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연갤 - 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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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5 15:52
플라밍고 호가 드레스로자에 도착했을 당시 조로를 가장 위독하게 만든 건 눈에 보이는 상처가 아니었다. 폭탄 파편이 박힌 어깨라든가 몸을 관통한 자상도 물론 중상이었지만 이 둘은 처치가 잘돼 있었다. 도피가 직접 봉합한 덕인데 그 몸에서 나온 실은 거부반응이 전혀 없는데다 기본적으로 그는 손재주가 뛰어났다. 이는 단순히 잘한다를 넘은 공예 수준이었으니 배에 대기 중이던 궁정의가 환부를 돌보고 그가 직접 꿰맨 솜씨는 나무랄 데 없었다. 등에서 복부로 난 관통상도 내부 장기는 전부 피한 상처였으니 더더욱. 때문에 로우는 상처가 난 각도와 크기를 통해 뒤에서 앞으로, 날카로운 것에 공격당했으며 갈고리나 곡도 같이 휘어진 무기라는 걸 파악했을 때 누구의 소행인지 바로 알아챘다. 그런 무기를 쓰면서 장기 손상 없이 관통상을 만들만 한 실력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하지만 당시 조로의 생명을 구함에 촌각을 다투게 한 건 정체불명의 약물이었으므로 로우는 입을 다물었다. 이 불가해한 약물은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양극화를 초래했고 불나방이 불 속에 뛰어드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지극히 극단적인 물리적 방법이 아니고서는 이것에 중독된 육신을 멈추게 할 방법은 없었으리라. 또는 약물 기전을 견디다 못한 심장이 터져서 죽기 전에는. 그런 의미에서 크로커다일이 낸 상처는 무슨 의도였든 조로를 멈추게 만들었으니 로우는 도리어 가슴을 쓸어내릴 정도였다. 실로 그가 플라밍고 호에서 능력으로 살핀 조로는 다발성 장기부전 증상에 더해 특히 부풀어오른 심장은 터지기 직전이었으니까. 때문에 로우를 따라왔던 궁정의장은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의 소견에 조로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인공호흡기를 달고 겨우 숨이나마 붙어서 예까지 온 것도 기적이었다. 그럼에도 차분한 로우는 그 자리에서 코트를 벗어던지고 소매를 걷어올렸으니 놀란 궁정의는 반사적으로 그를 불렀다. 왕자님 소리에 다시금 손을 펼쳐 룸을 확장하려던 로우가 침대 건너편의 남자를 힐끗 쳐다봤다.
‘이 이상 왕자님 능력으로 치료하시면 조로님 면역체계는 완전히 망가지십니다.’
‘그렇다고 나 아닌 다른 대안이 있는가?’
감정 없는 음성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그를 짓누른다. 앞서 로우의 발정기 때 입은 상처를 능력으로 치료하지 않은 건도 이런 이유였다. 이에 궁정의가 탄식 어린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니 우뚝 선 왕자는 여전히 서릿발처럼 시리고 찬 표정이었다. 그는 말 없이 룸을 확장한 뒤 궁정의장을 방 문 너머로 내쫓았다.
문이 닫히고 굳게 잠기는 소리가 들린다. 궁정의장도 그토록 무서운 왕자는 처음이었다. 그래도 인간미는 있던 분일진대 방금 전 그를 내려다보던 눈빛은 꿈에 볼까 두려울 정도였다. 궁정의장의 두 손은 그새 식은땀이 흥건해졌다.
조로의 치료는 배 위에서 지속됐다. 그 몸에서 발견된 다량의 수면제와 마약성 진정제에 로우가 도피를 부르며 이를 갈았을 때 제르마66라는 정보를 받은 덕분이다. 조로가 사라진 침대에서 제르마66가 새겨진 주사기를 발견한 건 도피였다. 이에 로우는 레이주의 직통 번호로 전보벌레를 연결했고 플라밍고 호가 드레스로자 해역 경계선까지 나온 건 한시라도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통화 당시 로우의 설명에 금시초문이란 반응이었던 레이주는 조금만 시간을 달랬는데 정확히 십분 뒤 회신된 전보벌레는 짜증 가득한 얼굴을 했었다. 화를 꾹 눌러참는 목소리는 덤이었으나 그녀는 가장으로서 제 식구 단속에 소홀했음을 시인했다. 더불어 조로에게 쓰인 약물은 국가기밀이니 자료를 함부로 넘겨줄 수 없다면서도 말을 덧붙였다.
‘우리쪽 잘못도 있으니까 이번만 예외로 할게. 대신 볼일이 끝나면 사용된 자료는 전부 폐기할 것. 그리고 우리쪽에서도 감시자 한 명을 붙여서 자료를 전달할 텐데 괜찮겠지?’
‘직접 전달이면 시간이 걸릴텐데?’
‘그건 걱정 마. 마침 우리도 그쪽으로 가는 중이었거든. 도착까지 반나절도 안 걸릴 거야.’
‘좋아. 우린 누만시아 플라밍고 호에 있다. 드레스로자 동쪽 해역 경계선에서 기다릴게. 배는 알아보겠지?’
‘아아, 그 휘황찬란한 홍학 배 말이야? 그 배라면 당연하지.’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에 로우는 잠시 귓불이 달아올랐다. 플라밍고 호는 어디 내놔도 덩치와 외형이 눈에 띄었다. 전용 함선이 잠수함인 로우와 비교해봐도 젊은 왕과의 취향차는 극명했다. 그래선지 다시 입을 열기 전 내뱉은 레이주의 한숨에는 로우를 향한 측은함이 있었다.
‘가망은 없겠지만 그래도 네 오메가가 살 수 있기를 바랄게.’
진심어린 염려의 말에 로우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걸 느꼈다. 그로부터 한쪽 눈이 보라색으로 멍든 욘디가 나타난 건 반나절도 안 돼서였다. 한 손에는 검은색 아타셰 케이스를 들고 말이다.
정확히 스무하루날에 의식을 차린 조로가 제일 먼저 물은 건 루피였다. 이를 예상했던 로우는 블루노가 밀짚모자를 무사히 인계했음을 전하며 추후 검은다리, 즉 상디를 직접 보게 해주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 말에 안심한 조로가 미소지으며 훈훈한 분위기도 잠시, 로우의 입가에 든 멍을 알아채면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또, 하아, 폐하지? 하….”
“아니라니까, 조로야.”
거칠어지는 숨소리와 함께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조로를 따라 모니터의 그래프도 요동쳤다. 왕자의 얼굴을 저리 만들 이가 몇이나 될까. 더욱이 도피는 다른 이가 로우의 얼굴을 저리 만들었다면 가문을 멸하고 남을 성격이었다. 조로도 이정도는 파악한 세월이지 않은가. 때문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던 조로는 도피에게 그대로 갚아주려는 생각이었다. 호흡기를 달고 숨을 쉬는 주제에. 로우는 한숨이 깊어지던 순간이었다.
“그럼 뭐ㅡ! 윽…….”
“거봐. 내가 흥분하면 안 된다고 했지? 너 죽다 살아났다, 조로야. 걱정하는 사람 생각도 좀 해라.”
“이까짓거 기합으로 털고 일어날 수 있어!”
“조로야!!”
억지로 일어나려던 조로가 고꾸라졌다. 그런 녀석을 부축하던 로우는 울 듯 말 듯한 표정이었다. 화난 목소리는 덤이었고 말이다. 그러다 결국 저 고집에는 못 이기겠다 싶었는지 로우의 언성이 올라갔다. 그는 이제 막 깨어난 조로가 잘못될까 조바심이 났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이제와 신경쓰는 척하지 마라! 애당초 네가 날 이렇게 신경쓸 거였으면 멋대로 뛰쳐나가지도 않았겠지!”
“너 이자식! 헉! 허억…!”
그 말에 발끈한 조로가 로우의 멱살을 움켜쥐려 했으나 반쯤 일어난 몸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환자용 가운 차림의 조로가 모로 누워 바튼 숨을 몰아쉰다. 침대 옆에서 이를 빤히 내려다보던 이의 눈빛이 서늘했다. 조로는 뜻대로 되지 않는 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루피를 구하기 위해 치룬 값이 무엇인지를. 코라씨를 살리지 못한 일이 응어리로 남아 필사적으로 능력을 갈고닦은 로우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미 죽었을 거다.
“넌 밀짚모자를 구하고 죽은 목숨이다. 그러니 앞으로 남은 네 인생은 전부 내것이야. 넌 무조건 내 말에 순응해야ㅡ! 너 진짜 내 말 안 들을래?!”
로우가 뭐라 하든 말든 스스로 호흡기를 벗어던진 조로는 제 몸에 붙은 패치를 떼려 들었다. 네 발로 기어서라도 침대를 나서려는 놈에 로우의 얼굴이 달아오른다. 아랑곳 않은 조로가 팔에 연결된 링거줄까지 건드릴쯤에는 로우도 또 한번 무력을 쓸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 오른 그가 사지를 결박하니 쉽게 붙잡힌 조로의 노려보는 시선이 가슴에 박혔다.
“넌 내거다! 내게 복종하겠다고 대답해!”
로우가 다그치지만 조로는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갈라진 입술새로 베어나온 핏물이 유난히 붉었다. 와중에도 벗어나려는 힘은 순간순간 사경을 헤맨 중환자가 맞나 싶을 정도다. 그럴수록 조로의 위에 올라탄 로우가 누르는 힘 또한 강해졌다. 이런 이유로 문 밖에 도착한 기척을 알아채지 못했으니 살그머니 열린 틈새를 기웃대는 눈이 있었더랬다. 그 주름진 눈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해 급히 문을 닫아버렸다.
“뭐야, 영감?”
“아, 아니요 애기씨. 왕자님을 뵙는 건 다음에 하심이…….”
그린비트에서 톤타타족의 왕처럼 군림해 떵떵거리고 지내던 슈거를 불러온 건 영감이었다. 슈거의 능력을 알게 되면서 이후 진실을 들은 영감은 로우의 기분전환이나마 될까 싶었던 거다. 한데 심상치 않은 상황을 목도했으니 문을 막고 선 영감의 얼굴에 비지땀이 흘렀다.
‘우리 왕자님께서 의식도 없는 환자한테 설마……! 그럴 리가! 내가 잘못 본 게야!!’
저희 고상한 왕자님이 의식도 없는 환자를 덮치려 한다니 말이 안 됐다. 영감은 이내 헛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꼴을 지켜보는 슈거의 눈썹이 들썩일 때 장난감 수레를 끌던 워커는 혼자 눈만 멀뚱거렸다. 수레에서 내린 슈거는 아무 생각 없는 소인족에 혀를 끌끌 찼다. 이 식충이를 나 아니면 누가 거둘까 싶어서다.
“비켜, 영감.”
“잠시만요, 애기씨. 왕자님께서 지금은 상심이 크신 듯하니 이따 찾아뵙는 게…!”
“이따는 무슨.”
“아앗! 애기씨!”
실소한 슈거는 가뿐히 영감을 제치고 문을 열었다. 그 또한 엄연히 일분대원 소속이었으니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빠르기는 톤타타족과 견줄 정도다. 이들이 일반인 눈에 띄지 않을만큼 재빠른 몸놀림을 가진 걸 생각하면 영감이 슈거를 막을 방도는 없었다. 그가 알아챘을 때 슈거는 진작 양문을 열어젖히고 방 안에 있었으니까. 그리고 보게 된 침대 발치쪽 모습은 슈거가 사지를 부들부들 떨게 만들었다. 마침 들린 인기척에 이쪽을 돌아보던 두 사람의 얼굴이 대조적이었으니 말이다. 특히 이제 막 깨어나 병색이 완연한 몰골로 바튼 숨을 몰아쉬던 조로는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어이구, 조로님!!!”
“조로랜드!!!”
“둘 다 멈춰! 한발짝도 움직이지 마!!”
그제야 조로가 의식을 차렸다는 걸 알아챈 영감과 워커가 감격한 목소리를 낼 때 노여움 실린 슈거의 외침이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이 멈칫하고 슈거는 앙증맞은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 색광자식! 죽여버리겠어!”
“색…! 슈거, 잠깐 이건 오해다!”
“왕자님은 안 됩니다! 애기씨, 제발!!”
“조로랜드!!!”
장갑을 벗고 목을 조르려는 모양새로 달려들던 슈거에 로우는 당황해 물러섰다. 그런 슈거를 영감이 필사적으로 말리는 틈에 달려든 워커만이 조로의 가슴에 매달려 반가움의 눈물을 쏟을 따름이었다.
슈거가 난동을 부린 그날 다시 의식을 잃은 조로로 인해 로우는 목숨을 건졌다. 사람은 살려야지 않던가. 덕분에 슈거의 감시하에 조로를 돌본 로우는, 이날의 난동으로 인해 의식도 없는 왕세자비를 덮치려 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그토록 금욕적이던 무결점 왕자께서 오메가에 미쳐 색정광이 됐다며 말이다. 이는 웃전의 귀에도 들어갔는데 헛소문임을 확신한 도피는 한번 비웃고 말았다면 크로커다일은 달랐다. 그는 의외로 농간에 잘 휩쓸리는 타입이었으니 도피는 이를 알면서도 내버려뒀다. 말 같지도 않은 소문에 밤새 고뇌하고 뒤척이는 악어가 웃겼으니까. 그러는 동안 이주의 시간이 더 흘렀고 새해를 넘겼다. 평소라면 드레스로자도 여느 나라와 같이 새해를 기념하는 축제가 한창일텐데 올해는 조용한 날들이 이어졌다.
“희한하게도 올 겨울은 유독 눈이 많이오네. 옛말에 괴이한 일이 벌어지면 나라에 흉조가 든다고 했는데.”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비질이나 하시게. 머리에 찬바람이 드니까 헛소리가 나오지? 그리고 아무리 괴변이 일어나도 국왕폐하랑 왕자님이 계시는데 무슨 걱정이야? 두 분이랑 왕실 호위대만 있으면 이 나라는 끄떡 없는데.”
아침 일찍 마당을 쓰는 시종들간에 투닥대는 소리가 있었다. 한두달이면 끝나는 드레스로자의 겨울은 1월이 끝물이었다. 때문에 싸락눈일지라도 좀체 보기 힘든 눈이 유독 잦은 것에 시종들은 넋두리를 늘어놨다. 그도 그럴 게 동생이 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로즈워드 반정은 물론 조카가 하룻밤새 숙부의 목을 자르고 궁을 장악한 해에도 죽은 물고기떼가 해변가로 올라온다거나, 때아닌 태풍이 닥치는 등의 이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더불어 올 겨울은 왠 마물떼가 나타나 왕의 대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니 이를 재건하기까지 드레스로자 왕실이 임시로 머무는 곳은 대지 면적만 이천평이 넘는 99칸 기와집이었다.
본디 관대한 젊은 왕은 귀족이나 고위 관료가 왕실을 위협하듯 부를 과시해도 신경쓰지 않았다. 이로 인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몇몇은 왕의 대지 근처에 보란듯 궁전같은 집을 지었는데 로우가 임시거처로 이 기와각을 고른 이유와도 일맥상통했다. 왕의 대지 지척에 지어진 집들 중 가장 넓었기 때문이다. 호위대를 비롯해 딸려오는 식속들을 생각하자면 이천평 기와각도 부족했으나 별수가 없으니 로우는 참기로 했다. 하루아침에 내 집에서 쫓겨났던 귀족은 지랄맞은 왕자의 성미를 잘 알아서 하소연 한번 하지 못했고. 그래도 나름 이리 쫓아내시면 저희 식구는 길바닥에 나앉으란 거냐 불쌍한 척도 해봤지만 왕자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내 알 바 아니다.’
로우의 냉대처럼 귀족은 철마다 동서남북 섬에 있는 별장으로 꽃놀이며 물놀이며 잘만 다닌 사람이었다. 이런 사정을 손바닥 보듯 하던 왕자인지라 귀족과 그를 따르는 식솔들은 하루만에 집을 나와야 했다. 이렇듯 드레스로자 왕실의 횡포란 평민들과 전혀 상관없으니 신경쓸 바 아니었고. 오히려 그들은 왕자가 만든 새장 안에서 아늑하게 목숨보전하지 않았나. 때문에 집을 뺏긴 귀족이 아무리 불쌍한 척해본들 평민들은 내심 왕자 편이었다. 귀족 또한 그의 새장 덕을 본 건 같았으니까. 대신 마물떼와의 격전지가 된 왕의 대지는 초토화된지라 천장을 비롯해 사방 벽까지 오롯한 왕의 침실만은 요상해보일 정도였다. 왕의 침실은 진작 대수선을 통해 벽과 천장, 지지대를 별개로 나누어서 북궁 전체가 무너진다한들 영향 받지 않았다. 때문에 젊은 왕도 제 침실만 유일하게 남은 걸 보면서는 헛웃음이 나오지 않았나. 도피가 들어앉은 로시의 방을 대수선한 건 로우가 대리청정을 맡고 제일 처음 스스로 상정해서 재가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이런 사정 속에서 조로가 눈을 뜬 이른 아침, 왕세자 부부는 이주째 냉전 아닌 냉전 중이었다. 조로는 저희 왕자님이 오해받는 꼴은 죽어도 못 보는 시종장 영감 덕에 로우 얼굴에 난 상처의 원인을 알고 있었다. 영감의 집착과 끈기는 로우의 집요함을 뛰어넘었으니까.
언제나 일정이 빡빡한 로우는 조로를 돌보는 중에도 나랏일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꼬박 삼일을 자지도 먹지도 않고 조로의 치료에 전념한 뒤 곧 쓰러질 듯한 몰골로 나와서는 바로 급한 안건들을 처리할 정도 아니던가. 한 배에서 감시 겸으로 대기했던 욘디마저 그런 로우를 보고는 혀를 찰 정도였다. 강화인간도 아닌 놈이 제 몸 쓰기를 강철같이 한다는 것에.
‘야, 너 계속 그렇게 살면 요절해. 사람이 쉴 때도 있어야지.’
오죽하면 폐기 자료를 넘겨받던 욘디가 한마디를 얹었을까. 이때 로우는 혼자 힘으로는 제대로 서지도 못해 벽에 의지한 상태였다. 크로커다일 역시 임시거처로 옮긴 기와각에서 사법섬의 후처리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전갈독에 당한 도피는 자리보전했고 말이다. 상황이 이러니 로우가 국사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조로를 치료하는 삼일을 번 것도 베르고가 있은 덕분이었다. 이런 이유로 조로가 정신이 들고 안정권에 들어서자 남은 치료를 궁정의장에게 넘겨준 로우는 자리를 비우는 때가 많았다. 그래도 매번 호위대를 감시로 세웠건만 집요하게 틈을 노리던 영감은 왕자의 침실에 잠입하기를 성공치 않았나. 간곡한 읍소 끝에 불로 수술에 대한 얘기를 꺼낼쯤에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하지만 로우의 능력에 불로 수술 같은 능력이 있을 줄 몰랐던 조로는 당황함도 잠시 오히려 더 화가 나 버렸다.
“경께서 로우를 때렸다고요? 잘하셨습니다, 크로커다일 경. 그놈은 더 맞아도 쌉니다.”
크로커다일은 조로가 정신을 차리고 오늘 처음 본 거였다. 격무에 시달리던 로우는 지난밤 이곳에 돌아오지도 못했는데 크로커다일도 알고서 부러 찾은 거였다. 도피 또한 사법섬 일에 대비하느라 밤새 서재에 틀어박혔다. 그런데 크로커다일을 보자마자 한 조로의 첫마디가 저것이었다. 조로는 상대의 기척을 느끼고 막 눈을 뜬 참이었다.
“…몸은 괜찮은 건가?”
“내내 누워만 있었더니 좀이 쑤십니다. 다들 호들갑을 떨어서 뭘 어쩌지도 못하겠고요.”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조로에 그 옆으로 의자를 끌어온 크로커다일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이른 아침에도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는 어깨에 두른 털코트를 벗어내리며 의자에 기대앉았다. 긴 다리를 꼬아앉은 사내의 손에는 언제나처럼 휘황찬란한 알반지가 손가락마다 자리했다. 유일하게 아무것도 없는 건 약지뿐이지만 이토록 과한 장신구마저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크로커다일은.
“너도 이젠 불로 수술에 대해 알게 된 모양이지?”
“영감님이 말해주던데요. 로우 걔는 지 목숨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원.”
“그때 네놈은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네가 살려면 불로 수술을 받아야 했던 상황이었어.”
튼튼한 몸이 장점이라고 했던가. 크로커다일은 회복이 빠른 편이라 놀라워하던 궁정의장의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제 몸을 찌른 사내를 반갑게 맞아줬던 잔디머리가 눈살을 구겼다. 똥이라도 씹은 얼굴이었다.
“사람 떠보는 짓이래도 그런 말은 마십쇼. 아무리 경이라도 두 번은 안 참습니다.”
“무슨 뜻이지?”
“하… 로우 걔처럼 성실하고 착한 놈도 없는데 왜 그렇게들 함부로 합니까? 폐하는 그렇다쳐도 경은 로우한테 좋은 어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참에 약속하는데 나도 로우한테 해가 되는 짓은 절대 안 할 겁니다.”
“그게 밀짚모자를 살리는 길이래도?”
“뭔 물음이 또 그래요?”
“밀짚모자와 로우가 바다에 빠졌다. 조로 넌 둘 중 하나만 구할 수 있다면 누굴 선택할 거냐?”
“진짜 유치하게 이럴 거요?”
“대답해라, 롤로노아. 너는 이미 밀짚모자를 구한다고 멋대로 뛰쳐나와 로우에게 해를 입혔다. 그런 네놈 약속을 내가 믿을 거라고 보나?”
“루피를 구하고 로우랑 같이 죽겠습니다! 됐습니까?”
조로가 언성을 높였지만 마음에 안 드는 답이었다. 그러나 로우라면 이 답에 만족할 것이다. 크로커다일은 알 수 있었다. 결국 신경전처럼 오가는 눈빛을 먼저 돌려버린 그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환자임을 감안해 맨 입으로 온 이는 시가 생각이 간절해졌다.
“지금도 밀짚모자를 사랑하나? 롤로노아.”
“……!!”
“아니면 로우를 사랑하게 된 거냐?”
“아니, 잠깐! 이런 얘기는 좀 그런데… 그리고 나보다는 로우를 더 신경쓰는 게 어때요? 걔도 진짜 좋아하는 사람 찾아야지. 걔는 발정기도 엄청나던데 매번 그렇게 둘 겁니까? 원체 순한 녀석이니까 마음에 드는 짝만 만나면 발정기도 무난할 텐데.”
내내 고압적인 자세로 임하던 크로커다일이 손을 들어보인 건 이때였다. 그는 황천에서 살아 돌아온 이를 앞에 두고 저울질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 또한 조로가 로우의 마음을 알고 이용했다 여겼으므로. 사랑하는 가족과 코라손을 잃은 아이는 또다시 마음을 주는 것에 벽을 세웠다. 소외되고 결여된 아이들을 모아 호위대를 만들기까지 보인 로우의 행보는 스스로 가족을 만든 도피와 일치하는 데가 있었다. 애정을 갈구함에 있어 또다시 잃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고. 하나 여기서 두 사람이 갈렸으니 도피는 필사적으로 제 사람을 곁에 두고 지킨다면 로우는 아예 특별한 존재를 만들지 않고자 한 거다. 이것만이 자신으로 인해 다른 누가 또 다칠 일 없는 방법이라면서. 코라손의 죽음은 어린 로우에게 유독 큰 상처를 남겼음이라. 한데 등 떠밀리듯 시작된 인연에 특별한 존재가 생긴 거였다. 이는 그 성격에 두번 다시 없을 존재감이다. 적어도 도피와 크로커다일은 이것을 직감했다. 그러니 크로커다일은 도피도 로우도 바쁜 이때 조로를 죽일지 말지를 가늠하러 온 거였다. 한데 대화가 지속될수록 느껴지던 위화감을 그는 드디어 알아챘다. 단지 알파의 발정기에 제 발로 걸어들어간 놈이 설마 지나가는 개도 알 일을 정말 모른다는 걸 납득하기 어려웠을 뿐.
“이런 멍청…….”
절로 나오던 말을 손으로 막은 크로커다일의 시선이 갈 곳을 잃었다. 부러 조로를 피한 눈동자가 정처없이 떨렸다. 마음에도 없는 녀석이 별궁을 찾았다면 그 지랄맞은 성격에 발정기까지 더해졌으니 목이 뽑히고도 남았으리라. 그런데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갔다면 죽으러 간 거나 다름없잖은가. 배포가 남다른 건지 바보천치인지 모를 녀석에 크로커다일은 평정심을 잃었다. 이렇게 되면 애당초 계획도 다 쓸모없어졌다.
‘어디부터 알려줘야 하지? 설마 저놈 형질인자가 뭔지도 모르는 건가?’
“뭡니까? 크로커다일 경. 할 말 있으면 하십쇼.”
태도가 돌변한 상대에 조로가 의문을 가질 때였다. 밖이 시끄럽다 싶더니 양문이 거칠게 열렸다. 나타난 건 젊은 왕으로 이 겨울에 땀이 흐를만큼 다급히 찾아온 인사는 속옷 바람이었다. 맨 몸에 팬티 한장뿐인 몰골의 그는 흉포하게 갈라진 복근과 결이 선명한 대퇴직근을 자랑했으니 병상에 있는 동안 아령 한번 잡아보지 못한 조로의 눈썹이 꿈틀했다.
“악어자식 너 어느틈에! 혹시 벌써 무슨 짓한 건 아니겠지?”
성큼성큼 들어온 도피가 조로 앞에 다가온 건 금방이었다. 입꼬리가 씰룩대는 얼굴은 드물게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사법섬을 빠져나오기 전, 크로커다일이 미스터 투를 불러 의식 없던 조로의 얼굴을 오른손으로 만지게 한 걸 알고 있었다.
한조각
‘이 이상 왕자님 능력으로 치료하시면 조로님 면역체계는 완전히 망가지십니다.’
‘그렇다고 나 아닌 다른 대안이 있는가?’
감정 없는 음성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그를 짓누른다. 앞서 로우의 발정기 때 입은 상처를 능력으로 치료하지 않은 건도 이런 이유였다. 이에 궁정의가 탄식 어린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니 우뚝 선 왕자는 여전히 서릿발처럼 시리고 찬 표정이었다. 그는 말 없이 룸을 확장한 뒤 궁정의장을 방 문 너머로 내쫓았다.
문이 닫히고 굳게 잠기는 소리가 들린다. 궁정의장도 그토록 무서운 왕자는 처음이었다. 그래도 인간미는 있던 분일진대 방금 전 그를 내려다보던 눈빛은 꿈에 볼까 두려울 정도였다. 궁정의장의 두 손은 그새 식은땀이 흥건해졌다.
조로의 치료는 배 위에서 지속됐다. 그 몸에서 발견된 다량의 수면제와 마약성 진정제에 로우가 도피를 부르며 이를 갈았을 때 제르마66라는 정보를 받은 덕분이다. 조로가 사라진 침대에서 제르마66가 새겨진 주사기를 발견한 건 도피였다. 이에 로우는 레이주의 직통 번호로 전보벌레를 연결했고 플라밍고 호가 드레스로자 해역 경계선까지 나온 건 한시라도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통화 당시 로우의 설명에 금시초문이란 반응이었던 레이주는 조금만 시간을 달랬는데 정확히 십분 뒤 회신된 전보벌레는 짜증 가득한 얼굴을 했었다. 화를 꾹 눌러참는 목소리는 덤이었으나 그녀는 가장으로서 제 식구 단속에 소홀했음을 시인했다. 더불어 조로에게 쓰인 약물은 국가기밀이니 자료를 함부로 넘겨줄 수 없다면서도 말을 덧붙였다.
‘우리쪽 잘못도 있으니까 이번만 예외로 할게. 대신 볼일이 끝나면 사용된 자료는 전부 폐기할 것. 그리고 우리쪽에서도 감시자 한 명을 붙여서 자료를 전달할 텐데 괜찮겠지?’
‘직접 전달이면 시간이 걸릴텐데?’
‘그건 걱정 마. 마침 우리도 그쪽으로 가는 중이었거든. 도착까지 반나절도 안 걸릴 거야.’
‘좋아. 우린 누만시아 플라밍고 호에 있다. 드레스로자 동쪽 해역 경계선에서 기다릴게. 배는 알아보겠지?’
‘아아, 그 휘황찬란한 홍학 배 말이야? 그 배라면 당연하지.’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에 로우는 잠시 귓불이 달아올랐다. 플라밍고 호는 어디 내놔도 덩치와 외형이 눈에 띄었다. 전용 함선이 잠수함인 로우와 비교해봐도 젊은 왕과의 취향차는 극명했다. 그래선지 다시 입을 열기 전 내뱉은 레이주의 한숨에는 로우를 향한 측은함이 있었다.
‘가망은 없겠지만 그래도 네 오메가가 살 수 있기를 바랄게.’
진심어린 염려의 말에 로우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걸 느꼈다. 그로부터 한쪽 눈이 보라색으로 멍든 욘디가 나타난 건 반나절도 안 돼서였다. 한 손에는 검은색 아타셰 케이스를 들고 말이다.
정확히 스무하루날에 의식을 차린 조로가 제일 먼저 물은 건 루피였다. 이를 예상했던 로우는 블루노가 밀짚모자를 무사히 인계했음을 전하며 추후 검은다리, 즉 상디를 직접 보게 해주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 말에 안심한 조로가 미소지으며 훈훈한 분위기도 잠시, 로우의 입가에 든 멍을 알아채면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또, 하아, 폐하지? 하….”
“아니라니까, 조로야.”
거칠어지는 숨소리와 함께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조로를 따라 모니터의 그래프도 요동쳤다. 왕자의 얼굴을 저리 만들 이가 몇이나 될까. 더욱이 도피는 다른 이가 로우의 얼굴을 저리 만들었다면 가문을 멸하고 남을 성격이었다. 조로도 이정도는 파악한 세월이지 않은가. 때문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던 조로는 도피에게 그대로 갚아주려는 생각이었다. 호흡기를 달고 숨을 쉬는 주제에. 로우는 한숨이 깊어지던 순간이었다.
“그럼 뭐ㅡ! 윽…….”
“거봐. 내가 흥분하면 안 된다고 했지? 너 죽다 살아났다, 조로야. 걱정하는 사람 생각도 좀 해라.”
“이까짓거 기합으로 털고 일어날 수 있어!”
“조로야!!”
억지로 일어나려던 조로가 고꾸라졌다. 그런 녀석을 부축하던 로우는 울 듯 말 듯한 표정이었다. 화난 목소리는 덤이었고 말이다. 그러다 결국 저 고집에는 못 이기겠다 싶었는지 로우의 언성이 올라갔다. 그는 이제 막 깨어난 조로가 잘못될까 조바심이 났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이제와 신경쓰는 척하지 마라! 애당초 네가 날 이렇게 신경쓸 거였으면 멋대로 뛰쳐나가지도 않았겠지!”
“너 이자식! 헉! 허억…!”
그 말에 발끈한 조로가 로우의 멱살을 움켜쥐려 했으나 반쯤 일어난 몸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환자용 가운 차림의 조로가 모로 누워 바튼 숨을 몰아쉰다. 침대 옆에서 이를 빤히 내려다보던 이의 눈빛이 서늘했다. 조로는 뜻대로 되지 않는 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루피를 구하기 위해 치룬 값이 무엇인지를. 코라씨를 살리지 못한 일이 응어리로 남아 필사적으로 능력을 갈고닦은 로우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미 죽었을 거다.
“넌 밀짚모자를 구하고 죽은 목숨이다. 그러니 앞으로 남은 네 인생은 전부 내것이야. 넌 무조건 내 말에 순응해야ㅡ! 너 진짜 내 말 안 들을래?!”
로우가 뭐라 하든 말든 스스로 호흡기를 벗어던진 조로는 제 몸에 붙은 패치를 떼려 들었다. 네 발로 기어서라도 침대를 나서려는 놈에 로우의 얼굴이 달아오른다. 아랑곳 않은 조로가 팔에 연결된 링거줄까지 건드릴쯤에는 로우도 또 한번 무력을 쓸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 오른 그가 사지를 결박하니 쉽게 붙잡힌 조로의 노려보는 시선이 가슴에 박혔다.
“넌 내거다! 내게 복종하겠다고 대답해!”
로우가 다그치지만 조로는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갈라진 입술새로 베어나온 핏물이 유난히 붉었다. 와중에도 벗어나려는 힘은 순간순간 사경을 헤맨 중환자가 맞나 싶을 정도다. 그럴수록 조로의 위에 올라탄 로우가 누르는 힘 또한 강해졌다. 이런 이유로 문 밖에 도착한 기척을 알아채지 못했으니 살그머니 열린 틈새를 기웃대는 눈이 있었더랬다. 그 주름진 눈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해 급히 문을 닫아버렸다.
“뭐야, 영감?”
“아, 아니요 애기씨. 왕자님을 뵙는 건 다음에 하심이…….”
그린비트에서 톤타타족의 왕처럼 군림해 떵떵거리고 지내던 슈거를 불러온 건 영감이었다. 슈거의 능력을 알게 되면서 이후 진실을 들은 영감은 로우의 기분전환이나마 될까 싶었던 거다. 한데 심상치 않은 상황을 목도했으니 문을 막고 선 영감의 얼굴에 비지땀이 흘렀다.
‘우리 왕자님께서 의식도 없는 환자한테 설마……! 그럴 리가! 내가 잘못 본 게야!!’
저희 고상한 왕자님이 의식도 없는 환자를 덮치려 한다니 말이 안 됐다. 영감은 이내 헛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꼴을 지켜보는 슈거의 눈썹이 들썩일 때 장난감 수레를 끌던 워커는 혼자 눈만 멀뚱거렸다. 수레에서 내린 슈거는 아무 생각 없는 소인족에 혀를 끌끌 찼다. 이 식충이를 나 아니면 누가 거둘까 싶어서다.
“비켜, 영감.”
“잠시만요, 애기씨. 왕자님께서 지금은 상심이 크신 듯하니 이따 찾아뵙는 게…!”
“이따는 무슨.”
“아앗! 애기씨!”
실소한 슈거는 가뿐히 영감을 제치고 문을 열었다. 그 또한 엄연히 일분대원 소속이었으니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빠르기는 톤타타족과 견줄 정도다. 이들이 일반인 눈에 띄지 않을만큼 재빠른 몸놀림을 가진 걸 생각하면 영감이 슈거를 막을 방도는 없었다. 그가 알아챘을 때 슈거는 진작 양문을 열어젖히고 방 안에 있었으니까. 그리고 보게 된 침대 발치쪽 모습은 슈거가 사지를 부들부들 떨게 만들었다. 마침 들린 인기척에 이쪽을 돌아보던 두 사람의 얼굴이 대조적이었으니 말이다. 특히 이제 막 깨어나 병색이 완연한 몰골로 바튼 숨을 몰아쉬던 조로는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어이구, 조로님!!!”
“조로랜드!!!”
“둘 다 멈춰! 한발짝도 움직이지 마!!”
그제야 조로가 의식을 차렸다는 걸 알아챈 영감과 워커가 감격한 목소리를 낼 때 노여움 실린 슈거의 외침이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이 멈칫하고 슈거는 앙증맞은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 색광자식! 죽여버리겠어!”
“색…! 슈거, 잠깐 이건 오해다!”
“왕자님은 안 됩니다! 애기씨, 제발!!”
“조로랜드!!!”
장갑을 벗고 목을 조르려는 모양새로 달려들던 슈거에 로우는 당황해 물러섰다. 그런 슈거를 영감이 필사적으로 말리는 틈에 달려든 워커만이 조로의 가슴에 매달려 반가움의 눈물을 쏟을 따름이었다.
슈거가 난동을 부린 그날 다시 의식을 잃은 조로로 인해 로우는 목숨을 건졌다. 사람은 살려야지 않던가. 덕분에 슈거의 감시하에 조로를 돌본 로우는, 이날의 난동으로 인해 의식도 없는 왕세자비를 덮치려 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그토록 금욕적이던 무결점 왕자께서 오메가에 미쳐 색정광이 됐다며 말이다. 이는 웃전의 귀에도 들어갔는데 헛소문임을 확신한 도피는 한번 비웃고 말았다면 크로커다일은 달랐다. 그는 의외로 농간에 잘 휩쓸리는 타입이었으니 도피는 이를 알면서도 내버려뒀다. 말 같지도 않은 소문에 밤새 고뇌하고 뒤척이는 악어가 웃겼으니까. 그러는 동안 이주의 시간이 더 흘렀고 새해를 넘겼다. 평소라면 드레스로자도 여느 나라와 같이 새해를 기념하는 축제가 한창일텐데 올해는 조용한 날들이 이어졌다.
“희한하게도 올 겨울은 유독 눈이 많이오네. 옛말에 괴이한 일이 벌어지면 나라에 흉조가 든다고 했는데.”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비질이나 하시게. 머리에 찬바람이 드니까 헛소리가 나오지? 그리고 아무리 괴변이 일어나도 국왕폐하랑 왕자님이 계시는데 무슨 걱정이야? 두 분이랑 왕실 호위대만 있으면 이 나라는 끄떡 없는데.”
아침 일찍 마당을 쓰는 시종들간에 투닥대는 소리가 있었다. 한두달이면 끝나는 드레스로자의 겨울은 1월이 끝물이었다. 때문에 싸락눈일지라도 좀체 보기 힘든 눈이 유독 잦은 것에 시종들은 넋두리를 늘어놨다. 그도 그럴 게 동생이 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로즈워드 반정은 물론 조카가 하룻밤새 숙부의 목을 자르고 궁을 장악한 해에도 죽은 물고기떼가 해변가로 올라온다거나, 때아닌 태풍이 닥치는 등의 이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더불어 올 겨울은 왠 마물떼가 나타나 왕의 대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니 이를 재건하기까지 드레스로자 왕실이 임시로 머무는 곳은 대지 면적만 이천평이 넘는 99칸 기와집이었다.
본디 관대한 젊은 왕은 귀족이나 고위 관료가 왕실을 위협하듯 부를 과시해도 신경쓰지 않았다. 이로 인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몇몇은 왕의 대지 근처에 보란듯 궁전같은 집을 지었는데 로우가 임시거처로 이 기와각을 고른 이유와도 일맥상통했다. 왕의 대지 지척에 지어진 집들 중 가장 넓었기 때문이다. 호위대를 비롯해 딸려오는 식속들을 생각하자면 이천평 기와각도 부족했으나 별수가 없으니 로우는 참기로 했다. 하루아침에 내 집에서 쫓겨났던 귀족은 지랄맞은 왕자의 성미를 잘 알아서 하소연 한번 하지 못했고. 그래도 나름 이리 쫓아내시면 저희 식구는 길바닥에 나앉으란 거냐 불쌍한 척도 해봤지만 왕자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내 알 바 아니다.’
로우의 냉대처럼 귀족은 철마다 동서남북 섬에 있는 별장으로 꽃놀이며 물놀이며 잘만 다닌 사람이었다. 이런 사정을 손바닥 보듯 하던 왕자인지라 귀족과 그를 따르는 식솔들은 하루만에 집을 나와야 했다. 이렇듯 드레스로자 왕실의 횡포란 평민들과 전혀 상관없으니 신경쓸 바 아니었고. 오히려 그들은 왕자가 만든 새장 안에서 아늑하게 목숨보전하지 않았나. 때문에 집을 뺏긴 귀족이 아무리 불쌍한 척해본들 평민들은 내심 왕자 편이었다. 귀족 또한 그의 새장 덕을 본 건 같았으니까. 대신 마물떼와의 격전지가 된 왕의 대지는 초토화된지라 천장을 비롯해 사방 벽까지 오롯한 왕의 침실만은 요상해보일 정도였다. 왕의 침실은 진작 대수선을 통해 벽과 천장, 지지대를 별개로 나누어서 북궁 전체가 무너진다한들 영향 받지 않았다. 때문에 젊은 왕도 제 침실만 유일하게 남은 걸 보면서는 헛웃음이 나오지 않았나. 도피가 들어앉은 로시의 방을 대수선한 건 로우가 대리청정을 맡고 제일 처음 스스로 상정해서 재가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이런 사정 속에서 조로가 눈을 뜬 이른 아침, 왕세자 부부는 이주째 냉전 아닌 냉전 중이었다. 조로는 저희 왕자님이 오해받는 꼴은 죽어도 못 보는 시종장 영감 덕에 로우 얼굴에 난 상처의 원인을 알고 있었다. 영감의 집착과 끈기는 로우의 집요함을 뛰어넘었으니까.
언제나 일정이 빡빡한 로우는 조로를 돌보는 중에도 나랏일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꼬박 삼일을 자지도 먹지도 않고 조로의 치료에 전념한 뒤 곧 쓰러질 듯한 몰골로 나와서는 바로 급한 안건들을 처리할 정도 아니던가. 한 배에서 감시 겸으로 대기했던 욘디마저 그런 로우를 보고는 혀를 찰 정도였다. 강화인간도 아닌 놈이 제 몸 쓰기를 강철같이 한다는 것에.
‘야, 너 계속 그렇게 살면 요절해. 사람이 쉴 때도 있어야지.’
오죽하면 폐기 자료를 넘겨받던 욘디가 한마디를 얹었을까. 이때 로우는 혼자 힘으로는 제대로 서지도 못해 벽에 의지한 상태였다. 크로커다일 역시 임시거처로 옮긴 기와각에서 사법섬의 후처리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전갈독에 당한 도피는 자리보전했고 말이다. 상황이 이러니 로우가 국사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조로를 치료하는 삼일을 번 것도 베르고가 있은 덕분이었다. 이런 이유로 조로가 정신이 들고 안정권에 들어서자 남은 치료를 궁정의장에게 넘겨준 로우는 자리를 비우는 때가 많았다. 그래도 매번 호위대를 감시로 세웠건만 집요하게 틈을 노리던 영감은 왕자의 침실에 잠입하기를 성공치 않았나. 간곡한 읍소 끝에 불로 수술에 대한 얘기를 꺼낼쯤에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하지만 로우의 능력에 불로 수술 같은 능력이 있을 줄 몰랐던 조로는 당황함도 잠시 오히려 더 화가 나 버렸다.
“경께서 로우를 때렸다고요? 잘하셨습니다, 크로커다일 경. 그놈은 더 맞아도 쌉니다.”
크로커다일은 조로가 정신을 차리고 오늘 처음 본 거였다. 격무에 시달리던 로우는 지난밤 이곳에 돌아오지도 못했는데 크로커다일도 알고서 부러 찾은 거였다. 도피 또한 사법섬 일에 대비하느라 밤새 서재에 틀어박혔다. 그런데 크로커다일을 보자마자 한 조로의 첫마디가 저것이었다. 조로는 상대의 기척을 느끼고 막 눈을 뜬 참이었다.
“…몸은 괜찮은 건가?”
“내내 누워만 있었더니 좀이 쑤십니다. 다들 호들갑을 떨어서 뭘 어쩌지도 못하겠고요.”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조로에 그 옆으로 의자를 끌어온 크로커다일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이른 아침에도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는 어깨에 두른 털코트를 벗어내리며 의자에 기대앉았다. 긴 다리를 꼬아앉은 사내의 손에는 언제나처럼 휘황찬란한 알반지가 손가락마다 자리했다. 유일하게 아무것도 없는 건 약지뿐이지만 이토록 과한 장신구마저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크로커다일은.
“너도 이젠 불로 수술에 대해 알게 된 모양이지?”
“영감님이 말해주던데요. 로우 걔는 지 목숨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원.”
“그때 네놈은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네가 살려면 불로 수술을 받아야 했던 상황이었어.”
튼튼한 몸이 장점이라고 했던가. 크로커다일은 회복이 빠른 편이라 놀라워하던 궁정의장의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제 몸을 찌른 사내를 반갑게 맞아줬던 잔디머리가 눈살을 구겼다. 똥이라도 씹은 얼굴이었다.
“사람 떠보는 짓이래도 그런 말은 마십쇼. 아무리 경이라도 두 번은 안 참습니다.”
“무슨 뜻이지?”
“하… 로우 걔처럼 성실하고 착한 놈도 없는데 왜 그렇게들 함부로 합니까? 폐하는 그렇다쳐도 경은 로우한테 좋은 어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참에 약속하는데 나도 로우한테 해가 되는 짓은 절대 안 할 겁니다.”
“그게 밀짚모자를 살리는 길이래도?”
“뭔 물음이 또 그래요?”
“밀짚모자와 로우가 바다에 빠졌다. 조로 넌 둘 중 하나만 구할 수 있다면 누굴 선택할 거냐?”
“진짜 유치하게 이럴 거요?”
“대답해라, 롤로노아. 너는 이미 밀짚모자를 구한다고 멋대로 뛰쳐나와 로우에게 해를 입혔다. 그런 네놈 약속을 내가 믿을 거라고 보나?”
“루피를 구하고 로우랑 같이 죽겠습니다! 됐습니까?”
조로가 언성을 높였지만 마음에 안 드는 답이었다. 그러나 로우라면 이 답에 만족할 것이다. 크로커다일은 알 수 있었다. 결국 신경전처럼 오가는 눈빛을 먼저 돌려버린 그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환자임을 감안해 맨 입으로 온 이는 시가 생각이 간절해졌다.
“지금도 밀짚모자를 사랑하나? 롤로노아.”
“……!!”
“아니면 로우를 사랑하게 된 거냐?”
“아니, 잠깐! 이런 얘기는 좀 그런데… 그리고 나보다는 로우를 더 신경쓰는 게 어때요? 걔도 진짜 좋아하는 사람 찾아야지. 걔는 발정기도 엄청나던데 매번 그렇게 둘 겁니까? 원체 순한 녀석이니까 마음에 드는 짝만 만나면 발정기도 무난할 텐데.”
내내 고압적인 자세로 임하던 크로커다일이 손을 들어보인 건 이때였다. 그는 황천에서 살아 돌아온 이를 앞에 두고 저울질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 또한 조로가 로우의 마음을 알고 이용했다 여겼으므로. 사랑하는 가족과 코라손을 잃은 아이는 또다시 마음을 주는 것에 벽을 세웠다. 소외되고 결여된 아이들을 모아 호위대를 만들기까지 보인 로우의 행보는 스스로 가족을 만든 도피와 일치하는 데가 있었다. 애정을 갈구함에 있어 또다시 잃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고. 하나 여기서 두 사람이 갈렸으니 도피는 필사적으로 제 사람을 곁에 두고 지킨다면 로우는 아예 특별한 존재를 만들지 않고자 한 거다. 이것만이 자신으로 인해 다른 누가 또 다칠 일 없는 방법이라면서. 코라손의 죽음은 어린 로우에게 유독 큰 상처를 남겼음이라. 한데 등 떠밀리듯 시작된 인연에 특별한 존재가 생긴 거였다. 이는 그 성격에 두번 다시 없을 존재감이다. 적어도 도피와 크로커다일은 이것을 직감했다. 그러니 크로커다일은 도피도 로우도 바쁜 이때 조로를 죽일지 말지를 가늠하러 온 거였다. 한데 대화가 지속될수록 느껴지던 위화감을 그는 드디어 알아챘다. 단지 알파의 발정기에 제 발로 걸어들어간 놈이 설마 지나가는 개도 알 일을 정말 모른다는 걸 납득하기 어려웠을 뿐.
“이런 멍청…….”
절로 나오던 말을 손으로 막은 크로커다일의 시선이 갈 곳을 잃었다. 부러 조로를 피한 눈동자가 정처없이 떨렸다. 마음에도 없는 녀석이 별궁을 찾았다면 그 지랄맞은 성격에 발정기까지 더해졌으니 목이 뽑히고도 남았으리라. 그런데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갔다면 죽으러 간 거나 다름없잖은가. 배포가 남다른 건지 바보천치인지 모를 녀석에 크로커다일은 평정심을 잃었다. 이렇게 되면 애당초 계획도 다 쓸모없어졌다.
‘어디부터 알려줘야 하지? 설마 저놈 형질인자가 뭔지도 모르는 건가?’
“뭡니까? 크로커다일 경. 할 말 있으면 하십쇼.”
태도가 돌변한 상대에 조로가 의문을 가질 때였다. 밖이 시끄럽다 싶더니 양문이 거칠게 열렸다. 나타난 건 젊은 왕으로 이 겨울에 땀이 흐를만큼 다급히 찾아온 인사는 속옷 바람이었다. 맨 몸에 팬티 한장뿐인 몰골의 그는 흉포하게 갈라진 복근과 결이 선명한 대퇴직근을 자랑했으니 병상에 있는 동안 아령 한번 잡아보지 못한 조로의 눈썹이 꿈틀했다.
“악어자식 너 어느틈에! 혹시 벌써 무슨 짓한 건 아니겠지?”
성큼성큼 들어온 도피가 조로 앞에 다가온 건 금방이었다. 입꼬리가 씰룩대는 얼굴은 드물게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사법섬을 빠져나오기 전, 크로커다일이 미스터 투를 불러 의식 없던 조로의 얼굴을 오른손으로 만지게 한 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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