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ㅇㅈㅇ


https://hygall.com/584083605 1편
- 직장인인 나, 미연시 게임의 주인공이 되어 최애와 재회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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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인 내가 공략불가 악역 캐릭터와 친해져 버린 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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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역 캐릭터를 너무 좋아해 쓰러뜨릴 수 없어 곤란한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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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 속 주인공으로 환생해 버린 내가 공략 불가였던 히든 루트를 개척했습니다







5편
게임 속의 주인공입니다만, 이런 엔딩은 싫으니까 바꿔 보려 합니다





아다치가 쿠로사와의 기숙사에서 하룻밤 자고 일어났던 날, 뽀샤시한 햇살을 맞으며 눈을 뜬 그가 목격한 광경은 다음과 같았다.
바로 전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처음으로 깊은 키스를 나누었던… 처음으로 사귀게 된 연인. 쿠로사와가 자신을 끌어안은 채 곤히 자고 있는 모습. 자고 일어나니 마냥 꿈 같기만 하던 순간뿐이었다.
그를 동경한다고만 생각했지만 망설임 없이 제 곁에 가까이 다가오는 쿠로사와가 싫지 않았고, 그보다 더 가까운 거리가 되어도 좋았다. 간질간질, 지금껏 살면서 느껴 보지 못했던 생소한 그 감정이 그를 향한 사랑이었을 줄이야.
아다치는 그렇게 하염없이 잠든 쿠로사와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제 사귀게 되었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거지? 평범한 연인들이 어떻게 데이트를 즐기며 교감하는지에 대해서는 배운 바가 없으니 설레면서도 막막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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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사와가 눈을 뜬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졸음이 채 가시지도 않았으면서 아다치의 시선에 부스스 기분 좋은 미소부터 지어 보인 그는 자신에게 어색한 인사를 건네는 아다치의 뺨에 뽀뽀를 남기며 대답했다.
이렇게 기분 좋은 아침은 처음이라고.



두 사람이 같이 등교를 하고, 같이 조식을 먹는 모습은 전교생에게 꽤나 떠들썩한 이슈였다. 한동안은 데면데면한 모양이더니 언제 저렇게 또 사이가 좋아졌나 싶냐는 느낌.
쿠로사와는 공식 설정집에서도 적혀 있지 않았던 사실을 알게 되기도 했다.
아다치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할까, 언제부턴가 학생 식당에 오게 되면 늘 고정적으로 찾는 메뉴가 있다는 이야기에 귀가 번쩍 트였던 쿠로사와는 제 앞에서 오물오물 주먹밥을 먹고 있는 아다치를 보느라 정작 자신은 식사를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참치마요주먹밥, 에그마요주먹밥이 늘 세트. 그래서 더블마요였다. 아다치는 더블마요를 좋아하는구나….


“쿠로사와, 아까부터… 계속 나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그게… 주먹밥을 먹고 있는 아다치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눈을 뗄 수가 없어.“

”???“


아다치가 엥? 하며 황당하다는 듯 자신을 보든지 말든지 쿠로사와는 난데없이 벅차오르는 기분에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야만 했다. 아, 진짜 미쳐 버릴 것 같아.
쿠로사와는 자꾸만 거칠어지는 호흡을 애써 참아야만 했다. 진정하자, 앞으로도 아다치에게 넘치도록 사랑을 줄 수 있으니 벌써부터 이러면 안 돼.
아직은 비밀 연애인 만큼 자신이 티를 내서 아다치를 곤란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이쪽은 원래도 동성 연애에 대한 개념이 희박한 세계관이므로.

어쨌든 아침 댓바람부터 남사스러운 분위기를 풍겨대는 두 남학생의 모습은 여러 가지로 기묘한 광경이었다.
안면 가득 흐뭇한 웃음을 띄운 채 식사 중이던 것도 멈춰서 아다치를 바라보는 쿠로사와나, 그런 쿠로사와의 시선에 부끄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쭈뼛대는 아다치나 주변으로 하여금 질린 표정을 짓게 만들었으니.
그러나 둘만의 파라다이스는 오래 가지는 않았다. 조식을 먹으러 나타난 히로인들이 웬일로 함께 아침 식사를 하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다가왔기 때문.
가장 먼저 둘에게 말을 건 사람은 토모에였다.


“… 두 사람, 다시 친해지기로 한 거야?”

“그게… 역시 타인의 반응 때문에 멀어지는 건 견딜 수가 없어서. 내가 멋대로 다시 다가간 것뿐이니까.“

”쿠, 쿠로사와! 아니야. 내가 갑자기 말도 없이 피해 버려서… 내가 나빴어.“

”나를 생각해 준 마음에 그런 거였잖아? 오히려 감사하게 여기고 있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이 새끼들 진짜 뭐냐…?
히로인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같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동성끼리의 저 간질간질 미묘한 분위기는 그렇다치고, 쿠로사와는 도대체 왜 아다치를 저렇게 싸고 도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아다치가 착한 심성을 가졌다는 건 몇 번 함께 있어 보기도 했고, 그를 둘러싼 편견에 대해 쿠로사와가 반박했던 것을 인정했던 덕분도 있기에 알고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쿠로사와의 반응이 납득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대놓고 둘이 앉아 있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는 떨떠름한 얼굴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뭐, 예전 같았으면 아다치의 존재 자체를 피하느라 쿠로사와를 놔두고 따로 먹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정도까진 아니니까.


”결국 주변의 평판 같은 건 생각하지 않기로 한 거야? 여러 가지로 피곤할 일이 많아질지도 몰라.“
하나비가 말했다. 짐짓 단호한 어조이지만 쿠로사와를 걱정하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이기에 쿠로사와 역시도 날카롭게 대응하지는 않았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런 생각을 해 봤거든. 모두가 보아 왔던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정의롭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잖아? 실제로도 나는 선하고 정의로운 판단을 하고 움직여야 하지.“

”… 뭐, 그렇지? 빛의 마법사는 항상 그런 느낌이었잖아.“

”그렇다면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소외시키고, 그가 괴롭힘을 당하거나 하지도 않은 악행을 뒤집어쓰고 매도당하는 등의 상황을 방관하는 게 과연 정의롭고 선한 일일까?“

”그건….“

”마법의 속성은 사용자의 인격이랑은 관계가 없어. 누구나 안 좋은 소릴 들으면 기분이 상하는 게 당연하고, 상처받고, 슬퍼하지. 아다치도 똑같아. 우리와 똑같이 제대로 감정을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니까. 그동안 아다치가 겪어 왔던 일들을 자신이 당한다고 상상해 봐. 어떨 것 같아?”


쿠로사와의 말을 끝으로 테이블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슬쩍슬쩍 아다치의 눈치를 살피는 히로인들도 그렇지만 가장 놀란 사람은 아다치였다.
이렇게까지 날 생각해 주고 있었구나… 그동안 쿠로사와가 아다치의 자책을 막았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는 아다치가 처한 입장과 느낄 감정에 대해 정말로 진심으로 공감하고,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질타와 경멸이 날아드는 이 세계를, 너무나 당연했던 것들을 부정하며 정면으로 맞서는 그를 바라보며 아다치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왠지 모를 해방감, 그리고 희망.
맞은편에서 아다치가 자신을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쿠로사와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이전부터 아다치를 그리며 함께 나누었던 슬픔과 분노, 한은 잠깐의 대화 정도로 끝날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게 모두가 조용해진 가운데, 쿠로사와의 목소리만이 선명하게 울리고 있었다.


“내가 아다치와 가까워지고 싶어했던 건… 단순히 아다치가 좋은 사람이라서, 착해서 그런 것뿐만은 아니야. 그가 당하는 차별과 모욕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니까.“

“…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겠어. 그리고 아다치에게도 미안해. 그동안 잘 모르면서 미워하고, 못된 말만 했으니까.“

”어…? 아, 응. 나는 괜찮아.”


지난번 연회 때 사과했던 하나비에 이어 키노코가 다른 이들을 대표해 사과를 한다. 다소 얼떨떨하지만서도 그녀의 사과를 받아 준 아다치는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가벼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저 미안하다는 한마디일뿐인데,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위로가 되는 건지. 솔직히 아다치도 사람인지라 자신에게만 따갑게 구는 그녀들에게 좋은 감정은 없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지난 일들에 대한 앙금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언젠가 쿠로사와가 조금 머쓱허게 그랬던 적이 있다.
이들도 기본적으로는 모두 상냥한 성격이라고.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아다치가 사과를 받아 주자 조금 어색하게나마 그에게 웃어 주는 모습들이 그러했고, 특히 하나비의 경우는 아다치에 대한 오해가 풀리기 전부터도 그가 주먹밥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우리는 쿠로사와의 의견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흑마법은 확실히 무섭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아다치는 사람을 해칠 목적으로 마법을 쓴다거나 하는 성격이 아니니까.“

”이해해 줘서 고마워.“

”… 하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설득시키는 건 쉽지 않을 거야. 아마 반발이 심할지도 몰라. 아무리 아다치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흑마법을 타고났다는 건 그야말로 원죄, 태어난 순간부터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걸 당연하게 여길 테니까.“


하나비의 다소 단호한 의견에 쿠로사와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아다치를 향했다.
애써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겠지. 지금의 아다치는 세상을 향한 증오가 그다지 위험한 수준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낮은 자존감과 자기 혐오는 꾸준히 관심을 기울여 줄 필요가 있었다.
게임 속의 아다치는 삶의 결말이 두 가지뿐이었으니까.
막 대하면 타락해서 끔찍한 살인귀, 이전에 본인이 들었던 말마따나 재앙이 되어서 죽임을 당하거나 잘해 주면 죄책감과 자기 혐오에 잡아먹혀 자살을 한다.
지금의 아다치는 후자의 위험성이 높은 상태. 비록 사랑을 확인하고 연인이 되었다고는 하나, 방심할 수 없었다. 쿠로사와를 더욱 좋아하게 된 만큼 자신이 그의 삶에 장애물이 된다거나 괴롭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면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물론 하나비가 아다치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저런 말을 한 건 아니다. 전부 사실이며, 아다치라는 한 사람의 인격을 떠나 어둠의 마법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두려움을 깨부수는 게 핵심이라고 짚어 준 것이기에 귀담아 들을 필요는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아다치의 마음은 어떨까, 자신을 겨냥해 비난하고자 하는 말이 아님을 알지만서도 속상한 건 어쩔 수 없겠지.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마는 아다치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쿠로사와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마법은 쓰는 사람의 마음에 달린 거니까. 솔직히… 사람을 공격하기 위해 쓴다면 위험하지 않을 마법이 있을까?”

“원론적으로 따지면 그게 맞아. 그렇지만 쿠로사와의 논리는 지금으로서는 거센 반발을 부르기 충분하니까 그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대비라고 한다면… 어떤 걸 말하는 건데?“

”… 네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일일이 아다치가 와서 지켜 줄 수는 없잖아? 혼자 있을 때 휘말리면 어쩔 수 없으니까.“


하나비는 상냥하지만서도 상당히 직설적이었다. “주둥이 털기 전에 누가 시비 걸 때 처맞지 않을 정도론 실력을 갖춰라, 좆밥아.”라는 말을 곱게 표현했으니까. 아다치에 이어 쿠로사와까지 가차없이 패 버리는 그녀의 팩트 폭격에 두 사람 다 기가 죽어 버린 상태. 대문자 T와 진지한 대화를 하면 맞닥뜨리게 되는 F들의 숙명이었다.

결국 대화의 요지는 일단 쿠로사와에게 일종의 수련이 필요하다는 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약점을 보완하고, 필요 이상 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의 무력은 갖추고 있어야 마냥 개소리로 취급당하는 일이 없어질 것이며 치솟는 반발에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어야 하니까.

한편, 쿠로사와는 육체적 수련이 목표가 되었다면 아다치는 약간의 인성 교육을 거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난데없이 팩트 폭행을 당해 억울했던 쿠로사와가 하나비에게 무력을 쓰지 않고도 가능할 수 있다며 항변했고, 하나비는 다른 의견이 필요하다는 말과 함께 여태 가만히 입 닫고 있던 아다치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렇게 나온 아다치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 내가 겪은 바로는…. 강한 힘, 공포와 파괴가 곧 설득력인 것 같아. 말로만 하니까 아무도… 들어 주지 않았거든.“


침체된 표정으로 얼굴에 그늘이 진 채 씁쓸하게 대답하는 아다치의 모습은 모두가 할 말을 잃어 버리기에 충분했다.
온 세상에게 미움받으며 뒤틀린 삶을 살아온 이의 결과라고 할까, 어쩌면 타락은 점점 진행 중이었지만 아다치 특유의 착한 성품으로 꾹꾹 눌러 참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
쿠로사와는 그저 아다치의 손을 꼬옥 잡아 주었을뿐이다. 자신이 어떻게 그를 탓할 수 있겠는가, 쿠로사와는 절대적으로 그의 편이니까.




본격적으로 연인 사이가 되었으나 이후로 어떻게 흘러갈지는 솔직히 장담할 수가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아다치는 이때 쯔음부터 학교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되니까. 그러나 쿠로사와로 인해 그 플래그는 분쇄되어 퇴학이든, 자퇴든 피해갔으니 아다치는 평소처럼 멀쩡하게 등교하고 있었다. 거기다 이제는 대놓고 쿠로사와랑 붙어다니고 있기에 늘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던 왕따 처지에서 벗어나 곧잘 웃음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를 향한 도 넘은 차별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쿠로사와에게 사랑받으며 이전에 비해 밝아지기 시작한 아다치는 타인의 수군거림이나 평가질에도 확실히 신경을 덜 쓰게 된다는 것을 실감하는 중이었다.

다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이따금씩 쿠로사와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거나 이마를 짚으며 휘청일 때가 있었다. 무언가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그리고는 심호흡을 하며 애써 그것을 감추려는 듯하는 모습, 아다치는 그가 그럴 때마다 자신이 모르는 병이라도 앓고 있는 것인지 걱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이 기우였다는 걸 깨닫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다치는 쿠로사와를 좋아한다. 그는 정말로 멋있기도 하지만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는 사람이니까. 자신의 애정을 보여 주는 데에 한 점 부끄러움도, 망설임도 없다. 아다치는 쿠로사와의 그런 점이 닮고 싶어졌다.


“… 저기, 쿠로사와.”

“응. 왜 그래, 아다치?”

“그게, 쿠로사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답지 않게 결연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다치에 쿠로사와의 표정에는 의문이 떠올랐다. 뭐길래 이렇게 비장한 예고를 날리는 거지? 그러나 그 의문점은 오래 가진 않았다.
동그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무언가 결심한 듯한 아다치가 대뜸 머뭇거리며 쿠로사와의 손을 두 손으로 꼬옥 감싸쥐더니 그의 심장에 필살기를 날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나도… 쿠로사와를 엄청 좋아하니까. 제대로 표현하고 싶어서….“

”…!!“


쿠로사와도 귀여워! 좋아해! 난데없는 아다치의 폭격에 쿠로사와는 하마터면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녹음, 녹음하고 싶다. 아니, 영상으로 녹화해 두는 것이 더 시급할지도.
어느 쪽이든 이 순간을 평생토록 박제하고 싶은 마음이다. 용기를 내어 결연하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아다치라니, 어떻게 이런 자극적인 전개가…. 고백도 고백이지만 기껏 질러놓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고개를 푹 떨궈 버리는 이 사랑스러움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 아다치,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너무 궁금해서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되겠어. 아다치는 천국에서 쫓겨난 거야, 아니면 자발적으로 내려온 거야, 그것도 아니면 추락 사고였던 거야? 날개는 언제 잃어버렸어?“


어흑… 결국 이번에도 패배한 쪽은 아다치였다. 요상한 소릴 흘리며 주저앉으려던 아다치를 감싸안은 쿠로사와 역시도 만만치 않은 자극에 시달리는 중이다.
아다치는 쿠로사와가 왜 휘청였는지 이제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서, 지나친 설렘에 다리가 풀렸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그런 감정이 싫지는 않았다. 자신이 느끼는 이 사랑을 쿠로사와 또한 느끼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한편, 두 사람은 교내 연애의 짜릿함을 아주 잘 즐기는 중이었다. 사람의 왕래가 적은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키스를 나누기도 하고, 사람들이 보는 앞애서도 은근슬쩍 스킨십이 잦아진다거나 시시콜콜한 이야길 나누는 것뿐인데도 애정이 가득 담긴 눈길로 시선을 마주친다.
그런 두 사람의 애틋한 분위기는 이전보다도 훨씬 단단해진 모습이었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수근거림, 또는 곱지 않은 시선 따윈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모양새였으니까.


그렇게 두 사람의 소소하고 잔잔한 연애가 시작된 지도 한 달이 흘렀다. 그 사이, 이전처럼 함께 놀러 나가는 것을 핑계로 데이트도 즐기며 알콩달콩 서로에 대해 이해해나가는 시간을 가진 동안 별다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앞으로 다가올 태풍에 대해 대비라도 하라는 듯한 고요함이었지만 지금의 아다치와 쿠로사와가 그런 걸 깨닫지는 못했다. 그저 눈앞의 행복한 나날을 즐기기 바쁠뿐.

이후에 다가올 가장 가까운 이벤트는 외국으로의 견학이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각자 견문을 넓히기 위해 국내를 벗어나 다른 나라에서의 경험을 쌓고 그것을 바탕으로 진로 결정에 도움을 받는다… 는 취지로 매년 행해지는 행사이다.
게임 속에서는 이때엔 아다치가 없기 때문에 플레이할 가치조차 없는 파트라고 여겨 기억 속에서도 흐릿한 상황.
이 견학 이벤트에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더라? 무언가 위험이 닥쳤던 것 같지만 자세히는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그저 답답했던 쿠로사와는 원래는 스토리 안에 존재하지 않았을 아다치가 제일 걱정이었다.







***





“아다치, 이번 외국 견학 때 너는 빠져 줬으면 하는데.”

“갑자기 왜 시비야? 아다치도 이 학교의 학생이야. 참여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가 있어.”


잘 사는 귀족가의 자식이 자신의 무리와 함께 대뜸 다가오더니 던진 말이었다.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견학에서 빠지라는 무례한 태도에 빡친 쿠로사와가 반발했지만 의외로 아다치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침착히게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 권리에 대한 것은 부정하지 않아. 문제는 저 검은 머리칼이야. 국내도 아니고 외국에 흑마법을 다루는 녀석과 함께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외교적 문제로 번질지도 모르니까.“

”… 외교적… 인가. 이를 테면?“

”선전포고지. 너 같은 흑마법사를 데리고 입국하게 되면 그 나라 국민에게도 위협 아니겠어? 그도 그럴 게, 거기는 신성 국가잖아. 쿠로사와라면 당연히 환영받고도 남겠지만 너는 아니야. 신성 마법에 정면으로 반하는 속성이니까.“


침착하게 질문하는 아다치에 귀족가 자제는 더욱 탄력을 받고 떠들어댔다. 그 덕분에 쿠로사와는 잊고 있던 사실을 한 가지 떠올릴 수 있었다. 신성 국가로의 견학, 그곳에서의 사건은 세계가 점차 위험에 빠지게 되는 원인이 된다. 주인공과 히로인들을 포함한 마법 학교의 학생들이 신성 국가에서의 여행을 즐기는 동안 벌어지는 일들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는 다섯 명의 히로인들 중 한 명이 고백을 해 온다. 이것은 다섯 중 호감도가 제일 높게 쌓인 히로인이 고백을 하는데, 일정 수치 이상의 호감도를 쌓지 않았다면 이 이벤트는 생략된다.
두 번째로는 히로인 다섯 중 한 명의 사망. 이것을 계기로 주인공은 힐러로서의 능력을 각성한다.
세 번째로는… 드래곤의 침략으로 인해 마법 학교의 학생들 중 일부가 사망하고, 신성 국가는 격럴한 대항을 벌인 끝에 결국 멸망하는 길로 이어진다. 그 결과, 빛과 신성 마법을 숭상하는 그들이 사라짐으로써 반대 상성을 지닌 어둠의 기운이 힌층 강대해지고 마물이 득세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스토리상으론 함께하지 않았지만 아다치는 반대편에서 점차 강대해지는 어둠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광증에 사로잡혀 타락에 가속도가 붙게 된다. 즉, 마왕의 탄생에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린다는 소리.

기껏 파멸 플래그를 박살냈더니 더 엄청난 위기가 쿠로사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이벤트의 등장은 쿠로사와가 여태까지 들인 노력이 전부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는 위험이었다. 일단 가장 큰 문제는 드래곤의 침략을 막을 방도가 없다는 것.
필연적으로 벌어지는 이벤트이고, 게임 속에서도 주인공은 드래곤을 저지하지 못한 채 목숨만 건지는 게 전부다. 뭐, 진정한 빛의 마법사로 각성하는 계기이기도 하지만 그건 살아남았을 때의 이야기. 그리고 신성 국가의 멸망 또한 예외는 없었다.
즉… 어찌저찌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아다치는 광증에 시달리다 최후를 맞는다. 마왕이 되거나, 광증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재앙을 가져오느니 차라리 죽는 것을 선택했다.
물론, 주인공이 죽은 뒤에 어떻게 되는지는 묘사된 바가 없긴 했지만 아마도 비슷하게 흘러가겠지.
아다치가 등장하지 않는 파트인데다 다른 루트가 존재하지도 않는 필연적인 전개라 주의깊게 플레이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이벤트, 쿠로사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 특정 속성에 따라 입국을 제한한다는 법률은 없어. 나도 이 학교의 학생으로서 동등한 교육을 누릴 자유가 있고.“

”이건 눈치의 문제잖아. 넌 어딜 가서도 달갑지 않은 존재야.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도 솔직히 이해가 안 돼. 미래를 위해서라도 진작에-“

”그 입 닥치지 못해?“


쿠로사와가 자리를 박치고 일어나 귀족가 학생의 멱살을 잡았다. 지금 누구에게 그딴 막말을…!
경비원을 몰아붙였을 때에 이어 격하게 분노를 표출하는 쿠로사와의 모습에 모든 이가 경악했고, 으르렁대는 그의 기세에 상대 학생은 기가 눌려 반사적으로 입을 닫았다.


“슬슬 사람에게 할 말, 못할 말 정돈 구분하는 지능을 갖추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나불대지 마.“

”… 대체 왜 네가 쟬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아다치는 네 적이잖아? 잘해 줄 가치가 없는 녀석이라고.“

”누가 그래? 이딴 비상식적인 괴롭힘에 동참해서 사람 하나를 궁지로 몰아넣는 게 정의로운 행동이라면 너희들이나 그렇게 해. 난 차라리 악당이 될 테니까.“


이번에도 나 대신 쿠로사와가….
아무래도 눈앞에서 대놓고 “넌 죽어야 될 놈이야.”라는 뉘앙스의 말을 듣는 건 타격이 좀 크게 느껴졌다. 그런데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화내 주는 쿠로사와의 모습이 왜 이렇게 가슴이 아파 오는 건지 모를 일, 자신이 아니었다면 그는 당연하게 많은 이들의 호의를 누리며 하루히루 행복하게 살아갔으리라는 생각이 아다치의 머릿속을 채워나간다.
쿠로사와는 어째서… 나 같은 놈을 좋아해 주는 걸까? 또 다시 끝도 없는 나락으로 추락하는 기분,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아다치가 조용히 쿠로사와의 소맷자락을 부여잡았다.


“… 아다치, 미안해.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 버렸구나. 많이 놀랐어?”

“어? 아, 그런 거 아니야. 오히려… 고마워. 하지만 난 이미 익숙하니까 괜찮아. 바람이라도 쐬러 갈까?“

”응…. 그렇게 하자.“


어째 욕을 들은 당사자가 더 얌전한 반응을 보이는 게 기묘할 따름이었지만 아다치로 인해 소란은 진정되었다.
쿠로사와의 충격 발언은 여전히 모두를 뒤숭숭하게 만들어놓긴 했지만… 차라리 악당이 되겠다라, 이 정도면 쿠로사와가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하다는 인식이 모두에게 퍼져나갔다.
저 녀석만 없었더라면…. 아다치를 뒤따르는 기분 나쁜 시선들, 묵묵히 자리를 피하는 새카만 뒤통수만을 눈에 담던 쿠로사와는 돌연 뒤를 돌아 다른 학생들을 무표정으로 둘러보는 아다치에 멈칫했다.
잠시 조용히 모두를 응시히던 아다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 어느 때보다도 뚜렷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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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말해 두겠는데, 혹시라도 쿠로사와에게 나쁜 짓을 한다면 내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사람을 해칠 목적으로 저주 같은 흑마법을 쓰고 싶지는 않지만, 그걸 바란다면 경고를 무시해도 좋아. 기꺼이 제물로 삼아서 정말로 마왕이 되어 줄 테니까 일조하고 싶은 사람은 마음대로 해.“


아다치의 경고는 한순간에 교실을 조용해지게 만들었다.
여태 이렇게까지 강한 수위의 발언을 한 적도 없는지라 그 무게는 더욱 상당했고, 쿠로사와 또한 말문이 막힌 채 등골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아다치가 말했던 설득이라는 게 어떤 느낌인 것인지 알게 되었다고 할까, 그동안 기세 좋게 멋대로 수군거리는 이들이 한순간에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한다. 아다치에게 견학에서 빠지라며 폭언을 내뱉었던 학생마저.
강한 힘, 공포와 파괴. 아다치는 이번에도 이것이 모두를 잠재울 수단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다치의 뒤를 따르던 쿠로사와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닌 쿠로사와를 위해 모두에게 공포가 되는 것을 선택한 그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참담한 심정을 느꼈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게 해 주고 싶었는데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살랑살랑 나부끼는 미지근한 바람, 둘은 함께 걸으면서도 평소와는 달리 꽤 오래도록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어쩐지 생각이 많아 보이는 듯한 아다치의 그늘진 얼굴, 쿠로사와는 아다치가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런 표정을 짓게 하려고 그를 사랑하고 고백했던 것이 아닌데.
결국 정적을 참지 못하고 먼저 균열을 낸 쪽은 쿠로사와였다. 아다치는 원래도 말수가 없기에 복잡한 생각에 갇히기까지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고민에만 몰두하니까.


“… 저기, 아다치. 아까 일은-“

”쿠로사와, 앞으로는 무리해서 내 편을 들어 주지 않아도 괜찮아.“

단호함을 담고 울리는 아다치의 목소리에 쿠로사와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쿠로사와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차마 어떤 의미로 하는 말이냐며 묻지도 못한 채, 그저 움직이지 않는 입술만이 파르르 떨려 왔지만 아다치는 아랑곳 않고 자신의 심경을 전해 왔다.

“… 나에게도 쿠로사와는 아주 소중한 사람이야. 하지만 나를 감싸기 위해 모두에게 등을 돌리는 건 원하지 않아. 나는 원래 그림자 같은 존재지만 쿠로사와까지 그럴 필요는 없으니까.“

“그림자라니, 절대 그렇지 않아. 나에게 있어서 너는-“

”미안해. 여태까지 쿠로사와를 통해 수없이 위로받고, 용기를 얻고, 감사한 일들뿐이지만… 역시 나로 인해 겪지 않아도 될 고생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악역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내가 맡을 테니까 쿠로사와는 언제나처럼….“


모처럼 또박또박 자신의 심경을 전하던 아다치는 말을 끝까지 이어나갈 수 없었다.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쿠로사와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무척이나 깊은 상처를 받은 듯한 그런 모습이었으니까.
이런 쿠로사와의 반응에 아다치는 당혹스러워졌다. 어째서 이런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는 거지….? 생각은 오래 이어질 수 없었다. 결국 울컥 치미는 괴로운 감정을 삼킬 수 없었던 쿠로사와의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르더니 봇물 터지듯 넘쳐 흘렀기 때문.


“쿠로사와…? 지금 우는 거야? 어째서…. 저기, 미안해. 뭔가 내가 쿠로사와에게 상처라도 준 거라면….”


쿠로사와는 대답 대신 아다치를 끌어안았다. 한동안 이어지는 흐느낌, 아다치는 다소 얼떨떨하지만서도 전해지는 그의 슬픔에 함부로 무어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쿠로사와에게 이토록 괴로운 심정을 느끼게끔 만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라는 것.
난 어째서 이렇게나 한심한 거야…. 좋아하는 사람을 상처받게 만들다니, 어떤 말실수를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가 상처를 받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중요할뿐.
아다치는 마치 안기듯 자신을 끌어안고 훌쩍이는 쿠로시와가 차츰 진정할 때까지 아무런 말 없이 그를 마주안고 토닥여 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울음 섞인 쿠로사와의 중얼거림에 모든 생각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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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있어서 넌 한 번도 악역이었던 적이 없었어. 아다치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나는 오랜 시간을 행복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으면 좋겠어.“

”쿠로사와…?“

”이제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 네 곁에서 아픔도, 슬픔도 함께 나누며 아다치가 행복해지는 모습을… 내 눈으로 보고 싶어. 그것뿐이야.”


아직까지도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쿠로사와는 굳게 믿고 있었다. 죽기 전까지 염원했던 것, 아다치와 만나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그리던 그와의 행복한 순간을 이루기 위해 이곳에 오게 된 것이라고.
오직 그 바람만이 목표였던 쿠로사와의 입장에서 그것을 부정당한다는 건 이 세계에서 살아갈 이유를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무엇보다 두렵고 끔찍한 일이었다.
아다치로서는 쿠로사와의 이러한 맹목적인 애정이 전부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뭘 해 줬다고…?
어쩌면 누구나 어리둥절해할 만한 당연한 생각이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의 행복을 바랐다는 것 하나만으로 눈물까지 흘리는 그의 모습에는 지금까지 겉으로 보여졌던 것 이상의 깊은 사연과 애정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으니까.
아다치는 그의 눈물을 닦아 주며 그의 뺨에 입맞춤을 남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성격상 부끄러움에 약간의 머뭇거림은 있었지만.


“쿠로사와, 나도 언제나 네가 행복하기만을 바라고 있어.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자신을 향해 애틋함이 담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똑바로 시선을 마주치는 아다치, 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과거 ‘체리마왕’ 게임 속 일러스트 캐릭터와 겹쳐졌다. 그리고 수없이 되새김질했을 그의 캐릭터 사진을 찾아보며 환하게 미소짓던 자신의 모습도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순간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사랑하지만 닿을 수는 없었던, 말 그대로 최애였던 아다치가 자신을 향해 미소와 함께 손을 내미는 듯한 이 기분을.
아다치의 말은 함축적이었지만 아주 깊기도 했다. 예전에도 자신으로 인해 쿠로사와가 행복했다면 앞으로도 그러길 바란다는 뜻 안에는 함께 고난과 역경을 딛으며 밝은 미래로 나아가고 싶어하는 쿠로사와의 바람을 존중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었으니까.
결국 쿠로사와는 벅차오르는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그 탓에 아다치의 이마에, 뺨에, 입술에 쉴 새 없이 키스를 남겨대며 자신의 사랑을 마음껏 드러낼뿐.



일련의 소란이 벌어졌던 이후, 아다치의 살벌한 경고가 효과를 발휘했던 덕분(?)인지 파란을 몰고 오기 충분했던 발언을 했음에도 쿠로사와에게는 별다른 비아냥이 들려 오지는 않았다.
뒤에서야 어떨지 모르나 앞에서라도 조용한 게 어디인가, 다만 제물로 삼아 마왕이 되어 주겠다며 역대급 협박을 날렸던 아다치는 이전보다 더욱 기피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빼도 박도 못할 마왕 후보 확정.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다치가 다른 학생들을 대놓고 위협했던 것을 다른 히로인들은 어느 정도 심경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당당하게 다가오지는 못했지만 어쩌다 틈이 났을 때, 아다치의 곁을 스쳐지나가던 후우라가 한마디 했던 것이 증표였다.

”아까는 속이 시원했어요.“

그리고 생긋 미소를 보여 주고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다치는 자신도 모르게 기분 좋은 웃음을 띄웠다. 다른 이들이 어찌 생각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은 마왕이 되지 않을 것이고, 예전에는 원망스럽기만 했던 이 흑마법을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사용하겠다는 용기를 얻었으니까.
강한 힘, 공포와 파괴… 역시 정답은….! 갑자기 눈동자를 반짝이는 아다치를 곁에서 지켜보던 쿠로사와는 안 봐도 읽히는 그의 속내에 다정함을 담아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다치, 그래도 앞으로는 되도록 다른 방법을 선택해 보자. 강한 힘이나 공포, 파괴는… 최후의 수단으로.“

”… 응.“


어떻게 알았지!
뜨끔한 아다치는 쿠로사와의 설득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뭐, 그렇다고 한들 여태 사람을 때려 본 적도 없었으니 막상 저지를 수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신을 위해 언제든 기꺼이 맞서 싸워 준 그의 애정은 매우 숭고한 것. 그러니 쿠로사와가 위기에 처하게 된다면 망설임없이 나설 생각이었다.

아다치는 여전히 자신에게 따뜻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쿠로사와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리고 그에게만 들리도록 자신의 다짐을 전했다.


“쿠로사와는 언제나 완벽하다는 이미지가 있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러니까 쿠로사와가 약해질 때가 온다면 내가 강해질게.“

”… 내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아다치가 제일 잘 알고 있잖아? 조금 어색하더라도 문제없고, 그래도 괜찮다는 걸 알려 준 사람도 너니까.“


완벽하지 않은 쿠로사와가 완벽한 주인공이 되어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는 분명히 변화하는 것이 있었다.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을 때까지 사랑이라는 것을 몰랐던 아다치에게 그것을 깨닫게 해 주었고, 아다치를 대하는 히로인들의 인식과 태도가 바뀌면서 그에게 좋은 친구들이 생겼다.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변해가는 게임 속 스토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알 수 없다. 정해진 엔딩을 벗어난 새로운 엔딩을 만들어나가는 것이기에.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중간 정도의 타임라인에 돌입했을 뿐이며, 그가 개입해야만 하는 이벤트 역시도 아직 남아 있다. 앞으로의 미래에 중요한 분기점이 될 외국으로의 견학에서 쿠로사와는 다시 한번 스토리를 바꿔 보려 하고 있었다. 아다치의 행복을 위해, 그와의 미래를 위해.









마치아카 쿠로아다 동정마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