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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5 07:25
수도가 내려다보이는 산으로 올라가는 혁명정부 임시총리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쿠로사와가 마치다와 스즈키 및 많은 친구들이 함께 다녔던 대학이 내려다보이는 이 산을, 마치다 케이타는 참 좋아했었다. 마치다 케이타에게 끌려 이 산에 함께 올랐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였는지 홀로 걷는 쿠로사와의 귓가에 마치다 케이타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했다.
[조금만 더 가면 앵두랑 산딸기가 진짜 끝내주게 맛있는 곳이 있다니까. 와인이랑 먹으면 최고야. 기대해.]
형이 넷, 누나가 셋이나 있어서 황위계승순위가 8순위였기에 황제가 될 가능성이 낮았지만 그래도 황자인데. 황자의 몸으로 황실을 전복하는 혁명을 주도했던 마치다 케이타는 본인이 제일 괴로웠을 텐데도 항상 밝았고 불안한 미래를 근심하는 동료들을 늘 다독이며 기운을 북돋워줬다. 어느 날 또 이 산을 함께 올랐을 때 쿠로사와가 준비한 안주 바구니를 내놓자 마치다는 환호하며 그랬었다.
[역시 유이치가 최고야. 나중에 우리가 뜻을 이루면 같이 새로운 세상을 돌아다니며 여행하자. 도시락은 네가 싸. 차비는 내가 낼게.]
그렇게 마치다가 친구들에게 친근하게 굴 때는 꼭 옆에서 끼어들며 맹렬하게 질투하는 녀석이 있었다.
[케이, 여행은 나랑 같이 가야지, 무슨 소리예요?]
[넌 요리 못하잖아. 난 유이치가 좋아.]
[배우면 되잖아요. 그까짓 요리!]
[노부. 난 아직도 네가 끓여줬던 그 오묘한 맛의 수프를 기억하고 있어.]
다른 날들도 있었다. 아몬의 동료였다가 혁명을 함께하게 된 류세이는 성격이 매우 유쾌했고 마치다와도 잘 맞았었다. 그래서 마치다는 류세이와 노는 걸 유독 좋아했고 종종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스즈키는 난리가 났었다.
[류세이,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내가 사 줄게. 뭐 먹으러 갈까?]
마치다가 류세이에게 이렇게 친근하게 굴기만 하면 귀신같이 알고 나타나서 마치다의 옆에서 방방 뛰는 스즈키 녀석의 모습은 모두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기만 했었다.
[케이, 말해 봐요. 나예요. 야오토메예요.]
[당연히 류세이지, 물어봐야 알아?]
[아, 둘 중에 누가 더 미운지 물어봤는데 야오토메라고 한 거죠?]
[아니야! 류세이가 더 좋다고!]
[이미 대답한 건 못 물러요. 야오토메가 더 밉다고 이미 말했어.]
[아니거든? 난 류세이가 더 좋다고 한 거거든? 류세이도 내가 제일 좋지?]
그 말 빨리 철회하라고 방방 뛰는 스즈키 녀석 옆에서 마치다는 보란 듯이 류세이의 팔짱을 꼈고 류세이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정말 시끄럽고 꼴보기 싫어 죽겠다고 친구들과 투덜거리던 날이 많았는데.
그러지 말걸 그랬지.
스즈키와 마치다는 늘 투닥투닥거렸지만 또 늘 꽁냥꽁냥 달콤하게 굴었다. 둘 중 누가 더 문제랄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은 목숨을 걸고 함께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가려하는 동료들이 옆에 있어도 일상처럼 꽁냥꽁냥 속닥속닥 간지럽게 굴었다. 그걸 볼 때마다 쿠로사와도 그랬고 류세이나 쿠니시타, 야마토와 노보루도 그랬었다.
[어우, 저 꼴 좀 안 보고 살고 싶다.]
그때는 몰라서 그랬다. 그 꼴을 안 보고 살게 될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라서.
알았으면 그런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텐데.
쿠로사와가 마치다의 묘로 통하는 샛길로 막 접어들려 할 때 뒤에서 묵직하면서도 조용한 발걸음이 느껴졌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진중한 무게감이 느껴지는데도 고요하게 걷는 이가 누군지 뻔히 알아서 쿠로사와는 멈춰서서 뒤를 돌아봤다. 쿠로사와의 눈은 아몬의 손으로 향했다. 아몬의 손에는 쿠로사와가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와인이 한 병 들려 있었다.
"너도 올 줄 알았으면 나는 술 갖고 오지 말걸."
그러자 아몬의 옆에서 같이 올라오고 있던 소라가 힘없이 웃었다.
"케이타라면 두 병이 뭐야. 세 병도 거뜬히 비울걸. 술고래잖... 아니, 술고래였잖아."
쿠로사와는 그렇게 울고도 눈물이 남아서 또 울었는지 요즘 늘 그랬듯이 또 벌개져 있는 소라의 눈가를 잠깐 바라보다가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그러게, 난 케이타가 언젠가 술병으로 죽을 줄 알았어. 그러니까... 한 30-40년 후에."
정말로 그랬다. 이렇게 빨리, 이렇게 끔찍하게 죽어 버릴 줄 모르고.
쿠로사와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스즈키 녀석, 오늘도 방에서 안 나왔어?"
스즈키는 마치다가 죽은 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한동안은 바빴다. 마치다가 왜 실종됐었는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헤쳤고 관련된 놈들을 다 잡아들였다. 마치다가 스파이라고 마치다를 내놓으라고 했었던 이들 앞에 그들을 던져줬다. 평화를 바랐으나 결국 피를 보고 말았던 혁명의 분위기에 취해 있던 이들이 원하던 반동의 무리가 마치다가 아니라 그들이었음을 대대적으로 공표했다. 마치다를 납치했었던 황족들과 귀족들 무리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 무리 중 주동자였던 황족 두 명은 계속 찾지 못했는데 결국 어느 날 몰골을 알아보기 힘든 시체로 발견됐다.
그 일이 끝난 후, 스즈키는 마치다가 쓰던 방에 틀어박혔다. 술에 만취해 있거나 매일 울부짖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다가 죽었을 때는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었지만 마치다를 묻은 뒤로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저 매일 마치다가 남긴 수첩들을 보거나 마치다가 좋아하던 책, 마치다가 스즈키와 함께 바닷가에 짧게 바람을 쐬러 갔을 때 모아온 조개껍데기를 모아둔 상자나 마치다가 장난처럼 그려준 스즈키의 초상화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다는 그림 솜씨가 그다지 봐 줄 만한 정도가 아니었는데 어린애 낙서 같은 그 그림을 스즈키는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친구들이 스즈키를 방 밖으로 끌어내려 해도 소용없었다. 스즈키는 마치다가 쓰던 방에 틀어박힌 채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았다. 오늘도 역시 그랬으리라 생각하고 물었는데 아몬이 고개를 저었다.
"나왔다."
"나왔다고?"
쿠로사와가 고개를 돌리자 아몬은 계속 걸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발도 하고 면도도 했더군. 옷도 깔끔하게 입고."
"정말이야?"
한동안은 입에 뭘 넣으려 하지도 않고 정말 길거리 거지처럼 제대로 씻지도 않고 옷도 안 갈아입고 있더니 정신을 차리긴 차렸나.
"케이타 방에 스즈키가 입을 만한 옷이 있었나. 뭐 입었던데?"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묻자 아몬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케이타가 생-"
그러나 쿠로사와는 발걸음을 뚝 멈춘 채 아몬의 말을 끊고 대신 말을 이었다.
"케이타가 생일에 사줬던 옷."
아몬이 고개를 돌려 의아한 얼굴로 쿠로사와를 바라보는 것과 동시에 아몬보다 조금 더 앞쪽에서 걷고 있던 소라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산을 울렸다.
마치다가 스즈키의 생일에 선물해 줬던 세련된 느낌의 옷을 위아래로 다 갖춰입은 스즈키가 마치다의 묘 앞에 쓰러져 있었다. 살아 있는지 확인해 볼 것도 없었다. 마치다가 죽었을 때처럼 스즈키의 목에서 피가 잔뜩 뿜어져 나와 마치다의 묘 주위를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저렇게 피를 많이 흘리고 살아 있을 리가 없잖아.
소라와 아몬이 정신없이 달려가서 스즈키의 맥박과 호흡을 확인하다가 울부짖는 걸 보면서 쿠로사와는 눈을 들어 그 뒤에 있는 마치다의 묘를 바라봤다.
혁명은 마침내 승리로 끝났다. 황실은 무너졌고, 과거에 확고한 권력의 상징이었던 황성은 혁명정부의 청사가 됐다. 황성의 켜다란 별관들은 이제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며 새로운 지식을 탐구할 수 있는 시민도서관으로 탈바꿈 중이었다. 시민들은 이제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대표자를 직접 선출할 수 있게 되었고, 오랫동안 많은 이의 눈물과 한이 되었던 낡고 비틀린 신분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누구나 소정의 수업료만 내면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시대가 열렸으며, 합리적인 세금 개혁이 논의되고 있었다. 더 이상 천한 신분이라는 이유로 정당한 이유도 없이 채찍질을 당하지 않게 됐고, 타인의 재산과 사람과 목숨을 멋대로 빼앗고도 법망을 피해갈 수 있는 이들은 없어졌다.
물론 사회는 여전히 변화의 과정 속에 있어 혼란스러운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공기 중에는 새로운 시대의 희망이 가득 차 있었다. 불안과 고통에 찌들어 있던 표정 대신, 사람들은 환하게 웃으며 거리를 걸었고, 한때 욕설과 한숨이 가득했던 거리는 이제 노랫소리와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그들이 꿈꾸던 새로운 세상은 드디어 만들어졌다.
그들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고 그들의 혁명은 성공이었다.
그때 와인병이 흙바닥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자 들고 온 와인을 바닥에 툭 떨어뜨린 류세이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흙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는 게 보였다. 쿠로사와는 류세이의 표정이 처참하게 허물어지는 걸 보다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스즈키의 시신을 끌어안고 울부짖는 소라와 절망적인 표정으로 스즈키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몬을 보던 쿠로사와는 천천히 발을 옮겨 스즈키에게 다가갔다. 스즈키의 손에는 한때는 마치다의 눈물로 젖어 있었고, 이제는 스즈키의 피로 젖어 버린 종이가 한 장 들려 있었다. 피범벅이 된 종이의 글자들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마치다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유서 같은 그 글을 몇 번이나 읽었던 쿠로사와는 스즈키의 피로 젖은 글자들이 뭔지 알 수 있었다. 눈물과 핏물을 잔뜩 머금은 저 종이에 쓰인 글의 마지막 문장이 뭔지 쿠로사와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었다.
다음 세상이 있다면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마치다와 함께 미래를 꿈꾸고 혁명을 일궈나갔던 모두의 가슴에 한으로 남은 마치다의 마지막 말이었으니까.
피에 젖은 그 종이를 바라보던 쿠로사와는 문득 생각했다.
혁명 같은 거 하지 말걸.
정말로... 하지 말걸.
꿈은 이루었으나... 지독하게 허무하고 피곤했다.
역시...
혁명 같은 거 하지 말걸 그랬어.
이제 담편부터 환생물
#성혁망사놉맟환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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