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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9 05:04
가루베와 '아마미야 료이치로'가 운영한다는 바는 정문 앞의 식당가에서도 꽤 목좋은 곳에 있었는데, 노부는 가 보지 않은 곳이었다. 바답게 실내는 꽤 어두웠는데 세련된 분위기의 인테리어가 눈에 띄었다. 그래서인지 학생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오늘따라 가루베가 혼자 일하고 있어서 가루베가 바빴기 때문에 케이와 노부는 바가 한가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감 시간이 돼서 손님들이 다 떠나고 난 뒤에야 가루베는 케이와 노부가 기다리고 있는 자리로 다가왔다.
"한동안 얼굴도 안 보여주더니, 웬 미남을 데려 왔어요?"
그때 가루베는 혁명단에서 고토와 함깨 가장 어린 나이로 막내였었다. 그때는 16세였는데 지금도 그렇다면 바텐더로 일해도 괜찮은 나이인가 싶은데, 이번 생에서는 처음 만나는 사이라 나이를 묻지는 못하고 그저 감사하다며 웃었다.
"마치다 형은 와인을 제일 좋아하면서 와인 바를 가지, 왜 여기를 들락거려요."
"난 다이가 만들어주는 칵테일이 제일 좋아."
"거짓말이라도 듣기는 좋네요."
케이는 계속 혹시 모를 사고 -노부가 사망할 수도 있는 사고- 를 신경쓰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은 특별히 무알코올로 마시겠다고 했고, 케이를 지켜야 하는 노부도 당연히 무알코올로 주문했다. 다른 손님이 없어서 가루베도 동석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자정이 다 돼 가는 시간에 문이 벌컥 열리고 아주 느끼한 목소리로 '다이'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게 누군지 알 것 같아서 찝찝한 마음으로 돌아보자, 아니나다를까 그때 그 시절에 늘 케이의 귀여움을 받았던 노부 천적의 등장이었다.
류세이는 모르는 얼굴인 노부를 보고 눈썹을 살짝 까딱했지만 곧 자연스럽게 들어와서 다이의 양쪽 뺨에 번갈아 입을 맞췄다.
"큐티, 잘 있었어?"
저 자식, 왜 저렇게 느끼해졌어? 노부가 어이가 없어서 바라보고 있자, 류세이는 케이의 뺨에도 얼굴을 가져다대려 했다. 어딜!
노부가 재빨리 일어나서 케이의 뺨 앞에 손을 가져다대며 막자, 류세이의 입술이 노부의 손등에 닿았다. 뭐야, 저 자식 진짜로 케이의 뺨에 입을 맞추려 한 거였어? 노부가 경악해서 류세이의 얼굴을 세게 밀어내자, 류세이는 비틀비틀 밀려나면서 피식 웃더니 케이를 내려다봤다.
"마치다, 한동안 안 온다 싶더니 기사님을 만들어왔네?"
노부가 케이를 거의 끌어안듯이 당겨서 앉고 케이의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치며 언제든 류세이를 막을 준비를 하고 류세이를 노려보자, 류세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는 바로 걸어가서 멋대로 위스키를 따서 온더락을 만들어왔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가루베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케이는 위스키 잔을 들고 허공 건배를 시도하는 류세이의 잔에 잔을 부딪쳐주는 시늉을 하고는 류세이를 장난스럽게 나무랐다.
"류세이, 노부 놀리지 마."
"기사님 이름이 노부야?"
"그래, 그러니까 놀리지 마."
케이는 장난처럼 말했지만 노부쪽으로 기대앉으며 류세이를 바라보는 케이의 눈빛이 엄한 게 옆에서도 너무 잘 보였다. 그때 그 시절에는 케이는 늘 류세이를 껴안고 노부를 놀리곤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케이가 그럴 수 있었던 건 무슨 일이 있어도 노부와 케이가 서로를 떠날 일은 없을 테고, 두 사람은 항상 서로와 함께일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지나치게 고통스러운 시련과 오해를 겪으며 결국 케이가 세상을 버렸고, 노부를 떠나지 않았던가.
그 기억이 상처가 돼서 가벼운 장난도 치지 못하게 된 걸 보니 속이 쓰렸지만, 케이를 끌어안고 류세이를 바라보는 노부의 표정은 그때의 류세이가 늘 그랬듯 의기양양했다. 케이가 이젠 가벼운 장난도 치지 못하는 게 속이 상해서 노부는 더 장난스럽게 굴었다. 우린 이번에야말로 절대로 헤어지지 않고 늘 서로 함께할 테니까. 케이는 노부의 마음을 느낀 건지 노부의 팔을 제 허리에 감고 노부에게 기대 앉은 채로 류세이를 의기양양하게 바라봤다.
그렇게 한 차례 하찮은 기싸움을 하고 난 후에야 케이는 본론을 꺼냈다.
"다이, 오늘 내내 료이치로가 전화를 안 받는데 무슨 일 생겼어?"
가루베는 미간을 찌푸리곤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도 모르겠어요. 어제 오후에 갑자기 쿠니시타 형이 와서 료이치로 형한테 교내에서 음주운전 차량으로 인한 사고가 일어났다고 했거든요. 스즈키?라는 사람을 치려고..."
가루베는 거기까지 말하고 갑자기 노부에게 시선을 확 돌렸다. 조금 전에 스즈키 노부유키라고 소개한 게 이제야 떠오른 모양이었다.
"어?"
케이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기 허리를 감고 있는 노부의 팔에 얹혔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케이는 노부의 팔을 꽉 잡은 채로 말을 이었다.
"맞아, 어제 노부가 차에 치일 뻔했어. 다행히 잘 피했지만."
가루베는 노부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아무튼 쿠니시타 형이 그런 말을 하니까 갑자기 료이치로 형이 나가봐야겠다면서 바를 제게 맡기고 나갔어요. 밤까지 계속 안 돌아와서 저도 계속 전화했는데 안 받던데."
"그래?"
거듭되는 환생이 고토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점은 일단 확실했다. 고토의 회고록에 그렇게 적혀 있었으니까.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이 일정치 않다거나 성격이나 인생 궤적이 달라지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나 계속 노부의 죽음을 유발하는 사건사고 등은 고토의 의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다. 고토가 의도적으로 케이의 기억을 지웠다거나, 노부가 계속 케이의 앞에서 죽도록 장치해 놨다는 건 그때 봤던 고토의 성격상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니까.
그리고 지금, 가루베가 말한 '사고가 일어나서 스즈키라는 사람이 치일 뻔했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나갔다는 걸 보면, 일단 고토가 사고를 일으키거나 하는 건 아니란 말이니, 노부는 케이 모르게 한숨을 삼키며 마음을 조금 놓고 케이를 끌어안았다. 고토가 정말 선의로 모두를 환생시키고 있는지, 이게 정말 고토가 하고 있는 일인지,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케이가 그렇게 아꼈던 소년이 케이를 상처입히는 건 원치 않았으니까.
"이치로랑 같이 나갔다고?"
케이는 노부에게 안긴 채로 폰을 꺼내서 톡톡 두드리더니 바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지 한참 기다리다가 끊으려고 할 때쯤, 케이를 바로 뒤에서 안고 있던 노부에게도 '달칵'하는 듯한 소리가 작게 들리고, '마치다'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치로. 어디야?"
전화기 너머의 이치로는 일을 하고 있다는 핑계를 댔던 것 같지만, 케이가 당장 료이치로를 만나야 하니까 료이치로를 불러달라고 했다. 이치로는 정말로 료이치로의 증발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건지, 아니면 핑계를 대 주는 건지 계속 모른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 사고가 우연이 아니었던 거 알아. 료이치로한테 물어볼 게 있어."
케이가 그렇게 말한 후였다. 전화기 너머에선 한참 아무 말도 없는지 케이가 잠깐 폰을 귀에서 떼서 여전히 통화 중인지 확인하고는 다시 이치로를 불렀다. 그러자 잠시 후에 이치로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케이가 '알았어'라고 하고 통화를 끝냈다.
"뭐래요?"
"지금 온대."
정말로 아마미야 료이치로가 고토 타다오미인지, 아니면 제3자인지 몰라서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정말로 고토라면 아마도 우리는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토가 아니라면?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마치 우리 중 하나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는데 그게 고토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지금의 이 알 수 없는 일들을 일으키고 있는 존재라는 걸 테고, 그 존재가 고토가 아니라면, 정말로 선의로 사람들을 계속 환생시키고 있는 게 아닐 수도 있으므로, 그건 더 심각한 문제라서 초조하게 입술을 씹고 있을 때였다.
"그 사고가 우연이 아니었다니, 무슨 사고?"
류세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연스럽게 물었지만, 케이를 바라보는 눈빛이 매서웠다. 옆에선 가루베도 의아한 얼굴로 케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어제 음주운전 사고 말하는 거예요? 그게 우연이 아니라뇨? 누가 사고를 사주했다는 거예요?"
"사주는 아니고..."
케이가 한숨을 내쉬자, 류세이는 빈 술잔에 얼음을 바꾸고 새로 위스키를 따라 온 다음 테이블에 팔을 올린 채 턱을 괴고 물었다.
"어제 너희 대학에서 일어난 사고를 낸 그 차에 가해자 말고 다른 사람도 있었던 거 알아?"
케이가 코타로에게 들었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류세이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모델 지망생이라서 나랑 같이 화보 찍은 적도 있는 사람이던데. 그 사고가 우연히 아니었다는 게 무슨 말이야?"
"친한 사람이야?"
"아니, 그냥 작업만 한 번 같이 한 거라 친한 건 아니고 얼굴이랑 이름만 아는 정도지, 뭐. 그래도 아는 사람이 사고를 당했는데 그 사고에 석연치 않은 사정이 있다니 찝찝하잖아."
"그건 료이치로가 와야 알 수 있어."
"마치다, 네가 아는 건 뭔데?"
예전에 류세이는 이렇지 않았다. 어딘가 위험한 분위기가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야말로 어딘가 쎄한 느낌이 있다 정도였지, 실제로 뭐 딱히 위협적인 행동을 하거나 한 적은 없었고, 케이를 상대로 날을 세운 적은 전혀 없었다. 그때의 류세이는 케이를 정말로 좋아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묘하게 케이를 몰아붙이고 있는 게 낯설고, 그런 류세이가 케이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노부는 테이블을 톡톡 치며 류세이의 시선을 돌렸다.
"야오토메 상. 케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마미야 료이치로가 와야 알 수 있다고요. 할 말이 없다는데 왜 다그칩니까?"
그때 케이는 황족이라는 신분의 특성상 성을 사용하지 않고 이름만 썼고 다른 친구들도 전부 이름으로 불렀다. 다른 친구들도 케이는 전부 케이타라고 불렀었고.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케이는 그때의 기억이 있기 때문인지 지금은 그다지 친하지 않다는 쿠니시타나 아몬도 여전히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노부가 만난 사람 중 미야무라 외에 케이를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쿠로사와나 아몬, 가루베가 마치다라고 부를 때는 괜찮았는데 류세이가 부르는 마치다는 그렇게 거슬릴 수가 없었다. 지금은 케이와 류세이의 관계가 어떤지 몰라도 그때 케이가 류세이를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알아서. 지금의 류세이가 그때의 케이의 마음을 짓밟는 것 같아서 열이 올랐다. 케이가 마치다에게 장난처럼 뺨에 입을 맞추려고 했을 때보다 지금이 더 화가 났다. 그때를 기억하지 못하고 그때와는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혼자서 계속 그 시절의 기억을 간직한 채 몇 번이나 환생하면서 케이는 얼마나 외롭고 서글펐을까 생각하니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아서. 딱히 류세이의 탓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화가 치솟았다.
노부가 살벌한 분위기를 뿜어내자,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위스키를 몇 모금 마신 류세이는 잔을 내려놓고 양 손을 들어보였다. 항복이라는 것처럼.
"마치다, 미안해. 아는 사람 이야기라서 조금 예민했어."
"아니야, 그럴 만하지. 그런데 지금은 정말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나도 어떻게 된 건지 잘 몰라서. 있다가 료이치로가 오면 상황을 좀 알아보자."
역시 케이는 류세이의 공격적인 태도에 속이 상했는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죄도 없이 그저 사이에 끼어 있기만 했던 가루베가 열심히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했지만, 한 번 충돌했던 분위기는 쉬 풀어지지 않았고 네 사람이 어색한 분위기에서 아마미야 료이치로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얼마 후 문이 열리고 노부가 익히 아는 얼굴의 두 사람이 들어왔다.
"아, 이치로. 료이치로."
케이는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맞이했지만.
노부는 기억 속 16살일 때의 얼굴보다 몇 살은 더 먹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노부가 절대로 잊거나, 착각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들어오는 '료이치로'를 보고 본능적으로 케이를 꽉 끌어안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토 타다오미."
그리고 '료이치로'가 어딘가 찔리는 표정이면서도 동시에 묘하게 차라리 잘됐다는 듯 후련한 표정으로
"오랜만이에요, 노부유키 형"
이라고 말했을 때.
노부의 품 안에 있는 케이가 머리를 감싸쥐면서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성혁망사놉맟환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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