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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9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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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곧 평온을 되찾았다. 그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피어올랐다. 마치 모든 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아니 어쩌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옷자락의 먼지를 털 듯 허공을 가로질러 가슴께 올려진 검을 튕겼다. 그 동작에는 과장됨이 없었고, 손끝이 멈추는 순간에는 마치 흘러가는 물길을 다스리는 듯 자연스러운 흐름이 느껴졌다.

 

"성급하시군요. 몸 상태로 보아 검을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의원의 목소리는 나른하게 흘러내렸다. 담담한 어조에는 조롱도 위협도 없었으나, 담백함이 오히려 강만음의 속을 긁었다.

 

……입 다물어라.”

 

강만음은 힘을 주어 말하였다. 검에 살기는 날을 바짝 세운 것처럼 예리했다. 그러나, 어깨에 담긴 힘은 도망칠 곳이 없이 짐승과 대치할 때와 비슷하여 검은 세차게 흔들렸다.

 

그런 말을 듣는 것도 오랜만이군요.”

 

의원이 천천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눈동자가 반쯤 감긴 채로 강만음을 바라보던 눈빛에는 은근한 흥미가 담겨 있었다. 게다가 당혹감은 커녕 오히려 감정을 시험하는 장난스러움이 표정에 묻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네놈은 누구냐.”

 

강만음이 다시 뱉어낸 목소리에는 묵직한 분노와 경계가 담겨 있었다. 가슴께를 짓누르던 검에 미약하지만, 영력이 실렸다. 그럼에도 의원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종주님은 의외로 정이 많으신 분이군요.

 

의원이 눈을 반쯤 감고 피식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가벼운 듯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것보단 종주님께서 중독된 독의 해독은 수진계에 있는 의원 중에서도 가능한 자가 거의 없을 겁니다.”

같잖은 속세의 독에 쓰러질 일은 없다.”

과연, 그 몸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의원의 목소리는 유독 낮게 깔렸다. 깊은 곳에서 울리는 소리 같았다.

 

정말로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독은 단순히 몸에 스며드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이 음과 양의 흐름을 교란할 때는 더욱 치명적이지요.”

 

강만음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

의원이니까요.”
 

단호한 답이 짧게 흘러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이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나직이 덧붙였다.

 

"수진계에 그 독을 풀어낼 수 있는 의원이 몇이나 될 것 같습니까?“

"그래서, 네놈이 그중 하나라는 거냐?“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당당하게 굴 이유가 없겠지요.“

 

말끝에 담긴 미묘한 여유가 강만음의 신경을 긁었다. 의원의 의중이 뭔지도 모르겠고, 대뜸 자신의 의술을 과시하는 태도도 탐탁지 않았다. 한두 마디면 충분할 말을 굳이 빙빙 돌려 말하는 수작이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신뢰할 수 없는 자를 믿어야만 하는 제 처지가 가장 불편했다. 강만음의 표정에는 경계와 불쾌함이 서려 있었다.

 

", 그럼 내가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느냐? 네놈의 혀끝 하나로 내 안위를 걱정한다는 게 우습구나.“

"우습습니까? 그 우스운 일이 지금 종주님의 목숨을 붙들고 있습니다."


강만음의 시선과 의원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히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의원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으며 눈빛에는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이 단호함과 함께 묘한 아집이 서려 있었다.

 

"독에 찌든 몸으로 종주 자리를 지킬 수는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잘 아실 텐데요."

 

강만음의 손이 움찔하며 떨렸다. 그녀는 알 수 없는 독이 몸에 퍼져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의원의 말 속에 숨은 또 다른 의미, 마치 독뿐만이 아니라 더 큰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기색이 느껴졌다. 하지만 강만음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약점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네놈, 목적이 뭐냐.”

 

강만음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다. 숨을 고르는 듯 천천히 숨을 내쉬었지만, 가슴이 오르내리는 폭이 유난히 컸다. 더 이상의 언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자의 대답이 들리는 순간, 이곳을 떠나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았다.

 

제 목적이라

 

의원은 천천히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한 그 눈빛에는 오래된 그리움과 깊은 슬픔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다시 웃었다. 허나, 웃음은 조금 전의 나른한 웃음과는 전혀 다른 결이었다.

 

그건, 저도 궁금합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답변에 강만음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 순간, 손끝의 감각이 무뎌졌고, 검을 쥔 손에 힘이 풀리며 몸이 크게 휘청였다. 독의 기운이 퍼진 것이다.

 

……젠장.”

 

강만음의 숨이 거칠어졌다. 힘이 풀린 손에서 검이 뚝 떨어져 바닥에 닿았다. 쟁그랑, 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녀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땀과 피로 젖은 이마가 차가운 바닥에 닿았다.

 

조급해 마세요.”

 

의원은 무릎을 굽히며 천천히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허우적거리면 물에 가라앉히는 법이니, 잠시 흘러가는 게 좋을 때도 있습니다.”

 

강만음의 눈에 살짝 물기가 서렸다. 하필, 그 순간에도 웃는 자를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견딜 수 없었다. 눈매에 물기를 서리고 부들거리는 강만음을 바라보는 의원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쳤으나 곧 미묘한 감정이 덧씌워졌다. 그는 자신의 소매 끝으로 그녀의 얼굴을 조용히 닦아내었다. 그 손길에는 연민이 없었으며 마치 바람이 지나가듯 가볍고도 서늘했다.

 

또다시 침상에서 정신을 차린 강만음은 천장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감각이 뚜렷했다. 침상에 눌린 등, 땀이 식어 들러붙은 옷자락, 맥박처럼 뛸 듯한 머릿속의 혼란. 지독한 피로가 그녀의 사지를 짓눌렀다.

 

또다시 이 꼴이군.’

 

자신에게 내뱉는 듯한 자조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스스로도 지긋지긋한 반복이었다. 달려나가던 자신이 이곳에 다시 누워 있다는 현실이 기막혔다. 손가락 끝을 움직여보았다. 미세한 떨림이 감지되었고, 한동안 굳어있던 손끝의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곁에서 탕약의 은은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의원이 앉아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느슨하게 흘러내린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피로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손에는 막 달야온 것인지 연기가 나는 탕약이 들려 있었고, 눈동자는 강만음을 고요히 바라보고 있었다. 강만음은 짧게 숨을 내쉬고 날카롭게 물었다.

 

이름이 뭐냐.”

 

목소리는 낮고 매서웠다. 의원은 입을 닫은 채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시선이 흐릿하게 어딘가를 향하다가, 그의 눈동자가 다시 강만음을 바라보았다.

 

담(潭)이라 부르십시오.”

“담? 

 

강만음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이름이라고 할 가치도 없었다. 제가 짓는 개 이름도 이보다는 날 것이었다.

 

깊은 물웅덩이라니 가명을 지어낼 셈인가.”

 

그녀의 목소리가 비웃음으로 바뀌었다.

 

물길이란 본디 흐르기 마련이지요. 강물과 연못은 스치듯 닿기도 하고, 때로는 멀어지기도 하지 않습니까.

어디서 개소리냐. 그런 이름을 가진 자는 들은 적이 없다.”

 

강만음은 단호히 말했다. 담은 어깨를 으쓱였다. 마치 알아서 하시라는 듯하였다.

 

이름은 원래 존재보다 앞서는 법입니다. 사람이 불러주는 그 순간, 의미가 부여되지요.”

장난칠 생각하지 마라. 똑바로 대답해라. 네놈, 대체 무슨 꿍꿍이냐.”

 

담은 퍼석 하고 웃음을 흘렸다. 눈동자엔 얕은 파문처럼 은근한 흥미가 어렸다. 당혹도, 긴장도 보이지 않는 태도였다. 오히려 그의 눈길은 강만음을 향하면서도 어딘가 비껴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그녀의 분노를 당연하게 여기는 듯, 기척조차 가볍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럼, 천천히 운몽으로 떠날까요?”

 

강만음은 눈썹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누가 너랑 간다고 하였지?”

고집부리지 마시지요.”

?”

쓸데없는 언쟁으로 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강만음이 어이없어하는 사이, 담은 강만음의 짐을 슬쩍 짊어졌다. 보따리를 정리하던 중, 그의 손에 하나의 물건이 걸렸다. 차가운 광택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드러났다.

 

호쇄옥.”

 

담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그것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가지고 계시지요. 기력을 차리시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강만음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의 시선이 호쇄옥에 가 닿자, 얼굴에 감춰둔 경계심이 다시 드러났다. 손을 뻗어 호쇄옥을 거칠 게 받아들였다.

 

이게 어떤 법기인지 네 놈이 어떻게 아는 것이냐.”

 

강만음은 똑바로 그를 바라보며 따져 물었다. 담은 미소를 거두고, 손끝으로 보따리의 주름을 펴며 담담히 대꾸했다.

 

호쇄옥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계십니까?”

 

강만음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

 

담의 눈매가 서늘하게 가늘어졌다. 이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고소의 종주 택무군의 것입니다.”

 

강만음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이름이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지는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가 강하게 스쳐갔다.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의심과 경계의 빛이 더욱 짙어졌다. 손에 쥔 호쇄옥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택무군의 법기가 어째서 여기에...’

 

강만음의 머릿속에 수많은 단서들이 얽혀 들었다. 담은 여전히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고요했으나 그 고요함이 마치 깊은 연못과 같았다. 겉으로는 잔잔하지만, 그 깊은 밑바닥에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꿈틀대고 있었다.

 

어찌하여 이게 네 손에 있던 거냐.”

 

강만음의 목소리가 낮고 서늘해졌다. 담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숙여 강만음을 바라보았다.

 

그보다 더 흥미로운 질문이 있지 않습니까, 종주님.”

?”

 

강만음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담은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눈동자는 마치 고요한 호수의 표면과도 같았다.

 

그 호쇄옥이 왜 당신 곁에 있었을까요?”

 

**

 

강만음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손에 쥔 호쇄옥을 다시 바라보았다. 차가운 법기의 표면에 희미한 빛이 감돌았다. 마치 무언가 말을 건네는 것처럼 보였다. 불현듯 강만음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강만음는 담이 들고 있던 보따리를 거칠게 낚아채 매듭을 풀었다. 보따리를 열자 안에 들어 있던 옷이 드러났다. 강만음의 손이 멈췄다. 그녀의 손끝이 천천히 옷자락을 쓸어내렸다. 맑은 흰 바탕에 고상한 권운무늬 자수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소매 끝의 단이 유독 고급스러웠다. 그리고 이리 단단하고 견고한 직물은 수사가 아니라, 고위 인물의 의복에 쓰이는 것이었다.

 

이 옷이

 

강만음의 입에서 새어나온 말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담을 향했다. 그러나 그 순간, 담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빛이 어둠에 스며들 듯, 그의 얼굴이 그림자 속에 감춰져 있었다.

 

그 옷의 주인은 누구였을까요, 종주님?”

 

담의 목소리가 고요히 울려퍼졌다. 그 말에 강만음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무엇인가 놓치고 있다는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심장은 알 수 없는 압박감으로 옥죄어 왔다.

 

절에 있던 그 인물설마

 

한순간 모든 기억의 조각이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 자가... 택무군이었단 말인가?’

 

강만음의 입술이 단단히 다물어졌다. 머릿속이 서서히 얼어붙는 듯했다. 그렇지만 절에 있던 자가 남희신이었다면, 그와 마주친 자신이 어찌 무사할 수 있었단 말인가. 남희신이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알아보았기에, 그녀를 보내준 것일지도 모른다. 전신에 긴장감이 퍼져 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흔들렸다. 그동안 지켜왔던 비밀이라는 방벽이 한순간에 무너질 것만 같았다. 운몽의 강만음이 아닌, 다른 이름과 성별로 살아가는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은 단 한 번도 들킨 적이 없었으며 절대 발각되면 안 되는 비밀이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부정으로 간주될 터였다. 더는 이라고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당장 떠나야 했으나 강만음의 눈동자가 깊은 고민에 잠겨 뚜렷했던 시선은 흐려졌고, 갈등이 서렸다. 옆에서 알짱거리는 이자를 데리고 갈 것인가, 아니면 홀로 길을 떠날 것인가. 한참을 입술을 깨물며 고심하던 강만음은 결단을 내린 듯 눈을 들어 담을 바라보았다.

 

너 혼자 연화오로 가라.”

 

강만음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말 끝에 망설임은 없었다.

 

서신을 써줄 터이니 그곳에서 기다려라.”

 

그러나 담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그 미소는 조소도 아니었고, 비웃음도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예측했던 대로 상황이 흘러간다는 듯한 여유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가능할 것 같습니까? 운몽이 아니라 어딜 가시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종주님은 지금 환자입니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몸이니, 제가 곁에 있어야 명줄이라도 붙잡을 수 있을 겁니다.”

 

강만음의 이마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짧고 무겁게 숨을 뱉은 그녀는 마치 최후통첩이라도 하듯 경고를 날렸다.

 

네가 내 비밀을 많이 알수록, 네 명을 재촉하는 것임을 명심해라.”

 

강만음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널 결코 쉬이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담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작게 웃었다. 웃음엔 어딘가 익숙한 서늘함이 묻어 있었다.

 

바라는 바입니다.”

 

담의 눈은 부드럽게 휘어졌으며

 

더 꽉 붙잡아 주십시오. 도망갈 생각조차 없으니.”

 

목소리는 묘하게 격양되어 들떴다.

 

당신이 하는 일에 폐가 되지는 않을 것이며, 구태여 나서지도 않을 것입니다.”

 

순간, 강만음은 그 기세에 압도된 기분이 들었다. 어딘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질적인 느낌이 온몸을 감싸며 싸늘한 공기가 피부 위로 스며드는 듯했다. 그녀는 무심히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저었다.

 

생살이 벗겨지는 고통을 알고자 하다니, 미친놈이군. ”

 

강만음은 근처에 펼쳐져 있던 종이에 손가락을 세우고 손끝에 영기를 모아 빠르게 글을 그리기 시작했다. 부적의 문양이 선명히 새겨졌고, 강만음의 손끝에서 불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부적을 공중에 던지며 낮게 읊조렸다.

 

길을 내어라.”

 

부적은 타오르며 재가 되어 공중으로 흩어졌다. 불길이 남긴 선명한 흔적이 공중에 머물러 있더니, 그것이 하나의 뚜렷한 방향으로 뻗어갔다. 강만음은 길로 한 발짝 발을 내딛자, 담도 뒤를 따랐다. 불길의 선이 가리키는 곳은 운몽이 아닌 어딘가 더 깊고 어두운 방향이었다.

 

**

 

한실의 고요한 방안. 낮고 부드러운 불빛이 서책의 낡은 가장자리를 감쌌다. 방 안에는 은은한 백단향이 스며 있었고, 창호에 비친 그림자가 천천히 흔들렸다. 그림자의 주인은 남희신이었다. 남망기가 떠나고 그는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차분히 내려앉은 시선이 서책 위를 천천히 훑고 있었다. 손끝으로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종이가 내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방 안에 잔잔히 퍼졌다. 그가 읽고 있는 서책의 표지는 오래되어 바래있었고, 책의 제목은 거의 지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 속의 글자들은 날이 선 듯 뚜렷했다. 혈맥과 경락의 흐름을 다룬 고대의 비법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 서책을 손에 넣기 위해 남희신은 고소에서 멀고도 깊은 산길을 지나, 고요한 절의 법당을 찾았다. 노승의 허락을 받기까지도 긴 시간이 걸렸다. 노승은 서책을 빌려주며 덤덤하게 말했다.

 

"거스르는 것이 더 고통스러울 걸세."

 

그의 목소리는 바람에 실린 먼지처럼 가벼웠지만 묘하게 뇌리에 박혔다. 남희신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속이 흔들렸다. 본능의 소용돌이에 말려들던 어느 날의 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단지 한순간의 방심이었지만, 그날 이후로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남망기처럼 자연스럽게 흘려보내지 못한 탓이었다. 남희신은 다르길 바랐다. 결코 짐승으로 남지 않겠다고 다짐하였기에 그는 여기까지 왔다. 짐승의 피가 끓는 본성을 부정하며, 끝내 그 위에 서기로 했다. 남희신의 눈동자가 고요히 움직였다. 서책의 한 구절을 오래도록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서서히 가늘어졌다. 그 구절에는 단 한 줄의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혈을 끊고 심맥을 고요히 하여 본래의 음양을 뒤바꾼다.”

 

남희신의 시선이 서책에서 벗어나 손등 위로 향했다. 손등의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고, 그 선이 마치 서책 속의 혈맥도처럼 느껴졌다. 그는 손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그 동작은 무의식적이었으나, 스스로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노승의 말이 맞았군

 

남희신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바람에 흩어질 만큼 작았고, 고요한 방 안에 남기엔 지나치게 가벼웠다. 남희신의 얼굴은 자조와 냉소가 얽혀 있었다. 누군가를 이해한 듯한 표정이었으나, 스스로를 책망하는 기색도 있었다. 그는 손을 올려 이마를 눌렀다.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고?”

 

노승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거스를 수 있으면 다행이겠지. 그러나 이미 알고 있었다. 거스를 수 없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서책을 덮은 그의 손이 책 위를 훑었다. 마치 먼지를 닦는 것처럼, 그러나 닦고 싶은 것은 먼지가 아니라 마음의 찌꺼기였다.

 

이건 선택이 아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말의 끝에 남아 있는 울림이 묘하게 서늘했다. 이내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방 안에 짧게 울렸다. 그 순간, 창호 틈새로 불어온 바람이 방 안을 휘저었다. 백단향의 냄새가 퍼지며 가벼운 향내가 바람을 타고 방을 감돌았다. 바람에 남희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흩날렸으며 눈을 남희의 눈동자는 어쩐지 짐승의 것처럼 동공이 가늘어진 채로 노랗게 빛났다. 순간적이었으나 찰나의 순간이 기이하게 강렬했다. 남희신은 다시 눈을 감았다. 고요함이 방 안을 메우고, 불빛은 바람에 흔들리며 그림자를 일렁이게 했다. 바람이 멎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여전히 빛나는 노란 눈에는 오직 무표정한 고요함만이 남아 있었다. 방 안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평온해 보였으나, 그 고요함의 밑바닥은 심연처럼 어두웠다.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비우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렀다.

 

지우는 거지.”

 

 

남희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을 열어 고이 감춰둔 자개 상자를 꺼냈다. 자개 상자는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자물쇠가 달려 있었지만, 이미 오래전에 부서진 것처럼 헐겁게 걸려 있었다. 남희신은 상자 안에 무언가를 감싼 비단을 꺼내어 풀었다.

 

"청류옥(靑流玉)..."

 

옥의 빛깔은 깊은 강물의 푸른빛과도 같았고, 표면은 잔잔한 물결의 결을 닮아 있었다. 표면을 어루만지자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서려왔다. 손끝이 스며드는 서늘함과 묘하게 뻗어나가는 진동이 느껴졌다. 남희신과 남망기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누어 가진 법기. 두 개가 원래 하나였던 옥패는 서로를 향해 끌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호쇄옥은 마음을 고요히 다스리는 법기였다. 동요하는 감정, 흔들리는 이성을 가라앉히고 본연의 차분함을 되찾아주는 힘을 가졌다. 분노, 슬픔, 불안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를 단숨에 평정하게 만드는 힘. 어머니가 늘 곁에 두었던 이유였다.

반면 청류옥은 숨겨진 진실을 떠올리는 법기였다. 물결 아래에 잠긴 돌이 물 위로 떠오르듯, 감춰진 진실을 서서히 끌어올리는 능력이었다. 그 힘은 느리지만 필연적이었다. 때문에 남희신은 그 청류옥을 몸에 지니지 않았다. 감히 지닐 수 없었다. 고소의 종주로서 지녀야 할 것은 위엄과 아정한 품격이지, 진실을 헤집어 끌어올리는 법기가 아니었다. 청류옥은 그에게 있어 칼날이었다. 남을 베는 칼이 아니라, 자신을 겨누는 칼. 그는 그 칼끝이 언제고 자신의 목을 겨눌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청류옥은 혼자서는 완벽히 발현되지 않았다. 반드시 호쇄옥과 함께 있어야만 능력이 온전히 발휘되었다. 아버지가 종주였을 때, 어머니는 늘 "어디 있든지 반드시 돌아온다"고 말하며 이 옥패를 손에 쥐고 있었다. 하나의 흐름이 멈추면 물결이 가라앉듯, 호쇄옥과 청류옥은 서로를 끌어당기며 균형을 맞추는 관계였다.

 

'호쇄옥을 누가 가지고 있을까...‘

 

청류옥을 만지는 손끝에 서려오는 떨림과 함께 남희신의 눈이 서서히 아래로 떨어졌다. 내심 호쇄옥을 찾고자 한 적이 없었다. 굳이 다시 손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아니, 생각해도 의미가 없었다. 그 법기가 끌어올릴 것은 자신의 심연일 테니.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으며 호쇄옥을 누가 가져갔는지의 단서는 한 사람의 입속에 단단히 잠겨 있었다. '남망기.'

 

내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비웃음도, 조소도 아닌 미묘한 기색의 미소였다. 얼굴은 부드러웠으나 속에 깃든 감정은 명확했다. 호기심, 의구심, 그리고 기묘한 기대감. 남희신은 고개를 들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게 될 것이다. 청류옥이 끌리는 곳, 그 끝에 있는 자가 답을 줄 테니까. 청류옥을 비단으로 감싸 품 안에 넣으면서,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멀리 가지는 못하겠지.”

 

짧고 은유적인 말이었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자 누군가에게 보내는 경고 같기도 했다. 남희신의 말투는 언제나 부드러웠으나, 그 속에는 날이 서 있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갈대의 줄기 같지만, 줄기 끝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난 법이었다. 남희신은 한 손에 삭월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문이 천천히 닫히자, 방 안에 남은 것은 단 하나의 등불과 희미한 백단향의 잔향뿐이었다. 청류옥이 이끄는 방향이 있다면,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호쇄옥의 기운 때문이든, 남망기의 숨긴 진실 때문이든 상관없었다.

 

**

 
 

한편, 강만음과 담은 쉴 틈 없이 한참을 달려 물안개가 짙게 깔린 담하의 초입에 다다랐다. 원래부터 비밀리에 숨겨둔 곳이었으나, 오늘따라 더욱 스산하게 느껴졌다. 낯선 자에게 이곳을 보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불안감이 내내 강만음의 가슴을 옥죄었다. 바위 위로 흘러내리는 물줄기의 소리와 안개 속에 얽히는 소리가 불안감을 대변하듯 귓가에 가득 찼다.

익숙한 길이었으나 유달리 자욱한 안개에 오늘따라 발걸음이 묘하게 더디게 느껴졌다. 끝없이 앞을 가로막는 안개 속을 뚫고 나아가자, 마침내 검은 기와 지붕을 인 범상루의 윤곽이 흐릿하게 드러났다. 안개 속에서 우뚝 솟은 그 모습은 마치 세상과 단절된 듯한 이질감을 자아냈다. 범상루의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나, 강만음이 손끝에 영력을 실어 문에 스치듯 흘려보내니 문 안쪽에서 '' 하고 걸쇠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대문이 서서히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강만음과 담이 말에서 내리자, 어디선가 바삐 발소리가 다가왔다. 근처에 있던 부사가 급히 뛰어와 마중하였다. 그의 얼굴에는 반가움과 당혹스러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단정한 옷차림새와 달리, 숨을 몰아쉬는 기색이 역력했다. 강만음을 본 부사의 눈에 안도의 빛이 어렸다.

 

"종주님! 무탈하셨습니까?"

 

부사는 말을 건네며 숨을 고르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 시간 소식이 끊긴 종주에 대한 걱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강만음의 얼굴에는 고된 피로가 짙게 서려 있었고, 안색도 평소보다 창백했다. 부사는 눈썹을 찌푸리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강만음을 훑어보았다.

 

"무탈하니 쓸데없는 말 삼가라."

 

강만음이 단호히 말하며 부사의 염려를 잘랐다. 부사 한쪽으로 물러서 자연스럽게 강만음의 뒤를 따라오는 낯선 자, 담을 눈으로 좇았다. 흙이 잔뜩 묻은 옷자락과 어딘가 범상치 않은 눈빛에 부사의 미간이 자연스레 좁혀졌다.

 

"저 자는..."

 

부사가 입을 떼자마자 강만음이 먼저 말을 끊었다.

 

"수사들을 불러 이 자를 끌고 지하 감옥에 가둬라."

 

부사의 눈이 크게 떴다. 의문이 담긴 얼굴이었다. 그러나 더는 묻지 않았다. 부사의 손짓에 따라 수사들이 다가와 담의 양팔을 붙잡았다. 담은 발걸음에 저항하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돌려 강만음을 보았다. 그의 눈매는 여전히 나른했다.

 

"언제든 편히 찾아오십시오"

 

강만음은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종주실로 몸을 돌리며 단호하게 내뱉었다.

 

"시끄럽다."

 

강만음은 홀로 종주실의 문을 닫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이 풀리자, 온몸의 피로와 고통이 물밀듯 몰려왔다. 침상에 닿기도 전에 다리가 풀려 무너져 내렸다. 등을 바닥에 기댄 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바닥의 냉기가 등을 타고 올라왔다. 온몸이 뼛속부터 무거웠다.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으나, 이내 다시 떴다. 늘 그랬듯이 귀신들의 속삭임과 고함과 비명, 날 선 속삭임이 머릿속을 가득 채울 줄 알았다. 그러나 귓가를 찢던 이명도, 멀리서 울리던 고함도 존재하지 않고, 세상의 모든 소리가 물러간 듯 적막했다. 그러나, 이는 강맘음에게 평온함을 주기보다는 숨이 가늘어졌고,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목을 쥐어오는 듯한 답답함이 밀려왔다. 고요함이란 본디 경계해야 할 징조가 아니었던가. 숨이 막히면서 모든 감각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차디찬 바닥의 감촉과 묵직한 피로조차 멀어져갔다. 어딘가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의식이 끊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깻죽지에 뜨겁고 무거운 열기가 몸을 짓눌렀다. 목은 바싹 말랐고, 땀에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어 끈적거렸다. 등부터 허리까지 뻣뻣하게 굳은 몸을 일으켰다. 서늘한 바닥의 감촉이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침상까지 가지도 못하고 마룻바닥에서 쓰러졌던 모양이었다. 이마에 손을 대자 미열이 퍼져 나갔다. 그럼에도 몸을 일으켜 책상에 앉았다. 강만음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고르다 옆에 놓인 붓을 집어 들었다.

 

석달 전, 담하와의 주된 물자 유통을 맡아온 가문의 가주가 비통한 얼굴로 강만음을 찾아왔다. 말은 길지 않았다. 상단주가 팔던 약에 그의 아들이 중독되었고, 그로 인해 아들은 가문의 재산을 몰래 팔아치웠다. 끝내는 상단주의 노비로 전락했다는 것이었다. 가주는 이를 바로잡으려 했으나, 오히려 상단주에게 보복을 당했다. 수척해진 얼굴로 홀로 남은 여식의 안위와 가문의 복수를 부탁하며 가주는 강만음 앞에서 스스로의 목숨을 끊었다. 그가 남긴 건 단 한 줄의 유서뿐이었다.

 

"폐를 끼쳐 송구하오. 부덕함으로 인해 능력 없는 이는 여기서 멈추나이다."

 

3년 전, 강만음이 선대 담하 종주의 부인의 양녀가 되어 담하의 종주 자리에 오른 뒤, 그녀의 출신을 두고 말들이 많았다. 선대 종주 부인이 갑작스레 자신을 양녀를 들였고, 양녀가 단숨에 종주가 되었으니, 의심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출신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속을 떠보고 시험하는 자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가주는 달랐다. 그는 강만음을 선대와 다름없이 종주로 대우했다. 왕래를 이어가며 필요한 것을 묻고, 걸맞는 예를 다했다. 사람들은 가주를 어리석다고 비웃었으나, 그는 끝내 자신의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강만음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외면할 수 없었다.

가주는 마지막 남은 명예를 유서 한 장에 담았다. 스스로를 폐인(廢人)이라 칭하며 그 명예를 스스로의 죽음으로 지켰다. 가주의 딸이 강만음에게 유서를 전하며 무너질 듯 울음을 삼키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강만음이 굳이 나설 일이 아니었다. 청을 들어준다고 해서 담하에 이익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가주가 생전에 보답을 바랐던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강만음은 움직였다. 몸이 먼저 움직였고, 머리는 뒤늦게 이유를 붙였다. ()이라는 것이 결국 강만음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유였다. 입 밖으로 그 생각을 꺼내는 순간, 자신이 더 나약해질 것 같아 이를 어리석음이라 변명하며 꾹 눌러 참았다.

 

'어리석은 짓이었다.'

 

입가에 희미한 냉소가 떠올랐다 곧 사라졌다. 스스로를 속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으면서도, 혼란스러웠다.

 

가주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난 뒤, 혼란에 빠진 가문을 홀로 남은 여식이 지키고 있었다. 자산의 손실로 파산 직전까지 몰렸으며 실추된 명성을 단숨에 회복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여식은 무너지지 않고, 작은 몸이 온 가문의 지반이 되어, 흐트러진 기둥과 대들보를 부여잡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얼마 못 버틸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강만음의 눈에 비친 여식은 담대함이 가문을 붙들고 있었다. 이는 비슷한 처지인 강만음의 마음을 동하기에 충분했다.

담하의 종주로서 선택은 분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실이 생길 것을 알면서도 그는 가문을 지원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가주의 아들이라던 자를 노비 신분에서 빠져나오게 하여 담하의 지하 감옥에 가둬버렸다. 자신을 부정하면 신분이 무너진다. 담하의 이름으로 그를 가둔 것은 단 한 가지 의미만을 지녔다. 더는 가문을 건드리지 말라는 강경한 경고였다.

그걸로 충분했고 끝냈어야 했지만 강만음은 그러지 못했다.

 

상단주와의 비밀 회동을 갖은 이유는 모든 것을 철저하게 끝내기 위함이었다. 강만음은 신분을 속이고 약초를 비싼 값에 구매하겠다며 은밀한 만남을 주선했고, 상단주는 의외로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상단주가 예의로 내어준 차는 향이 은은했고, 입에 닿는 맛도 깔끔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속이 끓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한 입만 마셨을 뿐인데도 속이 타는 것처럼 울컥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단순한 불편함에 그저 우연이라기에는 몸에 흐르는 영력이 막히는 듯한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신음이 들려 고개를 돌려 보니 상단주의 눈은 핏줄이 터지며 붉은 혈점들이 퍼져나갔다. 몸을 격하게 흔들더니 눈동자가 어느 순간 날카롭게 바뀌었다.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맹수의 눈이었다. 그가 탁자가 세차게 내려치자 두꺼운 탁자가 흔들리며 잔이 깨졌다. 피거품을 문 상단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짐승처럼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크륵! 크아아악!”

 

날짐승의 울음과도 같은 소리를 내지르더니, 상단주는 순식간에 강만음을 향해 날아들었다. 맹수가 발톱을 내지르듯 그의 손이 공중을 갈랐다. 강만음은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었으나 미세한 감촉이 팔뚝을 스치고 따끔한 고통과 함께 열기가 퍼졌다. 옷자락이 갈라지며 붉은 피가 맺혔다. 천천히 스며든 피는 옷을 적시며 팔뚝을 타고 흘러내렸다. 강만음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피가 떨어지는 감각이 그녀를 일깨웠다.

순간적인 본능이었다. 강만음은 허리에 찬 검을 뽑아 휘둘렀다. 하나의 동작에 불과했으나, 그 한 번의 베기가 모든 것을 갈랐다. 공중에서 날아들던 상단주의 목에 붉은 선이 그어졌다. 피가 뿜어져 나와 머리가 바닥에 떨어질 때서야 강만음의 심장이 크게 고동쳤다. 강만음은 상단주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소란을 감지한 가복들이 안으로 들이쳤다. 그들이 본 것은 잘려나간 상단주의 목과 피투성이의 검을 든 강만음이었다. 가복들의 눈에 서린 적의는 불길처럼 일렁였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본능적으로 칼집에 손을 올렸다.

 

"잡아라!"

 

누군가의 외침이 터졌다. 명령이 아니라 터져 나온 외침이었다. 그 소리와 함께 가복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강만음은 깨달았다.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절대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상단주를 죽일 생각도 없었다. 협상을 위해 온 자리였다. 그러나 협상은 이미 끝난 지 오래였다. 끝을 본 후에야 알았다. 모든 것이 뒤틀렸다는 걸.

도망쳐야 했다. 뒤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검을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으며 발을 딛고, 몸을 돌렸다. 그 순간부터 추격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연쇄작용으로 일어난 모든 일을 간략히 정리하고, 담하가 앞으로 가문에 취할 조치에 대한 사안을 담아 서신을 작성했다. 수사를 통해 서신을 전달하는 일만 남았다.

생사를 넘나들었고, 예상 밖의 일들이 연이어 터졌다. 모든 순간이 뇌리에 선명했건만, 막상 붓을 들어 추려 적으니 남은 것은 고작 몇 줄이었다. 넘쳐흐르던 피와 흔들리는 결단, 벼랑 끝에서의 선택들이 전부 몇 마디로 정리될 수 있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담하의 종주로서, 모든 걸 적을 필요는 없었다. 숨기고 감추며, 동시에 드러내고 행동해야 하는 삶. 그것이 강만음이 아닌 담하의 종주로서의 삶이었다. 진실을 모두 드러내는 순간, 담하의 종주는 무너질 것이었다. 몇 번이나 덮어두고 외면한 의문을 떨칠 수는 없었다.

 

이것이 옳은가.’

 

한 차례 멈췄던 붓끝이 다시 움직였다. 서신의 마지막에 다다르자, 붓이 잠시 공중에 머물렀다. 주저한 건 아니어서 이내 붓끝이 천천히 움직였다. 마지막에 적힌 글자는 담백했다.

 

'담하의 종주, 심욕연(深欲然).'

 

자를 쓰는 손끝에 불필요한 힘이 들어갔다. 종이 위의 획이 미세하게 갈라졌다. 먹이 잔잔히 번졌다. 번진 먹 자국은 원을 그리듯 천천히 퍼졌다. 강만음으로서의 이름이 아니었다. 담하의 종주로서 사용하는 허울뿐인 가명. '심욕연(深欲然)'이라는 이름을 쓸 때마다 그녀는 자신을 지웠다. 몸을 지우고, 뜻을 지우고, 오직 남는 건 껍데기뿐인 이름 하나였다.

담하가 비밀에 가려진 중소 세가라 해도, 종주의 책임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강만음은 쇠약해졌다 해도 4대 세가중 하나인 운몽의 종주였다. 하나는 어둠 속에 숨어 지탱하는 세가, 하나는 빛 아래서 정도를 이끄는 세가. 두 개의 길을 걸으며, 두 개의 그림자를 남기고 있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림자는 서로 겹쳤다. 어느 쪽이 진짜 모습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 모두 감당할 수 있는 무게라고 믿었던 자신이 가장 오만했다. ‘얼마나 더 감당할 수 있을까.’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은 의문이지만, 답을 찾지 않은 채 걸어왔다. 답을 구하지 않았으니, 끝이 보일 리 없었다.

근원적으로 운몽의 잃어버린 번성을 되찾기 위해 스스로 택한 길이었다. 되돌릴 수 없는 길이기도 했다. 허나,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은 것은 아닐까. 세대를 거쳐 쌓아 올린 번성도 하루아침에 화마에 무너졌거늘, 거짓을 바탕으로 쌓은 이 미약한 발버둥이 어찌 끝까지 버틸 수 있겠는가. 끝이 어디로 향할지는 뻔했다.

 

몸이 무거웠다. 피곤한 것도, 단순한 피로도 아니었다. 몸속 어딘가에서부터 끌어올라오는 이질감과 온몸의 기운이 제대로 돌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팔과 다리는 마치 남의 몸처럼 무겁고 뻐근했다. 독은 사람의 감각을 둔화시킨다. 판단을 흐리게 하고, 마음을 뭉개버린다. 더 무서운 것은, 스스로 중독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이다.

 

**

 

그날 저녁, 강만음은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그날 저녁, 강만음은 지하감옥으로 향했다. 감옥의 냄새는 축축했고, 습한 공기와 쇠의 냄새가 뒤섞여 불쾌했다. 단단한 쇠창살이 가득한 문 앞에 선 강만음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벽에 정자세로 앉아 있는 담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도 얼굴만은 환히 드러났다. 여전히 느긋한 표정이었다. 담의 시선이 천천히 강만음을 훑었다.

 

"저런, 안색이 어찌 그리 바래셨습니까. 이리 되실 때까지 버티신 겁니까."

"네 주제 파악이 아직 안 되나 보지?“

 

대답과 함께 강만음이 담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담은 고개를 들어 강만음과 눈을 마주하였다.

 

의원이 환자의 상태를 물어보는 게 그리도 거슬리십니까?”

그럴듯한 말로 나를 간파라도 하겠다는 속셈이면 헛된 꿈은 꾸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강만음은 짧게 혀를 차고 담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내가 널 믿을 거라 생각했나?”

 

강만음의 말에 담이 낮게 웃었다. 그 미소는 얄미울 정도로 여유로웠다.

 

"믿어달라 한 적 없습니다.“

 

담이 눈을 반쯤 감으며 미묘하게 신경질적인 말투로 대꾸하였다.

 

다만 환자에게는 사실을 말해야지요.”

 

강만음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 동안 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생에 처음 보는 낮짝인건 확실했다. 그런데도 낯설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익숙함과 낯섦의 경계에 서 있는 기이한 감각이 들어 알지도 못할 걸 알고 있는 듯한 위화감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얼굴에 담긴 인상도, 말투도, 표정 하나하나가 어딘가 익숙했다. 그러나 아무리 떠올려도 이런 자를 만난 적은 없었다. 잠시 짜증이 올랐으나 그 짜증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단숨에 가라앉았다. 논쟁을 이어가 봤자, 서로의 속내를 확인할 수 없을 터. 가치가 있는 자라면 써야 한다. 강만음의 판단은 언제나 그랬다. 강징은 신경질적인 어투로 담을 긁어내다 더는 말을 이어가지 않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정녕 네가 날 치료할 수 있겠느냐.”

 

짧고 묵직한 질문에 담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의술 말고 가진 게 없으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강만음의 입가에 희미한 냉소가 떠올랐다.

 

착각하지 마라.”

 

강만음의 손끝이 천천히 검집을 스쳤다. 움직임은 위협이 아니었으나 그럴 수도 있다는 걸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내가 너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살리는 것뿐이다.”

 

강만음은 뒤돌아서 부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데리고 나간다. 의원으로서 의술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줘라.”

 

부사의 얼굴이 굳었다. 눈이 커지며 그의 시선이 강만음과 담 사이를 오갔다.

 

종주님,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목소리는 낮았으나 의심이 뚜렷했다. 종주가 스스로 독에 당해 의원을 신뢰하는 일. 이건 위험을 넘어 불가해한 일이었다. 강만음의 눈이 부사를 향했다. 눈에 깃든 묵직한 압박에 부사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어졌다.

 

감시할 수사도 함께 붙여라.”

 

강만음의 말은 단호했다.

 

**

 

담은 부사의 감시 아래 작고 단출한 방으로 들었다. 이불과 목침이 놓인 공간은 딱히 불편할 것도, 편할 것도 없었다. 그는 말없이 짐을 풀었다. 옷가지 몇 벌, 약재 꾸러미, 낡은 약서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의원의 짐이었다. 부사는 벽에 기대어 담을 지켜보았다. 너무 평범했다. 그의 손놀림은 차분하고 일정했다. 별다른 행동 없이 짐을 풀고 정리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평범한 의원그 자체였다. 그런데도 부사의 눈썹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수진계와도 연이 없는 평범한 의원인 듯했으나, 그에게선 평범치 않은 기운이 스쳤다. 무고한 듯했으나, 그 무고함이 오히려 불편했다. 지극히 평범한 자가 이토록 신경 쓰일 리 없지 않은가. 부사는 일부러 자리를 피하지 않고 빤히 시선을 고정했다. 감시받고 있다는 걸 뻔히 알 텐데도 담은 신경 쓰지 않았다. 부사의 인내심이 바닥을 보일 때쯤, 담이 조용히 손을 뻗어 무언가가 부사의 품으로 던져졌다. 본능적으로 잡아든 그것은 딱딱하고 묵직했다. 검은 화살촉, 붉은 화살대. 누가 봐도 독화살이었기에 부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

종주님의 어깨에 박혀 있던 화살입니다.”

담은 아무렇지 않게 손을 털며 말했다.

 

?”

 

부사의 눈이 크게 떠지고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부사는 화살을 들어 올려 가까이 살폈다.. 화살촉의 끝에 묻어 있는 미세한 검은 얼룩.

 

왜 이걸 지금 내놓는 거냐?”

 

부사의 표정이 단단하게 굳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 화살을 쥐는 손이 뻐근해질 정도였다.

 

그간 감옥에 있었는데 어떻게 이를 알립니까. 그리고, 독의 배합을 알아야 해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독이라면 독전(毒專)을 불러도 될 터다. 굳이 네 손을 빌릴 필요는 없다

 

부사의 말을 끊고 담이 고개를 저었다.

 

독의 배합이 심상치 않습니다. 흔한 약재로는 해독이 불가능합니다.”

심상치 않다니, 그걸 어찌 알지?”

 

담은 화살촉의 가만히 검은 부분을 문질렀다. 손끝에 묻어난 미세한 가루를 부사에게 보였다.

 

이건 모란의 씨앗에서만 추출되는 가루입니다.”

“...?”

 

부사의 얼굴이 굳었다. 모란의 씨앗이라니, 그 순간 그의 뇌리에 떠오른 이름 하나.

 

설마,,,,난릉?”

 

난릉이라는 말이 나오자 담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부사는 곧장 담의 멱살을 붙잡고 소리쳤다.

 

네 이놈, 제대로 알고 하는 소리냐! 난릉이 미치지 않고서야!......”

물론입니다.”

 

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부사의 손에 쥐인 옷깃이 팽팽히 당겨졌으나, 그의 얼굴엔 고요한 무표정이 떠올랐다.

 

화살촉의 재질과 가루로 부서지는 독의 잔여물. 난릉에서 암암리에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헛소리하지 마라, 난릉이 담하와 무슨 원한이 있다고 종주를 노린단 말이냐.”

 

부사의 손에 깃든 힘이 더 강해졌다.


“....저도 모릅니다. 저는 독을 다룰 뿐이니까요.”

 

담의 말은 담백했지만 짜증을 숨기지 못하여 혀를 차고 고개를 숙였다. 부사는 얼굴이 어둡게 일그러졌다.

이걸 바로 종주님께 알리겠다.”

멈추시죠.”

 

담의 손이 부사의 소매를 가볍게 붙잡고 있었다. 힘을 준 것도 아니었지만, 경고가 담겨 있었다. 부사의 이마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손 치워라.”

지금 알리는 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담은 순순히 손을 거두며 나직히 말했다.

 

독의 배합을 먼저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종주님은...명확한 이유와 납득이 될 만한 설명이 있어야 믿으실 겁니다. 지금 난릉을 건드리면 수습할 수 없습니다.”

 

부사는 담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럼 너는 뭘 하겠다는 거냐. 난릉으로 가겠다는 소리냐?”

은밀히 난릉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담은 부사를 바라보며 천천히 화살촉을 돌렸다. 익숙하게 화살을 돌리는 게 부사의 시선에 걸렸다.

 

차선이 있습니다.”

차선?”

고소에는 모란과 상반되는 매서운 겨울에도 꺾이지 않는 고결한 산매화(山梅花)가 있습니다. 산매화의 차가운 성질을 가지고 독의 배합과 반대되게 해독제를 만들 수 있습니다.”

 

부사의 인상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고소는 난릉보다 접근이 더 어려운 곳이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요.”

 

담의 대답은 담담했다. 부사는 인상을 거세게 찌푸리며 담을 노려보았다.

 

넌 대체 뭐냐. 정체가 뭐길래 이를 다 알고 있는 것이냐!.”

그저 아는 게 좀 많은 의원일 뿐입니다.”

 

그 대답에 부사는 더 분노해야 마땅했으나, 이상하게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종주님께 알리면 넌 끝이다.”

그럴 수도 있겠죠.”

 

담의 목소리는 너무도 무덤덤했다. 말끝에 어떤 불안도, 초조함도 담겨 있지 않았다. 부사는 답답한 숨을 내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지금 무슨 수를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수는 쓰지 않습니다.”

 

담은 고개를 들며 부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수를 쓰지 않아도, 진실은 때로 더 무겁게 얹히는 법이지요.”

“....뭐라는 거냐?”

 

도저히 뭐라는지 모르겠다는 부사의 뚱한 표정에 담은 짧게 혀를 찼다.

 

전 종주님께 해를 끼칠 이유가 없습니다.”

 

부사는 더 묻지 않고 눈을 감고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고소로 간다는 거냐.”

그래야 겠지만....”

 

담이 말을 잇지 않자 부사는 빨리 말하라고 재촉했다.

 

고소에서 먼저 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참다 참다 헛소리의 정도가 지나치는구나. 고소가 왜 여기로 오냐? 됐다. 고소나 난릉으로 접근할 방법이 있는지 알아볼 터이니 일단 너는 당장 종주님께 올릴 해독약을 만들어라. 보고는 직접 내가 받을 거다.”

 

허튼 생각 그만하고 약이나 만들라며 부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나갔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나는 방 안에서 담은 약탕기를 꺼내어 물을 붓고, 약재를 하나하나 집어넣었다. 약재가 끓는 동안 옆에서 단약을 만들면서 담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련하긴.....답답한 건 어쩔 수 없구나....’ 천천히 피어오르는 약재의 향과 함께, 그의 말도 어둠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

 

 

강만음은 붓을 들어 보고된 안건들을 취합하는 문서를 적고 있었다. 먹의 향이 은은히 퍼지는 가운데, 필획이 종이를 타고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방 안의 공기는 고요했으나, 고요함 속에는 왠지 불안한 기색의 부사가 앞에 서 있었고, 그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주저하고 있었다. 부사는 강만음의 비밀을 아는 몇 안 되는 자이기도 했으며 선대부터 담하의 부사로 섬겨온 인물이기에 웬만한 일로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 자이기에 강만음은 재촉하지 않고, 부사가 입을 여는 걸 기다렸다.

 

종주님, ……

 

말을 꺼내긴 하였지만, 부사가 뜸을 들이자 강만음은 붓끝을 가만히 멈춘 채, 고개를 살짝 들었다.

 

내 전속 의원이다.”

 

강만음의 목소리는 낮고도 차가웠다. 붓끝에서 흘러내린 먹방울이 종이 위에 검은 점으로 번졌다. 그녀는 그 점을 흘깃 내려다보며 조용히 이어 말했다.

 

방자하게 굴거나 담하에 문제가 되지 않게 할 것이다. 약조하지.“

 

부사는 그게 아니라고 하였지만, 여전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어떻게 말해야 모르겠어서 차마 입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강만음은 짜증이 섞인 눈길로 부사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똑바로 말해라.”

 

이내 부사는 한숨을 쉬고 품속에서 군청색 비단으로 감싼 서신을 꺼내 강만음에게 건넸다. 손끝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택무군께서 만남을 청하셨습니다.”

 

강만음의 표정이 굳었다.

 

?”

 

그녀의 손끝이 서신을 거칠게 붙잡았다. 군청색 비단이 풀어지자 검은 잉크로 새겨진 택무군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눈썹이 찌푸려졌다. 택무군은 쉽게 움직일 인물이 아니었다. 강만음의 손에 쥔 서신이 약간 구겨졌다. 설마,....정말로... 그날... 강만음은 불안해 하며 서신을 곧장 열어보았다.

 

고소 남씨의 종주 남희신이 담하 심씨의 종주에게 범화루의 방문을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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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기강징ts 희신강징ts XX강징ts
[Code: f84f]
2024.12.19 03:5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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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씨 센세 양질의 무순을 목전에 두니 눈물이 좔좔 난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센세 존나게 나의 빛과 소금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31a4]
2024.12.19 07:32
ㅇㅇ
모바일
강징 능력 무엇? 두가문의 종주로 가문들을 이끌고 있다고...물론 징이를 갈아넣고 있겠지만 어쨌든 대단하다.
[Code: 3d3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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