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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1 00:35
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다. 거기다가 대숲에서는 제법 소리까지 일었다. 하기야 대숲에서 바람 소리가 일고 있는 것이 굳이 날씨 때문이랄 수는 없었다. 청명하고 볕 발이 고른 날에도 대숲에서는 늘 그렇게 소소한 바람이 술렁이었다.

그것은 사르락 사르락 댓잎을 갈며 들릴 듯 말 듯 사운거리다가도, 솨아 한쪽으로 몰리면서 물소리를 내기도 하고, 잔잔해졌는가 하면 푸른 잎의 날을 세워 우우우 누구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래서 울타리 삼아 뒤 안에 우거져 있는 대밭이나, 고샅에 저절로 커 오르는 시누대, 그리고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왕 댓잎의 대 바람 소리는 그저 언제나 물결처럼 이 대실을 적시고 있었다.

근년에는 이상하게, 대가 시름거리며 마르기도 하고, 예전처럼 죽순도 많이 나지 않아, 노인들 말로는 대숲이 허성해졌다고 하지만, 그러나 아직도 하늘을 가리며 무성한 대나무들은 쉰 자의 키로 기상을 굽히지 않은 채 저희들끼리 바람을 일구는 것이었다.

전에 누군가가 그 소리를 들으면서, 대는 속이 비어서 제 속에 바람을 지니고 사는 것이라, 그렇게 가만히 서 있어도 저절로 대숲에는 바람이 차기 마련이라고 말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이처럼 날씨마저 구름이 잡혀 있는데다가 잔바람이라도 이는 날에는 으레 물결 소리는 소리를 쏴아 내면서, 후두둑 비 쏟아지는 시늉을 대숲에 먼저 하는 것이었다.

대실의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 대숲에서 일고 있는 바람에 귀가 젖어 그 소리만으로도 날씨를 분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하고 있는 이야기와 몸짓까지라도 얼마든지 눈치 챌 수 있기도 하였다.

그저 저희끼리 손을 비비며 놀고 있는 자잘하고 맑은 소리, 강 건너 강골 이씨네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 이쪽 대실로 마실 나온 바람이 잠시 머무는 소리, 어디 먼 타지에서 물어와 그대로 지나가는 낯선 소리, 그러다가도 허리가 휘어질 만큼 성이 나서 잎사귀 낱낱의 푸른 날을 번뜩이며 몸을 솟구치는 소리, 그런가 하면 아무 뜻 없이 심심하여 제 이파리나 흔들어 보는 소리, 그리고 달도 없는 깊은 밤 제 몸 속의 적막을 퉁소 삼아 불어 내는 한숨 소리, 그 소리에 섞여 별의 무리가 우수수 대밭에 떨어지는 소리까지라도 얼마든지 들어 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도 그 대 바람 소리에 마음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명희최 혼파이어 첫 장면 너무 좋음..
몸 엄청 안좋았는데도 작가 본인이 생을 태워서 쓴다고 할 만큼 끝까지 집필한 것도 대단함
돌아가셔서 완결은 못내셨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