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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5 19:55
온실 화원은 레드 킵 안에서도 손꼽히게 아름다운 곳이라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화사해지는 기분을 얻을 수 있었다. 과거 아에마 왕비가 살아 있을 적에 완공되었던 곳이었다. 헬라에나가 특히 좋아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자주 왔었기에 아에곤도 이곳이 너무나 익숙했다. 헬라에나가 죽은 이후에는 한 번도 오질 못했지만.
“여기 장미 좀 보세요!”
토라졌던 것도 잊고 금세 기분이 좋아진 딸을 보며 아에곤은 마주 웃었다. 헬라에나의 죽음 이후 아에곤은 무의식중에 그녀의 흔적을 피해 다녔지만, 아이들이 그리워한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씩 외면해왔던 것이 미안했다. 이곳에 오고 싶어 했던 걸 그동안 참은 게 분명했기에, 아에곤은 못내 미안한 눈빛으로 재해이라를 바라봤다.
“짠-”
그러다 불쑥- 튀어나온 붉은 장미 한 송이에 아에곤은 고개를 갸웃하며 미소 지었다.
“예쁘네. 방으로 가져가려고?”
“똑같아요.”
“어떤 것과?”
“제이스가 맨날 입고 다니는 거.”
그 말에 미소 짓던 얼굴이 조금 어색하게 굳었다. 어깨에 두른 케이프를 말하는 게 분명했다. 재해이라는 정원사가 손질한 장미를 몇 번이고 돌려 보더니 향기를 맡고 아에곤의 손에 쥐여주었다.
“선물로 주면 엄청 좋아하겠죠?”
“그렇..겠지?”
아에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재해이라에게 장미를 주려고 했지만, 재해이라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설마 아니지...?”
아에곤은 침착하고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지만 재해이라는 손바닥을 짝! 마주치며 확인사살을 했다.
“아버지가 주면 엄청 좋아할 거예요."
“아니, 그건 좀-”
네가 생각한 거니까 네가 주면 되지 않을까? 라고 말해도 안 들을 기세로 재해이라는 몸을 돌려서 이미 다른 장미들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아에곤은 절망적으로 장미꽃을 들고 있어야 했다. 벌써부터 눈앞에 그려지는 어색한 선물 전달식에 몸서리가 쳐졌다. 역시나 안될 거 같다고 살살 구슬리려는데, 시끄러운 소리가 밖에서부터 들려왔다. 누군가 소리를 지르는 게 분명해서 아에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해이라도 소리를 들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 의아한 듯 올려다봤다.
두 사람이 바깥으로 향하기도 전에 화원 문을 박차고 들어온 건 재해리스였다. 이미 눈물 범벅이 된 아들의 얼굴은 예삿일이 아닌듯했다. 아에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한걸음에 달려나갔다. 재해리스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뭐라 뭐라 소리 지르며 어딘가를 손으로 가리켰는데, 훌쩍임이 심해서 반쯤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에곤이 겨우 알아들은 단어는 딱 세 가지였다. 연못, 제이스, 인형. 아에곤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연못 방향으로 돌렸다.
“... 이런, 젠장-!!”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상상에 아에곤은 재해리스가 가리키는 곳으로 달려갔다. 뛰면서 입고 있던 두터운 로브와 재킷을 벗어던지고 튜닉과 바지만 남겼다. 겨우겨우 신발도 던지듯 벗어서 연못에 당도했는데 그는 잠시 몇 초 동안 굳어버렸다. 이 깊은 연못은 하필 아에곤에게 썩 좋지 못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곳이었다. 뒤에서 아이들이 불안한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렀지만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었다. 풍덩- 소리와 함께 아에곤이 수면밑으로 내려갔다.
살을 베어버릴 듯 차가운 물 온도에 저절로 입이 벌어지고 욕이 나올 뻔했다. 헤엄치며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돌리니, 다행히 붉은색 케이프가 물속에서 깃발처럼 일렁이는 게 시야에 잡혔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손가락 하나 움직임이 없는 자캐리스를 보자 불안감이 치솟았다. 자신이 오기 전까지 얼마나 있었던 걸까. 아에곤은 침착하고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바로 허리를 낚아채서 힘겹게 수면 위로 올라갔다. 축- 쳐진 몸과 자캐리스의 젖은 옷이 너무나 무거워서 아에곤은 몇 번이나 수면 아래로 다시 내려가야 했다.
아이들은 연신 아버지만 부르며 목놓아 울었다. 저 멀리서 유모들이 사람을 데려오는 게 보였지만, 그렇다고 더 지체할 수도 없었다. 한 팔로 겨우 지탱해서 수면 위로 올린 자캐리스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으니까. 아에곤은 이를 악물고 팔과 다리를 움직여 헤엄쳤다. 마침내 연못 다리 위로 자캐리스를 끌어올리고 자신도 위로 올라왔을 땐, 물과 식은땀이 같이 흐를 만큼 지친 상태였다. 숨을 고를 시간도 없이 아에곤은 기어가듯 자캐리스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창백한 안색과 핏기 없는 입술이 다른 의미로 겁이 났다.
새파랗게 질려있는 입술 사이로 숨이 나오지 않았다. 코밑으로 손가락을 대봐도 똑같았다. 아에곤은 고개를 단단히 잡고 입을 벌려 숨을 불어넣었다. 몇 번의 시도 후에 가슴팍 위를 두 손으로 힘 있게 눌렀다. 잠시도 쉬지 않고 빠르게 몇 번을 반복했다. 아이들은 이제 겁에 질려 서로를 껴안고 울지도 않고 숨죽여 쳐다보고 있었다. 서너 번 넘게 했을까, 시체처럼 움직임이 없던 자캐리스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지는 걸 확인한 아에곤이 눈을 크게 떴다.
“쿨럭...!!”
거친 기침소리가 터져 나오자 세 사람이 동시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자캐리스의 몸이 튕겨져 오르며 기침을 연신 내뱉었다. 아에곤은 곧바로 그의 몸을 옆으로 돌려줬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 사이로 물을 토해내며 들썩거렸다. 자캐리스의 등을 두들기며 아에곤도 거친 숨을 그제야 몰아 내뱉었다. 아이들은 안도감에 다시 눈물이 터진 듯 크게 소리 내어 울었다. 아에곤은 기진맥진해서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한참 동안 기침과 물을 토하던 자캐리스는 간신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아에곤..?”
“너는 진짜....! 사람을 이렇게 놀래켜도 되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아에곤은 그게 열받아서 그런 게 아닌 추워서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젖은 튜닉과 바지만 입은 아에곤의 상태를 깨달은 자캐리스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랐다.
“당신이... 날 구했어..?”
“그래!! 너 진짜 재해리스 아니었으면...!”
머리맡에서 울리는 울음소리에 자캐리스는 그제야 아이들의 존재를 기억하고 손을 뻗었다. 아에곤과 마찬가지로 기진맥진한 손에는 힘이 없고 추위로 인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재해리스의 작은 손을 꼭 붙잡고 자캐리스는 먹먹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해, 놀랐지... 울지 마.. 괜찮아.”
재해리스는 크게 훌쩍거리며 계속 ‘나 때문에, 인형,’이라는 말만 계속 내뱉었다. 아에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자캐리스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 부드러운 어조로 알아들었다는 듯 안심시켰다.
“네 잘못이 아니라.. 내가 실수한 거야.”
자캐리스는 어느덧 가까이 다가온 사람들을 보고 재해리스의 어깨를 붙잡고 부드럽고 단호한 어조로 조금 다급하게 말했다.
“내가 말할 거니까 너는 아무 말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대신 물으려는데, 달려온 사람들이 자캐리스의 몸을 살피며 어수선을 피우는 통에 할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젖은 아에곤에게 두꺼운 옷을 둘러주는 사람들 사이로 알 수 없는 기류가 흘렀다.
*
레드 킵 내부에서 왕이 모르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 말은 즉, 오전에 있었던 일이 왕에게 보고되었고 드래곤 스톤으로 돌아가기 위해 아버지와 인사하던 라에니라의 귀에도 들어갔다는 소리였다. 그녀는 당장 아들의 신혼 방으로 쳐들어가듯 전진했고, 젖은 옷을 막 갈아입고 머리에서 물기를 털어내던 아에곤은 반갑지 않은 손님 방문에 대번 인상을 구겼다. 자캐리스는 침대에 상체를 기대고 편하게 진찰을 받다가 긴장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아에곤은 한바탕할 기세인 라에니라의 표정을 보고 자캐리스 옆에서 손을 잡고 붙어있던 쌍둥이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방으로 돌아가자. 어른들끼리-”
“아니.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의 말을 끊고 공격적으로 입을 연 라에니라를 아에곤은 의아한 얼굴로 쳐다봤다.
“애들은 왜? 할 말 있으면 나한테 하면 되지.”
“확인할게 있어서. 내가 들은 바로는 제이스가 물에 빠진 게 장난감 때문이라던데.”
그 말에 재해리스는 움찔-하며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자캐리스는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작은 손이 움츠러드는 걸 느끼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얘들아, 아버지 말씀대로 방으로 돌아가.”
자캐리스의 상냥한 말에도 선뜻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들을 아에곤은 두 팔로 각각 안아들고 문 앞에 내려놨다.
“아에곤.”
불만스러운 누이의 목소리에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그는 곧장 아이들을 문밖으로 내보내고 문을 닫았다. 그리곤 뻔뻔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왔다.
“할 말 있으면 나한테-”
라에니라는 그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던졌다. 가슴팍으로 날아든 그것을 엉겁결에 받은 아에곤은 미간을 찌푸리며 내려다봤다. 자신이 아이들에게 만들어준 말 모양 목각인형이었다. 자캐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뭐?”
자캐리스가 진찰받느라 아직 어떠한 설명도 못 들은 아에곤이었다. 라에니라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에곤을 노려보며 한 발자국 다가갔다. 자캐리스는 대학사의 손을 물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겨우 이딴 거 때문에 내 아들이 죽을뻔한 거야?”
“뭔 소리야, 알아듣게 말해!”
“니 아들이 떨어뜨린 그 장난감 때문에-”
“재해리스가 그런 게 아니에요.”
금방이라도 뺨을 올려붙일 거 같은 일촉측발의 상황을 깬 건 자캐리스였다.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자캐리스는 라에니라 뒤에 서있던 유모 둘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이부동생들은 울다 지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비세리스가 잠깐 가지고 있다가 떨어뜨린 거예요. 재해리스는 그걸 주우려고 한 것뿐이고.”
“제이스-”
“못 믿으시겠다면 확인하세요.”
자캐리스는 여전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라에니라의 시선이 닿자마자 고개를 조아리며 긍정의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라에니라의 분노가 꺼진 것은 아니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내가 내 후계자를 잃을 뻔한 거구나. 저 보잘것없는 걸로 내 아들을..!”
“실망 시켜드렸다면 죄송해요.”
아에곤은 모든 상황을 알게 되고 잠시 이마를 짚었다가, 문득 떠오른 의문에 고개를 들었다. 조카들 중 가장 수영을 잘했던 건 자캐리스였다. 어릴 적 같이 바다와 호수에서 수영도 같이 했었던 아에곤은 똑똑히 기억했다. 그가 부친에게 배운 수영을 얼마나 잘 뽐냈는지. 아무리 옷이 무거웠어도, 그리 맥없이 가라앉을 리 없었다. 올라오지 못했어도 하다못해 살려달라 소리 지르고 버텼을 것이다. 아에곤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
자캐리스는 정곡을 찌르는 정확한 지적에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반응에 확신에 확신을 더해서 아에곤은 눈을 질끈 감았다. 라에니라는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다리가 아프다니, 무슨 소리야? 어디 다쳤어?”
“그게 무슨 소리냐면 사랑하는 누이야- 네 아들이 아직 러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단 뜻이야. 아파서 며칠 내내 약을 먹고 잠이 들었는데 하필 아까 물에 빠졌을 때 다리가 아팠을 게 뭐람?”
아에곤은 신랄하게 비꼬는 어투로 말했고, 자캐리스는 탄식을 내뱉으며 마른 세수를 했다. 하지만 아에곤은 연회 이후로도 단단히 벼르고 있었기에 멈출 기세가 아니었다.
“아직도 굳이 그렇게 잘잘못을 따지고 싶다면 어디 한번 해볼까? 네 귀한 아들이 오늘 정말 누구 때문에 죽을뻔했는지 궁금해?”
라에니라의 인상이 차갑게 굳으며 자캐리스를 돌아봤다. 그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기 힘들어서 자캐리스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정말이니?”
“...”
“정말 그거 때문이야?”
“...”
침묵의 곧 긍정이라는 말이 지금보다 어울릴 때는 없을 것이다. 라에니라는 잠시 말없이 자캐리스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 내일 다시 얘기하자.”
그리곤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에곤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게 다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허공에 발길질을 하니, 대학사는 눈치껏 약을 빠르게 준비하고 물러갔다. 두 사람만 남은 방에는 적막이 남았다.
“누이 말도 틀린 건 없네.”
조용한 적막을 먼저 깬 건 아에곤이었다.
“무슨 뜻이야?”
아에곤은 손에 들고 있던 젖은 목각인형을 테이블 위로 던지고, 자캐리스를 돌아봤다.
“겨우, 이딴, 보잘것없는 걸로- 네가 죽을 뻔했다는 거. 원인이 러트 후유증 때문이었어도 애초에 저것만 아니었으면,”
“아니야.”
“아니. 정말로 너 죽을뻔했어. 재해리스를 감싸준 건 고맙지만 라에니라가 화내는 것도 당연해. 다른 가족들도 난리 났을 거고.”
“감싸준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한 거예요."
“.. 알았다. 그리고 내일 드래곤 스톤으로 돌아가면 네 동생들부터 챙겨. 애들 많이 놀랐던 거 같은데-”
“그만.”
“부탁할게, 그만해.”
아에곤은 갑작스러운 요청에 눈을 끔벅거렸다. 왜 그러냐고 묻기 겁날 정도로 자캐리스의 표정은 심상치 않았다. 아에곤이 가까이 다가가자 자캐리스는 처음으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처음 있는 일에 아에곤은 멈칫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는데?”
“뭐?”
“재해리스가 줍게 놔뒀어야 했을까? 그러다 물에 빠졌으면?”
“자캐리스-”
“그것도 아니면, 아버지가 만들어 준거라고 속상해하는 애한테 그딴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보잘것없는 나무 조각따위라고- 그러니 그냥 버리고 가자고 말했어야 해?”
“아니 내 말은,”
“동생들도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야,”
“어머니가 내게 하는 말과 행동들은 더 이상 큰 상처로 남지 않아.”
“...”
“근데 당신은 아니야. 나한테 그러지 말아요.”
자캐리스는 로브를 챙겨들고 아에곤을 지나쳤고 문을 열고 나서기 전, 나지막이 말했다.
“애들 괜찮은지 보고 올게. 당신은 좀 쉬어요. 너무 늦게 말했지만... 구해줘서 고마워.”
닫힌 문 사이로 냉기가 스며들었다.
*
낮잠 시간을 조금 지나친 시간이었지만 아이들은 각자 침대에 누워서 걱정하고 있었다. 아마 문을 열고 들어온 자캐리스를 보지 못했다면 쭉 그랬을지도 몰랐다. 아이들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 안 자고 있었네?”
졸음이 가득한 눈들이 금방이라도 잠들 거 같아서 웃었다. 폭 안기는 작은 몸을 차례대로 안아주고 다시 침대에 눕혔다. 가운데에 앉아서 양손으로 어깨를 토닥거려주니 금세 재잘거렸다. 괜찮냐는 질문이 대부분이었지만 자캐리스는 다정히 미소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다고 몇 번이고 대답해 줬다.
“아버지는..?”
“방에서 쉬고 계셔.”
“으응, 그게 아니라 괜찮을까...?”
“응?”
“거기 연못 엄청 무서워하는데...”
두 손을 꼭 모아 잡고 재해리스가 속삭였다. 졸음이 몰려오는 듯 눈꺼풀이 느릿해졌고 자캐리스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급히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에곤은 물 안 무서워했는데...”
“예전에 거기 갔다가.. 재해이라가 반딧불이를 쫓아다녔는데에... 반딧불이만 보고 뛰다가 연못에 빠졌었어요... 아버지가 바로 구하러 가긴 했는데 근데 저녁이었고... 잘 안 보여서... 아버지 엄청 울었는데... 그래서 그 연못 엄청 무서워 하는데..”
중얼중얼 대던 재해리스는 하품을 하며 눈을 비비적대다가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재해이라도 어느 순간 잠이 들어서, 방안은 아이들의 숨소리만 들려왔다. 자캐리스는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방안을 한참 서성이던 아에곤은 기가 막혀서 혼자 씩씩대다가 진정하다가 난리 쳤다.
"왜 자기가 화를 내지? 찬물에 들어갔다 오더니 회까닥 돌아서 미친 건가?”
아무도 듣지 않는 혼잣말도 하면서 왔다 갔다 해봤자 웃기기만 했지만 아에곤은 멈추지 않았다.
“지 생각해 주고 지 편 들어줘도 난리야!”
두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던 아에곤은 마침내 모든 분노를 털어낼 생각으로 방 밖으로 나섰다. 기세 좋게 뛰어가다가 아이들 방으로 시끄럽게 들어갈 수는 없음을 간신히 생각해낸 그는 성난 숨소리를 숨기고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각자 침대에 잠든 아이들이 먼저 보였고, 벽난로 앞에 혼자 몸을 둥글게 말고 누운 자캐리스가 보였다. 로브는 옆에 팽개치고 벽난로의 따듯함에 의지한 그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그 모습에 아에곤은 갑자기 모든 전투의지를 상실한 듯 두 주먹을 내리고 머리를 긁적이며 조심히 다가갔다. 담요라도 덮어줄 생각이었다.
“...-..는...”
“?”
이제 하다 하다 잠꼬대도 하나보다 싶어서 아에곤은 귀를 좀 더 가까이 대고 숨을 참았다. 감긴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며 입술 사이로 흐느낌 같은 중얼거림이 세어 나왔다.
“더.. 잘할 수 있어요.. 제가 할 수 있어요.. 괜찮아... 더.. 견딜...”
저도 모르게 숙였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재미난 놀림거리인 줄 알았더니 알고 싶지 않은 심연에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대로 나갈까 고민하던 아에곤은 결국 다시 몸을 숙였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자캐리스가 거지 같은 잠꼬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뿐이었다. 아에곤은 돌려누운 그의 어깨를 확 붙잡고 똑바로 눕혔다. 아이들이 깨지 않을 정도로만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일어나, 제이스. 일-어-나..!”
헉- 하는 숨을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감겼던 눈꺼풀이 올라가고 젖은 갈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흔들리는 동공이 불안감에 갈피를 못 잡다가 눈앞에 보이는 이를 확인하고 끌어당겼다. 눈부신 은발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나한테 실망했어요..?”
“쉿, 진정해.”
“이제 쓸모없어?”
아직도 악몽을 꾸는 거라고 생각한 아에곤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등을 토닥였지만 떨림이 잦아들지 않았다.
“내가 더... 잘... 그러니 버리지 마..”
아, 너를 어쩌면 좋지.
단정하고 바른 겉모습을 하고 속은 곪을 대로 곪은 멍청한 나의 조카. 누구라도 힘주어 그를 압박한다면 금방이라도 터질 거 같은 모습은 마음이 안 좋았다.
“더 잘할게.....”
유일한 생명줄인 듯 아에곤을 두 팔로 힘껏 끌어안고 매달린 그는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거 같았다.
날 버릴 거야? 아에곤 제발.. 제발... 내가 잘못했어.
잊었고, 묻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에곤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의 악몽은 가족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건 눈치챘다. 하지만 그 속에 자신도 있었다는 걸 깨닫는 건, 그건 정말.
아에곤은 자캐리스의 몸을 살짝 떼어냈다. 아직 정신 차리지 못한 와중에도 유일한 온기에 떨어지지 않으려던 자캐리스는 뺨에 닿는 따듯한 손에 멈칫했다. 아에곤은 망설임 없이 매끈한 입술 위로 키스하며 가슴이 맞닿을 정도로 숨 막히게 끌어안았다.
저기요 애들 방에서 뭐 하시는 거예요
+ 아에곤은 저 연못 근처로 가기만 해도 손발이 떨림. 그날 이후로 두 번 다시 밤에 애들 데리고 저길 가는 일은 없었음. 오늘도 낮이라 갔던 거고 자캐리스가 어련히 알아서 잘 돌보겠거니 하고 맡기고 딸이랑 화원에 들어간 것.
환장힐링
원앤온리
쌍방구원
알오주의
근친주의
자캐리스아에곤 제이스아에곤
톰글린카니 해리콜렛
하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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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해이라 보호하는 자캐리스 진짜 좋다 멋져
근데 ㄹㅇ 서로에게 구원이다 아에곤이 점점 자캐리스 상처를 알게되서 보듬어 주는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