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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7 02:47
다 ㅈㅇ











차가 멈춘 곳은 허름한 펍 앞이었다. 습기를 머금어 벌어진 나무문틈사이가, 간판을 대신한 네온사인의 불꺼진 철자들이 이곳의 연식을 알려주고있었다. 따질 것 없이 묵직한 문을 잡아당겼다. 몰려오는 허기에 인내심이 바닥을 찍어가고 있었다. 문을 열자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허름한 외관과는 다르게 내부는 며칠전 보수 공사를 마친 것 처럼 깔끔했다. 내부만 본다면 펍이 아니라 프랜차이즈 레스토랑같은 모양새였다. 일렬로 늘어서있는 테이블을 따라 가장 안쪽 자리로 들어갔다. 붙박이형 소파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서버가 귀찮은 표정으로 다가와 메뉴판을 건넸다. 그걸 손에 쥐고는 논문 읽듯 정독했다. 메뉴는 멋대로 선정했다. 버키에게 무얼 먹겠냐고 묻지도 않았다. 하루종일 운전을 시키고 원하지도 않는 봉사활동에 휘말리게 했지만 양심은 텅 빈 위장에 버려 버렸다.

“다 먹을 수 있어?”

그는 그렇게만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곤 힘차게 서버를 불러 최소 성인 남성 4인은 데려와야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양의 음식들을 주문했다. 술도 잔뜩 시켰다. 서버가 짜증섞인 손짓으로 메뉴를 적어내려갔다.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입에 소세지를 욱여 넣고 위장 가득 위스키를 퍼부었다. 술기운은 금방 올라왔다. 알콜이 턱 밑까지 차오르자 헛소리가 막을 새도 없이 튀어나왔다.

“데이지 말이야. 걔네 아빠가 내 광팬이래.”

토니의 뜬금없는 말에도 버키는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토니의 눈썹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누군지 알아?”

“아까 둘이 대화하는 거 들었어.”

새삼 혈청 능력이 대단하구나 싶었다. 그 난장 속에 족히 몇미터는 떨어져 있었것만 그걸 들었다니. 입술을 삐죽이다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버키가 토니의 손목을 붙들었다. 작작하라는 뜻 같았으나 그러기 싫었다.

“내 팬들이라는 사람들은 왜 다 그모양이야. 좀 좋은 아빠면 어디가 덧나? 아픈애 버리고 내뺐다잖아. 그 개자식이.”

알콜이 뇌를 점령하자 성급한 일반화가 시작됐다. 팬들을 싸잡아서 못난 애비로 만들고 나자 속에 돌덩이라도 얹은 것처럼 마음이 불편해졌다. 버키가 토니를 빤히 쳐다보았다. 민망함에 포크를 들어 애꿎은 소세지만 푹푹 찔러댔다.

“신경쓰여?”

아니라고 하고싶었다. 조금도 신경쓰고 있지 않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데이지의 얼굴이 아직도 눈 앞에 어른거렸다. 버려진다는 게 어떤건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어릴 때는 늘 바쁜 아버지에게 뒷전이었고, 커서는 연인이 일언반구도 없이 떠나버린데다, 죽다 살아나서 착하게 좀 살아볼랬더니 유일하게 의지하던 대부가 뒤통수를 후려 갈겼다. 이런 험한 세상에 데이지는 산타에게 빌 소원으로 제 엄마의 행복을 꼽았다. 제 행복도 아닌, 함께하는 행복도 아닌, 오롯이 한사람만을 위한 행복. 이제 7살 남짓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그 어린애가 제 엄마의 행복을 빌어주기까지 얼마나 숱한 밤을 뒤척였을까. 생각하니 속이 뒤틀렸다. 팬이고 뭐고 아비라는 놈을 때려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타크, 다음 봉사가 언제야.”

“왜?”

“나도 가게.”

왜? 물음대신 크게 눈을 뜨고 버키를 보았다. 버키의 봉사는 일회성으로 끝낼 생각이었다. 애들한테 저 사람이 루돌프라는 건 구라였다. 세상에 루돌프 같은 건 없으니 정신차리고 살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루돌프는 크리스마스에만 볼 수 있는데...?”

바보같이 지껄이자 버키가 웃음을 터트렸다. 산타 마을에서 도망쳤다고 하지 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요새 애들이 바본줄 아나. 버키가 나타나는 순간 산타 마을의 마법은 깨지고, 두사람은 사기조직단으로 강등 될 게 분명했다. 고심하다 고개를 저었다. 애들 환상을 깨기도 싫었지만 괜히 그를 끌어들여 생고생 시키기도 싫었다. 이번 한번으로 족했다. 아동병원 봉사라는게 애들 돌보는 걸로 끝나는게 아니었다. 이불빨고 호스 연결에 청소까지 잡일이란 잡일은 다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뛰어들 일도 아니었다. 운이 나쁘면 아이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도 할 수도 있었다.

“쉬운 일이 아니야.”

“상관없어.”

버키는 고집이 쎘다. 어렵고 힘든 일 너는 빼주겠다는데도 요지부동이었다. 한참을 실랑이하다 결국 두손 두발을 다 들었다. 죽을 각오 해라. 애들이 어찌나 힘이 장사인지 나도 목이 졸려 죽을 뻔 했다. 혈청이 무용지물이란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의미 없는 으름장에도 그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왜 하고싶은데?”

“지금은 당신 남자친구니까.”

뭔 헛소린지. 의도를 알 수 없는 동문서답에 술이나 퍼마셨다. 잠도 못자고 혹사한 몸에 알콜까지 부어대니 점점 정신이 나른해져갔다. 피할 수 없는 장력에 이끌리듯 눈이 감겼다.






































눈을 뜨자 익숙치 않은 천장이 보였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갈증이 일었다.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오후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비척이며 방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러자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삭막한 집안 꼴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으로 버킬 찾았으나 그는 보이지 않았다. 냉장고까지 겨우 걸음을 뗐다. 한걸음씩 움직일 때마다 머리통이 후드려 맞은 것처럼 지끈거렸다. 알콜중독자처럼 손을 벌벌 떨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물이 반쯤 차있는 생수통을 꺼내 목구멍에 들이 붙자 이제야 살 것 같았다.

빈 생수통을 식탁에 올려두다 테이블 끄트머리에 놓인 작은 수첩을 발견했다. 아무생각 없이 수첩을 집어들고 열었다. 순전히 생각없이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수첩에는 빽빽하게 알수 없는 이름들이 나열 되어 있었다. 그걸 유심히 쳐다보고 있는데 가죽장갑을 낀 손이 불쑥 나타나 수첩을 낚아 채갔다. 고개를 들자 버키의 분노한 얼굴이 눈에 박혀들었다. 순간 남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다 걸린 것처럼 민망해졌다.

“왜 남의 걸 멋대로 봐.”

“그냥... 여기 있길래...”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대지마.”

버키가 차갑게 일갈했다. 소매치기라도 대하는 태도였다. 그의 과한 대응에 민망한 마음이 싹 가셨다. 별안간 화가 치밀었다. 그렇게 소중하고 아끼는 물건이었으면 꽁꽁 숨겨둘 것이지, 테이블 위에 보란듯이 던져두고는 눈알 번뜩이며 성질을 내는 저의를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대단한 거면 숨겨두지 여기에 떡하니 펼쳐두고 왜 나한테 성질인데?”

“됐다.”

그가 피곤하다는 듯 돌아섰다. 더 열이 뻗쳤다. 그의 뒤통수에 대고 총알처럼 말을 쏴댔다. 이 상황에서 잘못을 따진다면 네 잘못이 훨씬 크다고, 내 잘못이 1이라면 너는 9라고.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재수없게도 오늘은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어색한 침묵을 유지한 채 꾸역꾸역 차에 몸을 실었다. 가는 내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도착해서도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회의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도달해서야 제가 지금은 그와 연인관계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가시를 삼키는 심정으로 입을 뗐다.

“그래, 대인배인 내가 먼저 사과할게. 존나 미안해. 그 빌어먹을 수첩 마음대로 열어봐서. 죽을 죄 지었어 내가.”

버키가 황당하는 얼굴로 토니를 내려다 보았다. 그는 허공에 한숨을 뱉어내더니 착잡한 얼굴로 이마를 짓눌렀다.

“내 잘못이야. 당신 말이 맞아. 거기에 두지 말았어야했어.”

완벽한 사과의 정석. 뒤통수를 난타당한 것 같았다. 바보가 된 기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의 행동들이 저를 바보로 만들기 위한 계획 된 술수들은 아니었나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엘리베이터 벽에 몸을 붙이고 얼굴을 찌푸리고 있자 버키가 다시 말을 붙였다.

“미안하다고, 표정 좀 풀어. 좀 있으면 회의실이야.”

그만 불퉁대고 연기나 똑바로 하란 말로 들렸다.

“당신 국회의원 하면 잘하겠다.”

빈정거렸으나 그는 반응이 없었다. 그를 지나쳐 먼저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회의 테이블 중앙에 위치한 모니터에 제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토니는 말없이 모니터에 띄워진 사진들을 바라봤다. 버키가 토니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사진과 버키가 토니를 보며 환하게 웃고있는 사진이 모니터를 반씩 차지하고있었다. 제 3자의 입장으로 본다면 한창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연애 초기의 커플처럼 보일 것 같았다. 토니는 이런 짓을 벌인 범인을 찾으려 주위를 두리번댔다. 클린트가 히죽거리며 토니에게로 다가왔다. 멤버들은 뒤에서 웃음을 참고 있었다. 몸에 힘이 쭉 빠져 나갔다. 저들은 전부 한패였다.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클린트가 토니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솔져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클린트가 때 맞춰 들어오는 버키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를 악물고 클린트의 팔을 떼어냈다. 이새끼고 저새끼고 하나같이 제 속을 뒤집어 놓으려고 안달이 난 것 같았다.

“얼굴! 얼굴 말고 뭐 볼거 있어? 사귀고 나니까 성격도 개싸가지에 결벽도 있는 것 같더라고. 지 물건 좀 만지니까 아주 지랄지랄 개지랄을 하더라.”

들으란듯이 크게 떠들었다. 버키는 피곤한 얼굴로 회의실을 훑더니 직접 모니터로 가 창을 꺼버렸다. 그러더니 토니를 끌어당겨 제 옆에 앉혔다.

“뭐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난건데.”

버키는 마치 회의실에 둘만 있는 것처럼 굴었다. 어? 대답해봐. 그가 토니를 다그쳤다. 그제서야 이성이 돌아왔다. 불꺼진 모니터를 바라보다 버키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야 내가 사과를 계속 하든, 빌든 할거 아냐.”

그는 진심인 것 같았다. 오오. 클린트가 이상한 감탄사를 내뱉자 나타샤가 그의 팔을 툭 쳤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느낀 것 같았다. 토니는 도망치고 싶은 기분으로 버키와 시선을 맞대었다.

“쪽팔려서. 내가 잘못해놓고 내가 성질내는게 쪽팔려서.”

진심엔 진심으로 응수했다. 두가지 뜻을 내포하고 꺼낸 말이었다. 첫번째는 속옷에 관한 것, 두번째는 그의 수첩에 관한 것. 버키는 알아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토니는 기세를 이어 턱짓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안그래도 짜증나는데... 눈 앞에 저런게 보이니까 더 짜증나잖아...”

이번엔 연기였다. 버키가 고개를 들어 멤버들을 훑었다. 어디선가 연장이라도 찾아와 사진을 띄운 범인을 줘 팰 것 같은 눈이었다. 멤버들이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 꼴을 보고있으니 속이 후련해졌다. 처음으로 버키와 제가 한팀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슬픈 척하며 입을 가리고 마구 웃었다.

“어떻게 해줄까. 찾아내서 때려줘?”

버키는 이것마저 진심이었는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응이라고 했다가는 사단이 날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됐어. 사진 잘나왔더라.”

풀어진 얼굴로 대꾸하자 토니의 표정을 살피던 버키의 얼굴에 느리게 미소가 걸렸다.

“화 풀렸네.”









































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샹들리에와 호화스럽게 꾸며진 연회장을 무감한 눈으로 관찰했다. 이런 자리는 몇번을 와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한때는 파티광으로 불린 적도 있었으나 사실 파티를 즐겨본 적은 없었다.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가식을 떨던 시절의 일이었다. 그때는 정신나간 삶을 살았다. 텅빈 속을 채우려 허공에 계속해서 헛발질을 했다. 그럴수록 제 살을 깍아먹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로. 이제는 받아들였다. 텅빈 채로 살아도 삶은 그런대로 굴러갔다. 사랑 없이도 그럴듯하게 이어지는 결혼 생활처럼.

버키는 약속 시간이 넘었는데도 나타나질 않고 있었다. 초조하게 시계를 내려다보다 끊임없이 사람이 쏟아져 들어오는 문을 바라보길 반복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애인은 어디갔어요? 파티의 주인은 따로있었으나 주요 관심사는 이쪽인 것 같았다. 목이 바짝 타들어 갔다. 이 고고한 인간들이 버키를 심판대에 올려두고 자신들의 잣대를 들이밀어 그를 도륙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버키는 이런 파티에 면역이 있을리 없었다. 있을 이유도 없었다. 순전히 자신 때문에 이런 곳까지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니 어떻게든 그를 지켜야만 했다.

말라가는 목구멍 아래로 침만 삼키고 있을 때, 버키가 연회장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수트를 입은 그는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잘생긴 줄은 알고있었다. 저 정도인 줄은 몰랐을 뿐. 멀끔하게 차려입은 버키는 미디어에서 시종일관 외모를 뽐내는 연예인들과 다를바 없어 보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는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손을 들어 제 위치를 알렸다. 버키는 곧바로 토니를 향해 다가왔다.

“차가 막혀서.”

버키가 변명했다.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버키의 등장과 동시에 꽂혀드는 수십개의 시선에 정신이 팔린 터였다. 막연하게 상상했던 상황이 현실이 되자 심각성이 와닿았다. 버키를 발견한 순간부터 다들 굶주린 개마냥 침을 흘리며 먹이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침착하려 노력했다. 부부로 보이는 커플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게 신호탄이었는지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두사람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당신은 대답 안해도 돼.”

자신없는 말투가 새어 나왔다. 토니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뚜렷하게 베어 있었다. 버키가 그런 토니를 보며 헛웃음을 쳤다.

“다들 등 뒤에 칼이라도 숨기고 있는거야?”

버키의 농담에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등 뒤는 아닐 것이다. 혀끝에다 숨기고 있겠지. 고상한척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데는 도가 튼 인간들이었다. 부부는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넸다. 호의적인 태도에도 방심할 수 없는 게 이바닥 생리였다. 방어태세를 취하며 버키를 소개했다.

“기사 보셨죠? 제 남자친구예요.”

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부부는 쌍으로 미소짓더니 차례로 버키와악수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영화사 대표라고 소개했다.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들이었다. 이제 시작이겠거니 했다. 예상과 한치도 다름없이 아내쪽이 먼저 이번에 들여올 영화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요약하자면 영화사에 길이 남을 수작이니 투자를 하라는거였다. 우회해서 거절했다. 여자의 눈에 빠르게 냉기가 돌았다. 남편쪽도 마찬가지였다. 어이가 없어 비소가 튀어나올 뻔 했다.

“아쉽네요. 영화가 가해자의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인데. 심리를 아주 내밀하게 표현했거든요. 하마터면 저도 가해자한테 이입할뻔 했지 뭐예요.”

몸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녀의 말은 버키와 토니 모두에게 치명상을 입히기에 충분했다.

“아, 얼마전에 사면 받으셨죠. 억울하셨을텐데 축하드려요.”

이번에는 남편쪽이 어퍼컷을 날렸다. 버키의 표정을 살피고 싶었으나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릴 수 없을 정도로 미안함 마음이 들었다. 그가 이런 자리에 참여해 이런 말을 들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손에 칼이라도 들려 있으면 당장 남자의 머리통에 꽂아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피해자들한테는 안타까운 소식이겠지만.“

남자가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 그는 말 한마디로 버키를 가해자로 붙박아 버렸다. 반발심이 일었다. 원체 참지 못하는 성미에 불이 붙었다. 혀끝으로 남을 재단하는 일은 너무나 쉽다. 상대의 사정과 상황을 모를 때는 더더욱.

“무슨 뜻이죠? 이 사람이 사면 받은게 피해자들에게 안타까운 일이라고요? 왜요? 이사람이 뭘 잘못했는데요?”

입이 폭주했다. 그와 동시에 이성은 점멸했다. 토니의 날카로운 반응에 부부는 당황한듯 보였다. 몰아치듯 쏘아 붙이려는데 버키가 토니의 손을 붙잡았다. 울컥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주한 눈에는 체념이 서려 있었다. 버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입놀리지 말라 경고하고 싶었다. 언감히 떠들어댄 댓가를 치르게 해주겠다고 길길이 날뛰고 싶었다. 버키의 눈을 보기 전까지는 그럴 작정이었다. 그의 눈을 보자 날 선 깨달음이 찾아왔다. 몇분 전까지만 해도 이들과 자신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의 잘못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를 살인자로 여겼다. 토니는 그 사건들의 배경까지 꿰뚫고 있었으니 질이 더 나쁘다 할 수 있었다. 누군가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사적인 감정이 걷혀진 자리에는 결국 본질만이 존재했다. 누구의 잘못인가. 피해자는 누구인가.






























토니는 버키를 피해 달아났다. 허둥대며 뒷문을 통과해 계단을 뛰어내려가다 발목을 접질렸다. 절뚝이며 몇 걸음 더 걷다가 포기하고 계단에 주저 앉았다. 목울대가 펄떡였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생경한 공포.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진실이 토니의 가슴 속을 난도질 했다.

토니가 부모를 잃었다면, 버키는 삶을 통째로 잃었다. 그 사실을 몰랐냐고 묻는다면 알고싶지 않았다고 답하는게 정확했다. 그 영상을 목격한 후로 줄곧 버키에 대한 분노만 키워왔다. 지금 잘 살고 있으니 그걸로 됐다 여기며 액면 그대로만 상황을 받아들였다. 진실은 모조리 외면한 채로. 버키를 끈덕지게 따라다녔을 살인자란 꼬리표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견뎌냈다. 살아갔다. 자신을 향하는 비틀린 원망들을 모두 제 것으로 흡수했다. 이제야 버키 반즈가 제대로 보였다. 바보같을 정도로 우직한, 그 어떤 불행에도 결국엔 선을 택할 남자. 계단 위쪽에서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더 파묻었다. 누구인지 안봐도 알 수 있었다.

“나만 두고 도망가냐. 의리 없게.”

버키가 장난스레 말을 걸었다. 고개를 들지 않자 우는거냐며 놀리듯 물었다.

“스타크, 그 남자 말이 틀린 것도 없어. 내가 사면 받은 게 그 사람들한테는...”

“아니? 그새끼 말은 완전히 틀렸어!”

그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접질린 발목을 망각한 채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바람에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질뻔 했다. 버키가 셔츠깃을 붙잡아 당기지만 않았어도 두개골이 반으로 쪼개졌을 지도 몰랐다.

“다쳤어?”

“별거 아냐.”

허세를 부리자 버키가 혀를 찼다. 그는 두칸 아래로 내려가 몸을 굽히더니 등을 내밀었다. 업히라고 했다. 싫다고 하자 버키는 토니의 팔을 잡아당겨 그를 강제로 업어 들었다. 반항해 봤자 질게 뻔해 몸을 축 늘어트렸다. 다행히 뒷문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밤하늘에는 별 하나 떠있지 않았다. 공기를 애워싼 냉기에 몸을 부르르 떨자, 버키가 토니를 업은 팔을 추스르며 조금만 참으라 말했다. 그가 걸음을 뗄 떼마다 발 아래로 낙엽이 뭉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밀착 된 몸에 온기가 퍼져나갔다. 그의 목을 감싸안은 팔에 힘을 주며 용기를 쥐어짜내기 위해 노력했다.

“있잖아... 오늘 일은 그냥 잊어버려.”

겨우 뱉어낸 말은 형편없었다.

“싫은데.”

돌아온 대답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잊으라고.”

“싫어. 평생 기억해야지... 토니 스타크 성질머리.”

그가 나직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답답함에 차가운 공기 속에 한숨을 팍 내쉬었다. 버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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