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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3 15:40
다 싫다. 정말 다 싫어. 자지러지게 웃는 붉은머리도, 저를 한심스립게 쳐다보는 스승도, 무엇보다 매의 눈이라면 홀린 듯 정신이 빠지는 잔디머리도. 로우는 이 셋 전부 싫다고 생각했다.

“이만큼이면 양은 충분할 겁리다. 절구도 가져왔으니 빻아서 붙이면 되는데… 로우 왕자는 팔이 왜 이렇게 된 겁리까? 코끼리한테라도 맞았뜹니까?”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샹크스가 불러내는 소리에 자다 나왔음에도 침착하던 레오는 중간 문이 부서진 호박집 내부와 침대에 앉아있던 로우의 팔을 보고 놀랐다. 그의 한 팔이 푸르죽죽한데다 퉁퉁 부어 있었으니 말이다. 보기에도 심히 고통스럽던 환부는 팔뚝에 사선으로 넓은 띠와 같이 형성된 자국이 두드러졌는데 이는 칼의 옆면으로 맞은 듯했다. 이정도로 퉁퉁 붓고 검푸른색이 나오려면 코끼리가 휘둘러야 할 성싶었지만. 때문에 순수하게 물어오던 레오 앞에서 이것도 봐준 거라는 말은 아무도 할 수 없음이었다. 이때도 역시 제일 씁쓸한 건 맞은 당사자였고 말이다. 그러니까 상처의 원흉은 미호크가 문을 가르고 나타난 순간부터 시작이었다.

‘나와라, 로우. 훈련이다.’
‘나는?! 나도 할래!’
‘조로야, 너……!’
‘으하하하, 켁! 아학! 큽!’

미호크와 훈련이면 만사 오케이인 조로의 반응이 제일 빨랐다. 로우를 밀치고 따라나서려 했으니까. 다만 의외라면 위를 선점한 로우가 비키지 않았다는 것과 웃다 지친 샹크스가 사레에 걸렸다는 걸까. 요 한달간 질리지도 않고 한결같은 세 사람에 샹크스는 오늘도 눈물을 닦아내기 바빴다. 그렇게 네 사람은 아닌 밤중에 달구경이라도 하듯 그린비트 섬 지상으로 올라간 거였다.

“훈련도 좋지만 시간을 보십시오. 식물도 잘 때를 아는데 다 큰 어른들이 한밤중에 뭐하는 짓입리까? 애들도 아니고.”
“그렇지? 저 셋은 못 말리는 훈련광이라니까.”

잠옷과 세트인 풀잎 모자를 쓴 레오의 음성에 한심함이 담겼다. 샹크스는 그런 소인족이 주섬주섬 챙겨온 보따리를 받아들고 테이블에 펼치며 말을 얹었고. 이때 로우의 곁에 앉아 있던 조로만이 별생각 없었지 다른 두 사람은 발끈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우두커니 서있던 미호크는 샹크스가 실실대며 팔꿈치로 찌르는 통에 휘청이기도 했고. 조용한 성격이던 미호크에게 샹크스 같은 친구는 평생 처음이었다.

“이 약초는 하룻밤만에 팔뚝의 피멍과 붓기를 빼줄 겁리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합리다.”

테이블 위로 뛰어오른 레오가 하는 말에 반응한 건 로우뿐이었다. 그는 뭔가를 아는 얼굴이었다. 로우의 반응에 레오는 떼쓰는 아이를 달래듯 엄한 얼굴을 했고 말이다.

“그런 얼굴하지 마세요, 로우 왕자. 맨셸리 공주님을 깨우지 말라고 한 건 당신입리다.”
“알아. 누가 모른데?”

로우의 대답에 멀뚱히 둘을 번갈아보던 조로의 시선이 닿았다. 조로와 눈이 마주친 순간 로우의 미간에 진 주름이 옅어졌다. 멀쩡한 손을 뻗어 매끈한 볼을 만지니 자연스레 눈을 감아오는 녀석이 로우는 사랑스러웠다. 그는 비록 조금 전 한눈을 판 대가로 미호크의 검을 피하지 못해 기절했을만큼 아파했을지라도 말이다. 이는 두 사람의 대련을 보기 위해 따라온 조로가 원인이었다. 그는 검을 휘두를 때 말고는 한 눈으로 느끼는 거리감에 온전히 적응치 못했으니까. 검을 사용하는 건 미호크의 지도 하에 금방 감을 잡았는데 일상에서는 허점투성이었다. 때문에 잘 넘어지고 부딪히고 헛손질도 했는데 그때마다 매번 주변에서 자연스레 도와주는 게 다반사였고. 개중 샹크스는 이를 빌미로 한 스킨십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서 로우는 볼 때마다 화를 삭혔다. 이번에도 덩굴에 걸려 넘어질 뻔한 조로를 한팔로 끌어안아 붙잡아주던 샹크스에 눈이 팔려 이꼴 난 것 아니었나. 당연히 피할 줄 안 제자에 당황한 미호크가 급히 칼을 돌리고 힘을 풀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로우의 몸이 동강나고도 남았으리라. 그래서 미호크는 위험한 순간에 정신을 판 녀석에게 화가 난 것도 사실이었으나 또다시 옆구리를 찔러오던 친구에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샹크스의 눈짓이 향한 곳에는 사랑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이가 있었으니까. 손길을 따라 자연스레 눈을 감은 조로를 내려다보던 로우의 눈빛은 따스한 봄을 닮았다.

“그래서 절구에 누가 침을 뱉겠습리까? 약초가 가진 효능을 극대화시키려면 침이 필요합리다.”
“오오! 나! 내가 할게! 나 왕년에 침 모으기 선수였어!”

레오의 말이 치고 들어오기 무섭게 마물 손까지 들고 반색한 건 샹크스였다. 그리고는 생동감 넘치는 얼굴로 침 모으는 소리를 내는데 로우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레오는 침을 받겠다며 샹크스 앞에 절구를 들이밀기도 했다.

“침이 약초에 골고루 스며들어야 하니 직접 입으로 씹어서 뱉는 게 더 좋기는 하지만 쓴맛이 너무 강해 어쩔 수 없죠. 대신 침이 아주 많이 필요합리다, 두령님. 미호랜드도 도와준다면 고맙겠뜹니다.”
“아니, 난…….”

옆에서 침 모으는 소리가 요란한 와중에 미호크는 드물게 당황한 티를 보였다. 레오는 이에 그치지 않고 조로를 돌아보기도 했다.

“조로랜드도 가만있지만 말고 어서 침을 모아주세요.”
“나도?”
“예, 그래야 빨리 끝나지 않겠뜹니까? 저는 일단 약초를 절구에 넣고 빻을테니 다들 되는 대로 침을 뱉는 겁리다.”

그사이 샹크스가 대접 크기의 절구를 가져다 얼굴을 들이밀었다. 레오는 역시 두령님이 제일 성실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로우는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이 됐다.




로우가 오늘밤 이곳에 머물기로 한 건 미호크와 할 얘기도 있음이었다. 왼팔에 잘게 빻은 약초와 함께 붕대를 감은 로우는 부서진 문을 사이에 두고 한 침대에서 잠든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약초의 효과를 끌어올리는데 제일 큰 공헌을 한 건 샹크스였고. 그런 이가 지금은 조로를 품에 가두다시피 하고 잠든 모습을 보면서 로우는 착찹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저 둘, 꼭 저러고 자야 돼?”
“롤로노아는 감이 좋은 아이다. 샹크스가 조금만 이상해도 잠결에 다독이더구나. 덕분에 녀석도 몸을 지배당하기 전에 잠에서 깰 수 있었어.”

미호크 역시 덩달아 잠을 편히 잤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붉은머리도 천성이 음흉함과는 제일 반대쪽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미호크가 이를 증명해주는 사람이 아니던가. 때문에 로우는 다수를 위한 약간의 희생은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조로 본인이 상관없다고 했으니까. 잠에 빠져든 샹크스는 이따금씩 무섭도록 인상을 쓰고 몸에 힘을 주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스스로에게 상처를 낸다고 했다. 이는 미호크가 들려준 말로 조로를 안고 자면서부터는 그런 일도 사라졌다고. 또 그는 품에 햇병아리가 있다는 사실을 무의식에도 의식하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했었다. 그 말에 로우는 뭐라 했던가.

“조로 대신 당신을 안고 자도 되잖아. 그럼 샹크스를 깨운다고 당신이 밤잠을 설칠 일도 없고.”

로우가 지난 대화를 회상하며 불쑥 입을 여니 원탁을 사이에 두고 앉아있던 미호크가 대놓고 싫은 얼굴을 했다. 잠든 줄 알았던 저쪽 침대에서 샹크스에 낮은 웃음을 흘리며 몸을 떨어댔다.

“음…….”
“어, 그래그래. 햇병아리는 푹 자고 쑥쑥 커야지.”

진동을 느낀 조로가 잠결에 팔뚝을 쓸자 그 손을 자연스레 거둔 샹크스가 도리어 녀석을 폭 끌어안았다. 조로도 작은 체구는 아니건만 샹크스가 더 크다보니 품에 안기고도 남았다. 이로써 로우는 짜증이 더 치솟았다.

“당신도 안 잘거면 이리 나오지?”
“싫은데?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호사 좀 실컷 누려봐야지 나도.”

샹크스가 이젠 역으로 조로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적당히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듣기 좋았다. 조로의 머리 위로 턱을 올려둔 샹크스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호선을 그러던 입술은 생기 도는 붉은 빛이 선명했다.

“내일, 아니 이젠 오늘인가? 아침에 도플라밍고가 도착한다는데 우리도 그 전에 떠나야지.”

문제 만들기 싫다는 뜻이 역력한 말에 로우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스승이 걱정이었다. 이런 마음이 사치일만큼 강한 상대라지만.

“원래 살던 섬으로 돌아갈 거야?”
“일단은 그래야지. 누가 찾아오지 않는 한.”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말해줘. 언제든지 상관없어.”

로우는 온몸으로 걱정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건 냉소적인 아이의 변화였다. 이 변화의 시작에 햇병아리가 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고. 하지만 생각의 끝에서 슬며시 올라가던 입꼬리를 붙잡는 음성이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샹크스였다.

“그럼 이녀석을 돌려주는 건…….”
“샹크스. 그건 이미 끝난 얘기다. 롤로노아는 제 의지로 여기 있는 거라고 했어.”

미호크의 음성이 서릿발 같았다. 전말은 몰라도 샹크스의 말뜻은 알아챈 로우 역시 얼굴을 굳히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닌 척해도 셋 모두 언제든 공격 가능한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조로는 이 상황에서도 태평하게 잘만 잤고 말이다. 끊어질 듯 팽팽하게 날선 공기중에 조로가 약하게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 삼주간 매일같이 계속된 미호크의 지도는 조로에게 꽤나 고된 시간이었다. 덕분에 밤만 되면 세상 모르고 곯아떨어졌으니. 반대로 독수공방한 삼주 동안에 로우는 불면증과 악몽에 시달려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올 지경이었다. 이는 오늘 다친 팔에 자가치료 대신 약초를 쓴 이유이기도 했다. 당장 아침부터 낮도깨비같은 도피를 상대해야 되는 마당에 체력을 비축해야지 않겠는가.

“그런대도 녀석의 의사를 무시하고 네 생각을 강요한다면 이번엔 날 상대해야 할거다.”
“거참, 매의 눈이 진심으로 말하는데 내가 별수 있나? 알아서 꼬리 말아야지.”

샹크스와 미호크가 눈을 맞춘 건 단 몇초였으나 로우는 가슴이 터져나갈 듯한 기분을 느꼈다. 순식간에 주변 공기가 증발한 것처럼. 그는 샹크스가 먼저 초승달처럼 웃는 낯을 하고 약한 소리를 했을 때야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로우는 두 사람이 얼마나 강한지조차 가늠키 어려웠다. 그 사이로 조로 역시 순간이나마 멈춘 숨을 몰아쉬듯 급히 약하게 코고는 소리가 들려온다. 왼 팔을 접어 머리를 받친 샹크스는 바로 아기 어르듯 조로의 등을 토닥였다.

“귀찮은 걸 싫어하는 네가 왠일로 제자를 받아들였나 했더니 어지간히 예뻐하는구나, 미호크. 이거 질투나는걸?”
“너야말로 평생 고기 무료 제공을 약속한 해군 녀석 때문에 왼 팔을 버리지도 못하지 않나?”
“뭐야, 매의 눈. 설마 질투해?”
“그럴리가. 나는 피차일반이라는 걸 알려주는 거다.”
“너도 참 어지간히 귀엽지 않은 녀석이라니까.”

샹크스의 말을 끝으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이로써 로우는 제가 없는 동안 샹크스가 조로를 루피에게 데려갈 생각이 있었음을 알 게 됐다. 그리고 로우는 애당초 미호크를 믿고 걱정 없이 조로를 맡긴 거였지만 샹크스와 루피의 관계는 인지하지 못했다.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샹크스 당신 밀짚모자랑 원래 아는 사이였어? 혹시 그걸 조로도 알았던 거고?”
“아, 깜빡했다! 이거 쟤는 모르는 일이었지?”

로우의 물음에 아차 싶던 샹크스는 와중에도 조로를 생각해 목소리를 낮췄다. 식겁한 얼굴을 하고서. 포차 다 떼고 봐도 로우가 알아서 기분 좋을 게 없는 얘기 아니던가. 때문에 조로도 로우 앞에서 루피 얘기는 하지 않으려 들었건만 평생 눈치 보고 산 적 없던 샹크스가 입을 털고 말았다. 친구인 미호크는 샹크스의 실수가 의도적인지 고의적인지 더 의뭉스러운 순간이었대도 말이다.




로우는 삼주 동안 그런 일이 있는 줄 꿈에도 몰랐다. 샹크스가 루피에게 데려다 주겠다며 조로를 꾀고 있을 줄이야. 미호크의 말에 의하면 조로는 그럴 때마다 붉은머리를 날파리 쫓듯이 했다지만 로우는 심기가 불편했다. 어쨌든 조로는 이 일을 말하지 않았으니까. 지난밤이 아니었다면 계속 몰랐을 걸 생각하니 로우의 마음은 갈수록 모난 정이 돼버렸다. 이른 아침에 조로를 데리고 궁에 돌아온 뒤에도 마찬가지였고.

“그런 걸 뭐하러 너한테 말하냐? 쓸데없는 소리인데.”
“쓸데없는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해. 그러니까 넌 나한테 숨기는 게 하나도 없어야 맞지!”

이때 조로는 의부증 걸린 남편이라도 보는 시선이었다. 그 시선에 도리어 상처받은 건 로우였고. 두 사람은 왕궁 내 지하 선착장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베르고나 펭귄 등은 먼저 도착한 상태였다.
드레스로자 본섬은 왕의 대지를 중심으로 커다란 성벽이 가로놓였고 그 아래 바다와 연결된 수로가 있었다. 또한 이는 우뚝 솟은 왕의 대지 측면의 수문과 연결되니 궁 밑에 자리한 선착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기둥 사이사이 아치형으로 된 공간이 있던 성벽은 평상시에는 수로 위를 꽉 메운 다리에 덮여 통행로로 사용됐으나 지금은 잠시 연결이 끊긴 상태였다. 폴라 탱 호가 수로에 진입하기 전부터 연락을 받은 베르고 등은 먼저 움직인 상태였고. 여기서 로우와 조로는 제일 늦게 출발했음에도 말다툼을 하느라 걸음이 더디기만 했다. 기다리다 못한 펭귄이 리프트를 타고 지상까지 올라왔으니 말이다.

“빨리 오세요, 대장! 방금 수문이 열렸다는 보고가 있었다고요! 형수!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야, 펭귄. 너 다친 건 괜찮아?”
“네, 저야 뭐 대장이 치료해줘서 멀쩡해요.”

중앙궁 내부는 유독 복잡한 구조를 가졌으나 모든 궁으로 통하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그 한쪽에 리프트도 있었고. 때문에 로우는 조로의 한 팔을 붙들고 리프트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마중나온 펭귄은 근 한달만에 조로를 보더니 다급한 상황도 잊은 듯했다. 잠시 멍하니 조로를 쳐다보던 그는 이내 정신을 차리며 둘을 따랐지만 죄책감이 여실한 얼굴이었다. 조로의 한쪽 눈꺼풀을 세로 지나는 칼자국 때문이었다. 이를 눈치챈 로우는 조로의 손목을 더 세게 움켜쥐었고. 가해진 악력에 힐끗 로우를 보던 조로는 리프트에 오르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눈치 볼 거면 캐묻지나 말든가.”

툭 던지듯 나온 말에 로우가 움찔했다. 펭귄의 손에 리프트가 둔중한 소리를 내며 하강을 시작한다. 낮은 기계음이 귀를 울리는 가운데 조로는 또 한번 시원스레 말했다.

“네가 나를 못 믿는 것 같으니까 다시 말하는데.”
“누가 널 못 믿는대?!”
“난 여기 안 떠나. 나는 내 의지로 로우 네 옆에 있기로 한 거야.”

로우의 반발을 가볍게 씹고 나온 조로의 말은 뚝심있었다.

‘일단은 십년 정도만.’

속으로 덧붙인 말이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조로가 흔들림 없는 건 이유가 있어서였다. 설령 십년이 지나 훌쩍 사라진대도 어떤 형태로든 로우의 주변에서 그를 지켜주기로 마음먹지 않았나. 십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세월이니 로우도 분명 진짜 좋아하는 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계약에 묶인 관계 말고 말이다. 이때 리프트 구석에 박혀 최대한 존재감을 지운 펭귄은 조로의 말이 프로포즈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지만. 드디어 대장의 마음이 형수에게도 통했구나 싶은 생각과 제가 눈치 없이 여기 끼어 있으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 그러면서도 대장의 행복한 순간을 직접 두 눈으로 목도했음이 감격스럽다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펭귄의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방금 내가 본 걸 애들한테 얼른 말해주고 싶다!!!’

펭귄이 내적 비명을 지르며 벌렁대는 가슴을 진정킬 때였다. 무슨 상황이든 닥치면 즐기자가 모토인 조로 역시 가뿐한 마음이건만 로우만이 홀로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지하 선착장에 도착해 문이 열린 리프트 안에서.




세 사람이 지하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 폴라 탱 호도 막 부두에 정박해 있었다. 상디와 이반코프를 먼저 발라티에에 내려주고 온 배는 현재 엔진이 완전히 멈춘 상태였다. 적막한 이곳에서 여전히 손목을 그러쥔 로우가 조로와 함께 제일 앞으로 나오는 발소리만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조로는 일행 뒤에 슈거에게 끌려나온 듯한 워커를 발견했고 말이다. 수레를 끌고 나온 듯한 모양새에도 워커는 조로와 눈이 마주치자 과하게 좋은 티를 냈다. 그런 녀석에 조로가 마주 웃어줄 때 드디어 폴라 탱 호의 문이 열리며 갑판 위로 젊은 왕이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대흉근과 복근이 선명한 상반신 위로 핑크색 깃털 코트를 걸친 남자는 장신 특유의 구부정한 등과 껄렁한 걸음이 날티났지만 잘생겼다. 붉은빛 도는 알이 날렵하게 빠진 선글라스까지도 괜찮게 보일만큼. 다른 이라면 왕서방처럼 보일 물건인데 말이다. 그 뒤로 크로커다일이 나올 때는 흘러내린 흑발에 낡고 지친 모습이 평소의 그답지 않음이었다. 손가락마다 자리한 형형색색의 알 굵은 반지가 헛돌만큼 크로커다일은 많이 수척해져 있어서 로우가 바로 움직인 것 또한 당연했다. 갑판 위에서 크로커다일이 휘청인 순간 그 옆에 나타난 로우가 부축했다.

“조심해.”

다정한 모습이 로시를 떠오르게 함에 크로커다일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사이 부둣가로 사뿐히 뛰어내린 젊은 왕은 허리를 숙여 조로를 내려다봤다. 그는 반대로 고개를 치켜든 조로의 얼굴 위로 주머니에 꽂힌 손을 빼서 검지를 폈다. 손끝은 속이 텅 비어 푹 꺼진 한쪽 눈두덩이 위의 흉터를 덧그렸다.

“내가 없는 동안 왕세자비께서 한층 근사한 얼굴이 됐구나. …그래도 베르고가 진 빚은 갚아야겠지?”

적당히 굵직한 음성은 오금이 저리게 하는 음탕함이 있었다. 이어 턱을 쓰다듬던 손길은 침대 위에서나 나눌 법한 달콤함이지만 왕의 눈은 시원스레 끌어올린 입꼬리와 달리 웃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조로가 이를 한 눈으로 직시할 때 일이 벌어졌다.

“무슨ㅡ!!!”

얼굴을 따라 쓸던 손이 목을 움켜쥐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를 본 로우가 단말마를 낸 동안 상황은 끝났다. 한차례 먼지가 인 공간에서 벽에 박힌 조로의 목이 젊은 왕의 왼손에 틀어쥐였으니까. 그가 언제든 조로의 목을 손쉽게 부러트릴 수 있다는 건 로우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는 곧 그의 발을 잡는 족쇄가 됐고.

“로우야, 네 능력이 먼저일지 내가 왕세자비의 목을 부러트리는 게 먼저일지 해볼테냐?”

조로를 제 눈높이까지 끌어올린 젊은 왕은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는 경고를 잊지 않았다. 이때 왕과 왕자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으니 크로커다일이 로우를, 베르고가 베포를, 베이비5와 버팔로가 펭귄과 샤치를 막아섰다. 마지막으로 슈거가 워커를 발로 짓누른 채 금방이라도 장갑 벗은 맨 손을 대기 직전이었고. 하지만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유일하게 피 흘리던 이 또한 젊은 왕이었다.

“그새 실력이 늘었구나. 매의 눈한테 배운 건가?”

조로도 그냥 당하지는 않았다. 검 하나가 젊은 왕의 오른팔에 박혀 있었으니까. 축 늘어진 팔을 본 젊은 왕의 눈썹이 씰룩였다. 미호크가 그린비트에 있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준이 잘못됐구나. 왼팔을 찔렀어야지.”
“잘못된 게 아니야. 나야말로… 빚은 갚았다.”

조로는 목이 졸린 채 말했다. 쥐어짜듯 나온 소리에는 두려움이 아닌 희열이 담겨 있었고. 마치 이런 기회를 저 역시 기다려왔다는 반응에 젊은 왕은 오른팔과 얽힌 빚을 손쉽게 떠올렸다. 그순간 드디어 젊은 왕의 눈이 웃었다.

“그래, 내가 로우의 오른팔을 잘랐었지. …재미있군.”
“이 손을 풀어준다면 내가 더 재미있게 놀아줄 수 있는데.”
“하지만 버르장머리도 없지!”
“크헉!!”

아무리 서로 적대시하는 상황이래도 반말을 지껄이는 녀석에게 교육은 필요한 법이다. 젊은 왕 본인이 조로의 반말에 개의치 않는다 할지라도 핑계는 많을수록 좋지 않던가. 젊은 왕은 왼손을 조로의 목에서 팔로 옮겨 뒤로 비틀었다. 조로가 벽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던 속도와 반대로 사납게 뒤로 꺾여 올라간 팔은 어깨 관절이 탈골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어 기이하게 돌아간 팔과 함께 바닥에 버려진 조로를 향해 젊은 왕이 한 발을 들어올린 순간이었다.

“도플라밍고!!!”

검을 뽑아든 로우가 뒤에서 순식간에 날아왔을 때 그 사이를 모래줄기가 끼어들었다. 금빛 갈고리와 귀곡이 부딪히며 불꽃이 튈 때 금방이라도 조로를 짓뭉갤듯 하던 젊은 왕은 순순히 다리를 내렸다. 그리고는 등 뒤에서 죽다 살아난 크로커다일이 힘겹게 로우를 막는 동안 쪼그려앉은 젊은 왕이 조로의 턱을 잡아올렸다. 그의 오른팔에는 여전히 검 하나가 관통한 상태였다.

“방금 내가 진 빚을 갚았다. 그러니 이쯤에서 그만하지.”
“하아…… 그래? 난 아직, 큿! 더 할 수 있는데?”
“훗, 허세 부리는 꼴이 갓 태어난 고양이 새끼 같구나. 로우가 왜 귀여워하는지 알겠군.”

턱을 쓰는 손길에 정염이 담겼다. 상대는 욕정하는 것마저 계산적으로 쓸 수 있었다. 그래서 더 기분 더러워진 조로가 인상을 쓰고 노려보니 젊은 왕의 얼굴이 한층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조로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거였다.

“본보기로 로우 앞에서 네 사지를 찢어발겨줄까 했는데 시종장 영감이 네 덕분에 살았다는 말을 들었다.”
“아아, 그래서 이정도만 하시겠다?”
“그것 말고도 조만간 네놈이 또 쓸만한 일도 있을 것 같으니까 겸사겸사.”

그래도 로우에게 직접적인 위해는 가하지 않아서 다행이라 해야 할까. 조로가 고통에 점철된 머리로 생각을 정리할 때였다. 젊은 왕에게 가리워져 격한 소리와 공기의 떨림만이 가득하던 뒤쪽이 돌연 조용해졌다.

“크흑!”

참았던 고통의 소리가 새어나온 것은 크로커다일이었다. 그는 피할 수 있었음에도 로우의 검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덕분에 당황한 로우가 행동을 멈출 때 소리만 듣고도 크로커다일의 의도를 파악한 젊은 왕은 못마땅하게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젊은 왕은 배에서 내리기 전에 크로커다일에게 둘 중 누구를 상처 입힐지 선택하도록 했다. 왕의 말은 절대적이었고 그의 가족, 특히 베르고와 같은 초기 멤버를 향한 애틋함은 남다르다. 하니 베르고를 난자한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으나 자비를 베풀어 로우와 조로 중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지 선택하도록 하지 않았나. 비록 그는 크로커다일이 로시의 유산을 절대 상처입힐 수 없다는 걸 알았음에도. 하지만 그렇다고 조로를 택하면 로우의 마음은 더 상처받을 테니 크로커다일의 행동은 그 나름의 사죄였다. 로우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한 것에 대한.








한조각
2024.05.03 16:11
ㅇㅇ
센세 오셨다 센세오셨다!!!!
[Code: d53b]
2024.05.03 16:41
ㅇㅇ
결국 크로커다일이 피흘리는건가ㅠㅠ 너무 슬프다 얘네는 이렇게 잔뜩 꼬여가지곤 결국 서로를 생각하고 있다는게 미춰버려ㅠㅠ 센세 알러뷰ㅠㅠ 크로커다일 이렇게 쌓이고 쌓여서 결국 죽어버리기라도하면 어쩌려고이래 다들 ㅠㅠ 엉엉 ㅠㅠ
[Code: d53b]
2024.05.03 22:26
ㅇㅇ
조로는 언제쯤 십년계획을 포기할까 나 진짜 슬슬 걱정되는데 저거 로우가 알게 되는 순간이... 로우가 알기 전에 조로가 먼저 포기해야할텐데 ㅋㅋㅋ 그와중에 로우의 오른팔 건을 잊지 않고 되갚아주는 조로 역시 만만치않다
[Code: d3a7]
2024.05.03 22:4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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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 채무회수(?) 장면 보니 로우가 있긴하지만 크로커다일 선택처럼 결국 드레스로자에서 조로는 객식구인 느낌이라 안쓰럽다....도피도 마리조아 복수에 쓸 미끼 정도로만 생각하는거 같고. 뭐 도피는 늘 그런놈이긴 하지만 가족이었다면 그렇게는 안쓸테니ㅋㅋㅋ 조로 십년계획 은근히 이해되려고 하네..... 근데 ㄹㅇ 샹크스랑 맨날 같이 잔거였어?ㅋㅋㅋ 로우 악몽 달래주다가 전문가 다 됐네 ㅋㅋㅋ
[Code: afe7]
2024.05.03 22:4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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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센세 마침 날씨도 좋은데 밤마실 좀 안나가실래요? 응? 여기 좋은 산책로 알아왔는데 이리 와봐. 아니 지하실로 가는 길 아니라고요. 진짜 좋은 산책로야!!! 도착지가 지하일 뿐이야!!
[Code: afe7]
2024.05.04 18:4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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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도피나오니까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과연 천야차;; 섹텐 지리구요 조로 계속 부둥부둥 햇병아리 취급받다가 도피한테 바로 굴림당하는 것도 존잼존맛 근데 저 상황 봤으면 샹크스,미호크가 가만 있진 않았을 거 같아서 빨리 떠난 게 다행인가 불행인가ㅜ 둘이 너무 빨리 떠났어 재밌었는데ㅜㅜ 조로가 샹크스 잠결에 토닥이는 거 로우랑 자던 버릇 아닌가ㅋㅋㅋㅋㅋ
[Code: 718f]
2024.05.05 09:23
ㅇㅇ
로우가 변태긴하지만 샹크스는 진짜 얄밉닷 스승인 미호크까지 오해할 정도로 설명을 잘 못(?)하는 로우가 문제인건지 대책없이 눈치없는 조로탓인건지 이젠 나도 헷갈맄ㅋㅋㅋㅋㅋㅋ
[Code: 57da]
2024.05.05 12:22
ㅇㅇ
아니이!! 당장 죽을수도 있는데 10년 뒤에 자기가 스스로 떠날사람을 위해 오른팔 복수해주는건 도대체 어느머리에서 나오는거지요!???!? 녹색 복슬머리에서 나온 것이란말입니까!!!!! 아오 진짜ㅠㅠㅠㅠㅠㅠㅠ 그거 사랑이야 바부탱이드라!!!!!!!!!!
[Code: b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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