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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3 22:58
전편: https://hygall.com/611799088
앨러배마와 캐나다를 차로 가로지르는 것은 이틀에서 삼일이면 충분하였다. 그러나 웨이드는 굳이 최단 거리를 택하지 않았다. 그저 속도를 늦추고, 방향을 틀고, 필요 이상으로 멈추며 시간을 길게 늘렸다. 길은 어느새 단순한 목적지로 가는 여정이 아니라 두 사람에게 필요한 쉼의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길 위의 날들은 느리게 흘렀다. 때로는 작은 모텔에 머물기도 했고, 가끔은 그냥 차 안에서 하룻밤을 때우기도 했다. 그동안 로건의 얼굴엔 조금씩 평온이 스며들었다.
그 날도 휴게소에서 웨이드가 커피 두 잔을 사 들고 나왔다. 주차장으로 돌아온 그는 멀찍이 서 있는 로건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로건은 차에서 내려, 바람을 맞으며 주차장 한켠에 서 있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그는 눈을 감고 조용히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얼굴은 햇빛에 부드럽게 물들어 있었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짓누르던 무거운 그늘은 어느새 조금 희미해져 있었다.
웨이드는 그를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다, 커피잔을 흔들며 다가갔다.
“이거 지금 안 마시면 다 식는다, 아저씨.”
로건이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커피 사는데 오래도 걸린다.” 로건이 커피를 받아들며 말했다.
“그러게.” 웨이드는 피식 웃으며 옆의 벤치에 앉아 커피를 홀짝였다.
그런 웨이드를 잠시 쳐다보던 로건은 받아든 커피잔을 빠르게 비우곤 쓰레기통에 빈 컵을 던져 넣었다.
“뭐야, 벌써 가려고?” 웨이드가 반쯤 빈 커피잔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캐나다 간다며. 네가 자꾸 돌아가서,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다.”
“허니뱃저, 성격 참 급하네.” 웨이드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날 기색도 없이 커피를 홀짝댔다. “난 아직 다 못 마셨어. 여유 좀 가져.”
로건은 멈춰서서 웨이드를 힐끔 돌아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웨이드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애새끼처럼 굴지 말고.”
웨이드는 그 손길에 살짝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빨리 와라. 춥다.” 로건은 그 말을 던지고 다시 차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웨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뭐야, 갑자기. 기분 이상하게.” 웨이드는 중얼거리며 비워지지 않은 커피를 한 번 더 들이켰다. 그런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차로 향했다.
-
길게 뻗은 도로 옆으로 우거진 숲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나뭇잎이 흔들리며 바람에 실려오는 숲내음이 차 안까지 스며들었다. 웨이드는 창문을 내리고 고개를 내밀어 그 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우와, 이게 자연의 향기지!” 웨이드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로건은 옆에서 핸들을 잡고 있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머리 집어넣어라.”
웨이드는 못 이긴 척 고개를 슬며시 차 안으로 다시 돌리며 창문을 닫았다.
“흥, 뭐, 자연을 사랑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 그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내젓더니 다시 말을 꺼냈다.
“근데 있잖아, 로건. 나랑 미래로 돌아가는 거, 정말 생각도 없는 거야?”
로건은 시야를 앞에 고정한 채 무심하게 대답했다. “글쎄다. 너한테나 돌아가는 거지. 난 가서 뭐하냐.”
“가서 뭐하냐니! 울버린이 돌아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놀랄지 상상해 봐!” 웨이드는 과장된 몸짓으로 양팔을 벌리며 흥분했다. “진짜 난리 날걸? ‘이제 뭐든 해낼 수 있어!’ 이런 분위기일 텐데. 재밌잖아!”
로건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별 게 다 재밌겠다.”
“에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웨이드는 손을 앞뒤로 휘저으며 더 많은 이유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로건은 그가 쉴새없이 떠드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울버린… 그 이름을 버리고 살아온지 한참이었다. 이제 더는 울버린도 아니고, 그 이름을 들을 자격은 더더욱 없었다.
로건은 한동안 묵묵히 도로를 응시하며 운전했다. 길은 한적했고, 주변의 나무들만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웨이드는 돌아오는 대답 하나 없는 그 침묵을 오래 견디지 못했다.
“아, 진짜,” 웨이드는 투덜거리며 조수석 앞 칸을 열어 뒤적거렸다. “대화도 안 하고, 이건 완전 고문이야. 침묵은 진짜 별로라니까. 적어도 라디오라도 틀자고!”
웨이드는 한참을 푸념하다가 로건에게 물었다. “근데 오늘은 어디서 자? 모텔이 있나? 아니면… 설마 또 차에서?”
“어쩔 수 없잖아.” 로건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차?”
웨이드는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또? 아니, 저기요. 나 생각보다 잠자리 가리는 사람이라고요. 훌륭한 용병에게는 그에 걸맞는 훌륭한 잠자리가 제공돼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가 갑자기 멈춰섰다. 웨이드는 그 관성에 이마를 부딪히고는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로건을 쳐다봤다.
“뭐야… 화났어? 내가 너무 귀찮게 했다면 사과할게.”
로건은 웨이드를 무시한 채 창밖을 주시했다. “잠깐.”
“뭐?”
“조용히 해.”
로건은 오른손을 들어 웨이드의 입을 막았다. 그의 표정은 긴장감으로 굳어 있었다.
“로건?”
웨이드는 로건의 손을 슬쩍 치우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뭐, 곰이라도 본 거야?”
로건은 대답 대신 차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의 시선은 저 먼 숲 너머를 향해 있었다. 웨이드는 그의 눈빛을 따라가려 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웨이드가 입을 다물자 숲속에서 들려오는 기묘한 소음이 들려왔다. 로건과 눈을 마주친 웨이드가 덩달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 누가 야단을 치는 건가.
아, 아니다.
남자아이의 비명소리. 성인 남성의 고함소리.
아, 그것도 다가 아니다.
여자아이의 기합소리와 성인 남성‘들’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들.
“로건?”
그가 묻는 순간, 로건은 이미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차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밖은 어느새 해가 내려 앉고있었고, 며칠 새 추워진 기온 탓에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웨이드는 날카로운 바람과 눈발이 몰아치는 밖을 내다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로건!”
웨이드는 소리쳤지만, 로건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숲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눈발 속에서 그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아, 미치겠네.” 웨이드는 투덜거리며 조수석 아래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닿은 것은 차갑고 익숙한 금속의 감촉이었다. 그는 총 두 자루를 꺼내들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결국 또 나보고 구해달라는거지?”
웨이드는 차에서 내려 로건을 따라갔다. 차 문을 닫는 소리가 쿵 울렸지만, 로건은 여전히 뒤돌아보지 않았다.
언덕 위에 올라간 두 사람이 내려다본 광경은 마치 악몽 같았다. 로건과 웨이드는 숨을 죽인 채 상황을 살폈다. 거친 눈발 사이로 보이는 검은 옷의 남성들은 아이들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당기며 끌고 가고 있었다. 그들은 주저앉아 비명을 지르거나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곁에 세워진 차량의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웨이드의 얼굴이 굳었다.
“저 문양…” 웨이드가 낮게 중얼거렸다.
로건 역시 눈길을 그 문양에 고정했다. 익숙한, 너무도 익숙한 그 기호. 그것은 과거 찰스와 자신들을 끝까지 쫓아다니던 그들의 것이었다.
정부군.
“젠장,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네,” 웨이드가 이를 악물었다.
아이들까지 사냥하겠다는 건가. 그의 머릿속에 찰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들은 이제 뮤턴트 아이들까지 잡아가려 해. 우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걸세.
언덕 아래에는 대략 여섯 명의 아이들이 보였다. 대부분은 이제 막 십대가 되었을 법했고, 몇몇은 그보다도 더 어렸다. 하나같이 거칠게 끌려가면서도 저항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사용하려고 애쓰는 듯했지만,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힘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듯 보였다.
“이제 애들까지…” 웨이드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뮤턴트 본능은 죽지 않았나 보네. 다들 싸울 생각은 하는 걸 보니.”
웨이드가 말을 하다말고 옆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에 고개를 돌려 로건을 쳐다봤다.
로건의 얼굴에 감도는 서늘한 기운은 웨이드조차도 익숙하지 않은 무언가였다. 그것은 단순한 분노를 넘어선, 깊고 날카로운 무언가였다. 아이들을 괴롭히는 저놈들 때문인지, 아니면 누군가를 떠올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웨이드는 그 긴장감을 깨고자 말을 꺼냈다.
“잠깐, 로건. 일단 진정 좀 하고, 계획이라도 세워보자고—”
그러나 그의 말은 로건의 클로가 튀어나오는 금속음에 의해 끊겼다.
웨이드의 시선이 로건의 손으로 향했다. 날카로운 금속클로가 붉은 석양 햇빛 아래 번들거렸다.
아, 망했다.
웨이드가 이마를 짚었다.
로건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서늘한 분노만이 가득했고, 웨이드를 힐끗 쳐다보곤 바로 시선을 돌려 거침없이 포효하며 언덕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의 외침은 전장을 울렸다. 검은 옷의 요원들이 고개를 돌리며 한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곧 그들 사이에 긴장감이 퍼지며 총구가 로건을 향했다.
웨이드는 총을 고쳐잡았다.
“저 바보가,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그는 로건이 요원들에게 닥쳐오는 걸 보며 마지못해 달려 나갔다. 총을 꺼내 든 요원들 사이로 웨이드의 목소리가 퍼졌다.
“좋아, 로건. 달려드는 놈들은 내가 처리해줄게.”
웨이드가 총을 들어 검은 옷 요원들에게 조준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그나저나 네가 먼저 열어제친 판이니까 책임 좀 져라, 울버린!”
첫 번째 총성이 울려 퍼지며, 전장은 순식간에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살육의 현장이었다.
로건은 광기 어린 맹수와 같았다. 날카로운 이빨 대신 클로가 번쩍였고, 인간의 도리가 아닌 본능적인 살의가 그의 움직임을 이끌었다. 그의 포효는 주변 공기를 갈라내듯 울려 퍼졌고, 요원들은 로건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지만 단 하나의 총알도 그를 맞추지 못했다.
그것은 마치 짐승이 사냥을 하는 모습이었다.
로건은 순식간에 네 발로 땅을 박차고 내달리며 요원의 한쪽 허벅지를 노렸다. 날카로운 클로가 순간적으로 허벅지를 찢고, 이어 몸을 비틀어 요원의 복부를 꿰뚫었다. 그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다음 표적을 향해 뛰어올랐다.
웨이드는 그 광경에 잠시 얼어붙었다.
로건이 가끔 “짐승 같은 놈”이라 자조적으로 말할 때가 있었지만, 지금의 그는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였다. 웨이드는 숨을 삼키며 속삭이듯 말했다.
“진짜 짐승이잖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총을 거의 떨어뜨릴 뻔했다.
순식간에 어느정도 정리가 된 살육의 현장은 숨 막힐 정도로 조용했다. 로건은 열 명에 달하는 요원들을 처참히 쓰러뜨렸고, 웨이드는 총을 난사하며 다섯 명의 요원을 땅에 눕혔다. 남아있는 검은 옷의 요원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는 마지막 카드처럼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를 앞세웠다.
요원의 떨리는 손에 들린 총이 아이의 관자놀이를 겨누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공포와 초조함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 이 씨발!” 요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너네 뭐야!! 당장 무기 내려놔! 안 그러면 이 새끼 죽어!”
로건은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돌아섰다. 로건이 꽂아넣었던 클로를 천천히 빼내자 힘없이 늘어진 몸뚱이가 바닥으로 털썩 떨어졌다. 웨이드도 따라 총을 내렸다. 그들은 요원의 행동을 주시하며 조금씩 움직임을 멈췄다.
“빨리!” 요원은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웨이드는 그 모습을 보고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겁에 잔뜩 질렸네. 그는 생각했다.
“알았어, 알았어,” 웨이드는 한 손을 들어 보이며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내려놓는다니까.”
그 순간, 날카로운 금속음이 허공을 갈랐다.
요원은 눈이 뒤집힌 채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털썩, 그의 손에서 총이 떨어졌다. 멍한 표정으로 웨이드는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요원의 머리에 박혔던 금속 클로가 천천히 빠져나왔다. 그 클로를 뽑아 든 이는 다름 아닌 그 인질이었던 여자아이였다.
그 아이의 작은 손에는 아직도 요원의 머리에 꽂혔다가 방금 뽑아낸 금속 클로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 웨이드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래, 쟤네도 뮤턴트였지.”
그러나 그보다 더 눈길을 끈 건, 그 아이의 클로였다. 너무 익숙한 형태, 너무 익숙한 움직임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클로인데.
그 여자아이는 놀랍게도 침착한 얼굴로 자신의 클로를 천천히 거둬들였다. 흡사 로건이 하는 동작과 똑같았다. 그녀의 클로는 손등으로부터 튀어나왔고, 크기도 로건의 것만큼 날카롭고 강해 보였다.
웨이드는 순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설마…?”
웨이드의 시선은 조용히 숨을 내쉬고 있는 로건으로 옮겨갔다. 로건의 눈빛이 형편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가슴이 불규칙하게 들썩였고, 얼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스쳐 갔다.
“너… 어디서 배운 거야, 그거.”
아이가 그제야 옷에 손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고개를 들어 로건을 쳐다봤다.
“난 배운 적 없어. 그냥 태어났을 때부터… 이렇게 된 거야.”
로건의 표정이 굳어졌다. 웨이드는 곁에서 그 반응을 보며 놀란 듯 로건의 팔꿈치를 쿡 찔렀다.
“야, 아저씨. 이거 혹시—”
“닥쳐.”
로건은 웨이드의 말을 단칼에 끊고는 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이름이 뭐야.”
아이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분명했다.
“로라.”
웨이드로건 덷풀로건
앨러배마와 캐나다를 차로 가로지르는 것은 이틀에서 삼일이면 충분하였다. 그러나 웨이드는 굳이 최단 거리를 택하지 않았다. 그저 속도를 늦추고, 방향을 틀고, 필요 이상으로 멈추며 시간을 길게 늘렸다. 길은 어느새 단순한 목적지로 가는 여정이 아니라 두 사람에게 필요한 쉼의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길 위의 날들은 느리게 흘렀다. 때로는 작은 모텔에 머물기도 했고, 가끔은 그냥 차 안에서 하룻밤을 때우기도 했다. 그동안 로건의 얼굴엔 조금씩 평온이 스며들었다.
그 날도 휴게소에서 웨이드가 커피 두 잔을 사 들고 나왔다. 주차장으로 돌아온 그는 멀찍이 서 있는 로건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로건은 차에서 내려, 바람을 맞으며 주차장 한켠에 서 있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그는 눈을 감고 조용히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얼굴은 햇빛에 부드럽게 물들어 있었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짓누르던 무거운 그늘은 어느새 조금 희미해져 있었다.
웨이드는 그를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다, 커피잔을 흔들며 다가갔다.
“이거 지금 안 마시면 다 식는다, 아저씨.”
로건이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커피 사는데 오래도 걸린다.” 로건이 커피를 받아들며 말했다.
“그러게.” 웨이드는 피식 웃으며 옆의 벤치에 앉아 커피를 홀짝였다.
그런 웨이드를 잠시 쳐다보던 로건은 받아든 커피잔을 빠르게 비우곤 쓰레기통에 빈 컵을 던져 넣었다.
“뭐야, 벌써 가려고?” 웨이드가 반쯤 빈 커피잔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캐나다 간다며. 네가 자꾸 돌아가서,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다.”
“허니뱃저, 성격 참 급하네.” 웨이드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날 기색도 없이 커피를 홀짝댔다. “난 아직 다 못 마셨어. 여유 좀 가져.”
로건은 멈춰서서 웨이드를 힐끔 돌아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웨이드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애새끼처럼 굴지 말고.”
웨이드는 그 손길에 살짝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빨리 와라. 춥다.” 로건은 그 말을 던지고 다시 차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웨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뭐야, 갑자기. 기분 이상하게.” 웨이드는 중얼거리며 비워지지 않은 커피를 한 번 더 들이켰다. 그런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차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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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뻗은 도로 옆으로 우거진 숲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나뭇잎이 흔들리며 바람에 실려오는 숲내음이 차 안까지 스며들었다. 웨이드는 창문을 내리고 고개를 내밀어 그 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우와, 이게 자연의 향기지!” 웨이드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로건은 옆에서 핸들을 잡고 있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머리 집어넣어라.”
웨이드는 못 이긴 척 고개를 슬며시 차 안으로 다시 돌리며 창문을 닫았다.
“흥, 뭐, 자연을 사랑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 그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내젓더니 다시 말을 꺼냈다.
“근데 있잖아, 로건. 나랑 미래로 돌아가는 거, 정말 생각도 없는 거야?”
로건은 시야를 앞에 고정한 채 무심하게 대답했다. “글쎄다. 너한테나 돌아가는 거지. 난 가서 뭐하냐.”
“가서 뭐하냐니! 울버린이 돌아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놀랄지 상상해 봐!” 웨이드는 과장된 몸짓으로 양팔을 벌리며 흥분했다. “진짜 난리 날걸? ‘이제 뭐든 해낼 수 있어!’ 이런 분위기일 텐데. 재밌잖아!”
로건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별 게 다 재밌겠다.”
“에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웨이드는 손을 앞뒤로 휘저으며 더 많은 이유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로건은 그가 쉴새없이 떠드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울버린… 그 이름을 버리고 살아온지 한참이었다. 이제 더는 울버린도 아니고, 그 이름을 들을 자격은 더더욱 없었다.
로건은 한동안 묵묵히 도로를 응시하며 운전했다. 길은 한적했고, 주변의 나무들만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웨이드는 돌아오는 대답 하나 없는 그 침묵을 오래 견디지 못했다.
“아, 진짜,” 웨이드는 투덜거리며 조수석 앞 칸을 열어 뒤적거렸다. “대화도 안 하고, 이건 완전 고문이야. 침묵은 진짜 별로라니까. 적어도 라디오라도 틀자고!”
웨이드는 한참을 푸념하다가 로건에게 물었다. “근데 오늘은 어디서 자? 모텔이 있나? 아니면… 설마 또 차에서?”
“어쩔 수 없잖아.” 로건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차?”
웨이드는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또? 아니, 저기요. 나 생각보다 잠자리 가리는 사람이라고요. 훌륭한 용병에게는 그에 걸맞는 훌륭한 잠자리가 제공돼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가 갑자기 멈춰섰다. 웨이드는 그 관성에 이마를 부딪히고는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로건을 쳐다봤다.
“뭐야… 화났어? 내가 너무 귀찮게 했다면 사과할게.”
로건은 웨이드를 무시한 채 창밖을 주시했다. “잠깐.”
“뭐?”
“조용히 해.”
로건은 오른손을 들어 웨이드의 입을 막았다. 그의 표정은 긴장감으로 굳어 있었다.
“로건?”
웨이드는 로건의 손을 슬쩍 치우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뭐, 곰이라도 본 거야?”
로건은 대답 대신 차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의 시선은 저 먼 숲 너머를 향해 있었다. 웨이드는 그의 눈빛을 따라가려 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웨이드가 입을 다물자 숲속에서 들려오는 기묘한 소음이 들려왔다. 로건과 눈을 마주친 웨이드가 덩달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 누가 야단을 치는 건가.
아, 아니다.
남자아이의 비명소리. 성인 남성의 고함소리.
아, 그것도 다가 아니다.
여자아이의 기합소리와 성인 남성‘들’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들.
“로건?”
그가 묻는 순간, 로건은 이미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차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밖은 어느새 해가 내려 앉고있었고, 며칠 새 추워진 기온 탓에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웨이드는 날카로운 바람과 눈발이 몰아치는 밖을 내다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로건!”
웨이드는 소리쳤지만, 로건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숲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눈발 속에서 그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아, 미치겠네.” 웨이드는 투덜거리며 조수석 아래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닿은 것은 차갑고 익숙한 금속의 감촉이었다. 그는 총 두 자루를 꺼내들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결국 또 나보고 구해달라는거지?”
웨이드는 차에서 내려 로건을 따라갔다. 차 문을 닫는 소리가 쿵 울렸지만, 로건은 여전히 뒤돌아보지 않았다.
언덕 위에 올라간 두 사람이 내려다본 광경은 마치 악몽 같았다. 로건과 웨이드는 숨을 죽인 채 상황을 살폈다. 거친 눈발 사이로 보이는 검은 옷의 남성들은 아이들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당기며 끌고 가고 있었다. 그들은 주저앉아 비명을 지르거나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곁에 세워진 차량의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웨이드의 얼굴이 굳었다.
“저 문양…” 웨이드가 낮게 중얼거렸다.
로건 역시 눈길을 그 문양에 고정했다. 익숙한, 너무도 익숙한 그 기호. 그것은 과거 찰스와 자신들을 끝까지 쫓아다니던 그들의 것이었다.
정부군.
“젠장,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네,” 웨이드가 이를 악물었다.
아이들까지 사냥하겠다는 건가. 그의 머릿속에 찰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들은 이제 뮤턴트 아이들까지 잡아가려 해. 우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걸세.
언덕 아래에는 대략 여섯 명의 아이들이 보였다. 대부분은 이제 막 십대가 되었을 법했고, 몇몇은 그보다도 더 어렸다. 하나같이 거칠게 끌려가면서도 저항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사용하려고 애쓰는 듯했지만,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힘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듯 보였다.
“이제 애들까지…” 웨이드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뮤턴트 본능은 죽지 않았나 보네. 다들 싸울 생각은 하는 걸 보니.”
웨이드가 말을 하다말고 옆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에 고개를 돌려 로건을 쳐다봤다.
로건의 얼굴에 감도는 서늘한 기운은 웨이드조차도 익숙하지 않은 무언가였다. 그것은 단순한 분노를 넘어선, 깊고 날카로운 무언가였다. 아이들을 괴롭히는 저놈들 때문인지, 아니면 누군가를 떠올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웨이드는 그 긴장감을 깨고자 말을 꺼냈다.
“잠깐, 로건. 일단 진정 좀 하고, 계획이라도 세워보자고—”
그러나 그의 말은 로건의 클로가 튀어나오는 금속음에 의해 끊겼다.
웨이드의 시선이 로건의 손으로 향했다. 날카로운 금속클로가 붉은 석양 햇빛 아래 번들거렸다.
아, 망했다.
웨이드가 이마를 짚었다.
로건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서늘한 분노만이 가득했고, 웨이드를 힐끗 쳐다보곤 바로 시선을 돌려 거침없이 포효하며 언덕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의 외침은 전장을 울렸다. 검은 옷의 요원들이 고개를 돌리며 한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곧 그들 사이에 긴장감이 퍼지며 총구가 로건을 향했다.
웨이드는 총을 고쳐잡았다.
“저 바보가,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그는 로건이 요원들에게 닥쳐오는 걸 보며 마지못해 달려 나갔다. 총을 꺼내 든 요원들 사이로 웨이드의 목소리가 퍼졌다.
“좋아, 로건. 달려드는 놈들은 내가 처리해줄게.”
웨이드가 총을 들어 검은 옷 요원들에게 조준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그나저나 네가 먼저 열어제친 판이니까 책임 좀 져라, 울버린!”
첫 번째 총성이 울려 퍼지며, 전장은 순식간에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살육의 현장이었다.
로건은 광기 어린 맹수와 같았다. 날카로운 이빨 대신 클로가 번쩍였고, 인간의 도리가 아닌 본능적인 살의가 그의 움직임을 이끌었다. 그의 포효는 주변 공기를 갈라내듯 울려 퍼졌고, 요원들은 로건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지만 단 하나의 총알도 그를 맞추지 못했다.
그것은 마치 짐승이 사냥을 하는 모습이었다.
로건은 순식간에 네 발로 땅을 박차고 내달리며 요원의 한쪽 허벅지를 노렸다. 날카로운 클로가 순간적으로 허벅지를 찢고, 이어 몸을 비틀어 요원의 복부를 꿰뚫었다. 그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다음 표적을 향해 뛰어올랐다.
웨이드는 그 광경에 잠시 얼어붙었다.
로건이 가끔 “짐승 같은 놈”이라 자조적으로 말할 때가 있었지만, 지금의 그는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였다. 웨이드는 숨을 삼키며 속삭이듯 말했다.
“진짜 짐승이잖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총을 거의 떨어뜨릴 뻔했다.
순식간에 어느정도 정리가 된 살육의 현장은 숨 막힐 정도로 조용했다. 로건은 열 명에 달하는 요원들을 처참히 쓰러뜨렸고, 웨이드는 총을 난사하며 다섯 명의 요원을 땅에 눕혔다. 남아있는 검은 옷의 요원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는 마지막 카드처럼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를 앞세웠다.
요원의 떨리는 손에 들린 총이 아이의 관자놀이를 겨누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공포와 초조함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 이 씨발!” 요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너네 뭐야!! 당장 무기 내려놔! 안 그러면 이 새끼 죽어!”
로건은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돌아섰다. 로건이 꽂아넣었던 클로를 천천히 빼내자 힘없이 늘어진 몸뚱이가 바닥으로 털썩 떨어졌다. 웨이드도 따라 총을 내렸다. 그들은 요원의 행동을 주시하며 조금씩 움직임을 멈췄다.
“빨리!” 요원은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웨이드는 그 모습을 보고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겁에 잔뜩 질렸네. 그는 생각했다.
“알았어, 알았어,” 웨이드는 한 손을 들어 보이며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내려놓는다니까.”
그 순간, 날카로운 금속음이 허공을 갈랐다.
요원은 눈이 뒤집힌 채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털썩, 그의 손에서 총이 떨어졌다. 멍한 표정으로 웨이드는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요원의 머리에 박혔던 금속 클로가 천천히 빠져나왔다. 그 클로를 뽑아 든 이는 다름 아닌 그 인질이었던 여자아이였다.
그 아이의 작은 손에는 아직도 요원의 머리에 꽂혔다가 방금 뽑아낸 금속 클로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 웨이드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래, 쟤네도 뮤턴트였지.”
그러나 그보다 더 눈길을 끈 건, 그 아이의 클로였다. 너무 익숙한 형태, 너무 익숙한 움직임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클로인데.
그 여자아이는 놀랍게도 침착한 얼굴로 자신의 클로를 천천히 거둬들였다. 흡사 로건이 하는 동작과 똑같았다. 그녀의 클로는 손등으로부터 튀어나왔고, 크기도 로건의 것만큼 날카롭고 강해 보였다.
웨이드는 순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설마…?”
웨이드의 시선은 조용히 숨을 내쉬고 있는 로건으로 옮겨갔다. 로건의 눈빛이 형편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가슴이 불규칙하게 들썩였고, 얼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스쳐 갔다.
“너… 어디서 배운 거야, 그거.”
아이가 그제야 옷에 손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고개를 들어 로건을 쳐다봤다.
“난 배운 적 없어. 그냥 태어났을 때부터… 이렇게 된 거야.”
로건의 표정이 굳어졌다. 웨이드는 곁에서 그 반응을 보며 놀란 듯 로건의 팔꿈치를 쿡 찔렀다.
“야, 아저씨. 이거 혹시—”
“닥쳐.”
로건은 웨이드의 말을 단칼에 끊고는 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이름이 뭐야.”
아이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분명했다.
“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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