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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9 00:43
리네이밍...이 맞긴 하다만 거의 재창조? 사실상 새업이죠 이거는
가상국가ㅈㅇ 평행세계ㅈㅇ 아무튼 다 ㅈㅇ
1. 천 년 전
이름 없는 들판, 야생화가 곳곳에 소담스레 피어나 양지바른 언덕 위로 넓은 가슴의 상수리나무 한 그루가 터전을 가꾸며 아주 오랫동안 살고 있었더랬다. 지나가는 과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이 그늘을 사랑하여 잠시 쉬었다 가거나, 나무의 거대한 풍채에 압도되어 신목이라고 여기곤 머리를 조아려 무언가 간절히 빌기도 했다.
그렇게 꾸준히 오백 년을 기도받으며 받들어지던 어느 장맛날, 나그네들의 오랜 염원이 스며들어서 사유하는 힘이 생긴 거목에게 별안간 번개가 검처럼 내리꽂혔더랬다.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진 번개는 나무를 정확히 두 갈래로 쪼개 놓았고, 그 사이로 드러난 형체는 헐벗은 몸의 여인이었다. 새하얗고 튼튼한 팔다리를 가진 여인은 어째서인지 일어서지를 못하는 대신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마치 입과 코로는 숨을 처음 쉬어 본다는 듯 생경한 얼굴이었다. 실로 여인에게는 지금 이 순간 처음인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나무에서 ‘탈피’한 여인은 스스로의 이름을 허니(栩妮)라 지어주었다.
허니는 이제 어디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었다. 생각한 바를 그대로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고, 지난날 무수히 보았던 나그네들처럼 훌륭하지 않은 솜씨라도 춤을 너울너울 춘다거나 흥겨운 곡조로 노래도 부를 수 있었다.
2. 그리고 현재
하늘 아래에 땅이 있다면 그 땅 위에는 대국이 있었다. 대국을 다스리는 연제의 황후에게는 본래 쌍생이 수태됐으나 기구하게도 회임 도중 한 아이의 맥을 잃었더랬다. 그렇게 아홉 달을 채워서 태어난 황후의 첫 아이는 여아였는데, 이미 죽어버린 제 혈육의 작아진 몸을 품에 끌어안고 나와 대국 황실에 파문을 일으켰다.
여러 소문에도 불구하고 아직 젊은 나이의 연제는 아이를 무척 귀애했으나 불임의 몸이 된 황후는 그러지 못했다. 이씨 황조 여아의 이름은 봉요, 봉호는 장목(蜂準長目)이었다.
봉요는 부황의 총애를 십분 누리고 있었음에도 자신을 바라보는 모후의 텅 빈 눈에는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 맸다. 그러함에도 모후께 눈길 한 번이라도 받아보고자 직접 만든 종이 등을 안고 배알했던 날, 모후의 눈에 드리워진 건 응당 어미로서의 온기가 아니라 살이 에이는 듯한 무정이었다.
제 하나뿐인 딸을 내려다보던 황후는 피식 웃으며 말했더랬다.
그녀가 쥐고 나온 사태(死胎)는 남아였다고.
어머니이기 전에 황제의 정치적 동반자이기도 했던 여인은 가장 먼저 종이 등을 던져 뭉개뜨렸다. 그뿐만이랴, 제 허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아이더러 그 핏덩이는 너보다 먼저 태어나고 죽었으니 당연히 네 오라버니가 아니겠냐며 괴성을 질렀더랬다. 그렇게 황후는 마지막 끈을 놓아버렸다.
회임 중이던 소의가 황후에게 떠밀려 복중 태아를 잃고 나서야 연제는 후궁을 텅 비웠다. 자식이라곤 봉요 하나였기에 그녀를 적통 후계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대국은 대대로 남아가 보위에 올랐고, 무엇보다도 연제에게는 그만큼이나 젊은 아우가 한 명 있었다. 봉요의 숙부이기도 한 경왕의 이점은 정통성도 정통성이지만 정비 아래로 토실토실한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는 것이었기에, 적통 후계가 끊기다시피 한 연제께서 정녕 양위를 하시겠다면 가장 적합한 후계자로는 역시 경왕이 아니겠는가? 하는 소리가 조정의 대신들 사이에서 불경하게도 이미 퍼질 대로 퍼지고 만 정론이었다.
그런가 하면 연제의 신경은 더더욱 황후에게만 쏠려서 어린 봉요는 이제 외딴섬이나 다름없었다. 봉요의 행동 하나하나가 어떤 식으로 황후의 광증을 자극할지 몰랐으므로 그녀는 가급적 별궁에 머무르도록 안배되었다. 어려서부터 허리를 굽혀 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데 익숙해져 온 장목공주는 그 봉호답게 영특하고도 생각이 깊어, 연제가 한 마디를 흘리면 문장 속에서 열 마디의 뜻을 알아냈다.
부황도 아버지이기 전에 한 여인과 평생을 약조한 낭군인지라.
별궁은 늘 태양이 머무는 중궁과 달리 하루의 거의 모든 시간이 긴 그림자에 잠겼더랬다. 그리고 이제 별궁에서도 긴 복도를 한참 지나야만 나오는 제실, 대국에서 황후 다음으로 가장 존귀한 여인이었던 장목공주가 보석이 촘촘하게 세공된 황금 가위를 촛불 위로 들어서 멍하니 보고 있었다. 가위가 촛불의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가만 보고 있노라면 자못 차분함으로 겉을 한 겹 싼 장목공주는 손가락으로 뾰족한 날끝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불과 몇 년 전, 부황께 하사받은 선물로 마냥 보기만 해도 아까워 어딘가 꺼내 놓는 것조차 고민이 되던 물건이었다. 이 천금의 가위로 모후께 종이 등을 만들어 드렸다.
가위 날 위로 지친 기색이 역력하신 모후의 용안이 비쳐 보였다.
‘내게 그 애만 있었더라면, 지금쯤 내가.’
몹시 울렁거리는 머릿속, 조그맣고도 창백한 손이 촛불에 오랜 시간 달궈진 날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쇳소리가 작게 삐걱댔다. 뜨거운 날이 어린아이의 손바닥 안을 파고들었다. 피는 여린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리다 마룻바닥 위로 점 찍듯이 톡, 떨어졌다.
“그 애는 돌아오지 못해요.”
연이어 톡, 톡, 선홍의 피가.
“저는, 어머니 곁에 있고요.....”
3. 그날 밤
온기라고는 촛불 하나가 전부인 제실 안, 어째서인지 수면에 먹이 번지기라도 한 듯 허공 가운데 의문의 검은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한 번 쏟아진 물은 두 번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는 말처럼 긴밀히 퍼져나가던 먹의 번짐은 이 별궁에서 살아 숨쉬는 모든 이들을 재우고 나서야 비로소 진두를 멈췄다. 그리고 현 사태를 일으킨 괴력난신은 제실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먹을 토해낸 소용돌이의 중심부에서 묵묵히 때를 기다렸으니, 가히 칠 척은 되어 보이는 장신의 남자가 낡아빠진 칠흑의 용포를 고집스레 입었더랬다. 허리춤에는 용포보다 더 낡은 향낭이 매달렸는데, 청창(青苍)이라는 단 두 글자가 서툰 솜씨로 삐뚤빼뚤 수놓여 있었다.
그러면 단서대로 남자를 청창이라고 불러보도록 할까. 청창은 해를 끼치기보다 오히려 침상 위에서 색색 잠들어 있는 아이를 고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두꺼운 이불을 품 안으로 전부 끌어모아 감싸안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처량해 보여서 평소답지 않게 넋을 놓고 바라보고만 있었던 게다.
아이의 침상은 어찌 보면 작은 성 같아, 그 위로 구기듯 뉘인 몸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채 금방이라도 파도에 떠밀려 흩어질 듯 위태로웠다. 고요히 잠든 아이의 숨은 살얼음 위로 지나다니는 바람처럼 가늘고 약했다.
“공주가 되고 싶다면서, 왜.”
목소리는 날카로웠으나 분노도 슬픔도 아니었다. 아이의 이마에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느리게 쓸어 올리는 그의 움직임에서 어쩐지 회한이 묻어났다.
“왜 스스로 모질게 굴어대. 어리석어서.”
그런가 하면 그의 손끝에서 흐르던 건 마음뿐만이 아니었으니, 눈부시지는 않을지언정 그것은 엄연한 빛이었다. 희미한 금빛 실오라기가 나풀거리며 아이의 마른 가슴께까지 흘러들어가 창백하던 얼굴 위로 고운 혈색을 차차 입혀 나갔다.
“앞으로 열흘이 더 지나면 너는 어디까지 네 자신을 상처 입힐지, 기대라고는 할 수 없겠다.”
4. 왕부로부터
봉요는 경왕을 꿋꿋이 숙부라 불렀고, 경왕비에게도 정중하게 예를 다했다. 그러함에도 황실이란 그저 보기 좋게 금칠한 우리에 불과할 뿐, 가족이라는 이름은 실상 텅 빈 틀과도 다름없으나 봉요에게는 여전히 유효한 가치였다. 무엇보다도 경왕비가 꾸며낸 그 온화함은 머릿속으로 늘 상상하던 어머니 같아, 미음처럼 부드럽게 넘어가는 말 한 마디가 고팠던 어린아이는 온화함 아래 어떤 불순한 의도가 깔렸을지언정 묵묵히 삼키기를 택했다. 오래전부터 너덜해진 장 끄트머리에 거짓으로도 삼킬 수 없는 찌꺼기가 또 쌓일 것을 능히 알면서도.
‘저어, 이 아이는 제 유모가 직접 가르쳐 무엇이든 곧잘 만들지만 그중에서도 다과를 만드는 솜씨가 참 뛰어납니다. 공주 전하께서 쓰신다면 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것 같사온데.’
‘숙모가 내주신 아이인데 솜씨라면 논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이 아요가 어찌 싫겠어요.’
그렇다고는 하나 작금의 정국에 대뜸 시녀를 밀어넣으시겠다.
경왕비와의 짧은 차담을 몇 번이고 계속 돌아보던 장목공주의 감은 눈 위로 바람이 왈칵 스며들었다. 시린 바람에 다시 천천히 눈을 뜨자 먼저 보인 것은 예법대로 얌전히 모아 쥔 깡마른 손등. 출세의 여지라고는 전혀 없는 이 궁에 버리는 패처럼 등 떠밀린 여자아이는 그토록 바싹 말랐음에도 어째서인지 키는 또 커서, 앙상한 가지로 눈더미를 떠받들고 있는 한 그루의 고목(枯木) 같았다.
“왕부에서 쓰던 네 이름을 그대로 쓰자.”
“.....화진(火尽)이라고 불렸습니다.”
장목공주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화진이라는 시녀의 손에 자신의 목숨이 통째로 쥐어졌다는 것을. 더 나아가서 저 안쓰럽게 깡마른 손이 제 목숨을 쥐어 터뜨리는 순간 화진의 앞에 드리워질 결말 또한. 우리 둘 모두 자의로는 이곳에서 나갈 수 없으렷다. 찻잔은 이미 오래전 식어버렸음에도 허한 마음에 마지막까지 남겨 두었던 차 한 모금을 들이키면서 셈을 마쳤다.
“지내기에는 그리 고되지 않을 것이다. 내 말벗이나 자주 해주면 더 좋겠구나.”
그렇게 화진은 별궁의 사람이 되었다. 형식적으로.
듣자 하니 제 또래인데도 키가 꽤 커서 여느 남자아이 못지않게 우뚝 솟아 있었던 화진은 별궁의 다소 심심한 생활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그러니까 눈치가 빨랐다. 솜씨가 좋다는 것도 진실. 감춘다고는 하나 매일 경왕부로 몰래 소식을 전하는 것도 진실. 정국은 더더욱 혼란해져 가는 와중에 별궁만큼은 논외되어 평화로웠기에 봉요는 귀를 닫기로 했다. 대를 끊고 태어난 불운의 아이에게는 누구도 기대를 걸지 않아 실망조차 하지 않았으니 이 나름대로 자유로웠다.
화진은 다과 중에서도 산사고(山楂糕)를 특히나 곧잘 만들었는데, 이는 봉요의 몇 안 되는 선호로 꼽혔다. 음식을 고집스레 가리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먼저 식욕이라는 것 자체가 전무하다시피 했음에도 산사고만큼은 금방 먹었다. 새콤한 맛 덕분이었을까. 떡의 풍미와 어우러지는 차의 향기에 집중하고 있노라면 모든 감각이 혀끝으로만 쏠려 모든 기억을 혀 아래에서 잘게 뭉개뜨릴 수 있었다.
이제 떡의 질감에서부터 화진의 솜씨를 구별해 낼 수 있었을 쯤, 말벗이 되어 달라 했지만 늘 과묵하던 화진 쪽에서 어쩐 일로 먼저 조심스레 대화의 운을 띄우더랬다.
“떡의 맛이... 이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길이가 짧은 문장인데도 화진의 목소리는 물살을 거스르다 휘청이는 작은 나룻배처럼 불안정하게 출렁거렸다. 그리고 월백색 접시 위로 툭 튀어나온 붉디붉은 산사고가 한 점. 봉요의 입이 짧다고 하나 평소였다면 족히 세 점을 준비해 두던 화진이 오늘 어째서인지 딱 한 점만을 대령했단다.
“색은 더 곱게 뽑혔는데, 맛이 이상하다.”
“.....”
“정녕 그렇게 말하는 거니.”
“그렇...습니다.”
“어디 보자, 내게 감히 상한 떡을 가져올 리는 없는데. 맛은 또 하필 이상하다라... 화진이 네가 왜 그렇게 말할까. 의도를 모르겠구나. 부황께서 공사다망하신 이후로 이런 수수께끼는 오랜만인데.”
봉요의 말투는 타버린 재와 같아, 이제 불씨조차 남지 않았다.
“그런데 맛이 어떻든 간에, 경왕야께서 안배하신 뜻대로라면 본공주는 이걸 먹도록 되어 있지 않더냐.”
그러나 잿더미 속에서도 열기는 남아, 목전의 상대가 쭉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음에도 장목공주의 위치는 결코 아래라고는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위. 훨씬 높은 곳.
“진아, 내 말이 그렇지 않니.”
산사고 접시를 들고 있던 아이는 어깨를 움츠렸다. 장목공주가 제 자신을 분명 진(尽)이라고 불렀는데도 귓가에는 꼭 신(烬)이라고만 들린 것 같아, 경왕비에게 붙들려 황궁에 발을 들인 이후로부터 내내 거짓말을 하던 입장으로서 도저히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ㅇㅇ청창너붕붕
ㅇㅇ신너붕붕
당연하지만 봉요=너붕붕
가상국가ㅈㅇ 평행세계ㅈㅇ 아무튼 다 ㅈㅇ
1. 천 년 전
이름 없는 들판, 야생화가 곳곳에 소담스레 피어나 양지바른 언덕 위로 넓은 가슴의 상수리나무 한 그루가 터전을 가꾸며 아주 오랫동안 살고 있었더랬다. 지나가는 과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이 그늘을 사랑하여 잠시 쉬었다 가거나, 나무의 거대한 풍채에 압도되어 신목이라고 여기곤 머리를 조아려 무언가 간절히 빌기도 했다.
그렇게 꾸준히 오백 년을 기도받으며 받들어지던 어느 장맛날, 나그네들의 오랜 염원이 스며들어서 사유하는 힘이 생긴 거목에게 별안간 번개가 검처럼 내리꽂혔더랬다.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진 번개는 나무를 정확히 두 갈래로 쪼개 놓았고, 그 사이로 드러난 형체는 헐벗은 몸의 여인이었다. 새하얗고 튼튼한 팔다리를 가진 여인은 어째서인지 일어서지를 못하는 대신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마치 입과 코로는 숨을 처음 쉬어 본다는 듯 생경한 얼굴이었다. 실로 여인에게는 지금 이 순간 처음인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나무에서 ‘탈피’한 여인은 스스로의 이름을 허니(栩妮)라 지어주었다.
허니는 이제 어디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었다. 생각한 바를 그대로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고, 지난날 무수히 보았던 나그네들처럼 훌륭하지 않은 솜씨라도 춤을 너울너울 춘다거나 흥겨운 곡조로 노래도 부를 수 있었다.
2. 그리고 현재
하늘 아래에 땅이 있다면 그 땅 위에는 대국이 있었다. 대국을 다스리는 연제의 황후에게는 본래 쌍생이 수태됐으나 기구하게도 회임 도중 한 아이의 맥을 잃었더랬다. 그렇게 아홉 달을 채워서 태어난 황후의 첫 아이는 여아였는데, 이미 죽어버린 제 혈육의 작아진 몸을 품에 끌어안고 나와 대국 황실에 파문을 일으켰다.
여러 소문에도 불구하고 아직 젊은 나이의 연제는 아이를 무척 귀애했으나 불임의 몸이 된 황후는 그러지 못했다. 이씨 황조 여아의 이름은 봉요, 봉호는 장목(蜂準長目)이었다.
봉요는 부황의 총애를 십분 누리고 있었음에도 자신을 바라보는 모후의 텅 빈 눈에는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 맸다. 그러함에도 모후께 눈길 한 번이라도 받아보고자 직접 만든 종이 등을 안고 배알했던 날, 모후의 눈에 드리워진 건 응당 어미로서의 온기가 아니라 살이 에이는 듯한 무정이었다.
제 하나뿐인 딸을 내려다보던 황후는 피식 웃으며 말했더랬다.
그녀가 쥐고 나온 사태(死胎)는 남아였다고.
어머니이기 전에 황제의 정치적 동반자이기도 했던 여인은 가장 먼저 종이 등을 던져 뭉개뜨렸다. 그뿐만이랴, 제 허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아이더러 그 핏덩이는 너보다 먼저 태어나고 죽었으니 당연히 네 오라버니가 아니겠냐며 괴성을 질렀더랬다. 그렇게 황후는 마지막 끈을 놓아버렸다.
회임 중이던 소의가 황후에게 떠밀려 복중 태아를 잃고 나서야 연제는 후궁을 텅 비웠다. 자식이라곤 봉요 하나였기에 그녀를 적통 후계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대국은 대대로 남아가 보위에 올랐고, 무엇보다도 연제에게는 그만큼이나 젊은 아우가 한 명 있었다. 봉요의 숙부이기도 한 경왕의 이점은 정통성도 정통성이지만 정비 아래로 토실토실한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는 것이었기에, 적통 후계가 끊기다시피 한 연제께서 정녕 양위를 하시겠다면 가장 적합한 후계자로는 역시 경왕이 아니겠는가? 하는 소리가 조정의 대신들 사이에서 불경하게도 이미 퍼질 대로 퍼지고 만 정론이었다.
그런가 하면 연제의 신경은 더더욱 황후에게만 쏠려서 어린 봉요는 이제 외딴섬이나 다름없었다. 봉요의 행동 하나하나가 어떤 식으로 황후의 광증을 자극할지 몰랐으므로 그녀는 가급적 별궁에 머무르도록 안배되었다. 어려서부터 허리를 굽혀 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데 익숙해져 온 장목공주는 그 봉호답게 영특하고도 생각이 깊어, 연제가 한 마디를 흘리면 문장 속에서 열 마디의 뜻을 알아냈다.
부황도 아버지이기 전에 한 여인과 평생을 약조한 낭군인지라.
별궁은 늘 태양이 머무는 중궁과 달리 하루의 거의 모든 시간이 긴 그림자에 잠겼더랬다. 그리고 이제 별궁에서도 긴 복도를 한참 지나야만 나오는 제실, 대국에서 황후 다음으로 가장 존귀한 여인이었던 장목공주가 보석이 촘촘하게 세공된 황금 가위를 촛불 위로 들어서 멍하니 보고 있었다. 가위가 촛불의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가만 보고 있노라면 자못 차분함으로 겉을 한 겹 싼 장목공주는 손가락으로 뾰족한 날끝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불과 몇 년 전, 부황께 하사받은 선물로 마냥 보기만 해도 아까워 어딘가 꺼내 놓는 것조차 고민이 되던 물건이었다. 이 천금의 가위로 모후께 종이 등을 만들어 드렸다.
가위 날 위로 지친 기색이 역력하신 모후의 용안이 비쳐 보였다.
‘내게 그 애만 있었더라면, 지금쯤 내가.’
몹시 울렁거리는 머릿속, 조그맣고도 창백한 손이 촛불에 오랜 시간 달궈진 날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쇳소리가 작게 삐걱댔다. 뜨거운 날이 어린아이의 손바닥 안을 파고들었다. 피는 여린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리다 마룻바닥 위로 점 찍듯이 톡, 떨어졌다.
“그 애는 돌아오지 못해요.”
연이어 톡, 톡, 선홍의 피가.
“저는, 어머니 곁에 있고요.....”
3. 그날 밤
온기라고는 촛불 하나가 전부인 제실 안, 어째서인지 수면에 먹이 번지기라도 한 듯 허공 가운데 의문의 검은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한 번 쏟아진 물은 두 번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는 말처럼 긴밀히 퍼져나가던 먹의 번짐은 이 별궁에서 살아 숨쉬는 모든 이들을 재우고 나서야 비로소 진두를 멈췄다. 그리고 현 사태를 일으킨 괴력난신은 제실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먹을 토해낸 소용돌이의 중심부에서 묵묵히 때를 기다렸으니, 가히 칠 척은 되어 보이는 장신의 남자가 낡아빠진 칠흑의 용포를 고집스레 입었더랬다. 허리춤에는 용포보다 더 낡은 향낭이 매달렸는데, 청창(青苍)이라는 단 두 글자가 서툰 솜씨로 삐뚤빼뚤 수놓여 있었다.
그러면 단서대로 남자를 청창이라고 불러보도록 할까. 청창은 해를 끼치기보다 오히려 침상 위에서 색색 잠들어 있는 아이를 고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두꺼운 이불을 품 안으로 전부 끌어모아 감싸안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처량해 보여서 평소답지 않게 넋을 놓고 바라보고만 있었던 게다.
아이의 침상은 어찌 보면 작은 성 같아, 그 위로 구기듯 뉘인 몸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채 금방이라도 파도에 떠밀려 흩어질 듯 위태로웠다. 고요히 잠든 아이의 숨은 살얼음 위로 지나다니는 바람처럼 가늘고 약했다.
“공주가 되고 싶다면서, 왜.”
목소리는 날카로웠으나 분노도 슬픔도 아니었다. 아이의 이마에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느리게 쓸어 올리는 그의 움직임에서 어쩐지 회한이 묻어났다.
“왜 스스로 모질게 굴어대. 어리석어서.”
그런가 하면 그의 손끝에서 흐르던 건 마음뿐만이 아니었으니, 눈부시지는 않을지언정 그것은 엄연한 빛이었다. 희미한 금빛 실오라기가 나풀거리며 아이의 마른 가슴께까지 흘러들어가 창백하던 얼굴 위로 고운 혈색을 차차 입혀 나갔다.
“앞으로 열흘이 더 지나면 너는 어디까지 네 자신을 상처 입힐지, 기대라고는 할 수 없겠다.”
4. 왕부로부터
봉요는 경왕을 꿋꿋이 숙부라 불렀고, 경왕비에게도 정중하게 예를 다했다. 그러함에도 황실이란 그저 보기 좋게 금칠한 우리에 불과할 뿐, 가족이라는 이름은 실상 텅 빈 틀과도 다름없으나 봉요에게는 여전히 유효한 가치였다. 무엇보다도 경왕비가 꾸며낸 그 온화함은 머릿속으로 늘 상상하던 어머니 같아, 미음처럼 부드럽게 넘어가는 말 한 마디가 고팠던 어린아이는 온화함 아래 어떤 불순한 의도가 깔렸을지언정 묵묵히 삼키기를 택했다. 오래전부터 너덜해진 장 끄트머리에 거짓으로도 삼킬 수 없는 찌꺼기가 또 쌓일 것을 능히 알면서도.
‘저어, 이 아이는 제 유모가 직접 가르쳐 무엇이든 곧잘 만들지만 그중에서도 다과를 만드는 솜씨가 참 뛰어납니다. 공주 전하께서 쓰신다면 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것 같사온데.’
‘숙모가 내주신 아이인데 솜씨라면 논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이 아요가 어찌 싫겠어요.’
그렇다고는 하나 작금의 정국에 대뜸 시녀를 밀어넣으시겠다.
경왕비와의 짧은 차담을 몇 번이고 계속 돌아보던 장목공주의 감은 눈 위로 바람이 왈칵 스며들었다. 시린 바람에 다시 천천히 눈을 뜨자 먼저 보인 것은 예법대로 얌전히 모아 쥔 깡마른 손등. 출세의 여지라고는 전혀 없는 이 궁에 버리는 패처럼 등 떠밀린 여자아이는 그토록 바싹 말랐음에도 어째서인지 키는 또 커서, 앙상한 가지로 눈더미를 떠받들고 있는 한 그루의 고목(枯木) 같았다.
“왕부에서 쓰던 네 이름을 그대로 쓰자.”
“.....화진(火尽)이라고 불렸습니다.”
장목공주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화진이라는 시녀의 손에 자신의 목숨이 통째로 쥐어졌다는 것을. 더 나아가서 저 안쓰럽게 깡마른 손이 제 목숨을 쥐어 터뜨리는 순간 화진의 앞에 드리워질 결말 또한. 우리 둘 모두 자의로는 이곳에서 나갈 수 없으렷다. 찻잔은 이미 오래전 식어버렸음에도 허한 마음에 마지막까지 남겨 두었던 차 한 모금을 들이키면서 셈을 마쳤다.
“지내기에는 그리 고되지 않을 것이다. 내 말벗이나 자주 해주면 더 좋겠구나.”
그렇게 화진은 별궁의 사람이 되었다. 형식적으로.
듣자 하니 제 또래인데도 키가 꽤 커서 여느 남자아이 못지않게 우뚝 솟아 있었던 화진은 별궁의 다소 심심한 생활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그러니까 눈치가 빨랐다. 솜씨가 좋다는 것도 진실. 감춘다고는 하나 매일 경왕부로 몰래 소식을 전하는 것도 진실. 정국은 더더욱 혼란해져 가는 와중에 별궁만큼은 논외되어 평화로웠기에 봉요는 귀를 닫기로 했다. 대를 끊고 태어난 불운의 아이에게는 누구도 기대를 걸지 않아 실망조차 하지 않았으니 이 나름대로 자유로웠다.
화진은 다과 중에서도 산사고(山楂糕)를 특히나 곧잘 만들었는데, 이는 봉요의 몇 안 되는 선호로 꼽혔다. 음식을 고집스레 가리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먼저 식욕이라는 것 자체가 전무하다시피 했음에도 산사고만큼은 금방 먹었다. 새콤한 맛 덕분이었을까. 떡의 풍미와 어우러지는 차의 향기에 집중하고 있노라면 모든 감각이 혀끝으로만 쏠려 모든 기억을 혀 아래에서 잘게 뭉개뜨릴 수 있었다.
이제 떡의 질감에서부터 화진의 솜씨를 구별해 낼 수 있었을 쯤, 말벗이 되어 달라 했지만 늘 과묵하던 화진 쪽에서 어쩐 일로 먼저 조심스레 대화의 운을 띄우더랬다.
“떡의 맛이... 이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길이가 짧은 문장인데도 화진의 목소리는 물살을 거스르다 휘청이는 작은 나룻배처럼 불안정하게 출렁거렸다. 그리고 월백색 접시 위로 툭 튀어나온 붉디붉은 산사고가 한 점. 봉요의 입이 짧다고 하나 평소였다면 족히 세 점을 준비해 두던 화진이 오늘 어째서인지 딱 한 점만을 대령했단다.
“색은 더 곱게 뽑혔는데, 맛이 이상하다.”
“.....”
“정녕 그렇게 말하는 거니.”
“그렇...습니다.”
“어디 보자, 내게 감히 상한 떡을 가져올 리는 없는데. 맛은 또 하필 이상하다라... 화진이 네가 왜 그렇게 말할까. 의도를 모르겠구나. 부황께서 공사다망하신 이후로 이런 수수께끼는 오랜만인데.”
봉요의 말투는 타버린 재와 같아, 이제 불씨조차 남지 않았다.
“그런데 맛이 어떻든 간에, 경왕야께서 안배하신 뜻대로라면 본공주는 이걸 먹도록 되어 있지 않더냐.”
그러나 잿더미 속에서도 열기는 남아, 목전의 상대가 쭉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음에도 장목공주의 위치는 결코 아래라고는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위. 훨씬 높은 곳.
“진아, 내 말이 그렇지 않니.”
산사고 접시를 들고 있던 아이는 어깨를 움츠렸다. 장목공주가 제 자신을 분명 진(尽)이라고 불렀는데도 귓가에는 꼭 신(烬)이라고만 들린 것 같아, 경왕비에게 붙들려 황궁에 발을 들인 이후로부터 내내 거짓말을 하던 입장으로서 도저히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ㅇㅇ청창너붕붕
ㅇㅇ신너붕붕
당연하지만 봉요=너붕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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