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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0 22:39
원작 날조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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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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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치는 악몽을 꿨다. 일어나 보니 식은땀으로 머리가 젖어 있었다. 쿠로사와는 발목 통증 때문에 그럴 것이라며 의사를 불렀다. 단순 염좌였다. 의사는 발목을 단단히 고정시켜 줄 수 있는 보호대를 주었다. 외출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가지 말까?”
쿠로사와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리광을 부렸다. 결혼식꺼지 이제 3주 가량이 남았다. 그 시간이 줄어들수록 쿠로사와는 더 바빠질 것이다. 결혼 후 아버지는 쿠로사와를 정식 후계자로 임명할 생각이었다. 그때쯤이면 타니는 쿠로사와 료헤이가 되어 쿠로사와의 힘이 되는 게 아버지의 생각이다. 아다치는 품속으로 파고드는 쿠로사와를 안고 머리에 뺨을 기댔다.
쿠로사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출근했다. 아다치는 집에 홀로 남아 누워있기만 했다. 그러다 일어나서 괜히 청소를 시작했다. 단순 염좌라던 발목이 너무 아파서 오래 서있지는 못해도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나았다.
바닥 청소. 빨래. 서재는 쿠로사와의 공간이니까 건들지는 못한다. 낯선 집엔 아다치가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요리라도 할까? 장을 봐서 냉장고를 채우는 게 좋을까? 나갈 수 있을까? 아다치는 금새 생각이 많아졌다. 그러니 몸은 과부하가 걸려서 침대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 키요. 무리하지 말고 쉬어.
쿠로사와가 문자를 보냈다. 아다치는 알겠다는 짧은 답장을 보내고 새 휴대폰 곳곳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전에 쓰던 것과 달라서 조작법도 익숙하지 않았다. 아다치는 어플 몇 개를 만지작대다가 얼마 남지 않은 전화번호를 뒤졌다. 화가 잔뜩 났던 쿠로사와는 츠게와의 관계도 끊어내려고 했었는데, 아다치가 빌고 빌어 휴대폰에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아다치는 츠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바로 전화가 왔다.
- 뭐해?
“나. 나 그냥 누워 있었어…….”
츠게의 말투는 평소와 똑같았다. 그런 무시무시한 일이 있었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 부럽네. 백수는.
진지해 보이지만, 츠게와 가까운 사람은 그게 장난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다치가 큭큭대며 작게 웃었다. 츠게도 미소 지었다.
“몸은 좀……. 어때?”
- 괜찮아. 다시 연재 들어가니 살이 좀 빠졌지만.
“미나토는 잘 지내?”
- 응. 최근에 다시 공연 시작했거든.
츠게는 아다치가 궁금해할 만 한 소식들을 알려줬다. 우동이 살이 찐 것. 미나토가 대회에 나가 상을 받은 것.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는 것. 해줄 말이 없던 아다치는 츠게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 너는?
“응?”
- 아다치. 너는 잘 지내?
아다치는 손을 뻗어 보호대를 찬 발목을 만졌다. 어젠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자신이 타니에게 큰 잘못을 했다는 것도. 아다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츠게는 아다치를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츠게. 있잖아.”
- 뭔데?
“그때 그 남자 기억나? 너를 데려왔던 그 남자.”
- 기억 나. 쿠로사와 유이치랑 똑 닮은 놈. 네 이야기를 해뒀어.
아다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널 잘 부탁한다고.
그제야 아다치는 타니가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알았다. 아다치의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아다치는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다리를 침대 밖으로 빼냈으나, 갈 곳이 없다는 걸 깨닫고 또 멈췄다.
- 무슨 일 있어?
“……. 아니야. 아무것도.”
- 그 놈이 널 괴롭히기라도 한 거야?
“오히려 그 반대일지도……. 아. 미안. 넌 좋지 않을 텐데…….”
츠게라면 타니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다치가 사과하자 츠게는 됐다며 여느 때처럼 넘어가려고 했다. 그러다, 타니에게 아다치를 부탁한 것이 떠올랐다. 아다치는 츠게의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연락처. 줄까?
아다치가 고개를 들었다. 그때 발바닥이 땅에 닿았다. 츠게는 별다른 말 없이 메시지로 번호를 보내주었다. 아다치는 한참을 망설이다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타니는 받지 않았다. 묘한 서운함과 안도감에 아다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아…….”
- 여보세요?
“…….”
- 뭐야. 전화를 걸었으면 말을 하세요.
“타, 타니씨……!”
타니는 금방이라도 전화를 끊을 것 같았다. 아다치는 마음이 급해져 냅다 타니를 부르고 말았다. 타니는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가 진짜인지 의심스러워 숨도 멈췄다. 아다치는 혹시 전화가 끊긴 건가 싶어 ‘여, 여보세요?’라고 말했다. 타니의 숨소리가 들렸다.
- 형수님? 무슨 일로…….
“어. 그게……..”
당황한 건 타니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아다치에게 미움 받을 일만 남았구나 생각해서 일부러 연락도 하지 않았다. 아다치는 일단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어쩔 줄 모르는 마음에 몸이 먼저 움직인 건데, 그래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어요?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 아니면 뭐…….
원래 악행을 고하기란 쉽지 않다. 아다치를 악하다고 표현할 수 있다면 말이다. 순진하고 착한 아다치는 제 아버지의 준 상처를 꼭 자신이 준 것처럼 착각했다. 어린 시절 누렸던 안락함과 평화마저 악행의 대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다치가 아무 말 못하자 타니는 아다치가 원할 수도 있는 말을 했다.
- 제가 갈까요?
어쩌면 타니 스스로가 원했던 일일지도. 아다치는 공허한 거실을 둘러보았다. 쿠로사와의 눈을 피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생각나는 좋은 핑계가 있었다.
그 병원은 타니도 아는 곳이었다. 종종 서류조작을 해주는 곳으로, 타니 역시 도움을 받은 적 있었다. 그래서 주소를 알고 있었다. 타니는 병원 뒤에 있는 주차장에 있었다. 조수석엔 달달한 비타민 음료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곧 하얗고 말간 얼굴이 건물 밖으로 나왔다. 아다치였다. 아다치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타니를 찾는 것이다. 타니는 경적을 울릴까 하다 창문을 내려 아다치를 불렀다. 아다치는 절뚝이며 타니에게 걸어갔다. 타니는 자신도 모르게 차에서 내려 아다치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아다치와 가까워질수록 그때 맡았던 차 향이 훅 끼쳤다.
“뭐 얼마나 다쳤길래 걷지도 못해요?”
“그냥 삔 거예요. 괜찮아요.”
아다치가 소곤대며 말했다. 사람들을 의식해서 그런 것 같았다. 타니는 아다치를 부축하고 조수석 문까지 열어주었다. 아다치는 의자에 놓인 비타민 음료를 보고 입술을 앙 물었다. 타니는 다시 차를 빙 돌아 운전석에 앉았다.
“왜 전화했어요?”
질문을 던진 건 타니인데 안달이 난 것도 타니다. 타니는 비타민 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아다치는 손가락을 꼼질대고 있었다.
“할 말이 있어서요.”
“그러니까 그게 뭔데요?”
혹시 츠게가 다른 말을 한 것인가? 뭔가 실망할 만 한 일이 있었나? 타니는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아다치의 입술만 보고 있었다. 붉게 피가 오른 입술. 그 옆에 난 점. 입을 달싹이면 보이는 촉촉한 혀. 목소리. 울림…….
“타니의 어머니에 대해 알고 싶어요.”
그런데 들려오는 대답은 전혀 예상 못한 것이라, 타니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집안에서 타니의 어머니는 거의 금기나 마찬가지였다. 언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 뿐이었다. 그러니 아는 사람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타니도 가끔만 꺼내보는 추억이 재생되었다. 그때 타니는 참 행복했었다.
“왜요? 누가 뭐라고 해요?”
타니는 아다치가 어머니에 대해 궁금해 한다면, 좋은 이유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어머니를 좋게 말하는 사람은 남아있지 않았다. 아다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다치는 처음부터 끝까지 타니의 예상을 벗어났다.
“밝은 사람이었어요.”
“…….”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좋은 사람이에요.”
대화가 길어질수록 아다치의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그럼……. 지금은 어디 계세요?”
“정말 무슨 이야기 들었어요?”
이제 잊혀진 사람이다. 타니는 고개를 숙인 아다치와 눈을 마주치고 싶었다. 그때 아다치는 눈을 꼭 감았다.
“타니. 어쩌면요. 그때 있잖아요. 쿠로사와가 우리 별채를 떠난 날…….”
“…….”
“그때 우리 아버지가…….”
더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필요 없었다. 타니의 영리한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그때의 기억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생생했다. 낯선 남자는 자신을 아버지라 말하며 타니의 손을 잡아 끌었다. 어머니는 타니에게 좋은 학교를 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며 타니를 떠밀었다. 타니는 어머니를 떠나기 싫었다. 어머니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끝까지 반항했다. 낯선 남자는. 그러니까 타니의 아버지는 그런 타니를 보며 싸울 줄 아는 아이라며 좋아했다.
타니는 어머니의 사정을 뒤늦게 알았다. 소속사에서 어머니에게 사기를 친 것과 어머니를 아는 사람들은 전부 어머니를 배신한 것.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보낸 것이라는 걸. 소속사 대표는 새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파산했다. 어머니를 배신한 자들도 잘 지내지는 못한다. 석연찮은 점도 많았다. 누가 방해라도 한듯 어머니에게 들어오던 공연. 노래. 광고는 순식간에 끊겼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소속사를 옮겨야 하는 일이 생겼고, 어머니 주변 환경이 바뀌게 되었다. 의지하던 사람들 대신 새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마치 누가……. 연출하기라도 한 듯이…….
타니는 그때의 사건을 다시 파헤치고 싶기도 했다. 이제 자긴도 어엿한 어른이니. 하지만 그럴 때마다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치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그걸 싫어했다.
“아.”
이제야 이해 가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가 쿠로사와 집안과 아무 연관 없는 아다치를 며느리로 허락한 이유 말이다. 그때의 일은 아버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의 문제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알겠네.”
타니가 ‘하.’하고 웃었다. 아다치가 타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차 향이 더 진해졌다. 아다치의 표정은 죄책감이었다. 타니에게 죄를 말하고 싶어 전화했던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단 둘이 있을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타니는 자신에게
‘이만 돌아가 주세요.’
라고 말한 아다치를 떠올렸다. 그 말에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무너졌던가? 타니의 입술이 씰룩대며 올라갔다. 평생을 찾아다니던 단서를 드디어 발견한 해방감. 어떤 만족감. 비틀린 감정. 그런 것들 때문이었다. 순진한 아다치는 그게 자신을 향한 분노라고 생각했다.
“난 몰랐어요.”
아다치는 타니가 했던 말과 비슷한 말을 했다. 이제 두 사람의 입장이 바뀌었다. 아다치는 타니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이게 강력한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 쿠로사와 유이치가 그렇게 가지고 싶어 하던 것일지도 모른다. 타니의 몸에서 불길이 끓어올랐다. 아다치가 타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타니는 그 손을 꼭 붙잡고 끌어 당겼다.
“당연히 몰랐겠지. 형수님.”
타니는 그때 자신이 했던 말을 무르고 싶어졌다. 본인 탓을 자주 하지 말라는 말. 죄책감에 사로잡힌 아다치는 다가오는 타니를 피할 생각조차 못했다. 타니는 사막을 건넌 사람처럼 목이 말랐다. 그래서 그대로 아다치를 마셨다. 질척한 소리가 차를 가득 채웠다. 아다치가 그만 해달라고 빈 것 같았는데, 타니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결국 아다치가 타니를 밀어냈다.
“형수님. 나 환자예요.”
이상하게도 타니는 아다치가 더욱 죄책감에 빠졌으면 했다. 아다치는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음에도 차 문을 열지 않았다. 타니는 혀로 축축한 입술을 핥은 다음 아다치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켰다. 차 향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다치의 살내음이었다. 선천적으로 향이 없는 알파 타니는 오메가의 향을 잘 맡지 못했다. 그래서 성적으로 흥분한 적은 거의 없었다.
“당신을 진짜…….”
어쩌면 좋지? 타니가 아다치의 목에 대고 말했다. 그 진동에 아다치가 몸을 움츠렸다. 타니는 앞으로 아다치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생각했다. 벌써부터 신이 났다.
쿠로아다 타니아다 마치아카
캐붕주의
빻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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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치는 악몽을 꿨다. 일어나 보니 식은땀으로 머리가 젖어 있었다. 쿠로사와는 발목 통증 때문에 그럴 것이라며 의사를 불렀다. 단순 염좌였다. 의사는 발목을 단단히 고정시켜 줄 수 있는 보호대를 주었다. 외출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가지 말까?”
쿠로사와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리광을 부렸다. 결혼식꺼지 이제 3주 가량이 남았다. 그 시간이 줄어들수록 쿠로사와는 더 바빠질 것이다. 결혼 후 아버지는 쿠로사와를 정식 후계자로 임명할 생각이었다. 그때쯤이면 타니는 쿠로사와 료헤이가 되어 쿠로사와의 힘이 되는 게 아버지의 생각이다. 아다치는 품속으로 파고드는 쿠로사와를 안고 머리에 뺨을 기댔다.
쿠로사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출근했다. 아다치는 집에 홀로 남아 누워있기만 했다. 그러다 일어나서 괜히 청소를 시작했다. 단순 염좌라던 발목이 너무 아파서 오래 서있지는 못해도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나았다.
바닥 청소. 빨래. 서재는 쿠로사와의 공간이니까 건들지는 못한다. 낯선 집엔 아다치가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요리라도 할까? 장을 봐서 냉장고를 채우는 게 좋을까? 나갈 수 있을까? 아다치는 금새 생각이 많아졌다. 그러니 몸은 과부하가 걸려서 침대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 키요. 무리하지 말고 쉬어.
쿠로사와가 문자를 보냈다. 아다치는 알겠다는 짧은 답장을 보내고 새 휴대폰 곳곳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전에 쓰던 것과 달라서 조작법도 익숙하지 않았다. 아다치는 어플 몇 개를 만지작대다가 얼마 남지 않은 전화번호를 뒤졌다. 화가 잔뜩 났던 쿠로사와는 츠게와의 관계도 끊어내려고 했었는데, 아다치가 빌고 빌어 휴대폰에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아다치는 츠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바로 전화가 왔다.
- 뭐해?
“나. 나 그냥 누워 있었어…….”
츠게의 말투는 평소와 똑같았다. 그런 무시무시한 일이 있었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 부럽네. 백수는.
진지해 보이지만, 츠게와 가까운 사람은 그게 장난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다치가 큭큭대며 작게 웃었다. 츠게도 미소 지었다.
“몸은 좀……. 어때?”
- 괜찮아. 다시 연재 들어가니 살이 좀 빠졌지만.
“미나토는 잘 지내?”
- 응. 최근에 다시 공연 시작했거든.
츠게는 아다치가 궁금해할 만 한 소식들을 알려줬다. 우동이 살이 찐 것. 미나토가 대회에 나가 상을 받은 것.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는 것. 해줄 말이 없던 아다치는 츠게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 너는?
“응?”
- 아다치. 너는 잘 지내?
아다치는 손을 뻗어 보호대를 찬 발목을 만졌다. 어젠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자신이 타니에게 큰 잘못을 했다는 것도. 아다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츠게는 아다치를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츠게. 있잖아.”
- 뭔데?
“그때 그 남자 기억나? 너를 데려왔던 그 남자.”
- 기억 나. 쿠로사와 유이치랑 똑 닮은 놈. 네 이야기를 해뒀어.
아다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널 잘 부탁한다고.
그제야 아다치는 타니가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알았다. 아다치의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아다치는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다리를 침대 밖으로 빼냈으나, 갈 곳이 없다는 걸 깨닫고 또 멈췄다.
- 무슨 일 있어?
“……. 아니야. 아무것도.”
- 그 놈이 널 괴롭히기라도 한 거야?
“오히려 그 반대일지도……. 아. 미안. 넌 좋지 않을 텐데…….”
츠게라면 타니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다치가 사과하자 츠게는 됐다며 여느 때처럼 넘어가려고 했다. 그러다, 타니에게 아다치를 부탁한 것이 떠올랐다. 아다치는 츠게의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연락처. 줄까?
아다치가 고개를 들었다. 그때 발바닥이 땅에 닿았다. 츠게는 별다른 말 없이 메시지로 번호를 보내주었다. 아다치는 한참을 망설이다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타니는 받지 않았다. 묘한 서운함과 안도감에 아다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아…….”
- 여보세요?
“…….”
- 뭐야. 전화를 걸었으면 말을 하세요.
“타, 타니씨……!”
타니는 금방이라도 전화를 끊을 것 같았다. 아다치는 마음이 급해져 냅다 타니를 부르고 말았다. 타니는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가 진짜인지 의심스러워 숨도 멈췄다. 아다치는 혹시 전화가 끊긴 건가 싶어 ‘여, 여보세요?’라고 말했다. 타니의 숨소리가 들렸다.
- 형수님? 무슨 일로…….
“어. 그게……..”
당황한 건 타니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아다치에게 미움 받을 일만 남았구나 생각해서 일부러 연락도 하지 않았다. 아다치는 일단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어쩔 줄 모르는 마음에 몸이 먼저 움직인 건데, 그래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어요?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 아니면 뭐…….
원래 악행을 고하기란 쉽지 않다. 아다치를 악하다고 표현할 수 있다면 말이다. 순진하고 착한 아다치는 제 아버지의 준 상처를 꼭 자신이 준 것처럼 착각했다. 어린 시절 누렸던 안락함과 평화마저 악행의 대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다치가 아무 말 못하자 타니는 아다치가 원할 수도 있는 말을 했다.
- 제가 갈까요?
어쩌면 타니 스스로가 원했던 일일지도. 아다치는 공허한 거실을 둘러보았다. 쿠로사와의 눈을 피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생각나는 좋은 핑계가 있었다.
그 병원은 타니도 아는 곳이었다. 종종 서류조작을 해주는 곳으로, 타니 역시 도움을 받은 적 있었다. 그래서 주소를 알고 있었다. 타니는 병원 뒤에 있는 주차장에 있었다. 조수석엔 달달한 비타민 음료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곧 하얗고 말간 얼굴이 건물 밖으로 나왔다. 아다치였다. 아다치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타니를 찾는 것이다. 타니는 경적을 울릴까 하다 창문을 내려 아다치를 불렀다. 아다치는 절뚝이며 타니에게 걸어갔다. 타니는 자신도 모르게 차에서 내려 아다치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아다치와 가까워질수록 그때 맡았던 차 향이 훅 끼쳤다.
“뭐 얼마나 다쳤길래 걷지도 못해요?”
“그냥 삔 거예요. 괜찮아요.”
아다치가 소곤대며 말했다. 사람들을 의식해서 그런 것 같았다. 타니는 아다치를 부축하고 조수석 문까지 열어주었다. 아다치는 의자에 놓인 비타민 음료를 보고 입술을 앙 물었다. 타니는 다시 차를 빙 돌아 운전석에 앉았다.
“왜 전화했어요?”
질문을 던진 건 타니인데 안달이 난 것도 타니다. 타니는 비타민 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아다치는 손가락을 꼼질대고 있었다.
“할 말이 있어서요.”
“그러니까 그게 뭔데요?”
혹시 츠게가 다른 말을 한 것인가? 뭔가 실망할 만 한 일이 있었나? 타니는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아다치의 입술만 보고 있었다. 붉게 피가 오른 입술. 그 옆에 난 점. 입을 달싹이면 보이는 촉촉한 혀. 목소리. 울림…….
“타니의 어머니에 대해 알고 싶어요.”
그런데 들려오는 대답은 전혀 예상 못한 것이라, 타니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집안에서 타니의 어머니는 거의 금기나 마찬가지였다. 언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 뿐이었다. 그러니 아는 사람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타니도 가끔만 꺼내보는 추억이 재생되었다. 그때 타니는 참 행복했었다.
“왜요? 누가 뭐라고 해요?”
타니는 아다치가 어머니에 대해 궁금해 한다면, 좋은 이유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어머니를 좋게 말하는 사람은 남아있지 않았다. 아다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다치는 처음부터 끝까지 타니의 예상을 벗어났다.
“밝은 사람이었어요.”
“…….”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좋은 사람이에요.”
대화가 길어질수록 아다치의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그럼……. 지금은 어디 계세요?”
“정말 무슨 이야기 들었어요?”
이제 잊혀진 사람이다. 타니는 고개를 숙인 아다치와 눈을 마주치고 싶었다. 그때 아다치는 눈을 꼭 감았다.
“타니. 어쩌면요. 그때 있잖아요. 쿠로사와가 우리 별채를 떠난 날…….”
“…….”
“그때 우리 아버지가…….”
더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필요 없었다. 타니의 영리한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그때의 기억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생생했다. 낯선 남자는 자신을 아버지라 말하며 타니의 손을 잡아 끌었다. 어머니는 타니에게 좋은 학교를 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며 타니를 떠밀었다. 타니는 어머니를 떠나기 싫었다. 어머니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끝까지 반항했다. 낯선 남자는. 그러니까 타니의 아버지는 그런 타니를 보며 싸울 줄 아는 아이라며 좋아했다.
타니는 어머니의 사정을 뒤늦게 알았다. 소속사에서 어머니에게 사기를 친 것과 어머니를 아는 사람들은 전부 어머니를 배신한 것.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보낸 것이라는 걸. 소속사 대표는 새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파산했다. 어머니를 배신한 자들도 잘 지내지는 못한다. 석연찮은 점도 많았다. 누가 방해라도 한듯 어머니에게 들어오던 공연. 노래. 광고는 순식간에 끊겼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소속사를 옮겨야 하는 일이 생겼고, 어머니 주변 환경이 바뀌게 되었다. 의지하던 사람들 대신 새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마치 누가……. 연출하기라도 한 듯이…….
타니는 그때의 사건을 다시 파헤치고 싶기도 했다. 이제 자긴도 어엿한 어른이니. 하지만 그럴 때마다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치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그걸 싫어했다.
“아.”
이제야 이해 가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가 쿠로사와 집안과 아무 연관 없는 아다치를 며느리로 허락한 이유 말이다. 그때의 일은 아버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의 문제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알겠네.”
타니가 ‘하.’하고 웃었다. 아다치가 타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차 향이 더 진해졌다. 아다치의 표정은 죄책감이었다. 타니에게 죄를 말하고 싶어 전화했던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단 둘이 있을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타니는 자신에게
‘이만 돌아가 주세요.’
라고 말한 아다치를 떠올렸다. 그 말에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무너졌던가? 타니의 입술이 씰룩대며 올라갔다. 평생을 찾아다니던 단서를 드디어 발견한 해방감. 어떤 만족감. 비틀린 감정. 그런 것들 때문이었다. 순진한 아다치는 그게 자신을 향한 분노라고 생각했다.
“난 몰랐어요.”
아다치는 타니가 했던 말과 비슷한 말을 했다. 이제 두 사람의 입장이 바뀌었다. 아다치는 타니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이게 강력한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 쿠로사와 유이치가 그렇게 가지고 싶어 하던 것일지도 모른다. 타니의 몸에서 불길이 끓어올랐다. 아다치가 타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타니는 그 손을 꼭 붙잡고 끌어 당겼다.
“당연히 몰랐겠지. 형수님.”
타니는 그때 자신이 했던 말을 무르고 싶어졌다. 본인 탓을 자주 하지 말라는 말. 죄책감에 사로잡힌 아다치는 다가오는 타니를 피할 생각조차 못했다. 타니는 사막을 건넌 사람처럼 목이 말랐다. 그래서 그대로 아다치를 마셨다. 질척한 소리가 차를 가득 채웠다. 아다치가 그만 해달라고 빈 것 같았는데, 타니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결국 아다치가 타니를 밀어냈다.
“형수님. 나 환자예요.”
이상하게도 타니는 아다치가 더욱 죄책감에 빠졌으면 했다. 아다치는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음에도 차 문을 열지 않았다. 타니는 혀로 축축한 입술을 핥은 다음 아다치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켰다. 차 향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다치의 살내음이었다. 선천적으로 향이 없는 알파 타니는 오메가의 향을 잘 맡지 못했다. 그래서 성적으로 흥분한 적은 거의 없었다.
“당신을 진짜…….”
어쩌면 좋지? 타니가 아다치의 목에 대고 말했다. 그 진동에 아다치가 몸을 움츠렸다. 타니는 앞으로 아다치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생각했다. 벌써부터 신이 났다.
쿠로아다 타니아다 마치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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