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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4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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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

 

 

 

    동행인이 또 허튼 짓을 할까봐 신중한 건지 손을 잡은 건 안중에 없었던 건지 또는 그 사실조차 잊은 것인지, 한결같이 웨이드를 붙든 채로 차가 달렸다.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웨이드는 그가 받은 요청대로 입을 다물어주었다. 잡힌 손이 기분 나쁘지 않았기 때문도 있었다. 

    웨이드는 자신이 로건을 붙잡음으로써 그가 제 하우스메이트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뮤턴트의 기원 격에 가까운 남자는 그가 눈을 떴을 때 아무것도 남김 없이 고요하게 사라졌다. 어딜 그리 바삐 떠나려 했는 지 의류수거함도 안 받아줄 너덜거리는 노란색 수트 한 장이 없었다면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이 한 여름밤의 꿈처럼 녹아버린 솜사탕이 되어 사라진다 해도 놀랍지 않았다. 사라진 건 그 뿐이 아니었다. 로라 역시 소리소문 없이 떠나자 웨이드는 흐리멍텅해진 구름이 낀 머릿속으로 덜컥 집을 뛰쳐나왔다. 그는 불안함이란 단어를 서운함이라는 포장지로 감싸 본다. 작은 판도라의 상자를 들고 뛰쳐나온 웨이드에게 추적이라는 건 그가 가장 전문인 것 중 하나였고, 로건이 어디로 사라졌을지 예상이 가는 구석도 있어 그가 뒤를 따라나서는 건 쉬운 일이었다.

 

    한결같이 웨이드를 붙든 채로 로건이 유도로를 따라 하이웨이 바깥에 위치한 모텔로 차를 돌렸다. 네온사인이 번뜩이며 두 얼굴을 붉혔다. 보텔 주차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로건이 웨이드를 놓아준다. 

 

    한적한 주차장에서 한 손으로 여유롭게 핸들을 돌려가며 주차를 하고 나서야 다른 일을 하던 손이 자연스레 기어로 돌아가 레버를 잡아 당긴다. 서서히 느려진 엔진이 완전히 꺼진다. 

차키를 뽑아 손가락에 은색 고리를 건 로건이 뒷자석의 더플백을 챙기다 미동조차 없는 웨이드에게 묻는다. 

 

    “안 내릴 거야?”

 

    그가 본 웨이드는 황당한 표정이었다. 

 

    “나한테 말도 없이 떠나서 14시간쯤 운전해 여기까지 와서 간다는 게 꼴랑 이런 모텔이야? 미국 여행 하면 가지 말라는 장소 중 0순위인, 공포영화가 아닌 다른 장르의 영화도 사망하기 딱 좋은 설정을 던져주는 고속도로 옆 모텔에? 너랑? 나랑? 단 둘이서?”

 

    로건이 웨이드의 기복을 따라가주는 건 보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입을 열기 전까지만 해도 옆자리에서 얌전하더니 이상한 데서 심사가 뒤틀린 언사에 로건도 참아주진 않는다.

 

    “당장 죽을 걱정 1순위인 윌슨 씨. 0순위로 지옥에 보내주기 전에 당장 그 무거운 궁둥짝을 차에서 내리시지?”

    “너랑 나랑 모텔에 가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팬걸들에게 자꾸만 이상한 망상을 부추겨주는 꼴이 된다고.”

 

    웨이드의 불평을 귓등으로도 안 들은 로건은 먼저 차에서 내린다. 마지못해 따라내린 웨이드가 여전히 구시렁거린다. 라이터를 찾아 주머니를 뒤지던 로건이 그를 부른다. 

 

    “이봐.” 마뜩찮은 기분을 숨기지 않으며 웨이드가 돌아본다.

 

    “먼저 가서 방이나 잡아놔.”

 

    던진 지갑을 웨이드가 낚아챘다. 연이어 커다란 더플백도 날라온다. 

 

    “싱글 베드룸을 잡는 수가 있어.”

    “방은 두 개를 잡는 게 나을 걸.”

 

    아까 남겨둔 시가를 그 새 입술에 끼운 로건이 지적했다. 

 

    “난 혼자서 못 자.”

 

    이젠 헛소리에 익숙해진 로건이 등을 돌리며 손사레 쳤다. 

 

 

 

 

 

 

    “언제는 싱글베드룸을 잡겠다며?”

 

     좁아터진 공간에 간신히 싱글베드를 두 개 끼워넣은 방에 들어섬과 동시에 로건이 웨이드의 성질을 긁는다. 

 

    “그리고 방은 따로 잡으라고 했잖냐.”

 

    데님은 벌써 어디로 벗어 던졌는 지 낮에 로건이 빌려준 흰색 티셔츠에 요란한 무늬가 그려진 트렁크만 덜렁 입은 웨이드가 욕실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그는 모텔 프론트에 있던 자판기에서 산 듯 한 일회용 칫솔을 입에 문 채였다. 작은 방은 퀘퀘한 곰팡이 냄새가 나고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운 커튼이 창문에 달려있었지만 아주 너저분하지도 않았다.

     로건은 차에서 빼온 맥주 번들을 냉장고에 넣었다. 제 기능을 하긴 하는 지 의문이 들 정도로 미약하게 차가운 기운을 뿜는 냉장고와 뒤에서 뭐라 끊임없이 웅얼대는 웨이드를 무시하며 로건은 문을 닫았다. 한창 트렁크 안에서 뜨거워진 것들은 금세 시원해지지 못할 게 분명했다. 

 

    세면대에서 물소리가 들리고 한 차례 가글을 한 웨이드가 재차 화장실 밖으로 얼굴을 빼꼼 내놓고 말한다. 

 

    “나는 혼자서 못 잔다니까. 내가 왜 이 나이가 먹도록 알과 함께 살았다고 생각해? 게다가 다른 방에서 혼자 자다가 호러무비 클리셰에 당하느니 공포의 벌꿀오소리 옆에서 자는 편이 내 입장에선 더 안전하지 않겠어?”

    “죽여도 안 죽는 놈이 죽을까봐 더럽게 겁이 많네.”

    “죽는 게 무서운 거랑 귀신이나 전기톱 살인마를 마주칠까봐 겁나는 건 전혀 다른 거지. 자, 그래서 봐봐, 자기야, 이제 우리 그거 할래?”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침대에 가서 눕기나 해.”

 

    로건은 화장실 문을 덩치로 막은 웨이드를 옆으로 밀어내며 지나간다. 키들거리는 웃음을 달고 순순히 밖으로 밀려나간 웨이드는 상대의 앞으로 문을 닫아준다. 

 

 

 

 

 

 

    로건이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웨이드는 이미 제 마음에 드는 침대를 하나 골라잡아 드러누워 있었다. 그는 언제 꺼내서 가져갔는 지 모를 미지근한 맥주 역시 벌써 홀짝이며 멍하니 천장을 올려봤다. 

 

    “그거 알아? 중국에선 맥주를 미지근하게 마신대. 나도 전생에는 거기에 다녀온 것 같아서 이렇게 맥주를 먹어도 별로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이런 빈대가 나올 것 같은 침대에서 자도 좀 간지럽고 말테니까 뭐든 괜찮겠지.”

    “그 두 가지가 무슨 연관성이 있는 지 전혀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아.”

 

    목덜미에 젖은 수건을 걸친 로건이 머리를 털며 심드렁하게 웨이드의 말을 넘긴다. 그 또한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캔 꺼낸다. 한 박스를 다 쏟아부어도 모자를 판에 웨이드가 한 캔을 빼내간 자리가 덩그러니 비어있다. 차라리 리큐르를 살 걸 그랬나 인상을 찌푸린 로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상한대로 냉장고는 제 기능에 불충실했고 안에서 표면만 차가워진 캔은 액체가 흔들릴 때마다 조금씩 더 미지근해진다. 

    젖은 수건을 옷걸이에 대강 걸어둔 로건도 침대에 앉았다. 매트리스가 삭은 침대가 견디기 버거운 무게에 푹 주저앉는다. 

 

    “있잖아 네 머리는 드라이를 안 하고 가만히 내버려둬도 다 마를 때쯤이 되면 알아서 고양이 귀처럼 뿅하고 솟는 거야? 잘생긴 사람은 별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잘생김의 요소가 따라온다 이건가?”

 

    천장을 향했던 웨이드가 슬그머니 로건 쪽으로 돌아 눕는다. 그는 은근한 눈길을 보내며 손가락을 걸어 슬쩍 목덜미를 내린다. 

 

    “그래서 정말로 그거 할 생각은 없어? 아까 시키는대로 얌전히 침대에 누워있었으니까 한 번 마음대로 올라 타 보라고.”

 

    하는 말과 달리 불안하게 내내 다리를 떠는 웨이드를 가만히 지켜본 로건이 진절머리를 냈다. “역겹게 날 보면서 묻지 마.” 그는 더플백에서 새 양말을 찾으며 불쾌한 티를 숨기지 않았다. 

 

    “게다가 정말로 하자고 하면 할 수나 있고?”

    “오, 그거 되게 도발적인 발언이다 땅콩아. 지금 수위가 확 올라가는 게 느껴졌어. 너야말로 남자랑 할 수가 있기나 해?”

    “일단 너랑 나랑 그럴 이유가 있냐?”

 

    로건이 덤덤하게 웨이드를 응시한다. 때로는 이 고지식한 뮤턴트의 반응이 아주 적절한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웨이드가 반문할 말을 찾는 동안 로건이 느릿하게 눈을 깔고 찾아낸 양말을 신는다. 

 

    “조용한 건 불편한 게 아니야 웨이드. 굳이 내내 떠벌거릴 필요가 없다고.”

 

    웨이드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쩐지 양말을 다시 신은 로건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인다. 웨이드는 최대한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입을 연다. 

 

    “땅콩 네가 뭘 상상한 건지 몰라도 나는 그저 진실게임이나 하자는 거였어. 그나저나 그 양말은 왜 다시 신는 거야? 무슨 그런 이상한 페티쉬가 다 있담?”

    “이건 페티쉬가 아니라 습관이라고 하는 거야.”

 

    웨이드가 멋쩍게 티셔츠에 걸어둔 손가락을 내렸다. 그가 다시 텅 빈 캔을 양손으로 잡아 뭉툭한 손톱 끝을 이용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달그락거린다. 

 

    “시시하네.” 결국 웨이드의 손 안에서 빈 캔이 와자작 짜그라든다. 

    “시시해.” 제 기분을 한 번 더 강조한 그가 거의 납작하게 만들어진 알루미늄을 던진다. 은색이 시원하게 호선을 그리고 날아가 쓰레기통에 쳐박힌다. “3점.” 로건은 고개를 젓지도 않고 그가 하는 시늉을 모두 지켜본다.

 

    슬며시 시선을 피하기 위해 웨이드는 새 맥주캔을 가지러 일어나며 그에게서 등을 돌린다. 어두운 조명 아래 얼룩덜룩한 뒷통수가 반짝였다. 

 

    “왜 말도 없이 떠난 거야?”

    “글쎄.”

 

    로건이 의뭉스럽게 답한다. 

 

    “게다가 거기에 가려고 하는 거 아냐? 같이 가자고 한 번쯤 물어볼 수도 있었잖아.”

 

    이어지는 질문에 로건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지나간 일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게 깜찍이의 신조라면 그렇게 북쪽까지 갈 필요도 없는 거 아냐?”

    “굳이 말하고 갈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했으니까.”

 

    코끝에 다시 곰팡이의 눅눅한 내음이 스친다. 로건은 그렇게 웨이드를 묵과한다. 

    덕분에 웨이드는 로건이 계속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그가 더 채근한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뮤턴트가 아니란 것도 알기에 한숨을 내쉰 웨이드는 드디어 냉장고에서 벗어나 로건에게도 새 맥주캔을 건넨다. 

    처음 만났던 날 값싼 위스키 한 병을 비우던 것처럼 새로 받아든 한 캔을 단숨에 들이킨 로건이 잘 기세로 몸을 눕히자 스프링이 끼그덕거린다. 그가 더는 받아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몸을 돌리자 말상대를 잃은 입이 드디어 영업을 종료한다. 

 

    밖으로는 지나가는 차도 없다. 로건은 몸을 돌린 채 커튼 밖으로 한 자리에 못 박힌 가로등만 노려보다 눈을 감았다. 애써 잠을 청하는 귓가에 웨이드가 캔을 따는 소리가 들렸다. 한숨에선 술 냄새가 풍겼다. 그리고 웨이드가 방 안을 돌아다니는 발소리가 차박였고 전등 스위치가 달칵 내려간다. 그는 등 뒤로 자리한 웨이드의 존재를 의식하며 이 밤 역시 무사히 지나길 간절히 바란다. 아무리 그가 뭔가를 해냈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을 품어온 상처는 쉽사리 소멸되지 않는다. 땅에 붙이기 어려운 발바닥이 화닥거렸다. 
 

    그 새를 참지 못하고 웨이드는 망가진 라디오처럼 다시 중얼거렸다. 양을 세는 목소리는 웨이드 그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 보였지만 로건에게는 이상한 위안이 된다. 로건은 눈을 떴다. 그리고 핏발 선 눈이 스스로 감기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꿈으로 간다 할 지라도, 더욱 끔찍한 것은 그의 꿈이 깊었단 사실이었다. 

 

    잠은 얕았지만 헤어나오지 못하는 절망의 묘지는 멀다. 

 

    생전 페루에 가본 적도 없었건만 어떤 무의식이 만들어낸 건지 모를 나스카 문명 풍의 거대한 비석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정렬되어 또다시 그를 압도한다. 

    로건이 간과한 것은 아무리 그가 똥통에서 건져 올려졌을 지언정 이 악몽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단 거였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단 한 순간이라도 이 사실을 얕잡아 본 적이 있었나. 절망은 제 스스로 사그라들 때까지 불타올라야 사라지는 법이라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수억 번을 되돌리고 싶었지만 그의 바람은 여태껏 이뤄진 적이 없었다. 모든 슬픔은 적법한 시간을 거쳐 제멋대로 산화되어야만 그를 떠났다. 그래. 안다고. 로건이 입 밖으로 뱉지 못할 말을 짓씹었다. 광야에 세워진 카타콤에 울리는 부름은 절대로 멈추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희안하게도 그는 앵무새같이 입을 절대 다물지 않던 웨이드가 떠오른다. 아직도 양을 세는 건지 조금은 가늘고 긁히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네가 틀렸어. 누운 자리에서 그대로 비난을 뭉게고 있다고 했지만 그게 아주 사실은 아녔다. 로건을 비난하던 대상들은 그가 상실한 당사자들이 아니었다. 그를 기피하는 살아있는 존재들도 정말로 그에게 상처를 줄 순 없었다. 언제가 그를 가장 괴롭게 하는 건 그 자신이라는 존재였다. 로건도 안다. 자신이 사랑하고 사랑했던 존재들이 그를 이런 식으로 미워하고 겁박하지 않을 거란 걸 잘 안다. 그럼에도 이 허공을 맴도는 메아리들이 그를 채찍질 하는 건 이게 그가 스스로에게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속죄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로건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끔찍한 두통이 그의 뇌를 손아귀에 넣고 쥐어짠다. 
 

    그리고, 얕게 가슴팍을 달싹이던 로건이 불시에 뒤를 돌아본다. 
 

    도망친 뒤로 단 한 번도 돌아본 적 없는 생지옥을 마주해야겠다는 결심이 본능적으로 차오른다. 그들의 목소리를 똑바로 들어야만 했다. 

 

    그러자.
 

    놀라울 정도로 뜨거운 햇살이 그를 부른다. 그가 찾아낸 샛노란 해가 그를 찾아온다. 로건이 뒤를 도는 순간 어두운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 밝아진 적 없던 카타콤의 끝에서, 저 멀리서부터 비추는 샛노란 빛이 벽 높은 파도처럼 광활한 물결이 되어 억새처럼 마냥 높게 자란 풀들을 덥치며 그에게 날아온다. 

 

    불새같이 세모난 하얀 깃발을 높이 단 요트가 그에게 꽂히는 광원이 되어 해를 찾아 날아온다. 

 

    쏴아아아 하고 황금빛으로 변한 곡물들이 길게 늘어지며 바람을 따라 눕는다. 

 

    그것들은 손톱 자국이 패이도록 세게 쥔 주먹을 부드러이 두드린다. 로건은 끔찍하게 창백해졌을 제 뺨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고 느낀다. 그런데도 자신의 의지를 배반하고 돌아가고 싶어지던 본심처럼, 불현듯 순진하게 펴져 내밀어진 손 안으로 두텁게 낱알이 굵어진 곡식들이 휘어진다. 이것은 보리일 수도 밀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의 손짓은 그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는 동작이다. 그의 무의식이 원한 바람이다. 

 

    로건

 

    눈가가 시큰해지고 따스한 전율이 그를 감싸며 피부 안으로 개미가 돌아다니는 듯 했다. 숨이 턱하니 막혀온다. 카산드라 노바가 뇌를 헤집어 억지로 그를 정지시키며 기만하던 고요와 확연히 달랐다. 자글거리는 소름이 척추를 따라 내달리고 로건 역시 내달렸다. 어느 순간부터 달려나간 지 모를 다리가 제 멋대로 앞으로 뛰쳐나간다. 그는 앞이자 뒤로 내달린다. 

 

    우습게도 영글어가는 밀과 보리밭 사이로 흰 양들이 군데군데 풀을 뜯는다. 너무 오래 살아서 정말 미쳐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 사이로 검은 양 한 마리가 휙 지나쳤다. 하지만 그건 로건의 주의에서 금방 사라진다. 

 

    얼마나 뛰었을까 도저히 더는 달릴 수 없을 정도로 숨이 차올랐을 때 소실점 끝으로 향하던 발이 멈추었다. 곡물밭 사이로 갑자기 나타난 황무지는 틈 없이 재단된 투박한 돌바닥 길이다. 거기에서 그를 향하던 목소리들이 잔류한다. 

    그가 알던 모든 목소리들이 공명하여 그를 부른다. 로건은 본능적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타일처럼 박힌 돌 옆의 틈을 긁었다. 손톱 끝에서 피가 나도 통증이 앞서지 않는다. 로건은 어떻게든 이 땅을 엎어 봐야겠다는 일념으로 클로를 꺼내 무식하게 바닥의 돌이 깨질 수 있도록 파헤친다. 

    정말 오소리가 되기로 결심이라도 한 거야? 
또 머저리같이 실없는 웨이드의 목소리가 들린다. 닥쳐 웨이드. 이건 네 문제가 아니야. 여상스레 짜증을 담아 답한 로건은 더욱 다급히 묘를 파낸다. 돌에서 튕긴 클로가 강제로 몸 안에 파고들어 고통이 된다. 허나 로건은 멈출 수가 없다. 

마침내 그가 돌 하나를 드러낼 수 있을 정도로 땅을 파내었을 땐 삽시간에 주위가 고요해진다. 로건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걸 들춰본다. 팔꿈치에 맺힌 핏물이 방울이 되어 떨어지고 피투성이가 된 주먹과 팔로 로건은 천천히 돌을 끄집어냈다. 

 

    하지만 그 밑으로도 더한 깊은 어둠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를 향한 안온한 목소리가 울린다. 

 

    로건.

 

    로건은 진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구덩이 안으로 몸을 들이밀어 넣었다. 손을 헤집으며 뻗어봐도 닿는 게 없다. 제발. 제발 날 두고 가지 마. 막힌 음성은 부글거리며 목구멍에 역류해 기도를 압착한다. 결국 들어갈 수 있을만큼 들어갔던 몸이 중심을 잃고 쏟아져 구덩이 아래로 떨어진다. 

 

    로̸건̸ ̸이제̸는̸ ̸거̸기̸ ̸있̸어̸야̸ ̸해̸.̸

      ̸ ̸ ̸돌̸아̸오̸지̸ ̸마̸.̸ ̸/—

 

 

 

 

 

 

    “로건!”

 

    추락의 끝에서 로건은 다급히 무엇이던 붙잡으려 애쓰다 허공에 주멍을 날렸다. 그는 허공에서 무용한 몸부림을 친다. 이번에도 무엇이든 부수고 찢을 줄 알았건만 우습게도 그는 웨이드의 가슴에 안착한다. 웨이드가 잡아 방향을 바꾼 주먹의 날이 허공만 찔렀다. 

    자신을 붙든 게 웨이드라는 걸 알아차린 로건이 허탈한 한숨을 내쉬며 헐떡이다가 허무하게 뒤로 드러누웠다. 
 

    “젠장… 씨발.” 모든 걸 다 잃었단 걸 새삼 되새긴 후인데 모순되게도 차갑게 식어가는 마음은 평온해진다. 아직 흐르지는 않았지만 축축해진 눈가가 꼴사나웠다. 웨이드는 질문 없이 조용하게 그를 지켜보았다. 그런데도 어디에라도 토로해야 하는 입이 그처럼 제멋대로 나불거렸다. 

 

    “…- 사라졌어.”

    

    로건은 시트를 움켜쥐며 말했다. 

    그렇게 말을 하고 그는 자기가 내뱉은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차린다. 시린 슬픔이 그의 뇌에 꽂혔다.

 

    “진, 의 목소리가… 사라져…….”

 

    웨이드는 그를 물끄러미 기다린다. 로건은 무거운 팔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이제 들리지가 않아.”

    로건이 괴롭게 중얼거렸다.

 

    그를 내리 괴롭혔던 따뜻한 목소리가 사라졌다. 단 한 번을 똑바로 직시했을 뿐인데 목소리가 그의 마음에서 지워졌다. 어떻게 단 한 순간에. 아무리 떠올려 보아도 어떤 식으로 진이 그를 불렀는지,그에게 말을 걸었는지, 그 음조가 어땠는지, 억양이 어땠는지 모든 게 떠오르지 않는다. 이렇게 사라진단 말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로건이 눈을 감았다. 다른 종류의 고통이 찾아왔음에도 이상하게 눈꺼풀은 그 어느 때보다 안락하게 닫힌다. 

 

    웨이드는 여전히 그의 옆에 앉아 로건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불편한 정적이 흐르고 로건이 변명처럼 말한다. 

    

    “그러니까 다른 방을 잡으라고 했잖아.”

 

    그러자 웨이드가 그의 옆에 풀썩 뭄을 뉘였다. 두 사람의 체구로는 한 명이 눕기에도 힘든 침대가 비좁게 삐그덕거렸다. 

 

    “그러니까 같이 자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해줬잖아.”

 

    아무것도 못 본 척 눈감아 주겠다는 것처럼 웨이드가 천연덕스럽게 로건의 가슴 위로 팔을 얹었다. 

 

    “좁으니까 저리 옆으로 좀 가봐.”

    “… 너야말로 네 침대로 돌아가라.”

 

    로건은 짜증을 내면서도 몸을 옆으로 움직여 공간을 만들어준다. 그가 내어준 자리로 파고들며 웨이드가 은근슬쩍 얹어둔 팔을 안는 것처럼 끌어당긴다. 안는 것도 아닌 것도 아닌 애매한 자세를 취하며 웨이드가 몸을 웅크렸다. 로건은 포기하고 이 어설픈 포옹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별 수 없이 굴러들어온 웨이드의 머리통이 팔뚝에 닿고 그에게 바싹 붙은 입술에서 나온 자장가가 가슴 언저리에서 살랑인다. 로건은 창밖 너머로 여전히 한 자리에 못박힌 가로등 빛을 바라봤다. 가볍게 긁히는 목소리가 가을 바람처럼 분다. 그저 흔한 노래였는데도 이번에도 웨이드를 저지하지 못한 로건이 그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여전히 발은 땅에서 떨어졌고 주저앉은 침대는 바다 위에서 흔들리는 거대한 요람처럼 출렁였다. 하지만 더는 허우적거리지 않는 발을 양말 속에 감추고 로건은 잠을 청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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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건덷풀 풀버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