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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9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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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잔을 입에 털어 넣고 있는 스티브의 옆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지는 대충 감이 왔던 터라 돌아보진 않았다. 올리브가 든 접시를 내려놓은 나타샤가 남은 맥주를 잔에 따른 뒤 스티브의 앞으로 밀어줬다. 


"취하고 싶으면 토르한테 연락 넣어 줘?"

"......그냥 좀 답답해서."


벌써 몇 번째 마찰인지도 까마득했다. 스티브와 토니가 언쟁을 할 때마다 바튼이 7라운드, 8라운드 하고 속삭이며 깐족댔으나 2주 전쯤엔 그 카운트마저 멈췄다. 잦은 갈등은 팀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란 생각에 몇 번이고 다짐을 해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토니에게는 매번 새롭고 참신한 방식으로 저를 자극시키는 능력이 있는것 같았다.


"이번엔 또 뭐 때문에 싸웠더라? 저번주랑 워낙 다를 게 없어서 좀 헷갈리네."


명백히 놀리는 투에 스티브가 한숨을 쉬었다. 


"통제되지 않는 팀원과 함께 현장에 나갈 수는 없어."

"엄밀히 말해서 우리 중에 통제가 가능한 팀원이라면... 둘, 너까지 해도 셋 정도 되겠네."

"........"

"그냥 내버려 둬."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말을 들었단 듯 스티브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포크로 안주를 찍다말고 손이 휘청했다. 올리브 하나가 접시 위에 나뒹굴었다.


"내버려 두라고...?"


충격을 받아 스티브의 목소리가 평소답지 않게 나지막해졌다. 내버려 두라니. 스티브는 혼란스러웠다. 내버려 둬야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단 점에 놀란 건지, 토니를 내버려 두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놀란 건지 구분이 안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타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낙오된 올리브를 찍어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채로 냇이 말을 이었다.


"그래. 확실히 초반하곤 다르잖아. 그걸 못 느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좀 멋대로 굴지만 결국 하라는 대로 하잖아? 자기 머리로 계산한 최적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이라 그런 것뿐이고."


헐크에게 깨고 부수는 게 방식인 것처럼.

덧붙인 말에 스티브는 잠시 말을 골랐다. 고민하는 미간이 심각했다. 발언을 준비하는 입도 달싹거리는 중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냇의 안중에는 없었다.


"못 미더워서 그래?"


이제 막 움직이려던 중이었던 입술이 다시 한번 힘을 잃었다. 포크를 쥐고 있던 손도 마찬가지였다. 또 한 번 접시 위의 올리브가 도르륵 굴러가기 시작했다. 

못 미덥냐고?




/




진부한 인질극이었다. 아마도 범인은 몇몇 영화에 심취해있는듯 했다. 복면은 커녕 온 얼굴을 다 드러내고 시종일관 과장된 대사와 몸짓을 하는 태도에서 이미 짐작했지만, 무전기 너머로 빈정대며 두어개의 영화제목을 나열하는 토니 덕에 모두가 확신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상황이 영화가 아니라는 점이었고, 때문에 그럴싸하게 연출된 악인을 흉내내던 자는 수세에 몰리자 준비했던 모든 협박을 쏟아내며 발버둥을 쳤다.


"선택해! 인질인지 폭탄인지!"


꽤나 위험할수 있는 순간이긴 했다. 병원을 점령한 범인을 포위하기 위해 냇과 토르는 지하로부터 접근 중이었고 헐크는 옥상문을 뜯어내고 있었으며 바튼은 반대편 건물에서 활로 저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끝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그는 다른 인질의 존재와 발전소의 폭탄을 최후의 보루처럼 들먹였다. 이기겠다는 의중 보다는 이젠 도망칠 구석이 없다는 선언이나 다름 없었다. 아차 하는 순간 모든게 날아갈수 있단 뜻이었다.

그러나 그가 겁에 질려 갈라진 목소리를 다시 꾸며낼 새도 없이 승세의 가닥이 결정됐다.


- 인질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캡틴 아메리카는 인질에게로, 아이언맨은 폭탄이 있는 발전소로 갈라졌습니다. 이미 그의 계획을 예상하고 있던걸로 보이는데요. 어벤져스의 활약과 팀워크로 금일의 소동은 부상자 7명을 제외하고-


현장을 중계하는 기자의 목소리에 본부로 돌아가던 스티브의 발걸음이 미묘하게 느려졌다. 팀워크. 속으로 단어를 곱씹었다.


"토니랑 따로 무전하고 있었어 캡?"


바튼의 물음에도 대답없이 송수신기를 제거했다. 답을 하지 않았다기보단 뭐라고 답해야할지 모른다는게 더 정확했다. 

폭탄과 또다른 인질 모두 예상하지 못한 수였다. 그래도 인질의 위치를 듣자마자 몸을 움직였다.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술수를 이해하지 못한건 아니었다. 그러나 스티브는 본래 이런 종류의 저울질엔 소질이 없었다. 그럴 생각도 없었고.

쉬울 리가 없는 순간에 저는 무슨 확신으로 그렇게 망설임 없이 움직였을까. 속이 복잡했다. 스티브는 방패를 고쳐매고 달음박질을 치기 직전 귀에 꽂힌 소리를 떠올린다. 아머의 추진기 소리였다.


예상했던 대로- 라고 생각했다. 인질범의 계획이 아니라 토니의 선택이. 


다시 익숙한 소리와 함께 아머를 탄 토니가 현장으로 돌아왔다. 수트의 헤드만 열어둔채였다. 그리고 요원들에게 폭탄해제 작업의 후처리를 지시하기 시작했다. 한편 아직 답을 듣지 못한 바튼이 다시 한번 물었다.


"아니 그래서 너네 그새 언제 상의하고 갈라졌냐니까?"


성에 찬 목소리에 돌아보던 토니와 문득 눈이 마주쳤다. 토니는 스티브가 제 뒤에 있었단 사실도 몰랐던 것처럼 놀라보였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마주쳐오는 갈색 눈을 샅샅이 뒤져보듯 살피던 스티브가 생각했다. 토니도 알고 있었구나. 내가 어떤 쪽으로 달려갈지. 무슨 선택을 할지. 그래서였구나.




/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자다말고 창밖으로 수 번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이런 날이면 매번 그랬듯 편히 자긴 글렀단걸 경험으로 익힌 스티브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직업병인지 책임감인지. 아니면 그저 강박일지도 모른다. 익숙한 사이렌 경고음과 함께 딸려오는 정신없는 고함소리나, 겁에 질린 사람들의 비명이 들리는듯 했다. 비단 이런 신경증을 차치하고도 일단 마음이 개운치 못했다.

자비스를 통해 무슨 일인지 알아볼까 잠시 고민도 했지만 접었다. 새벽이기도 했고, 자비스를 통한다면 의도치 않게 누군가의 귀에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토니?"


그리고 그 누군가가 어두운 라운지 소파 한가운데 앉아있는걸 보고는 적잖이 당황하는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캡? 이 시간에 잠도 안자고 여긴 왜 나온-"


때맞춰 다시 한 번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둘의 시선이 약속한듯 테라스로 돌아갔다.


"......내가 확인했어. 큰 문제는 아니야. 아마 곧 수습 될거고. 다시 가서 자."


창밖에서 들어오는 얕은 불빛에도 보일만큼 토니의 눈이 붉었다. 딱 그정도로 피곤을 숨기지 못하던 토니가 이내 눈가를 꾹꾹 눌렀다. 아까부터 스티브를 괴롭히던 비명과 고함소리가 멎었다. 대신 짐작보다도 더 미약한 토니의 한숨이 들렸다.

더이상의 별다른 대화 없이 토니가 라운지를 빠져나갔다. 스티브와 달리 어둠에 밝은 눈이 아닐텐데도 조명 하나 없이 새카맣게 물든 길을 잘도 걸었다. 이런 밤이 처음이 아니구나. 여전히 잠들지 못한 침대 맡에서 스티브는 그런 생각을 했다.




/




회의실 옆방으로 들어와 꼼꼼히 문을 닫은 토니가 의자 위에 눕듯이 앉아 늘어졌다. 회의를 20분 남짓 남겨두고 모이기 시작한 사람들에 층 전체가 왁자지껄해졌다. 벽 너머로도 소음이 들렸다. 

사흘동안 긁어모아 5시간 정도 잠을 잤다. 이제 토니는 이게 소음인지 두통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머라도 입고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문이 한 번 열렸다 닫혔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실은 돌아볼 힘이 없었다.


"회사 일로 바쁘다고 들었는데."


그치만 너무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스티브였다.


"......뭐야? 그게 왜. 회의 안가고 튀기라도 할까봐? 걱정 마. 회의도 참여할거고 이따 미션도 갈거야."


당황하면 시비부터 터는 토니가 결코 나긋하지 못한 투로 대답했다. 그런데 말해놓고서 또 한 번 당황하는 것도 토니의 몫이었다. 인상이나 구길줄 알았던 스티브가 말없이 웬 종이백을 책상위에 올려놨기 때문이었다.


"이건 또 뭐야."

"샌드위치네."


내가 지금 그걸 물어봤어? 대강 뭐 이딴 식으로 말하기 위해 벌어졌던 토니의 입이 그대로 멈췄다. 종이백에 그려진 로고가 익숙했다. 평소 토니가 즐겨먹던 브랜드였다. 메뉴 표시를 위해 매직으로 휘갈겨진 메모도 눈에 들어왔다. '치즈 추가. 피클 빼고.'


"그래서 왔네. 회의도 참여하고 미션도 갈 것 같길래."


멀뚱히 눈만 깜빡이는 토니를 잠시 내려다보던 스팁이 말을 이었다.


"10분 정도는 늦어도 되니까 천천히 먹고 들어오도록 해."


5시간 밖에 못 잔게 아니라 혹시 50시간째 자고 있는 건 아니겠지? 토니가 얕은 공황에 빠져있는 사이 스팁이 방을 나섰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틈으로 회의실의 소음이 커졌다가 다시 작아졌다. 그게 꼭 물 속에서 듣는 소리 같아 토니의 정신을 더 멍하게 했다.

같은 가게의 커피가 들어있을거라 생각했던 음료봉지에는 피로회복제가 있었다. 비타민 함유량이 커다란 글자로 강조되어 써있었다. 토니가 그 숫자를 노려보며 지금 이 상황에 대한 현실감을 찾기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회의시간이 10분 지나도록 딱히 효과는 없었다.




/




휴게실로 들어서던 스티브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간식을 먹거나 과자봉지를 뜯거나 티비를 향해 삿대질을 하는 팀원들 가운데 토니는 없었다. 밥은 먹었냐 묻는 배너와 가볍게 인사를 주고 받았지만 돌아가던 눈동자는 여전히 쉬지 않는 채였다. 그때 드디어 동그란 뒷통수가 발견됐다. 토니는 몸을 작게 말고 3인용 소파에 구겨져있었다.


"캡틴!"


반가워서 평소보다 더 우렁차진 토르의 목소리에 스티브는 꽤 크게 놀랐다. 소파에 처박혀있던 어깨가 움찔거리는 걸 의식하는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심판이 필요하오!"

"아니 게임 시스템이 곧 심판이라니까? 저거 봐, 네 캐릭터 체력이 다 닳아서 죽은거라고!"

"나는 아직 더 싸울수 있소!"


예정에 있던 훈련을 취소한 참이었다. 승패를 인정하지 않고 길길이 날뛰는 토르를 보면서도 바튼은 낄낄 웃었다. 모두가 즐거워보였다. 


"가끔 이렇게 땡땡이 치고 놀자." 

"땡땡이가 아니라 어쩔 수 없었던거네. 훈련실이 계속 공사중이니까."

"그래. 멀쩡하던 훈련실을 왜 뜯어고치는지는 모르겠지만."


수퍼솔져용 샌드백을 한 오백개 달고 싶었나보지- 

나타샤가 과자를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비꼬는게 분명한 어투 같았는데 말하는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스티브는 묘하게 웃는 그 얼굴을 보면서도 의중을 바로 파악하지 못했다. 신경이 다른데에 팔려있던 것도 이유였다. 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누군가가 소파 위에서 꿈틀대다 말고 움직임을 뚝 멈췄다.  


"아직 수트랑 전투장비 수리도 다 끝나지 않았고."

"난 그거 저번 주말에 이미 도착했는데."


바튼의 말이 끝나자마자 엎어져있던 토니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힐끗 눈을 돌려보려던 스티브의 코앞에 배너가 과자봉지를 내밀었다. 스티브는 반사적으로 손부터 뻗었다.


"캡틴 거는 업그레이드할 게 더 남았나보지. 아니면 그러고 싶었거나."


드디어 나타샤의 어투가 해석되는 동시에 스티브의 손이 삐끗했다. 카펫 바닥에 과자 서너개가 떨어졌다. 토르가 재빨리 그 중 하나를 주워 입에 넣었다.

저 인간이 도망을 칠 때도 있네.

냇이 중얼거렸다. 스티브가 정신을 차렸을땐 토니가 이미 휴게실을 나서고 있었다. 다소 긴박해보이는 걸음이었다. 스티브가 여전히 멈춘 채로 움직이지 않자 토르는 눈치를 봤다. 토르가 떨어져있던 과자를 주워 스티브의 입에 직접 욱여넣기 시작했다.

이빨을 비집고 들어온 과자가 세개쯤 됐을때 스티브는 발견했다. 멀어지는 토니의 뒷통수로 삐져나온 귀끝이 붉었다. 바삭 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시력이 좋아서 다행이다.




/




토니는 잠을 잘 때마다 몸을 둥글게 말고 눕는 습관이 있었다. 조명을 피해서 베개에 고개를 파묻기도 했다. 스티브는 익숙하게 손차양을 만들어 토니의 이마께에 조심히 갖다 댔다. 감은 눈 사이의 미간이 부드럽게 펴졌다.

살짝 벌어진 토니의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자 입이 합 다물렸다. 스티브가 남의 입술을 두고 손장난을 치기를 한참, 아래층에서 웬 포효소리가 들렸다. 토르였다.

햇빛은 막아줄 수 있었지만 소리는 그렇지 못했다. 결국 토니가 꿈지럭거리며 눈을 떴다. 바싹 마른 맨살끼리 닿는 감촉이 간지러웠다.


"...무슨 타잔이라도 온 줄 알았네."


토니는 타잔 대신 그와 비슷한 차림의 스티브와 눈을 맞춘다. 헐벗은 상체에 버릇처럼 손을 올리고는 손톱을 세워 아프지 않게 긁어댔다. 


"또 바튼과 다트 게임을 하고 있나 보군."


손가락이 움직이는 만큼 스티브의 가슴께에 붉은 줄이 생겼다. 토니의 몸에도 역시 불규칙하게 열꽃이 있었다. 스티브는 그게 좋았다. 만지고 닿는 만큼 생기는 자국들이. 스티브가 그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토니도 알았다.

각자 눈앞의 시야에 빠져있는동안 다시 한 번 우렁찬 고함이 들렸다. 대충 들어도 불만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소리였다. 


"졌나보네."

"매번 저렇게 처음 지는 것처럼 분해하는군."

"바튼이 사람 놀려먹는 걸로는 어디서 빠지질 않잖아. 분명 졌으니까 다트는 네가 뽑아오라고 심부름이라도 시켰겠지."

"묠니르처럼 부른다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단 사실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긴 하더군."


큭큭 웃던 토니가 갑자기 생각에 빠졌다. 딴 세상에 가있느라 초점이 사라졌는데 신기하게 눈동자가 더 초롱초롱해졌다. 이 눈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당신 방패 말이야. 던졌다가 알아서 돌아오게 하는건 어때."


그게 꼭 필요한지는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스티브는 그런 말 대신 괜히 토니의 턱에 이빨을 세우고 한입에 넣어본다. 

별로 어렵지도 않을것 같애. 자기장만 조절하면 될걸? 턱이 물린 채로도 토니가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렸다. 

하릴없이 떠드는 사이 볕이 더 강해져있었다. 이번엔 토니가 능숙한 손길로 자비스를 향해 손짓했다. 가벼운 재질의 커튼이 소리없이 내려왔다.  스티브의 파란 눈은 햇빛에 약했다. 

아주 평범하고 별다를것 없는 아침이었다.




/




"이게 뭐야? 신발?"


토니가 스티브의 오믈렛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딱 봐도 오믈렛인데." 

"아니야. 당신도 얼른 먹어봐. 맛도 신발 맛인 것 같아."


아침부터 파를 송송 써느라 매웠던 눈이 아직도 따끔거렸다. 스티브는 조금 억울했지만 이번엔 참기로 했다. 이틀 전 토니가 만들어둔 부라타치즈샐러드를 통째로 버렸었다. 맹세코 정말 상한 건줄 알았다.


"든든하게 먹게. 주말엔 미션이 있으니 오늘까진 일을 다 끝내놔야지."


스티브가 토니의 접시에 오믈렛 한 덩어리를 더 얹었다. 토니가 가죽을 씹는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네덜란드라고 했지? 안 그래도 거기 총리 뒤 구리단 소린 들었는데 어김이 없네. 잡을 손이 없어서 하이드라를-"


스티브는 알지 못하는 이름들이 나열됐다. 어떤 미션이 거론되든 토니는 관련된 기업인이며 정치인, 하다못해 뼈가 굵은 준범죄자들까지 꿰고있었다. 어딘가로 전화를 하거나 패드를 툭툭 두들기면서 상황을 컨트롤하기도 했다. 스티브는 때때로 추궁하고 가끔은 막아세웠으나 대부분 그저 지켜봤다. 그게 토니의 방식이었으니까. 스티브의 방식이 방패를 고쳐매 사람을 이끌고 사람에게 먼저 달려가는 것처럼. 그렇게 여겼고 그래야한다고 생각했다.

간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다시 돌이켜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스티브는 어떤 예감을 뒤로하고 토니의 입가에 묻은 케첩 소스를 닦는 데에 그쳤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스티브는 토니를 위해 손차양을 만들고, 토니는 스티브를 생각해 커튼을 치는 사람이어서. 내가 인질을 구하러 갈 동안 너는 폭탄을 해제하면 되니까.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럴 리가 없는데. 신발 같은 오믈렛을 입 한가득 넣고 씹어대는 볼이 사랑스러워서. 그만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버린거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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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캐릭터에 안 맞게 너무 조용하네."

"벌써 마음을 결정해서 그렇겠지."

"날 너무 잘 알고 있네."


이상한 일이었다. 토니의 그 말이 속을 갑갑하게 했다. 상대를 너무 잘 알아서 내 편이 아닐 것마저 미리 알게 되는 기분은 확실히 이상했다.

너는 끝까지 네 의견을 굽히지 않겠구나. 스티브를 설득하겠노라고 마주한 자리였지만 토니는 좀처럼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집요하게 그 눈을 쫓아 확인한 스티브는 확신했다. 우리는 오늘 우리기 때문에 헤어지겠구나. 우리가 우리라서 되는 일은 결국 없던 거야. 

토니의 셔츠 안쪽으로 얇은 살이 보였다. 사흘 전엔 둥글게 말려있던 저 몸을 제 손으로 열어 이를 박아 넣고 입술을 내렸다. 쥐고 문대는 대로 붉어졌던 흔적이 사라져있었다. 그 날 밤의 일이 다 거짓말 같았다. 눈을 보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느껴졌다. 여전히 그랬다. 그걸 알아서, 아는 만큼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것도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




"쳐다본다고 전화가 와?"

"...샘."


예상보다도 더 나빴다. 결과가 그랬다. 왜 이렇게 됐는지 이렇게 돼야만 했는지 되짚는 대신 스티브는 할 수 있는 일부터 했다. 그는 본래 그런 사람이었다. 


"스타크가 그걸 쓸까?"


...글쎄. 회피가 아니라 정말로 몰랐다. 그러나 그마저 대답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으니 결국 일종의 회피인가 싶었다. 

사용할 일이 없어 잘 닳지도 않는 전화기를 매일밤 꼬박꼬박 충전하면서 스티브는 생각했다. 토니의 전화를 기다리는 이유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가 날 필요로 한다는 걸 확인받고 싶은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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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칸다의 방패는 본래 스팁의 것보다 조금 더 가벼웠고 훨씬 더 날렵했다. 


"이게 아무래도 캡틴께서 기존에 쓰시던 것보단 공격 위주라서요. 날리고 돌아오는 맛은 없어도 내려찍는 데에는 더 유용할 겁니다."


새 방패의 무게에 익숙해지기 위해 이리저리 팔을 움직이던 스티브가 우뚝 멈췄다. 


"...방패를... 돌아오게 할 이유가 없겠군요."

"네. 뭐, 그런 셈이죠."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토니는 구상한 것들을 기어코 실현시키곤 했다. 자기력 유도 장치는 던졌던 방패를 다시 가볍게 돌아오게 했다. 오래 쓰지 않은 기능임에도 손에 익었던 감각이 생생했다. 스티브는 제 손목에 꼼꼼히 기능을 추가하던 토니의 머리 꼭지를 되새긴다. 

방패는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두고 온 거라고 여겼었다. 제가 놓고 제 손으로 두고 온 거라고.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처음이었다. 돌아오지 않은 거구나.

토니. 불러도 닿을 곳이 없는 이름이라서. 돌아올 대답이 없는 상대라서 스티브는 입 안으로만 이름을 곱씹었다.




/




핏기 없는 얼굴이 생각보다도 더 질려있었다. 병실 침대에 누운 토니의 모습이 그랬다. 둘은 셀 수 없이 많은 전투를 치렀고 수십 번도 넘게 함께 구른 사이였다. 그럼에도 덜컥 겁이 날 만큼이었다.

코에 닿는 숨이 손가락을 간질이지도 못할 만큼 미약했다. 스티브는 의식 없는 토니를 깨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깨워서 캐묻고 싶었지만 뭘 묻고 싶은지 스스로도 몰랐다. 무엇이 불안한 건지도 모르는 채로 불안이 커지기만 했다.

창밖으로 노을이 들어왔다. 빛이 드리워지기 전에 스티브는 습관처럼 토니의 눈가를 가렸다. 손에 닿는 살결이 익숙했다. 




/




잠들었다는 걸 깨어난 뒤에야 알았다. 침대에 있던 토니가 사라져있었다. 서둘러 시계를 확인했으나 이미 새벽은 한참 지나 아침이 된 후였다. 그런 것치고는 사위가 어두웠다. 병실을 둘러보던 스티브는 꼼꼼히 쳐진 커튼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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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you trust me?"


답을 하기 전엔 숨을 크게 들이마신 것도 같았고 이를 악문 것도 같았다.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았다. 다만 온 몸으로 깨달았다. 나는 줄곧 대답하고 싶었구나. 

시종일관 말을 걸던 스콧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었다. 전장의 기운이 가시지 않아 어수선하고 난장판이던 뉴욕의 거리 역시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낯익은 갈색 눈이 시야의 전부인 것 같았다. 진부하게도 그랬다. 




/




1970년 4월, 그리 춥지 않은 계절이었으나 토니는 두 겹의 옷을 껴입어야 했다. 박사 역할을 하려면 로고가 새겨진 가운이 필수였으니 하는 수 없었다. 사실 스티브와 같이 군복을 입을 계획이었다. 군화를 신다말고 끝없이 이어진 매듭에 열이 받은 토니가 신던 걸 그대로 던지지만 않았아도 그랬을 거다.

이미 70년대 대위의 모습을 갖춘 스티브가 툴툴대며 바지를 꿰어입는 토니의 머리통을 관찰했다. 시선이 느껴졌는지 토니가 셔츠를 입으면서는 마주보고있던 몸을 슬슬 돌려 딴청을 부렸다. 두어개의 단추만 남겨두고 있었는데 별안간 상체가 딸려갔다.

목덜미 아래 뼈가 움푹 들어간 공간에 스티브가 자리를 잡고 이를 박아넣었다. 파득 거리며 품 안에서 떠는 몸이 기꺼웠다. 

힘을 풀어주자 그제야 떨어진 토니가 잠시 얼이 빠져있다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스콧을 데려올 걸 그랬나. 이거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것 같은데."

"날 믿는다면서."

"...내가 언제? 당신이 그랬지."


그러자 이번엔 얼굴째로 다가오는 스티브를 두 손으로 막아야했다. 한숨 같이 웃어보인 토니가 밀어내던 손을 양옆으로 돌려 스티브의 얼굴을 천천히 끌어왔다.


"그래 좋아. 나도야."


눈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ㅌㅆ업로드 한적 있음
2024.06.30 00:15
ㅇㅇ
모바일
너무 좋아서 말이 안나오네............
[Code: 46a3]
2024.06.30 00:20
ㅇㅇ
모바일
하 미친 이게 스토니지.....
[Code: 7850]
2024.06.30 11:07
ㅇㅇ
모바일
팀업한 이후로 지금에 오기까지 쭉 스티브는 스티브의 방식으로, 토니는 토니의 방식으로 서로의 그늘을 만들어주고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말 없이도 자연스럽게 알게되는거ㅠㅠㅠㅠㅠ든든한 만큼 마음도 시리지만 그래도 너무 좋다고 스토니 최고다 진짜
[Code: 8921]
2024.06.30 16:25
ㅇㅇ
모바일
존좋..........
[Code: edee]
2024.06.30 22:45
ㅇㅇ
모바일
상대를 자기방식으로 무리해서 바꾸려하지않고 있는 그대로 서로를 보는 스토니.. 센세 어나더!
[Code: f1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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