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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9 20:15
볼사리노는 드레스로자에서 마물을 진압한 뒤에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남은 찜찜함을 지우지 못했다. 하나 이유도 없이 계속 남을 수도 없는 일. 이는 같은 해군 대장인 사카즈키의 서릿발 같은 잔소리를 배로 들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 그는 본부로 귀환하고자 했다. 이에 로우가 사람을 시켜 가져오게 한 건 과일 바구니였다. 고급스런 느낌의 바구니 안에는 눈깔사탕만 한 알갱이가 알알이 맺힌 포도 두 송이가 있었는데 그저 건내주고 끝인 물건에 볼사리노는 당황했더랬다. 해군 대장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에 대가를 바란 건 아니지만 포도 두 송이는 아리송하잖은가. 그러나 막상 해군 함선을 타고 본부로 귀환하는 도중 무심코 한 알을 맛봤을 때의 그는 웬만한 일에 감흥하지 않는 해군 대장 노란원숭이가 아니었다.

‘흐음….’

입 안에서 알갱이가 터지는 순간 절로 눈을 감고 음미하게 됐으니 달고 신 맛이 이보다 더 환상적으로 어우러질 수 없음이었다. 껍질은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으며 적당히 단단한 씨 없는 과육은 탱글하니 씹을수록 입 안의 침이 고이게 했다. 끝으로 목구멍을 넘어갈쯤에는 절로 손이 다음 알갱이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으니 먹는 것도 적당적당히던 볼사리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포도 한송이를 다 먹은 뒤였다. 생애 처음 부려본 식탐에 헛웃음이 날 정도였다. 그럼에도 한송이를 애써 남겨둔 건 이유가 있음이었다.

“이제야 겨우 얼굴 내비추는 거냐, 이 한량아?! 네가 자리 비우고 농땡이 치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신문에까지 떠들썩하게 난 사법섬 일로 골치를 썩던 또 다른 해군 대장 붉은 개 사카즈키는 볼사리노의 등장에 있는 대로 언성을 높였다. 때가 어느 땐데 애먼 데서 희희낙락하니 좋더냐며. 물론 사카즈키는 볼사리노를 통해 드레스로자에 마물 떼가 습격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러나 이는 애당초 그가 삼일씩이나 이유도 없이 죽치고 있지 않았다면 거들어줄 필요도 없었을 일 아닌가. 철저한 정의를 관철하는만큼 효율성도 중시했던 그는 해군 대장이란 인력을 함부로 내돌리는 것도 달갑잖게 여겼다. 때문에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으려는데 집무책상 위로 자리가 좀 허전한 과일 바구니가 내밀어졌다. 굵직한 선을 자랑하는 얼굴의 사카즈키는 이건 또 무슨 수작이냐는 듯 인상을 썼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선 볼사리노가 얇은 피부 특유의 자글자글한 주름진 미소를 보이며 과일바구니를 더 깊숙이 밀어넣었다.

“먹으라고?”

사카즈키는 볼사리노를 오래 알고 지낸만큼 뭔가를 강권하는 남자가 아닌 걸 안다. 때문에 쓸데없이 실실대며 바구니를 밀어넣기만 하는 연상에 강직한 인상의 남자는 마지못해 한 송이뿐인 포도알을 하나 떼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턱에 한번 힘을 줬을 때다.

“……!”

단지 그뿐일진대 까맣고 짙은 눈썹이 움찔했다. 남자는 바로 태연을 가장했지만 턱을 움직이는 모양새가 제법 부단했다. 이후 들린 소문에 의하면 볼사리노가 들어간 뒤 한바탕 소란이 일 줄 알았던 사카즈키 대장실은 고요함 뿐이었다고 한다.




너는 내게 빛과 같다.

“심정지입니다, 왕자님!”

오늘 하루만 벌써 세번째였다. 침대 옆에 놓인 환자감시장치에서 불길한 장음이 이어졌다. 반구 형태의 룸 밖에서 궁정의장의 외침이 들려올 때 로우는 조로의 옷을 헤치고 직접 가슴에 손을 투과시켜 심장을 주물렀다. 그렇게 미동 없는 심장에서 억지로 피를 순환시키길 몇십분이나 됐을까, 모니터 위 일직선이던 그래프가 서서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명처럼 울리던 경보음이 다시 안정적인 단음으로 바뀔 때, 그제야 로우는 진이 빠진 듯 침대 옆 의자에 털썩 앉는다. 나이 지긋한 궁정의장이 룸 밖에서 서성이는 모습이 꼭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신참과 같다. 하지만 진작 죽었어야 할 이의 명줄을 억지로 붙들고 있는 건 로우의 능력이었다. 현대 의학 기술로 조로를 살리는 건 무리다. 궁정의는 로우가 능력으로 스캔한 조로의 상태를 보고 치료를 포기했었다. 이대로 보내주는 게 불필요한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라면서. 그만큼 당시 조로는 숨이 붙어 있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로부터 약 삼주의 시간이 흘렀다.




수술수술 열매를 먹고 돌아와 싸늘한 코라손의 주검을 마주했을 때 열두살 아이는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유일한 빛이 돼주던 존재가 사라졌으니까. 그 심정을 알았음일까. 도피와의 혈투에서 겨우 목숨 부지한 크로커다일은 정신이 들고 제일 먼저 로우를 불렀다.
코라씨 살아생전에 크로커다일은 항상 무서운 얼굴로 곁을 지키고 있던 어른이었다. 그는 대놓고 면박을 준다거나 무시하는 도피, 베르고 등과는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로우는 알 수 있었다. 이 사람도 자신을 싫어한다는걸. 그래도 아이는 상관없었다. 넓디넓은 왕의 대지에서 유일하게 저를 반기고 다정히 대해주던 코라씨만 지킬 수 있다면 말이다. 물론 이때도 이상한 영감이 스토커처럼 들러붙기는 했지만 오직 코라씨뿐인 로우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랬던 소년은 코라씨가 사라진 뒤 삶의 의욕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서투르고 상처 많은 두 사람을 잘 돌봐달라더군. 로시의 유언이다.’
‘…그걸 나한테 말해도 돼?’

고작 열두살 아이가 산송장같은 눈을 하고 있었더랬다. 그랬던 놈이 로시의 유언이란 말에 처음 눈에 반짝 생기가 돈다. 이를 침대에서 갓 정신이 든 몸으로 보고 있으려니 크로커다일도 속내가 복잡해졌다. 그 또한 로시를 죽음으로 몰고 간 아이가 미웠다. 눈 내리던 그밤만 아니었다면, 그곳에서 이녀석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니 하다못해 놈을 내버려뒀더라면 로시는 살아 있었을 거다. 지난 일을 되새김질하며 끝없이 후회했던 크로커다일은 그러나 동시에 로시가 남긴 유일한 것을 향한 미련이 솟구쳤다. 눈앞의 볼품 없이 바짝 마른 아이는 로시가 가장 많이 울고 웃었던 지난 이년의 산물이었다. 녀석이 없었다면 로시는 그토록 풍부한 감정을 느끼기나 했을까. 그만큼 로시는 로우를 진심으로 아끼고 보듬었다. 진정으로 아이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그래서 크로커다일은 로우를 불러 로시의 유언을 전한 거였다. 아이가 살아갈 희망을 주기 위해서.

‘그래. 상관없겠지. …녀석은 마지막까지 널 걱정했다.’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은 크로커다일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서있던 아이와의 거리감이 선명했다. 그 사이로 진한 한숨같은 말이 흘렀다.
크로커다일은 톤타타족을 전부 수장시키려 한 젊은 왕을 저지하려다 죽을 뻔했다. 햇수로만 이년에 걸쳐 고생고생해 얻은 수술수술 열매다. 이것을 열두살짜리 아이에게 먹이면서도 도피는 동생이 살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돌아온 고국에서 그를 맞이해준 건 싸늘한 주검이었으니 도피는 애끓는 슬픔도 원망도 모두 증오로 승화시켰다.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은 고통이란 로우를 죽이고 마리조아와의 전면전을 치룰 태세였으니 말이다. 이는 로시의 장례를 치루고 꼬박 하루를 그가 죽은 침실에서 쥐죽은 듯 있다 나온 도피가 보인 행동이었다. 그렇게 도피는 로우가 있는 곳에 처들어갔다가 톤타타족 공주의 비밀을 알게 된 거였다. 당시 맨셸리는 저와 또래인 로우를 위로하고자 찾으면서 로시난테가 저 또한 지켜줬다는 비밀을 털어놓던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난입한 도피였으니 죽음의 화살이 맨셸리와 그 부족에게 꽂힌 것 또한 사실이었다. 역시 상심에 젖어 있던 크로커다일이 뒤늦게 소식을 듣고 찾았을 때 톤타타족은 전부 수장될 위기에 처해있었고. 그런 이가 죽음에서 살아돌아온 건 도피의 명이 있은 덕분이었다. 그는 유일하게 로시의 임종을 지키고 유언을 들은 자였으니. 이를 알고 있던 아이는 코라씨가 마지막까지 자신을 걱정했다는 말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유언을 입에 담기 전 주변을 전부 물린 크로커다일에 이날 아이는 원없이 소리내 울었던 것도 같았다. 문이 굳게 닫힌 실내에 모래바람이 불어 소리를 감춰주었으니까. 이는 마치 오래전 눈산을 헤쳐나올 때 마음껏 울도록 소리를 숨겨준 코라씨를 생각나게 해서 아이는 더 눈물 흘렸는지 모른다. 정말 코라씨가 죽었구나. 더는 그 사람을 볼 수 없는 거구나 깨달아버린 현실에.




꿈을 꿨다. 코라씨가 죽은 다음의 일을. 조로가 있는 침대에 머리를 대고 선잠을 잤던 로우는 미동없이 눈만 깜박였다. 사법섬에서 조로가 돌아온 뒤로 로우는 유독 코라씨가 죽은 다음의 일들이 꿈에 보였다. 하나같이 괴로운 일 뿐이었지만 코라씨에 대한 것이니 잊어버릴 수는 없었다. 때문에 로우는 아무리 괴롭고 힘든 추억일지라도 모두 기억에 담아두었다. 코라씨를 살릴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가 절망에 휩싸여 추락했던 마음까지도. 불로 수술은 수술수술 열매의 가장 높은 기술이었다. 그 대가로 치뤄야 하는 건 이 기술을 사용한 능력자의 목숨이다. 도피는 처음부터 대놓고 로우에게 이것을 말했다. 네 목숨 바쳐 로시를 구하라고. 로우 또한 망설임은 없었다. 복수심에 불타 죽으러 간 아이를 살리겠다며 찾아와준 사람이었다, 코라씨는. 열살 아이가 바랐던 건 저로 인해 죽게 된 그 사람을 살리는 것뿐이었다. 이를 위해서라면 자신은 죽어도 상관없다고. 그러나 스물여섯의, 죽은 코라씨와 같은 나이가 돼서야 알게 된 사실에 로우는 머리가 무거워졌다. 그 얼굴은 한쪽 입가를 따라 둥그렇게 퍼진 멍자국이 있었다. 갓 생긴 멍자국은 진한 보라색으로 붓기도 했다.

“울었구나, 코라씨…….”

한숨처럼 흘러나온 혼잣말이 부쩍 추워진 공기를 타고 번진다. 순식간에 흩어진 목소리가 공허하기 그지없다. 밖은 반나절 전의 난리를 치우느라 여전히 부산스럽기만 했다. 안을 감시하듯 복도를 종종거리던 영감이 슬쩍 미닫이문 틈으로 확인하는 걸 느낌에 로우는 손짓 한번으로 간단히 닫아버렸다.

“와, 왕자님!”
“안 해, 안 하니까 영감도 그만 가서 쉬어.”

그 말에도 문너머는 전혀 미동이 없었지만 로우는 화낼 기력조차 없다. 정확히 세이레가 된 오늘 아침, 조로는 또 한번의 심정지를 일으켰고 이번은 여느 때와 달랐다. 한시간 가까이 이어진 심장마사지에도 맥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 또한 로우가 능력자이기에 가능한 일로 흉부압박에 의한 심폐소생술이나 제세동기를 사용했다면 조로의 몸이 버텨내지 못했으리라. 이렇게 자주, 긴 시간 동안의 심폐소생술은 심한 흉부 골절을 야기하거나 내부 장기가 타버리는 불상사로 이어졌을 테니. 그리고 한시간여만에 드디어 스스로 맥이 뛰기 시작했을 때, 누구보다 간절했을 로우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음이다. 또 한번 심정지를 일으키면 끝이다. 로우는 알 수 있었다.

‘다들 돌아가. 조로와 둘이 있게 해줘.’

심상치 않은 조로의 상태에 궁정의장은 물론 펭귄, 샤치, 베포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조로의 상태가 안정됐다는 사실에 복도를 서성이던 이들이 양문을 열고 기웃댈 때 로우의 명이 있었더랬다. 조로가 돌아온 뒤 늘 있던 일에 다들 조용히 물러나던 중 혼자 뭔가를 느낀 영감만이 발빠르게 움직였을 뿐. 눈을 피해 구석으로 숨어든 영감이 품 속에서 전보벌레를 꺼냈을 때 그 손은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다. 역시나 상대는 전보벌레가 한번 울기도 전에 수화기를 들었다.

‘폐하… 폐하께서 언질주신 대로 로우 왕자님이 조로님께 불로 수술을 감행하실 듯합니다.’

늙은 얼굴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로서는 너무 끔찍해서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을 고하려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대답 한번 없이 끊긴 전보벌레가 잠자듯 눈을 감을 때 복도 구석에 없는 듯이 있던 영감은 쪼그려앉아 소리없이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했다. 간간이 복도를 지나던 시종들의 시선에도 상관 말고 가라며 손을 휘저을 따름이었다. 또 영감이 몰래 왕자가 쓰다 버린 물건을 모으다 걸려서 폐기처분 당했나 싶던 시종들은 조용히 물러났고 말이다. 그때 긴 복도를 꺾어지른 저편에서는 또다시 마물이라도 처들어온 양 큰 소란이 일었으니 도피의 난입이 있음이었다. 문을 열어젖히고 나타난 그는 단숨에 로우의 목덜미 잡아채 마당에 내동댕이쳤다. 소란을 듣고 나타난 크로커다일도 두 사람이 연못까지 있던 너른 정원에서 싸우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러다 처마 밑에서 연신 눈물을 훔치던 영감을 발견하고 자초지종을 들었으니 그는 결국 도피에게 가세해 로우를 제압하는데 힘을 보탰다. 로우의 얼굴에 주먹을 날려 피멍을 만든 건 크로커다일이었다. 비록 직전에 능력을 못 쓰도록 열 손가락을 부러트려주마 했던 건 도피라지만 먼저 나선 크로커다일 덕분에 수고를 덜었다. 얼굴을 맞고 나가떨어진 로우에게 올라탄 이가 분노에 차 일갈했으니 말이다.

‘로시는 애초부터 네 목숨따위 받고 싶지 않아 했어! 네놈이 소갈머리 없이 목숨바쳐 살려주겠다는 말을 하고 간 뒤면 녀석은 매번 울었다! 나이를 이만큼 먹었으면 그 마음을 알아줄 때도 되지 않았나?! 언제까지 애송이처럼 굴 거냐?!’

그렇게 말하던 크로커다일이 더 울기 직전의 얼굴이었다. 아마도 로우의 정신을 일깨운 건 코라씨의 이름과 그 얼굴이 아니었을까. 직후 차분해진 로우는 생각을 달리 바꿨다. 설령 불로 수술로 살아나더라도 조로는 자신 때문에 로우가 죽은 걸 알면 조금도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날 그린비트에서 눈 얘기를 꺼냈을 때 질색하던 조로를 떠올리며 로우는 도피와 크로커다일에게도 말했다. 이제 더이상 불로 수술은 할 생각이 없으니 조로를 돌보게만 해달라고. 그때 도피가 뭐라 했던가.

‘코라손을 걸고 맹세해라. 네 생애 불로 수술은 쓰지 않겠다고.’
‘…코라씨를 걸고 맹세해. 앞으로 죽을 때까지 불로 수술은 쓰지 않아.’

여기까지가 반나절 전에 벌어진 사건의 전말이었다. 싸움의 여파로 엉망이 된 연못과 정원은 지금도 치우는 소리가 났다. 로우는 반나절 동안 그 소리를 들으며 조로의 곁에 붙어있었다. 불로 수술은 하지 않는다. 코라씨를 걸고 맹세했으니 로우는 이것을 어길 수 없다. 하지만.

‘하지만…….’

로우는 머리속에 가득 찬 생각을 꾹 누르며 잇새를 다물었다.

“조로야…….”

그는 한줄기 빛과 같은 이를 또다시 잃고 싶지 않았다.




“아까 꽤 격렬하던데? 크로커다일.”
“입닥쳐, 새대가리. 너도 잘한 거 하나 없으니까.”

신경질적인 중저음에 도피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반나절 전 벌인 아수라장 직후 크로커다일을 끌고온 도피는 그를 안았다. 침대에 눕힐 때까지만 해도 거칠기 그지없던 놈은 막상 그다음이 되면 매너가 좋았다. 그런 놈을 자극해 정사를 거칠게 몰고 가는 건 크로커다일이었다. 그러다보니 피를 보기 일쑤라지만 전부 자잘한 상처였다. 아나마도 더 많은 피를 내는 건 박는 쪽인 도피였고 말이다. 그는 보기와 달리 침대 매너가 우수한 편이다. 덕분에 크로커다일은 정사 후 침대 위에서 시가를 태우며 서류를 볼 뿐이었고 그 시중을 드는 건 도피였다. 그는 간만에 갈고리를 완전히 빼내 뭉툭하게 드러난 왼팔을 숭배하듯 두 손에 쥐고 입맞추길 주저하지 않았다. 침대 위의 두 사람은 알몸이었다.

“남의 결손이나 좋아하는 변태자식 같으니. 로우가 네 이런 점은 안 닮은 게 다행이지.”
“이것까지 포함해서 아름다운 거라고, 악어자식. 너무 완벽하면 시시하잖아?”

도피가 보란 듯 뭉툭한 자리 위로 혀를 내어 핥는다. 그순간 남의 결손에 유독 집착하는 녀석이 귀찮아 갈고리를 더 벗지 않던 크로커다일이 움찔했다. 선글라스를 벗은 남자의 눈은 동생보다 더 순한 눈꼬리를 하고 있었다. 자신은 아버지를, 형은 어머니의 눈매를 닮았다고 하던 로시의 말이 떠올랐다. 형은 순해보이는 눈매가 신경쓰여서 선글라스를 필수로 여긴다는 것도. 그런 남자가 제 앞에서는 맨 눈을 보이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는 게 크로커다일을 새삼스럽게 했다. 원래 그는 도피와 이리 밀접한 관계가 될 생각은 없었다. 과거에도 필요하다면 제 몸을 이용하는 것도 서슴치 않는 크로커다일이었지만 적정선을 지켰지 않은가. 과거 그가 몸을 살뜰히 가꾸고 단련한 건 천성이 깔끔한 탓도 있지만 유일한 밑천이기도 해서였다. 깨끗해야 잡병을 예방하고 건강해야 남을 등처먹기도 유리하지 않겠는가. 덕분에 그는 일찍이 조직을 세우고 힘을 키웠으며 외부 세력에 간섭받지 않는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이상에도 가까워졌었다. 아마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쯤 크로커다일은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세우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

“나는 지금 네가 싸놓은 똥을 치우느라 바빠. 그런데도 예의 없이 세우는 놈은 뭐지?”
“알고 있으니까 너는 내가 싼 똥이나 잘 치우라고, 악어자식. 예의 없이 선 놈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읏… 빌어먹을 악어자식. 너 이럴 때면 정신 못 차리겠다니까.”

결손된 부위에 입맞추던 놈을 내버려둔 채 서류를 확인하던 크로커다일이 그것을 내려놓더니 시가를 손에 옮겼다. 이어 한발로 도피의 다리 사이를 지긋이 누르니 빳빳하게 일어선 놈이 움찔했다. 징그럽도록 큰 것을 보면 저걸 받는 스스로가 신기할 따름이다. 처음에나 좀 고생했지 이젠 몸이 좀 뻐근한 것 말고는 괜찮은 것이 매 정사 때마다 공들이는 도피의 노력이 가상하기도 했고. 그에 상이라도 주듯 발을 움직여 압박을 주노라니 도피의 얼굴이 금새 달아오른다. 시가를 한번 빨아들인 크로커다일은 이 얼굴을 꽤나 좋아했다. 쾌락에 젖은 녀석의 얼굴을. 도피가 놀아주는 것도 여기까지인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윽! 무슨… 도피! 오늘은 더 안 한다고 했잖아! 네가 알아서 처리한다며!”
“그래,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도 볼일 보라고.”

발목을 잡힌 크로커다일이 순식간에 끌어내려졌다. 허공에 뜬 시가를 낚아챈 실이 재떨이에 사뿐히 얹어놓을 때 크로커다일의 머리맡에는 흐트러진 서류가 있었다. 그 아래로 씻은 지 얼마 안 된 흑발이 흐트러진 채 누인 크로커다일은 제 다리 사이에서 스스로 콘돔을 씌우는 놈을 봤다. 이어 진입하는 녀석에 여운이 남아있던 구멍은 침입자를 받아들이는데 서슴치 않았다. 비록 앞서 풀어놓았다고 해도 여전히 큰 놈을 받는 건 쉽지 않았지만 말이다. 또다시 한몸처럼 겹친 두 사람의 방 밖에서는 진눈깨비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스치듯 지나는 드레스로자의 겨울은 눈이 흔치 않다. 해질녘, 바람따라 흩날리는 진눈깨비가 유독 스산한 밤이었다.




스산한 바람소리가 고막을 메운다. 어쩐지 비나 눈이 올 것 같은 밤이다. 조로는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황량한 절벽에 누워있었다. 하늘조차 까만 이곳은 별도 달도 없는 곳이다. 있는 것이라고는 끝도 없는 어둠과 바람소리뿐. 그러나 지금은 축축한 공기를 느꼈다. 이건 전에 느껴보지 못한 것이다. 문득 깨어나보니 지금 이곳에 묶인 듯 꼼짝할 수 없던 조로에게 시간은 찰나와 같았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이곳에서의 찰나가 짧은 시간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조로는 제가 왜 이런 곳에 발이 묶였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발버둥치고 있었다. 기억에 없는 누군가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나 반드시 돌아올게!’

조로는 분명 약속했다. 흐릿한 인영의 누군가에게. 그리고 이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녀석이 울지 않기를 바란다. 누군지도 모를 애매한 것투성이면서도 조로는 이것만큼은 확신했다. 울리기 싫다고. 그러니 자신은 돌아가야 한다고 말이다. 이런 생각에 조로가 꿈쩍도 않는 몸을 움직이려 다그칠 때였다. 육신은 마치 생을 다한 듯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목소리도 마찬가지로 조로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하나뿐인 눈을 굴리는 정도였다. 그런 조로의 앞으로 별안간 낫을 든 사신이 나타났다. 해골 위로 검은 망토를 두른 놈은 거인과 같았다.

‘그만둬!’

허공을 가르고 나타난 녀석이 낫을 어깨 위로 치켜들었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소름에 조로가 외쳐보지만 고막을 채우는 건 격렬한 바람소리 뿐이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 휘둘러진 낫이 땅을 가르니 조로의 발치에서부터 긴 금이 가기 시작했다. 조로는 땅이 괴이한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어 갈라진 선이 끝에서 끝으로 이어질 때 조로가 있던 암반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끝인가.’

허탈한 생각을 마지막으로 조로는 몸이 빨려들어가듯 푹 꺼지는 감각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

천길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감각을 느끼며 눈을 번쩍 뜬 조로의 몸은 식은땀이 흥건했다. 그는 창문을 흔드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눈을 굴렸다. 잔잔한 밝기였음에도 눈부심이 쉬이 가시지 않는다.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려 한 그는 생각만큼 움직이지 않는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하지만 낯선 천장, 처음 보는 방 안 풍경에도 당황하지 않은 건 침대에 엎드려 잠든 머리통의 익숙함 덕분이었다. 오래 관리하지 않은 머리는 제법 길어있었고 유독 풍성한 구렛나루와 삐죽빼죽한 턱수염은 기억 속 모습과 사뭇 달랐다. 그럼에도 나쁜 꿈을 꾸는지 잔뜩 인상을 쓰고 잠든 얼굴은 녀석과 갓 합방을 했을 때와 같았다. 조로는 찌푸린 미간을 펴주고 싶었지만 손을 잡고 잠든 녀석에 가만있었다.

“그렇게 뛰어다니시면 위험합니다, 애기씨! 간밤 내린 눈에 곳곳에 살얼음이 끼었습니다요!”
“시끄러워! 이렇게 좋은 곳이 있었는데 왜 이제야 날 불렀냐고! 가자, 나귀야!”
“지금 뛰고 있는 건 저입리다! 영감님은 눈이 발에 달렸뜹니까?”
“넌 조용히 하고 달리기나 해! 이랴!”

익숙한 바깥 소란에 조로의 입꼬리가 움직였다. 그러다 거스러미 일어난 입술이 당겨옴에 절로 손끝이 움찔했을 때 그 작은 움직임 한번으로 로우는 놀란 듯 눈을 떴다. 벌떡 일어난 이는 조로의 상태부터 확인하려 했음이다. 그러다 마주친 시선에 로우가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어정쩡한 자세로 멈춘 더벅머리 남성에 조로의 입끝이 또한번 움찔했다. 어떻게 봐도 미남이었다. 로우는.

‘다녀왔어.’

소리가 되지 못한 입술의 달싹임에 로우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의자에 주저앉아 고개를 푹 수그린 녀석에 조로는 힘겹게 손을 올렸다. 머리를 멋없이 쓰다듬어주는 것뿐이었으나 그것으로 충분했으리라. 침대 위로 엎드린 어깨가 잘게 떨리는 것에 조로는 못내 씁쓸함을 삼킨다. 울지 않기를 바랐는데. 머리 속을 맴도는 생각에 조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날은 밤사이 내린 눈에 세상이 온통 하얀 아침이었다.







한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