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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7 09:28

근데 강징만 비밀이 있는 게 아니고....
 

옷자락은 찢기고 진흙과 핏물에 얼룩진 몸이 거친 숨결을 내뱉었다. 쏟아지는 비 속을 뚫고 달리고 또 달렸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내달린 끝에 다다른 곳은, 나무 기둥마다 세월의 금이 간 낡고 버려진 절이었다. 뜯긴 기왓장 사이로 비가 줄줄 새어 내렸고, 곳곳에 하얗게 엉긴 거미줄이 걸쳐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삐걱이는 문짝 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당장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법한 풍경이었으나 추격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아무도 없는 정적이 오히려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비에 젖은 머리칼이 뺨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으며 들숨과 날숨을 깊이 내쉬며 가빠지는 숨을 골랐다. 고꾸라질 듯 기운이 빠졌으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몸을 밀어내며 한참을 걷자 절 안 깊숙히 그녀의 시야에 명부전(冥府殿)이라는 현판이 어슴푸레 들어왔다. 물에 젖은 나무판자에 새겨진 세 글자는 검은 먹물이 번진 것처럼 짙었다.

썩은 나무 문을 밀어 열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쪽은 촛불 하나 없이 어둠이 짙었다. 절 안은 죽은 공간 같았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는 것이 없고, 발소리가 나도 되돌아오는 메아리가 없었다. 그녀의 코끝에 스며든 것은 짙은 습기와 오래된 나무 썩은내, 그리고 불길의 잔재, 탄내였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순간 "와지끈!" 하는 천둥 소리와 함께 번개가 하늘을 찢었다. 섬광이 절 내부를 하얗게 밝히는 순간, 천장의 한쪽이 힘없이 무너져내면서 가려져 있던 낡고 때 묻은 불상의 얼굴이 드러났다. 단단히 굳어진 표정의 지장보살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옥에 떨어진 모든 중생을 구제할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지닌 지장보살이었다
 

"당장 지옥으로 끌려가야 할 것 같군..."

그녀는 자조 어린 웃음을 흘렸다. 비에 젖어 무거워진 옷이 몸에 달라붙었고, 머리칼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물줄기는 이마를 타고 흘러내려 눈가를 스치고 턱 아래로 떨어졌다. 비를 피하려 몸을 돌리자 강렬한 통증이 어깻죽지에서 불길처럼 치솟았다. 유독 피가 끈질기게 흘러내렸다. 검붉은 피가 팔을 타고 흐르더니 손끝에까지 이르러 뚝뚝 떨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서서히 어깨로 향했다. 어깻죽지에 박힌 화살이 눈에 들어왔다. 피가 화살촉 주변을 따라 퍼져 있었다. 화살대는 붉게 물들었고, 날끝이 유난히 거무스름했다. 독화살이 분명했다. 뻣뻣한 손끝이 화살을 잡았다. 떨리는 손가락이 화살대의 나무결을 더듬었다. 단단히 박혀 움직이지 않는 화살촉이 어깨뼈를 찌르는 감각이 명확히 전해졌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이대로 두면 독이 퍼질 게 뻔했다. 가슴이 조여들고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손끝에 온 힘을 실어 다시 화살대를 움켜쥐니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신음을 참으려 꽉 깨문 어금니가 부러질 것 같았다. 화살대가 약간 흔들리는 순간, 뼈가 긁히는 소리가 귀에 울렸다.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뭔가 뚝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빠져나왔다. 압박이 풀린 대신, 통증이 전신을 덮쳐 온몸이 무너진 것처럼 피를 줄줄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어깨는 불타는 듯이 뜨거웠고, 위장이 뒤집히는 듯한 고통에 목구멍을 막고 있던 헛구역질이 터져 나왔다. 몸을 웅크렸으나, 차가운 바닥에 닿은 이마가 싸늘했다. 도망치던 동안 짓누르던 고통들이 이제야 물밀듯 밀려왔다. 어둠이 시야 끝에부터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몸은 서늘했고, 한기와 열기가 동시에 겹쳐졌다. 시야가 어두워지며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정신을 붙잡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지만 손끝의 감각조차 희미해졌다.

그때였다. 굳게 닫힌 절 문이 "끼익" 하고 천천히 열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검의 손잡이를 힘겹게 잡았다. 하지만 시퍼렇게 선 날 위로 번쩍이는 빛에 시선이 멎었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밝고 노란 두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뚜렷한 금빛이었다. 사람의 눈과는 달랐다. 어둠 속에서도 유독 뚜렷하게 빛났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흰 털로 뒤덮인 거대한 짐승이었다.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그 눈동자는 사람의 것과도 달랐고, 짐승의 것과도 달랐다. 그녀는 헛웃음을 흘렸다.
 

피 냄새를 맡고 온 건가?”
 

물음에도 짐승은 움직이지 않았다. 요수라면 사악한 기운이 느껴졌겠지만, 그 어떤 기운도 감지되지 않았다. 산짐승 같지도 않았다. 절을 지키는 영험한 영물인가 싶었지만, 그마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겨우 몸을 일으키며 검을 들었다. 마지막 기운을 쥐어짜듯 검을 휘둘렀다. 둔한 움직임이었기에 당연히 피할 줄 알았건만, 날카로운 검날이 짐승의 옆구리를 스쳤다.짐승의 옆구리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한 상처였다. 짐승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낮고 깊은 그르렁 소리를 내뱉었다. 이빨 사이로 커다란 송곳니가 뚜렷이 드러났고, 소름이 돋는 진동이 공기 중에 전해졌다. 진흙탕 바닥을 걷고 있음에도 발소리 하나 없이 다가온 짐승이 입으로 검을 물어 그녀의 손에서 멀리 던져버렸다. 검을 뺏긴 충격에 그녀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몸이 바닥에 닿기 전에 어깻죽지의 화살 상처가 다시 울컥 피를 뿜었다. 뺨이 젖은 바닥에 닿았다. 의식이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차갑게 식어가는 몸을 느끼며 미물에게 물어뜯겨 죽는 최후라니. 하지만 차갑게 식어가던 등 뒤로 따뜻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새하얀 털뭉치가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반항하지 못하고, 털에 얼굴을 파묻은 채 온기를 느끼는 동안, 그녀의 의식은 천천히 끊어졌다.

 

 

**

 

 

 

한참을 사경을 헤매던 끝에, 이제는 기억에서조차 흐릿해져 버린 오래된 추억이 서서히 떠올랐다. 오랜 시간 동안 꿈조차 꾸지 못하는 그녀에게 이 광경은 무척 생경했다. 연꽃 내음이 은은히 스며드는 호수 한가운데, 유유히 떠 있는 나룻배 위에 기댄 자신이 보였다. 나룻배 맞은편에는 피리를 연주하는 사내와 연방을 서리하는 여인이 있었다. 물결에 잔잔히 흔들리는 배와 함께 그들의 웃음소리가 물비늘 위로 흩어졌다. 참으로도 그립고, 그리웠던 이들의 모습이었다.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으나, 이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의 줄기는 뺨을 타고 천천히 흐르며 가슴에 스며들었고, 그와 함께 서글픈 통증이 가슴을 찔렀다. 이토록 온화하고 따뜻한 기억이 떠오른다는 것은, 살아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경계에 발을 들였음을 의미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이 따스한 기억이 꿈이라는 사실이 더욱 서글프고 잔혹했다. 분명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인데 차마 부르지도, 손을 뻗지도 못하였다. 다가가지 못하고 찰나를 지켜보는 것만이 허락된 추억이었다. 그리운 이들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 풍경이 눈앞에서 사라질까 두려워,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그런데 멈추지 않고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헛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따뜻했고 생생한 촉감이었다. 순간 폐부가 찢기는 것 같은 고통과 함께 눈이 번쩍 뜨였다. 쿨럭거리는 숨결에 붉은 덩어리가 튀어나왔고, 피가 다시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피는 역류해 눈과 코로까지 흘러내려, 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뿌옇고 따가운 눈을 비비려 하였으나, 누군가 손을 붙잡아 이를 막았다.

 

상처가 덧납니다.”

 

낮고 단단한 저음이 고요한 공간에 울렸다. 뿌옇고 흐릿한 시야 속에서 두 노란 눈이 더 밝게 빛났다. 그녀가 묻기도 전에 차가운 물수건이 눈을 감쌌다. 눈과 코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주는 손길이 섬세했다. 여전히 쿨럭거리며 숨을 고르지 못하는 그녀의 등을 쓰다듬고 두드리는 손길도 다정했다. 흰 털이 아니라, 묵직한 숲 향이 은은히 풍기는 흰 장포가 어깨 위로 덮였다. 털이 아닌 살이 맞닿는 온기가 느껴졌다. 팔이 그녀를 감싸안자, 그녀는 빠져나가는 온기를 붙잡고 싶다는 듯 그 팔을 꽉 부여잡았다.

 

도대체 누가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제대로 뱉어지지 않았다. 목소리 끝에 담긴 떨림은 희미한 불안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뿌연 시야 속, 선명하게 빛나는 노란 눈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눈은 짐승의 본능도, 인간의 연민도 아닌, 무언가 알 수 없는 존재의 고요한 응시였다. 마치 어둠 속에서 오랜 세월 동안 기다리던 자가 드디어 만난 상대를 지켜보는 듯한,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그녀를 꿰뚫어보았다.

 

**

 

 

 

 

 

해시가 한참 넘어 어둠이 짙었지만, 한실에 조그마한 불빛이 켜져 있었다. 방 안의 기운은 묘하게 무거웠다. 뒷짐을 지고 서 있던 남희신이 몸을 돌려 들어서는 남망기와 마주했다. 형제의 두 눈이 노랗게 밝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들의 눈빛만은 선명했다. 초승달처럼 옅은 곡선을 그리던 한 쌍의 눈이 천천히 접히며 남희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망기, 고생 많았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다.”

 

남희신은 남망기를 자리에 앉히고 자리에 앉았다. 그에게서 풍기는 향이 평소의 백단향과는 달랐다. 더 묵직하고 오래된 절의 향이었다. 남망기는 미세한 차이를 놓치지 않았고 고개를 살짝 돌려 남희신을 바라보았다.

 

형장, 출타하셨다 돌아오신 겁니까?”

조금 전에 돌아왔다.”

절에 다녀오신 겁니까?”

 

남희신은 눈을 가늘게 뜨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래, 절에 다녀왔단다.”

 

남망기는 더는 묻지 않고 눈을 내리깔았다. 피진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남희신이 그 모습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러는 망기 너도 절에 다녀온 것 같구나.”

 

남망기는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대답했다.

 

그저, 비를 피해 잠시 머물렀을 뿐입니다.”

 

남희신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제 동생이 말하지 않는 것을 들추고 싶지 않았고, 저 또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쉬이 말할 수 없었다. 그보다 지금은 남망기를 은밀히 보냈던 일의 경과를 듣는 게 더 시급했다. 남희신의 노란 눈이 고요하게 빛났다.

 

**

 

 

 

 

 

남희신이 남망기에게 부탁한 바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남희신이 전한 내용은 이랬다. 방계 장로의 자식 중 능구 수련에 힘을 쏟기보다는 향락에 빠져 속세로 쫓겨난 자가 있었다. 장로의 지원이 끊기고 수진계와도 연을 끊자, 홀로 상단을 차려 속세에 수진계를 모방한 물품을 거래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법기를 흉내 낸 장난감과 효염이 거의 없는 부적 따위를 팔아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남희신 또한 그가 명백히 수진계의 것을 팔지 않는 한 굳이 손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상단의 규모가 갑자기 커지기 시작했다. 속세의 가문들이 앞다투어 상단에 패물을 바치더니, 부유하던 한 가문은 전 재산을 탕진한 끝에 소가주였던 아들이 노비로 팔려 가고, 가주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사 결과, 상단주는 고소의 이름을 내세우며 속세에 약초를 독점 유통하고 있었다. 그 약초는 운심부지처 뒷산에서만 자라는 고귀한 약초로, 평범한 약재보다 효과가 뛰어났지만 중독되기도 쉬운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간과할 사태는 아니었지만, 고소의 명예가 걸려 있는 일이라 크게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던 남희신의 부탁을 받아 남망기는 은밀히 조사하고, 이를 처리하기로 하였다. 근방 야산에서 주변의 기척을 죽이고 동태를 살피던 중, 예상치 못한 밤에 상단의 창고와 본채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폭음과 함께 비명이 쏟아졌고, 불길 속에서 검과 화살이 날아다녔다. 누군가가 상단을 습격한 것이 분명했다. 남망기는 서둘러 피진을 들고 상단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아수라장이 된 상단은 비명과 절규가 뒤섞여 있었고, 침입자의 흔적은 뚜렷했다. 그러나, 장정 수십 명이 투견까지 풀며 뒤쫓았음에도 침입자는 잡히지 않았다.

모두가 혼란스러운 순간, 남망기의 눈에 들어온 것은 불길에 휩싸이지 않은 텃밭이었다. 텃밭은 겹겹의 부적 결계로 보호받고 있었고, 그 안에는 약초들이 자라고 있었다. 불길 속에서도 불타지 않는 부적과 약초라니. 남망기는 피진을 휘둘러 결계를 깨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약초뿐 아니라, 법기 하나가 땅에 묻혀 있는 듯 은은한 영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법기는 바로 '호쇄옥(濩灑玉)'이었다. 호쇄옥은 무엇보다 몸이 좋지 않았던 남망기의 어머니가 차고 다녔던 영험한 영기가 흘러나오는 패옥이자 기산의 고소 토벌시에 잃어버린 유품이었다.

분노가 끓어올랐다. 법기를 회수한 남망기는 상단의 내부로 향했다. 그는 상단주를 붙잡아 진상을 밝히고자 했다. 그러나 방 안에 있던 것은 이미 목이 떨어져 나간 시신뿐이었다. 침입자는 남망기의 목적과는 다르게 상단주와 관계가 있는 자였다. 게다가 단칼에 깔끔하게 잘린 목덜미는 침입자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증명했다.

남망기는 시신을 살펴보다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목덜미의 절단면에 묻어 있는 검은 잔재가 보였다. 불에 그을린 자국 같으면서도, 날의 흔적이 아니라 뭔가가 스친 흔적 같았다. 그 위로 희미하게 남은 붉은 선은 독이 묻어 있었다는 것을 암시했다. 남망기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그 자국을 닦아내어 독을 채취했다. 손수건을 살펴보며 눈을 좁혔다. 단순한 칼날이 남긴 흔적뿐 아니라, 뭔가 더 있었다. 단지 자국의 형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삿된 것의 흔적이었다. 남망기는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근방의 산길에 흩뿌려진 검붉은 핏자국을 쫓아갔다. 그 길 끝에서 장정들의 목소리와 투견의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정들은 횃불을 들고 이리저리 비추며 침입자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곧 쏟아진 비에 횃불은 모두 꺼졌고, 사람들의 기세도 꺾였다. 남망기는 빗물에 피가 씻긴다 해도 그 냄새를 감지할 수 있었다. 어둠이 짙어져도 그의 눈엔 모든 게 또렷했다.

남망기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게 드리운 먹구름 아래, 노란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눈이 서서히 가늘어지더니, 달빛에 하얀 털이 돋아났다. 뼈와 근육이 변형되면서 몸은 커져갔고, 남망기의 발톱이 길어지며 땅을 움켜쥐었다. 남망기는 완전히 늑대로 변했다.

 

**

 

 

 

 

피 냄새를 쫓아간 끝에 그가 도착한 곳은 낡고 버려진 절이었다. 가장 안쪽에서 진하게 풍겨오는 피 냄새에 이끌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엔 불상 앞에 검을 든 이가 서 있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강적이 아니라, 찢겨진 옷에 비에 젖은 몸이 다 드러난 가냘픈 여인이었다. 여기저기 베인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녀는 검을 들고 위태롭게 흔들렸다.

여인은 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방어보다는 마지막 몸부림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피할 수 있었으나 남망기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검을 맞아주었다. 옆구리가 스치며 피가 흘러내렸으나, 이유도 모른 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 느끼는 기이한 고동이었다. 마치 그의 심장이 스스로 깨어나 무언가를 부르짖는 듯 거칠게 요동쳤다.

남망기는 장포를 벗어 여인에게 걸쳐주고 품에 안았다. 차가웠던 몸에 열기가 돌기 시작했고, 여인은 마치 악몽을 꾸는 듯 눈물을 흘렸다. 줄줄 흐르는 눈물이 그의 가슴을 적셨고, 그녀의 붉어진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남망기는 가슴 깊은 곳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품 안에서 패옥을 꺼냈다. 푸른빛을 띠며 은은한 영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고소의 법기인 호쇄옥(濩灑玉)이었다. 겨우 되찾아 운심부지처에 보존해야 할 법기임을 알아 남망기는 잠시 머뭇거렸다. 눈앞의 여인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들어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패옥은 오래도록 어머니의 체온이 남아 있던 유품이었다. 그 체온이 식어버린 날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하지만, 잃어버린 물건이 자리를 되찾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의 생명이었다. 남망기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복잡하게 얽힌 감정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의 손이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패옥을 여인의 손 위에 조용히 올려두었다. 차가운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끼며 남망기는 눈을 감았다.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작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여전히 낯선 여인은 제 품 안에서 작게 숨을 내쉬며 살아가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떠오르는 해가 천천히 절 안으로 빛을 들이기 시작했다. 붉은 기운이 불상 아래로 길게 드리우며 서늘한 기운을 밀어냈다. 어둠이 가시고 아침이 오는 진리처럼, 생명이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치를 남망기는 거스를 수 없었다. 그녀를 이대로 두고 가는 것은 결코 옳은 처사가 아니었다. 데리고 가야 하는가, 심문해야 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맞는 걸까. 남망기는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것이 답답하게 했다. 남망기는 숨을 길게 내쉬며 품 안의 떨림을 조용히 느꼈다. 그 떨림은 생명의 불씨처럼 미약했지만, 확실히 살아 있었다. 그 작은 떨림이 그의 손끝을 통해 전해질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묵직해졌다. 무게는 무겁고도 서늘했다. 그가 감당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생명은 그 자체로 무겁고, 무겁기에 쉽게 손에서 흘러내렸다.

여인은 남망기의 품 안에서 어느새 온기를 띠었다. 그러나 그 온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울컥거림과 함께 그녀의 몸이 크게 떨렸다. 곧이어 거친 기침이 터져 나왔고, 이내 눈, ,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남망기의 시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선혈이 옷자락에 스며드는 것을 보며  순간 숨을 멈췄다.

 

상처가 덧납니다.”

 

남망기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문득 품 안에서 자신의 손수건을 꺼냈다. 그녀가 피 묻은 손으로 더는 움직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천천히 젖은 손수건을 펴서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 위에 덮었다. 차갑던 그녀의 피부가 그의 손끝에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잠깐 그를 보았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점점 생명이 꺼져가는 느낌이 뚜렷했다. 몸이 식어가는 감각이 서서히 팔다리로 퍼지는 걸 보면서, 이러다가는 그녀가 먼저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머릿속을 스쳤다. 남망기는 축 늘어진 그녀를 품에 안고 나갈까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여전히 근처에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추격대의 위험이 마음에 걸렸다. 더구나, 이 몸이 그 거친 도주를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결국 한숨을 뱉고 의원을 데려오기 위해 홀로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몇시진 뒤 의원과 함께 다시 절로 돌아왔을 때, 내부는 고요에 잠겨 있었다. 남망기는 천천히 문을 밀어 열었다. 불상 아래를 감싸던 떠오르는 해의 붉은 기운은 자취를 감추었고, 서늘한 기운만이 묵직하게 깔려 있었다. 남망기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절 안에는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발끝으로 바닥을 조심스레 눌러보니, 검붉은 선혈이 바싹 말라 굳어 있었다. 그녀의 흔적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

 

 

 

 

 

 

여인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절의 내부가 아니었다. 나무 기둥이나 불상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자, 자신의 몸이 온통 붕대로 감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묵직한 통증이 몸 구석구석에 스며 있었고, 코끝을 찌르는 약초 냄새가 지독했다. 사방을 둘러보니 피물이 가득 고인 양동이와 피로 얼룩진 영견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약초 더미와 함께 놓인 물건들을 보고 여인은 여기가 의원의 거처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정신이 흐릿한 상태에서도 경계심이 잔뜩 일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금세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억눌린 신음이 새어나오자, 그 순간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셨습니까.”

 

서글서글한 인상의 사내가 다가왔다. 낯선 얼굴이었다. 눈에 익은 가문이나 문장의 표식은 보이지 않았다. 방심할 수 없었다. 여인은 이내 경계의 기운을 가득 품은 목소리로 낮게 물었다.

 

“...누구십니까.”

 

사내는 여인의 날 선 기색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예상했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신이 이 고을의 의원이라고 밝혔다.

 

절에 약초를 캐러 갔다가, 쓰러진 당신을 보고 모셔왔습니다.”

 

여인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리가 없었다. 의문이 가시지 않아 한참을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사내는 여인의 심중을 읽기라도 한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근처에서 보따리를 가져와 풀어 보였다. 보따리 속에는 온갖 약재와 산과 절에서 캔 듯한 약초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절에는 예전부터 스님들이 기른 영험한 약초가 많아 가끔 들릅니다.”

 

사내가 담담히 말하였지만, 여인은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못한 채 몸을 일으키려 했다. 팔에 힘을 주자 온몸에 통증이 퍼져 나갔고, 몸은 금세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러자 사내가 다가와 여인의 팔을 부드럽게 붙잡고 침상에 기대게 해주었다.

 

상처가 덧납니다.”

 

단호한 목소리에 여인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녀의 얼굴에 약간의 당혹이 서렸다. 사내의 눈빛은 차분했으나, 그 안에 단단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여인의 눈이 천천히 사내를 향했다. 그녀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이내 눈동자가 좁게 가늘어졌다. '그 말' 그녀의 머릿속에 어렴풋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절 안에서 들었던 바로 그 말이었다. 단순한 말이었지만, 같은 문장이 똑같이 떠올랐기에 가슴 한켠이 서늘하게 식어갔다. 여인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지더니, 이내 무겁게 열렸다.

 

"혹시, 그때 절에 있었던 자가 당신입니까?“

 

사내의 미소가 희미하게 흐려졌다. 그가 대답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곧 닫았다. 얼굴에는 미묘한 기색이 떠올랐다.

 

"저는 그때 그곳에 없었습니다. 그저지나간 자의 흔적을 본 것일 뿐이지요."

 

여인의 시선이 그를 뚫어지게 노려보다 숨을 고르며 천천히 물었다.

 

절 안에다른 사람은 없었습니까?”

 

사내의 미소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퍼석한 기운이 서려 있는 미소였다. 그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갔을 땐 그쪽 혼자뿐이었습니다.”

 

여인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의아함이 스며들었다.

 

정말로아무도 없었습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낮고 조심스러웠다.

, 그랬습니다. 다만

 

사내의 시선이 강징의 옆에 놓인 물건으로 향했다.

 

이건, 그곳에 놓여 있더군요.”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피로 물든 흰 장포와 호쇄옥(濩灑玉)이었다. 낯선 법기가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흰 장포는 여인의 시선에 단번에 걸려들었다. 여인은 눈을 부릅떴다.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손을 뻗어 흰 장포를 움켜쥐었으나, 손끝이 떨렸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고소의 것이었다. 그녀의 목덜미에 스산한 소름이 돋았다. 여인은 숨을 내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잘못됐다그녀의 속삭임이 방 안에 희미하게 울렸다. 사내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이곳은 외진 곳이라 사람이 잘 찾아오지 않는 곳입니다. 몸부터 회복하는 게 먼저일 테지요.”

 

그의 목소리는 나긋했으나, 그 말에 왠지 알 수 없는 여운이 남았다.

 

독이 몸에 퍼지고 있었습니다. 살을 째고 독을 빼냈으나, 완치된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급소로의 중독은 막았으나, 이 독은 배합을 알아내지 않으면 쉽게 풀 수 없습니다. 당분간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여인은 짧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고맙소.” 그녀의 목소리는 기운이 빠져 있었다. 몸을 더는 지탱할 수 없었다. 어지러움이 몰려오고, 다시 침상에 쓰러졌다. 사내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을 영견으로 닦아주었다. 그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어리석은 짓이었지.”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으나, 그 안에는 자조가 가득 배어 있었다.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사내의 시선이 희미하게 흐려졌다. 무겁게 떨구어진 눈꺼풀 너머로, 그 시선이 향한 곳은 그녀의 손에 쥐어진 호쇄옥이었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으며 눈길은 다시 흐트러짐 없이 고요해졌다. 어딘가에서 바람이 새어 들어온 듯, 짧은 찰나의 흔들림만을 남긴 채, 호쇄옥은 고요히 그녀의 손 안에 남아 있었다.

 

**

 

 

 

 

운심부지처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남망기의 심사는 편치 않았다. 발끝이 마룻바닥에 닿는 감각마저 묵직하게 느껴졌다. 남희신을 대면하기 전까지 그는 줄곧 고심했다. 평소라면 남희신에게 숨김없이 따르고 모든 것을 솔직히 대했으나, 이번만큼은 입을 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가.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내보여야 하는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실타래가 엉켜갔다.

 

약초는 모두 회수했습니다.”

 

남망기는 말끝을 한 번 삼킨 뒤 이어갔다.

 

상단은 호쇄옥으로 약초를 길렀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법기는 도중에 분실하였습니다.” 짧은 숨을 고른 뒤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시일 내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남희신의 시선이 천천히 남망기를 향했다. 그의 빛은 결코 가볍지 않았고, 시선은 마치 얇은 장막을 뚫고 속을 꿰뚫어보는 듯했다. 시선이 거두어지지 않아 남망기의 어깨에 알 수 없는 무게가 얹힌 듯했다. 얼굴에 담긴 표정은 분명 온화했으나, 쉽게 해독할 수 없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선연히 떠오른 표정은 갈등이 얽혀 있는 듯 묘하게 흐릿했다.

 

상단이 불타고, 상단주가 목이 잘려 죽었다고 들었다.”

 

남희신의 목소리는 여전히 온화했으나, 그 나긋함이 오히려 서늘하게 퍼졌다.

 

망기, 네가 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어찌 된 일인지 연유가 알고 싶구나.”

 

남망기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올렸다. 얼굴은 감정의 흔들림 없이 올곧았으나, 피진을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손등 위로 선명히 드러난 핏줄이 서서히 부풀어올라 굳건한 의지를 드러냈다.

 

상단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불길이 치솟고 있었습니다.”

 

남망기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확고했다.

 

침입자는 오로지 상단주만을 죽이고 떠났습니다. 다른 것은 건들지 않았습니다.”

 

남희신은 말없이 남망기의 말을 들었다. 무겁고 길게 흐르는 침묵 속에서도, 남희신의 시선은 여전히 남망기를 놓지 않았다. 침입자에 대한 남망기의 태도는 두둔에 가까웠으나 남희신은 이를 묻지 않았다. 충분히 더 물을 수 있었으나, 그저 침묵으로 넘겼다남망기는 피진을 더 깊이 움켜쥐었다. 불분명한 정체의 침입자, 분실된 호쇄옥, 그 모든 것들이 실타래처럼 엉켰다. 사태는 해결되기보다는 더 깊고 어두운 미궁 속으로 흩어지는 듯했다남희신은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그의 손이 남망기의 손등 위에 가만히 내려앉았다. 도드라진 핏줄 위로 남희신의 손가락이 조용히 눌렸다. 그 움직임에는 질책도, 위로도 없었으나 묘한 무게감이 있었다. 손끝이 살짝 눌리며 흐르는 기운이 남망기의 피부에 스며드는 듯했다.

 

망기야.”

 

남희신의 목소리는 부드럽고도 낮게 가라앉았다.

 

무리하지 말고, 네 선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된단다.”

 

남망기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 형장.”

 

남희신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는 서서히 몸을 바로 세우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책상 위에 다시 손을 올리며, 손가락으로 가볍게 서책을 두드렸다.

 

낯선 이를 쫓는 것은 네게 맡기겠다.”

 

남희신의 목소리는 더없이 조용했으나, 조용함이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호쇄옥은 내가 찾겠다.”

 

남망기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으나 남희신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다.

 

종주로서의 책임이 있으니.”

 

남희신의 미소가 서서히 번졌다.

 

더불어, 형제는 함께 걸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 말에 남망기는 단단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시선이 남희신이 들고 있는 고서에 잠시 머물렀다. 서책의 너덜너덜해진 가장자리와 노란빛으로 바랜 종이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고서의 한 구절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심맥을 잠재우는 법과 혈의 흐름을 끊는 지침.' 우연히 펼쳐진 것인지, 일부러 열어둔 것인지 알 수 없었다남망기의 시선이 머무는 것을 느꼈는지, 남희신은 아무 말 없이 고서를 천천히 덮었다. 얇은 책장이 닫히며 공기 중에 희미한 향이 퍼졌다. 그 순간의 소리는 유난히 길게 울리는 것만 같았다.

짧은 침묵이 흘렀고, 남망기는 이내 고개를 숙이며 단정히 대답했다.

 

, 형장.”

 

**

 

 

 

 

 

 

사흘간 사경을 헤매던 여인은 나흘째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마치 모든 일이 아지랑이처럼 희미한 꿈 같았다. 그러나, 콧속을 찌르는 지독한 약초 냄새와 온몸을 옥죄는 통증이 이곳이 현실임을 뚜렷이 인지하게 했다침상의 이불을 천천히 걷어내자 온몸에 감긴 붕대가 눈에 들어왔다. 붕대 곳곳에는 검붉은 피가 스며든 자국이 선명했다. 팔부터 어깨, 허리, 다리에 이르기까지 감기지 않은 곳이 없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늑골이 조이는 듯한 통증이 따라붙었다몸을 일으키려 하자 머리가 핑 돌았다. 그녀는 침대 기둥을 붙잡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손끝에 힘을 주고 바닥을 짚어 겨우 몸을 일으켰으나, 발을 내디딜 때마다 전신의 근육이 단단히 뭉쳐 있었다. 마치 쇠사슬로 묶인 듯,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온몸에 새겨진 고통은 단순한 부상이 아니라, 그간의 고난을 증명이라도 하듯 깊고 끈질겼다. 게다가 무언가가 몸 안에서 꿈틀대며 내장을 짓누르는 듯한 기분에 그녀는 가슴께를 눌렀다. 차가운 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망신스러운 꼴이군." 그녀는 스스로를 책망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마침 의원이 약탕기에서 달인 약을 들고 들어왔다. 의원의 눈이 천천히 그녀의 움직임을 좇았다.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걷는 그녀의 걸음은 비틀거림이 섞여 있었고, 얼굴에는 진한 피로가 묻어났다. 의원은 안쓰러움이 깃든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많이 회복되셨군요. 무리는 하지 마십시오. 걷는 것만으로도 큰 진전입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약을 받아들었다. 짙은 약초 향이 코끝을 찔렀다. 그녀는 약을 한숨에 들이켰다. 약의 쓴맛에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이내 입을 닦고는 의원을 향해 가볍게 포권하며 말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후일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의원은 느릿하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갚을 필요는 없습니다."

 

여유로운 음성이었다. 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유 없는 친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가 내뿜는 온화한 말투는 알 수 없는 수법의 일환처럼 느껴졌고, 그녀는 그것에 의존할 수도 없었으며,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여인은 고이 정리된 짐과 검을 집어들었다. 가슴께로 전해지는 묵직한 무게에 잠시 숨을 고르는 듯했으나, 곧 발걸음을 내디뎠다.

 

"지금 당장은 보은할 수 없으나, 반드시 다시 찾아와 갚겠습니다.“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숨소리는 다소 거칠었다. 의원은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등을 돌린 채였다. 의원이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한 기색을 보였으나, 그녀는 기다리지 않았다. 문을 밀어 열고 밖으로 나섰다. 발걸음은 단호했으나 어딘가 불안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그녀의 조급함을 드러냈다. 조급한 여인과 다르게 의원은 문틀에 느긋이 기대어 있었다.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혈자리가 막혀 있어, 당분간 변면술(變面術)은 사용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강 종주님.”

 

문 밖으로 나선 강만음의 거친 발걸음이 순간 멈추었다. 숨을 들이쉬는 소리마저 조용히 끊겼다. 강만음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눈동자에 당혹, 분노, 그리고 불안과 불신이 겹겹이 어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사내를 향했다. 눈동자가 떨렸다. 흔들리는 감정은 분명히 억누르고 있었으나, 그 억눌림의 틈새에서 벗어나려는 노기가 서렸다.

 

……, 대체 누구냐.”

 

강만음의 손이 천천히 허리춤으로 향했다. 검집을 잡은 손이 무겁게 떨리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것은 곧 단단한 결단으로 바뀌었다. 검이 서서히 빠져나오며 공기를 가르자 서늘한 금속음이 공간을 스쳤다. 차가운 칼날 끝이 사내의 가슴께를 곧게 겨눴다. 마치 그 자리에서 숨을 꺼내려는 듯한 날카로움이었다. 가슴께를 겨눈 칼끝 앞에서 의원은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미소를 지으려는 입가가 천천히 일그러졌다. 웃음의 흔적은 사라졌고, 복잡한 감정이 얼굴을 스쳤다. 순간, 눈동자 깊은 곳에 잠시 흔들림이 비쳤다. 흔들리던 시선은 여인의 날 선 얼굴을 비추더니, 이내 허공으로 흘렀다. 그 눈길이 허공의 어디에 멈춘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는 듯한 묘한 기색이었다.

 

 

 

 



 

*변면술(變面術) 은 육체의 본질을 왜곡하고 외형을 뒤바꾸는 술법으로, 성별을 포함한 신체적 특징을 자유자재로 변형하는 비술이다. 그러나 단순히 얼굴을 바꾸는 변장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변장은 껍질을 바꾸는 것에 불과하지만, 변면술은 뼈와 근육, 피부, 혈맥, 음양의 속성까지 교란하는 술법이다.

이 술법의 기원은 오래된 고서에조차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으며, 귀도(鬼道)와 사도(邪道)의 기법에 가까운 술법으로 여겨진다. 운용할 수 있는 자는 극히 드물며, 거대한 대가와 고통을 수반하기에 세가에서도 이를 터득한 자는 손에 꼽힌다. 변면술을 익혔다고 해서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매번 사용할 때마다 육체와 정신에 큰 부담을 주어 몸과 마음을 서서히 망가뜨린다고 전해진다. ()과 양()의 균형을 강제로 전복시키며, 신체의 구조를 무너뜨린 후 재조립하는 것과 같으며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본성"을 뒤틀어 바꾸는 것이다.

변면술의 대가는 단순한 체력 소모를 넘어서 신체와 정신의 훼손으로 이어진다.



망기강징ts 희신강징ts XX강징ts


아아아주 옛날에 비슷한 무순 쓴 적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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