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메가를 음월로 알파를 양명으로 표현 
내 맘대로 설정ㅈㅇ 



 

<1>

 

  궁문의 높은 탑 등롱이 붉은 색으로 물들었고 뒷산에서는 침입을 알리는 커다란 북 소리가 앞산까지 울려 퍼졌다. 상궁의 궁주가 집인과 장로들 그리고 수 많은 여인들과 아이들을 급히 비밀 통로로 데려가며 크게 후회하고 소리쳤다. 초양파를 궁문에 들이는 게 아니었다! 단지 적에 의해 공격을 받은 안쓰러운 가문이라 생각한 것이 크나큰 오판이었다. 무봉으로부터 피하고자 깊은 산골까지 들어간 처지가 제 위치는 생각지 못한 채 동정심에 물들어 스스로 안위를 불안스럽게 만들고 말았다. 그것이 무봉의 계획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이들이 부리나케 발을 놀려 그들의 눈을 피해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었으나 화를 면할 수는 없었다. 궁 내에 피 냄새가 도지기 시작했다. 그들을 호위하던 시위들이 날카로운 칼날에 스쳐 무너지고 부서졌다. 오늘로써 궁문의 명예와 영광 그리고 역사가 무너지는 날인 것인가. 집인이 탄식했으나 각 궁주들이 그를 안심시켰다. 급습은 당했으나 내공이 높은 이들이 살아남아 있으니 이 화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집인이 비밀통로에 발을 들였으나 절대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그렇게 떼를 지어 피신하려는 사람들 속에 한 아이가 입구에서 주춤거리고 섰다. 치궁의 외아들 궁원치였다. 작고 왜소한 아이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시위들이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가고 있을 적에 원치는 치궁에 두고 온 옥패 하나가 생각이 나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만 봤다. 치궁에는 아직 아버지가 계시니 지금 가도 괜찮지 않을까. 두고 온 옥패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기신 유품이었다. 하나뿐인 것이라 원치는 저 멀리 보이는 치궁을 내다보며 그리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리에 힘을 주고 곧장 뛰려는 것을 작은 손이 잡아챘다. 돌아보니 각궁의 막내 소생 랑이었다. 

 

 "어디를 가려고?!"

 "치궁에 가야 해. 어머니 유품을 놓고 왔어."

 "그럼 나와 가자. 혼자는 위험해!"

 

  우연찮게도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난 두 사람은 걸음마를 뗄 적부터 죽마고우가 되어 바늘과 실처럼 함께 노 다녔었다. 식성까지 비슷해져 어머니들이 서로 때가 되면 음식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는데, 다만 둘의 처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랑은 차기 집인이 될 궁단각의 막내아들이었고 원치는 치궁의 궁주의 소생이긴 하나 첩의 아들이었다. 본디 본처와 적장자가 있었으나 무봉의 습격으로 둘을 잃고 급히 첩을 들여 아들을 보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원치였다. 그러나 궁문의 피를 이어 받은 자라면 당연히 태어날 적부터 양명이어야 했는데 원치는 그러하지 못했다. 치궁의 궁주는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져 갔다. 언제가 제 뒤를 이을 아이가 양명으로 발현하지 못한다면 다른 이에게로 지위가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또 다시 여인을 들이자니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첩자일까 두려웠다. 치궁의 궁주는 하루빨리 원치가 양명으로 발현되었음 하여 어린아이를 혹독하게 대했다. 눈물도 흘려선 안되고 한시도 책을 눈에서 떼어도 안 된다는 엄격한 규율로 원치를 대했는데 그 안에는 본부인과 아들을 잃은 것에 대한 원망의 분풀이도 함께 서려 있었다. 어린 아이를 향해 가차없이 매질을 하기도 했고 조금의 잘못도 그냥 넘어가는 법 없이 고문과도 같은 짓을 일삼았다. 무봉에게로 향해야만 했던 원망을 비겁하게도 어린 아이에게 쏟아 부었으나 그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다섯살 때까지 살아있었던 어미의 보호 아래 그나마 숨통이 트인 때를 제외하고는 원치는 늘 고달팠다. 그러니 저 랑과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원치는 벌써 알아차렸다. 그것이 부럽지는 않았다. 다만 하나 부러운 것은 랑의 형님, 궁상각의 존재였다. 어디를 가도 랑아, 랑아 하고 불렀고 집인과 각궁의 궁주의 명으로 잠시 출타했을 때에는 늘 소중한 뭔가를 사와 품에 안겨주기도 했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입에 넣어주고 세차게 달리다 넘어질라치면 어디선가 나타나 거뜬히 안아 올렸다. 원치는 형님의 존재가 부러울 따름이었다. 

 

  그러니 저 옥패라도 손에 꼭 쥐고 있어야 했다. 이제 더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머니에게서 유일한 위로를 받고자 한다면 저 옥패가 필요했다. 랑이는 원치의 손을 잡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비밀 통로를 먼저 앞서던 각궁의 부인이 비명을 질렀다. 랑아! 랑아! 시위보다 부인이 먼저 움직였다. 아이들의 뒤를 따라 쫓아가자 시위들이 뒤늦게 반응했다. 원치는 랑이와 함께 숨을 헐떡이며 치궁으로 달렸다. 가는 길마다 시위와 무봉의 자객들이 피 웅덩이 위로 쓰러져 있었다. 두 사람은 울지도 않고 앞만 보고 질주했다. 드디어 치궁 앞이다. 짧은 다리로 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 위에서는 각궁의 궁주와 무봉의 자객들이 서로 칼을 부딪히고 있었다. 낑낑대며 한참을 올라 마지막 계단 하나를 남겼을 때에는 이미 먼저 쓰러져 숨진 치궁의 궁주 앞으로 궁단각이 칼에 찔려 무릎을 꿇고 말았다. 랑이가 그 모습을 보고 악을 지르고 달려가 형님인 궁상각이 준 단도를 꺼내 아버지 앞을 가로 막았다. 궁단각은 어서 가라 피를 토하며 울부짖었지만 랑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 틈에 원치는 몸을 낮추고 치궁 안으로 들어갔다. 급히 어머니의 옥패를 찾아내 나오다가 눈도 감지 못한 채 숨져 있는 아버지에게로 눈을 뒀다. 이미 죽어버린 이의 눈빛은 황망 그 자체였다. 그때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뜨겁고 끈적한 피가 얼굴과 몸으로 튀었다. 눈에까지 튀어 세상이 붉게 변해버렸다. 빠르게 깜빡이고 손으로 비벼 보아도 붉은 세상은 지워지질 않았다. 겨우겨우 고개를 들어보니 뒤늦게 쫓아온 궁단각의 부인이 랑이를 안고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등에는 길고 날카로운 칼이 하나 박혀 있었다. 쓰러진 각궁의 식솔들은 움직임이 없었다. 그들을 향해 칼을 휘두른 무봉의 자객이 비릿한 웃음을 흘린 채 서 있었다. 그는 좀전의 싸움으로 한쪽 눈을 잃은 상태였다. 원치는 울지 않았지만 몸은 뻣뻣하게 굳어 움직이질 못했다. 그저 그들 앞에 서 있는 자객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어머니! 아버지! 랑아! 하고 외치며 올라오는 상각을 보고 주저앉았다. 상각이 올라오자 그들을 헤친 자객은 더 이상의 싸움은 무리라 여겼는지 급히 자리를 피했다. 상각은 넘어지다시피 계단을 올라와 울부짖으며 어머니를 품에 안고 손으로는 아우의 뺨을 쓰다듬었다. 원치는 그 모습을 보고 덜컥 겁을 먹었다. 궁문의 오판이었으나 각궁의 식솔들이 모두 죽게 된 원흉은 저에게 있었다. 원치는 영원히 지우지 못하고 내려놓지도 못할 두려움을 평생 끌어안게 되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긴요. 이게 다 저 궁원치 때문에 생긴 일이지 않습니까."

 "저 아이 때문만은 아니지요."

 

  장례식이 있던 날, 문파의 어른들이 원치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질을 해댔다. 

 

 "왜 아닙니까. 저 아이가 치궁에만 가지 않았어도 각궁의 궁주와 부인 그리고 막내까지 살아 남았을 겁니다."

 "애초에 사람을 들이지 말았어야 합니다. 무봉의 잘못을 왜 어린 아이에게로 돌리는 겁니까."

 "궁상각을 보십시오! 저게 지금 사람의 몰골입니까. 게다가 생각을 좀 해보십시오. 차기 집인으로 각궁의 궁주가 유력했고 각공자는 그 뒤를 이을 후계자였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사태로 인해 우궁의 궁주가 집인이 되기 일보 직전입니다. 각궁에 비해 능력도 뭣도 없는 자가!"

 

  치궁에서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궁문의 집인에게도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의관들이 바삐 발을 놀리며 대전을 드나들고 전보다 더 많은 인원들의 시위들이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원치는 그 앞 계단 위에 쪼그려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른들은 그 모습을 보고 다시 흉을 보았다. 대체 누굴 닮았는지, 어쩜 저리 눈물이 없는 걸까요. 어릴 때부터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어요. 이제 치궁은 누가 맡습니까. 저 피도 눈물도 없는 아이가 맡아야 하는 겁니까. 그런 말을 들었음에도 원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왜 울어야 하는지도 아이는 이해하지 못했다. 

 

 "원치야."

 

  하염없이 밤하늘만 올려다보던 원치는 제 이름에 고개를 돌렸다. 상각이 작은 상복 하나를 손에 들고 서 있다가 아이가 저를 보자 무릎을 꿇고 피곤한 눈임에도 불구 으레 미소 지어주었다. 우선 이것으로 갈아입자. 피 묻은 옷은 보기 싫구나. 원치는 아직도 피 묻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피바람이 한차례 불고 나서도 어느 누구도 원치를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천천히 자리서 일어나자 상각이 피 묻은 겉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원치는 제 옷을 벗기는 그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손등에 잘고 굵직한 상처들이 한가득하였다. 칼날에 다친 것은 아니고 무언가를 세게 친 흔적 같았다. 

 

 "그리하시면 뼈가 상합니다."

 "응?"

 

  상복으로 갈아입히던 상각이 눈을 들었다. 눈물로 젖어있는 그의 눈을 원치가 바로 보며 말했다. 차라리 제게 화를 내십시오. 상각은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어버렸다. 우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바 없는 아이였으나 지금 원치의 두 눈에는 두려움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른들께서 말하는 차가운 아이가 아니었다. 그저 정을 모르는 아이일 뿐. 상각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가족을 잃은 것은 나 뿐만이 아니지 않느냐. 우리 둘 다 잃었다. 원치는 등을 살살 쓸어내리는 상각의 손길에 점차 긴장이 풀려갔다. 그러나 축축하게 젖어가는 어깨를 느끼고는 다시 무거운 마음을 느꼈다. 그 누구도 궁상각의 슬픔을 위로할 수 없는 걸까. 원치는 있다면 자신이 되고 싶단 생각을 가졌다. 둘 다 가족을 잃었으니 서로가 가족이 되어주면 될 것이다. 그렇담 다시 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제가 형님의 아우가 되겠습니다."

 "······"

 "그러니 형님께서도 저의 가족이 되어주십시오."

 

  상각은 소리 없이 울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아우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계단 아래서 형님! 하고 소리치며 금방이라도 올라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제 그 어디에도 없다. 몸은 차게 식어버렸고 조금 있으면 흙 아래로 들어가 모든 것들의 거름이 될 것이다. 그럼 진정 혼자가 되는 것이겠지. 이 아이도 더불어서 말이다. 상각은 원치를 품에서 떼어내며 말했다. 넌 내 아우다. 그러니 이제 혼자가 아니야. 원치가 죽마고우를 잃은 뒤 처음으로 밝게 웃음 지었다. 저에게는 이제 평생 형님 밖에 없다. 형님이 제 세상이고 빛이며 희망이다. 원치는 상각을 위해 죽고 살기를 다짐하며 랑이의 것이었던 단도를 그 자리서 선물 받았다. 그토록 부러워했던 형님의 선물인 단도를 구경하는 사이 두 사람 머리 위로 하얀 등이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끝내 궁문의 집인이 사망한 것이다. 상각은 치궁 앞을 지키던 어른들과 눈빛을 주고 받았다. 궁문의 정권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제 궁문은 우궁의 궁주였던 궁목우가 집인이 되었고 후계자 소주의 자리는 그의 아들 사우가 받았다. 궁문의 둘째 아들 상각은 한참 뒤로 밀려나 버렸으나 영향력은 꺼지지 못했다. 정권이 바뀌고 난 뒤 궁문은 빠르게 회복해 나갔다. 경계를 더 세우고 안과 밖을 더 보강했는데 그 덕은 모두 상각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피바람이 불고 난 이후로 상각은 이전보다 더 바삐 움직였다. 여러모로 능력 좋은 상각은 집인의 명대로 강호를 접수하고 주변 문파들을 하나씩 제거하거나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원치는 바쁜 임무 속에서도 틈틈이 상각을 보호하고 살피는 상각 아래서 치궁의 아들 답게 약재와 약리학 그리고 무공을 익히며 나날이 지식과 힘을 키워나갔다. 머리 하나는 치궁의 전 궁주를 닮았는지 여간 똑똑한 것이 아니라 한 번 외면 백 가지, 천 가지를 알아 스승을 놀라게 했고 열 살 무렵에는 스승을 뛰어넘어 홀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원치는 지식과 내공으로 물들어 가는 자신을 보며 환희했다. 조금만 더 크면 형님을 돕고 지킬 수 있으리라. 상각은 궁문에서 그 누구보다 뛰어난 자였다. 무공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났으며 이미 애저녁에 집인의 시험도 거친 특출난 인재인지라 궁사우의 어머니인 지약 부인의 경계 대상에 오르고 말았다. 궁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이나 그 밑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어쩌다 지약 부인과 대립각을 세우게 된 상각은 여간 피곤할 수 없었다. 그녀는 궁상각이 제 아들 궁사우를 쳐내고 소주의 자리에 오를까 염려했다. 특유의 계략으로 집인의 신뢰마저 얻어냈으니 지약 부인으로서는 경계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의 곁에는 원치가 있었다. 독약과 해독제 그리고 암살 무기에 특별한 재능을 갖춘 아우가 있으니 눈엣가시가 되었고 잔잔한 호수 밑으로 발버둥 치는 오리처럼 지역 부인은 끊임없이 상각과 원치를 해치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하여 원치는 그들에게서 형님을 지키고자 끊임없이 배우고 또 배워나가야만 했다.

 

  이러구러 상각이 또 다시 출타한 지 6개월이 지났고 원치는 열일곱이 되었다. 그 사이 치궁의 피는 원치가 유일했기에 궁주의 자리에 올랐으나 오른지 일 년 만에 다시 도마 위에 놓이고 말았다. 원치는 집인과 소주 그리고 지약부인이 먹을 특별한 금초차를 만들다 말고 대전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의 측시위 무결이 궁주를 데리러 온 녹옥시들을 힐끔 훔쳐보고는 염려하는 투로 물었다. 

 

 "이번엔 무엇으로 꼬투리를 잡으려는지 모르겠습니다. 궁주."

 

 산곡의 독장을 막아줄 차를 우리던 원치는 꽤 여유로운 얼굴로 서늘하게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형님이 어디까지 오셨는지 알아보거라."

 "예, 궁주."

 "내가 궁지에 몰렸단 내용의 서신도 함께 전하고."

 

  무결이 주인 따라 비릿하게 웃고는 재빨리 뒷문으로 나갔다. 정성스럽게 우려낸 차를 찻잔에 옮겨 담고 대전에서 보낸 녹옥시들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대전으로 들자 집인의 곁에 있던 지약 부인이 구렁이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사촌지간임에도 궁상각을 빼닮은 원치의 태도가 상당히 거슬렸다. 집인 대인.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시종에게 찻잔을 남겼다. 

 

 "날로 독해지는 산곡의 독장을 해결하기 위해 집인의 명대로 처방해 우려낸 차입니다. 안심하고 드소서."

 "언제나 원치 네게 신세를 지는구나."

 

  저의 소임일 뿐입니다. 집인 대인. 두 손을 공손히 올리고 인사를 올리며 대답한 원치의 얼굴은 간사하기 이를 데 없다 지약부인은 생각했으나 집인은 이를 든든하게 여겼다. 집인이 금초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 대전으로 부른 까닭을 말해주었다. 여태 양명으로 발현하지 못한 원치가 궁주의 자격이 있는 가를 놓고 장로들이 염려하고 있다는 주제였다. 원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툭하면 양명을 먹이 삼아 씹어대는 장로들이 꼴 보기 싫었다. 그것으로 형님과 저를 내칠 수 있으리란 막연한 기대를 하는 것 같아 같잖아 보이기까지 했다. 허나 다행인 점은, 집인이 형님과의 신뢰가 두터운 만큼 저를 믿고 있다는 것이었다. 염려와 음모는 지약부인과 소주 궁사우 그리고 장로들이 하는 것 같았다. 집인은 피곤하단 얼굴로 양옆으로 앉아있는 장로들을 흘긋 노려보았다. 

 

 "그것을 말하고자 한다면 저 또한 언제 발현되리라 차마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안다. 그것을 미리 알 수 있다면 벌써 예언가가 되어 이 세상을 쥐락펴락 했을 것이다."

 "허나, 집인 대인. 이것은 사뭇 심각한 일이옵니다. 궁주의 자격으로는 반드시 양명이어야 한다는 것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각 공자 또한 태어날 때부터 양명으로 태어나 이례적으로 내력이 강하고 무공이 뛰어나 삼역 시련을 쉬이 통과하지 않았습니까."

 

  찻잔을 쥔 지약 부인의 손등에 힘줄이 돋아났다. 지금의 집인도 스무날이 가깝도록 어렵사리 통과한 삼역 시련을 상각은 열다섯이란 나이에 보름도 못 되어 통과한 궁인이었다. 아들인 궁사우도 한 달이 조금 넘어 겨우 통과했으니 저 발언은 심기를 거슬리게 하기에 딱 좋은 방편이었다. 궁상각이 궁사우보다 능력이 좋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시킨 꼴이니 비위가 상했고 부러 가식을 떠느라 살며시 고개를 숙인 원치의 입꼬리를 올라간 것을 보고는 구역감이 올라왔다. 언젠가 저 낯짝을 뜯어내고 사지를 가를 것이다. 집인이 단숨에 차를 마시고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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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둥.둥. 그때 큰 북이 일정한 속도로 둥둥 울리기 시작했다. 출타 중이었던 궁인의 환궁을 알리는 소리였다. 어느새 무결이 대전으로 들어와 원치의 곁에 섰다. 궁주, 오셨습니다. 나지막이 속삭이자 원치의 입꼬리가 부드러워졌다. 또각또각. 계단을 오르는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질 수록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반년 만에 보는 형님이다. 그 동안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고 얼른 품에 안기고 싶었다. 그토록 그리운 형님의 품으로. 대전 안으로 그림자 하나가 길게 드리워졌다. 형님의 향이다. 비에 젖은 흙내음과 추운 겨울날의 서늘한 바람 냄새를 닮은 상각의 향이 코 밑을 스치더니 차디 찬 손 끝이 원치의 손바닥을 훑고 지나갔다. 안심의 손길이었다. 상각은 긴장감에 뜨거워진 아우의 손바닥을 식혀주고는 소주의 곁을 스치며 서늘한 눈빛을 건넸다. 소주 궁서우는 입안의 살을 이로 콱 깨물며 그 시선을 받아냈다. 

 

 "집인 대인."

 "드디어 돌아왔구나. 그래, 네 공은 서신을 통해 다 전해 들었다. 수고가 많았다."

 "아닙니다. 대인께서 부탁하신 것은 따로 문서를 남겨놓았으니 곧 올리겠습니다. 헌데."

 

  상각의 눈초리가 자신의 아우 원치에게로 향했다. 집인은 곧바로 혀를 차며 장로들 쪽으로 탓하듯 손짓했다. 원치가 아직 양명으로 발현하지 않아 장로들이 걱정을 하던 참이었다. 이리 말하자 원치가 입을 열었다. 형님,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반년 만에 본 상각의 얼굴은 살이 내려 전보다 더 날카로워졌고 눈빛은 피곤함에 젖어 들어 예민해 보였다. 오자마자 쉬어야 되건만 자신의 발현 문제로 대전에 들어 실랑이를 벌여야 하니 볼 면목이 없어 한 없이 부끄러워졌다. 궁상각치우는 대대로 양명이 태어났다. 치궁에서도 대대로 양명으로 발현한 궁문의 핏줄만이 궁주가 되었으니 원치 자신도 반드시 그리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발현이 늦어 자신도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발현을 당길 수 있는 약재란 약재는 다 조제해 복용해 봐도 기미가 없다. 그것이 형님께 죄송해 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장로님들께 아룁니다. 대대로 양명이 궁주를 맡아 왔으나 꼭 양명이어야만 한다는 규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양명이기 전에 반드시 궁문의 핏줄이어야 한다는 것이 자격 요건 중 가장 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치 아우는 전 치궁의 궁주의 아들이며 그에 걸맞은 보기 드문 약리학의 수재입니다. 발현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원치를 대신할 궁인은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원치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아버지와 죽마고우의 죽음을 목격했을 때에도 울지 않던 원치가 상각의 말에 눈물을 보였다. 상각은 그런 존재였다. 유일하게 원치를 울릴 수 있는 존재.

 

  집인은 흐뭇하게 웃었고 사우와 장로들은 눈을 굴리고 반박할 말을 찾았지만 대전의 주인이 조용한 탓에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없었다. 대인, 각 공자의 말이 맞아요. 꼭 양명으로 발현한 자만 궁주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게다가 원치 궁주를 대신할 이도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원치는 그녀를 노려보았고 상각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으나 제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집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로들을 설득해 이 일에 대해 넘어가기로 했다. 각 공자. 장로들이 자리를 물리자 지약 부인이 상각을 불렀다. 상각은 두 손을 공손히 모아 올리며 뒷 말은 듣지도 않고 거절했다. 고된 일정에 몹시 피곤하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집인이 어서 가서 쉬라 손짓하자 지약 부인의 얼굴에 냉기가 떠올랐다. 상각과 원치가 대전을 나서고 집인이 자리를 비우자 서우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날이 갈수록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냥 두어라. 대나무도 꼿꼿하게 자라나다 보면 꺾이는 법이다."

 

 지약 부인이 아들의 손을 잡고 다정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눈꼬리에는 산곡의 독장보다 더 짙은 살기가 넘실거렸다. 

 

  원치는 앞서 걷는 상각의 뒤를 따르며 열심히 몸 상태를 살폈다. 옷을 벗어봐야 면밀히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걷는 모습으로도 어느 정도 추려낼 수 있다. 뒤에서 지켜봤을 때 절뚝임은 없으나 걸을 때마다 어깨가 움찔거린다. 등 쪽을 다치셨구나. 치궁에 가자마자 빠르게 처방을 내려야 한다. 그런데 이리 빨리 걷는 것이 조금 불안해졌다. 몸이 불편해 빨리 앉고 싶었던 상각은 앞서 걷다가 제 뒤만 졸졸 쫓아오고 있는 원치에 속도를 늦추고 뒤를 돌아봤다. 걱정과 불안이 어린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오자 상각이 그제야 미소를 띄었다. 화 난 거 아니야. 피곤해서 그래. 눈에 띄게 안심하는 얼굴에 상각은 가슴 한 곳이 묵직해졌다. 늘 눈치만 보는 구나. 그는 원치의 걸음 속도에 맞춰 각궁으로 향하려 했으나 아우의 손길에 끌려 치궁으로 먼저 발을 들였다. 돌아올 것을 생각해 미리 약탕을 준비한 원치가 상각을 목욕탕으로 보내놓고 약방으로 향했다. 그가 바를 연고와 마실 약을 조제하기까지 몇 분 소요되지 않았다. 줄 것을 한 아름 품에 안고 목욕탕으로 들어가니 상각이 옷을 벗고 약탕에 들어가 몸을 풀고 있었다. 원치는 그의 뒤에 앉았다가 새로 생긴 멍과 상처로 가득한 어깨를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강호에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건 이 몸을 가혹하게 혹사한 덕분이다. 주인 잘 못 만난 몸뚱이는 상처를 가득 안고 돌아와 비명을 질러대고 있으니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형님, 또 나가셔야 합니까?"

 

  눈을 감고 뜨거운 약물에 몸을 녹이던 상각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아직도 밤에 혼자 자기 무서워 그러느냐. 원치가 눈살을 찌푸렸다. 불과 작년 까지만 해도 천둥이 치는 날이면 각궁으로 달려가 형님과 함께 한 침상에서 잠이 들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부끄러워 아침이면 괜히 부루퉁해지곤 했는데 그걸 날이 훤한 날에 말하니 다시금 낯부끄러워졌다. 형님 몸이 상하는 것이 싫어 여쭌 겁니다. 일부러 연고를 아프게 바르자 상각이 억눌린 소리로 아픈 티를 내며 살살하라 달랬다. 

 

 "당분간은 나갈 일 없을 거야. 지약 부인이 움직이지만 않는다면."

 "형님이 돌아오셨으니 분명 다시 움직일 겁니다." 

 "···그러겠지. 그래도 혼자서 잘 감당했다."

 "그런데 형님."

 

  상각이 손을 들어 원치의 말을 가로챘다. 그가 슬쩍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향주머니 찼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원치가 자기 몸을 내려다보고 대답했다. 아니요, 그런 것은 안 찹니다. 아시잖아요. 상각이 이상한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런데 뭐?"

 "아, 발현이···."

 "조급해하지 마라. 늦어지는 걸 수도 있어. 평생 발현하지 않아도 너무 걱정 말고. 넌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거야."  

 

  미소 지을 수 밖에 없다. 남아있던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자 원치는 다시 정성스럽게 연고를 발라주고 약차를 내줬다. 편히 잠드시라고 피로에 좋은 차를 준비했으니 조금 있다 드시고 잠자리에 드세요. 상각은 고개를 주억거리고 아우가 만든 차를 마시더니 설핏 웃어버린다. 왜 웃는지 궁금해 넘어다보니 그가 밖으로 고갯짓을 한다. 가서 봐봐. 네가 생각 나 사 왔어. 원치가 얼른 몸을 일으켜 목욕탕을 나섰다. 약재가 한가득 쌓인 넓은 탁자 위에 탕후루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각 공자님께서 직접 사셨습니다. 그의 측시위 치풍이 웃음을 머금고 다가와 말했다. 내가 아직도 애인가 하고 핀잔을 두면서도 원치는 탕후루 하나를 잡고 환하게 웃었다. 상각이 나올 때까지 한꺼번에 세 개를 먹었다가 끝내는 혼이 나고 말았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이른 시각, 상각이 잠든 후 경비병을 불러 각궁을 지키게 했다. 약차를 마시고 잠들었으니 못 해도 네시진 정도는 깊게 잠들었다 깨어날 것이다. 그 틈에 망가졌을 암기들과 형님의 검을 새로 봐주기 위해 원치는 치궁으로 돌아가 손을 보기 시작했다. 단 것을 너무 많이 먹어 그런 것인지 이상하게도 심장이 빠르게 뛰어 불편함은 좀 있었지만 물을 많이 먹고 활동량을 늘리면 괜찮겠지 싶어 손질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나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심장은 물론이고 맥박마저 빨라지기 시작했고 호흡은 가빠졌으며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먹은 것이라고는 고작 자신이 처방한 약차와 상각이 가져온 탕후루 뿐이 없다. 독이 든 것을 먹을 리 없으니 무슨 연유에서 몸이 이러는지 알아내기 위해 서책을 펼쳤다가 수그렸던 고개를 쳐들었다. 양명으로 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드디어 발현되는 구나. 원치는 재빨리 훈향을 피워 밖과 안으로 걸어 두었다. 예민한 사람은 향을 맡을 수 있어 혼란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증상이 심해지고 있었다. 아랫도리를 날카롭게 찢는 듯한 고통에 원치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침상으로 달려갔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양명으로 발현될 때에는 그저 발열과 호흡곤란 그리고 거센 두통이 증상이 다다. 원치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엄청난 고통에 식은땀을 흘리며 이불을 끌어다 입에 물었다. 안 돼. 안 돼. 절대 안 돼. 찢기는 통증이 다시금 세게 치달았다. 두꺼운 솜이불에 얼굴을 처박고 억눌린 신음을 터트렸다. 잠시 후, 아래가 축축하게 젖어갔다. 원치가 몸을 덜덜 떨며 이불을 살짝 들춰보았다. 아래에 피가 흥건하게 새어 나와 침상을 적셔갔다. 양명이 아니라 음월이다. 원치가 이불로 핏자국을 덮으며 울면서 바닥으로 내려와 옷장 쪽으로 기어갔다. 어디까지나 형님의 곁에 있을 수 있는 건 양명이나 혹은 아예 발현하지 않는 것이다. 음월은 필요도 없다. 궁문에서 음월이 태어나면 쫓아내는 게 관습이었다. 강한 자만 살아남을 수 있는 당연한 이 곳에서는 생산만 할 수 있는 음월은 쓸모 없게 여겼다. 옷장으로 숨어 든 원치는 몸을 웅크리고 좌절감에 빠져 소리 없이 통곡했다. 상각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형님 없이 저 혼자 이 세상을 살아가고 싶지 않다. 아래가 갈라지는 고통에 원치는 제 손목을 입에 물고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밖은 어둑해졌고 그의 측시위인 무결이 불빛도 없이 어두컴컴한 치궁을 보고는 이상함에 문을 두드렸다. 궁주님. 궁주님? 괜찮으십니까? 훈향까지 피워두고 뭔가 이상했다. 얼마나 불렀을까,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작은 목소리로 괜찮으니 이만 가보라 했다. 점심도 안 드셨으니 저녁은 드셔야 한다 말해도 입맛이 없으니 형님 혼자 드시라 전하라 하였다. 무결이 이상함에 곧장 각궁으로 향했다. 

 

  드디어 출혈이 멈췄다. 그러나 아래를 살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저 울고 또 울기만 했다. 갑작스럽게 생긴 또 다른 생식기에 원치는 끔찍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은 멈추었으나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돌연 함께 찾아온 발정기에 원치는 괴로워했다. 처음 겪어보는 현상은 단단했던 원치의 정신을 단 한 번에 무너뜨렸다. 이제는 울컥울컥 새어 나오는 애액에 입술을 꽉 깨물고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 했지만, 음월 앞에 무릎 꿇는 일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원치야. 형님의 목소리다. 원치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몸을 한껏 웅크렸다. 훈향을 피웠어도 피의 양이 많아 알아차릴 것이다. 그저 숨죽여 형님이 빨리 이 방을 나서기를 기도했다. 역시 상각의 발걸음은 침상 쪽으로 향했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났다ㅋㅌ. 이불을 들춰본 듯 하자 원치는 이제 숨도 쉬지 못했다. 발소리가 잠시 멈추는 듯하더니 옷장 쪽으로 걸어오자 이제는 발작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심장이 터질 듯 크게 울리자 원치는 그냥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기절도 하기 전, 옷장 문이 천천히 열렸다. 굳은 얼굴의 상각이 원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두 손으로 입을 꼭 틀어막고 있었던 원치가 결국 울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재생다운로드6ebf2310910911582745643400.gif
 

  "절 버리지 말아주세요. 형님."









운지우
상각원치
ㅌㅆ올린 적 있음 

 

[Code: c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