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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7 14:43
5층은 1인실이 모여있는 층이다. 508호에 입원해 있는 마치다 케이타라는 환자는 자신의 주치의인 스즈키 노부유키를 짝사랑 중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사실 만큼 소문이 퍼졌다. 차트를 들고 복도를 지날 때면 병실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뒷모습을 훔쳐 보기도 하고, 의사 가운 주머니 안에 몰래 초콜릿을 넣기도 했다. 이런 잔망스런 행동들을 노부 역시 알고 있다. 508호 환자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건 이 병동에서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귀엽다고 생각하지만 환자와 사귀는 건 부적절하기 때문에 애써 모르는 척을 하는 중이다. 만약 퇴원을 해 더이상 이 병원 환자가 아니게 되면 그땐 사귀어볼 수도 있다.
"오늘 컨디션은 어때요?"
"배가 아파요. 새벽부터 땀도 많이 나고..."
"그래요? 어디 볼까요?"
"......"
"이렇게 누르면 아파요?"
"아뇨... 거기 보다 아래요..."
"여기요? 아파요?"
"조금요..."
약 처방은 더 늘일 필요 없다. 보통 그냥 기분탓일 확률이 높으니까. 대충 맞장구 쳐주며 공감하는 척 하면 열에 아홉은 그 증상이 씻은듯 사라진다. 그러나 마치다는 자신의 주치의가 새로운 약을 넣어줬다고 착각한다. 어제는 보라색 약이었는데 오늘은 분홍색 약이라고, 역시 선생님은 내 말을 잘 들어주신다고 말이다. 사실 어제도 오늘도 약은 늘 흰색이지만 마치다가 그때그때 다르게 받아들일 뿐이다. 망상과 강박 증상이 심한 환자는 다루기 어렵기도, 쉽기도 하다. 노부는 망상 증상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508호 환자를 돌보는 게 수월하다.
"내일부터 일주일 동안은 제가 없어요. 다른 선생님이 봐주실 거예요."
"어디 가세요?"
"세미나가 있어요. 그럼 일주일 뒤에 만나요. 혹시 뭐 갖고 싶은 거 없어요?"
"전... 전 곰돌이요! 분홍색 곰돌이."
"그래요. 있으면 구해올게요."
노부가 없는 일주일 동안 마치다는 굉장히 우울했다. 다른 의사가 컨디션을 물어보면 엉망이라고만 답했다. 밥도 안 먹고 약도 침대 밑에 숨겼다. 노부가 아닌 다른 의사의 말은 잘 들을 필요가 없다. 모두 차갑고 형식적인 표정을 지을 뿐이고 가짜로 반응할 뿐이니까. 진심으로 교감해주는 사람은 스즈키 노부유키 단 한 명이다. 적어도 마치다는 그렇게 생각했다.
일주일 뒤 다시 모습을 드러낸 노부는 의사 가운 주머니에서 작은 비닐을 꺼내 보였다. 하리보 젤리였다. 뜯어진 봉투 안엔 분홍색 젤리만 잔뜩 담겨 있었다.
"자, 말했던 분홍색 곰돌이에요."
"와...! 정말이네요! 고마워요!"
마치다는 젤리 하나를 꺼내 입에 쏙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달콤하고 탱글탱글했다. 간호사가 급하게 뛰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스즈키상? 여기 계시면 안 된다니까요."
"네네. 지금 가요. 4층이죠?"
"예, 4층 회진 돌 시간이에요."
"마치다상, 이따 다시 올게요."
노부는 간호사를 따라 4층으로 내려갔다. 401호로 들어가 먼저 환자들을 살핀다. 언제나 그렇듯 아무도 그에게 집중하지 않지만 괜찮다.
"TV 안 보이니까 꺼져."
"자꾸 나쁜 말 하시면 TV 시청 금지합니다."
"네가 뭔데! 진짜 지가 의사인 줄 알아!"
"주사 놓을 거예요."
"너나 맞아!"
소란에 또 다시 등장한 간호사는 노부를 조심스럽게 복도로 불러낸다.
"다른 환자분들이랑 자꾸 싸우면 지난주처럼 격리예요. 이제 안 싸운다고 하셨잖아요."
"하지만... 저놈이 자꾸 내가 의사가 아니라잖아요."
"그건... 스즈키상이 진짜 의사가 아니니까요. 오늘 아침에도 약 안 드셨죠?"
"......"
"3시에 명상 치료 잡혀있으니까 점심엔 꼭 약 드세요."
간호사가 굳이 그를 현실로 데리고 온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에 실망감이 가득하다. 노부는 물 속에 잠겨 푹 젖은 자기 모습을 보고 있다. 실제로는 전혀 젖지 않았지만.
"508호 환자도 오나요?"
"마치다상은 오늘 치료 없어요. 대신 이따 저녁에 같이 산책할 수 있게 해드릴게요. 그리고 간호사 전용 탕비실에서 젤리 잔뜩 가져간 거 스즈키상이죠? 마음대로 출입하면 안 돼요."
"분홍색 곰돌이만 모아야 해서..."
"앞으론 들어가지 마세요. 알겠죠?"
"네..."
노부는 마치다보다 6개월이나 먼저 입원해 있던 환자다. 한 층 위에 입원한 마치다를 면회실 테라스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첫눈에 반해버렸다.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마치다가 오기 전부터 노부는 늘 의사 행세를 하고 다녔으니까. 흰 가운 안에 대놓고 보이는 환자복을 마치다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다른 환자들과 싸움이 붙어 일주일동안 격리가 되면서도 꼬박꼬박 탕비실에 침입해 하리보 젤리를 훔쳤다. 마치다에게 분홍색 곰돌이만 모아서 주려고. 마치다가 자신을 짝사랑하는 걸 안다. 그리고 노부는 그 짝사랑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의사 역할에만 몰두할 수 있을 뿐, 진심으로 다가가 마음을 교감하는 방법은 모른다. 마치다에게 노부는 늘 멋진 주치의이며, 노부에게 마치다는 나를 좋아하는 귀여운 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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