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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7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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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에 실습에 시험에. 이놈의 스타플릿은 그들이 여유를 부리거나 조금이라도 노는 꼴을 보지 못하는듯 했다. 아카데미가 갈라놓은 커플이 강의실 두세개를 채우고도 남지 않을까. 커크는 그 강의실에 본즈와 자신의 이름이 오르지 않기를 바라며 한 달 뒤의 데이트 계획을 짜는 중이었다. 무려 한 달 뒤였지만 그는 농땡이를 피울 합당한 이유가 필요 했다. 마켓 플레이스에 갈까 치즈나 와인을 사서 테라스에서 시간을 보내는 거지. 부두에서 페리를 타고 섬 투어를 갈까? 본즈가 배는 싫어 하려나... 그의 계획은 거리와 시간따위 신경 쓰지 않고 샌프란시스코 최남단에서 주 밖까지 종횡무진 하였다.


"본즈 아이스크림 가게 갈까? 아니다 하이킹 갔다가 레스토랑에 가는건?"
"아이스크림도 좋고 레스토랑도 좋아. 하이킹도"


커크는 질문을 던져놓고 그의 대답에는 크게 흥미가 없는지 다시 자신의 메모에 밑줄을 죽죽 그으며 "조금 더 멀리 나가서 1박을 하는 것도 괜찮지... 흐흐" 라고 다 들리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흐흐'에서 본즈로 하여금 생각이 들게 하지만 혹자는 벽 하나를 두고 생도들이 모여사는 공동 취사용 건물에서 밤새 관계를 하는 것보다 멀쩡한 호텔이나 모텔을 이용하는 것이 평범한 선택이라고 할 것이다. 커크에게만 그게 특별한 이벤트 같이 느껴지는거겠지만.


그리고 커크의 패드의 저장공간을 차지하던 계획들이 결국 그들을 어디로 향하게 했냐하면, 아무데도 가지 못 했다. 시험이 끝나고 커크는 동기들과 펍으로 직행했고, 새벽에 감기와 함께 돌아왔다. 본즈의 잔소리는 덤이었다. 과음과 감기 그리고 약속의 불이행은 커크의 꼬리표와 같았지만 이번만은 눈치가 보였는지 이불을 눈 아래까지만 뒤집어 쓰고 본즈의 행방을 눈으로 좇았다.


"미안해 오랜만에 데이트인데..."
"괜찮아. 한 숨 자고 나면 고전영화나 보자"
"영화 보고 싶었어? 나가기 싫었던거야?"
"아니야. 나가는 거 좋지"
"역시 그렇지? 이번주 내내 공부하느라 방에 있었잖아. 혼자라도 갔다와"
"안 그래도 돼."


짜증도 섭섭함도 열정도 없는 그 말투는 골든 브릿지든 39베이든 어디든 좋다고 하던 대답의 말투와 같았다. 사실 아무데도 관심이 없었던 거 아닐까. 자신과의 데이트 자체가 관심이 없었다던지... 얄팍한 의심이 건방지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커크는 밤새 자신을 간호해 주던 본즈를 떠올렸다. 리플리케이터로 생성한게 아닌 진짜 스프를 사와 준 -심지어 시험이 끝난 후의 휴일이라 아카데미 주변 가게는 문이 닫혀있었다- 본즈에게 못 할 짓이었다. 대신 이제는 순수하게 그의 취향이 궁금했다.

"넌 그럼 다음에 리트리트는 어디로 신청할거야?"

본즈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고민하는 척도 안했다

"너 있는 곳?"

그게 뭐야. 그 직설적이고 심심한 대답에 그 순간의 커크는 어떠한 로맨틱함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허탈하고 조금 어이없고 웃기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 감정마저도 본즈가 가져 온 따뜻하게 데워와진 호박스프 냄새에 더이상의 태클은 잊어버리고 말았었다.







그리고 지금, 커크는 인데버호 탑승 신청서에 적힌 레너드 H. 맥코이라는 이름을 보며 그 날이 떠올랐다. 스타플릿 직원이면 누구나 사용하는 반듯한 폰트가 어쩐지 숨 막히게 느껴졌다. 그의 손끝은 어느새 살짝 떨리고 있었다. 패드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천천히 본즈에게로 옮겨졌다.

본즈는 여전히 태연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마치 부둣가 근처 카페가 아니라 기숙사에서의 휴일을 대신 선택한 중요성 정도의 느긋한 표정이었다. 커크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툭 내뱉었다.

"메디컬 치프 자리는 이미 찼어."
"알고 있어."

순간, 커크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 그래?" 그는 다시 패드를 내려다봤다. 그의 이름은 메디컬 장교가 아닌 일반 크루 명단에 있었다. 아, 정말이네.사실을 확인했을 뿐인데 손목 끝에서부터 손가락을 타고 묘한 간질거림이 커크를 좌불안석으로 만들었다. 괜히 엉덩이를 들썩여 자세를 고쳐 앉았고, 맞은편의 본즈는 변함없는 표정으로 그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쿼터는…"커크는 잠시 말을 멈췄다.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적시고 침을 한번 삼켰다.
"같이 쓸 수 있을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얼굴은 서서히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열감기에 걸렸던 그날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빨갛게 달아올랐을지도 몰랐다. 그는 본즈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본즈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뭐가 당연한지는 물을 수 없었다. 8년 전 둘의 첫 동거처에서 지금 이 우주 한복판에서까지 끊임없이 답을 주고 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