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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4 20:45
메크는 필사적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갈 추진력을 주는 것은 왼다리 하나 뿐이었지만 그는 오로지 꺼져가는 생명불을 붙들기 위해 사력을 다해 앞으로 기어갔다. 그의 이름은 다크윙이었고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아이아콘 시티 지하 광산에서 관리직을 맡고 있다는 사실은 몹시 중요했다. 그는 D 섹터의 관리자였고 거기에는 배정된 광산의 구역 이름을 그대로 쓰는 코그리스 광부가 있었다.
"오, 오지마."
거대한 동체를 가진 관리자는 보컬라이저를 벌벌 떨었다. 사냥당한다는 공포,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무참한 폭력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지 않을 메크는 거의 없다. 탄은 디셉티콘 제국의 존속을 위해 헌신하며 이런 자들을 수도 없이 목격해왔다. 위대한 대의를 배신한 과거를 송두리째 잊어버리고, 목숨만이라도 붙여달라며 비굴하게 구걸하던 자들…. 신념이라고는 싼값에 팔아치울 것도 없는 어리석은 자들. 그들이 프라이머스의 곁으로 돌아가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깨우침을 주는 것은 그의 의무였다. 단 하나의 메크가 도살당하는 것으로 한 명 이상의 예비 변절자가 탄생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그의 죽음에는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가르침을 주기 위해 그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저 메크에게 있어서는 난데없이 마주친 재해처럼 느껴질 일이었다. 하지만 삶이라는 자체가 무릇 불요한 사고의 연속이 아니던가? 그 불요함에서 의미를 찾느냐 마느냐가 산자의 생에 끝없이 주어지는 숙제인 것이다.
그리고 탄은 자신 몫의 숙제에서 답을 찾은 참이었다.
"다―다가오지 말라니까!"
"다크윙. 자넨 잘못을 저질렀어."
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제 손으로 추진기를 으깨고 수족을 뽑은 동체 앞에 앉아 허리를 숙였다. 그는 공포로 인해 사고회로가 얼어붙은 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직업병이라 해도 좋을 터다―관용적으로, 나긋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운이 없었지." 그는 눈을 감았다. 음악이 그리웠다. 처형 대상자의 마지막 순간을 그의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시간으로 윤색하기 위해 찬송가를 들려주는 것은 그가 정한 루틴이었다. 그러나 그는 빈손으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 가진 것이 없었다. 그는 메모리에서 그리운 선율을 재생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그가 지닌 기억은 이 불가해한 우주가 그에게서 앗아갈 수 없는 유일한 것이었다. "나를 마주쳐버렸어. 자네가 저지른 희대의 실수였지. 적어도 지하 깊숙한 곳에서 땅벌레처럼 숨어 살았더라면 몇 사이클이라도 더 명줄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을."
관리자의 오디오리셉터로부터 끊임없이 딸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탄은 디짓 두 개로 그의 턱을 잡아 올렸다.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나? 안타깝게도 그건 불가능해. 내가 자네 오디오센서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전파를 차단하고 있거든. 평소처럼 작동하고 있는 것은 주어지는 소리를 듣기 위한 수신기 뿐이지."
내 목소리를 듣기 위한 수신기 말이야. 탄은 그의 오디오리셉터를 어루만졌다. 연인을 애무하는 듯한 섬세하고 끈적한 손길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소름끼침 속에서 메크가 격렬하게 흐느꼈다. 그는 올스파크의 우물에서 태어난 이래 그토록 연약한 목소리로 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터였다. 탄은 그의 깨달음에 만족했다. 어떤 강자라 할지라도 죽음에 이르는 공포를 외면할 수는 없다.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는 누구나 겸허해지기 마련이다. 자신의 미력함을 깨닫고 운명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자세를 갖추었을 때, 폭정이 이룩하는 평화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순간이 온다.
"살려줘, 제발…. 원하는 건 뭐든 줄 테니…." 메크의 발이 정처없이 바닥을 긁었다. 도심지에서 벌어지는 성대한 축제는 그의 애걸을 축포의 소음 속에 사장해버렸다. 13 프라임 중 하나인 아말가머스 프라임의 주조일이라고 했었나. 탄은 프라임이라는 존재에게 처음으로 감사할 일이 생긴 것 같았다. 그가 목표물을 제거할 최적의 순간을 잡지 못했더라면 집요한 추적과 감시를 수일간 더 이어가야 했을 것이고, 그가 고대하는 만남 역시 후일로 미루어졌을 터였다. 탄은 외진 골목길까지 아스라히 흐르는 축제의 잔향을 들으며 지하에 있을 어느 광부를 떠올렸다. 사치와 향락으로 들끓는 축제와는 무관하게 지하 깊은 곳의 어두운 터널을 굴착하고 있을 작은 광부를.
그가 이 세계에 존재한다. 저 아래에서, 자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내가 자네에게 원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어. 여기서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거야."
메크의 동체가 거칠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탄은 컥컥거리며 몸을 뒤집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무기화된 대화는 여전히 유용한 대화 종결 방식이었다. 그는 목소리에 깃들어있는 힘을 섬세하게 조절했다. 가급적―천천히― 느리게― 음절 하나하나를 끊어서― 갓 태어난 개체에게 언어를 가르치듯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박살난 체스트플레이트 사이로 스파크의 박동이 천천히 느려지는 것이 들렸다. 탄은 그의 가슴에서 코그와 관리자의 증표를 떼어냈다. 코그를 서브스페이스에 넣은 그는 관리자의 증표를 제 외장갑에 붙였다. 그는 가치있는 존재에게 하사받은 훈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증표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꿈을 꾸는 것처럼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당신께 가겠습니다, 메가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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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거 맞아?"
D-16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꼭 뭔 일이 났길 바라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는 짜증을 숨기지 않으며 채굴 기계를 통에 집어던졌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같은 말을 한 번만 들으면 백 번째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난 솔직히 그가 널 계속 호출하는 게 신경 쓰여, 디. 그럴 만한 이유가 없잖아."
오라이온은 의구심이 짙은 얼굴로 말했다. 그는 D-16이 돌아온 순간부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 관리자가 널 불렀다고? 이 많은 에너존을 줬단 말이야? 대체 왜? 평소같으면 적당한 선에서 끝났을 질문들이 오늘따라 유독 집요했다. 걱정이야 이해는 된다만 이쯤 되면 까놓고 말해서 의심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진다. D-16은 코웃음을 치고는 빈정거렸다.
"'그럴 만한 이유가 없'다니, 세상에는 '열심히 일했으니까 그만큼 보상을 해 줄게'라는 유형의 상급자도 있거든. 네겐 너무 어려운 개념이라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을 테지만 말이야."
"예감이 안 좋아." 오라이온은 완전히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는 수레에 등을 기대고는 눈썹 사이를 좁혔다. "그 관리자 말이야. 소문도 소문이지만…, 그냥 보고 있으면 느낌이 와. 딱 봐도 질이 좋은 부류는 아닐 것 같다고."
그런가? D-16은 남은 도구들을 무성의하게 던져넣으며 생각했다. 확실히 탄의 외모는 누구에게나 부정적인 인상을 줄 여지가 다분했다. 코그리스 중에서 가장 큰 자신마저도 처음 그를 보았을 때는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내심 긴장했을 지경이었으니까(그 다음에는 '정신 나갔나?'라는 감상으로 바뀌었지만). 코그를 지닌 메크보다 두 배 가량 더 육중한 동체, 불타는 듯한 옵틱, 표정을 미지의 영역으로 던져버리는 가면까지. 첫 인상이 끔찍하게 남을 수밖에 없는 외관이었다.
그러나 요 며칠 사이에 그의 사무실을 오가며 D-16은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탄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그를 잘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 억측일 뿐이었다. 그는 전혀 호전적이지 않았고, 취향이 뒤틀려 있는 가학성애자도 아니었다. 그는 다른 관리자들처럼 주기적으로 하급자들을 손봐주는 '서열 정리' 행위나 케이온에서 송출되는 지하 경기장 방송 같은 것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아름다운 산문이나 학술적인 저서, 섬세한 미술작품, 품격 있는 음악 쪽이었다. 이따금 스스로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폭력적인 상상에 사로잡히곤 하는 D-16으로서는 내심 실망스러울 일이었다. 그가 자신과 동류일 것이리라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험상궂은 외모로 부당하게 뒷공론을 사는 부류일 따름이었다. 그는 고위 아카데미에서 수학을 마친 메크처럼 견식이 넓었고 행동에는 품위가 있었으며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유머러스해질 수 있었다. D-16은 예상치 못하게 흘러나온 그의 농담에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려버린 적도 있었다. 때때로 의뭉스럽게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만 아니면 그 관리자는, 탄은 정말로 괜찮은 친교 상대였다.
"네 예감? 아하, '코그 없이 변신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믿었던 네 예감 말이야?" D-16은 마지막 도구를 집어넣으며 오라이온과의 설전에서 필승할 수밖에 없는 소재를 꺼냈다. "퍽이나 잘 맞겠다. 인정해, 네 예감은 항상 이상한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지켜보는 메크만 불안해서 미치지."
'그 이야기 안 꺼내기로 했잖아?'라는 말이 나올 거라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불안한 쪽은 나야, 디. 네가 걱정돼서 그래." 오라이온의 손이 어깨를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그는 정말로 눈썹을 늘어뜨린 채 디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정말로 그 자식이 네게 해코지를 안 한 게 맞아? 뭔가 구역질 나는 말을 했다거나,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킨 건 아니야?"
"……." 사실, 해코지를 가한 쪽이라면 자신이었다. 관리자의 페이스플레이트에다가 주먹을 갖다 박아버렸으니까. 만일 이런 이야기를 오라이온에게 들려준다면 그는 반색을 하며 좋아할 터였다. 드디어 너도 내가 속한 세계로 왔구나, 디! 그런 생각으로 기뻐할 친구의 얼굴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옵틱에 그려졌다. 이 위험한 녀석에게 그런 생각을 불어넣어줄 수는 없었다. 만일 팩스의 브레인모듈에 자신과 그가 같은 부류라는 인식이 생긴다면 다음번에는 무슨 골치 아픈 사건으로 제 팔을 잡고 신나게 달려 갈지 모를 노릇이었다. 게다가 구역질 나는 말이라면.
구역질까지는 아니지만, 엄청나게 이상한 말을 듣긴 했지. 기실 D-16이 그 일과 관련한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봇도 오라이온 한 명 뿐이었다. 팩스, 사실 찜찜한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그 관리자가 나보고 사랑한댄다. 으, 진짜 괴상한 소리처럼 들리지 않아? 만난 적도 별로 없는 하급자한테 대뜸 당신이 제 스파크의 불꽃을 타오르게 하고 어쩌고 하다니. 살면서 그렇게 열렬하고 난데없는 고백은 처음 들어봤다. 무슨 대답을 돌려줘야 할지 감도 안 잡히더라니까.
…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 지금 이 녀석을 상대로 말하지 않으면 정말 아무에게도 꺼낼 수 없는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만큼은 곧 죽어도 꺼내기 싫은 것이었다. 그는 고백 이야기를 꺼냈다가 오라이온의 표정이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것까지 상상하고 나서야 머리를 대차게 휘둘러 생각을 몰아냈다. 이 건은 프라이머스의 곁으로 돌아갈 때까지 홀로 품고 갈 비밀이었다. 게다가 탄은 그 고백을 빌미로 제게 불쾌한 일을 시킨 적도 없었다. 오히려 이쪽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자꾸 편의를 봐주려 해서 문제지. 그러니 이건 고민거리라고 하기에도 어불성설인 일일 테다. 굳이 친구에게 털어놓을 이유가 없었다.
"걱정도 팔자다. 그렇게 걱정이 된다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알아, 팩스?" D-16은 배지가 달려있는 오라이온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약하게 쳤다. "앞으로 사고 안 치고 조용히 다니는 거야! 너 그리고 '그 관리자'에게 고맙다고 해라. 네가 아직까지 여기서 무사히 일하고 있는 건 그가 지난번 일을 눈 감아 줬기 때문이라고. 다크윙이었다면 널 묵사발냈을 텐데 말이야! 나 같으면 그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 은인으로 여기겠어. '감사합니다, 관리자 님. 앞으로 더 열심히 할당량을 채워서 은혜를 갚겠습니다.'"
"설마하지만, 나 때문에 그를 만나러 가는 거야? 내 선처를 조건으로 하면서?"
오라이온은 돌아서려는 D-16을 더욱 강한 힘으로 붙잡았다. 이번에는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이었다. "절대 그러지 마. 차라리 나를 보내! 네가 나 때문에 그런 취급을 받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그러니까…"
"돌겠네, 네가 걱정하는 일은 아무것도 안 일어났다니까!"
D-16은 오라이온의 팔을 뿌리치며 외쳤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오라이온의 머릿속에 지금쯤 어떤 장면이 그려지고 있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광부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처럼 관리자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거나, 인터페이스 같은 끔찍한 짓을 당하거나 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전부 기우일 뿐이었다. 탄은 심지어 제 동체에 멋대로 손을 올리지도 않았다. 단지 인상이 좋지 않고 덩치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남들에게 선입견을 사는 일은 지긋지긋했다. 저 녀석은 저렇게나 크고 무뚝뚝하게 생겼으니 분명 성질 더러운 자식일 거야. 신경에 거슬리면 주먹부터 나가는 말종일 거야. 오라이온은 제 외관을 두고 편견을 가지지 않은 첫 번째 메크였다. 다른 봇들은 아무래도 좋았지만 오라이온만큼은 그런 생각을 품는 것이 실망스러웠다.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D-16은 갈피를 잃은 오라이온의 손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이 은연 중에 탄에게 동지 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를 '관리자'가 아니라 '탄'이라는 이름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도.
"…화내서 미안한데, 진짜로 별일 없었어. 너 때문에 벌을 받게 된 거라면 내가 너한테 분풀이를 하려고 달려들었겠지, 뭐하러 미련하게 참고 있겠냐."
"알겠어,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믿을게. 믿겠지만… 한 가지 약속해줘."
오라이온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눈으로 D-16을 들여다보았다. 어깨를 붙잡은 손에서 확연히 힘이 빠졌다. "그 관리자가 널 멋대로 다루려 들거든 꼭 내게 알려주기로. 디, 넌 혼자가 아니야. 내가 있어. 늘 서로의 등을 지켜주기로 약속했잖아. 내가 어떻게든 도와줄게."
D-16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멋대로 다룬다라. 멋대로 다룬다니. 도대체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 건지. 현 시점에서 그를 가장 제멋대로 다루려 들지 않는 것은 탄이 거의 유일했다. 그는 권력을 지닌 것 치고 타인을 기분대로 휘두르려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단히 보기 드문 유형이었다. 그는 스피커의 음량을 조절할 때조차 이 정도 크기로 할까요, 저 정도 크기로 할까요를 시시콜콜 캐묻던 탄을 떠올렸다. 오라이온을 포함해서 광산에서 일하는 누가 들어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코웃음을 칠 장면이었다.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뭐, 어쨌거나 늘 걱정하던 입장에서 걱정받는 입장이 된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오라이온의 어깨를 치고는 씩 미소지었다. "속 타는 입장이 되어보니까 어때? 끝내주지?"
"농담하지 마. 그럴 기분 아니야."
"나도 마찬가지거든." D-16은 간만에 노래를 흥얼거리고 싶어지는 기분으로 말했다. "슬슬 수레나 반납하러 가자. 지난번처럼 엘리타 원에게 한소리 듣는 건 사양이라고. 대장이 뭐라고 하면 난 너 때문에 늦었다고 받아칠 거야. 실제로 틀린 말도 아니잖아."
더는 관리자 구역을 걸어도 유심히 눈여겨보는 시선이 없었다. 그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래도 역시 일개 광부가 관리자들이 다니는 공간에 왔다고 사방팔방 광고하며 돌아다니기는 싫었다. D-16은 최대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걸어 탄의 집무실까지 도착했다. 여러 번 노크하고 기다려도 안에서 들려오는 말이 없자, 그는 암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었다.
사무실은 비어있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관리자들도 광부나 감독관들만큼이나 바쁜 스케줄을 소화해야하는 족속들이었으니까. 사무실의 주인이 부재중일 때면 D-16은 방 안을 서성거리거나 앉아서 잠시 휴면 모드를 취하다가 탄이 도착하는 소리에 눈꺼풀을 올리곤 했다.
D-16은 익숙하게 문을 닫고 사무실 내부를 살펴보았다. 혹시라도 남겨진 쪽지가 있을까 싶어 책상 위를 보았지만 결재를 기다리는 데이터패드들이 올려진 것이 전부였다. 강박증 환자가 완성한 탑이라도 되는 것처럼 질서정연하게 쌓아올려져 있다. 전원이 꺼진 스피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몇 개 빈 공간이 생긴 에너존 더미. 새롭게 생긴 데이터패드 보관장. 비어있던 방을 두루 살피던 시선은 책상 너머의 의자에 종착했다.
D-16은 비어있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다시 책상으로. 문으로. 다시 의자로. 책상으로. 문으로. 의자. 책상. 문. 또 다시 의자.
그는 불현듯 머릿속으로 멍청한 충동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그런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걸 시도할 기회는 지금밖에 없었다.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지만 않으면 되니까…. 그는 무심코 립플레이트를 글로사로 핥고는 걸음을 옮겼다.
코그가 있는 봇의 동체에 맞춰진 의자는 생각했던 것보다 높았다. 거의 팔걸이를 하는 것처럼 상체를 올려 의자에 얹어야 하는 수준이었다. 그는 거의 등반을 하듯이 의자를 타고 올랐다. 의자에 제대로 걸터앉자 등은 아예 등받이에 닿지도 않았다. 그래도 관리자의 의자에 앉아있다는 만족감만큼은 확실했다. 그는 경이로워하는 눈으로 의자에 앉아있는 자신을 살펴보았다.
이거, 기분 끝내주는데.
꿈에 그리던 의자에 앉아있다는 현실은 좋은 감정을 표하는 데 인색한 그에게도 들뜬 기분을 선사해주었다. 비록 관리자 자리에 앉은 흉내를 낼 뿐이었지만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였다. 그는 보란듯이 다리를 쩍 벌리고 한 손으로는 턱을 괸 채 거드름을 피우는 척 했다. 그러더니 돌연 자세를 다잡고는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다크윙, 지금 그딴 걸 실적 보고라고 들고 왔나?" 그는 목소리를 험악스럽게 낮췄다. 머릿속 극장에서 다크윙의 절절매는 표정 클로즈업.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지? 에너존을 광부들의 몫보다 세 배 이상 채굴해 오지 않으면 네놈을 본보기로 흠씬 두들겨 주겠다고! 넌 나와의 약속을 못 지켰군. 이리 와라. 지금까지 맞았던 것은 장난처럼 느껴지게 해주지. 무릎 꿇어. 덴타 악물고 날 똑바로 올려다 봐."
사무실 안에 침묵이 흘렀다. D-16은 삿대질을 한 자세를 풀고 바람 빠지듯 웃음을 흘렸다. 아, 나 진짜 뭐하고 있는 거냐? 갓 태어난 메클링도 아니고 우스워 죽겠네. 게다가 이젠 광산에 출근하지도 않는 메크를 가지고 뭐하는 짓이람. 당장은 지켜보고 있는 이가 없는 것이 정말로 다행이었다(특히 오라이온에게 들킬 일이 없는 것이 가장 다행이었다!). 그는 한참을 더 키득거리다가 바보같은 머릿속 극장에 폐업 간판을 내걸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이런 허황된 상상이 실현될 수도 있었다. 열심히 실적을 쌓으면서, 감독관이나 관리자들의 눈밖에 나지 않게 조심히 살다가 등급표를 전부 채우게 된다면. 그는 곧 있으면 D 섹터의 광부들 중에서 최초로 열한 번째 배지를 수여받을 예정이었다. 만일 그가 윗 계급으로 승진하게 된다면 근무 환경이 더 나아질 뿐만 아니라 팩스가 치는 사고를 더욱 원만하게 수습해줄 수도 있을 터였다. 승진은 그를 어두컴컴하고 위험한 광산에서 버티게 하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 타인의 위에 서고 싶은 욕망. 남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닐 수는 없었지만 그에게도 그런 당연한 욕망쯤은 있었다. 그는 언젠가 어엿한 관리자가 되어 다른 이들로부터 마땅한 두려움과 존중을 받을 것이었다. 그래, 탄처럼.
D-16은 말도 안 되지만 만약 오라이온이 관리자 자리에 올랐을 때를 상상하면서 조금 더 키들거렸다. 아마 그 녀석이라면 이 자리에 앉아서도 근엄한 자세를 유지하진 못하겠지. 방정맞게 다리나 흔들어대고 있을 거다. 하루가 끝날 때면 마이크를 잡고 '전 구역에 알리겠다, 오늘 모두 수고했으니 광부 한 명당 에너존 백 개씩 수여하도록 하겠다!' 같은 소리나 하지 않을까? 그 바보라면 분명 그럴 거야.
폐업한 상상 극장에서 주연 배우들을 가지고 놀던 D-16은 책상 위에 아직 전원이 켜져 있는 패드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무심코 그 안에 적힌 글을 읽었다.
[만약 네가 이 체계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이게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사실, 이건 감옥이다. 그냥 감옥도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갇혀 있는 이들로 꽉 찬 감옥이다.
그리고 너는 이 시스템 안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네 몸 안에도 갇혀 있다. 네가 태어났든, 만들어졌든, 네 겉모습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D-16은 자력에 이끌리듯 패드를 들었다. 그는 이어지는 내용을 천천히 읽어내렸다.
[너의 변환 모드alt mode를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으면서, 기능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네 '최고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말한다.
'책임'이 있다고 말하며, 프라이머스께서 정해주신 네 모습을 가장 잘 활용하도록 돕는 게 자기들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한때 그들은 네가 코그 없이 태어났다면, 그것은 '사이버트론에 코그 없는 자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코그리스가 코그를 받고 자신의 역할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신의 분노를 불러오고 세상을 무릎 꿇게 할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었다.
낯선 이를 보면 너는 이렇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저 메크는 어떤 존재인가?'가 아니라 '저 메크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들의 희망, 꿈, 열망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들은 무슨 일을 하는가?'
그리고 또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저 메크는 나보다 위인가, 아래인가? 나보다 나은가?'
설령 네가 이 거대한 사이버트로니안 체계를 믿는다 해도, 너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누가 이런 질서를 정한 것인가?'
'왜 질서가 있어야 하는가?'
이들이 기능주의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만인이 답을 알게 되는 순간, 그들의 세계는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답을 알려주겠다: 질서는 필요 없다.]
"그건 제가 적은 글이 아닙니다."
스파크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D-16은 동체의 모든 시스템이 일시로 셧다운 되었다가 재부팅을 겪는 기분으로 패드를 내렸다.
탄은 어느새 닫힌 문 앞에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D-16은 자신이 얼마나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관리자의 허락도 없이 관리자의 의자에 앉아서, 관리자의 패드를 읽고 있었다. 게다가 언제부터 그 '관리자'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지도 몰랐다. 너무 글을 몰입해서 읽고 있었던 나머지 그가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한 것이다.
두 눈이 질끈 감겼다. D-16은 스스로 헬름을 깨고 브레인모듈을 으깨고 싶은 마음으로 립플레이트를 열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
"잘 어울리십니다."
저건 탄 나름의 빈정거림일까, 아니면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D-16은 가까스로 옵틱 한쪽을 열고 탄의 표정을 살폈다. 탄은 화를 내거나 어처구니 없어하는 기색 없이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D-16이 읽던 패드를 집어 올렸다.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모습이 한창 어느 문단을 읽는 중이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선언문입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고 경애하는 선지자께서 작성하신 것으로… 그분의 자서전 중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좋아하는 메크가 쓴 글이라 이거지. 대단하네."
처벌받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오디오리셉터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D-16은 정처없이 옵틱을 굴리며 의자에서 내려갈 최적의 타이밍이 언제일지를 고민했다. 잠깐, 발이 안 닿는 상황에서 뛰어내리면 소리가 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여기서 조용히 내려갈 수 있지?
"어떠셨습니까?"
돌연 던져진 질문에 D-16은 움찔했다. 탄의 음성은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묵직했다. 저 이글거리듯 꿰뚫어보는 붉은 옵틱이 주먹으로 시작하는 대화의 전조 증상인 것인지 고민이 될 노릇이었다. D-16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올렸다. "…뭐가 어땠냐는 거야?"
"이 글을 읽고, 어떤 느낌이 드셨습니까?"
'그게 왜 궁금한 건데?' D-16은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동결되어있던 사고 회로를 활성화시켰다. 글은… 훌륭했다. 탄의 말마따나 일부만 읽었을 뿐이었지만, 문외한의 눈으로도 필력이나 호소력을 고스란히 읽어낼 수 있었을 정도로 굉장한 글이었다. 어려운 단어가 많아 중간중간 무슨 의미인지 난해하게 느껴진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탄처럼 머리가 좋은 메크가 읽었더라면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으려나. D-16은 처음으로 자신의 지식 수준이 평균적인 메크보다 낮은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질서가 전부인 이 세계에서 질서는 필요없다니, 불편하고 파격적이면서도 어떤 면에서 조금쯤은 매혹적으로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잘 쓴 글 같았어." 그것이 그가 끌어낼 수 있는 찬사의 최대한도였다. "엄청 어렵긴 했지만. 보자마자 확 빨려들어가서 읽게 되는 힘이 있었달까…, 나한테는 처음 있었던 일이라서. 누구인지는 몰라도 네가 존경하는 메크는 대단한 존재인 것 같네."
탄은 물끄러미 작은 광부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훗날 이 글을 쓰는 대단한 존재가 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는 것일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고무적인 일이었다. 탄은 그의 자서전―<평화를 향하여Towards Peace>―을 수천, 수만, 수억 번은 읽고 메모리 속에서 되새긴 광적인 애독자였다. 여분의 패드가 생기자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평화를 향하여>의 전문을 새로운 장소에 받아적는 일이었다. 그는 감사 기도와 함께 경건한 마음으로 성서의 사본을 작성하는 것을 하루 일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성서를 완성한 선지자께서 그 글에 관심을 보이다니, 운명이 아니고서야 다르게 해석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탄은 사무실에 들어서던 때를 돌이켰다. 의자에 앉아, 패드를 들고… 어떤 문장으로 표현해야 불합리와 불평등의 녹물로 주조된 사회에 깨달음의 철퇴를 가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그의 메가트론께서는 고뇌가 깊은 얼굴로 한 문장 한 문장을 신중하게 적어내려갔을 것이다. 그는 진정 위대한 사상가요, 혁명가였다. 탄은 그저 그의 저서를 수집하고 탐독했을 뿐이었지만, D-16이 패드를 들고 사무실에 앉아 글을 읽고 있는 광경을 본 순간 마치 메가트론이 처음 선언문을 작성하던 역사적인 순간을 목도해버린 듯한 감격과 환희에 휩싸였다. 그는 그 광경에 넋을 빼앗겨버렸다. 그대로 침묵하여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 수 있었더라면 그렇게 했으리라.
아, 그의 브레인모듈에 <평화를 향하여>의 전문을 쑤셔박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직 사상의 뿌리만 어렴풋이 자라있을 뿐인 그를 살아있는 성서로 새롭게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나만을 위한, 나만의… 오로지 나만이 경배드릴 수 있는 그로…. 그러나 오만이자 과욕일 따름일지어다. 메가트론의 사상은 사이버트론과 그 외부로 널리 퍼져나가면서 그 영향력을 확산해야만 비로소 가치를 발하는 것이었다. 그의 숭고한 이념이 자신과 같은 한낱 종의 욕망에 사로잡혀 빛을 잃는 것은 전우주적인 손실일 따름이었다. 또한 그의 사상은 오롯이 그로부터 비롯되기에 유일하며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것은 메가트론으로부터 태동한, 메가트론께서 스스로 창조한 것이라야만 의미가 있었다. 타인으로부터 주입된 사상을 읊는 것은 싸구려 녹음기 따위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고작 순간의 욕망에 사로잡혀 그의 메가트론을 녹음기보다 하찮은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통각장치가 켜진 채로 온몸의 장기가 뽑혀나가는 것처럼 끔찍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D-16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불경한 상상 속에서 홀로 고요히 고통스러워했다.
탄은 데이터패드의 전원을 껐다. 그는 글의 내용이 D-16의 내부에서 사상이 자라날 토양 정도의 역할만 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훗날 메가트론으로 각성한 그가 자신의 이념을 한 권의 책으로 집필할 준비를 마쳤을 때, 자신은 그의 곁에 서서 사이버트론의 역사상 가장 거룩한 창작의 시간을 빠짐없이 목격하리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희어지는 것 같은 기쁨이 일었다. 그런 가능성이 주어졌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축복이었다. 설령 이번 생에는 만년의 시간이 걸리게 되더라도 기꺼이 그 순간을 기다릴 수 있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잠시 보컬라이저의 작동을 멈췄다가 다시 목을 열었다.
"그렇게 제 눈치를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D-16과 시선을 맞췄다. 늘 그랬듯이.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당신과 마주 앉아있는 기쁨에 취해 당신께 제 자리를 드린다는 더 훌륭한 생각까지는 미처 가닿지 못하였군요. 그 자리는 당신께 더 어울립니다. 아니, 필요하시다면 당신의 동체에 맞춘 의자를 새로 주문하겠습니다. 그것으로 제 무지를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겠습니까?"
"무슨 주문을 새로 해?! 아니, 아니지! 제발 호들갑 좀 떨지 마!"
D-16은 기겁을 하며 외쳤다. 당장 자신이 앉아있는 의자만 하더라도 상당한 가격을 호가하는 제품처럼 보이는데 무슨 주문 제작을 또 하겠단 말인가? 행여라도 그런 것에 앉게 된다면 엄청난 부담감에 그날 먹은 에너존이 전부 역류할지도 몰랐다. "난 그냥 평소처럼 반대편 의자에 앉아도 충분해! 넌 샤닉스가 남아돌아서 뭘 새로 사는 거에 별 생각이 없나본데, 나 같은 광부들은 의자 하나만 던져줘도 감지덕지하는 법이거든? 쓸데없는 데에 돈 쓰지 말고 아껴놓기나 해!"
"안타깝게도 제겐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당신을 계속 내려다볼 수는 없습니다."
D-16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의 힘이란 무량한 것이다. '하대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상위 입력값 덕분에, 그는 다른 관리자들에게는 결코 하지 못할 방식으로 탄을 향해 투덜거렸다. "지금까지는 늘 그래왔으면서 그게 왜 갑자기 문제가 되는 거야. 애초에 네 키가 너무 큰게 문제라고."
탄은 잠시 고민했다. 그는 짧은 침묵 후에 물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은 어떻습니까?"
탄의 두 손이 D-16의 허리 옆으로 가까이 다가온 다음 멈췄다. 그는 마치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끈질기게 D-16의 옵틱을 들여다보았다. D-16은 얼떨떨한 눈으로 그의 시선을 받았다. 뭐지? 손을 대도 되냐고 묻는 건가? 그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기를 바라면서 탄의 양손을 끌어 제 허리를 붙잡게 만들었다. 그러자 그의 동체가 순식간에 허공으로 번쩍 치솟았다.
"어, 우왓!"
코그리스 중에서 유독 체격이 다부지고 힘이 센 편이었기에, D-16은 보통 누군가를 드는 쪽이었지 들리는 쪽이 되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탄은 그의―자신은 나름대로 무거운 편이라고 자부했던―동체를 에너존 큐브 하나 들듯이 너무나 수월하게 들어올렸다. 이 정도로 성능 차이가 나버리면 자존심이 상하기보다 감탄이 튀어나오는 법이었다. D-16은 막연히 놀란 눈으로 탄을 보았다. 그의 몸은 소리 하나 없이 책상 위로 안착했다.
"이러면 제가 당신을 내려다 볼 일도, 새로운 의자 때문에 당신께서 부담을 느끼실 일도 없어지는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D-16은 책상에 걸터앉아 탄을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이렇게 앉아있으면 탄이 자연스럽게 그를 올려다보는 구도가 되었다. 설마 이러고 있다가 누가 예고도 없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와버리진 않겠지. 그런 불안감이 절로 떠오를 만한 자세였지만 탄의 말에 반박할 거리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이게 멋대로 관리자 의자에 앉아있던 것에 대한 벌…인 것일지도? 그러나 D-16은 그것이 제 지레짐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은연 중에 깨닫고 있었다. 탄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에게 벌이라고 할 만한 것을 내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당연히 손찌검이 날아올 것이라고 상정한 상황에서도 그랬다.
"그래, 뭐. 너만 괜찮다면야…." 서로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게 마음에 걸리는 점이라면 걸리는 점이다마는. 그는 양다리를 벌린 상태에서도 탄의 동체 너비의 끝에 닿을 수 없다는 점에 새삼 신기해하며 중얼거렸다. 이거 대단하네. 이러고 있으면 탄의 등 뒤에서는 내가 보이지도 않겠다. 이만큼이나 덩치가 크면 느낌이 어떨까.
그는 저도 모르게 다리를 바깥쪽으로 움직여 탄의 크기를 가늠했다. 탄이 무섭도록 침묵하고 있었기에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
"D-16?"
"흠?"
"다리를 닫아주시길 요청드립니다."
"다리? 아." 그는 그제야 움직임을 멈췄다. 자신이 인식하고 있던 것보다 다리 사이가 지나치게 열려 있었다. 이래서야 버르장머리 없이 보이는 게 당연하겠지. "주제 넘게 굴어서 미안. 네 책상 위라는 걸 깜빡해버렸…"
"그게 아닙니다." 탄은 여전히 감정을 배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 스파크가 미혹에 빠지는 탓입니다. 당신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D-16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미혹'이 무슨 뜻인데?"
"쉽게 풀어서 말씀드리자면," 쿨링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음성 사이의 정적을 거칠게 긁었다. 탄의 목소리는 무언가를 몹시 힘겹게 억제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당신의 모습을 보고 제 충동이 범람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당신의 자세는… 매우 무방비해 보이는군요, D-16."
D-16은 한 차례 늦게 아직 탄의 손이 그의 양쪽 허리에 맞닿아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가 만일 손에 힘을 준다면 코그리스에 불과한 제 동체는 책상 위로 아주 쉽게 넘어갈 터였다. 그렇게 된다면 딱히 그런 쪽 분야에 상식이 부족한 자신마저도 그들의 자세가 아주 미묘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젠장, D-16. 이 멍청아. 그걸 이제서야 깨닫고 앉아있냐?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야지!
그는 다리 바깥쪽에 갑자기 추진기가 돋아난 것처럼 황급히 양다리를 닫아걸었다. 그는 제 것의 쿨링팬도 사정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이 거북해진 분위기를 어쩔 것이냐. "다음부터는 제발 풀어서 말해주겠어? 그리고 이왕이면 이 손도… 좀 놓고!"
탄은 처음으로 그의 말에 곧장 따르지 않았다. 그는 한참을 정지 상태로 더 머물러 있더니―어느 순간부터는 D-16이 무안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셈이지? 리차징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 자세로 있을 셈인가?―마비된 사지에서 디짓을 움찔하듯 움직이고는 양손을 천천히 떨어뜨렸다. D-16은 어색한 침묵을 깨트리기 위해 일부러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는 탄이 가면 밑에서 눈을 감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는 자신을 타자화시켜 주체하기 어려운 욕망을 간신히 다스리는 중이었다. 그의 메가트론께서 원치 않는 접촉을 감히 시도할 수는 없었다. 사실은 명령을 듣기 전에 스스로 먼저 손을 떼어냈어야 했다. 그는 작은 동체에 손을 올린 순간부터 이미 충동에게 패배해 있었다. 그의 몸에 손을 올릴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버렸다. 앎과 행함 사이의 깊고 방대한 균열이 그가 맞서싸워야 하는 가장 큰 적이었다. 자기조절의 실패는 혐오감으로 이어지고 혐오감은 고스란히 정신의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그는 끊임없는 승리자가 되어야 했다. 그러고자 그는 매일 기도에 매진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의 주군을 향해 부디 힘을 주시길 간원하지 않았던가?
제3자의 시선에서 본다면 우습기 짝이 없는 기도였음에도, 탄은 간청했다. 당신을 향한 사랑에 눈 멀어 충동대로 행동하지 않을 힘을 주소서. 한낱 욕망보다 더 높은 경지에 있는 대의를 그르치지 않을 인내를 주소서.
"이봐, 탄?"
탄은 눈을 떴다. 기도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그는 평정을 되찾은 얼굴로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시간이 더 늦어지기 전에 오늘 분의 수업을 시작해야겠군요."
D-16은 미심쩍어하는 표정이었지만 마지못해 동의하듯 목을 울렸다. 그는 절대로 알 필요가 없었다. 그의 무방비한 자세를 두고 자신이 어떤 상념들을 떠올렸는지, 그것이 어떤 파괴적인 흐름으로 시작되고 이어지며 끝을 맺었는지. 상상은 가장 개인적인 자유요 가장 내밀한 통로를 흐르는 에너존이었다. 그는 가급적이면 자신을 내려다보는 D-16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며 준비한 대화의 운을 뗐다.
"오늘은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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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수장님께 스파이크가 아니라 사상을 박고 싶어하는 미친 봇이 있다?
트포 탄메가
https://hygall.com/611671093
[Code: 4309]
2024.11.24 21:18
ㅇㅇ
제목 보고 헐레벌떡 달려왔어요 내 센세가 어나더를 가져왔어ㅜㅠㅠㅠㅠㅠㅠㅠㅠㅠ포인트 개많아서 이마 때리면서 읽음 나만을 위한, 나만의… 오로지 나만이 경배드릴 수 있는 그로…. <<개무서워 진짜.. 탄 이 미친 봇 생각하는 내용 하나하나가 진짜 광신도 그 자체라 읽으면서 감탄했다 너무 좋구요 너무 무섭구요... 디는 탄이 속으로 백 번 필터링하고 나온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극히 일부의 행동만 보고 내심 편하게 생각하는 것까지 너무 좋고 꼴리고 미치겠음ㅋㅋㅋㅋㅋㅋㅋ자기가 들여다보고 있는게 시커먼 심연이라는 것도 모르고....진짜 재밌다 탄의 수장님 메이커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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