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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3 20:21
소설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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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Q. [이달의 광부] 취재차 나왔습니다. D-16에 관해서 한 말씀 해주세요.

 

"D-16? 이달의 광부는 그 녀석으로 뽑혔나보지? 인터뷰 딸 때 팩스 것도 같이 따봐. 꽤 재밌는 내용이 나올 것 같은데."
 

"'이달의 광부'? 하하! 나라면 차라리 오라이온 팩스를 뽑겠어. 그 녀석 또 강등당했다던데, 온 구역을 통틀어 최단기록이라고!"
 

"전에 그가 넘어지는 컨테이너를 받쳐준 일이 있었는데,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 D-16과 오라이온 팩스가 아니었더라면 짧은 시간 안에 산더미 같은 컨테이너들을 다 치우지 못했을 거야."
 

"그게 누구더라? 아, 리차징 베드에 대문짝만하게 메가트로너스 스티커를 붙여놓은 녀석? 그 유명한 오라이온 팩스와 자석처럼 붙어다니는 메크가 그 녀석이라던가?"
 

"D-16이라…. 생각나는 게 하나 있긴 해. 같은 팀에 있을 적에 함께 일해본 적이 있었는데, 작업 내내 무서울 정도로 집중을 하더군. 하여간 대단해. 성실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놈이야. 팩스 같은 말썽꾸러기랑 친하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지."
 

"나한테 묻지 말고 오라이온에게 물어보지 그래? 그래, 빨갛고 파란 기체를 가진 메크. D-16에 관한 건 그가 가장 잘 알 거야. 

 

음? D-16에 대해서 알아보고 다니는데 어째 오라이온 팩스의 이름이 계속 언급된다고? 그야 당연하지. 둘은 유별나게 친한 사이니까. 시종일관 붙어다니니 다들 두 녀석을 따로 떨어뜨려 생각하지 못하는 거야. 

 

…뭐? 팩스를 한참 찾아다녔지만 안 보였다고? 이런. 이봐, 재즈! 팩스 녀석 이번엔 또 어디 갔대?"



 

2. 그렇게 해야만 속이 시원하지, 너는!

 

D-16은 번잡스럽게 옥상을 서성거렸다. 그의 친구 오라이온이 짐작하지도 못할 어딘가를 나돌아다니는 일이야 흔했지만, 그렇게 사라지고 나서 밤이 깊어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동료 광부들이 모두 리차징 베드에 들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시각이었다.
 

브레인 모듈에 줄을 지어 떠오르는 불길한 상상에는 한계가 없었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일을 낸 건지도 모르지. 진작 경관들에게 붙잡혀 어디 구치소에라도 던져진 거라면? 젠장, 내가 가진 걸로 그 녀석 보석금을 내줄 수 있으려나? 이번엔 또 어떤 무모한 짓거리를 벌이다가 사달이 난 거냐고! D-16은 다시 방향을 틀어 걸었다가, 자신이 서른 번도 넘게 같은 동선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걸음을 멈췄다. 
 

차라리 그를 따라나섰어야 했다. 같이 있었더라면 어떤 식으로든 그가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도울 수 있었을 터다. 추가 근무 일정 탓에 오라이온이 어디로 향하는지 제대로 신경을 기울이지 못한 것이 이런 결과로 되돌아왔다. 수십 번도 넘게 통신창을 확인했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확인해봤지만, 몇 메가사이클 전에 [상황이 꼬여서 조금 늦어질 것 같다]라는 메세지가 도착한 것이 전부였다. D-16은 골반에 손을 얹은 채 남은 손으로 이마를 감싸쥐었다. 환장하겠군, 하다못해 바깥에서 그 녀석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게 가능했더라면….
 

"디?"
 

익숙한 성음이 들리자 D-16은 넥케이블에서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있었다. 오라이온이. 낮보다 도색이 벗겨지고 지독한 기름때를 뒤집어 쓴 채로. 광산에서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한층 더 후줄근한 몰골에 기름 찌든 냄새까지 풀풀 풍기고 있었지만 분명히 그가 아는 오라이온 팩스였다. 그 순간 디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 속력으로 오라이온을 향해 걸어갔다. 오라이온의 옵틱이 휘둥그레지는 것과 동시에 그의 손가락이 맹렬하게 상대의 가슴팍을 찔렀다.
 

"너!" D-16의 언성이 높아졌다. 서로의 외장갑이 부딪칠 정도로 가까워질 즈음 그의 삿대질은 거의 오라이온의 상체에 뚫린 구멍을 쑤실 정도로 격렬해져 있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뭘 한다고 이제야 돌아오는 거야!? 난 네가 어디 잡혀들어간 줄 알고, 이제부터 어떡해야 하나 엄청나게 고민하고 있었단 말이다!"
 

"워, 워, 디. 진정해, 진정." 오라이온이 난감한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마치 D-16의 서슬퍼런 손가락질이 제 스파크까지 쑤셔들어올까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방어적으로 양손을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늦게 돌아온 건 미안해. 하지만 난 당연히 네가 먼저 재충전에 들어갔을 줄 알았어.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야?"
 

"넌 그걸 질문이라고 하고 앉아있는 거냐." D-16이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렸다. "재충전에 들어가려 해도 맞은 편이 비어있는 게 빤히 보이는데 너라면 편하게 발 뻗고 잠들 수 있었겠어? 하물며 그 시한폭탄 같은 자식한테서 정황을 파악할 만한 아무런 연락도 없는 마당에?"
 

오라이온의 옵틱이 조심스럽게 천장을 굴렀다. 짧은 상상을 마친 그가 대답했다. "하기야, 그렇네. 나라면 진작 널 찾으러 도심으로 뛰어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 참 대단하시네. 그래, 난 용감무쌍한 오라이온 팩스 님과는 달라서 규율을 어길 엄두도 못 내고 이딴 옥상에나 처박혀 서성거리고 있었다!" 
 

D-16의 안광이 한층 더 형형해졌다. 그는 오라이온을 기겁하게 만든 손가락질을 멈추는 대신, 도심 쪽으로 사나운 손짓을 곁들이며 노성을 이어갔다. "너처럼 물불 안 가리고 저 야경으로 뛰어들었다가 들켜버리면 몇 계급이나 강등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난 이 모든 걸 가벼운 일처럼 여기는 너랑은 다르거든!" 
 

끝에 가서는 고함을 내지르는 격이었다. "넌 항상 그딴 식이야, 언제나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지껄이고! 남들이야 네가 저지른 행동에 무슨 생각을 품는지는 전혀 상관하지 않지!"
 

"뭐? 잠깐, 디. 비꼬려는 의도가 아니었어. 그저 나라면 그렇게 행동했을 거라는 소리야. 그런 식으로 곡해해서 듣지 말아줘."
 

D-16은 거칠어진 호흡을 간신히 다스리며 오라이온을 바라보았다. 친우의 얼굴에는 진심이 담긴 미안함과 죄책감, 안타까움이 잔뜩 혼재되어 떠올라 있었다. 생채기와 묵은 기름으로 엉망이 되어있는 외장갑 탓에 그의 모습은 평상시보다 훨씬 풀이 죽은 것처럼 보였다.
 

"네가 나 때문에 재충전도 못하고 있는 줄 알았더라면 어떻게든 빨리 돌아오려고 했을 거야. 정말 미안해."
 

D-16은 옵틱을 가늘게 좁혔다. 한참 후에 그는 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뱉어냈다. D-16은 미간을 붙잡은 채로 말했다. "…그냥 다음번에는 연락이라도 제대로 넣어라. 뭘 하고 다니는지는 알아야 내가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판단이 설 거 아냐."
 

"문제가 생기면 일단은 될 수 있는 한 내 선에서 처리해보려 하지만… 알겠어, 약속할게."
 

"늘 대답은 청산유수다, 자식아."
 

그 다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오라이온이 울적한 표정을 지워내고 입술 가득 미소를 지어 보인 것이다. 잠깐 동안 D-16이 할 말을 잃을 정도로 환한 미소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걱정해줬다니 기쁜데. 이 시각에 네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몰랐거든. 옥상에 올라왔다가 네 뒷모습 보고 엄청 놀랐지만, 그만큼 반갑기도 했어."
 

D-16은 피식 헛웃음을 뱉었다. 단시간 안에 상대방의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것은 오라이온이 가진 뛰어난 재능 중에 하나였다. "네가 할 말 못할 말 구분 못하는 얼간이라는 건 전부터 알았어야 하는 건데."
 

"생각해보니 반대편 리차징 베드가 비어있든 말든 잠들어있는 걸 봤더라면 조금은 서운했을지도 모르겠네."
 

"한 대 맞고 싶다는 말을 돌려 하는 거지? 좋아, 요즘 주먹 쓸 일이 없어서 근질근질하던 참이었거든."
 

슬그머니 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났다. 오라이온은 짐짓 근엄하게 답했다. "무슨 말씀을. 네가 주먹질로 광산을 부수는 걸 가장 가까이서 본 게 나인데."
 

"됐다, 너한테 바랄 걸 바라야지." 
 

말은 흠씬 패줄 것처럼 해놨지만 사실은 더 화낼 기력도 없었다. D-16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출입문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눈을 붙이고 있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오전 근무가 시작될 터였다. 그래도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예 날밤을 새우는 것보다 낫다. 재충전을 건너뛰면 신체의 기능이 극도로 저하되면서 업무 효율을 처참하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언제 에너존이 폭발할지 모르는 광산에서 피로한 몸을 이끌며 일하는 것은 지뢰 위에 발을 올려놓고 서 있는 것과 매한가지로 위험한 일이다. "재충전이나 하러 가자고. 이러다 해 뜨는 거 구경하게 생겼어."
 

오라이온은 군말 없이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러나 그는 출입문까지 걸어가는 내내 제 몸 구석구석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D-16이 출입문을 열어젖히자 그는 이윽고 망설임이 묻어나는 투로 말했다. "음, 일단 나는 몸을 좀 닦고 자러 가야겠는걸. 너 먼저 쉬어, 친구. 내 걱정은 말고."
 

"그러고 보니 대체 뭘하느라 그렇게까지 더러워진 거야? 폐기물 처리장에 섞여 있으면 자동 분류기가 용광로로 밀어버리고도 남을 꼴이야."
 

"그 말은 좀 너무하지 않아? 그 정도는 아니거든?" 일부러 상처받은 투로 반문하는 것이 분명했다. D-16이 눈썹을 들어올리자, 오라이온은 어깨를 크게 으쓱하고 뒷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큰일이 있었던 건 아니야. 저녁에 아이아콘 기록 보관소의 경비를 서는 자들의 동선을 살피고 왔거든."
 

"아이아콘 기록 보관소를?" D-16이 무심코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거긴 ID 카드가 있어야 입장할 수 있는 것으로 아는데. 우리 같은 광부들이 출입할 수도 없는 곳을 왜?"
 

"그러니까 경비들을 살피고 왔지."
 

이제야 돌아가는 꼴을 알겠군. D-16은 체념과 웃음이 반씩 섞인 소리를 내뱉었다. 진짜 새 친구 알아봐야 하나. "기가 막히네. 이번에는 거길 들어가보겠다고? 넌 하루라도 기상천외한 범죄를 꿈꾸지 않으면 엉덩이에 가시라도 돋치나 보다?"
 

열어젖힌 채로 멈춰있는 출입문을 지탱하며 오라이온이 대꾸했다. "어쩔 수 없잖아. 리더십의 매트릭스에 관련된 자료는 거기에 모여있으니 말이지."
 

리더십의 매트릭스. 또 그 소리다. D-16은 다음 내용을 듣지 않고도 오라이온이 할 말을 정확히 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리더십의 매트릭스만 있으면 광부들이 더는 채굴 작업에 매달리지 않아도 돼. 노동을 위해 투자했던 시간을 진정 원하는 일을 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거야. 마침내 우리의 잠재력을 펼칠 수 있게 되는 거라고.' 아름다운 이상이고, 헛된 희망이다. D-16은 실소를 머금었다. 그 위대한 센티넬 프라임도 해내지 못하는 일에 왜 변신 코그도 없는 그의 친구가 매달리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경비를 살피려고 어디 쓰레기통에라도 갇혀있다 왔나봐?"
 

"비슷해. 보관소와 거리를 두고 떨어진 곳에서 관찰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순찰 중이던 경찰 한 명이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더라고." 오라이온은 실없이 웃음지었다. "얼른 근처에 몸을 숨겼는데 하필이면 거기가 공용 기름 처리장이었지 뭐야. 미끄러워서 벽을 짚고 나오지도 못하고, 하마터면 네 말대로 폐기물 처리장까지 직행할 뻔했다니까."
 

"제발 거기에 나도 같이 입수해달라는 부탁은 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네 꼴을 보면 얼마나 지독한 곳이었는지 알 것 같거든."
 

"알아, 안다고. 당연히 그런 부탁은 안 할 거야." 오라이온은 기름 냄새가 흥건한 손을 대충 휘두르며 응수했다. 그는 희망이 부푼 옵틱을 한 채로 설명했다. "하지만 며칠간 계속 지켜본 덕분에 알게 된 것들이 상당해. 분명한 건, 낮보다 밤의 경비가 더 삼엄해진다는 사실이지. 다음번에 기록 보관소에 접근할 기회가 생긴다면 낮에 시도해 볼 예정이야. 보안 장치의 구조도 대강 파악해놨으니, 소리소문없이 들어갔다 나오기만 하면 되는 거지. 간단하잖아?"
 

D-16은 해줄 말을 고르며 물끄러미 오라이온을 바라보았다. 이 경우, 엉뚱하고 무모하며 때로는 브레인 모듈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궁금할 지경인 친구의 행동을 막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저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청사진을 아무리 비웃고 지적하더라도, 오라이온이라면 기필코 계획한 바를 추진하고야 말 것이다. 그가 저지르는 사건은 늘 그런 식으로 일어났다. 그것들은 오라이온 팩스가 지닌 상상력과 실행력, 낙관주의와 대담성과 고집의 합작품인 셈이었다.
 

만류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니 남은 것은 팔짱을 낀 채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는 일 뿐이다. 그는 이 기록 보관소 건으로 오라이온이 대체 어떤 구조 신호를 보내게 될까 상상해보면서 옵틱을 굴려 보였다. 그는 주먹으로 오라이온의 헤드 기어를 가볍게 치고는 예언했다.
 

"내가 단언하는데, 아마 소리도 소문도 충분히 날 것 같다."
 

 

그날 오라이온은 몇 번이고 거부했지만 D-16은 아랑곳하지 않고 세척기를 들이밀었다. "너 혼자 퍽이나 잘 닦아내겠다."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물론 그는 보편적인 도덕 관념을 갖춘 메크답게 저녁 내내 쌓아놨던 불만을 상대에게 되갚아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라이온의 전신을 '사려 깊게' 닦아주는 방식은 그런 목적에 정확히 부합하는 행위였다.
 

디! 감정이 담겨있잖아, 감정이! 오라이온이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뒤틀어대는 동안, D-16은 간만에 유쾌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있는 힘껏 오라이온의 외장갑에 붙어있는 기름때를 긁어냈다. 어라, 피곤해서 청각 장치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네. 이것 참 별일이군.

 

 

 

3. 변신 코그도 없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


광부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몰렸다. 개중에는 더러 입을 틀어막는 이들도 있었다. 캐낸 광물을 운반하던 D-16은 모두가 시선을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청각 장치의 기능을 확장시키자, 특정한 소음이 먼 곳에서부터 희미하게 잡혔다. 격렬한 구타음이었다.

"이 빌어먹을 광부놈이!" 이레 전 새로 온 감독관의 목소리였다. 누군가를 반복적으로 걷어차는 소리와 함께였다. "감히, 어제, 새 칠을, 한, 내 몸에, 흠집을 만들어!"

D-16은 소리의 근원지로 달려갔다. 두려움 때문에 숨 쉬는 것마저 멈춘 채로, 수많은 광부들이 동료가 무자비하게 폭행당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었다. D-16은 감독관의 발길질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푸른 동체의 광부 봇을 보았다. 그는 구타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도록 작은 덩치를 한계까지 옹송그리고 있었다. 심한 충격과 고통 때문에 옵틱이 이따금 깜빡거리는 것이 보였다.

"개자식." D-16의 곁에 있던 메크가 분노에 찬 혼잣말을 뱉어냈다. "부주의하게 다니다가 부딪친 건 자신인 주제에, 저 녀석 탓을 하고 있어!"

D-16은 빠르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다른 감독관들은 무심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난이라며 고개를 내젓는 것이 다거나, 심지어는 다시 자신이 감시할 구역으로 눈을 돌리는 이들도 있었다. 분명 코그가 없는 광부 메크가 감독관에게 폭행당하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숨이 끊어질 때까지 맞는 것은 명백히 체벌의 수위를 벗어난 일이었다. 더욱이 저 광부의 죄목은 실수로 감독관의 도색을 벗겨낸 것 뿐이었다.

어떡해, 저러다가 정말 죽겠어. 공포에 사로잡힌 속삭임이 광부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D-16은 군중 사이를 파고들어 더욱 앞으로 나아갔다. 앞줄로 나아갈수록 구타당하는 광부의 신음소리가 청각 장치에 더욱 선명하게 잡혔다. 그는 갈라진 목소리를 질금질금 뱉어내며 가까스로 비명을 억누르고 있었다. 감독관이 목구멍에서 침이 튀어나올 듯이 열변했다.

"이게 얼마짜리 몸인지 알아! 너 같은, 밑바닥 인생은, 아무리 돈을 긁어모아도, 못 만들 몸이란 말이다!"

감독관의 발이 마지막 일격을 날릴 듯이 치켜올랐을 때였다. D-16은 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내리찍는 발을 온 힘을 다해 막은 것은 거의 반사적인 행위였다. 혼란스러운 웅성임이 동심원을 그리듯 퍼져나갔다. D-16은 급속도로 일그러지는 감독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뭘 할 수 있다고? 팩스와 너무 오래 붙어있어서 앞뒤 잴 것 없이 뛰어드는 행동도 닮아버렸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선생님…. 외람되지만, 이 녀석은 실수로 부딪쳤을 뿐입니다." 

D-16은 감독관의 발을 내려주고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한 번만 너그럽게 봐주시죠. 도색이 필요하시다면 솜씨 좋은 가게를 소개시켜드리…"

"이게 미쳤나."

한순간 눈앞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정신을 차리자 이제는 엉망이 된 동료 광부가 같은 눈높이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온 낯이 경악과 공포심으로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D-16은 충격의 잔상이 남아있는 머리를 털어내며 시선을 들어올렸다. 감독관에게서 드리워진 그림자가 그의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아무리 기어올라도 결코 정복할 수 없는 벽 같다.

"어디서 광부 놈이 주제 넘게 끼어들어." 바이저 밑에 있을 옵틱이 그를 창처럼 관통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광분에 차 씩씩거렸다. "실수? 실수든 뭐든 알게 뭐야. 내가 말했을 텐데. 코그 없는 병신이 이 몸의 귀하신 동체에 흠집을 낸 게 문제란 말이다!

필시 이름 없는 광부가 제 발차기를 막아낸 것에 대한 분노도 섞여 있을 터였다. D-16은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가에 흐른 에너존을 닦아내자 얼얼한 통증이 뺨을 타고 목구멍으로 내려왔다. 문득 오라이온이 여기에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 녀석이 자리에 함께 있었더라면 자신보다 먼저 상황에 뛰어들어 이 엿 같은 놈에게 맞고 있었을 터였다. 이번에는 계급장 자체를 떼이고 지하 층으로 배속될지도 모른다. 차라리 이렇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실례…했습니다. 무례하게 끼어든 것에 사과드립니다."

다음 순간 감독관의 손가락이 거칠게 D-16의 헤드 기어를 찔렀다. 코그가 없는 개체 중에서는 그나마 덩치가 큰 편인데도, D-16이 뒷걸음을 짚게 만들 만한 힘이었다.

"너희 광부 놈들은 코그가 없다고 지능도 낮은 거냐? 말만으로 용서가 될 짓이었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고, 이 등신 새끼야. 아니면 네가 저 놈 대신 내 분이 풀릴 때까지 맞아줄 셈인가보지? 응?"

"……."

"하긴 넌 저 놈보다 튼튼해보이니 밟혀봤자 괜찮다는 생각인 것 같구만. 좋아, 그럼."

감독관이 제 발 밑을 정확히 가리켜 보였다. 그는 위협하듯이 D-16에게 가까이 고개를 디밀었다. 그리고는 무거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꿇어. 그리고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죽을 죄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라고 복창해라. 온 광산에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해. 그럼 네 놈도, 저 놈도 기꺼이 봐주마."

등 뒤에서 기겁한 목소리가 들렸다. "감독관님, 잘못한 건 접니다! 차라리 제가 할게요!" 발길질 당한 충격으로 음성 장치에 일시적인 손상이 왔는지 기괴하게 변질된 음성이었다. 감독관은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정확히 D-16을 내려보고 있었다. 처음 분풀이를 했던 메크는 이제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D-16의 내면에서 무언가 꿈틀했다. 맞서 싸워. 뒤이어 다른 목소리도 들렸다. 그런 다음엔? 죽도록 맞고, 강등당할까? 분에 못 이겨 주먹질을 해봤자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코그가 있는 메크에겐 아무런 타격이 되지 않을 텐데. 그러고 나면 남는 일은 반격당하는 일뿐이다. 아마 뒤에 누워있는 동료보다 더 무참하게 두들겨 맞게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일 감독관이 상관에게 대든 죄목을 들어 그를 고발하기까지 한다면 애써 쌓아온 실적이 무색하도록 그의 위치는 추락하고 말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다. 코그가 없는 하급 광부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자연한 일이었다. D-16은 어금니를 세게 깨물었다. 너무 많이 깨물고 닳아버려 형태가 완전히 변형되어버린 부위였다.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아서는 안 된다.

거기에 의문을 표하는 것이 잘못된 행동이다. 그래야만 한다.


D-16이 무릎을 꿇자, 주변을 둘러싼 동료들이 다시금 술렁거리며 동요하는 것이 들렸다. 누군가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도 들렸다. 시선이 한가운데로, 그를 향해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감독관의 의기양양한 눈초리가 그를 따라 내려왔다.

D-16은 고개를 숙이고 감독관의 시선이 닿지 않을 곳에서 그를 노려보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끓어 올라 넘칠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죽을 죄를 저질렀습니다." 음성 장치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떨렸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그런 하찮은 감정 때문이 아니라. "용서해……"


그 순간 거대한 폭발과 함께 시야가 흔들렸다. D-16은 턱을 치켜들었다. 갑작스러운 지진 탓에 사위는 아수라장이었다. 모두가 혼란에 잠겨 허우적거렸다. "연쇄 폭발이다! 구역이 무너지고 있어! 탈출해야 해!" 누군가 내지른 고함에 앞다투어 비명과 아우성이 치솟았다. 붉은 경고음이 사방을 매섭게 울려댔다. D-16의 앞을 버티고 서 있던 감독관은 불 같은 괴성을 내지르며 다른 감독관들을 향해 달려갔다. 갱내에서 폭발이 일어나면 코그의 유무를 막론하고 누구든 규율대로 움직여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D-16은 바닥에 쓰러져있는 동료를 일으켜 세우며 폭음이 울리는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분명 거대한 지진이었지만, 직감적으로 구역 전체를 무너뜨릴 만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첫 발견자가 정확하게 '구역이 무너지고 있다'고 못박았기에 모두들 정신없이 대피하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대체 누가 근거 없는 헛소리를 내질렀단 말인가?

후일 그 '연쇄 폭발' 건은 누군가 탄광에 부주의하게 놔둔 폭발물 탓이었던 것으로 판명났다. 한동안 감독관들은 어느 광부에게 책임이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수색 작업에 매진했지만, 폭발과 함께 증거물들이 모조리 날아가버렸기에 진상을 밝혀내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되었다.



D-16은 오래지 않아 푸른 광부와 다시 마주쳤다. 그는 먼저 D-16을 발견하고 말을 붙였다.

"그때 말이야, 도와줘서 고마웠다."

미소는 씁쓸했다. 그는 힘없이 D-16의 어깨를 치고는 남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다음번엔 끼어들지 마. 난 맞을 만해서 맞은 거였어. 너까지 휘말려버리면 내가 미안해지잖냐."

D-16은 감사 인사를 마치고 멀어지는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어깨에 채굴 기계를 짊어지고 배정된 탄광으로 사라지는 푸른 메크는 여전히 절뚝거리고 있었다. 부상당한 몸으로 채굴 작업에 들어가는 것은 에너존 광맥을 드릴로 직접 건드리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행동이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휴식으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 에너존 배급이 줄어들면 그의 신체는 채굴 작업의 강도를 더욱 버틸 수가 없게 된다. 스파크만 간신히 살아있는 상태로 작동을 멈추게 될 것이다. 죽느니만 못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D-16은 그의 뒷모습에 자신의 모습을, 뒤이어 오라이온의 모습을 덧입혀 보았다. 난 맞을 만해서 맞은 거였어. 만신창이가 된 채로 절룩거리던 걸음. 죄책감과 자기혐오로 얼룩진 미소. 단지 코그가 없을 뿐인데도 그들은 주어진 삶의 궤도를 벗어날 길이 없다.

손바닥을 펴자 광물이 완전히 부스러져 있었다. D-16은 수레로 다가가 조각난 것들을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떨어뜨렸다.




오라디

2024.10.03 20:3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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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보면서 웃고 있다가 오라이언과 얻어맞는 광부 그리고 무릎 꿇는 디십육 보고 비명질렀어요 센세.... 이건 문학이야
[Code: e37b]
2024.10.03 20:3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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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 폭발이다! 구역이 무너지고 있어! 탈출해야 해!" 이건 오라이온이 외쳤을까? 아니면 더 두고볼 수 없던 다른 광부봇이 기지를 짜낸 거였을까?
[Code: e37b]
2024.10.03 20:3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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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선생님... 선생님은 정말 빛이고 소금입니다... 미쳤다 진짜ㅠㅠㅠ 오라디 꽁냥 연애 행복하게 웃으면서 보고있다가 마지막에 디가 메가트론이 될수 밖에 없는 일과 심리를 읽는 순간 숨이 턱 막힘ㅠㅠㅠㅠㅠ
[Code: b554]
2024.10.03 20:4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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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코그가 없는 광부들의 삶과 애환을 닮은 하나의 문학작품을 읽는 것 같아요ㅠㅠㅠㅠㅠ디ㅠㅠㅠㅠㅠㅠ
[Code: c11b]
2024.10.03 20:4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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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는 센세의 글이 더 보고 싶네요.........
[Code: 0580]
2024.10.03 20:5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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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이라고 외친건 누구였을까..... 아 인터뷰 부분만 읽었을땐 유쾌할줄만 알았는데 내릴수록 광부들 처지랑 디 심리 묘사때문에 답답하고 턱턱 막힌다 불합리한 대우에 의문과 반발심을 가지면서 현실은 그렇지않으니까 순응하는데 그럼에도 눈앞에 말도 안되는 불의에 무의식적으로 나서버린게 디도 결국 벗어나고 싶었기에 그런 행동이 나왔다는게..... 디는 메가트론이 될수밖에 없었던거같음...
[Code: f212]
2024.10.03 20:56
ㅇㅇ
아 어떡해 너무 좋아 너무 좋아서 지하에 계실 프라이머스님 깨우고싶어 어떡해 프라이머스시여.....
[Code: 602c]
2024.10.03 21:04
ㅇㅇ
센세....제가 이글을 볼수있다는게 정말 행복해요...사랑해요 센세...
[Code: 0953]
2024.10.03 21:2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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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악!!!! 으아아아악!!!!! 으아아아악!!! 으아아아악 !!!!! 엉엉엉.. 엉어엉...
커여운 내용인줄알고 실실 웃고있다가 점점 표정심각해졌다가 가슴박박뜯고있어요...
[Code: 1ea8]
2024.10.03 22:2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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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센세 이런 보배로운 글을....!! 마지막 보고 ㅠㅠㅠㅠㅠ 기립하시오!가 절로 ㅠㅠㅠㅠㅠㅠ 그리고 디랑 오라이온 성격 대조되는게 새삼 느껴집니다. 전 그런 서로의 다른 점에 끌렸을거라 생각해요... 그런고로 둘이 결혼해
[Code: f1cc]
2024.10.03 22:3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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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아ㅏㅇ악 끄아아ㅏ아악 그아아아악ㅠㅠㅠㅠㅠㅠ센세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79ff]
2024.10.03 22:3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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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캐논이지ㅠㅠㅠㅠ 디가 빠르게 흑화할수밖에없었다 가슴속에 담아둔것이 너무많았어서
[Code: fb60]
2024.10.03 23:0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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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제가 방금 문학을 한 편 읽었습니다 제발 억나더..
[Code: 602d]
2024.10.04 10:1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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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혹시 각본가야....? 미쳤다 진짜..
[Code: e2c3]
2024.10.04 15:4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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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공식임...........
[Code: 8d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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