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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3 20:56
새벽까지 이어진 연회를 마치고 두 사람은 목욕을 끝내자마자 기절하듯 누워 잠에 빠졌었다. 덜 마른 머리카락은 안중에도 없을 만큼 피곤했다. 너무 오랜만에 춤을 춰서 그런 건가? 하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기억이 없었다. 단잠에 빠져들어서 아직 어둠이 내려앉은 시각이었지만 가까이서 쿵- 하고 울리는 소리에 아에곤의 눈이 번쩍 떠졌다. 커다란 소리는 아니었지만 무언가 떨어지는 울림이었다. 벌떡 일어나서 머리맡에 놓인 단검을 더듬거리며 찾는데 문득 옆자리가 비워진 게 느껴졌다. 설마, 하는 마음에 침대 끝 쪽으로 다가갔다.
“..자캐리스?”
인기척이 들려왔다. 맥이 탁 풀린 아에곤이, 놀라서 확 달아난 잠기운에 조금 짜증 섞인 기색으로 물었다.
“밤중에 뭐 하는 거야?”
“... 나 때문에 깼어요? 미안해. 내려오다가 헛디뎌서...”
침대에서 굴러떨어진 게 꼭 애 같다고, 평소 같으면 질릴 때까지 놀려 먹었겠지만 지금은 새벽이었다. 아에곤은 놀릴 기운도 없어서 하품을 하면서 눈을 비볐다.
“근데.. 이 시간에 어딜 가려고?”
“별건 아니고...”
차츰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그의 실루엣을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자캐리스는 여전히 바닥에 넘어진 상태로 아에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킨 모양새가 이상해서 아에곤은 바로 옆 테이블에 놓인 꺼진 촛불에 불을 붙였다.
“너 왜 그래?”
작은 촛불에 일렁이는 창백한 안색과 불편해 보이는 몸짓이 딱 봐도 상태가 별로였다. 아에곤은 침대에서 내려와 그를 일으켜 세웠다. 비틀거리며 완전히 일어선 자캐리스는 의아한 얼굴인 아에곤에게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다리가 좀 아파서...”
막 잠에서 깬 터라,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듣지 못한 아에곤은 잠시 눈을 꿈벅 데다가 몇 초 뒤에 나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약 먹으려고 일어난 거야?”
“응. 무시하고 자려고 했는데 잘 안돼서."
아에곤과 달리 자캐리스의 졸음기가 남은 얼굴은 멍해보였다. 혹시나 싶어 그때처럼 열이 있나 이마를 짚었으나 다행히 아니었다.
“기다려, 내가 찾을 테니까.”
조심히 침대에 앉히고 움직였다. 언제든 꺼낼 수 있게 가까운 서랍에 넣어놨기에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말없이 건네는 약을 보던 자캐리스는 묵묵히 약을 삼키고 다시 자리에 누우려고 몸을 움직였으나 잘 듣지 않는 듯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다리 어디가 아픈데?”
자캐리스는 손가락으로 허벅지와 무릎을 가리켰다. 아에곤은 망설임 없이 손을 갖다 대고 힘을 가해 주무르기 시작했다. 놀라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리며 손목을 잡아챘다.
“가만히 누워.”
오히려 손목을 털어내고 밀치듯이 눕혀버리자, 자캐리스는 오갈 곳 없는 손을 허공에 휘적거리다 아에곤의 어깨를 꾹 잡았다. 경직된 근육을 힘주고 누를 때마다 간간이 억눌린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그냥 둬요, 내가 하면 돼."
“그냥 얌전히 있어줄래? 빨리 다시 자고 싶다.”
그제야 입을 꾹 다물고 조용해졌다. 계속 움찔대는 걸 보니 여전히 아픈 모양인데도 손등으로 틀어막은 입에선 희미한 신음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늘 이랬어?”
조용한 적막을 깨고 들려오는 질문에 자캐리스는 잠시 잇새로 아픔을 삼키며 대답했다.
“러트..가 끝나면 일주일 정도는 약 먹고 잤어요.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나아진,”
“그 소리 지겹다.”
심기 불편한 목소리에 자캐리스는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점차 근육의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지면서 몸이 나른해졌다. 효과가 빠른 약은 눈꺼풀을 느리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넌 러트도 4일에서 6일 정도 고생했는데 끝나고 나서도 하루는 방 밖으로도 못 나갔고 그 뒤에도 일주일 동안 이 난리였다는 거군. 그걸 몇 달에 한 번씩....”
간단하게 정리한 말투는 점점 끝으로 갈수록 힘이 실렸다. 문제는 손끝에도 힘이 실렸다는 것이었다. 콱, 허벅지를 움켜진 손에 놀라 느리게 감겼던 눈꺼풀이 다시 떠졌다. 촛불에 일렁이는 아에곤의 모습이 폭풍전야처럼 고요했다.
"너네 엄마는 진짜......”
나쁜...
그 말은 차마 못 내뱉고 삼켰다. 아무리 아에곤이라도 자식 앞에서 엄마를 향한 그 욕은 내뱉기가 꺼려졌다.
“힘들다고 말해본 적 있어?”
“뭘...?”
“뭐긴 뭐야, 지금 말한 것들 말이야. 억제제만 잘-”
“견딜 수 있어.”
아에곤은 다리에서 손을 거두고 자캐리스를 내려다봤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난 괜찮아, 끄떡없어요. 어머니도 그걸 아시고...... 그러니까 난 괜찮아.”
아마 밝은 빛 아래서 아에곤의 얼굴을 봤다면, 자캐리스는 말을 멈췄을 것이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가 질려버린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걸 알았다면.
“... 알았다.”
“아에곤,”
“그만 자자, 피곤해.”
“화났어요?”
“아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아에곤은 몸을 반대로 돌려 등지고 누웠다. 어깨 끝까지 이불을 끌어올리고 눈을 감자 등 뒤로 붙는 체온이 느껴졌다.
“내가 뭔가.. 잘못했어?”
“아니. 얼른 자.”
“아에곤...”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캐리스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지만, 허리를 안고 꼭 붙인 몸은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았다. 그 압박감이 마치 두 사람을 조여오는 거 같아서, 둘 다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걸 시종들이 모를 리 없었다. 그들은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공기가 달라진 걸 알고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느릿하게 옷을 갈아입고 아이들과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방을 향하는 내내 두 사람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일어나자마자 자캐리스가 눈꺼풀에 키스하며 잘 잤냐며 인사했지만 아에곤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몸은 좀 괜찮냐는, 그런 말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아에곤은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고 눈길도 주지 않았다. 화도 안 났고 잘못도 안 했다고 했는데, 그의 행동은 모든 게 반대여서 자캐리스는 숨죽이고 눈치를 봐야 했다. 뭔가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어도 그게 뭔지 몰랐다. 하지만, 해결 못한 문제에 대한 생각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들리는 소음에 저절로 사라졌다.
“미워!!”
토라진 음성으로 재해리스에게 토끼 인형을 던진 재해이라를 보고 두 사람은 고개를 갸웃했다. 재해리스는 어깨에 맞고 떨어진 인형을 다시 주워들고 머쓱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가 아에곤을 발견하고 슬쩍 눈길을 피했다. 필시 저건 사고 친 표정이었다.
“우리 공주님 아침부터 왜 이렇게 화났어?”
일단 나긋한 목소리로 달래주려 했지만 이미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재해이라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았다. 재해리스는 점점 더 거리를 벌리며 은근슬쩍 자캐리스 뒤로 반쯤 몸을 숨겼다.
“나만 빼놓고 셋이서 재밌게 노는 게 어딨어..!”
이런. 아에곤은 재해리스에게 입단속 시킨다는 것을 까먹은 게 생각났다. 곁눈질로 아들을 바라보자, 재해리스는 다시 눈길을 피했다. 아마 자기도 말해놓고 아차 싶었는지 알아서 몸을 사리는 게 눈치는 아주 빨랐다. 누구 아들인지 참.
“다 미워...”
네가 어제 일찍 자러 갔잖아,라는 말 따위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에곤은 안아서 달래주다가 결국 눈물까지 보이며 쉽게 그치지 않을 기세에 한숨을 삼켰다. 자캐리스는 작은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며 사과했다.
“미안해. 다음에는 꼭 같이 춤추고 재밌게 놀자.”
“다 미워...”
밉다는 말만 계속 반복하면서 아에곤의 목을 끌어안고 눈물을 쏟았다. 자캐리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재래이라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며 말했다.
“오늘은 뭐든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같이 하자. 어때?”
훌쩍거리던 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눈물 젖은 얼굴이 빼꼼 드러났다.
“뭐든...?”
그러면서도 힐끔- 아에곤을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의구심을 품고 있어서, 아에곤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래, 오늘은 우리 공주님 하고 싶은 거 하자.”
잘 토라지지 않는 재해이라가 한번 토라지면 끝을 보는 성격인 걸 알아서 아에곤은 쉽게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연회도 끝났으니 오늘 적당히 좀 쉬려고 했는데, 산산이 부서진 계획에 다시 한숨을 삼켰다.
*
재해이라가 원한 것은 다름 아닌 레드킵 내부의 화원 산책이었다. 헬라에나가 살아생전에 아이들은 데리고 자주 갔던 곳이기도 해서 아에곤은 바로 수긍했다. 지금은 추운 날씨라 꽃들이 만개하지 않았지만 작은 온실 화원이 있었고, 재해이라는 그 바로 옆의 연못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었다. 날씨가 제법 추웠기에 옷을 껴 입히고 넷이서 나란히 밖으로 나섰다.
“어차피 내가 있을 거니까 넌 배웅하러 가도 돼."
원래라면 지금 자캐리스는 가족들을 배웅하러 갔을 시간이었다. 그의 가족들은 연회가 끝나고 다음날 바로 드래곤스톤으로 돌아가기로 했었다. 자캐리스도 이곳에서 신혼 생활을 보내고 있었지만 거의 낮 동안의 대부분의 시간은 드래곤스톤에서 보냈었다. 자캐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 어제 충분히 인사했어.”
“너무 소홀히 대하는 거 아냐?”
“뭐를?”
“네 가족들 말이야.”
어제 동생들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아에곤은 자꾸 뭔가 맘속에서 걸렸다. 같이 라이딩 했던 날 느꼈던 기시감. 자캐리스는 가던 길을 멈췄다. 유모와 함께 앞서 걸어가는 아이들은 빠른 걸음으로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네가 너무 우리만 신경 쓰니,”
“당신은 내 가족 아니야?”
“뭐?”
“내가 내 가족 먼저 챙기는 게 잘못됐어요? 내 외가, 친가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이제는 우리 넷이 한 가족이야. 자꾸 ‘네 가족들’이라고 하지 마.”
순 억지 같았다. 자캐리스는 그걸 알고 있었다. 아에곤이 말하는 게 무슨 뜻인 알면서도 ‘네 가족들’이라는 말이 자꾸만 마음 한편을 불안하게 건드렸다. 걱정해 주는 거 같으면서도 마치,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 가족 안에 들어올 수는 없으니까 네 가족들한테 가라고 등 떠미는 것 같았다. 아에곤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마주하며 물었다.
“너... 가족들하고 아무 문제 없는 거 맞아?”
예상치 못한 말에 자캐리스는 멈칫했다. 아에곤이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어서 가자는 재해이라의 목소리에 자캐리스가 뛰어가듯 먼저 가버려서 할 수 없었다. 하는 수없이 따라붙으며 이따가 얘기해야겠다, 싶었는데 우두커니 멈춰 선 자캐리스를 보고 따라 멈춰 섰다.
“아.”
아에곤은 익숙한 은발과 쌍둥이들 또래의 아이들을 보고 누군지 단박에 떠올렸다. 연못에는 먼저 와 있던 손님들은, 자캐리스의 이부동생들이었다. 아에곤과 비세리스. 아에곤과 똑같은 이름을 지닌 조카는 아직도 어색했다. 라에니라는 없었고 유모 둘과 함께 연못을 구경하고 있었다. 레드킵을 떠나기 전에 잠깐 나온듯했다. 쌍둥이들은 사촌 형제들에게 반갑게 다가가 인사하고 있었다. 그러다 자신들의 큰형을 발견한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
*
이부동생들에게 붙잡힌 자캐리스는 한 팔에 재해리스를 매달고 잠시 시간을 내줘야 했고, 아에곤은 온실 화원에 들어가자는 재해이라를 따라서 화원으로 들어가야 했다. 재해이라에게 붙잡혀 가는 와중에도 아에곤은 뒤돌아 자캐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치 뭔가 중요하게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자캐리스도 그걸 느꼈으나 두 명이서 동시에 말을 하는 통에 금세 정신이 없어져서 잊었다.
“어- 내 인형..!”
재해리스의 다급한 음성에 자캐리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살얼음이 얼어붙은 연못 위로 말 모양의 목각인형이 떨어져 있었다. 비세리스가 관심을 보이며 잠시 가져갔던 목각인형을 떨군듯싶었다. 재해리스는 몸을 숙여 주우려고 했으나 팔이 짧아 닿지 않았다. 자캐리스는 자신에게 안긴 비세리스를 유모에게 다시 건네주며 재해리스를 붙잡았다.
“그러다 떨어지면 큰일 나. 여긴 생각보다 깊어.”
“저거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건데..!”
울상인 재해리스를 보고 자캐리스는 빙긋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알지. 물러나, 내가 주워줄게.”
아에곤이 만들어준 장난감을 쌍둥이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었다. 자캐리스는 한쪽 무릎을 꿇고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 힘껏 팔을 뻗었다. 조금만 더 뻗으면 닿을 거리라 몸을 숙이고 손끝을 좀 더 뻗는 순간, 찌릿한 통증이 무릎을 타고 올라와서 휘청거렸다. 그 이후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다.
“왕자님-!!!”
얼음이 깨지는 파열음과 함께 유모의 비명소리가 연못에 울려 퍼졌다. 첨벙, 소리와 함께 연못 밑으로 떨어진 자캐리스를 보고 아이들도 놀라 울음을 터트리며 이름을 불러댔다. 왕자들을 안고 있는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건 큰소리로 도움을 요청하며 누군가를 부르러 뛰어가는 것뿐이었다.
찌릿한 통증에 다리에 힘이 빠진다고 생각이 든 순간,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고 막을 수 없었다. 칼날 같은 얼음이 온몸을 때리며 수면 아래로 잠기는 순간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이 버거웠다. 젖은 옷이 무겁게 그의 몸을 밑으로 끌어내리는 것만 같았다. 여긴 생각보다 깊어. 방금 재해리스에게 자신이 하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크지 않은 연못이었지만, 깊이는 성인 남자도 발이 닿지 않을 만큼 깊은 곳이었다.
부친에게 배웠던 수영실력은 형제들 중에 단연 으뜸이었던 자캐리스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처음으로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무릎에서 시작된 통증 때문에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죽을힘을 다해 손을 위로 뻗었다. 간신히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막힌 숨을 내뱉었다. 혼자 남겨져 우는 재해리스가 보였다. 엉엉 울면서 손을 뻗는 아이에게, 괜찮으니 겁먹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금세 힘이 빠져서 다시 주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연못의 물이 숨구멍을 통해 폐로 가득 찰 것만 같았다.
아에곤.
더 이상 버둥거릴 기력이 없어서 눈이 감기고 온몸에 힘이 빠졌을 때, 자캐리스가 생각할 수 있었던 건 그 이름뿐이었다.
환장힐링
원앤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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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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