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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1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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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뜻하고 건조한 공기, 고요한 실내, 무언가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 감은 눈 너머로 어스름하게 느껴지는 빛, 그리고 코 끝을 스치는 약품 냄새.

천천히 눈을 떴다. 아직 흔들거리는 시야 속으로 주변의 풍경이 들어 온다. 창문 너머로는 새벽빛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고 새하얀 벽과 천장을 따라 이동한 시선의 끝에는 똑똑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는 수액과 내 손에 꽂힌 링거 바늘이 보였다.

 

그리고, 침대 한켠에 머리를 살짝 기댄 채 잠들어 있는 한 남자. 이건 꿈일까? 아니면 현실일까? 꿈이었으면 좋겠다. 꿈이라면..저 손을 한 번만 더 잡고 싶으니까.

 

아직 몽롱한 정신을 핑계 삼아 욕심을 내 볼까 싶다.

잠시 망설였지만 내 손 바로 옆에 놓인 손을 포개 잡았고 그 순간 남자는 눈을 떴다.

마주쳐 오는 깊고 새카만 눈동자, 그 속에 담긴 나.


진짜, 진짜 정우성일까? 정말?
정말 너야 우성아?




"잘 잤어요?"
 

 

 

 

침대에 엎드린 자세 그대로 나를 응시하는 우성이의 모습은 그림 같았다. 반쯤 뜬 눈에는 아직 잠이 가득했고 나른한 기운 속에서 미세하게 움직이는 입꼬리였지만 분명 정우성은 웃고 있었다. 잘 잤냐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끄덕이며 웃음을 짓고 말았다. 우성이의 그 눈빛에, 낮고 차분한 음성에 그간의 노력들이 다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아무리 정우성을 사랑하지 않으려 노력해도 그건 다 부질없는 것이었다. 저 빛나는 아이를 내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마주 잡은 두 손 위로 비추는 서늘한 새벽빛은 참 따뜻했고 우리는 한참 동안이나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

 

 

 

 

점점 날이 밝아 오며 조금씩 정신이 또렷해졌다. 새벽에 취했던 걸까 안정제에 취했던 걸까, 마냥 행복하기만 하던 그 고요함 끝에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큰 두려움과 불안감이 찾아왔다. 정우성이 어떻게 여기에 와 있지? 혹시 내 몸 상태에 대해 전부 들은 걸까? 혹시 내가 유산을 했었다는 걸 알아버린 걸까? 내가 자기 아이를 임신해놓고 숨겼었다는 사실을 다 알아버렸으면 어떡하지? 이렇게 한심한 내 실체를 알아버렸으면 어떡하지...? 우성이의 표정을 읽어보려고 했지만 이미 불안으로 잠식당한 머리는 아무런 사고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너무 무서웠고 눈물이 났다. 이제껏 꾹꾹 눌러 참아왔지만 나는 더 이상 숨길 힘이 없었다.

 

더 이상은 버틸 힘이 없었다.

 

 

 

 

 

 

 

***

 

 

 

 

동오 형이 눈을 떴다. 참 오랜만에 보는 형의 모습이었다. 늘 보기 좋게 근육이 잡혀 있던 몸은 한 눈에 보기에도 많이 말라 있었고 안색도 핏기 없이 창백했지만 나를 바라봐주는 눈이 여전히 예쁘게 반짝였다. 그게 너무도 행복해서, 그런 형의 모습을 눈에 가득 담고 싶어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형의 눈동자가 점점 요동쳤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눈에 보일 만큼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고 큰 눈 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바늘이 가득 꽂힌 마른 손이 덜덜 떨렸다. 방금까지 평온하게 웃던 동오 형의 얼굴이 점점 충격과 공포에 물들어 가는 것을 보며 가슴 한 구석이 울렁거렸다. 형이 지금 왜 저렇게 울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다 나 때문인데...모든 게 나 때문인데 내가 어린애처럼 제멋대로 굴다가 지레 겁을 먹고 도망쳐 버린 건데...

내 잘못의 대가로 최동오가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형을 안아주고 싶었다. 형의 몸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있었고 나는 그저 그런 형을 안아주려고 했다.

 

형이 경기를 하듯 나를 뿌리쳤고 내 손길을 피하려 하는 듯 몸을 움직였지만 아직도 탈진 상태에서 회복되질 않고 있는 몸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길쭉한 몸이 중심을 잃고 그대로 침대에서 추락해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손에 연결된 링거 바늘이 빠지며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최동오는 울고 있었다. 

 

너무 놀라 그런 형에게 다가갔는데 그럴수록 형은 자꾸만 구석으로 뒷걸음질 쳤고 온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 결국 꺽꺽대는 소리와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

 

 

 

 

다 알아버린 거지

나 이렇게 한심한 놈인 거

전부 알아버린 거지 우성아, 그렇지?

 

 

 

 

형의 입에서 울음과 함께 터져 나오는 말들에 너무 가슴이 아팠다.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오열하며 내뱉는 그 자기혐오의 단어들은 형 스스로를 상처 입히고 있었다.

그러지 마요 형...왜 형을 상처 주고 있는 거야. 

차라리 나를 원망하지, 그 가시 돋친 말로 나를 찌르지...

 

 

 

 

볼에 타고 흐르는 눈물이 느껴졌다. 이런 동오 형의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힘들었고 너무 두려웠다. 형은 늘 든든하게 버티고 서서 제게 기대라며 기꺼이 어깨를 내어주던 사람이었고, 내가 애처럼 철없이 굴 때면 어른스럽게 타이르며 끝까지 내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었다. 고작 한 살 차이면서 유치한 형 노릇을 한다며 나는 늘 입을 삐죽댔지만 동오 형이 언제나 든든한 형이자 동료였다는 것은 처음부터 단 한 순간도 변함이 없었다.

그런 최동오가 무너져 숨이 넘어가게 울고 있는 모습은 당장이라도 형이 어떻게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모든 게 나 때문인데...겁쟁이였던 나 때문에 최동오가 모든 고통을 혼자 떠안고 있었다.

 

 

 

 

도망쳐선 안 된다. 

내 잘못들을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만약 되돌릴 수 없다고 해도, 그래도 해야 하는 말이었다. 지난 새벽 내내 주문처럼 되뇌었던 그 다짐들을 끝없이 되뇌며 나는 천천히 주저앉은 형에게 다가갔다. 늘 형이 그래 줬던 것처럼, 이번엔 내가 형을 위해 용기를 내 본다.

 

아주 천천히, 천천히.

나는 천천히 형에게 다가갔고 계속해서 뒷걸음치는 형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 대자 그 몸의 떨림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최동오의 두려움이 전해져 왔다. 천천히 동오 형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았고, 천천히 피가 흐르고 있는 형의 마른 손을 감싸 잡았고, 아주 천천히 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많이 아팠죠.

많이 힘들었죠 형.
이제 괜찮아요.


형 잘못이 아니야.
괜찮아, 다 괜찮아 최동오.

 

 

 

 

형은 계속해서 나를 뿌리치려 했지만 아무런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결국엔 내 품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덜덜 떨리는 동오 형의 몸이 피부를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지만 놔주고 싶지 않았다. 더 꽉 안아버렸다.

 

그리웠던 최동오의 냄새, 그리웠던 최동오의 체온.

나는 마치 주문처럼 형 귓가에 괜찮다는 말을 계속 속삭였고, 형의 비명 같던 울음은 점차 흐느낌으로 변해갔다. 밀어내려고 용을 쓰던 몸에서 힘이 빠지고 완전히 주저앉아버린 형은 그제야 서러움 섞인 울음을 토해냈다. 마치 아이처럼 엉엉 서럽게 목 놓아 울었다.

 

 

 

 

왜 이제 왔어 정우성..

나 너무 아팠어...너무 무서웠어...

투정 부려서 미안해.

네 탓 해서 미안해...

근데 나도 너무 힘이 들어서,

참아 봤는데...

...미안해 우성아.

형이 미안해 우성아......

 

 

 

 

이렇게 많이 아팠으면서, 아직도 아파하고 있으면서...

간신히, 간신히...힘들었다는 말을 하면서도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는 최동오. 바보 같은 최동오...

나는 오랜 세월 그렇게 도망쳤던 그 말을, 평생 전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그 마음을 이제는 전해야 했다.

너무 늦게 전하는 짧은 그 한마디.

 

 

 

 

 

 

 

좋아해요.

 

 

 

 

 

 

 

품에 안고 있던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게 느껴졌고 눈물이 가득 찬 형의 두 눈은 울렁울렁 요동쳤다. 그 큰 눈에 더 이상 눈물이 차오를 수 있나 의심이 갈 만큼 차오르던 눈물은 결국 뚝뚝 방울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짓말...거짓말이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형에게 다시 한번 눈을 맞추며 말했다.

 

 

 

 

 

 

 

좋아해요.

아주 많이.

아주 오래 전부터.

 

내가 형을 좋아했어요.

 

좋아해요 형.


처음부터 형이 좋았어요.

나를 바라봐주는 형 눈빛에 항상 설렜어요.

형하고 함께 뛰던 그 시절이 아직도 그리워요.

나는 그 기억을 자양분 삼아 미래를 그려요...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하는 농구가 이렇게나 행복하다는 걸 그 2년이 알게 해줬어요.

나 가족 말고, 선생님 말고...처음으로 칭찬받아 본 사람 형이에요.

 

형이 너무 좋아서, 형은 혹시 아닐까봐...그러면 나 동생으로도 형이랑 이렇게 못 지낼까 봐 숨겼어요.

너무 늦게 말 해서 미안해요.

그러면서도 형이 나 말고 다른 사람 만나는 거 싫어서...

그래서 매번 어리광 부렸어요.

항상 떼를 쓴 건 난데...잘못한 것도 난데...

형이 나한테 항상 져줘서, 내가 몰랐나 봐요...

형은 마음씨도 착하고 어른스러우니까...형이니까...다 괜찮아서 그런 줄 알았어요.

내가 바보 같았어요. 어리석었어요.

 

이번에도 혼자 둬서 미안해요...

아프게 해서 미안해요.

너무 늦게 알아서 미안해요.

 

...저 좀 용서해주세요 형.

형이 용서 못 한다고 하면 계속 용서 빌게요.

용서 받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요.
나 안 본다고만 하지 마요 형.

내 옆에 있어 줘요 형...

 

......나 좀 사랑해주세요.

 

 

 

 

 

 

 

눈물이 앞을 가려 동오 형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자꾸만 울음소리가 튀어나와 제대로 말을 전하지 못할까 봐 천천히 또박또박..한 자 한 자 입 밖으로 꺼냈다. 형에게 내 진심을 전부 말하고 싶었다. 용서받고 싶었다. 내가 당신을 이렇게나 오래 사랑해왔노라 고백하고 싶었다.

 

 

 

 

 

 

 

그리고,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는 내 볼에 따뜻한 손이 닿았다. 형은 이번에도 또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방금까지 너무도 무섭고 괴로웠던 마음이 동오 형의 손길 하나에 싹 쓸려 내려간다. 형을 고통에서 꺼내주기 위해 용기를 내었으나 이번에도 치유받는 건 나였다. 

 

최동오는 언제나처럼 내게 따뜻한 빛인가 보다.

 

나는 그 손을 마주 잡았다. 형의 눈을 바라 보았다. 천천히 형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고 우리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 

 

 

 

 

아주 짠 입맞춤이었다.

 

 

 

 

내가 형에게 용서를 구하는 방법은 눈앞에서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그건 그냥 도망이었을 뿐이다.
나는 항상 어리고 어리석었고 그래서 너무 오래, 너무 멀리 돌아왔다. 그래도 내가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건, 동오 형이 언제나처럼 그런 나를 기다려줬기 때문이겠지.

 

여전히 형 앞에만 서면 어린애가 17살의 어린 아이 같아지는 나지만, 그래도 나는 최동오 옆에 있으려고 한다.

 

나에게는 최동오가 필요하다.

 

그리고, 최동오에게도 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

 

 


눈물 가득했던 입맞춤과 거짓말 같았던 고백...

귓가에 계속 속삭여주는 우성이의 목소리를 끝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몇 시간을 잔 건지 모르겠다. 해가 떠서 환한 병실엔 나 홀로 누워 있었다. 내가 혹시 꿈을 꾼 것일까? 하지만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하다. 링거 바늘이 빠져서 피가 났던 손은 멍이 들어 울긋불긋했고 바닥에 떨어지며 부딪친 건지 온몸이 욱신거렸다. 일어나 앉고 싶었지만 힘이 들어가질 않아 누운 채로 눈을 바쁘게 움직여 누군가를 찾았다.


설마, 정말 꿈이었던 걸까.


역시...그 말이 안 되는 고백은 내 상상이었던 걸까...

아직도 이렇게나 생생한 입술의 감촉이, 그 냄새가 다 거짓말인 걸까...


다시 눈을 감았고 감은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리고, 정말 거짓말처럼 내 볼에 따뜻한 온기가 닿아왔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은 채 조심스레 눈을 떴고 내 눈 속에 가득 들어오는 잘생긴 남자의 모습에 막을 새 없이 입 밖으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왜 울어요 형."
"우성아...정우성..."
"네 저 여기 있어요. 어디 안 가요."
"정말 정우성 너 맞아..?"
"네. 저예요. 우성이에요."

 

 



얼굴에 '나 지금 형이 걱정돼요' 를 쓰고 있는 듯 나를 바라보는 우성이의 눈빛에 웃음이 난다. 저 밑의 깊숙한 나락으로 떨어졌던 기분이 이렇게 순식간에 위로 올라올 수 있는 것인가.
온몸으로 태양을 흡수한 듯 따사로운 정우성의 몸, 단단하게 내 손을 잡아주는 정우성의 손, 포근하고 따뜻한 정우성 냄새. 맞아, 우성이야. 우성이가 맞아. 꿈이 아니야.
 

 

 


"그만 울어요 형...더 울면 또 탈진한대요."
"흑...흐윽...응, 안, 울게..."

 

 

 

 

그래도 계속 흐르는 내 눈물을 우성이가 다시 닦아줬다.

눈 속에 가득한 눈물에 햇빛이 반사되어 이리저리 시야가 흔들렸지만 그 너머로 보이는 정우성의 모습에 행복했다.

다행이다. 꿈이 아니라서...거짓말이 아니라서......

네가 정말 내 옆에 있어서...

 

그리고 아까의 눈물 가득했던 고백이 다시 떠올랐다.

 

 

 


내가 너한테 사과받을 자격이 있을까 우성아...?
내가 너의 앞길에 짐이 되는 건 아닐까...?
내가,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내가 네 사랑을 받아도 되는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내가 널 사랑해도 되는 걸까...?

 

 

 

 

 

 

 

나는 이미 그 질문에 답을 알고 있었다.
단 하나 뿐이었다.

 

 

 

 

 

 

 

"사랑해 정우성."

 

 

 

 

 

 

 

어떻게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너는 평생 용서받지 못할 거야.

 

왜냐하면...나는 한 번도 너를 원망한 적이 없거든. 

그러니까 네 죄는 애초에 재판에 올릴 수 없는 죄야 우성아.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그 공간 속의 네가 반짝반짝 빛이 난다. 너의 눈 속의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아주 느리고 길었던 우리의 겨울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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