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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9 02:24
보고싶다
둘은 국가 간 화친혼,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정략혼으로 맺어진 사이인데 상황이 좋지 않았겠지. 말이 좋아 정략혼이지 매버릭한테는 국력이 부족해 억지로 할 수 밖에 없었던 굴욕적인 혼사였으니까. 그러니 당연히 아이스에게 감정이 좋을 리 없는데 아이스도 겉으로 티를 못 내 그렇지 강제로 팔려가듯 한 결혼이었겠지. 카잔스키 왕가의 하나뿐인 고명오메가로 고이고이 길러진 금지옥엽이라는 말은 카잔스키 왕의 뻔뻔한 생색내기였을 뿐 사실 아이스의 아버지인 카잔스키 왕은 아이스와 배다른 형제인 알파 아들만을 아끼고 사랑했으니까.
그렇게 제 자식을 팔아치운 걸로도 모자라 그 자리를 이용해 모국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캐오라 노골적으로 압박하니 매버릭으로선 아이스를 절대 좋게 볼 수가 없는 거야. 거기서 제 결백을 주장한들 씨알도 안 먹힐 거 아니까 아이스도 그냥 체념한 채 입 다물고. 그러니 오해는 풀릴 길 없이 하루하루 더 깊어지기만 하고 매버릭은 아이스라면 치를 떨 정도로 혐오하고 꼴 보기 싫어하겠지. 하지만 아이스는 그렇지 않을 거야. 그 어떤 냉대와 수모를 겪어도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 각오하고 왔던 아이스는 불행하게도 매버릭을 처음 본 순간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으니까.
아직도 선명히 기억해. 마차에서 내리던 그 때 형식적인 마중을 나와있던 매버릭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치던 그 순간을. 어리석고도 어리석은 마음이라 가슴속에서 지워 없애려 수십수백번을 노력했지만 소용없었지. 감히 그를 마음에 품었노라 어디에 하소연할 수조차 없는 감정을 가지고 하루하루 아이스는 산 채로 문드러져갔어. 차라리 매버릭처럼 아이스도 그저 상대방을 탓하며 미워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거야. 하지만 아이스는 그러지 못했고 그랬기에 모든 것이 아이스에겐 독이 되었지. 매버릭의 경멸에 찬 눈빛, 가시돋친 말투, 야멸찬 태도... 그 모든 게.
우습게도 둘은 첫날밤에 매버릭이 일부러 소박을 놓은 후 단 한 번도 같이 잠자리를 한 적 없겠지.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매버릭의 러트 때문에 사고처럼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되었으면 좋겠다.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매버릭은 거칠게 아이스를 안았고 그 다음 날 제 품 안에서 처참한 몰골로 정신을 잃은 아이스를 마주하게 되겠지. 매버릭은 제가 그를 끌어안고 있었다는 것에 화들짝 놀라서 아이스를 밀쳐내버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고통스러운 얼굴로 가느다랗게 신음을 흘릴 뿐이겠지. 그 때 처음으로 매버릭은 아이스에게 아주 미약하게나마 미안함이란 걸 느낄 거야. 왜냐하면 그런 아이스의 몸상태는 목이며 가슴이며 죄다 시뻘겋게 짓씹어 놓은 흔적으로 가득했고 첫눈에 들어오지 않아 미처 몰랐던 아랫쪽은 붉은 선혈이 낭자한 채 뭐라 묘사하기조차 참담한 꼴이었기 때문이지.
그 날 이후 매버릭은 저도 모르게 아이스를 떠올리는 날이 많아질 거야. 드문드문 흐릿하게 끊겨있는 그 날 밤의 기억에서 눈가가 발개져 눈물을 흘리던 아이스의 모습이라거나 의외로 한 팔에 쏙 들어오던 잘록한 허리 같은 게 떠오르면 이내 고개를 휙휙 저어 생각을 떨쳐내 버리곤 했지만. 그래서 그게 뭐. 퉁명스런 표정으로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고 되뇌이고 또 되뇌었지만 별 소용은 없겠지.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궁의를 불러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명하긴 했지만... 자꾸만 이렇게 생각나는 것을 보아하니 제가 그에게 도의적 책임이나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는 모양이라고 매버릭은 생각했어. 물론 처음에는 죄책감에 가까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빠르게 그 감정은 형태를 달리했는데도 말이야. 자각하기도 전에 스스로 부정해버리고 말았지. 어쩌면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외면해버린 것일 수도 있고. 그러던 와중에 아이스의 회임 소식이 들려오겠지.
회임? 분명 열성이라고 했는데 그리 쉽게 임신이 된 것도 이상했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건 회임이라는 말에 묘하게 마음이 들뜨는 자신이었어. 그는 원수같은 카잔스키의 핏줄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건 변함없는 사실이고 이때까지 자식 같은 건 바란 적도 없는데 어째서. 허나 돌이켜 보면 그 때 깨달았어야만 했어. 더 늦기 전에, 용서를 빌 대상이 남아있을 때, 영영 놓쳐버리고 나서 후회하기 전에 말야.
매버릭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아이스에게 회임 축하 선물을 보내라 명을 내렸어. 그리고 그 이후론 이따금씩 아이스의 처소에 들르기 시작했지. 뭐 그렇다고 해서 둘 사이가 갑자기 호전된 건 아니었어. 원체 살갑던 사이가 아니었으니 처음엔 많이 어색했지. 그래도 최소한 매버릭의 눈빛은 이전처럼 경멸이나 의심의 빛을 띄고 있지 않았어. 오히려 제가 찾아와 놓고 제가 더 어색해하며 큼큼거리곤 했지. 미안하다는 말은 끝내 하지 못했어.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아이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지. 다만 그 모든 변화는 뱃속의 아이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이스에게는 그렇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어. 냉대하고 무시하던 저를 대하는 태도가 갑자기 누그러진 이유라곤 오직 뱃속의 아이 외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으니까. 비록 많이 서툴지만 그래도 제 핏줄에게는 잘해주려는가보다 싶어서 아이스는 많이 안심했어. 실은 이 아이도 자기처럼 사랑받지 못할까봐 걱정했는데 그건 기우에 불과했던 것 같아서. 그러면서도 동시에 점점 불러오는 배를 쓰다듬으며 반드시 꼭 아버지를 닮으렴 아가, 하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염원했지. 혹시나 태어났는데 외양이나 형질이 자신을 닮았으면 다시금 버려질까봐.
그렇게 시간은 흘러흘러 산달이 가까워지는데 그 때쯤에서야 매버릭은 자신이 아이스를 대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마음이 많이 바뀌어 있다는 것을 깨닫겠지. 입덧이 심해 핼쑥해진 몸에 가혹할 정도로 크게 부푼 배 때문에 힘겨워하는 아이스를 지켜보는 제가 다 애가 닳아 죽겠다고 느낄 만큼. 그러면서도 아직까지 솔직하게 속마음을 전해본 적 없기에 아이스는 여전히 매버릭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 뱃속의 아이 때문이라고만 여기고 있었어. 첫경험을 알파의 러트로 치러야 했던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덕분에 아이를 가지고 또 그로 인해 매버릭이 저를 대하는 게 이렇게나 달라졌다 생각하니 그저 감사했지. 그러나 아이스는 가끔씩 이 행복이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느낌을 받았어. 마치 아주 찰나의 꿈 같은, 언제라도 곧 깨어질 듯한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었지. 그것은 본능적인 직감이었어. 자신이 뱃속의 아이와 끝까지 함께해 줄 수 없을 것만 같은 직감.
마침내 산실청이 설치되고 분만이 시작되었지만 좀처럼 아기 울음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어. 지독한 난산이었지. 매버릭은 체통도 뭣도 잊고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서성거렸어. 그놈의 법도가 뭔지 안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는데 아주 미칠 노릇이었지. 저녁답에 시작된 진통이 꼬박 밤을 새워 신새벽이 다 되었는데도 아직도 소식이 없었어. 이제는 산통에 비명을 지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순간 등줄기를 스치는 불길함에 매버릭이 법도고 뭐고 안으로 뛰쳐들어가려던 순간 궁의와 산파가 달려나와서 매버릭 앞에 머리를 조아렸지. 그들이 하는 말이란 이러했어. 출혈이 너무 심해 왕후께서 탈진하셨는데 아기씨께선 나오실 줄을 모르고 계신다......
그 말을 들은 매버릭은 눈앞이 핑그르르 도는 느낌이었어.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위험하다는 말에 매버릭은 휘청였지. 다음 순간 앞뒤 가릴 것 없이 뛰쳐들어가 보니 아이스는 눈도 제대로 못 뜨고 기진맥진해 있었어. 그 꼴을 본 순간 매버릭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말했지.
"왕후를 살려."
"하, 하오나... 그러면 아기씨께서......"
"상관없다. 애가 나오지 않아 왕후가 위험하다면 애를 죽여서라도 꺼내."
"아, 안 돼......"
그 때였어. 거의 의식이 없던 아이스가 눈을 가물거리며 입을 열었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목이 다 쉬어 있었어. 그러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호소했지.
"전하, 아기씨를 살려주십....제발......"
사실 아이스는 매버릭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이해하지 못했어. 그저 아이를 죽이라는 말에 놀라 거의 반사적으로 애원했을 뿐이야. 누구보다 아이를 기다려 온 그일 텐데, 어째서 그런 명을 내렸는지 모를 일이야. 하지만... 잠시나마 저를 선택한 것 같았던 그 말에 기뻤다면...천벌을 받아 마땅하겠지요...... 아이스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어. 그리고 곧 다시 진통이 시작되었지.
"아악-"
"저, 전하."
"뭘 하고 있지? 왕후를 살리라는데도."
"진통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은- 아기씨께서 살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것을..어찌할 수는....."
"왕후의 목숨이 우선이다."
"......."
그 단호함 앞에서 이미 늦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겠지. 결국 몇 시간의 산고 끝에 우렁찬 아기울음소리가 터지지만 아이스의 생명은 꺼져가고 있겠지.
"톰!!"
처음 불러보는 이름이었어. 매버릭은 사색이 되어 아이스의 몸을 부축해 안았어.
"톰, 눈 좀 떠 봐. 정신 잃으면 안 돼...제발...!!"
"전하......"
그러나 이미 희게 질린 아이스의 얼굴엔 생기가 없었어. 손은 너무나도 차가웠고. 아이스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매버릭에게 말했지.
"...아기씨를...우리 아이를... 많이... 사랑해주세요......."
그리고......
"톰!!! 더 이상 말하지 마!!!!"
"사......"
사...랑...ㅎ........
메마른 입술이 힙겹게 달싹였지만 결국 말이 되어 나오진 못했지. 매버릭이 덜덜 떨며 움켜쥐고 있던 아이스의 손이 스륵 빠져나가 침대 위에 툭 떨어졌어.
"톰!!!!!"
그렇게 끝내 제 마음은 제대로 전달해보지도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나는 아이스겠지. 매버릭은 싸늘하게 식어가는 아이스의 몸뚱이를 붙잡고 울며 절규하지만 이제는 그에게 용서를 빌 수도 뒤늦게 깨달은 사랑을 고백할 수도 없겠지. 사무치는 후회와 회한 속에 울부짖던 매버릭에게 남겨진 것은 저를 똑 닮은 갓난아이 하나뿐일 거야. 저와 아이스 사이에서 난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매버릭 자신만을 쏙 빼닮은 알파 아이겠지. 신하들은 왕가의 피를 짙게 이어받은 후계자라며 떠받들었지만 매버릭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어. 그리운 아이스를 닮은 구석이 단 한 군데라도 있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버릭은 자신이 이 아이를 저버릴 수 없을 거란 걸 알았어. 아이스의 마지막 부탁이 있었으니까. 아이스를 살리지 못한 궁의와 산파를 모두 죽이고 술독에 빠져 한동안 광인처럼 지냈지만 그것도 적당히 해야겠지. 자신은 아이스가 남긴 이 아이가 자라 왕위를 이어받을 때까지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어야 하니까. 하지만 톰, 너를 죽이고 태어난 이 아이를 내가 사랑할 수 있을까? 아무리 네 부탁이라지만 정말 네 말대로 내가 이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건 나를 포함해 너를 살리지 못한 모든 것들인데...... 그래도 노력할게. 죽도록 노력해볼게. 악착같이 살아서, 네가 원한대로 우리 아이, 많이 사랑주며 키울게. 그래서 이 아이가 나 없이도 거뜬히 홀로 설 수 있게 되면... 그 때는 너에게 가는 것을 허락해줄래?...
"톰......"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마침내 다니엘 알라스테어 캐피 미첼이 화려한 성년식과 성대한 대관식을 치르고 왕위를 양위받은 지 얼마 뒤, 선왕이 된 피트 미첼은 20년간 새로운 주인 없이 비어있던 왕후궁에서 조용히 음독자살을 한 채 발견될 거야. 은은한 미소마저 띄운 그 모습이 마치 평화롭게 잠이 든 모습 같아서 한동안 세간에는 20년간 정비는커녕 후궁 하나 두지 않고 먼저 보낸 반려를 그리던 선왕이 드디어 제 반려를 찾아 홀가분하게 떠났다는 소문이 돌았겠지.
매브아이스
둘은 국가 간 화친혼,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정략혼으로 맺어진 사이인데 상황이 좋지 않았겠지. 말이 좋아 정략혼이지 매버릭한테는 국력이 부족해 억지로 할 수 밖에 없었던 굴욕적인 혼사였으니까. 그러니 당연히 아이스에게 감정이 좋을 리 없는데 아이스도 겉으로 티를 못 내 그렇지 강제로 팔려가듯 한 결혼이었겠지. 카잔스키 왕가의 하나뿐인 고명오메가로 고이고이 길러진 금지옥엽이라는 말은 카잔스키 왕의 뻔뻔한 생색내기였을 뿐 사실 아이스의 아버지인 카잔스키 왕은 아이스와 배다른 형제인 알파 아들만을 아끼고 사랑했으니까.
그렇게 제 자식을 팔아치운 걸로도 모자라 그 자리를 이용해 모국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캐오라 노골적으로 압박하니 매버릭으로선 아이스를 절대 좋게 볼 수가 없는 거야. 거기서 제 결백을 주장한들 씨알도 안 먹힐 거 아니까 아이스도 그냥 체념한 채 입 다물고. 그러니 오해는 풀릴 길 없이 하루하루 더 깊어지기만 하고 매버릭은 아이스라면 치를 떨 정도로 혐오하고 꼴 보기 싫어하겠지. 하지만 아이스는 그렇지 않을 거야. 그 어떤 냉대와 수모를 겪어도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 각오하고 왔던 아이스는 불행하게도 매버릭을 처음 본 순간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으니까.
아직도 선명히 기억해. 마차에서 내리던 그 때 형식적인 마중을 나와있던 매버릭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치던 그 순간을. 어리석고도 어리석은 마음이라 가슴속에서 지워 없애려 수십수백번을 노력했지만 소용없었지. 감히 그를 마음에 품었노라 어디에 하소연할 수조차 없는 감정을 가지고 하루하루 아이스는 산 채로 문드러져갔어. 차라리 매버릭처럼 아이스도 그저 상대방을 탓하며 미워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거야. 하지만 아이스는 그러지 못했고 그랬기에 모든 것이 아이스에겐 독이 되었지. 매버릭의 경멸에 찬 눈빛, 가시돋친 말투, 야멸찬 태도... 그 모든 게.
우습게도 둘은 첫날밤에 매버릭이 일부러 소박을 놓은 후 단 한 번도 같이 잠자리를 한 적 없겠지.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매버릭의 러트 때문에 사고처럼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되었으면 좋겠다.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매버릭은 거칠게 아이스를 안았고 그 다음 날 제 품 안에서 처참한 몰골로 정신을 잃은 아이스를 마주하게 되겠지. 매버릭은 제가 그를 끌어안고 있었다는 것에 화들짝 놀라서 아이스를 밀쳐내버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고통스러운 얼굴로 가느다랗게 신음을 흘릴 뿐이겠지. 그 때 처음으로 매버릭은 아이스에게 아주 미약하게나마 미안함이란 걸 느낄 거야. 왜냐하면 그런 아이스의 몸상태는 목이며 가슴이며 죄다 시뻘겋게 짓씹어 놓은 흔적으로 가득했고 첫눈에 들어오지 않아 미처 몰랐던 아랫쪽은 붉은 선혈이 낭자한 채 뭐라 묘사하기조차 참담한 꼴이었기 때문이지.
그 날 이후 매버릭은 저도 모르게 아이스를 떠올리는 날이 많아질 거야. 드문드문 흐릿하게 끊겨있는 그 날 밤의 기억에서 눈가가 발개져 눈물을 흘리던 아이스의 모습이라거나 의외로 한 팔에 쏙 들어오던 잘록한 허리 같은 게 떠오르면 이내 고개를 휙휙 저어 생각을 떨쳐내 버리곤 했지만. 그래서 그게 뭐. 퉁명스런 표정으로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고 되뇌이고 또 되뇌었지만 별 소용은 없겠지.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궁의를 불러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명하긴 했지만... 자꾸만 이렇게 생각나는 것을 보아하니 제가 그에게 도의적 책임이나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는 모양이라고 매버릭은 생각했어. 물론 처음에는 죄책감에 가까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빠르게 그 감정은 형태를 달리했는데도 말이야. 자각하기도 전에 스스로 부정해버리고 말았지. 어쩌면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외면해버린 것일 수도 있고. 그러던 와중에 아이스의 회임 소식이 들려오겠지.
회임? 분명 열성이라고 했는데 그리 쉽게 임신이 된 것도 이상했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건 회임이라는 말에 묘하게 마음이 들뜨는 자신이었어. 그는 원수같은 카잔스키의 핏줄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건 변함없는 사실이고 이때까지 자식 같은 건 바란 적도 없는데 어째서. 허나 돌이켜 보면 그 때 깨달았어야만 했어. 더 늦기 전에, 용서를 빌 대상이 남아있을 때, 영영 놓쳐버리고 나서 후회하기 전에 말야.
매버릭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아이스에게 회임 축하 선물을 보내라 명을 내렸어. 그리고 그 이후론 이따금씩 아이스의 처소에 들르기 시작했지. 뭐 그렇다고 해서 둘 사이가 갑자기 호전된 건 아니었어. 원체 살갑던 사이가 아니었으니 처음엔 많이 어색했지. 그래도 최소한 매버릭의 눈빛은 이전처럼 경멸이나 의심의 빛을 띄고 있지 않았어. 오히려 제가 찾아와 놓고 제가 더 어색해하며 큼큼거리곤 했지. 미안하다는 말은 끝내 하지 못했어.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아이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지. 다만 그 모든 변화는 뱃속의 아이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이스에게는 그렇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어. 냉대하고 무시하던 저를 대하는 태도가 갑자기 누그러진 이유라곤 오직 뱃속의 아이 외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으니까. 비록 많이 서툴지만 그래도 제 핏줄에게는 잘해주려는가보다 싶어서 아이스는 많이 안심했어. 실은 이 아이도 자기처럼 사랑받지 못할까봐 걱정했는데 그건 기우에 불과했던 것 같아서. 그러면서도 동시에 점점 불러오는 배를 쓰다듬으며 반드시 꼭 아버지를 닮으렴 아가, 하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염원했지. 혹시나 태어났는데 외양이나 형질이 자신을 닮았으면 다시금 버려질까봐.
그렇게 시간은 흘러흘러 산달이 가까워지는데 그 때쯤에서야 매버릭은 자신이 아이스를 대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마음이 많이 바뀌어 있다는 것을 깨닫겠지. 입덧이 심해 핼쑥해진 몸에 가혹할 정도로 크게 부푼 배 때문에 힘겨워하는 아이스를 지켜보는 제가 다 애가 닳아 죽겠다고 느낄 만큼. 그러면서도 아직까지 솔직하게 속마음을 전해본 적 없기에 아이스는 여전히 매버릭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 뱃속의 아이 때문이라고만 여기고 있었어. 첫경험을 알파의 러트로 치러야 했던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덕분에 아이를 가지고 또 그로 인해 매버릭이 저를 대하는 게 이렇게나 달라졌다 생각하니 그저 감사했지. 그러나 아이스는 가끔씩 이 행복이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느낌을 받았어. 마치 아주 찰나의 꿈 같은, 언제라도 곧 깨어질 듯한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었지. 그것은 본능적인 직감이었어. 자신이 뱃속의 아이와 끝까지 함께해 줄 수 없을 것만 같은 직감.
마침내 산실청이 설치되고 분만이 시작되었지만 좀처럼 아기 울음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어. 지독한 난산이었지. 매버릭은 체통도 뭣도 잊고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서성거렸어. 그놈의 법도가 뭔지 안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는데 아주 미칠 노릇이었지. 저녁답에 시작된 진통이 꼬박 밤을 새워 신새벽이 다 되었는데도 아직도 소식이 없었어. 이제는 산통에 비명을 지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순간 등줄기를 스치는 불길함에 매버릭이 법도고 뭐고 안으로 뛰쳐들어가려던 순간 궁의와 산파가 달려나와서 매버릭 앞에 머리를 조아렸지. 그들이 하는 말이란 이러했어. 출혈이 너무 심해 왕후께서 탈진하셨는데 아기씨께선 나오실 줄을 모르고 계신다......
그 말을 들은 매버릭은 눈앞이 핑그르르 도는 느낌이었어.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위험하다는 말에 매버릭은 휘청였지. 다음 순간 앞뒤 가릴 것 없이 뛰쳐들어가 보니 아이스는 눈도 제대로 못 뜨고 기진맥진해 있었어. 그 꼴을 본 순간 매버릭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말했지.
"왕후를 살려."
"하, 하오나... 그러면 아기씨께서......"
"상관없다. 애가 나오지 않아 왕후가 위험하다면 애를 죽여서라도 꺼내."
"아, 안 돼......"
그 때였어. 거의 의식이 없던 아이스가 눈을 가물거리며 입을 열었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목이 다 쉬어 있었어. 그러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호소했지.
"전하, 아기씨를 살려주십....제발......"
사실 아이스는 매버릭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이해하지 못했어. 그저 아이를 죽이라는 말에 놀라 거의 반사적으로 애원했을 뿐이야. 누구보다 아이를 기다려 온 그일 텐데, 어째서 그런 명을 내렸는지 모를 일이야. 하지만... 잠시나마 저를 선택한 것 같았던 그 말에 기뻤다면...천벌을 받아 마땅하겠지요...... 아이스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어. 그리고 곧 다시 진통이 시작되었지.
"아악-"
"저, 전하."
"뭘 하고 있지? 왕후를 살리라는데도."
"진통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은- 아기씨께서 살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것을..어찌할 수는....."
"왕후의 목숨이 우선이다."
"......."
그 단호함 앞에서 이미 늦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겠지. 결국 몇 시간의 산고 끝에 우렁찬 아기울음소리가 터지지만 아이스의 생명은 꺼져가고 있겠지.
"톰!!"
처음 불러보는 이름이었어. 매버릭은 사색이 되어 아이스의 몸을 부축해 안았어.
"톰, 눈 좀 떠 봐. 정신 잃으면 안 돼...제발...!!"
"전하......"
그러나 이미 희게 질린 아이스의 얼굴엔 생기가 없었어. 손은 너무나도 차가웠고. 아이스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매버릭에게 말했지.
"...아기씨를...우리 아이를... 많이... 사랑해주세요......."
그리고......
"톰!!! 더 이상 말하지 마!!!!"
"사......"
사...랑...ㅎ........
메마른 입술이 힙겹게 달싹였지만 결국 말이 되어 나오진 못했지. 매버릭이 덜덜 떨며 움켜쥐고 있던 아이스의 손이 스륵 빠져나가 침대 위에 툭 떨어졌어.
"톰!!!!!"
그렇게 끝내 제 마음은 제대로 전달해보지도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나는 아이스겠지. 매버릭은 싸늘하게 식어가는 아이스의 몸뚱이를 붙잡고 울며 절규하지만 이제는 그에게 용서를 빌 수도 뒤늦게 깨달은 사랑을 고백할 수도 없겠지. 사무치는 후회와 회한 속에 울부짖던 매버릭에게 남겨진 것은 저를 똑 닮은 갓난아이 하나뿐일 거야. 저와 아이스 사이에서 난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매버릭 자신만을 쏙 빼닮은 알파 아이겠지. 신하들은 왕가의 피를 짙게 이어받은 후계자라며 떠받들었지만 매버릭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어. 그리운 아이스를 닮은 구석이 단 한 군데라도 있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버릭은 자신이 이 아이를 저버릴 수 없을 거란 걸 알았어. 아이스의 마지막 부탁이 있었으니까. 아이스를 살리지 못한 궁의와 산파를 모두 죽이고 술독에 빠져 한동안 광인처럼 지냈지만 그것도 적당히 해야겠지. 자신은 아이스가 남긴 이 아이가 자라 왕위를 이어받을 때까지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어야 하니까. 하지만 톰, 너를 죽이고 태어난 이 아이를 내가 사랑할 수 있을까? 아무리 네 부탁이라지만 정말 네 말대로 내가 이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건 나를 포함해 너를 살리지 못한 모든 것들인데...... 그래도 노력할게. 죽도록 노력해볼게. 악착같이 살아서, 네가 원한대로 우리 아이, 많이 사랑주며 키울게. 그래서 이 아이가 나 없이도 거뜬히 홀로 설 수 있게 되면... 그 때는 너에게 가는 것을 허락해줄래?...
"톰......"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마침내 다니엘 알라스테어 캐피 미첼이 화려한 성년식과 성대한 대관식을 치르고 왕위를 양위받은 지 얼마 뒤, 선왕이 된 피트 미첼은 20년간 새로운 주인 없이 비어있던 왕후궁에서 조용히 음독자살을 한 채 발견될 거야. 은은한 미소마저 띄운 그 모습이 마치 평화롭게 잠이 든 모습 같아서 한동안 세간에는 20년간 정비는커녕 후궁 하나 두지 않고 먼저 보낸 반려를 그리던 선왕이 드디어 제 반려를 찾아 홀가분하게 떠났다는 소문이 돌았겠지.
매브아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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