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을 때는 노부는 기숙사 방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전 생에서 노부와 미야무라는 그저 같은 하숙집에 머무는 사이였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이번 생은 더욱 연이 깊은 듯 노부는 미야무라와 기숙사의 같은 방을 함께 쓰고 있어서. 눈을 뜨자 미야무라가 노부의 침대 옆에 앉아서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미야무라 선배의 말에 따르면... 

"케이타가 널 업고 왔어."

....네?

"케이가... 아니 마치다 상이 업고 왔다고요? 내 방이 여기인지 어떻게 알고?"
"어 그게..."

미야무라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약간 민망한 듯 말을 이었다. 

"나도 오늘 점심 느티나무 아래에서 먹으려고 슌짱이랑 같이 갔거든. 근데 식당에 들어가니까 네가 쓰러져 있고 케이타가 너 끌어안고 막 허둥대면서 울고불고..."

미야무라가 '케이타가 이건 말하지 말랬는데'라고 중얼거리면서 낭패한 얼굴을 하더니 방금 들은 말을 잊게 하고 싶은 듯 우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네가 쓰러져 있어서 슌짱이 간단히 검사해 봤어. 병원이 아니라서 자세한 검사는 못하고, 기초적인 것만 봤는데 일단 상태가 안정돼서 일단은 기숙사에 데려가자고 한 거야. 네가 일어나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라고 하더라. 슌짱이."

말 속에 자꾸 등장하는 슌짱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미야무라가 슌짱, 슌짱할 만한 사람이 누군지 짐작이 안 가는 것도 아니라서 노부는 얼른 다른 걸 물었다. 

"그래서 케... 마치다 상이 절 업고 오셨어요?"

미야무라 선배의 '슌짱'은 아마 츠지무라 슌타로일 테니 그쪽이 케이보다 힘이나 덩치가 더 좋을 텐데? 그런데도 미야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슌짱이 업어준다고 했는데 케이타가 자기가 업는다고 했어. 손도 못 대게 해서..."

노부가 내내 냉랭하던 케이의 모습과 케이가 울고불고하며 허둥거리고 있었다는 미야무라의 말 속 케이 모습의 괴리를 생각하고 있을 때, 미야무라가 다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케이타 힘 센 건 알고 있었지만, 너 업고 이 언덕을 올라오면서 한 번을 안 쉬더라."

이 학교의 기숙사는 언덕 위에 있는 데다 언덕이 길고 가팔라서 기숙사생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그래서 설마하고 물어봤는데.

"케... 마치다 상이 내내 저를 혼자 업고 오셨어요? 교대 안 하시고요?"
"슌짱이 교대해 준다고 했는데 괜찮다고 했어. 본인이 업고 간다고."

세상에. 노부는 최근 아르바이트 폭주로 살이 좀 빠졌지만 워낙 키가 있고 근육이 많다 보니 보기보다 체중이 꽤 나갔다. 업고 오려면 정말 힘들었을 거라 노부가 미안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서 머쓱하게 얼굴을 쓸어내리자 미야무라가 웃으며 노부의 다리를 톡톡 두드렸다. 

"고마우면 나중에 케이타한테 밥 한 번 사 줘. 케이타 착해서 그걸로 퉁쳐줄 거야."

그러면서 생글생글 웃는 미야무라는 선배임에도 아주 귀여웠다. 케이타는 어떤어떤 음식을 좋아한다고 열심히 손가락으로 꼽고 있는 걸 보면 이번 생에도 미야무라는 여전히 케이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노부는 역사서를 뒤져보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미야무라는 노부와 케이가 떠나고 난 뒤에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당시 미야무라는 케이를 정말로 좋아했었고 마음이 정말 여린 사람이었어서. 그런데 놀랍게도 미야무라는 공화국 중앙은행장과 재무부 장관까지 오르면서 혁명 이후의 격동기에 요동쳤을 경제를 안정시키는데 큰 노력을 했고 많은 성과를 거둔 사람으로 기록돼 있었다. 그렇게 말랑말랑하기만 하던 사람이 케이와 노부가 다 떠나고 난 뒤에는 철혈의 미야무라라고 불리면서 혁명 이후 사회의 경제를 꽉 틀어쥐고 세상이 다시 흔들리는 걸 막아냈다고. 

1700년대의 기억을 되찾은, 아니 1700년대의 기억으로 20xx년의 몸을 차지한...?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노부가 그 먼 과거의 기억이 깨어난 뒤 미야무라의 얼굴을 기숙사 방에서 다시 마주한 노부는 반갑고 기특하고 고마운 마음에 미야무라를 마구 끌어안고 난리를 쳤었다. 현대의 미야무라는 전생에서 노부와 케이가 떠나기 전에 그랬듯 그저 말랑말랑한 성격이라서 매일 평범하고 데면데면하게 방을 같이 쓰던 룸메이트가 갑자기 끌어안고 기뻐하자 얼굴이 온통 빨개진 채로 당황했지만. 그때 아몬과 쿠로사와, 미야무라는 죽마고우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런지 미야무라의 입에서 유이치라는 이름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전생에는 혁명정부의 임시총리를 거쳐 초대 대통령까지 올랐던 쿠로사와는 현재 노부와 같은 철학과의 2년 선배였다. 

기억을 되찾은 뒤 쿠로사와는 아직 만나진 못했지만. 미야무라가 그때처럼 말랑말랑한 거 보면 쿠로사와도 그때처럼 냉정하고 예의바른 사람이겠지. 아몬은... 뭐 입술이 붙어 버린 게 아닐까 싶은 사람일 테고...





케이와 외할머니의 생각을 했을 때 갑자기 덮쳐왔던 두통은 사라졌고 속도 안정됐지만, 그때 떠오르려고 했던 기억은 그대로 가라앉아 버려서 뭘 기억해 내려고 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케이의 외할머니가 편찮으시다는 긴급 파발이 오고... 그리고 어떻게 됐었지? 

잠깐 고민하던 노부는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안타까워하며 눈앞의 거울 속에 비치는 제 얼굴을 바라봤다. 두통 때문인지 좀 창백하고 까칠해 보이긴 하지만... 잘 생긴 것 같은데. 노부의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먼 옛날 그때의 케이는 노부의 얼굴이 좋다고 대놓고 말했었다. 노부가 삐져서 케이는 내 얼굴 보고 만나는 거냐고 빽빽거렸을 때도 상쾌하게 웃으면서 '응'이라고 했던 사람인데. 

[너무해요, 진짜.]

그렇게 투덜거리자 그때 케이는 웃으면서 입을 쪽쪽 맞춰줬었다. 

[네 얼굴에 고마워해. 네 얼굴이 잘 생겨서 화가 나도 네 얼굴만 보면 풀리니까 고마워해야지.]
[... 진짜? 내 얼굴만 보면 풀려요?]

솔깃해서 물어보자 케이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 얼굴이 만능해결책이야. 네 얼굴만 보면 화가 사르르 녹아.]
[흥.]

그러면서도 얼굴만 보고 만난다는 말이 농담이란 걸 알아서 그저 좋기만 했었는데. 

노부는 거울 속 제 얼굴을 보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21세기에는 안 먹히는 얼굴인가. 나...

나 1700년대풍 고전미남이었던 거야?



*****


스즈키가 쓰러진 걸 본 날 저녁에 미야무라는 스즈키가 걱정돼서 기숙사에 남으려고 했지만, 스즈키 본인이 시험 전에 신청해 놓은 야간 아르바이트가 있어서 나가야 한다고 했다. 텅 빈 기숙사에 남았던 미야무라는 스즈키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슌짱이 사는 오피스텔로 향했다. 사실 미야무라는 낮에 스즈키가 기절한 걸 본 데다 늘 침착한 케이타가 이성을 잃고 오열하는 것까지 봐서 많이 놀란 상태긴 했다. 늘 미야무라의 기분에 민감한 슌짱은 미야무라가 많이 걱정되는지 품에 안고 토닥토닥 다정하게 다독이기만 했지만 많은 친구들의 따뜻한 관심과 다정한 데다 어른 그 자체인 애인의 성실한 돌봄에도 정신이 어딘가 살짝 무너져 있는 미야무라는 불안할 때면 더 체온을 갈구하는 경향이 있어서 슌짱의 옷을 벗기고 올라탔다. 미야무라의 정신건강에 누구보다 진심이지만, 미야무라의 신체적, 감정적 욕구를 풀어주는 일에도 누구보다 진심인 슌짱은 미야무라가 옷을 벗기자 더 이상 만류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미야무라를 끌어안고 파고들었다. 

결국 원하는 만큼 슌짱을 실컷 만끽한 미야무라는 따뜻한 목욕까지 즐기고 나와서 슌짱의 품속에 콕 박혀 편안히 앉은 채로 쉬어 버린 목에 따끈하고 달콤한 밀크티를 조금씩 흘려넣고 있었다. 

"케이타가 울고불고 했다고 말해 버렸어."
"스즈키한테?"

슌짱은 마음이 조금 깨졌지만 선량하고 다정한 어린 애인을 토닥이며 막 감아서 포슬포슬한 어린 애인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응. 케이타가 스즈키한테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는데 실수로 말해 버렸어."
"괜찮아. 소라도 많이 놀라서 그런 거잖아. 마치다도 이해할 거야."
"케이타가 그렇게 당황한 것도 처음 보고, 우는 것도 처음 봐서."
"당연히 놀랄 만했지. 나도 놀랐는데."
"그치? 느티나무 아래 사장님도 놀랐을 텐데 내일도 느티나무 아래 갈까? 오늘 거기서 밥 못 먹었잖아."
"그럴까?"
"슌짱, 내일도 시간 돼?"
"소라가 부르면 항상 시간 되지."

미야무라는 '흥'하고 새침한 척했지만 따뜻한 물에 실컷 목욕을 하고 나와서 빨개진 얼굴이 더 달아올랐다. 그리고는 다 마신 밀크티 컵을 내려놓고 다시 슌짱의 품으로 파고 들면서 다정한 애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럼 내일 케이타한테 연락해서 닭고기 요리 사 준다고 하자. 케이타는 닭고기 요리 제일 좋아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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