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사람,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 주고 따뜻하게 바라봐 준 사람의 품은 정말로 기분 좋았다. 모든 것을 잊고 잠시나마 몽롱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리고 이어진 그의 한마디가 아다치의 가슴 속에 파고들어 온기를 번져나가게 만든다.
당황스러웠지만 이 상황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 역시도 미약하게 느껴지는 쿠로사와의 심장 박동을 따라 점점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으니까.
쿠로사와… 너는 절대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야. 사랑받는 게 당연한 사람이며 세상 모든 만물을 감싸고 비추는 태양 같은 존재, 순간 울컥하는 무언가를 겨우 참아낸 아다치는 떨리는 손을 들어 서서히 쿠로사와를 마주안았다.
“… 쟤네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러게요…. 뭔가 잊혀진 기분이에요.”
“남자끼리지만 뭔가 위험한 느낌이 드는데… 괜찮은 건가?“
그렇게 서로를 꼬옥 껴안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내는 두 사람을 직관 중인 히로인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경악 그 자체였다. 던전 공략하는 도중에 이게 무슨….
뭐, 그러거나 말거나 아다치와 쿠로사와는 이를 계기로 서로에게 한 층 더 가까이 닿을 수 있게 되었다. 어쩐지 간질간질하지만 기분 좋은 감정, 그것이 서로 눈을 마주치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아카 쿠로아다 동정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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