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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0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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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이 생각하기에 세상이 본인에게 친절하지 않은 건 아마 태어났을 때부터. 그래서 상처받거나 좌절해서 무너질 여유도 없었음. 어떻게든 살아가야 했으니까.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아버지는 알파, 이제는 알콜중독자가 된 어머니는 오메가. 칼럼의 세상이 정상적으로 돌아갔다면 좋았겠지만 출생부터 아니었음. 어째서 자신의 배에서 나온건지 모르는 베타 아들 때문에 어머니는 외도를 의심받아서 이혼당하고 20대 중반에 혼자가 됨. 존재 자체가 실패한 결혼의 유산인 아들을 혼자 기르던 어머니도 처음부터 수렁에 빠지지는 않았음. 칼럼이 기억하는 한 아주 어릴 때는 엄마도 상냥했거든. 많은 게 바뀐 건 칼럼이 아홉살 때쯤 엄마가 새로운 애인을 만나면서부터임. 아침에는 거실에 드러누워 술을 마시고 잠을 자다가 밤에는 일을 나가던 사람. 엄마의 삶이 그 사람의 삶과 동화되었고 그때부터 칼럼이 기억하는 엄마는 항상 술을 먹고 제게 고함을 지르고 남자와 싸우다가 얼굴이나 팔이 멍투성이가 됨. 열두 살부터 트레일러 생활을 시작한 이유는 단 하나, 그 남자가 갱단과 얽혀 총에 맞아 죽은 후 집도 버리고 도망쳐야 했기 때문임. 칼럼은 엄마와 세 달에 한번씩은 거처를 옮기면서 살았음. 학교를 다니는 건 어림도 없어서 홈스쿨링을 함. 선생 노릇을 해준 건 엄마가 아니고 칼럼 본인 아니면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가끔 만나는 정많고 의로운 사람들이었음.

열네살쯤엔 칼럼은 이미 조숙해졌기 때문에 이렇게 살 순 없다는 생각을 했고 엄마 대신 가장을 자처함. 엄마가 자신을 보면서 벌써부터 그이를 닮아서 징그럽다고 소리지를 때에도 상처받기보다는 자신에게도 아버지가 있다는 걸 떠올렸음. 뉴욕에서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는 아버지의 존재를 찾는 건 정말 쉬웠지. 도서관의 공공 컴퓨터로 검색해도 회사 전화번호가 바로 떴거든. 아버지의 얼굴을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야. 구형 모니터에 천천히 로딩되는 사진을 보면서 생각함. 닮았나? 아닌 것 같은데... 어머니의 성을 따른 탓에 아버지하고는 공통점이라곤 하나도 없었음. 이름부터 형질까지, 모든 것이 엇나간 베타 아들은 그날부터 아버지의 회사에 매일 전화를 했음. 이사님과 통화하고 싶어요, 제가 그 분 아들인데요. 그런 말에 아버지의 비서는 항상 '전달해드리겠다'는 말만 하고 끊었고 3주를 넘게 매일 전화하자 겨우 '전달'이 되었는지 기다리시라는 대답을 들었지.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한 건 그가 정말 냉정하다는 것뿐이었음.

한번만 도와주세요. 칼럼은 친부에게 열다섯을 목전에 둔 변성기를 겪는 목소리로 애원함. 그런 건 별로 자존심이 깎이는 일도 아니었지. 엄마의 애인들, 경찰들, 길가다 부딪히는 알파들.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법을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배웠으니까. 재활원에 가야하는 엄마의 상태와 이사는 그만 다니며 살고 싶다는 건방진 목표에 대해서 칼럼은 최대한 공손하게 아버지에게 설명함. 전화를 끊고난 후 며칠 뒤에는 칼럼이 처음 보는 자릿수의 돈이 아버지로부터 들어왔어. 한번만 도와주겠다는 말처럼 그 돈으로 칼럼은 평생 엄마를 책임지고 살아야 했지. 물론 그것도 뜻대로 되지는 않음. 엄마가 그 돈의 존재와 출처도 알고난 후 그 돈은 그냥 사라졌음. 캠핑 트럭에는 칼럼만 남겨둔 채 몇 달 동안 사라졌던 엄마가 그 돈을 도박중독자인 애인과 술에 다 썼다는 건 너무 뻔한 일이라서 금방 알 수 있었지.

칼럼은 반 년만에 다시 친부한테 전화함. 그때부터는 일년에 한 두번 정도만 아버지에게 연락해서 몇달간 생활할 최소한의 돈을 받고 그걸 엄마한테 숨겨서 쓰는 법을 깨우침. 수치스러운 건 잠깐이고 얻는 건 많았기 때문에 열다섯의 칼럼은 더 뻔뻔한 요구를 할 때도 그냥 입술만 한번 깨물고선 얘기를 꺼낼 수 있었음. 고등학교에 다니고 싶어요, 그런 말을 하면서 칼럼은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같이 했음. 아버지는 자신은 사랑하지 않았어도 어머니는 사랑한 적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게 더 효과적일거라 생각함. 아버지는 혀를 차기는 했지만 결국 도와주었음. 심지어 근사한 사립학교에 장학생으로 넣어주기까지 했지. 대신 졸업하고 성인이 된 후에는 일절 연락하지 말라는 요구조차 황송해서 칼럼은 그러겠노라 했음.





열여섯이 된 칼럼은 부쩍 자람. 마치 알파처럼, 세상에 우뚝 서듯이 키가 크고 어깨가 자랐음. 그전까지는 누가 봐도 베타로 보일 만했는데 그즈음부턴 아니었음. 학교에서도 종종 알파라고 오해를 받았지만 일주일쯤 지나니 베타인 건 다 알려져서 혼자 조용히 지내게 됐음. 그냥 좀 재수없고 건방진 베타취급을 받았지. 감히 형질자들조차 알파로 생각할만하게 생긴 베타였으니까. 그래도 칼럼은 그 학교에 다닌다는 것 자체로 살면서 가장 흥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음. 트레일러를 타고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온갖 부랑자들을 만나던 것에 비하면 이 학교의 알파, 오메가들이 보내는 경멸의 눈빛 정도야 애들 장난 같았지. 칼럼은 점심 시간에는 혼자 학교 뒷마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점심 운동을 하는 수영팀 선수들이 있는 수영장을 내려다 보면서 생각함. 학교관리인으로 베타를 뽑아주던가... 하고. 어쨌든 이 학교 출신이라는 걸 이용해서 지원서를 내볼 수도 있을 것 같음. 평생 수영장 청소 같은 걸 하면서 사는 삶도 정말 좋겠지 생각함.

칼럼을 포함해 네 명의 베타를 제외하면 학교의 나머지 애들은 전부 형질자였음. 부촌이 가까운 위치인 걸 생각하면 학교 주차장에 매일 같이 스포츠카가 빼곡한 것도 이상하지 않았지.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에서 군림하는 애들이 있기 마련임. 같은 수업을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애들이지만 칼럼은 걔네의 얼굴을 다 알고 있었음. 고교 리그가 시작할 시즌이면 체육관 건물에 응원 현수막이 걸리는 풋볼팀의 주장과 그 친구들. 그 주장의 애인인 치어리딩부 주장. 그리고... 복도를 걸어가면 모두가 한번씩은 뒤돌아보는 금발의 미남, 오메가.

칼럼은 그 애를 처음 봤던 날을 뚜렷하게 기억함. 풋볼팀의 리그 출전 시합 전날이라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여서 출정식을 하고 있었음. 칼럼은 그런 자리에 합류하지 않아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제 처지를 즐기면서 학교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고. 학교가 정말 조용했기 때문에 빈 교실 아무데나 들어가서 잠을 자도 될 것 같았음. 3층의 한 교실 앞을 지나가다가 칼럼은 자신 말고 학교에 남아있는 학생을 발견함. 자신처럼 풋볼팀을 응원하러 가지 않아도 되는 베타인가 했는데 문에 난 창 너머로 바라보는 순간 아니라는 걸 알았음. 그 유명한 오메가잖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쳐다봤지. 칼럼이 알기로 걔는 풋볼팀의 어떤 알파가 점찍어놓은 상대인데 거기에 혼자 있다는게 신기했음. 칼럼은 하염없이 문 너머를 쳐다봄. 책을 읽고 있는 옆모습이 공들여 그린 것처럼 생겼음. 창가에 있는 얼굴과 부드럽게 구불거리는 밀밭색의 머리카락 주변에서 지는 해의 빛줄기가 인상파 화가의 그림처럼 부서져서 빛남. 한순간 그 애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는 것 같아 칼럼은 재빨리 벽에 붙어 몸을 숨겼다가 도망치듯 복도를 걸어갔음.

집에 갈 때 남몰래 찾아본 걔는 언제 그 교실을 나왔는지는 몰라도 풋볼팀 알파들의 주변에 서서 조용히 웃고 있었음. 칼럼은 풋볼팀 주장과 사귀는 치어리딩부의 오메가가 그에게 팔짱을 끼면서 몸을 기대고 말을 거는 것을 들었음. 오스틴, 내일 경기 보러 올 거지? 칼럼은 망설이며 대답하지 못하는 얼굴을 한번 훔쳐봄. 오스틴, 오스틴 버틀러,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오스틴은 교내에 전해지는 인기많은 여러 이름 중에서 칼럼이 처음으로 이름과 얼굴을 매치시켜서 기억하는 존재가 됨.






구치소와 재활원 그리고 애인의 집을 몇달의 주기로 반복하며 드나들던 엄마와 오랜만에 같이 지내게 되었던 열여덟의 칼럼은 새 학기가 시작할 때 정치학 수업에서 오스틴을 만남. 물론 그건 일방적인 만남이고 인식이었지. 오스틴 같은 애는 칼럼이 누군지 신경쓸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어차피 칼럼에겐 오스틴의 눈에 띄겠다는 식의 비현실적인 소망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칼럼은 그냥 오스틴과 같은 교실에 앉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하이스쿨 마지막 1년이 꿈만 같은 마무리가 될 거라고 확신함. 열여덟이 될 때까지 꾸준히 자란 몸집으로 알파나 오메가들의 수업 중 시야를 방해하지 않으려면 칼럼은 항상 맨 뒷줄의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아야 했음. 그 자리의 대각선 자리가 오스틴이 자주 앉는 자리였기 때문에 칼럼의 가을학기 정치학 수업은 대개 오스틴을 쳐다보다가 끝나곤 함. 정치학 수업만 그런 게 아니었음. 어느새 학교 뒷마당 잔디밭보다 카페테리아에서 더 자주 보내는 점심시간도 마찬가지였음. 구석진 베타 테이블에서 항상 같은 자리에 앉는 칼럼은 카페테리아 중앙 테이블을 차지한 오스틴과 그 친구들 무리를 자주 몰래 훔쳐봤음.

칼럼이 오스틴을 몰래 보면서 알게된 것 몇가지. 오스틴은 유명세와 소문과는 달리 조용한 성격인 듯 친구들 사이에서 말을 하기보다는 웃고만 있을때가 더 많다는 것. 또 입이 짧은 건지 식사를 아주 조금만 하는데 그 때문인지 손목이 아주 가늘다는 것. 그리고 친구 중 한 명인 알파가 몸에 손을 댈 때면 굉장히 당황해하는 표정을 짓는다는 것. 칼럼도 처음에는 교내에 알려진 소문처럼 오스틴이 그 풋볼팀 러닝백하고 사귀는 사이거나 최소한 걔를 좋아하는 줄 알았지. 그 알파가 그렇게 소문을 내고 다니기도 했고. 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갖고 지켜보면 그건 오스틴 입장에서는 환영하지 않는 소문일 게 분명해 보였음. 퍼스널 스페이스를 무시하고 다가가 제멋대로 몸에 손을 얹는 알파에게 오스틴이 분명히 불쾌감을 느낀다는 걸 왜 다들 모르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몸을 피하곤 하는 모습을 보면 칼럼은 제게 그 사이에 끼어들 권리가 없다는 게 슬퍼질 지경이었지. 물론 자신이 알파였다 해도 참견할 일은 절대 못 되었겠지만... 어쨌든 걔는 좀 더 자신을 소중하게 대해줄 알파를 곁에 두는 게 나을텐데 말이지. 그러다가도 베타가 본인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면 오스틴도 기분나빠할 거라 생각해 칼럼은 조용히 시선을 옮겼음. 오스틴이랑 눈이라도 마주친다면 분명 바보처럼 굴 테지 별볼일 없는 자신은.

칼럼이 본인의 학교 생활이 정말로 비현실적인 결말에 접어들었다고 느낀 건 봄학기가 시작되면서부터였음. 반년 가까이 AA미팅에 나가던 엄마는 이제는 일도 하기 시작함. 덕분에 칼럼은 매년 새해가 될 때마다 아버지에게 생활비를 목적으로 하던 전화를 그 때는 안 해도 되었음. 학기가 시작되면서 알게된 또다른 놀라운 사건은 지난 학기에 이어서 이번에도 오스틴이랑 같이 듣는 수업이 있다는 점이었음. 문학 수업이 정치학 수업보다 재미있다고 느낀 건 꼭 수업 내용 때문만은 아니었지. 문학 수업에서는 오스틴이 종종 선생의 지시로 교과서의 시를 읽거나 했거든. 칼럼은 가끔 그 수업이 꿈이면 어쩌나 걱정이 될 정도였음. 수업 중에 혼자서 팔 안쪽을 꼬집어 볼 때가 많았음. 다행히 항상 꿈이 아니란 걸 확인받아서 더없이 기뻤음.

당시 칼럼은 사회학 수업에서 그룹 과제를 함. 조원은 칼럼을 제외하고는 알파 둘에 오메가 셋이었음. 같은 조가 된 걸 알았을 때 오메가 한 명은 대놓고 싫은 소리를 했지만 칼럼은 그것조차 그러려니 했음. 어차피 좋은 학점을 바라고 들어온 수업은 아님. 과제 내용은 조원이 전부 똑같았지만 칼럼 혼자 C를 받은 과제가 끝나던 날에 조원들은 칼럼을 빼놓은 채 파티에 대해서 얘기하며 떠들었음. 칼럼과 같은 조를 하기 싫다고 했던 그 오메가는 치어리딩부에 있었고 풋볼팀 주장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갈 수 있다는 것에 굉장히 생색을 냄. 같은 조의 다른 애들이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니까 선심을 쓰듯 "매들린한테 물어볼게" 했거든. 칼럼은 그냥 그 소동에서 혼자 동떨어져있었는데 갑자기 그 오메가에게서 "너도 올래?"하는 소리를 들었음. 그 얘기에 다른 조원들이 다 키득거리고 웃는 걸 보면 당연히 장난으로 하는 얘기였지. 칼럼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음. 형질자들한테 그런 조롱을 당하는건 하루 일과 수준이니까.

그런데 불쑥 생각이 난 거야. 그 파티 연다는 풋볼팀 주장, 오스틴의 친구들 중 하나니까 그 파티에 오스틴도 있겠지. 칼럼은 건방지게도 그 파티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함. 봄학기가 지나가면 그대로 졸업이고 오스틴을 몰래 보는 것도 끝이겠지. 오스틴은 앞길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는 존재고 대학에도 갈 테니. 뉴욕, 보스턴, 시카고, 아니면 런던. 어디 한 군데 골라서 대학을 가겠지. 그리곤 남은 평생 주제넘게 걔를 쳐다보곤 하는 베타 따위는 상상도 못하는 인생을 살겠지. 시간을 무수히 많이 되돌려서 현재를 바꿔보려 노력한다고 해도 칼럼이 오스틴이 있을만한 파티에 갈 수 있는 일 같은 거, 그런 건 안 일어날 거야. 칼럼은 장난일 게 뻔한 기회조차 붙잡고 싶었음.

"나도 가도 돼? 그럼 사양은 안 할게."

장난으로 던져진 말에 칼럼은 웃으면서 대답함. 눈치도 수치도 없는 것처럼 웃으면서 뻔뻔하게 구는 것쯤은 칼럼한테는 일도 아님. 아버지한테 생활비 받으려 입 안의 혀처럼 구는 짓을 얼마나 자주 했는데 이쯤이야. 칼럼의 대답에 파티 얘기를 꺼냈던 오메가는 입을 벌리고 놀라더니 경멸하는 눈빛을 했다가 뭐 또 재미있는게 생각났는지 "그래, 오고 싶으면 와."하면서 파티가 열리는 주소를 칼럼에게도 알려줌. 칼럼을 두고 자리를 뜨면서 그 오메가가 조원들하고 같이 숙덕거렸지만 칼럼은 그리 신경도 안 쓰임. 주소가 적힌 메시지가 폰에서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열심히 외워둠. 파티에 가는 동선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시간을 따져봄. 일단은 집에 돌아가서 엄마의 식사를 챙겨놓고 가야겠지. 갈 때는 버스를 타도 되지만 올 때는 시간이 늦어서 걸어와야할 것 같음. 집에 아무리 빨리와도 새벽일텐데... 그래도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가 않았음.





처음 가본 파티는 혼란스럽고 난잡하고 그리고 실망스러웠음. 오스틴은 찾지도 못했음. 일단은 파티가 열리는 풋볼팀 주장의 집에 들어갈 때 한번 제지당했거든. 문을 열어준 이름 모를 오메가가 어떻게 왔냐고 짜증섞인 목소리를 했고 칼럼은 "카일라가 주소를 알려줬는데." 하고 같은 조원의 이름을 댐. 기다려보라며 눈앞에서 문이 탁 닫혔다가 몇분 뒤에 다시 열렸지. 들어오라고 하진 않았지만 칼럼이 가만히 있으니 그 오메가가 문을 계속 연 채로 짜증을 내서 들어감. 복도에도 손님이 가득차 있었고 전부 칼럼을 보면서 쑥덕거림. 오스틴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사람이 워낙 많아서 보이지가 않았지. 게다가 자신을 초대한 카일라가 2층에서 허겁지겁 내려오더니 진짜로 온 거냐고 여기가 어딘줄 알고 왔냐고 하면서 본격적으로 파티가 벌어지는 거실쪽을 가리키며 "저기는 가지마! 내가 베타 초대했다는거 아무도 모른단 말이야!" 했기 때문에 칼럼은 그냥 화장실로 향하는 복도 같은 데에 서있었음.

오스틴을 한번쯤은 볼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 대신 칼럼은 경기용 헬멧을 들고 집안을 우르르 몰려다니던 풋볼팀 알파들만 몇번 마주침. "이 새낀 뭐야?"하는 소리를 들리라는듯이 크게 얘기하면서 칼럼을 어깨로 치고 지나가는 알파들 때문에 한번은 안경을 고쳐써야하기도 했음. 카일라가 다시 와서 "제발 이제 가주면 안될까? 나 이상한 소문나는거 싫단 말야. 여기에 내 남자친구도 있는데 너 때문에 걔 화났어." 했고 칼럼은 이제 그만 가야할 때라고 생각하던 참이라 그낭 고개를 끄덕이고 나왔음.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생각함. 내일부터는 학교생활이 좀 더 망할지도 모르겠네, 하고. 그래도 뭐 지나가는 알파들한테 시비걸리는건 신경쓸 일은 아닐거야. 다만 아쉬운 건 딱 하나, 오스틴을 못 본 것뿐.

그렇게 집까지 걸어가 잠들었다가 학교에 간 후로 풋볼팀 애들이 던진 음료수 캔에 등을 맞는 일을 두 번쯤 겪으면서 인생이 조금 더 좆같아지려나 생각하던 칼럼에게 기적같은 일이 찾아옴. 문학 수업 교실에 가장 먼저 와서 항상 앉는 자리에 자리를 잡고 잠깐 엎드려 자다가 수업이 시작해서 일어났는데 눈앞에 정말 익숙한 뒷모습이 있었음. 돌아보지 않는 뒤통수를 하도 자주 쳐다봐서 칼럼은 제 앞에 앉은게 오스틴이라는걸 단번에 알았음. 잠이 덜 깼나? 꿈을 꾸나? 팔 안쪽을 꼬집어보는데 아프다는게 신기할 정도였지. 수업이 끝날 때까지 칼럼은 숨도 조심스럽게 쉬었음. 숨소리든 심장소리든 그게 뭐든간에 혹시라도 제가 오스틴한테 들릴까봐. 이건 칼럼의 예상에는 전혀 없던 오스틴과의 거리감이었거든.

하지만 그 후로 이어진 더 믿을 수 없는 일들. 에세이 과제 파트너가 되어서 서로 인사를 하고 이름을 알려주고. 제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일들이라서 도저히 적응할 수 없어서 오스틴의 앞에서 딱딱하게 굴게 되었던 일들을 집에 가서 자기 전에 좁은 트레일러 소파에 누워 곱씹어 보곤 했지. 오스틴이 베타인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칼럼은 일단 몸을 사렸음. 과제를 같이 하도록 짝지어졌다고는 해도 상대가 베타인만큼 개별과제처럼 진행하자고 한다고 해도 오스틴을 원망할 순 없겠지. 그저 그런 순간조차 자신에겐 소중할 따름이라 감지덕지인 거지만. 하지만 오스틴이 먼저 제게 인사를 했을 때부터 칼럼의 모든 방어선이 무너져내렸음. 먼저 인사를 하고 먼저 자신을 붙잡아 말을 걸고. 투명인간처럼 학교를 다닌게 3년 반. 오스틴 같은 애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줄거라고는 꿈도 꿔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칼럼은 그때부터는 모든 것에 필사적이 되었음. 사실 그건 어려운 일은 아니었음. 그냥 마음가는대로 했을뿐이야. 오스틴을 보면서 웃고 오스틴이 불쾌해하지 않을 말투와 목소리로 말하고 오스틴의 생각을 헤아려보는것. 칼럼이 자신에게도 최소한의 자격이 있었다면 해줄 수 있었을 것들을 열심히 실천한거지. 오스틴에게 진심으로 대하는 건 칼럼이 살면서 해온 일 중에 가장 쉬운 거였음. 그냥 그 순간에 솔직하기만 하면 됐으니까.

칼럼에게 오스틴은 어떤 날에는 꿈처럼 가까웠지만 어떤 날에는 언제 그랬냐는듯이 멀어지기도 했음. 친구들하고 있을 땐 제게 거리를 두는 것 같았지. 하지만 칼럼으로선 오스틴이 그러는게 당연해보이기도 했고 또 그게 오스틴을 지키는 방법이란 것도 알았음. 괜히 자신 같은 애하고 깊이 엮이게 되어서 좋을 건 없지. 오스틴이 필요할 때만 제게 다가온다고 해도 칼럼은 그걸 받아들이는 게 자신이 할 일이라고 생각했음. 파티에 가기 싫어하는 오스틴이 걱정돼서 한밤중에 학교에 다시 가서 파티 장소를 알아보고 데리러 가놓고는 그 다음날은 오스틴과 얘기도 할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 오스틴이 다시 먼저 연락을 해왔을 때에는 비로소 안도함. 칼럼은 제게 일어나는 말도 안 되는 행운 속에서도 언제든 현실로 돌아갈 각오는 하고 있었거든. 자신의 처지 이상으로 욕심내지 않고 오스틴의 뜻에 따르는 일. 그 연습을 계속 하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무엇이든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음.

하지만 오스틴과 가까워지고, 방과 후에는 항상 오스틴의 방에서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자기 전에는 전화를 하는 그런 날이 이어질수록 칼럼에게도 제멋대로 튀어나가는 희망이라는 게 생김. 자신의 앞에서 가끔 귀끝을 붉게 해서 웃는 얼굴을 보고 있을 때면 물어봐서는 안 되는 말을 하고 싶어서 턱에 힘을 줘서 입을 다물어야 했음. 우리는 어떤 사이인지, 서로에게 어떤 마음인지, 서로가 원하는 게 같은 건지. 그런 걸 물어보는 것조차 오스틴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겠지. 오스틴은 베타인 자신에게도 다정하고 수줍은 얼굴을 자주 해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마음이 자신과 같을 수가 있을까? 칼럼은 태생적으로 욕심을 부리지 못하게 태어났기에 그런 희박한 행운을 바라고 싶지도 않았음. 그렇지만, 마음이라는 건 오래 붙들고 있다보면 결국 튀어나가기 마련이라... 자신도 모르게 그저 오스틴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하나에 의지해 형편없는 고백을 해버린 칼럼은 그게 받아들여지고 오스틴이 같은 고백을 해왔을 때 꿈을 꾼다고 생각했음.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 되는 건가? 언젠가 빼앗길 보물을 찾은 사람처럼 놀라면서도 손에 들어온 걸 필사적으로 쥐었음. 첫키스를 할 때는 목 안쪽이 뜨거웠음. 불길이 속을 휩쓸고 지나간 것도 같고. 다시 태어난 것처럼, 삶에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환생한 것 같은 기분이 되었음. 오스틴과 다시 키스하는 동안 칼럼은 자신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음. 그런 착각 때문인지 키스를 할 때 몸을 겹친 오스틴에게서 희미하게 황홀한 체향이 느껴졌음. 금방 사라진 걸 보면 어쩌면 그건 칼럼의 상상일지도 몰랐지만 그만큼 행복했음.

오스틴과 사귀게 된 후로 하루하루가 믿기지 않게 새로워졌음. 오스틴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준다고 칼럼은 생각했지. 어머니에 대해서만큼은 자세히 얘기하진 못했지만 칼럼은 오스틴이 그정도의 밑바닥 이야기는 알아서는 안되는 사람이라 여겨서 그것만은 숨겼음. 소중해 마지않는 오스틴과 초라한 트레일러에서 첫경험을 한다는 건 미안해서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지만 결국 그게 오스틴의 뜻이니까 따라가게 되었지. 지겹다 생각하던 작은 집까지도 사랑하게 된 건 전부 오스틴 때문임. 칼럼은 오스틴이 제게 다녀간 모든 흔적을 다 사랑하고 싶었음.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거니까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거든. 칼럼은 당장 죽어도 좋을만큼 행복하면서도 내심 언제까지 행복할 수 있을지 헤아려보는 일이 잦았음. 졸업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오스틴과 제 처지가 어떻게 벌어지게 될지 예측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음. 다만 칼럼은 원래 스스로 예정하던 자신의 미래만 조금 지워냄. 학교 수영장을 청소하는 것에 그럭저럭 만족하는 미래 같은거, 그런 것 대신에 다른 가능성도 만들어두기로 함. 만에 하나 오스틴이 미래를 제시해준다면 그게 아무리 비현실적이어도 이뤄내고야 말거라고 다짐하면서.

그래서 칼럼은 오스틴이 프롬에 같이 가자고 했을때 그 결심을 굳혔음. 그건 어떤... 미래를 향한 시그널처럼 느껴졌거든. 설마 오스틴이 자신에게 프롬에서 이별을 고할까? 적어도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함. 칼럼이 아는 오스틴이라면 그런 식으로 잔인하진 않을 테니까. 희망이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현실이 다가오는 것 같았음. 오스틴과 사귀던 즈음에는 시내의 작은 다이너에서 주에 3일 정도는 일을 하던 엄마는 최근 들어서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듯 했음. 3일 내내 트레일러에 모습을 비추지 않아서 칼럼은 결국 또 그런 때가 되었나 생각함.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엄마도 칼럼은 사랑하려 노력하지만 이럴 때면 그게 쉽지가 않음. 또 누굴 만나고 있든간에 엄마를 안좋은 쪽으로 자극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면 하면서 칼럼은 남은 생활비를 헤아려봄. 엄마가 어떻게 뽑아쓴건지 모르겠지만 각오한 대로 생활비 구좌 잔고는 절망적이었지. 최소한의 생활비 계획에 오스틴과 프롬에 가기 위해 필요한 돈까지 포함시키니까 남은 돈으로는 사실 택도 없었지. 그렇지만 턱시도나 리무진도 빌리지 못하고 근사한 꽃다발 하나 들고가지 못하는 건 남자친구로서는 너무 형편없잖아.

오스틴을 그렇게 망신시키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칼럼은 일을 찾아봄. 열여섯살부터 간혹 엄마 때문에 생활비가 모자랄 때면 신세지던 정비소 사장이 이번에도 칼럼을 받아줌. 사장이 착하고 정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니고 오히려 성질은 고약한 구두쇠라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칼럼을 써주는 거임. 베타니까 돈을 상당히 적게 주고도 부릴 수 있다는 이유로. 그래도 칼럼 입장에서야 일을 시켜주니 고마울 따름이었음. 한 달 정도 일하면 최소한 오스틴에게 부끄럽지 않게 프롬에 데리러갈 돈은 생기기 때문에 칼럼은 열심히 일했음. 하도 늦게까지 일을 한 탓인지 프롬을 일주일쯤 앞둔 날부터는 몸에 열기운이 있어서 해열제나 감기약을 하나씩 먹으면서 일하기도 함. 여름이 다가오는데 때아닌 감기 기운이 떨어지지도 않는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크게 신경쓰진 않았음. 몸 하나는 튼튼한 편이어서 살면서 크게 아파본 적 없는 자신의 얼마 안되는 운을 믿었음.







언제나 그렇듯이 모든 일은 칼럼의 바람과는 다르게 돌아감. 프롬날이 되는 아침, 트레일러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에 일어난 칼럼은 창밖에서 붉고 푸른 빛이 어지러운걸 보면서 직감했음. 문을 열면 이미 잘 아는 삼촌처럼 지내는 경찰 두 명이 서있었음. 칼럼은 그들이 물어볼 내용도 이미 다 알고 있는 기분이 들었지. 어머니 안 계시니? 그렇게 말할 게 뻔했고 정말로 그랬음. 또 무슨 일이냐는 칼럼의 말에 경찰들이 꺼낸 건 정비소 얘기였음. 불법침입이랑 절도로 사장이 신고를 했고 조사를 하자 한 쌍의 침입자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카운터의 캐쉬박스가 열리지 않으니 그대로 가져갔다고 했음. 하긴 엄마가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날리가 없지. 그러다가 문득 정비소 문을 열고 들어갔다는 얘기가 머릿속을 스치고 칼럼은 자신의 소파침대 주변에 대충 벗어뒀던 정비소 유니폼을 찾았음. 주머니에 있던 열쇠는 당연히 없었고 그 옆에는 칼럼이 일하고 받은 돈을 숨겨놨던 양말이 뒤집어진채 있었음. 모아놓은 돈이 다시 한푼도 없어. 일을 하고 돌아와서 피곤에 절은 몸으로 자고 있던 아들 옆에서 오랜만에 집에 온 엄마는 도둑처럼 남은 걸 다 훔쳐가고도 모자라서 정비소까지 간 거야. 당장 아침이 되면 턱시도를 찾으러 가야하고 꽃다발도 사야하고 리무진이 오는데 그 돈이 전부 다....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음 희망이 한순간에 다 사라진 것처럼. 꿈에서 깨라는 철퇴를 맞은 것도 같았고.

망연자실할 새도 없이 칼럼은 경찰들을 따라감. 정비소 사장은 칼럼이 마지막까지 남아서 일을 하고 돌아가느라 열쇠를 가지고 있던 사람인데다 가게에 침입한 사람이 칼럼의 어머니이기에 칼럼도 한 패일거라고 걔를 잡아야 한다고 이미 경찰들에게 한바탕 난리를 부렸거든. 이미 칼럼의 사정을 훤히 하는 경찰들이라 그게 아니란 건 알지만 신고가 들어왔으니 칼럼은 조사를 받으러 가야했음. 엄마를 찾는데에 도움을 주는게 더 빨리 일을 마무리할 수 있는 길이기도 했고. 칼럼은 프롬에 가는 리무진 대신에 경찰차를 타고 가면서 창밖을 봤음. 지난 몇달 동안은 이 쓰레기 같은 동네도 이상하게 아름다워 보였지. 아마 오스틴이랑 같이 집에 오는 날이 생기면서부터 그랬던것 같음. 이제와 다시 보니까 여긴 여전히 쓰레기 같은 곳이고 그게 자신에게 더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였음.

조사를 받고 돌아온 칼럼은 일단 걸어놓은 예약을 다 취소함. 당일에 취소하는 거라서 돌려받지 못하는 보증금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음. 오스틴을 데리러 가기로 약속한 시간까지는 몇 시간이 남아있었고 자신의 처지를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 이번만큼은 칼럼도 비참함과 수치를 느껴서 망설였음. 이제와서 뭐라고 할까. 프롬에는 못 가겠어 나는 베타에다가 거지새끼라서 아무것도 준비를 못했거든. 그렇게 말할 수 있을리가 없음. 오스틴은 이런 사태를 알면 분명 괜찮다고 할 거고 당장 달려와 주겠지. 그걸 아니까 더 비참한 거야. 자신은 자격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음. 그건 단지 근사하게 차려입고 오스틴의 앞에 나타나서 좋은 차에 태워줄 수 없어서 그런 게 아님. 칼럼은 그냥 실감함. 자신은 바닥에 사는 사람이라는 걸. 그에 반해서 오스틴은 구름 위에 사는 존재고. 걔는 이런 삶 같은 건 상상도 못하겠지. 이런 삶을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졸업을 하고 나면 어떻게 할 건데. 멀리 떠나는 걔를 무작정 따라가? 그러면 뜯어낼 구석이라곤 아들밖에 없는 엄마도 지구 끝까지 쫓아오겠지. 어떤 병신 같은 베타새끼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면 영원히 엮일리 없는 진창에 오스틴도 발을 담그게 될 거임. 오스틴은 이런 삶을 책임져줄 필요가 없이 태어난 사람인데 자신 때문에 엉망이 될 거라고 생각이 들었음. 칼럼은 어릴 때부터 잘 울지 않았음. 우는 것조차 한가해보이는 인생이었으니까. 엄마의 애인에게 맞을 때도 울어본 적은 없이 꿋꿋했던 칼럼이었는데 이제 깨달음. 그건 지금까지 자신이 뭔가를 가져보고 소중하게 여기던 걸 빼앗긴 적이 없으니 딱히 눈물이 나지도 않았던 것이라고. 아예 그런 감각을 몰랐으니까 인생이 소용돌이처럼 자신을 뒤집어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음. 그런데 이제는 아는 거지. 소중히 쥐고 있던 것을 놓아야 하는 때가 왔다는 걸, 그런 경험이 자신에게도 생겼다는 걸. 그걸 아니까 자꾸만 눈물이 주륵주륵 나왔음.

불도 켜지 않은 트레일러 구석에서 가만히 몇 시간이고 웅크려 있던 칼럼은 주머니 속에 있는 폰이 여러번 울리기 시작하자 그때야 무언가에서 깨어난듯 고개를 들었음. 오스틴은 전화를 하다가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음. 하지만 그것마저도 보채거나 화내는 느낌이라곤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게 더 미안했지. [조금 있으면 너 본다고 생각하니까 자꾸 떨린다] [나 준비 다했어!] [어디야?] [어차피 조금 늦게가도 괜찮긴 해] [무슨 일 있어? 전화 너무 많이해서 미안] [우리 아빠가 데려다주신대 내가 그쪽으로 갈까?] [파티 안 가도 되니까 그냥 연락만 해줘] 그 메시지를 끝으로 오스틴에게서는 더 전화가 오거나 하지 않았음. 시간을 보니 이미 프롬 파티는 시작했을 시간이었지. 오스틴이 거기에 갔는지 안 갔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쪽이든 기다렸을테고. 그래, 이제 끝이라곤 해도 마지막 인사 정도는 하자. 그렇게 생각해서 칼럼은 메시지를 적다가 폰을 닫았음. 마지막이니까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겠지. 어쨌든 오스틴이 자신에게 초라하게 이별통보 당할만한 애는 아니니까. 얼굴만은 보고서 그동안 고마웠다는 얘기라도 하고 끝내자고 생각했음. 하지만 프롬 파티장까지 가는 동안 칼럼도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서는 결국 마지막으로 오스틴을 힌번 보고싶은 것뿐이라고 인정은 하고 있었지.






파티는 이미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음. 칼럼이 구겨진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볼품없는 행색으로 들어갔을 땐 무대 단상 위에는 채드와 풋볼팀 주장이 있었음. 칼럼은 렌탈할 엄두도 못내는 근사한 검은 턱시도 차림이었고 파티장에 있는 알파들은 다 그랬음. 학생들이 프롬 파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색의 칼럼을 피하느라 자연스럽게 길이 열렸고 그 끝에는 하얀 턱시도를 입은 오스틴이 서있었음. 모든 일이 잘 돌아갔다면 칼럼은 이 자리에 단상 위의 알파들처럼 까만 턱시도를 입고 나타날 수 있었겠지. 물론 자세히 보면 어딘가 후줄근해 보였겠지만 그래도 겉보기에는 오스틴에게 그럭저럭 잘 어울려 보였을 거야.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어린 연인들의 모습처럼 그런 흉내도 낼 수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이 파티에서 혼자만 동떨어진 채 칼럼은 오스틴을 보고 있었음. 눈밑이 약간 붉어진 오스틴의 얼굴은 조명탓만을 할 순 없었음. 이런 곳에 와놓고 오스틴은 저 때문에 울어야 했을 테니까. 그냥 모든 게 자기 잘못이니까 칼럼은 입을 열었음. '미안해' 하고 말하려고 했는데 이번만큼은 오스틴이 더 빨랐음. 턱시도가 구겨지도록 제게 안긴 몸을 끌어안아도 되는 건지 칼럼은 고민했음. 이제 마지막이라고 얘기하려고 온 건데, 그 결심이 한순간에 흔들림. 목에 닿는 머리카락의 감촉은 익숙했고 평소보다 조금 더 진하게 느껴지는 체향은 더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칼럼은 제 입으로는 오스틴에게 안녕을 고하지 못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음. 그 침잠하던 고뇌가 무색하게도 오스틴이 곁을 내어준다면 모르는 척 뻔뻔하게 그 옆에 계속 있어도 되는 걸까 했지.

"아파서 연락 못했던 거야? 걱정했어..."

품에서 고개를 든 오스틴이 살짝 올려다보는 얼굴로 걱정스럽게 얘기함. 열이 꽤 높은 것 같다는 말에 칼럼은 그제야 하루종일 해열제도 먹지 않았다는 걸 떠올림. 지독한 감기였지 오늘까지도 낫지 않아서 잠들기 전에는 프롬에 갈 때 오스틴에게 감기를 옮기면 어쩌나 하는 한가한 생각이나 했었는데. 그냥 감기라고 얘기해주려는 칼럼이 오스틴과 얼굴을 마주친 채로 잠시 다시 꿈결에 접어들려고 할 때 단상 위의 채드가 들고 있던 마이크가 한번 시끄럽게 지직거렸음. 그 소리가 벼락처럼 칼럼을 깨움.

"다들 봐봐. 드디어 주인공이 오셨잖아."

안 그래도 파티에 있는 모두의 시선을 받고 있던 칼럼이어서 그런 식의 스포트라이트는 불편했지. 옆에 있는 오스틴이 "채드, 하지마."하고 말하는데 그 소리 위를 마이크를 댄 목소리가 뒤덮음.

"리스에겐 미안하지만 프롬 킹 발표는 다시 하는 게 좋겠어. 아니 사실 애초부터 리스 네 거 아니었거든."

장난임이 분명한 목소리에 풋볼팀 주장은 그냥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음.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는 사람처럼 굴었음.

"오늘 다들 열심히 투표해준 프롬 킹을 드디어 제대로 모시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자고. 그러니까 이 상은.... 터너, 네 거야."

환호성 대신에 웃음소리가 가득해지는 발표였음. 오스틴은 옆에서 계속 그만하라고 얘기하고 있었는데 그 목소리가 떨고 있다는 걸 칼럼은 깨달았음.

"자, 우리 학교 최초로 고귀한 베타께서 프롬 킹이 되셨거든. 요즘 트렌드가 이런 거잖아 정치적 올바름 다들 뭔지 알지? 물론 터너는 그것보다는 더 자격이 있지. 본인이 알파인 줄 아는 베타니까 분명히 다른 시시한 베타들과는 다를 거야. 안 그래 다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저 새끼―, 미안, 우리 프롬 킹께서는 학교에서 제일 인기많은 오메가 중 한 명이 자기를 좋아한다고, 그래서 자기들이 어울린다고 감히 생각했었다고. 그 오메가가 베타랑 엮이기 얼마나 싫어했는지는 전혀 몰랐던 것 같아."

칼럼은 오스틴에게 잡혀 흔들리던 팔을 놓았음. 그냥 밖에 나가자며 팔을 흔들던 오스틴의 얼굴을 한번 봤음. 오스틴이 고개를 저었고 눈가가 젖었음. 오스틴의 표정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기 힘들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었음.

"어쨌든 그 착각의 왕에게 이 정도면 걸맞는 상이 아닐까 해. 리스도 기꺼이 양보해주기로 했으니까 왕관은 이제 넘겨주자고. 그리고 매들린 너도 양보해. 오스틴도 지금까지 베타새끼랑 서로 좋아하는 척 연극해준 거에 대해서는 보상이 있어야 되잖아. 우리 학교에서 제일 역사적인 커플로 만들어 주는 게 좋지 않겠어?"

멸시의 웃음소리와 박수가 끝나기 전에 칼럼은 몸을 돌려 댄스홀을 나갔음. 뒤에서 들리는 환호성이 안 들릴 때까지 무작정 걸었음. 밖으로 나오자 등 뒤에서 작은 발소리가 같이 따라붙었음. 뒤돌아보면 오스틴은 울고 있었음. 눈밑이 다시 빨갛게 되어서는 계속 고개를 저으면서. 흐느끼듯이 미안하다고 하면서.

현실이 연달아 심장을 뚫고 지나간 것 같았음. 점점 더 심하게 열이 오르는 몸을 최대한 휘청이지 않고 서있으려고 노력하면서 생각했지. 그 모든 게 다 가짜였던 걸까. 그런 가정을 하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들었음. 이런 마지막을 위한 몇 달 간의 일인극 같은 거였을까. 생각해보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행운의 연속이었음. 그중에서도 가장 큰 행운은 베타인 자신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여준 오스틴이었고. 이상하리만치 빠르고 순탄한 연애였거든. 세상에 그런 게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베타를 좋아해주는 오메가 같은 건 없는 게 당연하다는 걸 계속 기억하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냥 스스로가 운이 참 좋은 녀석이라고 믿고 싶었던 거지. 그런 존재로 살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고 싶었던 거지. 세상엔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었던 거 같음. 부모조차도 원하지 않는 불량품인 자신을 어떤 정신 나간 누군가는 특별하게 생각해줄 거라고. 열여덟이나 되어선 동화 속의 어린아이처럼 생각해서. 정작 동화책 같은 건 읽어본 적도 없는데. 이상한 꿈만 가득 꾸다가 이렇게 된 거지. 이래서 사람은 제 주제를 알아야 하는 건데.

"미안해 정말.... 그런데 채드가 말하는 그런 거, 아니었어 정말로...."

울고 있는 오스틴을 바라보면서 칼럼은 생각함. 이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중요한 건 우리가 이토록 어울려선 안 되는 한 쌍이라는 사실이라고. 결국은 이게 결말인 거지 다른 건 중요한 게 아니야.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우스꽝스러운 연극이 될 수밖에 없는 사이임을 깨달으라고 이런 시간이 닥친 거라는 사실, 칼럼은 오스틴도 그걸 알기를 바람. 한 명은 해진 티셔츠를 한 명은 턱시도를 입고 있는 이 모습이 결말이고 그걸 이제는 바꿀 수가 없을 것 같았음. 이젠 같은 공간에 동등한 척 있을 수 있는 모든 시간도 끝났으니까.

"들어가, 오스틴."
"같이 갈래 너랑...."
"아니, 괜찮아. 이젠 연기할 필요 없으니까. 어차피 앞으론 만날 일도 없을 거고.."

손에 든 핸드폰이 울렸음. 칼럼은 그게 경찰에게서 온 전화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음. 지겨운 현실로 다시 돌아갈 때가 온 것 같음.

"오스틴. 알잖아. 우린 안 어울려. 아무런 미래도 없고.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하자 이런 거. 웃기지도 않잖아, 너같은 애가 나를 좋아한다는 게. 그럴 리가 없다는 걸 내가 먼저 알았어야 했는데..."

스스로가 우스워서 칼럼은 어울리지 않게 웃음이 나왔음. 밤공기에 한번 숨을 내뱉은 다음에 오스틴을 쳐다봤음. 눈물에 푹 젖은 얼굴은 처음 보는 거였지. 이런 게 마지막이라니. 초라한 게 오히려 자신에게 어울려.

"앞으로는 너하고 어울리는 사람 만나. 나 같은 새끼 말고."

가지말라고 미안하다고 애원하는 오스틴을 놔두고 칼럼은 내달렸음. 트레일러에 도착했을 때 핸드폰은 여전히 울리고 있었음. 전화를 계속 거는게 경찰이 아니라 오스틴이어서 칼럼은 전화를 받는 대신 오스틴의 번호를 지우고 열이 오른 몸을 겨우 침대에 뉘었음. 눈을 감으면 모든 게 비로소 다 끝날 것 같아서 그렇게 하기로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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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전개 억지전개 ㅈㅅ..... 그래도 둘이 곧 다시 만날거임)




칼틴버
2024.05.18 12:05
ㅇㅇ
모바일
아ㅠㅠㅜㅠㅜ 칼럼이 살아온 인생을 알게되니까 둘의 이별이 배로 아프다ㅠㅠㅠㅠㅠ 칼럼에게 처음으로 희망을 잡고 미래를 꿈꾸게하고 소중한게 무엇인지 지키고싶은게 무엇인지 알게하고 가족에게도 느끼지못했던 사랑과 애정을 느끼게 한 사람이 오스틴인데ㅠㅠ 이렇게되다니 너무 가혹하다 세상이ㅠㅠㅜㅜㅠㅠ ㄹㅇ 화내는게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이별을 고하는것도 존나 찌통임ㅠㅜㅠㅜ 저기 알파놈들 진짜 하... 오스틴도 걱정된다ㅠㅠㅠ 오스틴은 진심이었어 칼럼이 그것만은 진짜 알아줬음 좋겠는데 그럴수없음이 너무 맴찢임ㅠㅠㅠ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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