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ㅇㅈ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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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인인 나, 미연시 게임의 주인공이 되어 최애와 재회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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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인 내가 공략불가 악역 캐릭터와 친해져 버린 건에 대하여






3편
악역 캐릭터를 너무 좋아해 쓰러뜨릴 수 없어 곤란한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만?






던전에서의 탐험이 큰 성공을 거둔 것이 계기가 되어 아다치는 쿠로사와의 비공식 파티원이 되었다.
그날 하루 동안 무려 레벨을 10이나 올렸으니 그야말로 괄목할 만한 성장 속도다. 본인의 수준보다 턱없이 높은 위험한 마물들을 쳐서 죽였으니 아무래도 빠를 수밖에.
덕분에 쿠로사와를 따라다니는 히로인들도 내키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아다치에게 감사 인사를 하기도 했었다. 어쨌든 아다치 덕분에 본인들도 성장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같이 다니는 건 역시나 꺼려지는 모양.
일단은 서로 어색하기도 하고,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남들이 수군대곤 할 테니 그 점을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한편, 쿠로사와가 게임 속 세계의 주인공이 된 것도 벌써 5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쿠로사와는 자신이 알고 있던 게임 내 설정, 캐릭터들의 성격, 그들의 취향, 모든 루트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굵직한 이벤트 등을 정리해 두고 틈틈이 꺼내 훗날의 계획을 짜기도 했다.
그중 가장 가까운 시일 내에 벌어질 이벤트는 바로 검술 수업에서의 일대일 스파링이다. 이 시기에 주인공과 아다치는 서로가 자신의 적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공존할 수 없는 양과 음, 빛과 어둠은 결코 섞일 수 없다는 판단과 함께 서로에게 적대감을 갖고 멀어져 버린다.

주인공은 몰라도 아다치는 왜 이러느냐, 아다치는 설정상 마왕이 될 재능을 타고난 캐릭터인 관계로 마법뿐만이 아니라 무력도 상당하다. 힘도 세고, 검도 잘 다룬다.
그런 아다치의 대척점인 주인공의 경우는 서서히 강해지는 성장형 캐릭터. 당연히 상식적으론 주인공이 털린다.
가뜩이나 영웅 취급받는 주인공의 스파링 상대가 된 것도 부담스러운데 주변에서 야유를 퍼부어대니 스트레스가 쌓였던 아다치.
스파링이 시작되면 자신에게 덤벼드는 주인공을 자비없이 패 버리는데, 이때 주인공의 피통이 1/3 가량 깎이면 갑작스럽게 필살기 발동이 걸린다. 그때 플레이어가 버튼을 누르면 주인공이 손을 펼치며 눈부신 빛을 뿜어내고, 이에 아다치의 캐릭터가 멈칫한다.
그때 달려들어 때리면 크리티컬 대미지가 터진다. 무슨 즉사기마냥 아다치의 피통이 쫙 깎이더니 주인공의 캐릭터가 승리를 거머쥐게 되는 막장 결말.
이러면서 “쉽지 않은 승부였지만 난 포기하지 않아!” 이 지랄을 하며 아다치에게 훈수를 빙자한 티배깅을 해대는데, 자기 손으로 최애를 때렸다는 것에 이미 울먹이는 중이었던 쿠로사와는 쌍욕과 함께 컨트롤러를 던져 박살냈다.

그렇게 강한 아다치가 왜 한 대 쳐맞고 패배 판정을 얻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주인공은 상도덕이 없는 새끼라는 것.
검술 수업에서 마법의 사용은 금지, 안전을 위해 급소는 피해서 때려야 한다. 아다치는 그 룰을 지키면서 주인공을 몰아넣고 있었지만 주인공은 빛의 마법을 사용해 아다치의 시야를 가렸다. 눈뽕에 당황한 아다치가 멈칫하는 사이, 주인공은 진짜 진심으로 아다치의 급소를 후려쳐서 승리한 거다.
씨발, 비겁한 새끼… 반칙 써서 이겨놓고 존나 당당했다.
더 기가 차는 건 주변의 반응, 다친 아다치는 신경도 안 쓰고 선이 악을 이기는 건 당연하다며 주인공을 추켜세운다.
아무리 착한 아다치라도 이런 상황은 상당히 좆같지 않았을까, 만약 쿠로사와 본인이 아다치였다면 그 자리에서 검으로 죄다 두들겨 패서 아작을 냈을 텐데 참고 넘어간 걸 보면 아다치는 악역이라기엔 확실히 보살이 맞았다.


그런 스토리의 흐름상, 가까운 시일 내에 벌어질 검술 수업에서는 분명 아다치와 쿠로사와가 맞붙게 될 것이다.
그러나 쿠로사와는 아다치를 상대로 비겁하게 승리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아다치에게 검을 휘두르는 것조차 자신이 없다. 뭐, 아다치야 쿠로사와를 공격할 수 있을지 몰라도 쿠로사와의 입장에선 아니다.
소중하게 아껴 주기만 해도 모자랄 판에 그를 공격하라니, 차라리 자신이 아다치에게 맞아 죽고 말지 그럴 수는 없었다.
쿠로사와는 최대한 많은 가능성을 생각해야만 했다.

아다치와의 전면전을 피해 버릴까? 수업 당일, 아프다는 핑계로 빠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아다치는 반드시 누군가와 겨루긴 할 것이다. 그렇다면 승패에 상관없이 욕을 얻어먹을 테고, 쿠로사와가 없는 곳에서 벌어진 일이니만큼 그를 실드쳐 줄 사람이 없을 테지.
아니면 다른 상대로 바꿔서 스파링을 하는 방법도 있지만… 문제는 아다치의 상대가 된 학생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
만약 상대 학생의 반응에 아다치의 스트레스가 터지면 그 학생은 절대로 곱게는 못 돌아갈 게 분명하다. 진심으로 죽이지는 않겠지만 팔다리 한 군데는 반드시 작살날지도.

아, 차라리 자신도 비호감으로 낙인 찍혀서 아다치와 둘이 붙어 다니는 건 안 되려나…. 그렇다면 선역도, 악역도 없는 평화로운 세계가 되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쿠로사와는 이벤트를 피해가는 것에 실패했다.
다른 이들의 반응을 쌩까기에는 훗날의 전개가 신경 쓰여 마음 편히 신경 끌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필연적 운명이니만큼 차라리 노선을 바꿔서 극복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게 수업 당일, 정해진 스토리대로 짜여진 대진표를 보며 쿠로사와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자신의 곁에서 힐끗힐끗 조심스레 눈치를 보는 아다치에게 왜 이리도 미안한 건지, 쿠로사와가 보기 좋게 아다치를 쓰러뜨리길 바라는 주위의 환호성이 끔찍하게 들려올 지경이었다.


“빛은 언제나 어둠을 이긴다고! 본때를 보여 줘, 쿠로사와!“

”응원할게! 멋지게 승리해 버려!!“


제각기 시끄럽게 한마디 보태는 인물들이 여럿이니 소란스러워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대놓고 쿠로사와가 아다치를 쓰러뜨리길 바라는 분위기, 시끄러운 소음은 둘의 사이에 숨 막히는 긴장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말해야 하는데, 나는 너의 적이 아니라고… 이기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다고, 널 괴롭게 만들고 싶지 않다고.
쿠로사와의 머릿속에 정리되지 않은 수많은 생각들이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아다치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저 대진표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뿐.
감히 내가 아다치에게 검을 겨눌 수 있을까? 겨누는 건 고사하고 애초에 맞설 의지조차 없었다.
게임처럼 비겁하게 승리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쿠로사와는 겉으로야 이 세계의 주인공이지만 알맹이는 그저 연약한 직장인이다. 살면서 잡아 본 칼이라곤 요리할 때나 쓰는 주방용 칼, 문구 용품인 커터칼 정도려나?


엄연히 학생끼리 이뤄지는 대련이기에 진검을 쓰지는 않았다.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쥔 목검, 아다치는 주위의 아우성에도 별다른 표정의 변화도 없이 쿠로사와의 맞은편으로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다치는 어떻게 할까, 게임에서처럼 인정사정없이 날 줘팰까? 쿠로사와는 그걸 막아낼 능력이 없다. 아마 때리는 족족 얻어맞다가 당연하게 패배할 것이 분명했다.
길게 내쉬는 한숨, 아다치가 억울한 일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신이 고기마냥 다져지는 것이 더 낫기는 하다. 기껏 가까워지기 시작했는데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건 최악이고, 적어도 자신이 사랑하는 최애가 다치는 꼴은 도저히 못 본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쿠로사와가 나름의 (얻어맞을)각오를 다지는 동안, 목검을 든 채 그의 맞은편으로 향하던 아다치가 잠시 멈춰서더니 쿠로사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쿠로사와가 고개를 들자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언제나와 같은 맑은 눈동자, 늘 그랬듯 두근거리는 심장과 함께 복잡하던 머릿속은 순식간에 백지장이 되었다.
그렇게 말없이 잠시 시선을 주고받던 둘, 아다치가 쿠로사와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저기, 쿠로사와… 이건 수업이니까 진심으로 승부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 응?“

”그게, 난… 너와 싸우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아다치는 말주변이 서툴러 잘 이야기하다가도 이렇게 렉이 걸리곤 했다. 그럴 때면 그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빠르게 눈치채고 받아 주는 건 쿠로사와의 몫.
그러나 이번만큼은 어떤 표현을 하고 싶어하는 것인지 감이 오질 않았다. 아마도 아다치 자신도 적절한 방식을 생각해 보려다가 말을 흐린 듯하기에.

그러나 쿠로사와는 자신과 싸우고 싶지 않다는 아다치의 진심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자신이 아다치에게 상처 입힐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려나, 적어도 그가 쿠로사와를 하찮게 봐서 나온 동정심은 아님을 느꼈다. 아다치가 적절한 표현 방식을 찾기 위해 말을 흐린 건 쿠로사와가 오해하지 않게끔 말하고 싶은 배려였으니까.
역시 너는 정말…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사람이구나.
쿠로사와는 늘 그랬듯 아다치에게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의식하지 않아도 그의 앞에선 반사적으로 나오는.
그리고 우물쭈물하는 아다치의 시선을 맞추며 대답해 주었다.


“그렇다면, 오늘은 아다치가 내 선생님이 되어 줄래?”

“에? 선생님이라니….“

”아다치는 검술도 굉장히 뛰어나니까. 나는 아직 좀 어렵게 느껴져서 말이야. 너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어.“


아다치의 얼굴이 급격하게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횡설수설하는 그의 반응.
내가 쿠로사와를 가르친다니,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그런 쪽에 재능도 없을 텐데… 연달아 이어지는 자책에 다시금 쿠로사와의 가슴이 먹먹해지기 시작한다.
붉어진 얼굴로 안절부절하는 아다치는 참으로 귀여웠다. 매번 좋은 말 한마디 해 줄 때마다 익숙하게 받아넘기지 못하고 고장나 버리는 모습은 이 세계에 스마트폰이 없디는 사실이 너무나 가혹하게 느껴지게끔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진정하고 그를 달래야 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낮추는 건 겸손이 아니라 자기비하에 불과했으니.
자신을 혐오하고 있디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그 태도는 최애를 사랑해 마지않는 쿠로사와에겐 마음 아픈 광경이었다.


“아다치, 난 널 믿고 있어. 지금까지 봐 왔던 모습들도, 던전에서의 경험도… 너는 내게 있어서 언제나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 쿠로사와….“

”그건 전부 너의 능력이야.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 항상 노력해 줬겠지. 그러니까 자신을 질책하지 않았으면 해.“


아다치는 묻고 싶었다. 대체 자신에게 왜 이렇게까지 다정하게 대해 주는 건지. 이전에 시비를 걸어 왔던 남학생이 했던 말은 멋대로 아다치를 매도할 목적이 아니었다.
쿠로사와는 정말로, 아다치와는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며 자신에겐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던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겉으로야 언제나 좋은 사람이었다.
문제는 딱 거기까지. 눈에 보이는 호의뿐, 아다치가 가진 어둠의 힘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도 그렇거니와 타인이 아다치를 괴롭히는 것을 철저하게 방관만 하던 이였다.
아다치가 가진 힘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는… 사실상 아다치를 속성상의 라이벌로 여기고 있지도 않았다.
언젠가 자신이 반드시 아다치를 이길 것이라는 자신감, 그 근거는 그가 가진 빛의 힘뿐이었다.

그랬던 쿠로사와가 어떤 날을 기점으로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마냥 달라져 버렸다.
그는 아다치에게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예전의 쿠로사와였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움을 받은 일 따위는 그저 당연하다는 듯, 형식적으로 웃어 주며 금방 잊어 버렸을 텐데.
그러나 오늘의 쿠로사와가 전해 준 또 하나의 진심은 이번에도 아다치의 가슴 깊은 곳을 간질이고 있었다.
정말로, 그 누구도 봐 주지 않았던 자신을 꺼내어 따스하게 감싸 주었다, 그리고 믿어 준다.


“… 고마워, 쿠로사와. 쿠로사와에게는 언제나 감사한 일뿐이야. 나는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어서, 금방 이렇게 되어 버리니까.”

“괜찮아. 아무리 아다치가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다고 해도… 내가 믿고 있잖아? 이미 멋지게 신뢰를 얻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자.”


주저없는 대답과 함께 싱긋 웃어 보이는 쿠로사와에 아다치는 하마터면 울컥 눈물이라도 고일 뻔했다.
주위의 시선이 없었다면 아마 주체할 수 없었을지도.
아다치는 치밀어오르는 일렁임을 꾹 눌러 참고 애써 활짝 웃어 보임과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내가 쿠로사와의 선생님. 라고 하기엔 아직도 부끄럽지만 미약하게나마 그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둘이 무슨 이야길 나눴길래 반응들이 저래….?
쿠로사와는 전례없이 다정한 미소를 짓고는 아주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아다치를 바라보고, 아다치는 부끄러워하는 것 같다가도 갑자기 처음 보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끄덕거린다.

“뭔데… 저 분위기. 요즘 친해졌다고는 해도 좀 이상하지 않아?“

”우와…. 나라면 친구한테 저런 눈빛을 하는 건 절대 무리일 텐데.“

쑥덕쑥덕, 남녀 할 것 없이 수군대는 소리가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빛과 어둠, 이 세계에서 가장 정반대인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웃으며 묘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과연 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모두를 궁금케 만드는 본인들만의 대화에 이어 이내 서로 대치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목검을 쥔 채 가벼운 웃음과 함께 서로 마주보는 둘, 엄연히 일대일 대련이지만 그 사이에 긴장감 따윈 없었다.
휘두르는 검에도 상대를 공격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고, 힘을 빼 가볍고 느리게 찌르며 그것을 막는다. 그게 전부였다.
아다치는 쿠로사와를 향해 목검을 내지르면서도 쿠로사와가 막지 못해 맞을 것 같으면 기가 막히게 타격을 멈추었다.
게임에서 인정사정없이 주인공을 패 버렸던 것과는 다른 모습, 쿠로사와 또한 자신이 적절한 타이밍에 방어할 수 있도록 공격 방향의 전환 시마다 신호를 주는 아다치에 검을 이렇게 휘두를 수도 있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말 그대로 아다치는 쿠로사와를 가르치고 있었고, 쿠로사와는 그 사실에 진심으로 벅차오르는 기쁨을 느꼈다. 검을 쥐는 것부터 공격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 이에 따라 방어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검을 휘두르는 손짓 하나하나에 쿠로사와를 생각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다.
때로는 공격해 보라는 듯 대놓고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기도 한다. 그래 봤자 쿠로사와가 그를 어떻게 공격하겠냐만은, 내키지 않는 심정으로 어설프고 조심스럽게 내지른 공격은 당연히도 간단히 빗나가거나 막혔다.

결국 이 대련에서 승패는 나지 않았다.
쿠로사와도, 아다치도 다친 곳 하나 없었거니와 오히려 정말 즐거운 얼굴로 웃으며 검을 주고받았으니까.
그러니까…. 두 사람은 싸우는 게 아니라 놀고 있었다. 어린 남자애들이 나뭇가지 하나 가지고 칼싸움을 벌이는 딱 그런 모양새였으며 체력만 받쳐 준다면 하루 종일도 할 듯한 기세.
둘의 대련은 수업 담당 교수가 마무리짓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모두가 기대했지만 너무나도 싱겁게 끝나 버린 상황, 마지막까지 따스한 웃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둘은 후련하게 검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쿠로사와는 원래대로라면 아다치와 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 이벤트의 결말을 바꾸는 데에 성공했다.
물론, 주변에서 질타는 좀 받았지만.


“있지, 쿠로사와군. 아까 아다치와의 대련 말이야. 어째서 필사적이지 않았어?”

“맞아요. 모든 사람들이 그걸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아다치가 잠시 자리를 비웠던 게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한동안 조용한 것 같더니 득달같이 몰려들어 아쉬움을 토로하는 히로인들과 같은 클래스의 학생들을 둘러본 쿠로사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이라도 쉬고 싶은 심정.
그러니까… 아다치가 대체 뭘 했냐고? 그 강한 힘으로 함부로 이들을 위협하기라도 했나, 아니면 죄 없는 학생에게 저주를 걸어 괴롭히기라도 했나.
솔직히 말하자면 아다치는 미래에 수백만 명을 학살하고 그들의 피와 영혼을 취하거나 세계를 부수는 등의 악행을 저지르기는 한다. 그러나 그건 타락한 이후의 이야기고, 지금의 아다치는 딱히 아무런 죄도 저지른 적이 없다.

쿠로사와는 아다치가 왜 타락하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다. 어떤 엔딩에서든 그가 광기에 사로잡히는 이유는 하나뿐이었지. 원하지 않았던 능력을 타고난 탓에 태어나면서부터 미움받아 온 자신의 처지를 저주하고, 이내 그 증오가 밖으로 흘러넘치면서 인격을 잃는다.
그렇다면 그러한 증오가 피어날 일이 없도록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답은 너무나도 간단하다.


“글쎄,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할까… 모든 이들이 기대했다고 해서 반드시 맞출 필요는 없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다치도 우리와 똑같은 한 명의 사람이야.”


다소 생뚱맞게 들릴 수 있는 대답이었으나 쿠로사와가 남긴 한마디는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조용하게 만들었다.
악의 기원을 품고 태어난 이를 두고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며 정의했으니 이는 충격적으로 들리기에 충분했으니까.
히로인들은 더 이상 그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게임 속이었다면 분명히 호감도가 곤두박질치는 게 화면으로 보였을 것이 확실한 상황.
쿠로사와 스스로도 당혹스러울 정도로 충동적인 대답이었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래, 미래에 대한 대비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목적은 조금이라도 아다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

이번에도 아다치는 쿠로사와에게 도움을 주고도 욕을 얻어먹었다. 아다치의 사랑스러움을 마음 속 깊이 알고 있는 쿠로사와로서는 도저히 참기 힘든 상황이었고, 솔직히 화가 났다.
아다치는 악마 같은 존재가 아니다. 평범하게 좋은 말을 들으면 부끄러워하거나 웃기도 하고, 나쁜 말을 들으면 슬퍼하거나 화를 내기도 한다. 보통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싸늘해진 분위기, 그 사이 자리를 비웠던 아다치가 돌아오자 학생들은 슬금슬금 서로 눈치를 살피며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히로인들 역시도.
그렇지만 쿠로사와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의 반응이 어떻든, 방금 전의 상황을 아다치가 모르고 있는 것이 다행일뿐.
수줍은 미소와 함께 자신에게 다가온 아다치는 평소와 같이 서투른 말주변으로 쿠로사와에게 감사를 전했다.


“저기, 쿠로사와…. 아까는 정말 고마웠어. 쿠로사와가 상대여서 정말 긴장했는데… 뭔가 엄청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 그런 경험은 처음이어서…. 그렇지만 굉장히 좋았다고 할까, 전부 쿠로사와 덕분이야.”

“… 아다치.”


쿠로사와를 바라보는 아다치의 눈동자에는 반짝반짝, 작은 별이 콕콕 수놓아진 밤하늘이 담겨 있었다.
약간은 상기된 아다치의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보던 쿠로사와는 다시 다짐한다. 모두가 아다치의 적이라면 자신만큼은 절대적인 아다치의 편이 되어 주자고.
어쩐지 몽글몽글 무언가가 차오르는 기분을 꾹 눌러 삼킨 쿠로사와는 언제나와 같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도 정말 즐거웠어. 아다치 덕분에 검에 대해서도 많이 배울 수도 있었고, 부족하지만 너에게도 재미를 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해.”

“… 난 딱히 대단한 일을 하지도 않았는걸.“

”충분히 대단해. 선생님이 된 아다치의 모습, 굉장히 멋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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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뿐만이 아니라 귀까지 붉게 달아올라 버린 아다치가 고개를 푹 숙였다. 강한 능력을 가지고도 오만하지 않고 늘 자신을 낮추는 이 면모는 매번 안쓰럽다. 하지만 그만큼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아마도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매순간마다의 아다치를 찍느라 사진 앱이 터져 나갔을지도 모를 일, 눈으로만 담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광경들이었으니까.
아, 안아 주고 싶다. 꽉 끌어안고 입맞춤이라도 질리게 퍼부어 주고 싶었다. 쿠로사와에게 있어서 아다치란 다른 덕후들과 같이 ‘내 새끼’이기도 했지만 심장을 뛰게 만드는 유일한 짝사랑 상대이기도 했다. 성별을 초월하는 그런 사랑.







***





쿠로사와가 폭탄 발언, 그러니까 아다치를 옹호하는 발언을 내뱉었던 이후로 얼마 동안은 히로인들도 그렇고 주변인들이 쿠로사와에게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 어쩌다 마주쳐도 어색한 눈치로 먼저 피해 버리기 일쑤, 그런 변화에 쿠로사와는 앞으로의 스토리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에 대한 새로운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편, 어쩌다 보니 주변이 비어 버린 쿠로사와의 곁은 빠르게 다른 이가 채우고 있었다.
그 인물은 바로 아다치, 아다치도 쿠로사와의 곁을 채우고 있던 다른 이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눈치채고 의아해하긴 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그냥 그 정도로 넘겨 버리고는 좀 더 편하게 쿠로사와랑 지내다 보니 같이 다니게 되었던 것.
빛과 어둠이라는 언밸런스한 조합은 꽤나 기묘한 광경이었다.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지니 대놓고 어울려다니기 시작한 아다치와 쿠로사와는 꽤나 여러 곳에서 목격되곤 했는데, 시가지에서 함께 간식을 먹거나 놀러 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호숫가에서 수다를 떨거나 도서관에서 조용히 키득키득거리고 있는 등 소소하게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는 듯했다.
그리고 그동안 쿠로사와는 하루하루가 행복해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크레페를 먹다가 입가에 크림을 묻힌 아다치, 제 곁에 앉아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맞으며 호숫가를 구경하다가 꾸벅꾸벅 졸던 아다치, 별것도 아닌 농담에 꺄르륵 웃어 주던 아다치…. 모든 순간이 심장에 위협적이었다.

이런 날만이 이어진다면 참 좋을 텐데, 열심히 뒤에서 수군대던 이들이 간을 보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쿠로사와, 너 아다치에게 약점이라도 잡혔지?“

”뭐?“

”그 녀석에게 유독 잘해 주니까. 혹시 걔가 무서워서 그래?“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들은 아님 말고~ 식의 싱거운 대답과 함께 어정쩡하게 멋대로 흐름을 끝내 버렸다.
이런 일은 꽤 자주 반복되었지만 정말로 치사한 점은 아다치가 같이 있을 때는 안 건드린다는 것. 쿠로사와에게만 은밀한 괴롭힘을 시도하는 셈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쿠로사와는 더 이상 영웅이 아니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둠을 굴복시킬 유일한 빛이라 생각해서 떠받들었지만 그 빛이 어둠을 물리칠 생각이 없다면 잘해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괴롭힘의 형태는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지나갈 때 일부러 어깨를 치고 지나간다거나 들리도록 저들끼리 수군대는 것은 약과였다. 마법 수업 때 고의로 쿠로사와를 향해 공격 마법을 쏜다거나, 검술 수업을 틈타 대련을 핑계로 다구리를 놓으려 하는 등 정말 치사하게 괴롭힌다.

게임 내에서는 스토리 중반부까지 주인공이 빛의 마법 스킬을 익히지 않은 경우에 이러한 일이 생기지만 아다치와의 친밀도가 있다고 해서 푸대접을 받는 일까진 없었다.
쿠로사와는 이들이 이러는 이유를 눈치채고 있었다.
괜히 하던 대로 아다치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털리는 건 무서우니 상대적으로 만만한 쿠로사와에게 이런 짓을 벌이는 거겠지. 그나마 다행인 건 아다치와 붙어 있는 시간이 꽤나 길어 하루 종일 시달리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얼마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히로인들 중 한 명인 하나비가 등장해 쿠로사와에게 대화를 요청했다. 무언가 공격적인 언사를 할 기세는 아니었기에 수긍했지만 그동안 쿠로사와를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 하는 모습을 보였던 그녀가 갑작스레 이러니 찝찝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상황.
그 찝찝한 기분은 괜한 걱정이 아니었다.
하나비가 짐짓 비장한 얼굴로 꺼낸 말은 쿠로사와의 가슴을 싸하게 식어내리도록 만들기에 충분했으니까.


“있지, 쿠로사와. 아다치와 친하게 지내는 건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어.”

“… 갑자기 불러내기에 무슨 이야길 하나 했더니, 또 왜 이러는 거야. 아다치는 나쁜 애가 아니라고 누누이 말했잖아.”

“나도 알아!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특별히 사악하다거나 음험한 애가 아니라는 것도 느꼈어. 여태까지 편견을 가지고 못되게 대했던 것도 인정해.”

“그런데 어째서….”


쿠로사와의 대답에 발끈한 하나비가 소리쳤고, 의외의 내용에 맥이 탁 풀린 쿠로사와가 중얼거렸다.
이에 하나비는 바로 답을 이어가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는 등 그녀답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아다치에게 오해가 있었다는 걸 인정한 상황에서 싫은 소리를 솔직하게 표현하기는 껄끄러운 모양.
그러나 이내 이어진 대답에서 쿠로사와는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 학교에서 너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가 잔뜩 퍼지고 있어. 너는 빛의 마법사잖아. 어둠의 능력을 지닌 애와 가깝게 지내는 게 모두에게 어떤 의미로 느껴질지 생각해 봤어?”

“….”

“아다치가 나쁜 애가 아니라는 건 동의해. 하지만 어둠의 힘은 존재 자체로 모두에게 절망과 좌절, 공포를 주기 충분하니까. 제국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지금까지 나타난 어둠의 마법사들이 어떤 일을 벌였는지 너도 알잖아?”


하나비는 지금 게임 속 세계관의 설명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는 아다치가 모두에게 배척당하는 어느 정도의 근거인데, 세상에 등장했던 어둠의 마법사는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해 미쳐 버리고 요절하거나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는 등 그야말로 ‘악’이었다.
사실 마왕은 속성에 관계없이 요건만 충족하면 각성할 수 있다. 다만, 어둠 속성의 마법사들이 다루는 흑마법은 하나하나가 죽음과 고통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누구보다도 그 요건을 달성하기 쉬운 조건을 가진다.
마왕으로 각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만 명에 달하는 인간의 영혼,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끔찍한 학살이 아니라면 도달할 수도 없는 영역일뿐더러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질러 완벽하게 인간임을 포기한다는 소리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전에 몇 번인가 탄생했던 마왕들 모두가 어둠의 속성 마법사 출신이다. 마왕이 되지 않아도 그에 못 미치는 악행을 벌이거나 광인이 되는 등 비참한 삶을 살다 갔기에 편견이 안 생길 수가 없는 것.

빛의 마법사는 오히려 그 반대다.
어둠의 속성 마법사가 태어나면 같은 해에 반드시 빛의 마법사가 태어난다. 반대로 빛의 속성 마법사가 태어난다는 건 어둠의 마법사도 태어난다는 의미.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빛의 마법은 어둠의 마법에 대응하는 유일한 속성인지라 어둠과 대립하여 마왕을 저지하고 세계를 구하는 등의 영웅적인 행보를 보여 왔다.
그렇기에 어둠과 달리 존재 자체로 ‘희망’을 뜻한다. 괜히 주인공이 모두에게 사랑받는 게 아니다.
이러니 세계관 특성상 빛과 어둠이 사이좋게 지낸다는 건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희망이 깨지는 것과도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어둠을 막아 주어야 하는 빛이 오히려 좋다고 편을 들고 있었으니.

쿠로사와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하나비는 죄책감이 서린 얼굴로 자신이 할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그동안 그 애한테 나쁘게 대해 왔으니 그 점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너까지 이런 취급을 받는 건 너무 괴로워. 나한테는 아다치보다 네가 더 중요하니까.“

”하나비, 그건 모두가 같은 오해를 하고 있는 것뿐-“

”아다치에게는 미즈키가 이 이야길 전할 거야. 그 애한테는 미안하지만 널 지키고 싶은 우리들 나름의 결정이니까.”


쿠로사와는 자신의 심장이 일순간 쿵 하며 추락하는 기분을 느꼈다. 교내에서의 괴롭힘, 일부러 아다치에게는 말하지 않고 숨기는 중이었는데….
히로인들이 이런 돌발 행위를 벌이는 건 본인들이 좋아하는 쿠로사와를 모두의 배척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움직임이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방법이 나빴다.
아다치에게는 분명히 큰 상처로 남게 될 테니까.
너 때문에 쿠로사와가 괴롭힘을 당하게 됐다고, 그러니까 그를 생각해서 멀어지라는 부탁을 받은 아다치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살면서 처음으로 생긴 친구를 이런 식으로 잃게 생겼으니 심적 고통이 말이 아닐 것이다.
이런 생각이 얼굴로 드러나 창백하게 질린 채 이를 악무는 쿠로사와, 그런 그를 보는 하나비 역시 매우 착잡한 표정으로 애써 달래 본다.


“… 심한 말을 하진 않을 거야. 미즈키는 상냥하니까. 그리고 이 편이 아다치에게도 나을지도 몰라. 그 애도 네가 이런 일을 겪는 건 원하지 않을 거야.“

”그래, 아다치라면… 분명 그렇겠지.”


하나비의 말이 맞았다. 쿠로사와는 아다치의 편이 되고 싶었고, 이 세계의 특성상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아다치가 좋으니까, 오래도록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최애가 조금이나마 행복해지길 바랐으니까.
그러나 그런 쿠로사와의 바람은 우물 안 개구리와도 같은 느낌에 불과했다. 아다치 개인의 인권은 쿠로사와에게 있어서는 이 세계의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알 바가 아니었다. 두려우니까 피하고, 불길하니까 거부한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의 유일한 희망인 쿠로사와에게 배신감마저 느꼈을 것이다. 악을 옹호하는 선이라니.
아다치에게만 향했던 칼끝은 쿠로사와에게도 겨눠지고 있었다. 배신감과 불안이 덕지덕지 섞인 채로.





히로인들이 다소 일방적으로 벌인 일을 어떻게든 수습하기 위해 쿠로사와는 어떻게든 아다치와 대화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쿠로사와가 말을 걸 때면 아다치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어두운 표정으로 자리를 피해 버렸다.
미즈키의 말에 의하면, 아다치는 쿠로사와에게 괴롭힘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자신 때문이냐며 물어 왔다고 했다. 그 질문에 당황한 미즈키가 대답을 얼버무리자 아다치는 한마디만 남기고 떠났다.

“쿠로사와에게 그동안 감사했다고 전해 줘.”

아다치는 미즈키가 자신을 찾아온 의도를 빠르게 알아채고 스스로 물러나 준 것이다. 쿠로사와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이 먼저 쿠로사와를 피함으로써 그가 자신에게 향할 비난에 휘말리지 않도록 애쓰고 있다.
그동안의 행복한 시간이 마치 한순간의 백일몽처럼 느껴지는 기분에 쿠로사와 역시도 하루하루 끝을 모르고 우울해지고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쿠로사와의 곁은 예전처럼 히로인들이 채웠고, 아다치는 교실 한 켠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중이다. 어쩌다 시선이 마주쳐도 어색하게 피해 버릴 뿐. 전부 원점이다.
그나마 하나 달라진 점이라고 한다면 쿠로사와를 통해 아다치에 대한 편견이 어느 정도 해소된 히로인들이 더 이상 그를 적대하며 흉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좋은 점은 인정해 주기도 했고, 물론 껄끄럽기는 할 테니 굳이 좋은 말은 하지 않지만 이걸로도 굉장한 변화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쿠로사와는 알고 싶었다. 지금 아다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뒤에서 혼자 슬퍼하지는 않을지.
자신이 뭐라고 아다치가 슬퍼하기까지 하겠냐만은… 솔직히 별생각 없다고 한다면 좀 상처받을 것 같다.

이 세계에 오게 된 이후, 쿠로사와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그에게 다가가 아다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 애정을 주는 것. 그런데 무엇 하나 이룰 수 없다면 자신은 이곳에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설마 자신의 손으로 아다치의 숨통을 끊게 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된다면 차라리 스스로 죽음을 택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공허함만 남게 된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다.
쿠로사와가 이곳에 오게 된 지도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곳에서의 생활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부족했던 마법 실력은 히로인들에게 등짝을 맞아가며(에임이 빗나가 히로인들에게 쏴 버리는 바람에….) 요령을 익혔고, 검을 다루는 것도 원래 체육 쪽에 재능이 있었던 만큼 점차 실력이 늘었다.
모두가 바라는 영웅, 용사의 이미지에 더욱 가까워진 것이다.
그에 반해 아다치는 늘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자신에게 꾸준히 다가오려던 쿠로사와를 스스로 피하고, 말을 걸어도 일부러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는다.
그 순간의 아다치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어느 순간부터 쿠로사와 역시 그에게 다가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다치가 괴로워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으니까.

한편, 쿠로사와는 슬슬 두 번째 대형 이벤트가 다가올 것임을 떠올렸다.
이 이벤트는 앞으로의 중요한 분기점, 아다치는 이 이벤트에서 큰 절망을 겪고 마침내 공식적인 악인으로 낙인 찍혀 비참한 주홍글씨를 안고 퇴학당하거나 스스로 사라지는 것을 선택한다. 바로 치한 사건의 시작이다.
물론 아다치 본인은 그런 짓을 한 적도 없고, 그럴 의도도 없었지만 억울하게 휘말린 것에 대한 결백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게 게임의 스토리 흐름. 원래대로라면 아다치와의 학교 생활은 여기까지가 끝인 것이다.

쿠로사와는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를 꿈에도 알지 못한 채 멍하니 창밖을 응시 중인 아다치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비록 이제 다가가지는 못할지라도 반드시 그의 파멸만은 막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그의 파멸 플래그를 부술 수 있을까? 이벤트가 다가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대비해야 할 텐데.
쿠로사와의 머릿속이 자꾸만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마치아카 쿠로아다 동정마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