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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01:06
조로가 받은 발신기는 3D의 2D로의 구현 한계를 보완한 우솝의 개량품이다. 때문에 건물 내에서 상하로 움직일 때 추적기의 온점은 진동의 격렬함을 깜빡이로 표시했다. 앞서 상디도 조로가 무슨 일을 벌일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므로 그저 오늘 당장 일을 끝맺음 한다는 계획을 전했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우솝은 나미의 은밀한 지시를 받고 먼저 나선 거였다. 지령 내용은 상디의 믿을 만한 정보원의 정체를 확인하고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었으니 우솝도 부담 없이 나섰음은 당연했다. 여벌용 추적기를 하나 더 만들어둔 덕에 추적을 놓칠 리도 없었고. 나미는 사이키 조명처럼 깜빡이는 온점을 본 순간 계획이 틀어졌음을 느낀 거였다. 상디의 정보원이 발신기를 부착해 루피가 있는 장소를 알려준다는. 드디어 도개교 중간에서 발신기와 상봉한 우솝은 할 말을 잃었다지만. 이는 발신기를 장소가 아닌 루피 본인에게 붙였다는 이유 하나와 홀로 죄수를 탈옥시킨 자의 무모함 하나, 그러나 일을 친 녀석이 누군지 알고 나니 납득되는 심리 등등 복합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가장 크게 그를 때리는 것이 있는 탓이다.
“…….”
그것은 우솝에게 약 이년여를 동고동락한 친구들과 만났다는 기쁨보다 앞선 것이었다.
“조로 너 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대체 왜…….”
조로를 본 우솝의 목이 메었다. 녀석은 겁이 많은 만큼 정도 눈물도 많았다. 예전보다 키도 덩치도 훌쩍 커서는 그새 더 자란 머리를 가지런히 묶어내렸지만 가면 중앙에 막대과자처럼 솟은 코가 딱 우솝이었다. 이를 한눈에 알아본 조로는 왜 저러고 나타났나 의문이면서도 가면 밑으로 눈물을 훔치는 이의 어깨를 잡아돌렸다.
“여긴 위험하니까 일단 움직이자, 우….”
“난 저격섬의 저격왕이다! 자네들을 도와달라는 우솝 군의 부탁을 받고 왔지!”
“…그래, 저격왕.”
그러니까 코만 봐도 우솝인 놈이 왜 저러고 나타났는지 조로는 정말 영문을 몰랐지만 마지못해 맞장구쳐줬다. 그때 여태 홀로 제자리였던 루피의 감격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망토 입고 있길래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 나 영웅은 처음 봤ㅡ!”
“저격왕 연막 총알!”
이것 때문이었나. 두 눈이 반짝이던 루피를 보며 조로가 생각할 때였다. 우솝이 돌연 사법의 탑을 향해 무기를 날린 것은.
자기 키만큼 길다란 몸체에 장수풍뎅이, 즉 투구벌레의 뿔을 닮은 반월형 축을 지닌 우솝의 새총은 지난날 알라바스타에서 본 것과 비교도 안 될만큼 성능도 크기도 압도적이었다. 무엇보다 일취월장한 실력은 그 또한 허투루 세월을 보낸 게 아님을 증명하니 난데없이 루피를 제친 그가 주위를 연기로 에워쌌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만큼의 진한 연기는 도개교를 중심으로 사법의 탑 정문과 본섬 건물까지 침입했다. 그것은 순식간에 피어올라 사법의 탑 상층부까지 도달했는데 때문에 창문 바로 옆에서 벽에 대고 특수탄을 장착한 총구를 정조준했던 반 오거의 자세가 풀렸다. 제 의도가 들킨 이상 벽을 뚫고 루피의 머리에 탄환을 박아넣으려던 계획은 실패였다. 더욱이 한번 피어오른 뽀얀 연기는 쉬이 흐트러지지 않았으니 코끝을 감도는 매캐함이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벽에 붙어선 오거가 밖을 살피려들 때 밑에서 외침이 들렸다.
“불새성!”
창을 통해 들어온 것은 새의 형상을 한 화마였다. 하지만 진짜 위험은 이제부터였다. 화마가 스친 연기는 곧 묵직한 불씨로 변했으니 상층부 복도에 불길이 이는 것도 금방이었다. 오거를 스친 불새가 벽에 박혀 몸부림칠 때 그것은 주변 연기와 동화돼 더욱 위협적으로 치솟았다. 이에 위기를 느낀 반 오거가 워프해 사라지니 그 순간 크게 넘실댄 불씨가 빈 자리를 덮치며 까만 그을음을 남겼다.
“뭔가 더운데?”
사법의 탑 상층부, 숙소에 비치된 변기에 앉아 집중하던 마젤란이 턱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냈다. 그는 천장에서의 묘한 열기를 느꼈으나 이내 의심을 지웠다. 임펠다운의 초열지옥과 비교하면 머리 위가 지글대는 것쯤은 별거 아니었다. 그보다는 아까부터 밖이 소란스럽다 싶은 게 신경쓰였지만 또다시 꾸룩대는 장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마젤란은 다시 심기일전해 일에 몰두했다.
독독 열매를 먹은 그는 5미터에 준하는 거구와 두 개의 뿔을 연상케 하는 머리스타일, 그리고 거친 인상이 마치 악마를 연상케 했다. 외모만큼이나 실력도 확실했으니 CP9의 부재를 메워줄 최고 전력으로 손색 없었고. 실로 스팬담은 재판이 열릴 때까지 루피를 이곳에 계속 가둬둘 생각이 없었다. 루피는 내일 새 재판소장의 임명식이 진행되는 틈을 타 마젤란의 단독 경호 하에 임펠다운으로 먼저 수감될 예정이었다. 이후 사형이 확정된 그의 재판은 죄인 없이 이뤄질 예정이며 형 집행 또한 임펠다운 내에서 비공개로 처리할 터였다. 마젤란이야 한 나라의 궁에 침입해 힘없는 왕녀를 시해하려 한 중죄인이었으니 합법적 재판에 의한 처벌에 이견이 없음이었다. 기존의 두 재판소장이나 현재 죄인의 구금 및 인도를 책임진 스팬담의 경우 마리조아측 사람이었으니 말할 것도 없었고. 하지만 너무 마젤란 서장의 실력과 명성만 믿은 것은 스팬담의 실책인지도 모른다.
“마젤란 서장은 대체 뭘 했기에 죄인이 탈옥을 해??”
“그분은 지금 화장실에…….”
“아직도냐??! 빌어먹을 똥싸배기 자식!!! 이 내가 그자식을 특별히 모셔온다고 되도 않는 알랑방구를 얼마나 뀌어댔는데 허구한날 똥만 싸고 자빠졌어 왜!!”
전보벌레를 통해 부관과 얘기 중인 스팬담의 언성이 올라갔다. 돈키호테 국왕이 공격받은 순간 제일 먼저 달아난 그는 도개교 근처에서 더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마물은 아직 본섬을 넘지 못하고 있다 하나 사방이 뚫린 도개교를 혼자 지난다는 건 날 잡아잡수라는 말이잖은가. 때문에 제가 도개교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마젤란의 엄호를 요청하려던 그는 머리 위를 선회하던 마물 그림자에 급히 건물 사이로 숨었다. 스팬담의 지휘를 받고자 했던 부관도 온통 제 신변 걱정뿐인 상사가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런 이유로 위층에 불난리가 난 걸 모름은 당연했고. 부관 역시 조금 전부터 땀이 뚝뚝 흘렀으나 급박한 상황에 알아채지 못했다.
“그럼 루치는? 카쿠나 다른 사이퍼 폴 녀석들은??”
“움직일 수 있는 분들은 일이 터지기 전에 본섬 앞쪽의 차량기지로 이동했습니다.”
“으아아! 젠장! 알고 있어!!”
스팬담은 그제야 차량기지 내 마물 팔이 발견됐다는 소식에 제가 명령을 내렸던 걸 떠올리고 화풀이를 했다. 뛰어오는 동안 땀에 젖어 엉망이 된 머리를 움켜쥔 얼굴에는 이제 공포가 가득했다.
“그래서 지금 날 엄호하러 나올 녀석이 하나도 없다고?!”
“건물 내에 배치된 간부급 지휘관과 병사를 추릴 수는 있습니다만…….”
“장난해?! 너희 따위 아무리 많아봐야 쥐뿔 도움도 안 된다고! 사이좋게 마물한테 먹일 일 있냐?!”
실로 스팬담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본섬 곳곳에 배치된 병사들을 제물로 살아남았다. 마물은 일개 병사들이 상대키 어려운 존재였으니 가장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던 본섬 앞쪽에 능력자를 비롯한 주 병력이 몰린 참이다. 마음 같아서는 다 때려치우고 나부터 보호하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으나 그랬다간 향후 문책을 피할 수 없었다. 본섬 내에는 각국 왕실 및 주요 인사들이 가득했으니 만일 이들 중 하나라도 잘못된다면 제아무리 스팬담일지라도 중형을 면치 못하리라. 때문에 스팬담도 그들 전부가 안전하게 피할 때까지는 주 병력을 쉬이 불러들일 수 없었다. 그에 스팬담이 전전긍긍해할 때였다.
“현재 위치를 말해라, 장관. 내가 가겠다.”
‘살았다!!!!’
낮고 덤덤한 목소리의 주인은 블루노였다. 바로 위층의 심상찮은 불길을 경고해주려던 그는 부관에게서 말없이 수화기를 가져갔다. 블루노는 루치의 지령으로 중상 입은 동료들을 아공간에 대피시킨 참이었다. 칼리파는 사법의 탑 곳곳에 피어오른 화마를 잡는 데 힘쓰기로 했다. 블루노가 사무실에 나타난 건 그 직후였으니 스팬담은 제 전보벌레가 특유의 덤덤한 얼굴을 모사할 때 속으로 살았다는 쾌재를 내질렀다. 그런 이의 앞으로 멀리 건물 사이를 스치는 밀짚모자가 보인 건 덤이었다.
기척을 지우고 찾는다는 것은 저격수인 우솝의 특화 분야였다. 때문에 그는 육안으로 분별하지 못한 거리에서 위협을 느꼈으며 실력이 월등한 동류라는 걸 직감했다. 루피 조로는 도개교너머 우솝이었을 미지의 존재에 더 집중하느라 뒤의 감시를 놓친 거였다. 때문에 우솝의 빠른 판단력은 루피를 한 번, 연이어 조로까지 또 한번 구한 셈인지도 몰랐다. 미지의 저격수에 선제공격을 날리고 재빨리 본섬으로 도망친 우솝은 두 사람의 상태를 보며 이들이 제대로 싸울 수 있을까 싶었으니까. 고문에 의한 루피의 상처도 심했지만 무엇보다 그를 당황케 하는 건 조로의 상태였다. 때문에 해군과 마물을 피해 본섬 측면의 밀집구역을 공략한 우솝은 한적한 골목길에서 숨을 돌리며 조로를 봤다. 루피와 조로는 얌전히 그 뒤를 따르던 중이었다.
“조로, 너 왜…….”
눈이 하나 없냐, 보이는 곳마다 죄 멍자국은 무엇이냐 우솝은 물을 말이 차고넘쳤다. 루피의 상처는 고문에 의한 것이라는 원인이 확실한데 조로는 그가 봐도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었다. 알라바스타와 드레스로자의 이해관계로 맺어진 국혼 아니던가. 그 실체가 볼모라 한들 설마 조로를 대놓고 노예 취급한 것일까 우솝은 혼란스러웠다. 이 모습에서 상디가 왜 정보원의 정체를 숨겼는지는 이해했다지만. 지금 이 모습을 본다면 비비나 나미는 틀림없이 울 것이다.
‘그리고 정말 화를 내겠지.’
우솝은 생각했다. 사실 정말 화가 나면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것 또한 이 두 사람이었다. 군대 동기인 나미는 물론이거니와 알라바스타에서 약 이년여간 허물없이 지낸 비비의 성격 역시 그는 다 알고 있었다. 이 둘이 진짜 일을 치면 저희들 중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때문에라도 우솝 역시 당장은 나미, 비비에게 조로를 숨겨야 한다는데 동의했다. 지금은 루피의 구출이 우선이니까.
‘하지만 그게 정말 맞아? 루피는 왜 조로를 보고 아무렇지 않은 건데?’
멀지 않은 곳에서 연신 총포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조로를 면밀히 살피던 우솝은 말을 함에 신중하고자 했다. 지금 조로는 마치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 같았다. 죽기 전 마지막 불꽃을 틔우는 것과 같은. 그 단어 하나하나에 불길함이 깃드니 우솝은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해서 불러놓고 조용한 우솝을 조로가 멀뚱히 쳐다보려는데 부족장 같은 가면 속 눈이 한 지점에서 흔들렸다. 우솝의 손이 반사적으로 조로의 목을 향했다.
“조로, 너 목에 자국이……!”
“손대지 말아주라, 저격왕. 그 이상은 나도 못 참을 것 같으니까. 이녀석은 내거거든. 나랑 같이갈 거야.”
조로의 목에 둘러진 손수건으로 향하던 우솝의 손을 막은 건 루피였다. 그 손끝은 부드러움 속에 완강함이 있었다. 그제야 우솝은 루피도 다 알고 있음을 눈치챘다. 순간 마주한 녀석의 얼굴에 꾹 눌러둔 감정이 떠올랐다 가라앉는다. 그리고 역시 생각지 못한 말에 조로가 입을 달싹일 때였다.
“저기다! 탈옥한 밀짚모자와 일당을 잡아라!”
“우와아아!!”
골목 끝에서 들려온 스팬담의 외침에 병사 한무리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 얘기는 의무실에서 다 끝난 줄 알았다. 조로는 샹크스와 만났던 걸 털어놨고 루피는 입을 다물었으니까. 스스로 보기 좋은 꼴이 아니라는 건 조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루피를 구하는 걸 가장 우선시 해야 되는 상황에 그는 괜한 말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의도한 건 아니나 샹크스의 존재는 이런 이유를 포함해 안성맞춤이었다.
“얘기는 아까 끝난 거 아니었냐, 루피?! 난 네가 다 알아들은 줄 알았는데!”
“시끄러! 이 바보야!! 바보 길치 검사!!”
“뭐?!”
“잔디머리 삼검류!!”
“야!!”
“매의 눈 바라기!”
“…….”
“검 바보!”
“…….”
“바보 검사!”
“…….”
“아무튼 넌 바보야!!”
“우악!”
골목이 떠나가라 외치는 목소리에는 울분이 있었다. 더불어 루피의 단순한 주먹질에 병사 하나가 날아간다. 두 사람이 말다툼을 하는 동안에도 병사 수십 명이 낙엽처럼 쓸려나갔다. 스팬담은 블루노가 올 때까지 시간끌기 용으로 쓸 병사들을 모아 밀짚모자를 습격했으나 보기 좋게 당했다. 며칠을 갖은 고문에 시달리고 해루석 계구까지 찬 놈을 우습게 본 게 실수였다. 밀짚모자 일당일 게 뻔한 해군 병사 차림의 사내도 실력이 만만찮았고. 시종일관 검을 휘두르고 캡모자를 깊게 눌러써서 얼굴 확인은 어려웠으나 스팬담은 신경쓰지 않았다. 지휘관이라면 응당 저 둘 뒤에서 상황을 관찰하는 가면 녀석이 아니겠는가. 사법 섬에 마물을 떼로 불러오고 탈출극을 짤 만하다면 기상천외한 실력을 가졌을 게 분명하다. 때문에 스팬담은 루피, 조로보다도 그 뒤에서 묵묵히 서있는 가면남을 주목했다. 그가 재판관들에게 협박편지를 보내고 마물을 조종해 난공불락의 사법 섬을 어지럽힌 장본인이며 어쩌면 이 모든 게 밀짚모자를 구하려는 포석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이 전제가 성립하기에는 협박편지가 날아온 시일이 훨씬 전이라는 오류가 있었지만 당장은 일일이 따질 여유가 없었다. 오히려 이만큼 사법 섬을 농락한 자라면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도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때문에 절대 가면남과 밀짚모자를 놓칠 수 없다 여긴 스팬담이 손에 든 전보벌레의 채널을 돌렸다. 그것은 섬 전역의 확성기와 연결됐다.
“탈옥한 밀짚모자가 여기 있다! 근처 병력은 전부 이곳에 집결…!”
“엄호는 이 저격왕에게 맡기게, 제군들!”
방송과 함께 머리 위로 신호탄을 쏘아올리려던 스팬담이 굳었다. 오미터는 되는 거리에서 앞에 남은 이십여 병사들을 피해 날아온 납 탄환이 정확히 스팬담의 손에 있던 플레어건을 가격했다. 그는 방금 막 제 위치를 알리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충격에 총을 놓친 스팬담이 돌처럼 굳었다. 저격왕의 호기 넘치는 외침이 들릴 때 아직 손에 남은 묵직한 충격은 그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다.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가면남 아니 저격왕은. 정작 우솝은 우락부락한 병사 수십명이 달려듦에 다리가 풀리기 직전이었다지만 말이다. 그러던 중 전세가 바뀐 건 블루노가 나타나면서였다. 때는 해루석 계구를 목에 찬 능력자와 정체 모를 일검류 검사 앞에 남은 병사들마저 순식간에 쓸려나가고 달아날 시기를 놓친 스팬담이 잡히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블루노가 골목 옆 벽에 문을 만들어 나타나니 스팬담이 바로 몸을 숨겼다. 블루노 뒤로 닫힌 문이 사라지고 다시 벽이 될쯤 조로는 뒤쪽의 우솝을 향해 지체없이 소리쳤다.
“잡아, 저격왕! 루피의 목줄 열쇠를 가진 놈이다! 놓쳐선 안 돼!”
“좋아! 나한테 맡겨!”
“어림없다!”
조로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든 우솝이 측면 골목으로 사라졌다. 이곳은 밀집한 건물에 의해 자연스레 만들어진 골목이 어지러이 얽힌 곳이었으나 우솝은 지리에 밝았다. 지형만 머리 속에 있다면 스팬담이 사라진 건물을 통해 어느 골목으로 튀어나올지 예상할 수 있다는 거다. 그에 블루노가 우솝을 막으려 도약했지만 건물 위로 뛰어올라 앞서려던 계획이 막혔다.
“큭!”
“어딜 가려고? 네 상대는 나다!!”
우솝에게만 집중했던 블루노는 발목이 잡혀 땅에 처박혔다. 물소를 연상케하는 육중한 몸이 암반에 박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골목이 갈라지며 주변 건물이 기우뚱하건만 크로커다일보다 약 반뼘 정도 더 큰 레슬러 스타일의 남자는 가뿐히 몸을 일으켰다. 몸에 묻은 돌부스러기를 털어내는 모양새가 방금 공격에 전혀 충격을 받지 않은 듯했다. 블루노도 거구에서 나오는 맷집만큼은 꽤 자신있었다. 하지만 목에 해루석을 달고서 이만한 힘을 낸다는 건 놀라운 게 사실이다.
“제법이로군. 역시 가프 중령의 손자라는…….”
“아… 조로, 나 힘들어…….”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됐으니까 쉬고 있어. 저녀석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해루석을 달고 있는 한 루피의 한계점은 별수 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용케 힘을 낸 게 아닌가. 조로는 녹은 떡처럼 늘어지던 녀석에 피식 웃고는 밀짚모자를 한차례 꾹 눌러줬다. 그런 뒤 루피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서는 모습이란 마치 동생을 돌보는 형과 같았다. 이 다정다감한 분위기에서 철저히 배제당한 블루노는 씁쓸함을 느꼈다지만 말이다.
“우리 구면이지? 이제야 지난번에 당한 설욕을 갚아줄 수 있겠네.”
“롤로노아…….”
앞으로 나선 해군 병사 차림의 조로가 두 손에 칼을 쥐었다. 왜 녀석이 여기 있는지 당황한 블루노가 신음같은 소리를 냈다. 그에게는 카쿠 때문에라도 피하고픈 대결이었다.
“한번만 말하지. 순순히 밀짚모자를 내놓고 물러난다면 널 못본 척해주겠다. 내 제안에 응하겠나?”
“거절한다. 루피를 돌려받고 싶다면 날 쓰러트려라, 납치범.”
“납치범??!”
해루석에 의해 흐물흐물해져 있던 루피의 언성이 올라간다. 그순간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있던 블루노의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 조로는 그런 놈에게 눈을 떼지 않으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날카로운 눈매와 얄쌍한 입술이 그리는 미소가 냉소적이었다.
“저 녀석이 내 눈을 이렇게 만든 원인제공자 중 하나라는 거야, 내 말은. …로우는 날 구해준 사람이고.”
“뭐?? 저자식! 역시 내가 처리한다!! 야비한 납치범 자식!!”
“어어? 야, 루피! 넌 나서지 말라니까! 납치범은 내가 처리한다고!”
“둘 다 한꺼번에 상대해주마!”
해루석을 단 능력자와 척 봐도 중환자인 듯한 검사를 상대하는데 블루노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제 승리를 장담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납치범 소리에 정신이 흔들리고 있었다.
겨우 욘디를 뿌리치고 돌아온 크로커다일은 휑하다 못해 벽 한쪽이 완전히 무너진 숙소를 봤다. 이들 숙소는 사법의 탑과 더 가깝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멀쩡했는데 빈 침대만 덩그러니 놓인 방 벽 한쪽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그 너머로 포탄이 날아다니고 쇠긁는 듯한 마물의 괴성이 난무했다. 그리고 크로커다일은 난도질당하듯 걸레짝이 된 마물이 침대와 함께 꽁꽁 묶여 있는 걸 봤다. 미친 것미냥 몸부림치던 녀석에 종잇장과 같은 굵기의 실은 두꺼운 가죽 깊이 파고든 상태였다. 침대와 함께 수백겹을 둘렀으니 한낱 실이라도 힘으로 끊을 수는 없었으리라. 때문에 놈이 묶인 침대는 검붉은 피로 흠뻑 젖었다. 굳이 놈을 죽이지 않고 전시해둔 도피가 얼마나 화가 났을지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이말인즉 침대에 있어야 할 놈이 없었다는 말이렸다. 크로커다일은 다 죽어가면서도 침대가 들썩이도록 이빨을 세우는 마물을 보면서 긴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한손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린 뒤의 표정은 무섭도록 내려앉았으니 그는 곧 왼손의 갈고리를 내려쳤음이다.
“끅…….”
발작하듯 몸부림치던 마물이 잠잠해지더니 벌어진 입을 통해 피거품이 쏟아졌다. 목에 박힌 갈고리를 뽑은 크로커다일에게 붉은 핏방울이 튀었다.
“하…….”
연기처럼 그를 감싸던 모래가 시가와 토치를 실어왔다. 그리고는 시가를 입에 문 크로커다일이 깊은 숨을 내쉬니 무너진 벽너머로 포탄 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저지선이 무너졌다! 전원 대피하라!! 저지선이 무너졌다! 다들 어서 대피해!!”
발 아래로 난무하는 비명과 하나라도 더 살리고자 하는 절박한 외침이 뒤섞인다. 화약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하늘의 검은 무리가 한층 가까워지는 것을 보며 크로커다일은 한줄기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화나는 건 화나는 거고 도피의 진짜 걱정은 따로 있었다. 정신 바짝 차려도 목숨 부지하기 어려운 아수라장에 마약성 진정제를 맞고 돌아다니는 염병할 왕세자비와 로우 일이라면 눈이 돌아가는 악어 자식이었다. 최악은 둘이 먼저 맞딱뜨리는 것인데 경험에 의거해볼 때 염병할 왕세자비가 악어를 제대로 설득할 활률은 영에 수렴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염병할 왕세자비는 로우의 첫정인 아닌가. 아닌 척해도 악어는 이것에 많은 의의를 뒀다. 로시가 죽은 뒤 내내 의무감으로 자리보전하던 녀석이 제르만 호에서 도피 곁에 남겠다 자처한 이유는 오직 이것 때문이었다. 제 사람은 독점해야 직성이 풀리는 도피였으니. 이중에서도 로시와 얽히고설킨 두 사람에 관해서라면 도피의 독점욕 또한 특별했다. 저희 셋 다 결국 로시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는 애증까지 포함해서. 로시에 관해서라면 도피는 결국 그 자신도 용서하지 못했다. 앞으로도 절대 용서할 일은 없을 것이고. 그러니 제르만 호 이후로 방관했다면 도피는 조로를 이용하고도 남았음이다. 차를로스를 낚는 미끼로. 하니 도피가 이 모든 걸 그만둔 이유는 크로커다일이 제안한 거래 덕분이었다. 로우 대신 저를 가지라는. 아, 얼마나 달콤한 속삭임이던가. 이렇듯 악어는 로시의 유산을 위해서라면 낯빛 하나 안 변하고 천길 물속도 뛰어들 인사였다. 때문에 도피는 악어보다 먼저 염병할 왕세자비를 찾고자 혈안이었으나 상황이 좋지 못했다. 하늘을 점령한 놈들에 마음껏 날지도 못할 뿐더러 고막이 터질듯한 소리의 향연은 정보의 제한을 불러왔다. 이런 이유로 도피는 또다시 덤벼든 마물들을 단칼에 처리하며 온몸에 붉은 피를 뒤집어썼다.
“끄억… 꺽… 컥!”
제게 날아온 녀석을 향해 다섯 손가락 끝에서 뻗어나온 실을 뻗어 휘감은 도피가 낚아채듯 잡아당겼다. 바닥에 쓰러진 녀석의 가슴을 발로 누르고 실이 감긴 손을 조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 하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이를 무심히 내려다보던 도피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기실 어둠어둠 열매 능력자에게서 태어난 놈들에게 여타 악마의 열매는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피부 자체에 어둠어둠 열매 능력자가 다른 능력을 무력화시키는 힘이 깃든 탓이다. 원 능력은 손으로 직접 잡아야만 다른 힘을 누를 수 있었지만 놈들은 핵분열에 의해 탄생한 하위 개체였다. 또 지금의 결실은 늙은 왕이 오랜 시간 공들인 결과였고. 이말인즉 무수히 많은 마물 전부가 결국 하나라는 소리다. 덕분에 열매의 능력 또한 전이됐고. 단지 본체가 아닌만큼 제 의지로 능력을 부릴 수는 없었으니 이들이 얻은 건 세포 자체에 깃든 약간의 이점이었다. 그래서 놈들에게 능력자의 힘은 반감되지만 물리적 힘이라면 다르다. 설령 그것이 삼미터에 육박하는 성체라도 독만 조심한다면 도피는 육탄전 또한 자신 있었다. 지금처럼.
“키엑!”
우락부락한 상체의 산만 한 덩치가 날아온 속도 그대로 몸을 내리꽂지만 도피는 그 힘을 이용해 팔을 잡아채 회전했다. 이어 회전속도를 타고 업어치기하니 놈은 목이 반쯤 꺾인 채 바닥에 꽂혔다. 그러고도 바르작대며 움직이려는 녀석에 손끝의 실을 뻗어 버려진 검을 끌어당긴 도피는 긴 팔을 한차례 휘둘렀다. 실에 메인 검이 날아온 속도 그대로 마물의 목을 뚫고 땅에 박힐쯤 도피는 이미 저만치 걸어간 뒤였다.
“하…….”
그는 악어보다 먼저 염병할 왕세자비를 찾는 일이 시급했다.
한조각
“…….”
그것은 우솝에게 약 이년여를 동고동락한 친구들과 만났다는 기쁨보다 앞선 것이었다.
“조로 너 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대체 왜…….”
조로를 본 우솝의 목이 메었다. 녀석은 겁이 많은 만큼 정도 눈물도 많았다. 예전보다 키도 덩치도 훌쩍 커서는 그새 더 자란 머리를 가지런히 묶어내렸지만 가면 중앙에 막대과자처럼 솟은 코가 딱 우솝이었다. 이를 한눈에 알아본 조로는 왜 저러고 나타났나 의문이면서도 가면 밑으로 눈물을 훔치는 이의 어깨를 잡아돌렸다.
“여긴 위험하니까 일단 움직이자, 우….”
“난 저격섬의 저격왕이다! 자네들을 도와달라는 우솝 군의 부탁을 받고 왔지!”
“…그래, 저격왕.”
그러니까 코만 봐도 우솝인 놈이 왜 저러고 나타났는지 조로는 정말 영문을 몰랐지만 마지못해 맞장구쳐줬다. 그때 여태 홀로 제자리였던 루피의 감격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망토 입고 있길래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 나 영웅은 처음 봤ㅡ!”
“저격왕 연막 총알!”
이것 때문이었나. 두 눈이 반짝이던 루피를 보며 조로가 생각할 때였다. 우솝이 돌연 사법의 탑을 향해 무기를 날린 것은.
자기 키만큼 길다란 몸체에 장수풍뎅이, 즉 투구벌레의 뿔을 닮은 반월형 축을 지닌 우솝의 새총은 지난날 알라바스타에서 본 것과 비교도 안 될만큼 성능도 크기도 압도적이었다. 무엇보다 일취월장한 실력은 그 또한 허투루 세월을 보낸 게 아님을 증명하니 난데없이 루피를 제친 그가 주위를 연기로 에워쌌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만큼의 진한 연기는 도개교를 중심으로 사법의 탑 정문과 본섬 건물까지 침입했다. 그것은 순식간에 피어올라 사법의 탑 상층부까지 도달했는데 때문에 창문 바로 옆에서 벽에 대고 특수탄을 장착한 총구를 정조준했던 반 오거의 자세가 풀렸다. 제 의도가 들킨 이상 벽을 뚫고 루피의 머리에 탄환을 박아넣으려던 계획은 실패였다. 더욱이 한번 피어오른 뽀얀 연기는 쉬이 흐트러지지 않았으니 코끝을 감도는 매캐함이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벽에 붙어선 오거가 밖을 살피려들 때 밑에서 외침이 들렸다.
“불새성!”
창을 통해 들어온 것은 새의 형상을 한 화마였다. 하지만 진짜 위험은 이제부터였다. 화마가 스친 연기는 곧 묵직한 불씨로 변했으니 상층부 복도에 불길이 이는 것도 금방이었다. 오거를 스친 불새가 벽에 박혀 몸부림칠 때 그것은 주변 연기와 동화돼 더욱 위협적으로 치솟았다. 이에 위기를 느낀 반 오거가 워프해 사라지니 그 순간 크게 넘실댄 불씨가 빈 자리를 덮치며 까만 그을음을 남겼다.
“뭔가 더운데?”
사법의 탑 상층부, 숙소에 비치된 변기에 앉아 집중하던 마젤란이 턱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냈다. 그는 천장에서의 묘한 열기를 느꼈으나 이내 의심을 지웠다. 임펠다운의 초열지옥과 비교하면 머리 위가 지글대는 것쯤은 별거 아니었다. 그보다는 아까부터 밖이 소란스럽다 싶은 게 신경쓰였지만 또다시 꾸룩대는 장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마젤란은 다시 심기일전해 일에 몰두했다.
독독 열매를 먹은 그는 5미터에 준하는 거구와 두 개의 뿔을 연상케 하는 머리스타일, 그리고 거친 인상이 마치 악마를 연상케 했다. 외모만큼이나 실력도 확실했으니 CP9의 부재를 메워줄 최고 전력으로 손색 없었고. 실로 스팬담은 재판이 열릴 때까지 루피를 이곳에 계속 가둬둘 생각이 없었다. 루피는 내일 새 재판소장의 임명식이 진행되는 틈을 타 마젤란의 단독 경호 하에 임펠다운으로 먼저 수감될 예정이었다. 이후 사형이 확정된 그의 재판은 죄인 없이 이뤄질 예정이며 형 집행 또한 임펠다운 내에서 비공개로 처리할 터였다. 마젤란이야 한 나라의 궁에 침입해 힘없는 왕녀를 시해하려 한 중죄인이었으니 합법적 재판에 의한 처벌에 이견이 없음이었다. 기존의 두 재판소장이나 현재 죄인의 구금 및 인도를 책임진 스팬담의 경우 마리조아측 사람이었으니 말할 것도 없었고. 하지만 너무 마젤란 서장의 실력과 명성만 믿은 것은 스팬담의 실책인지도 모른다.
“마젤란 서장은 대체 뭘 했기에 죄인이 탈옥을 해??”
“그분은 지금 화장실에…….”
“아직도냐??! 빌어먹을 똥싸배기 자식!!! 이 내가 그자식을 특별히 모셔온다고 되도 않는 알랑방구를 얼마나 뀌어댔는데 허구한날 똥만 싸고 자빠졌어 왜!!”
전보벌레를 통해 부관과 얘기 중인 스팬담의 언성이 올라갔다. 돈키호테 국왕이 공격받은 순간 제일 먼저 달아난 그는 도개교 근처에서 더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마물은 아직 본섬을 넘지 못하고 있다 하나 사방이 뚫린 도개교를 혼자 지난다는 건 날 잡아잡수라는 말이잖은가. 때문에 제가 도개교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마젤란의 엄호를 요청하려던 그는 머리 위를 선회하던 마물 그림자에 급히 건물 사이로 숨었다. 스팬담의 지휘를 받고자 했던 부관도 온통 제 신변 걱정뿐인 상사가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런 이유로 위층에 불난리가 난 걸 모름은 당연했고. 부관 역시 조금 전부터 땀이 뚝뚝 흘렀으나 급박한 상황에 알아채지 못했다.
“그럼 루치는? 카쿠나 다른 사이퍼 폴 녀석들은??”
“움직일 수 있는 분들은 일이 터지기 전에 본섬 앞쪽의 차량기지로 이동했습니다.”
“으아아! 젠장! 알고 있어!!”
스팬담은 그제야 차량기지 내 마물 팔이 발견됐다는 소식에 제가 명령을 내렸던 걸 떠올리고 화풀이를 했다. 뛰어오는 동안 땀에 젖어 엉망이 된 머리를 움켜쥔 얼굴에는 이제 공포가 가득했다.
“그래서 지금 날 엄호하러 나올 녀석이 하나도 없다고?!”
“건물 내에 배치된 간부급 지휘관과 병사를 추릴 수는 있습니다만…….”
“장난해?! 너희 따위 아무리 많아봐야 쥐뿔 도움도 안 된다고! 사이좋게 마물한테 먹일 일 있냐?!”
실로 스팬담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본섬 곳곳에 배치된 병사들을 제물로 살아남았다. 마물은 일개 병사들이 상대키 어려운 존재였으니 가장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던 본섬 앞쪽에 능력자를 비롯한 주 병력이 몰린 참이다. 마음 같아서는 다 때려치우고 나부터 보호하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으나 그랬다간 향후 문책을 피할 수 없었다. 본섬 내에는 각국 왕실 및 주요 인사들이 가득했으니 만일 이들 중 하나라도 잘못된다면 제아무리 스팬담일지라도 중형을 면치 못하리라. 때문에 스팬담도 그들 전부가 안전하게 피할 때까지는 주 병력을 쉬이 불러들일 수 없었다. 그에 스팬담이 전전긍긍해할 때였다.
“현재 위치를 말해라, 장관. 내가 가겠다.”
‘살았다!!!!’
낮고 덤덤한 목소리의 주인은 블루노였다. 바로 위층의 심상찮은 불길을 경고해주려던 그는 부관에게서 말없이 수화기를 가져갔다. 블루노는 루치의 지령으로 중상 입은 동료들을 아공간에 대피시킨 참이었다. 칼리파는 사법의 탑 곳곳에 피어오른 화마를 잡는 데 힘쓰기로 했다. 블루노가 사무실에 나타난 건 그 직후였으니 스팬담은 제 전보벌레가 특유의 덤덤한 얼굴을 모사할 때 속으로 살았다는 쾌재를 내질렀다. 그런 이의 앞으로 멀리 건물 사이를 스치는 밀짚모자가 보인 건 덤이었다.
기척을 지우고 찾는다는 것은 저격수인 우솝의 특화 분야였다. 때문에 그는 육안으로 분별하지 못한 거리에서 위협을 느꼈으며 실력이 월등한 동류라는 걸 직감했다. 루피 조로는 도개교너머 우솝이었을 미지의 존재에 더 집중하느라 뒤의 감시를 놓친 거였다. 때문에 우솝의 빠른 판단력은 루피를 한 번, 연이어 조로까지 또 한번 구한 셈인지도 몰랐다. 미지의 저격수에 선제공격을 날리고 재빨리 본섬으로 도망친 우솝은 두 사람의 상태를 보며 이들이 제대로 싸울 수 있을까 싶었으니까. 고문에 의한 루피의 상처도 심했지만 무엇보다 그를 당황케 하는 건 조로의 상태였다. 때문에 해군과 마물을 피해 본섬 측면의 밀집구역을 공략한 우솝은 한적한 골목길에서 숨을 돌리며 조로를 봤다. 루피와 조로는 얌전히 그 뒤를 따르던 중이었다.
“조로, 너 왜…….”
눈이 하나 없냐, 보이는 곳마다 죄 멍자국은 무엇이냐 우솝은 물을 말이 차고넘쳤다. 루피의 상처는 고문에 의한 것이라는 원인이 확실한데 조로는 그가 봐도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었다. 알라바스타와 드레스로자의 이해관계로 맺어진 국혼 아니던가. 그 실체가 볼모라 한들 설마 조로를 대놓고 노예 취급한 것일까 우솝은 혼란스러웠다. 이 모습에서 상디가 왜 정보원의 정체를 숨겼는지는 이해했다지만. 지금 이 모습을 본다면 비비나 나미는 틀림없이 울 것이다.
‘그리고 정말 화를 내겠지.’
우솝은 생각했다. 사실 정말 화가 나면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것 또한 이 두 사람이었다. 군대 동기인 나미는 물론이거니와 알라바스타에서 약 이년여간 허물없이 지낸 비비의 성격 역시 그는 다 알고 있었다. 이 둘이 진짜 일을 치면 저희들 중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때문에라도 우솝 역시 당장은 나미, 비비에게 조로를 숨겨야 한다는데 동의했다. 지금은 루피의 구출이 우선이니까.
‘하지만 그게 정말 맞아? 루피는 왜 조로를 보고 아무렇지 않은 건데?’
멀지 않은 곳에서 연신 총포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조로를 면밀히 살피던 우솝은 말을 함에 신중하고자 했다. 지금 조로는 마치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 같았다. 죽기 전 마지막 불꽃을 틔우는 것과 같은. 그 단어 하나하나에 불길함이 깃드니 우솝은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해서 불러놓고 조용한 우솝을 조로가 멀뚱히 쳐다보려는데 부족장 같은 가면 속 눈이 한 지점에서 흔들렸다. 우솝의 손이 반사적으로 조로의 목을 향했다.
“조로, 너 목에 자국이……!”
“손대지 말아주라, 저격왕. 그 이상은 나도 못 참을 것 같으니까. 이녀석은 내거거든. 나랑 같이갈 거야.”
조로의 목에 둘러진 손수건으로 향하던 우솝의 손을 막은 건 루피였다. 그 손끝은 부드러움 속에 완강함이 있었다. 그제야 우솝은 루피도 다 알고 있음을 눈치챘다. 순간 마주한 녀석의 얼굴에 꾹 눌러둔 감정이 떠올랐다 가라앉는다. 그리고 역시 생각지 못한 말에 조로가 입을 달싹일 때였다.
“저기다! 탈옥한 밀짚모자와 일당을 잡아라!”
“우와아아!!”
골목 끝에서 들려온 스팬담의 외침에 병사 한무리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 얘기는 의무실에서 다 끝난 줄 알았다. 조로는 샹크스와 만났던 걸 털어놨고 루피는 입을 다물었으니까. 스스로 보기 좋은 꼴이 아니라는 건 조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루피를 구하는 걸 가장 우선시 해야 되는 상황에 그는 괜한 말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의도한 건 아니나 샹크스의 존재는 이런 이유를 포함해 안성맞춤이었다.
“얘기는 아까 끝난 거 아니었냐, 루피?! 난 네가 다 알아들은 줄 알았는데!”
“시끄러! 이 바보야!! 바보 길치 검사!!”
“뭐?!”
“잔디머리 삼검류!!”
“야!!”
“매의 눈 바라기!”
“…….”
“검 바보!”
“…….”
“바보 검사!”
“…….”
“아무튼 넌 바보야!!”
“우악!”
골목이 떠나가라 외치는 목소리에는 울분이 있었다. 더불어 루피의 단순한 주먹질에 병사 하나가 날아간다. 두 사람이 말다툼을 하는 동안에도 병사 수십 명이 낙엽처럼 쓸려나갔다. 스팬담은 블루노가 올 때까지 시간끌기 용으로 쓸 병사들을 모아 밀짚모자를 습격했으나 보기 좋게 당했다. 며칠을 갖은 고문에 시달리고 해루석 계구까지 찬 놈을 우습게 본 게 실수였다. 밀짚모자 일당일 게 뻔한 해군 병사 차림의 사내도 실력이 만만찮았고. 시종일관 검을 휘두르고 캡모자를 깊게 눌러써서 얼굴 확인은 어려웠으나 스팬담은 신경쓰지 않았다. 지휘관이라면 응당 저 둘 뒤에서 상황을 관찰하는 가면 녀석이 아니겠는가. 사법 섬에 마물을 떼로 불러오고 탈출극을 짤 만하다면 기상천외한 실력을 가졌을 게 분명하다. 때문에 스팬담은 루피, 조로보다도 그 뒤에서 묵묵히 서있는 가면남을 주목했다. 그가 재판관들에게 협박편지를 보내고 마물을 조종해 난공불락의 사법 섬을 어지럽힌 장본인이며 어쩌면 이 모든 게 밀짚모자를 구하려는 포석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이 전제가 성립하기에는 협박편지가 날아온 시일이 훨씬 전이라는 오류가 있었지만 당장은 일일이 따질 여유가 없었다. 오히려 이만큼 사법 섬을 농락한 자라면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도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때문에 절대 가면남과 밀짚모자를 놓칠 수 없다 여긴 스팬담이 손에 든 전보벌레의 채널을 돌렸다. 그것은 섬 전역의 확성기와 연결됐다.
“탈옥한 밀짚모자가 여기 있다! 근처 병력은 전부 이곳에 집결…!”
“엄호는 이 저격왕에게 맡기게, 제군들!”
방송과 함께 머리 위로 신호탄을 쏘아올리려던 스팬담이 굳었다. 오미터는 되는 거리에서 앞에 남은 이십여 병사들을 피해 날아온 납 탄환이 정확히 스팬담의 손에 있던 플레어건을 가격했다. 그는 방금 막 제 위치를 알리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충격에 총을 놓친 스팬담이 돌처럼 굳었다. 저격왕의 호기 넘치는 외침이 들릴 때 아직 손에 남은 묵직한 충격은 그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다.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가면남 아니 저격왕은. 정작 우솝은 우락부락한 병사 수십명이 달려듦에 다리가 풀리기 직전이었다지만 말이다. 그러던 중 전세가 바뀐 건 블루노가 나타나면서였다. 때는 해루석 계구를 목에 찬 능력자와 정체 모를 일검류 검사 앞에 남은 병사들마저 순식간에 쓸려나가고 달아날 시기를 놓친 스팬담이 잡히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블루노가 골목 옆 벽에 문을 만들어 나타나니 스팬담이 바로 몸을 숨겼다. 블루노 뒤로 닫힌 문이 사라지고 다시 벽이 될쯤 조로는 뒤쪽의 우솝을 향해 지체없이 소리쳤다.
“잡아, 저격왕! 루피의 목줄 열쇠를 가진 놈이다! 놓쳐선 안 돼!”
“좋아! 나한테 맡겨!”
“어림없다!”
조로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든 우솝이 측면 골목으로 사라졌다. 이곳은 밀집한 건물에 의해 자연스레 만들어진 골목이 어지러이 얽힌 곳이었으나 우솝은 지리에 밝았다. 지형만 머리 속에 있다면 스팬담이 사라진 건물을 통해 어느 골목으로 튀어나올지 예상할 수 있다는 거다. 그에 블루노가 우솝을 막으려 도약했지만 건물 위로 뛰어올라 앞서려던 계획이 막혔다.
“큭!”
“어딜 가려고? 네 상대는 나다!!”
우솝에게만 집중했던 블루노는 발목이 잡혀 땅에 처박혔다. 물소를 연상케하는 육중한 몸이 암반에 박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골목이 갈라지며 주변 건물이 기우뚱하건만 크로커다일보다 약 반뼘 정도 더 큰 레슬러 스타일의 남자는 가뿐히 몸을 일으켰다. 몸에 묻은 돌부스러기를 털어내는 모양새가 방금 공격에 전혀 충격을 받지 않은 듯했다. 블루노도 거구에서 나오는 맷집만큼은 꽤 자신있었다. 하지만 목에 해루석을 달고서 이만한 힘을 낸다는 건 놀라운 게 사실이다.
“제법이로군. 역시 가프 중령의 손자라는…….”
“아… 조로, 나 힘들어…….”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됐으니까 쉬고 있어. 저녀석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해루석을 달고 있는 한 루피의 한계점은 별수 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용케 힘을 낸 게 아닌가. 조로는 녹은 떡처럼 늘어지던 녀석에 피식 웃고는 밀짚모자를 한차례 꾹 눌러줬다. 그런 뒤 루피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서는 모습이란 마치 동생을 돌보는 형과 같았다. 이 다정다감한 분위기에서 철저히 배제당한 블루노는 씁쓸함을 느꼈다지만 말이다.
“우리 구면이지? 이제야 지난번에 당한 설욕을 갚아줄 수 있겠네.”
“롤로노아…….”
앞으로 나선 해군 병사 차림의 조로가 두 손에 칼을 쥐었다. 왜 녀석이 여기 있는지 당황한 블루노가 신음같은 소리를 냈다. 그에게는 카쿠 때문에라도 피하고픈 대결이었다.
“한번만 말하지. 순순히 밀짚모자를 내놓고 물러난다면 널 못본 척해주겠다. 내 제안에 응하겠나?”
“거절한다. 루피를 돌려받고 싶다면 날 쓰러트려라, 납치범.”
“납치범??!”
해루석에 의해 흐물흐물해져 있던 루피의 언성이 올라간다. 그순간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있던 블루노의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 조로는 그런 놈에게 눈을 떼지 않으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날카로운 눈매와 얄쌍한 입술이 그리는 미소가 냉소적이었다.
“저 녀석이 내 눈을 이렇게 만든 원인제공자 중 하나라는 거야, 내 말은. …로우는 날 구해준 사람이고.”
“뭐?? 저자식! 역시 내가 처리한다!! 야비한 납치범 자식!!”
“어어? 야, 루피! 넌 나서지 말라니까! 납치범은 내가 처리한다고!”
“둘 다 한꺼번에 상대해주마!”
해루석을 단 능력자와 척 봐도 중환자인 듯한 검사를 상대하는데 블루노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제 승리를 장담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납치범 소리에 정신이 흔들리고 있었다.
겨우 욘디를 뿌리치고 돌아온 크로커다일은 휑하다 못해 벽 한쪽이 완전히 무너진 숙소를 봤다. 이들 숙소는 사법의 탑과 더 가깝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멀쩡했는데 빈 침대만 덩그러니 놓인 방 벽 한쪽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그 너머로 포탄이 날아다니고 쇠긁는 듯한 마물의 괴성이 난무했다. 그리고 크로커다일은 난도질당하듯 걸레짝이 된 마물이 침대와 함께 꽁꽁 묶여 있는 걸 봤다. 미친 것미냥 몸부림치던 녀석에 종잇장과 같은 굵기의 실은 두꺼운 가죽 깊이 파고든 상태였다. 침대와 함께 수백겹을 둘렀으니 한낱 실이라도 힘으로 끊을 수는 없었으리라. 때문에 놈이 묶인 침대는 검붉은 피로 흠뻑 젖었다. 굳이 놈을 죽이지 않고 전시해둔 도피가 얼마나 화가 났을지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이말인즉 침대에 있어야 할 놈이 없었다는 말이렸다. 크로커다일은 다 죽어가면서도 침대가 들썩이도록 이빨을 세우는 마물을 보면서 긴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한손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린 뒤의 표정은 무섭도록 내려앉았으니 그는 곧 왼손의 갈고리를 내려쳤음이다.
“끅…….”
발작하듯 몸부림치던 마물이 잠잠해지더니 벌어진 입을 통해 피거품이 쏟아졌다. 목에 박힌 갈고리를 뽑은 크로커다일에게 붉은 핏방울이 튀었다.
“하…….”
연기처럼 그를 감싸던 모래가 시가와 토치를 실어왔다. 그리고는 시가를 입에 문 크로커다일이 깊은 숨을 내쉬니 무너진 벽너머로 포탄 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저지선이 무너졌다! 전원 대피하라!! 저지선이 무너졌다! 다들 어서 대피해!!”
발 아래로 난무하는 비명과 하나라도 더 살리고자 하는 절박한 외침이 뒤섞인다. 화약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하늘의 검은 무리가 한층 가까워지는 것을 보며 크로커다일은 한줄기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화나는 건 화나는 거고 도피의 진짜 걱정은 따로 있었다. 정신 바짝 차려도 목숨 부지하기 어려운 아수라장에 마약성 진정제를 맞고 돌아다니는 염병할 왕세자비와 로우 일이라면 눈이 돌아가는 악어 자식이었다. 최악은 둘이 먼저 맞딱뜨리는 것인데 경험에 의거해볼 때 염병할 왕세자비가 악어를 제대로 설득할 활률은 영에 수렴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염병할 왕세자비는 로우의 첫정인 아닌가. 아닌 척해도 악어는 이것에 많은 의의를 뒀다. 로시가 죽은 뒤 내내 의무감으로 자리보전하던 녀석이 제르만 호에서 도피 곁에 남겠다 자처한 이유는 오직 이것 때문이었다. 제 사람은 독점해야 직성이 풀리는 도피였으니. 이중에서도 로시와 얽히고설킨 두 사람에 관해서라면 도피의 독점욕 또한 특별했다. 저희 셋 다 결국 로시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는 애증까지 포함해서. 로시에 관해서라면 도피는 결국 그 자신도 용서하지 못했다. 앞으로도 절대 용서할 일은 없을 것이고. 그러니 제르만 호 이후로 방관했다면 도피는 조로를 이용하고도 남았음이다. 차를로스를 낚는 미끼로. 하니 도피가 이 모든 걸 그만둔 이유는 크로커다일이 제안한 거래 덕분이었다. 로우 대신 저를 가지라는. 아, 얼마나 달콤한 속삭임이던가. 이렇듯 악어는 로시의 유산을 위해서라면 낯빛 하나 안 변하고 천길 물속도 뛰어들 인사였다. 때문에 도피는 악어보다 먼저 염병할 왕세자비를 찾고자 혈안이었으나 상황이 좋지 못했다. 하늘을 점령한 놈들에 마음껏 날지도 못할 뿐더러 고막이 터질듯한 소리의 향연은 정보의 제한을 불러왔다. 이런 이유로 도피는 또다시 덤벼든 마물들을 단칼에 처리하며 온몸에 붉은 피를 뒤집어썼다.
“끄억… 꺽… 컥!”
제게 날아온 녀석을 향해 다섯 손가락 끝에서 뻗어나온 실을 뻗어 휘감은 도피가 낚아채듯 잡아당겼다. 바닥에 쓰러진 녀석의 가슴을 발로 누르고 실이 감긴 손을 조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 하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이를 무심히 내려다보던 도피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기실 어둠어둠 열매 능력자에게서 태어난 놈들에게 여타 악마의 열매는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피부 자체에 어둠어둠 열매 능력자가 다른 능력을 무력화시키는 힘이 깃든 탓이다. 원 능력은 손으로 직접 잡아야만 다른 힘을 누를 수 있었지만 놈들은 핵분열에 의해 탄생한 하위 개체였다. 또 지금의 결실은 늙은 왕이 오랜 시간 공들인 결과였고. 이말인즉 무수히 많은 마물 전부가 결국 하나라는 소리다. 덕분에 열매의 능력 또한 전이됐고. 단지 본체가 아닌만큼 제 의지로 능력을 부릴 수는 없었으니 이들이 얻은 건 세포 자체에 깃든 약간의 이점이었다. 그래서 놈들에게 능력자의 힘은 반감되지만 물리적 힘이라면 다르다. 설령 그것이 삼미터에 육박하는 성체라도 독만 조심한다면 도피는 육탄전 또한 자신 있었다. 지금처럼.
“키엑!”
우락부락한 상체의 산만 한 덩치가 날아온 속도 그대로 몸을 내리꽂지만 도피는 그 힘을 이용해 팔을 잡아채 회전했다. 이어 회전속도를 타고 업어치기하니 놈은 목이 반쯤 꺾인 채 바닥에 꽂혔다. 그러고도 바르작대며 움직이려는 녀석에 손끝의 실을 뻗어 버려진 검을 끌어당긴 도피는 긴 팔을 한차례 휘둘렀다. 실에 메인 검이 날아온 속도 그대로 마물의 목을 뚫고 땅에 박힐쯤 도피는 이미 저만치 걸어간 뒤였다.
“하…….”
그는 악어보다 먼저 염병할 왕세자비를 찾는 일이 시급했다.
한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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