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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7 13:50
이건 CDPR이 온라인 궨트에서 여덟 번째 이자 마지막으로 출시한 여정 스토리임
마지막 여정이니까 설명하자면 CDPR은 현재는 온라인 궨트 운영에서 손을 완전히 뗀 상태라 앞으로 추가 카드가 나오지도, 밸런스 패치가 이루어지지도, 신규 여정이 나오지도 않을 것임... 적어도 위쳐4가 나와서 다시 궨트가 흥할 때까지는 말이지
이 여정 스토리도 홈페이지에 올려주지 않아서 인게임 화면을 캡처해서 텍스트를 추출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음
아무튼 이 마지막 이야기는 단델라이온과 딕스트라가 누군가 때문에 골치 아픈 협업 관계를 갖게 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다루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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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초까지만 보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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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 진보주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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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1

단델라이온 (Lorenzo Mastroianni).png
단델라이온
단델라이온, 자네는 냉소적이고, 호색한이고, 사기꾼이지만 최고의 친구지.

옥센푸르트 옥상 위로 떠오르는 태양은, 세계의 절반을 여행해 본 단델라이온에게도 장관과 같은 풍경이었다.

단델라이온은 우아한 발짓으로 진흙 웅덩이를 밟고, 책을 다른 팔로 옮겨 들며 노랗게 바랜 책을 제자리에 꽂아두었다. 그와 동시에 다음에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땐, 니코데무스 드 부트의 삶과 행복, 그리고 번영에 관한 명상록보다는 가벼운 책을 빌리겠노라고 다짐했다.

단델라이온은 좁은 골목길을 따라 시장에 들어섰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여기저기서 벨레타인 축제 준비로 분주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상인들은 노점을 설치한 뒤 꽃으로 장식하며 큰 소리를 질러댔다. 팬 위에선 생선이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어갔고, 갓 구운 빵의 냄새는 단델라이온에게 참기 힘든 허기를 불러일으켰다.

단델라이온은 철학자의 문 옆에 서 있는 이터널 파이어 교단의 성직자 두 명을 지나쳤다. 단델라이온에게, 대학 내에 교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직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다른 모든 것들은 수년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바람에 나뭇잎이 흩날렸고, 사상가의 공원에서는 봄의 향기가 풍겨왔다. 단델라이온은 이곳에서 보낸 학생 시절과 옥센푸르트로 자신을 불러들인 지난 몇 년간의 방황을 회상했다. 고전 시학 교수, 마스터 드 레텐호브. 운명은 참 기이한 것이다.

분수 광장 한쪽에서, 노랫소리와 함께 류트의 구슬픈 선율이 들려왔다. 단델라이온은 가까이 다가가, 음유 시인을 둘러싼 학생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푸른 눈, 그 안엔 불길이 타오르고
지난 날의 열기는 흐르는 세월에 식어버렸소
헤아릴 수 없이 깊은 눈을 바라보며
나는 작별을 말할 때를 기다리고 있네.

젊은 음유 시인은 지판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였고, 류트의 현은 소리를 뽑아내었다. 단델라이온은 박수갈채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린 뒤 목청을 가다듬었다. 음유시인은 단델라이온을 알아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교수님! 언제부터 거기 숨어 계셨던 거예요?"

"자네가 음을 잘못 짚었다는 걸 알 만큼은 오래 있었지. 라눌프. 미묘하긴 했지만, 확실히 틀렸다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자네가 시의 기본 법칙을 어겼다는 거야."

북적대던 소리가 멈췄고, 학생들은 입을 다문 채 단델라이온을 바라봤다.

"어떤 거요?"

"나는 천사의 목소리를 가진 가수들을 봤었네. 진정한 류트의 마법사들도 봤었지. 하지만 그거 아나? 그중 아직까지 이름이 기억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 모두 자네와 같은 실수를 했기 때문이야. 멋진 시에는 여러 공식이 있으나, 그중 한 법칙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네. 이제 자네를 가르친 지 반년이나 됐으니, 자네도 기억할 게야. '절대로, 그 어떤 경우에도...' 다음은?"

라눌프가 류트를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시다리스의 음유 시인, 발도 마르크스의 노래를 부르지 마라."

"브라보!" 단델라이온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자, 고개 들게. 이제 잘할 수 있을 거야."

*

"마스터 니코데무스..." 단델라이온은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가끔씩이라도, 당신이 펜을 내려놓으면 이 세상은 훨씬 더 나아질 겁니다."

책의 내용은 너무나도 무거웠지만, 단델라이온은 서둘러 책을 반납하려 하지 않았다. 단델라이온이 도서관 문턱을 넘자마자 알론시우스가 쫓아와 야단치며 연체료를 내라고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단델라이온은 먼저 음유 시학과에 있는 자신의 연구실에 들리기로 결심했다.

단델라이온은 흥겹게 휘파람을 불며 번쩍이는 홀에 들어섰다. 그리고 발라드 작곡에 열중하는 학생 무리를 지나쳐 위층으로 향했다. 연구실 앞에 도착한 단델라이온은 그제서야 자신이 흥얼거리던 곡이 발도 마르크스의 작품이라는 걸 깨달았고, 고개를 저으며 열쇠를 꺼냈다. 하지만 단델라이온이 문고리에 열쇠를 넣고 돌리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눈을 가늘게 뜬 단델라이온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연구실에 있었던 때를 기억하려 애썼다. 단델라이온은 망설이며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고, 자신의 책상에 누군가 앉아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문은 닫지, 교수," 남자가 말했다. 단델라이온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챘다.

"아, 젠장." 단델라이온이 말했다.

"오랜만이군."

"여긴 왜 온 거지, 딕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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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스문드 딕스트라
체크메이트입니다... 폐하.

르다니아의 전 정보국 국장은 일어나려 애쓰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일단 날 부르는 호칭부터 고쳐야겠군. 안전을 위한 일이잖나. 나와... 자네의 안전 말이야. 시기 루벤이라고 하게. 지금은 향수를 느끼고자 옥센푸르트를 찾은 전직 학생의 신분이지."

시기 루벤 (Lorenzo Mastroianni).png
시기 루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누군가 널 죽이려 했다는 얘길 들었어, 시기, 그리고 성공했다는 소문도 들었지. 네가 지옥 불구덩이 깊숙이 처박혔다는 소식도 들었고."

"재미있군. 나는 제리카니아에 있었었는데."

"그럼 지금은...?"

"지금은 이렇게 여기 있지."

단델라이온은 앓는 소리를 내며 명상록을 품에 끌어안았다.

"아, 그렇지. 근데 미안하군. 오래간만에 옛날이야기를 하니 즐겁지만, 내가 얼른 도서관에 가야 해서 말이야. 하루라도 이 책을 더 빌리고 있다가는 마스터 알론시우스가 크게 화를 낼 거 같거든. 그럼, 갈게! 생일 축하해, 아, 벨레타인도. 앞으로 올 다른 명절들도 말이지."

단델라이온은 얼른 뒤로 돌아 손잡이를 당겼지만, 문이 열리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의 재킷을 잡아챈 다음 질질 끌어 연구실 반대편 의자 위에 앉혔다. 단델라이온이 그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자, 흉한 흉터와 비인간적으로 차가운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엘프는 뒤로 물러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돌에 긁히는 쇳소리와 같았다.

"얘기는 끝내고 가셔야지."

수년에 걸쳐 연기 경험을 쌓은 단델라이온은 어렵지 않게 의연한 척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입은 덜덜 떨리고 있었고, 단델라이온은 이러다 혀를 깨물지 않기만을 바랐다.

"이런 무례가 있나! 자네 동료한테 당장 사과하라고 하게! 난 대학의 교수야, 감히..."

첩보원은 단델라이온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책상 위의 양피지를 밀어낸 뒤, 책상 끝에 걸터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내 동료는 늑대 아이센그림이라 하네. 나쁜 의도는 없어. 우린 그저 자네와 조금 더 얘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야. 자네한테 부탁할 일이 좀 있거든. 기밀이야."

아이센그림 파올리타나 (Grafit Studio).png
아이센그림 파올리타나
그들이 내 흉터를 눈치채는 순간, 즉각적인 죽음을 깨닫게 되지.

딕스트라는 어딘가 불편한 듯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움직였다.

"자네 도움이 필요해."

"도움? 안 돼. 딕스트라든, 시기든, 누구든 사양할게. 아주 이골이 났어. 첩보 게임도, 쿠데타도, 더러운 골목을 쫓아다니는 것도 절대로 다시는 안 해. 나 이제 그런 사람 아니야. 돈다발을 준다 해도 안 할 거야."

"내겐 돈이 없어, 단델라이온." 딕스트라가 부드럽게 말했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지. 그러니 부탁을 하는 거야. 이번 일은..."

늙은 첩보원은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말을 이어갔다.

"내 딸 일이네."


챕터 2

"연체되셨습니다."

단델라이온은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펴 손바닥을 내보였다. 하지만 사서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답하더니 기름칠이 잘 된 기계처럼 주판의 구슬을 옮겼다...

"2크라운 5헬러입니다."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음유 시인은 부드러운 손짓으로 그 정도 액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나중에 사람을 보내겠네. 현금을 안 들고 다녀서 말이야."

이번 작전도 통하지 않았던 것일까. 사서는 입을 꾹 다문 채 안경을 고쳐 썼다. 그리고 조그맣게 접힌 종이를 펴 노랗게 물든 손톱으로 짚으며 긴 목록에서 항목을 하나 지울 뿐이였다.

"니코데무스 드 부트, 명상록. 검열관님께서 이 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단델라이온이 턱을 치켜들었다.

"아, 마침 만나러 가던 참인데. 자네가 동전 몇 푼 때문에 날 붙들고 있다는 걸 알게 되시면 썩 좋아하진 않으실 것 같군."

"네, 잘됐네요. 지금 도서관에 계시거든요. 성서관에 계실 겁니다, 드 레텐호브 교수님. 지금 바로 가서 책을 전해드리시면 됩니다... 물론, 연체료부터 내신 다음에요."

단델라이온이 자신의 모든 지성을 끌어모아 새로운 접근법을 생각해내려 할 때, 책상 위 떨어진 동전의 짤그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 학생이 도서관을 나가는 길에 예상치 못한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었다. 음유 시인은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고맙네, 라눌프."

"아닙니다, 교수님."

단델라이온은 독서대에서 명상록을 집어 들고는, 마치 기사가 방패를 올리듯 가슴에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의기양양한 투로 냉랭하게 말했다.

"저렇게 어린 학생도 교수를 존경할 줄 아는군."

사서가 안경 너머로 단델라이온을 바라보았다.

"몇몇 사람들이 저 학생을 좀 본받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

단델라이온은 도서관에서 책에 둘러싸인 채 일하는 걸 좋아했다. 사방에 널린 단어들이 열광적인 소녀들의 관심을 애원하며 알아서 구절을 맞추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혹여나 단델라이온의 뮤즈조차 단델라이온에게 영감을 주지 못할 땐,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책에서 운율 하나를 훔쳐 쓸 수도 있었다. 비유적인 표현을 하나 훔쳐쓰기도 좋았고 말이다.

하지만 이 서재에 이터널 파이어 교단의 검열관이 나타난 뒤로, 도서관은 음유 시인에게 낯설고 위협적인 공간이 되었다. 면도한 시종들은 책장 사이를 뒤적거렸고, 도서관 부속 건물들은 '목록화'나 '보존'이라는 명목 아래 밤새 빗장을 걸어 잠갔다. 옥센푸르트 대학 위에 기나긴 그림자가 드리운 것이다.

정작 그 그림자를 드리운 남자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책에 둘러싸인 채 독서대 앞에 앉아 괴팍한 필체로 양피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드 레텐호브 교수님? 반갑습니다. 지난번 교수 평의회에 참석하지 않으셨기에, 건강을 염려하던 참이었습니다."

"아, 몸이 좀... 안 좋았습니다." 단델라이온이 신경질적으로 기침을 하며 입을 가렸다. 밤새 연금술 학과 학술 토론회에 참석한 뒤 어제 겨우 깨어났다는 생각을 하자, 아직도 몸이 안 좋은 느낌이었다.

"이제 다 나은 모양이군요."

"물론이죠. 황금빛 신처럼 멀쩡하답니다!"

단델라이온의 혀에 불쾌한 뒷맛이 느껴졌다. 마치 필사실의 공기가 눅눅해지고 씁쓸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단델라이온은 학창 시절에 마시던 밀주의 맛이 기억난 것인지, 아니면 검열관과 가볍게 얘기를 나눈 것 때문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단델라이온은 검열관에게 다가가 사제의 앞에 책을 내려놓았다.

"이 책을 기다리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학생 때부터 니코데무스의 책을 즐겨 읽었거든요. 마치 오랜 친구 같아서 헤어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검열관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도장을 들고 책의 속표지에 이터널 파이어의 문양을 찍었다.

"깊은 통찰력을 지닌 사상가지요. 윤리관도 뛰어나고, 교단에서도 좋은 평가를 내립니다... 몇몇 저서에는 말이죠."

"그럼 다른 저서는요?" 호기심을 참지 못한 단델라이온이 물었다.

"가치가 떨어지지요."

음유 시인은 의자를 빼 앉았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긁히는 소리 때문에 검열관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고전들을 검열하고 있나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저는 해로울 수도 있는 특정한 내용을 검사합니다. 검열이 끝나면, 선택을 한 뒤 별도의 수집 목록으로 옮기죠."

"해로운 내용이요? 드 부트의 명상록에서요? 이 대학의 초대 총장님이시자, 이 대학의 아버지라고도 할 수 있는 분의 저서인데요...?"

목록을 쳐다보던 검시관이 단델라이온을 바라봤다.

"이 대학은 개교 이후 참 많은 게 변했습니다."

"네, 안타깝게도 말이죠."

단델라이온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이미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마당이었고, 별도로 할 일도 있었다.

"이리아나 반 트로프케 양의 일 때문에 왔습니다."

"아."

그 잠깐의 순간, 대화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검열관은 양피지를 가로질러 천천히 깃펜을 옮겼지만, 그 어떤 글자도 적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양피지를 돌돌 말고는 새틴 천으로 펜촉을 닦고, 잉크의 뚜껑을 꽉 닫았다. 검열관은 회색 눈동자 너머로 단델라이온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반 트로프케 양의 방을 청소하던 중, 방에서 피스텍을 발견했습니다. 퇴학당해 마땅한 일이죠."

피스텍 (Alicja Kapustka).png
피스텍
동공이 커지고 이가 떨리며 미친 듯이 웃게 되지... 그래, 그게 피스텍이야.

청소는 무슨... '수색'이었겠지. 단델라이온은 생각했다.

"종종... 기나긴 시험 기간을 버티기 위해 약간의 도움을 받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을 땐, 누구라도 밤새워 공부하잖습니까. 잘하고 싶은 욕심에 그랬겠지요. 그걸 어찌 탓하겠습니까."

"네, 반 트로프케 양의 성적은 훌륭하더군요. 학부의 자랑으로 남았을 겁니다. 이 불미스러운 사건만 없었다면 말이죠. 애석한 일이지만, 반 트로프케 양이 학교에 피스텍을 유통한다는 의혹도 있습니다."

단델라이온은 코웃음 쳤다.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이리아나 양이 회개하고 해명을 한 뒤, 피스텍의 출처를 명백히 밝힌다면 대학 관계자들도 관대히 넘어갈 수 있을 겁니다."

"이리아나 양이 명예를 회복한다면, 제가 이리아나 양의 행실을 보증하도록 하죠. 제가 직접 나서서 확실히..."

검열관이 손짓으로 단델라이온의 말을 끊었다.

"그 약속, 믿도록 하겠습니다, 마스터 드 레텐호브. 관련 서류에 서명하셔야 할 겁니다. 하지만,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이리아나 양이 캠퍼스에서 보이지 않은지 이틀이나 되었습니다. 질 나쁜 자들과 어울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위험에 처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혹여나 이리아나 양이 어디 있을지 짐작 가는 곳이 있다면... 지금 당장 찾아보는 게 좋을 겁니다."


챕터 3

딕스트라는 단델라이온에게 '가장 믿을만한 수하'를 붙여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 수하는 바로 엘프였다. 단델라이온과 아이센그림은 학생들이 자주 가는 가게인 목마른 학자, 잉크통 아래, 연감 같은 곳부터 수색을 시작했다. 이리아나는 단골이었기에, 모든 가게에서 이리아나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이틀간은 이리아나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다음 단델라이온과 아이센그림은 폰타르 삼각주의 좀개구리밥 냄새와 해변 인부들의 땀 냄새가 진동하는 항구로 향했다. 이리아나는 이곳에 왔었다. 하지만, 이미 떠나고 없었다.

"누구랑 어디로 갔죠?" 단델라이온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물었다.

"그것까진 기억이 나질 않는군."

음유 시인은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하지만 아이센그림은 여관 주인의 목덜미를 잡고 끌어내렸고, 여관 주인의 얼굴은 탁자와 부딪혔다.

"즐거운 과부에서 온 벌부들과 함께 갔소. 타고 온 바지선으로 말이오." 여관 주인은 피가 흐르는 코를 부여잡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제발 그만하시오."

단델라이온과 아이센그림은 비가 쏟아지는 여관 밖으로 향했다. 엘프는 옷깃을 세웠고, 단델라이온은 팔짱을 꼈다.

"으으." 단델라이온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술에 진탕 취해 있던 모양이로군."

"건강에 문제가 없길 바랄 뿐이야. 왜 그런 자들이랑 어울린 걸까."

"그걸 알아봐야지." 엘프가 등불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그리고는 앞길을 밝히며 부두로 향했다.

*

"즐거운 과부. 그래, 그랬지..."

배좀벌레 먹은 썩은 나무와 토사물, 타르가 섞인 고약한 냄새가 풍겨왔다. 갑판은 캔버스 천으로 덮여 있었고, 그 아래에서는 주사위 굴리는 소리와 술 취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듣기 좋은 음색으로 보아 그중 하나는 여자의 것이었다.

단델라이온은 맹렬한 발걸음으로 앞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마치 자신의 배라도 되는 것처럼, 허세 가득한 모습으로 둑을 박차고 갑판 위로 뛰어올랐다.

"여기까지야, 이리아나. 이제 집에 가야지!"

그때 어깨가 떡 벌어진 벌부가 단델라이온의 앞을 가로막았다.

"넌 뭐 하는 놈이야? 당장 배에서 내려, 내던져버리기 전에."

"난..." 음유 시인은 자주색 재킷의 옷깃을 가다듬고, 비에 젖어 엉망이 된 모자에 꽂힌 깃털을 빚어 올리며 말했다. "난 대학교수, 줄리안 드 레텐호브일세. 그리고 저 친구는 내 학생이지. 정말... 곤란한 상황에 빠진 학생이긴 하지만 말이야!"

벌부는 대답 대신 엄지손가락으로 한쪽 코를 눌렀다. 그리곤 몸을 숙여 킁 소리와 함께 단델라이온의 발치에 코를 풀었다.

단델라이온은 파랗게 질렸다.

"잘 들어, 머저리! 내 왼손은 죽음이다. 그리고 이 오른손은 나조차도 두려워할 정도지!"

아이센그림이 한 손에 칼자루를 쥐었다. 하지만 일격이 오가기 전에, 이리아나가 몸을 일으켜 선원들 사이를 걸어 나왔다.

"신사분들, 아무래도 저는 이제 슬슬..." 커다란 딸꾹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기 교수님께서 저를 캠퍼스로 데려다 주실 것 같네요. 밀주 잘 마셨어요, 게임도 재밌었고.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이리아나는 선원들의 실망 어린 불평을 뒤로한 채 갑판을 떠났다. 아이센그림은 밧줄과 노에 발이 걸려 비틀거리는 이리아나를 붙잡아 겨우 부두로 끌어올렸다. 이들은 우울한 침묵 속에서 폭풍우가 남긴 진흙탕을 자박자박 걸어갔다. 단델라이온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다못해 결국 화를 쏟아내고 말았다.

"피스텍이라니? 정신이 나간 건가?!"

이리아나가 멈춰 섰다.

"어떻게 아셨어요?"

"기숙사의 자네 방 소파 밑에서 찾았다더군!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지?!"

이리아나는 조용히 입술만 달싹였다. 아직도 술기운에 머리가 쿵쿵 울리고 있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교수님."

"그럼 뭐지?" 단델라이온이 소리쳤다. 그 소리에 길가에 있던 아이가 놀라 잠에서 깨 울음을 터뜨렸고, 길 건너편에서는 개가 짖기 시작했다. 위층의 여자는 창문 밖으로 고래를 내밀어 단델라이온을 노려봤다.

"거기 조용히 좀 해요! 잠 좀 잡시다!"

"그럼 스트리크닌을 좀 드쇼!" 단델라이온은 몸은 분노로 가득 차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이센그림이 단델라이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사람들 없는 곳으로 가지. 아가씨 술도 좀 깨울 겸."

*

이리아나는 뜨거운 차가 담긴 머그잔을 들고 단델라이온의 침대에 앉았다. 이리아나의 뺨에 있던 홍조는 사라졌고, 눈에도 총기가 돌아와 있었다.

"총장님이 학교에 사제들을 들인 뒤로, 캠퍼스의 상황이 좋지 않았어요. 대학을 수도원으로 만들려 하잖아요. 이렇게 있다가는 하루아침에 학교를 잃을 마당이었죠. 하지만 교수님들은 손 놓고 있으셨어요. 무섭다는 핑계나 너무 늙었다는 핑계를 대며 말이죠. 그냥 흘러가는 대로 방관할 뿐이셨어요."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우리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고요! 우리 손으로 직접!"

"그러니까... 약을 거래해서?"

"네! 아... 아니요."

단델라이온은 일어나 뒷짐을 지고 서성였고,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방을 채웠다. 아이센그림은 탁자 옆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자네는 퇴학당할 거야. 그런데 피스텍은 대체 어디서 구한 거지?"

"만든 거예요."

"뭐라고?"

"연금술 학과 친구들이랑 같이 만든 거라고요."

"하, 술로는 성에 안 차서 그런 건가? 맙소사, 애들이 말세로군, 말세야!"

"우리가 쓰려고 만든 게 아니에요. 돈이 필요해서 만든 거라고요."

시인은 마주 잡은 손을 쥐어짜듯 비틀고는, 그 손아귀로 이리아나의 목을 조르려는 것처럼 난폭하게 허공에 내질렀다.

"자네와 친구들은 지금 사제들한테 명분을 준 거나 다름없어! 이제 사제들은 이 대학에서 학생들이 제대로 교육받기는커녕 부패하고 있다고 발표하겠지."

엘프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단델라이온, 아가씨한테도 말할 기회를 좀 주지? 계속 끊어먹잖아."

엘프의 으름장에 놀란 시인은 의자에 털썩 앉아 팔짱을 끼고 말했다.

"좋아, 말해보게."

"검열관은 닭장 안의 여우처럼 도서관을 돌아다녀요. 그러다 마음에 들지 않는 문서가 보이면 그게 초기 간행본이든, 필사본이든, 그냥 종이 쪼가리든 비공개 수집 목록으로 옮겨버리죠. 왜 그러는 걸까요? 책 분류하는 걸 도와주기라도 하려고?"

단델라이온이 입을 비죽였지만, 탄력을 받은 이리아나는 단델라이온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단숨에 말을 이어나갔다.

"그 빌어먹을 광대 놈이 우리 책을 약탈하는 거예요. 팔에 끼고 다니는 그 두루마리에는 금서들의 목록이 적혀있어요. 그 목록에 적힌 책을 모두 불태우려는 거라고요."

아이센그림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인간들이 불장난을 좋아하긴 하지."

단델라이온은 그런 아이센그림을 곁눈질로 힐끗 질책했다. 그리고 한층 침착해진 마음가짐으로 몸을 숙이고, 무릎에 팔꿈치를 올린 뒤 이리아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래서 그걸 막으시겠다? 혼자서?"

"저와 뜻을 함께하는 학생들이 있어요. 옥센푸르트를 지키기 위해 모인 친구들이죠. 계획도 세워놨어요. 도서관에 있는 불태워질지도 모르는 책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길 거예요... 임시방편이긴 하지만요."

"그게 어디지?"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요. 그런데 책이 한두 권도 아닌 데다가, 뭐... 따지고 보면 밀수품이니까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죠."

"밀수업자 말이로군."

"네."

"피스텍으로 대금을 치를 생각이고."

"맞아요."

둘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잠시 뒤 입을 열은 건 아이센그림이었다.

"우리 일은 널 곤경에서 구하는 거다."

이리아나는 거만하게 턱을 세우며 말했다.

"전 멈추지 않을 거예요. 계획대로 진행할 거라고요."

"하지만 이제 밀수업자한테 줄 게 없지. 사제들이 네 물건을 압수했거든." 엘프가 답했다.

이리아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럼 또 방법을 찾아봐야죠."

"사제들이 얼마나 위험한 자들인데!" 또다시 화를 주체하지 못한 단델라이온이 소리쳤다. "까딱 잘못했다간 자네 목이 달아날 거라고! 그리고 또 밀수업자랑은 어떻게 접촉할 생각이지?"

"벌부가 연락책을 알려줬어요." 이리아나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술 마실 사람만 잘 고르면 되는 법이죠."

아이센그림과 단델라이온이 서로를 바라봤다.

"그냥 묶을까? 난 애 볼 생각 없는데." 엘프가 말했다.

"아니면 절 도와주실 수도 있죠." 그녀가 뻔뻔스럽게 끼어들었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특히 교수씩이나 되는 사람이라면, 책을 불태우는 광신도들의 만행을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시리라 믿어요."

단델라이온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었다. 그리고 손가락에 걸린 흰 머리 한 가닥을 보고 경악했다.


챕터 4

단델라이온은 옥센푸르트를 사랑했다. 하지만 밤에 항구를 산책하다 보면, 그 사랑이 조건부였다는 사실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아이센그림과 같이 있는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리아나는 자갈길의 개구멍 사이를 요리조리 잘도 오가며 길을 안내했다.

"아가씨 말인데." 엘프가 속삭였다. "딕스트라의 딸이라는 걸 예상했었나?"

"아니."

앞서가던 이리아나가 뒤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다. "조용히 하세요. 다 왔어요."

단델라이온은 주변을 둘러봤다. 옥센푸르트의 여느 골목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높이 솟은 연립 주택과 상점의 창문들, 그리고 일렬로 늘어선 색색의 간판까지. 단델라이온은 이리아나가 멈춰선 문 위의 빛바랜 룬을 읽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음, '반 올테레인 자매, 수입 물품 취급.' 한동안 문을 안 열었던 것 같은데. 여기가 확실한가?"

"나도 아는 곳이야." 아이센그림이 말했다. "하브'케런."

이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델라이온은 창문 안을 들여다보고는 혀를 끌끌 찼다.

"보아하니 이 자매라는 사람들은 오피에르 카펫을 주로 취급하나 본데, 정말 엄청나게 남겨 먹는군. 가격표 보여? 노비그라드에 있는 네스피네 상점에선 같은 문양의 카펫을 반값에 살 수 있어."

"언제부터 카펫 전문가가 됐지?" 아이센그림이 물었다.

"아는 게 좀 많아야 말이지. 아무튼, 여기서 뭘 하려는 건지 설명해줬으면 좋겠는데."

"넌 말이 너무 많아, 드완."

이리아나가 단델라이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제가 아는 다른 음유 시인 분도 말이 엄청 많은데." 그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직업병인가 봐요."

아이센그림은 문을 세 번 두드린 뒤 두 박자를 쉬고, 다시 세 번 두드렸다. 반응은 없었다.

"뭐, 확인은 했으니까." 단델라이온이 벨트를 여미며 말했다. "아무도 없나 보군."

그러자 이리아나가 자물쇠 따개를 꺼내 열쇠 구멍에 밀어 넣었고, 곧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저도 아는 게 좀 많거든요, 교수님." 이리아나가 말했다.

*

천의 냄새가 단델라이온의 코를 간지럽혔다. 재채기가 나오려는 찰나, 어둠 속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기계 장치가 덜컥거리는 소리를 냈다.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 덕분에, 이들은 자신들을 겨냥하고 있는 석궁을 볼 수 있었다.

"누구냐?" 카펫 더미 뒤에 숨은 여인이 물었다.

이리아나가 양손을 들고 답했다.

"대학에서 왔어요. 즐거운 과부에서 듣자 하니, 당신이 도와줄 수 있다고 해서요."

"뭘 도와달라는 거지?"

"조금... 불법적인 일이요."

"사람 잘못 찾아왔어, 아가씨."

양손이 잘 보이도록 들고 있던 아이센그림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날 기억하나, 헤브카르? 나 스코이아텔이오."

"이제 스코이아텔은 없어, 엘프, 헤브카르도 없지. 라도비드가 기회를 잡자마자 모두 처형해버렸거든. 비인간을 도우면 평생 죄인의 낙인과 함께 살아가야 해."

라도비드_ 철의 심판 (Valeriy Vegera).png
라도비드: 철의 심판
판사. 배심원. 사형집행인. 왕.

"이름이 산느였나? 맞지?"

정적이 흘렀다.

"난 아이센그림 파올리타나야. 우리 특공대는 당신한테서 코비어산 모피를 샀었지. 가격도 적당했고, 품질도 좋았어. 당신은 우리의 절박함을 이용해먹던 다른 드완과는 달랐지. 덕분에 많은 형제가 무사히 겨울을 버텨낼 수 있었다."

여인은 석궁을 내리고 카펫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헝클어진 회색 머리 뒤에 있는 커다란 검은 눈동자가 그들을 바라봤다.

"철의 늑대? 맙소사, 당신도 당한 줄 알았는데."

단델라이온은 처음으로 엘프의 얼굴에 핀 미소를 보았다.

"아직 아니야." 아이센그림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렇게 살아있지."

*

산느는 병의 마개를 열고 병 안의 액체를 잔에 따랐다. 향긋한 보드카 향이 단델라이온의 정신을 어지럽혔다. 입술을 핥은 단델라이온은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지도 않고 홀로 술을 벌컥 들이켰다. 그리고는 탁자에 손가락을 탁탁 두드렸다.

"정리를 해보지." 헤브카르가 단델라이온의 잔을 다시 채우며 말했다. "위험한 일을 함께할 동료를 찾고 있는데, 너무 위험한 일이라 선원들마저 거절하고 나에게 보냈다는 거군. 그리고 대금으로 사용하려던 피스텍까지 다 잃은 마당에, 날 찾아와서 도서관에서 책 좀 훔치게 도와달라는 거야?"

"정확히 말하면 책 수백 권이에요." 이리아나가 말했다. "금서 목록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어요. 아실 수도 있겠지만 이 사제라는 작자들이 워낙 부지런해서..."

"그 대가로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뭔지 듣고 싶은데."

이리아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역사적인 저서들을 지켜내는 데 힘을 보탠다는 사실만으로는 만족 못 하시겠죠?"

"잘 알고 있네."

"그렇다면..."

단델라이온은 보드카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온몸에 퍼지는 기분 좋은 온기에 몸을 떨었다.

"우린 참 교훈이라는 걸 배울 줄 몰라, 안 그런가?" 단델라이온이 아이센그림을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 인간 말이야. 책은 시작일 뿐이야. 곧 있으면 놈들은 우리가 돌아볼 틈도 없이 정의와 기원을 심판하고 있겠지. 장작에 불이 붙을 거야. 책더미와 양피지가 불타오르며 풍기던 냄새는 다른 무언가가 불타오르며 용인할 수 없는 악취로 대체되겠지. 그때가 온다면 다신 돌이킬 수 없어."

"아주 감동적인 연설이네." 산느가 말했다. "내가 30년만 더 젊었어도 자네들과 함께 그 불꽃을 끄러 나갔을 거야. 하지만 이젠 아니야. 난 전쟁을 겪었고, 이젠 그저 평화를 바랄 뿐이야. 그러기 위해선 돈이 필요해. 피스텍이라면 그 정도 되는 돈을 벌어다 줄 수 있겠지. 하지만 피스텍이 없으면, 거래도 없어. 미안하군."

밀주를 한 모금 마신 아이센그림이 얼굴을 찡그리더니 잔을 멀찍이 밀었다.

"이 아이를 도와줘." 아이센그림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아이가 해달라는 대로 해. 당신이 당신 몫을 다 해내면, 내가... 친구에게 말을 전하지. 그리고 당신이 합당한 보수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겠어."

"이봐, 피스텍 1파운드의 가격이 얼마인지 알기나..."

"당신의 평화는 얼마지?" 엘프가 헤브카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라도비드와 그의 사냥꾼들은 여전히 당신 같은 사람들을 쫓고 있어. 당신이 직접 말했잖아. 스코이아텔과 거래하는 건 평생 죄인의 낙인이 찍힌 채 살아가는 거라고. 한 마디만이라도 새어나가면, 당신은 바로 교수대로 가게 될 걸."

생각에 잠긴 산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당신들을 털어먹지 않았는지 아나, 늑대? 당신들이 인간보다 낫다고 생각했었거든. 하지만 우리 인간들에게 너무 빨리 물들어버렸군."

늙은 헤브카르는 잔을 기울여 입을 헹구고 말했다.

"돕도록 하지." 그녀의 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니 이제 내 가게에서 꺼져."


챕터 5

밤은 유난히도 조용했다.

단델라이온은 해가 진 뒤에 학생들이 학교 캠퍼스 근처에 있는 선술집에 모인다는 사실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끊임없는 침묵에 단델라이온은 계속 불안감을 느꼈다.

단델라이온은 이리아나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길을 따라 나 있는 서어나무 사이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은 젊은 음유 시인들이 자주 모이는 분수를 지나 도서관으로 향하는 통로로 발길을 옮겼다.

"드 레텐호브 교수님... 절 찾아다니신 진짜 이유가 뭐죠?"

"피스텍 얘기를 듣고 자네를 돕고 싶었네."

"그럼 지금쯤 저한테 더는 사고 칠 생각 말라는 말씀을 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야 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자네 생각에 동의하는 바이네. 해야만 하는 일이야... 이 광기를 멈춰야만 해. 하지만 그다음엔 책과 노트, 수업이 기다리는 모범생의 삶으로 돌아가는 걸세. 알겠나?"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도서관 문이 열리며, 누군가 휘파람을 불었다. 주변을 살피던 이리아나는 단델라이온의 손을 잡고 안으로 끌어당겼다.

도서관 안에는 두 명의 학생이 있었다. 두 학생 모두 단델라이온이 아는 학생이었다. 문을 연 학생은 역사학과 신입생, 헨지였다. 복도를 망보던 다른 학생은 의학과 3학년인 페트렉으로, 샤니가 아끼는 제자 중 하나였다. 페트렉의 검은 곱슬머리를 보자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샤니 (Lorenzo Mastroianni).png
샤니
아, 전 의사예요. 대체로 뭘 처방해야 할지 알죠.

이리아나는 샌들을 벗어 배낭 속에 던져 넣었다. 다른 두 학생 역시 맨발이었다. 내키지 않는 듯 눈을 굴리던 단델라이온도 결국 신발의 끈을 풀었다.

이들은 책이 수북이 쌓인 책상과 선반 사이를 조심히 걸어갔다.

"압수한 책은 어디에 보관하는 걸까요?" 이리아나가 물었다. 이리아나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중앙 복도에 울려 퍼졌다.

"이쪽일세." 단델라이온이 필사실로 안내하며 말했다.

압수된 책의 더미는 단델라이온이 검열관과 대화를 나눈 뒤보다 눈에 띄게 높아져 있었다.

"정말 성실하기도 하지." 이리아나가 탁자 위에 놓인 목록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단델라이온이 이리아나의 어깨 너머로 목록을 흘끗 보았다.

"'명상록'?!" 단델라이온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런 것 같네요. 근현대사를 다룬 역사서도 모두 위험하겠군요. 여기 보세요, 교수님. '타네드 섬 습격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1편부터 5편까지 전부 사라질 예정이예요."

"그건 개인적으로 나도 없애고 싶은 책이라 상관없네. 하지만 '명상록'을? 말도 안 되는 소리."

창문 쪽으로 이동한 페트렉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설마 책을 밖으로 던질 생각은 아니겠지?" 단델라이온이 물었다.

그때, 헨지가 도서관 카트를 끌고 필사실로 들어왔다.

"여기에 실을 거예요." 헨지가 말했다. "그리고 뒷문을 통해서 나갈 거고요."

이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놓인 책을 집어 들었다.

"건물 뒤편 벽에 통로가 있어요." 이리아나가 말했다. "그 길로 나가면 산느랑 아이센그림이 배를 대고 기다리고 있는 해안까지 곧장 갈 수 있죠. 거기서 책을 싣고 항구로 옮겨 다정한 교수형 집행인 배에 싣을 거예요."

단델라이온이 모자를 벗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와서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고 하면 너무 늦었겠지?"

이리아나가 단델라이온에게 책을 건네며 대답했다.

"책이나 실으세요, 교수님."

*

마지막 책까지 모두 싣자, 헨지가 카트를 끌고 문밖으로 나섰다.

"검열관의 호의를 악용하진 말자고." 단델라이온이 말했다. "속이 좁으신 양반이거든."

"잠시만요." 이리아나가 말했다. "선물을 좀 남겨야겠어요."

이리아나는 입술을 핥은 뒤, 탁자 위에 놓인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무어라 속삭이며 손가락을 간결하게 오므리자, 양피지가 깜빡이더니 글자의 모양이 바뀌고 하나로 합쳐졌다. 이윽고 도식적인 그림이 양피지 위에 나타났다.

"마법을 쓸 수 있었나?"

"조금요. 래드클리프의 조수였거든요."

"그런데 그 능력으로 검열관 노트에 낙서나 한다고?"

"화나셨나요, 마스터 드 레텐호브?"

"화나긴 무슨. 난 발로 마법을 부릴 정도의 실력을 지닌 소서리스 친구가 있을 정도로 마법에 친숙하지만, 이토록 멋지게 마법을 사용하는 건 처음 봐서 그랬네."

페트렉이 쉬익 소리를 내며 손을 흔들었다.

"누군가 오고 있어."

단델라이온과 이리아나는 창문턱으로 뛰어올라 창문에 바짝 붙어섰다. 한 남자가 철학자의 문에서 도서관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마스터 알론시우스야." 단델라이온이 말했다.

이리아나가 짜증을 내며 답했다.

"아니, 저 꼰대는 할 일이 그렇게 없나? 이러다 들키면 전부 헛수고가 될 텐데."

"교수님 앞에선 예의를 갖춰야지." 단델라이온이 속삭였다.

"뭐라고요?"

"아무것도 아닐세."

이리아나가 이마를 긁고 두 손을 비비며 말했다.

"안 되겠어요. 뭐라도 둘러대야겠는 걸요. 헨지가 밖으로 나갈 시간을 벌게요. 그 사이에 나가요."

"자네는 할 만큼 했어." 단델라이온이 모자를 고쳐 쓰며 말했다. "얘기는 내가 하지. 교수의 실력을 믿게나."

*

도서관 밖으로 뛰어나간 단델라이온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연을 마치고 수금할 때 자주 짓던 영업용 미소였다.

"마스터 알론시우스! 이렇게 다 만나는군."

"드 레텐호브 교수님?" 사서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답했다. "이 시간에 여기서 뭘 하고 계신 겁니까, 그것도 맨발로요?"

"어..." 단델라이온이 자신의 맨발을 내려다보았다. "그게 말이야, 내가... 여기 어딘가에 신발을 벗어뒀는데... 까먹었다네."

사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교수님... 본보기가 되어 주셔야죠."

"그게..."

"졸업한 뒤에, 1년간 시학을 가르치셨죠? 교수님께서는 기억 못하시겠지만, 그때 몇 번 교수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보조 사서였거든요. 교수님께서 대학을 떠나신 뒤, 교수님의 위업에 대해 들었답니다."

단델라이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알론시우스는 웃으며 철학자의 문을 바라보았다.

"전 저 벽 너머로 나간 적이 거의 없습니다. 당신이 부러웠죠, 마스터 드 레텐호브. 당신께서 세계의 끝을 향해 떠나신 여행과 여정이 부러웠습니다. 그곳에서 당신께서 보셨을 것들도 부러웠죠. 그런 특별한 삶을 사셨으면서도... 이렇게 그 모든 걸 낭비하고 계시다니요."

단델라이온의 귀에 작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미리 약속된 신호였다. 산느의 배가 약속대로 항구를 향해 방향을 튼 것이다.

"저 벽 너머의 세상은 황홀하다네, 마스터." 단델라이온이 말했다. "나는 정말 많은 곳을 여행했지. 그러니 잘 알고 말하는 걸세. 난 길 위에서 여러 친구들을 만났지만, 다시금 그들을 잃었다네. 거의 모두를 잃었지. 그런 내게 부러워할 만한 게 남았을지 모르겠군."

알론시우스는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아직 여정이 끝난 건 아니잖습니까. 노래도 아직 끝나지 않았고요. 결국 제 말이 맞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그래, 어디든 가려거든 우선 신발부터 찾아야 하겠군. 그럼 이만, 마스터 알론시우스."

"잘 가십시오... 단델라이온."


챕터 6

테이블 위에서 잔들이 부딪치자 거품이 튀어 올랐고, 이내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쭉 들이켜!"

"단델라이온을 위하여! 우리 학생 교우들을 위하여!"

건배가 계속 이어졌고, 바닥은 폭풍우 속을 항해하는 배의 갑판처럼 흔들렸다. 자기 자랑, 함께한 추억 이야기, 지저분한 노래가 즐거운 대화와 어우러져 방안을 가득 채웠다. 등짝이 성한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교수님이 우리 편인데..."

"감히 누가 우리한테 덤비겠어?!"

단델라이온은 느릿느릿 류트를 연주하며 모여든 학생들의 환호를 받았다. 학생들 사이에서 20년은 젊어진 기분이었다.

문이 쾅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라눌프가 바람과 함께 연감에 들어왔다. 그러다 문지방을 끌어안고 잠이 든 헨지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다들 이것 좀 봐!"

라눌프가 구겨진 종이를 내밀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한쪽 귀퉁이는 잔으로, 다른 쪽 귀퉁이는 촛대로 눌러 펼쳤다. 학생들이 테이블 위로 모여들었다. 종이 위에는 기분 나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추후 공지가 있을 때까지 도서관을 폐쇄합니다. 익일 모든 강의는 취소되었으며, 모든 학생은 아침 조회에 참석하십시오. 불응 시, 정학 조치합니다.'

"이젠 아주 대놓고 협박하네?"

"정말 쪼잔하기 짝이 없다니까!"

"검열관이 대학에 시종들을 데려왔어. 캠퍼스를 전체를 아주 이 잡듯이 뒤지려나 봐."

"하, 열심히 해보라지. 종이 쪼가리 하나 못 찾을 테니까."

단델라이온은 류트를 내려놓고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낼 때까지 몸을 뒤로 젖혔다.

"아주 잘했네, 학생 여러분. 곧 역풍이 불어올 거야. 하지만 사제들도 결국 대학을 떠나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겠지. 그럼 그때 조용히 책을 원래대로 옮겨 놓으면 돼. 그러니 다들 진정하고 때를 기다리도록."

라눌프가 머리를 흔들었다. 라눌프의 부스스한 머리가 헝클어졌다.

"진정하라고요? 교수님, 드디어 우리가 놈들한테 한 방 먹였다고요! 이제 아주 끝장을 내버려야죠!"

그러자 학생들이 일제히 잔을 탁자에 두드리며 답했다.

"끝장내자! 끝장내자! 끝장내자!"

단델라이온은 입가에 묻은 맥주 거품을 닦아냈다.

"그게 대체 무슨..."

열정의 물결에 따라, 학생들은 더욱 고양되었고 대담한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수도원은 꺼져라! 사제들도 꺼져라! 여긴 우리의 대학이다!"

"놈들한테 한 방 더 먹이자, 친구들! 이번 승리에 만족하면 안 돼!"

학생들의 함성은 커져만 갔다. 음악적 소양이 있는 단델라이온의 귀에는 이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고, 이내 단델라이온은 번쩍 술이 깼다. 단델라이온은 이리아나에게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이리아나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손 키스를 보낼 뿐이었다.

라눌프가 주먹으로 탁자를 세 번 두드리고 손을 높이 들었다. 그러자 학생들이 점차 입을 다물더니 그의 말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함께, 그리고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증명했어." 라눌프가 입을 열었다. 라눌프의 맹렬한 시선은 동료 한 명 한 명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었다. "우린 끝까지 옥센푸르트를 수호할 수 있다는 걸 증명했어. 대학은 사제들이 있을 곳이 아니야. 저 작자들이 불청객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자고."

방 안의 모든 눈이 라눌프를 향했다. 성공에 취해 의욕이 넘치는 학생들은 누군가가 자신들에게 방향을 제시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벨레타인이 다가오고 있어. 잊을 수 없는 5월의 밤, 불꽃의 밤을 만들자!"

라눌프는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올리고, 학생들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라눌프의 얼굴엔 앙심으로 가득한 만족감이 서려 있었다.

"벨레타인이 시작되고, 온 도시가 축제에 빠져있을 때. 사제들이 불침번을 서기 위해 자신들의 신전으로 돌아갈 때... 우린..."

라눌프는 극적인 효과를 주고자 목소리에 완급을 주었다. 학생들은 숨죽인 채 라눌프를 바라봤다. 모두가 라눌프가 말을 끝내길 기다리고 있었다.

"...신학부 건물에 불을 지를 거야."

*

사제들은 광신도적인 열정을 불태우며 수색을 시작했다. 아침 조회를 위해 모인 학생들이 부제의 지시를 따라 강제로 성가를 부르는 사이, 시종들은 기숙사의 마룻바닥을 뜯어내고, 창밖으로 옷가지를 던지고, 다락방을 모두 뒤집어엎으며 비밀 은닉처를 찾으려 애썼다. 결국 이 광기 어린 수색이 어느 정도 성과를 내긴 했다. 이 오래된 건물에서 긴 세월 왕조를 이루고 살던 거미들과 비둘기 가족들을 쫓아내긴 했으니 말이다.

물론, 사라진 책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그날 오후, 학생들은 자신의 소지품을 되찾고 사제들이 난장판으로 만든 캠퍼스를 청소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여야 했다. 대학 평의회 임원진들이 소집한 긴급회의에서 몰래 빠져나온 단델라이온은 사상가의 공원에 있는 이리아나를 발견했다. 이리아나는 코르보의 비소고타 동상에 등을 기댄 채 자신의 노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코르보의 비소고타 (Bryan Sola).png
코르보의 비소고타
내가 누굴 치료해본 지 반세기가 지났네. 게다가 나이를 먹어 기억력이 나빠지고 손이 둔해졌어.

"청문회는 어땠지?" 단델라이온이 물었다.

"최고였죠."

단델라이온은 이리아나 옆에 앉았다. 이리아나의 따뜻한 팔이 단델라이온의 어깨에 전해졌다. 단델라이온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기침을 했다.

"평의회는 난리가 났어. 검열관들이 병 안에 갇힌 꿀벌 무리처럼 날뛰더군. 정말 다른 학생들이 비밀을 잘 지켜줄 거라고 믿는가?"

"고문만 당하지 않는다면요."

"책을 배로 옮길 생각은 어떻게 한 거지?"

"라눌프가 생각해냈죠. 란 엑제터에 라눌프의 삼촌이 계시는데, 그 삼촌분이 배를 가지고 계셨거든요."

"라눌프가 코비어 출신이었나?"

"네, 공부하러 유학을 온 거죠. 란 엑제터에도 대학은 있지만, 신생 학교인데다가 평판도 그리 좋지 않거든요. 옥센푸르트랑은 비교하는 게 실례에 가까울 정도였죠. 지금은 또 모르겠지만요."

교장실에서는 검열관의 심문에 소환된 학생들의 이름을 읊는 교구 직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어나무 꼭대기에서는 다락방에 세워놨던 자신의 집을 잃어버린 비둘기들의 화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리아나."

"네?"

"도를 지나치는 것 같지 않나? 방화라니? 아무래도 자네 친구들은 정신이 나간 모양이로군. 검열관이 분노할 테고, 더 감당하기 힘든 일이 벌어질 거야. 지금까지의 자네 행동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어. 그래, 숭고하다고 할 수도 있는 이유였지. 아무리 교회에 반감을 가지는 교수가 많다고 하더라도, 방화를 저지른다면... 자네 무리를 지지하는 이들마저 자네들에게 등을 돌리게 될 걸세."

"위험하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인걸요."

"뭘 해야 한다는 거지? 불을 질러야 한다는 건가?"

"메시지를 보내는 일이요. 옥센푸르트를 위해 싸우는 일이요. 교수님들은 그저 방관하고만 계시잖아요."

"이리아나. 나랑 약속했을 텐데? 난 널 도와줬고, 넌 앞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고 했지."

"전 약속한 적 없어요, 단델라이온 교수님. 이렇게 친구들을 버려둘 순 없어요. 조금 위험해졌다고 저희의 대의를 포기할 순 없다고요."

단델라이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 아버지가 걱정하시네."

그 순간, 단델라이온의 어깨를 데우던 온기가 사라졌다. 이리아나는 벌떡 일어나 단델라이온과 멀찍이 떨어졌다. 주변의 공기마저 싸늘해져 있었다.

"지금 아버지 얘기가 왜 나와요?"

"자네를 지켜봐달라고 부탁하셨거든."

이리아나는 노트를 홱 집어 들고는 분노에 찬 손짓으로 돌돌 말았다.

"아버지가 딸 생각을 하긴 하셨었나 보네요? 하지만 어쩌죠? 이미 늦었거든요. 참, 뻔한 사람이네. 그리고 교수님... 교수님한테도 실망이네요. 전 교수님이 저희의 대의를 이해하시는 줄 알았어요. 옳은 일을 위해 노력하시는 분인 줄 알았다고요. 그 늙은 돼지 같은 아버지가 얼마나 주던가요?"

"그런 게 아니야, 이리아나."

"암요, 그러시겠죠.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그 사람한테도 그렇게 전해주시고요."


챕터 7

언뜻 보기에는 별다른 것 없는 집처럼 보였다.

경사진 지붕에는 붉은 타일을 얹었고, 정면에는 벽돌공의 끌 자국이 드러나 있었다. 예전에 딕스트라가 단델라이온에게 말해준 바에 따르면, 이 집은 한때 왕실과 가까운 거물이 소유했던 집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이 집이 르다니아 정보부에 넘어가는 일이 있었고, 그때 딕스트라가 이 집에 있던 장식을 모두 떼어냈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이전 집주인이 비지미르 왕의 사망 이후 벌어졌던 일련의 숙청 중에 자취를 감추었던 것이다. 그 후로 남몰래 옥센푸르트에 머무를 때면, 딕스트라는 이곳을 안전 가옥으로 사용하곤 했다.

단델라이온은 녹슨 문을 지나 정원에 들어섰다. 풀이 자라 엉킨 곳에 손을 밀어 넣던 중, 그 아래 보이지 않는 곳에 쐐기풀이 자라고 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닫고 말았다.

단델라이온은 벌겋게 변한 손으로 눈을 훔쳤다. 아릿한 들꽃 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들어와."

딕스트라는 문간에 서 있었다. 딕스트라의 배에는 덩치에 비해 너무 작아 보이는 앞치마가 볼품없이 걸쳐 있었고,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벽난로에 솥이 부글거리며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벽난로의 불꽃만으로는 이 집의 어두운 내부를 밝히기에 역부족이었다. 야채수프의 기분 좋은 냄새가 시인에게 풍겨 왔다. 첩보원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고, 그저 탁자에 앉아 다시 양파를 썰 뿐이었다.

"얘기 좀 하자고." 단델라이온이 말했다.

단델라이온은 길게 얘기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심각한 상황에 부담감을 느낀 단델라이온은, 곧바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요약해 전달했다. 이리아나가 책을 훔치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 라눌프가 이끄는 학생 무리의 음모와 대학에 불을 지르려는 위험한 계획에 대해서도 말했다. 나이 든 첩보원은 도마 위로 몸을 기울인 채, 시인의 말에 끼어들지 않고 얌전히 귀를 기울였다.

딕스트라는 의연한 자세로 시인의 보고를 받아들였다.

"됐어, 이제 꺼져. 수프 재료로 넣어 버리기 전에."

"딕스트라..."

"아무리 네놈이라도 이런 간단한 일을 망칠 리는 없을 줄 알았건만." 첩보원의 칼질이 더 거칠어졌다. 칼이 양파 아래 도마까지 깊이 박히고 있었다. "옛날 같았으면 당장 드라켄보그로 보내버렸을 거야. 자루에 담아서 말이지."

드라켄보그 (Karol Bem).png
드라켄보그
딱히 휴일은 아니지만, 노래를 좋아한다면 실컷 부를 수 있어.

"그런 말은 좀 심한데. 마음이 아플 정도야. 생각해 보게. 난 진심으로 자네 딸 일을 내 일처럼 생각했어. 내게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아이였지만, 난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이리아나를 지켜주려 했단 말일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도와주려 했다고."

"문제라니?" 딕스트라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미안한 말이지만, 네놈이 일을 맡은 뒤로 문제는 늘어나기만 했어."

"예를 들어 피스텍 문제가 있지. 이리아나에 대한 학생 신분 정지 신청서는 서류 처리 과정에서 사라졌어. 총장 비서가 알아서 처리하고 있지. 왜냐면 내가 약속을... 뭐, 내가 뭘 약속했는지는 신경 쓸 거 없고... 아무튼, 이리아나는 내 손 안에 있어."

딕스트라는 음유 시인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저번 대화는 좀 더 순조로웠던 것 같은데." 딕스트라가 말했다.

"자네가 날 협박해서 그랬던 거 아닐까?"

"아니, 자네가 좀 더 침착했었단 얘기야. 덜덜 떨면서 굳어 있는 게 아니라. 인정하지, 계산에 능한 단델라이온은 솔직히 마음에 들었어. 하지만 지금의 자네는 예전 단델라이온에 가까워. 그리고 나는 그놈이 별로 마음에 안 들어."

시인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딕스트라, 그게 말이지..."

"벨레타인이라고?"

"그래."

"들은 적 있어. 뭔가 구린 냄새가 나는군."

"수프에서 나는 냄새 아니고? 그 친구들은 너무 어려. 그거면 전부 설명이 되지. 성질 급한 꼬마들이 승리에 취한 거야. 나도 한때는 그랬었고."

첩보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흠, '한 때는 그랬었다'고? 재미있는 농담이군."

"괜히 트집 잡으며 비꼬는 건 그만두시지. 상황이 심각하다고. 그 친구들의 의도가 어떻든, 녀석들은 정말 불을 지를 생각이야. 그리고 라눌프는..."

"앞잡이지. 학생들을 선동하는 거야. 교단이 뒤에서 목줄을 잡고 있고."

"그 애송이가?! 그 녀석이 할 줄 아는 거라곤 류트 몇 곡 연주하는 것뿐일 텐데."

"단델라이온, 웅장한 대학 건물이 5월 밤의 거대한 말뚝처럼 불타오른다고 상상해 봐. 과연 누가 이득을 보게 될까?"

단델라이온은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검열관..." 단델라이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학이 무슨 땅도 아니고, 그냥 빼앗을 수 있는 게 아니야. 대학을 장악하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혼란이 필요한 법이야. 라도비드에게 누군가가 개입해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줄 만큼 난장판을 일으켜야 해. 자, 이제 이해가 되나?"

단델라이온은 충분히 이해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증거를 찾아야지."

시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벌겋게 반점이 생긴 손을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부터 찾아봐야 할지 감이 오는군."

딕스트라가 낮게 신음했다.

"단델라이온, 한 가지만 더 묻지. 그 아이가 혹시..."

"아니. 미안하네. 자네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아."

첩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친 딕스트라는, 양파를 칼에 얹어 솥에 밀어 넣었다.

"내가 잘 돌봐줄게." 단델라이온이 말했다. "믿어도 좋아."

"지금 널 보면 별로 안 믿겨서 말이야. 쐐기풀이나 조심해."

*

길바닥이 울퉁불퉁한 곳을 지나자, 수레가 튀어 올랐다. 그 때문에 상자의 가짜 바닥 밑에 있던 단델라이온은 머리를 찧었고, 좀 더 잘 생각해보고 계획을 세웠어야 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제발 도착할 때까지 내 몸이 남아나게 해 주면 안 될까?" 단델라이온이 상자 옆면의 뚫린 구멍을 통해 속삭였다.

산느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이게 다 그 잘난 전쟁 덕분이야. 원래는 평평한 도로였는데 군대에서 석재가 더 필요해진 거지. 원래 군대는 필요한 게 있으면 그냥 가져가잖아."

"그러면 구멍 난 데를 피해서 가면 되잖아. 말도 비쩍 말랐더만. 방금은 진짜 코 부러질 뻔했어."

"조용." 헤브카르 여인 옆에 앉은 아이센그림이 말했다. "다 왔다."

단델라이온은 입을 다물고 부두의 습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구멍을 통해 다정한 교수형 집행인 호의 갑판에서 뱃사람 두 명이 뛰어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저건 뭐야?" 선원 중 한 명이 물었다.

"책이야." 산느가 대답했다. "지난 운송분에서 빠진 상자가 있었어."

"라눌프도 아는 거지?"

"그럼."

단델라이온은 누군가의 손이 뚜껑을 열고 상자의 내용물을 뒤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알겠어. 어이, 토린, 스밴! 여기 좀 도와줘. 배까지 끌고 가야 돼."

상자가 올라가더니 다시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고, 힘쓰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도 들려왔다.

"아니, 이 여자야! 이 빌어먹을 상자엔 대체 뭐가 있는 거야? 무슨 시체라도 들어있어?"

"그냥 책이야. 지식은 무거운 법이지."

*

이들은 평범한 뱃사람이 아니었다. 단델라이온은 직접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상자가 갑판 밑으로 내려오자, 뱃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몇 년간 군대 용어를 주워들은 끝에, 단델라이온도 어디 가서 전문가 행세는 할 정도는 되었다.

선원들은 눈에 띄게 힘들어하며 상자를 큰 돛대 옆으로 밀어 놓았다.

"이게 마지막일 거야." 선원 중 한 명이 말했다.

"그런데 출항은 왜 안 하는 거야?" 다른 선원이 물었다. 목소리에서 북부 억양이 느껴졌다. 아마 크레이덴 출신일 것이다.

"왜, 니 애인 미르카 보고 싶어서 미치겠냐?"

"그러는 너는 집에 가기 싫냐? 지금 우리는 통 안에 든 새우 꼴이잖아. 르다니아 호위함이 배 세 척 거리에 있다고. 공작의 아들이 구해 오라던 물건도 챙겼어. 그런데도 왜 아직 여기서 미적거리고 있는 건데?"

"벨레타인까지 기다리라잖아. 그럼 얌전히 기다리자고. 불태운다는 거 태우고 그 녀석이 신호를 보내면, 그때 갈 거야."

단델라이온은 침을 삼키고 소리 없이 욕을 내뱉었다. 코비어 정보부였군. 좋아, 지금은 이거면 충분해.

단델라이온의 원래 계획은 배를 조사하고 교단이 개입했다는 증거를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단델라이온은 계획을 전면 수정하기로 했다.

상자에 들어가겠다는 아이센그림을 말린 것도 후회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다정한 교수형 집행인 호에 잠입한 단델라이온이 자정까지 빠져나오지 못하면 이 엘프가 구하러 오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기다리기로 했다.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단델라이온을 현실로 끌어냈다. 다른 누군가 갑판 아래로 내려온 것이었다.

"저 상자가 여기 왜 있는지 설명 좀 해보실까?"

"그 헤브카르 여자가 가져온 겁니다, 선장님. 책이 더 있다더군요."

"아, 책이라 이거지? 확인은 했고?

"당연히 했죠."

판자 위를 걷는 소리. 가까이, 더욱 가까이.

"내가 이런 상자를 전에 본 적이 있거든. 아듀의 자유 병사단에 들어가기 전엔, 나한테도 이런 상자가 하나 있었고 말이야. 이게 알고 보면, 아주 유용한 물건이야. 상자에 가짜 바닥이 있는데, 옆에 구멍이 있기 때문에 손쉽게 밀수품을 꺼낼 수 있거든. 위에 깔아놓은 합법적인 물품은 하나도 안 건드리고 말이야. 그냥 누르기만 하면 돼. 바로 여기를 말이지."

숨겨진 칸이 열렸다. 단델라이온의 눈에 몇 켤레의 신발이 보였고, 그다음에는 몇 쌍의 눈이 보였다.

조금 전 산느와 대화를 나누었던 선원이 활짝 웃었다

"이건 또 뭐야? 내가 부두에서 그 늙은 여자한테 시체라도 들었냐고 물어봤거든? 근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네."


챕터 8

손목을 묶은 끈이 단델라이온의 살을 파고들었다. 코비어 함선에 잠입하려던 담대한 계획이, 이제는 멍청하게만 느껴졌다. 단델라이온은 생각했다. '머리에 천 자루를 뒤집어쓰고 있으면, 생각이 참 빨리도 바뀐단 말이야.' 그리고는 이어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낮은 말소리, 사다리가 삐걱대는 소리, 갑판 아래 발소리.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

"교수님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라눌프의 걱정 어린 목소리는 정말 진심을 담은 것처럼 들려서, 단델라이온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재능이 있는걸?'

"일단 좀 풀어주면 좋겠군."

"그건 안 됩니다. 대학에서 안락하게 종신 고용을 누리려는 한물간 예술가라니, 사실 거의 속을 뻔했어요. 하지만 얼마 안 가 위장을 그만두고 작업을 시작하시더군요. 제가 교수님 서류를 입수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르다니아 정보부 비밀 요원이라니. 그것도 시기스문드 딕스트라의 수하라니."

"그것도 좋게 봐줘서 정보원이야. 게다가 오래전 일이고."

"겸손하시기까지. 지금 제게는 교수님을 제대로 모실 시간이 없네요. 하지만 란 엑제터에 있는 친구들이라면 교수님을 무척 반가워할 겁니다. 아, 질문도 좀 할 거고요. 교수님의 삶과 예술에 대한, 뭐 그런 거 있잖습니까."

단델라이온은 이 코비어 친구의 말을 굳이 정정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자신이 몸 성히 살아있는 것도, 결국 이 친구가 아직 자신을 가치 있는 포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단델라이온은 이 막돼먹은 친구의 말을 정정하는 대신 정보를 좀 더 캐내기로 했다.

"라눌프, 정말 비열한 행위로군. 난 자네가 어떤 행동을 해도 응원했을 거라네. 그런데 검열관과의 동침이라니?"

"완전히 잘못 짚으셨네요. 교단이 옥센푸르트 대학을 장악하면, 대학의 특권도 사라질 겁니다. 그러면 전 대륙의 인재들이 코비어로 몰려들겠죠. 란 엑제터 대학은 우리 자비로운 군주이신 탄크레드 티센 폐하의 가호 아래 번영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탄크레드 티센 폐하 만세"

"탄크레드가 자네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겠군. 원래 왕이란 자네 같이 더러운 일 담당하는 걸레를 부리고 싶은 법이거든."

"개인적인 감정은 삼가시죠. 국가의 중대사이지 않습니까."

"아이고, 참 고상하시군! 바지에 지리지나 말게. 여긴 왜 온 건가? 꼴 좋다는 소리나 하려고 왔나?"

라눌프는 되지도 않는 장난을 치려다가 그대로 들켜버린 학생처럼 키득대며 웃었다.

"조금은요. 교수님의 패배네요. 참, 래드클리프의 필사본은 무사합니다. 검열관 뜻대로 불타 사라지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시죠. 우리 코비어에서는 지식을 숭상하거든요."

"무슨 필사본을 말하는 건가?"

라눌프는 한숨을 쉬었다.

"또 시작이시군요. 언제까지 바보 행세만 하실 생각입니까? 가끔은 다른 역할도 해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라눌프의 몸을 지탱하는 사다리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좋은 여행 되십시오, 교수님. 선장 말도 잘 들으시고요. 악명 높은 해적 사냥꾼이거든요. 말 안 듣는 죄수한테까지 친절한 사람이 아니란 말이죠."

*

"우현 최대로! 북쪽 지류로 들어간다."

선장이 지시를 내리는 소리, 갑판 위 발소리, 넘실대는 파도 소리. 그리고 자루 안을 채우는 상한 비트의 냄새.

"거기 꼬맹이, 측연 챙기고 수심 잘 보고 있어. 임무 중에 졸지 마라! 삼각주는 까다로운 곳이다. 끝으로 갈수록 더 조심해야 해!"

단델라이온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옥센푸르트는 뒤로 멀어지고 있었고, 벨레타인의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필연처럼 말이다. 단델라이온은 어쩔 도리가 없어 주먹을 꽉 쥐고만 있었다. 꽉 묶인 지 한참 지나, 이미 감각이 사라진 주먹을 말이다.

"앞에 수심이 얕다! 오른쪽 강둑으로 붙어!"

갑자기 방향이 바뀌었다. 물결이 함선의 측면을 때리자 단델라이온은 속이 뒤집어지는 듯했다.

"흔들리지 마라! 항로 유지! 똑바로 간다!"

격렬한 흔들림에 이어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 충격에, 통에 앉아 있던 단델라이온도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단델라이온은 신음과 함께 바닥을 굴렀고, 머리에 씌워진 자루를 벗겨내기 위해 맨땅에 버려진 생선처럼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암초에 부딪혔습니다, 선장님!"

"암초가 어딨어?! 습지에 무슨 암초가 있다는 거야!"

다정한 교수형 집행인 호가 느려지더니 폰타르 강 너머에서 표류하기 시작했다. 단델라이온의 뺨에 축축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자루가 물에 젖은 것이었다. 등을 대고 눕자, 시인의 귀에 철벅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에 물이 차기 시작한 것이었다. 뱃머리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불길하게 들려왔다.

"어이, 어이!" 단델라이온이 소리쳤다. "나 좀 꺼내줘! 여기 물이 샌다고!"

하지만 선원들은 제 코가 석 자였다. 갑판에서 다급하게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지선이 온다! 꽉 잡아!"

사다리가 삐걱대더니, 묵직한 발소리가 철벅대는 소리와 함께 무릎까지 차오른 물을 뚫고 시인에게 다가왔다. "미안하다, 단델라이온." 시인의 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단한 무언가가 음유 시인의 머리를 내리쳤고, 시인은 꿈나라로 직행했다.

*

단델라이온은 모닥불 옆에서 눈을 떴다. 시인 옆에는 수초에 뒤덮인 바위 트롤이 있었다. 트롤은 무릎을 가슴팍에 올리고 주저앉아 있었고, 기분이 좋지 않은 듯 보였다. 갈대 사이로 매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는 선원들이 소리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녕." 단델라이온이 말했다. 다른 말은 생각해낼 수도 없었다.

"안녀엉." 대답하는 트롤의 목소리가 깊게 울렸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바트도 아프다." 트롤이 투덜댔다. "바트더러 물에 들어가랬다. 바트 오오래 기다렸다. 그리고 쾅!"

"쾅?"

"배가 바트 머리 쳤다."

"유감이야."

"바트도 유감이다."

단델라이온은 이 상황을 설명해줄 사람을 찾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갈대를 옆으로 젖혔다.

노을이 비친 강은 마치 황토색 물감을 풀어 놓은 것 같았다. 다정한 교수형 집행인 호의 절반은 물에 잠겨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얕은 바닥에 박혀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돛대의 돛은 느슨하게 늘어진 상태였다. 코비어 선원들은 화물을 건져내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며, 노 젓는 배에 물건을 싣고 강가로 옮기고 있었다. 폰타르 강 중간에 닻을 내린 바지선의 선원 무리가 이들을 도와주었다. 단델라이온은 그 바지선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즐거운 과부잖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갈대에서 손을 놓자, 갈대는 다시 똑바로 섰고 강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단델라이온은 말의 울음소리를 듣고 몸을 돌렸다. 아이센그림이 말 두 마리의 고삐를 잡고 모닥불로 다가오고 있었다.

"네가 내 머리를 친 거지? 배에 솔방울만 들어찬 놈 같으니."

"물 속에서 버둥대면 되레 위험했을 거야."

"나 수영 잘하거든!"

"시간이 없었다. 지금도 그렇고. 안장에 올라가."

"그런데 어떻게..."

"강에서 사고가 발생하도록 만들었지."

"그럼 이 트롤은 뭔데?"

"시기가 낙타 상인한테서 카드 쳐서 딴 녀석이다. 이름은 바트야."

"시기 착해." 바트가 거들었다.

아이센그림은 단델라이온이 말에 오르는 걸 도와주었다.

"저놈들이 네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리기 전에 빠져나가자."

"바트는? 놈들이 공격해오면 어쩌려고?"

"별일 없을 거야. 강을 따라서 시기한테 돌아갈 테니까. 자, 가자! 산느가 은신처에서 기다리고 있어."

"아니, 옥센푸르트로 갈 거야."

"미쳤군. 방금 죽다 살아난 몸 맞나?"

"옥센푸르트로 가자니까!" 이렇게 소리치는 단델라이온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모습과는 다른 굳은 단호함이 섞여 있었다.

강둑을 따라 이어진 습지를 가로지른 단델라이온과 아이센그림은, 옥센푸르트로 가는 자갈길에 말발굽이 부딪히는 소리가 날 때까지 말을 달렸다. 이들은 다른 행인들의 욕지거리도 무시하며, 지평선 너머로 서서히 몸을 감추는 태양과 경주라도 하듯 쉼 없이 달려갔다. 얼마 후, 둘은 축제가 한창인 도시에 들어섰다.

성문에 도착하자 종소리가 이들을 맞이했다. 봄을 기념하는 종소리일까? 아니면 경보일까?

성벽 안으로 들어선 단델라이온과 아이센그림은 화려한 등불을 들고 있는 술 취한 학생들의 행렬에 휩쓸리고 말았다. 말들은 폭죽이 터지는 소리에 연신 머리를 흔들어댔다. 음유 시인은 캠퍼스 쪽을 바라보다, 대학 건물 위로 불길이 솟구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화재인가? 아니면 단순히 축제용 모닥불일까?

"고삐 받아! 뛰어가는 게 더 빠를 것 같아." 단델라이온은 이렇게 외치고 안장에서 뛰어내렸다. 맥주 수레 아래로 뛰어든 단델라이온은 사람이 가득한 술집을 가로질러, 뒷문을 지난 뒤 주방 문을 통해 거리로 나섰다. 여기서부터 대학 교정을 둘러싸고 있는 내벽까지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단델라이온은 구멍을 덮고 있던 담쟁이덩굴을 치우고 구멍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이윽고 영안실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단델라이온은, 신학부로 이어지는 자갈길을 있는 힘껏 내달렸다.

건물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창문에서는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학자들은 축제따윈 까맣게 잊은 채 진화 작업을 지휘하기 위해 이리저리 급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상처 입고, 지치고, 망연자실한 단델라이온은 정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너무 늦어버렸다. 모든 노력이 수포가 되었다. 라눌프가 기어이 일을 저지른 것이다.

주저 앉은 단델라이온은 불길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단델라이온의 어깨에 갑옷을 입은 무거운 손이 느껴졌다. 병사의 가슴에는 르다니아 독수리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같이 가시죠."


챕터 9

경비병들은 단델라이온을 필사실로 데려갔고, 이리아나 옆에 있는 의자에 밀어 앉혔다. 이리아나는 이미 한참 전에 이곳에 온 모양이었다. 이리아나가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단델라이온을 바라보았다.

밖에서는 화염이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등 뒤로 손을 포갠 검열관은, 두 사람에게 등을 돌리고 서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스스로를 진실을 구하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진실이 이터널 파이어 교단의 적을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믿고 있지요."

검열관의 목소리가 오싹하게 울려 퍼졌다. 필사실에 있는 책을 빼냈기에, 필사실의 벽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도서관 장서 절취. 대학 부지 방화. 궁금하군요. 대체 무슨 동기로 대학에 반기를 든 겁니까?"

책상 위에는 이리아나가 성기를 그려 넣은 공책이 펼쳐진 채 놓여있었다. 건물 밖에서는 잡역부들이 물통을 들고 불에 타고 있는 신학부 건물로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물통 위에 펌프를 얹었다.

이 모든 상황에 정신이 사나워진 단델라이온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기침을 했다.

"혹시 좀... 다른 곳에서 심문을 진행해도 되지 않을까요?"

"여기가 심문 장소로 딱 제격입니다. 더 좋은 곳이 있나 모르겠군요."

이리아나가 한 번 더 용기를 내었다

"우리가 대학에 반기를 들다뇨! 그게 무슨 망발입니까, 검열관! 우리는 당신 같은 광신도로부터 대학을 지킨 거예요!"

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힘의 난제라는 잘 알려진 문제가 있지요. 망치를 든 자에게는, 모든 문제가 못처럼 보인다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저는 애초에 망치를 들고 싶은 유혹을 멀리하려고 하죠.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은 시각에서 이 비유에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자기를 못이라 생각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망치로 보인다는 거지요."

"당신은 양의 탈을 쓴 늑대야." 이리아나가 쉬익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그럼 금서 목록은 대체 뭐죠? 불태우려고 쌓아놓은 책들은 또 뭐고요? 당신들이 신성모독자이자 이단자로 몰아세운 니코데무스 드 부트는 어떻게 설명하실 건가요?"

"이 말도 안 되는 사건에 휘말리기 전... 전 오로지 단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주교께서 파기해야 할 서적의 목록을 만들라고 지시하신 건 맞습니다. 하지만 주교께서 말씀하신 책은 흑마법서였습니다. 정확히는 테오도르 래드클리프의 필사본이죠."

"헛소리." 단델라이온이 대답했다. "당신이 여기에 어떤 책을 모아 두고 있었는지 다 봤어. 시, 역사, 과학. 심지어 드 부트까지!" 소리 지르던 단델라이온이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갑작스러운 깨달음이 분노를 억눌렀다. 다정한 교수형 집행인 호에서 라눌프가 언급했던 게 있었다. '래드클리프의 필사본.'

검열관은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어떤 일에 휘말린 건지도 모르는 꼴을 보니, 더욱 끔찍하군요. 체스 말처럼 놀아난 데다가, 어리석기까지 하다니. 테오도르 래드클리프는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옥센푸르트에서 연구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유산을 남겼죠. 대학을 떠날 때, 래드클리프는 자신의 연구 기록이 잘못된 이들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손을 써두었습니다."

"손을 쓰다뇨? 그게 무슨 말이죠?"

"트로프케 양이 설명하는 편이 나을 것 같군요. 종종 래드클리프의 연구실에서 조수로 일했으니 말입니다. 안 그래도 교수님이 오시기 전, 그때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리아나? 알고 있는 걸 말씀드려서 우리 교수님의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 주시겠습니까?"

"래드클리프의 전문 분야는 마법 필사였어요. 암호나 봉인의 형태로 말이죠. 래드클리프에겐 단어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었거든요. 카트리오나 역병이 돌던 때, 경비원이 노비그라드로 들어가려던 우리의 길을 막은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래드클리프가 경비원 눈앞에 라도비드의 서명이 있는 통행증을 꺼내 들었죠. '어떻게 왕이 발행한 통행증을 얻으셨어요?' 하고 물어봤어요. 래드클리프는 너털웃음을 짓더니 경비원에게 들이밀었던 종이를 제게도 보여줬어요. 그건 통행증이 아니라 비발디 은행에서 온 통지서였죠. 그러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왕은 자기한테 오는 문서라면 일단 서명하고 보는 것 같아.'"

검열관은 농담을 즐길 기분이 아니었다.

"방역에 실패한 이유가 다 있었군요. 본론으로 넘어가 주시겠습니까?"

"책에 숨겨진 의미를 찾는다는 건 생각조차 못 해봤어요." 이리아나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래드클리프의 성격과 유머 감각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자기 비밀을 훤히 보이는 곳에 숨기고도 남을 사람이니까요."

"저는 세 달 동안 도서관 장서 목록을 뒤져가며 쭉정이를 가려냈습니다." 검열관은 책상에 몸을 기대고는 핏기가 사라질 만큼 주먹으로 책상을 세게 짓눌렀다. "철학? 얼마든지요. 천문학? 네, 좋습니다... 호기심 많은 이들이 창조의 기적을 연구한다니 반길 일이지요. 저열한 연애 소설? 이터널 파이어에게 위협이 될 소지가 있다고 보긴 힘들죠. 역사? 역사란 모두가 배울 수 있어야 하지요. 마땅히 배워야 하구요. 하지만 마법은... 마법은 다릅니다. 당신들이 훔친 기록이 잘못된 자의 손에 넘어가면 엄청난 위협이 될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 필사본이 어디 있는지 말씀해 주시죠."

"코비어로 가고 있습니다." 단델라이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우리 전부 놈들에게 당했습니다. 검열관 당신도 마찬가지요. 필사본을 찾아야 하는 임무를 받은 코비어 요원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반쯤 도와줬고, 필사본을 그놈 배로 옮긴 우리가 나머지 반쯤 도와준 셈이죠."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이리아나가 물었다.

"라눌프 말일세! 그 건방진 놈이 내 앞에서 전부 실토했다네. 다 이유가 있었어. 이미 다 늦어버린 거야. 놈은 학계와 교단 사이를 갈라놓은 것도 모자라, 무슨 마법서를 우리 눈앞에서 훔쳐 갔단 말일세. 그때는 그놈이 왜 래드클리프를 입에 올렸는지 알지 못했지... 하지만 검열관의 말을 생각해보니 전부 아귀가 맞는군."

어느새 긴장을 풀게 된 검열관은 책상에서 손을 떼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차라리 이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잘 됐군요. 암흑 마법은 란 엑제터에 맡기면 될 테니 말입니다. 그 라눌프라는 작자는... 생각하자니 참 우습군요."

"대체 어느 부분이 웃기다는 건지 알 수 있을까요?" 이리아나는 짜증이 난 말투였다.

검열관은 밀랍으로 봉인한 원통에서 접힌 편지를 꺼낸 후, 큰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저는 르다니아 왕국에 찾아와 수학 중인 유학생입니다. 저는 유학 생활을 하며 사람을 사귀고자 학생 단체에 가입했습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무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단체의 구성원들이 레텐호브 교수의 영향을 받아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점이었죠. 레텐호브 교수의 체제 전복적인 사상과 이 대학을 후원하는 이터널 파이어를 향한 적개심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레텐호브 교수는 자신의 명성과 매력적인 카리스마를 이용해 학생들을 급진화하고..."

"매력적인 카리스마라니." 단델라이온은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대학 캠퍼스에서의 기물 파손을 부추겼습니다. 이리아나 반 트로프케 양과 함께, 레텐호브 교수는 서관 장서 절도를 공모 및 실행했습니다. 또한, 그 사악한 계략을 현실화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학 연구실에서 불법 중독 약물을 제조했습니다. 이 훼방꾼들이 저명한 신학부 건물에 불을 지를 계획이라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 사랑하는 우리 대학의 운명에 대한 걱정과 우려 속에 검열관님께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오늘 밤에 방화를 저지를 계획이며, 고매하신 검열관님께서 이번 일을 막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러한 믿음과 신념 속에, 크게 비난받아 마땅한 이번 일에 관여한 자들의 목록을 동봉합니다. 무엇보다도 진심 어린 마음을 담아, 라눌프 헤르만 로이엘발트."

"이 망할 새끼! 갈가리 찢어버리겠어!"

"우리가 이렇게 대화를 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 정중한 고발장 때문입니다."

"설마 이 헛소리를 믿는 건 아니겠지요?"

"저는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최근에 발생한 사건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하죠. 상부에서는 제가 단호한 결정을 내리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대학의 질서를 바로잡고, 책임자를 처벌하길 바라고 있죠."

"진실을 구한다고 했잖습니까! 그런데 상부에 잘 보이려고 진실을 외면할 생각이십니까?"

"저도 손발이 묶인 상황입니다. 게다가 교수님께서는 코비어 정보부가 개입했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내세우시면서도 그 어떤 증거도 내놓지 않고 계시죠. 이틀 후 대학 중앙 강당에서, 학계 전체가 모이는 회합의 자리를 열 예정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대학의 자율권을 박탈한다는 결정을 발표할 것이며, 대학 평의회에도 해산 조치를 내릴 것입니다. 이터널 파이어 임원 중, 국왕 폐하의 승인을 받은 자들이 대학 감독관 자리를 채우게 되겠죠. 새로운 대학 감독관이 교단의 뜻에 따라 대학을 개혁할 것입니다."

단델라이온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아무리 검열관이라도 이럴 순 없습니다. 옥센푸르트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단 말입니다."

"아, 제가 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 레텐호브 교수님이 하게 되실 겁니다. 회의를 주재하는 영광을 드리죠. 직접 사임을 발표하시면 됩니다."


챕터 10

옥센푸르트를 휩쓸었던 벨레타인의 열기가 잦아들고 있었다.

도시를 찾아온 아침은 반갑다는 듯이 소나기를 뿌렸고, 마지막까지 축제의 여흥을 즐기고자 했던 술꾼들은 쫓기듯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시장은 여전히 북적이고 있었다. 피곤했지만 아직은 들뜬 분위기의 상인들이 가판대를 치우고 축제 기간에 벌어들인 돈을 세고 있었다. 단델라이온과 이리아나는 꽃장식을 두른 가판대가 연달아 서 있는 거리를 지나 붉은색 벽돌집 사이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정원으로 이어지는 문 앞에 멈췄다. 시인은 또 쐐기풀에 당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단델라이온, 들어가지 말아요."

빗줄기는 거세졌고, 그 무게를 버티지 못한 풀은 눕고 있었다. 시인은 옷깃을 세운 뒤, 모자를 손으로 훑어 챙에 고인 물을 털어냈다. 머리가 아팠다. 단지 날씨 때문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이리아나 양..." 단델라이온은 신음하듯 말했다. "혹시라도 자네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다시 한번 말해주겠네. 여기서 멀지 않은 곳, 시장 바로 뒤쪽에 대학이 있네. 저 사랑스러운 연기구름은 신학부 건물의 불타버린 잔해에서 나오고 있지. 그리고 검열관은 저 사태가 우리의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네. 자네와 나의 잘못이라고 말일세."

"하지만 검열관도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잖아요."

"검열관의 생각은 상관없네. 이 모든 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그것이 중요한 거지."

"말씀드렸잖아요. 전 안 들어갈 거예요."

단델라이온은 질렸다는 듯 팔을 늘어뜨렸다.

"지금 이렇게 자존심을 부리고 있을 땐가?! 자네한테 아버지 품에 안기라는 게 아니야. 하지만 하나는 알아두게. 딕스트라는 우리를 도와줄 수 있어."

"아뇨, 교수님이나 알아두세요. 전 가기 싫어요. 이 집에는 절대 못 들어가요."

시인은 한숨을 쉬었다. 마치 벽에 머리를 찧는 기분이었다. 옷은 이미 젖은 지 오래였고, 냉기가 뼛속까지 들어오고 있었다. 참을 만큼 참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아나의 태도에 질린 단델라이온은 다른 전술을 펼치기로 했다. 평소 자신이 설득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효과가 좋던 그 전술을 말이다.

단델라이온은 문제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로 했다.

"뭐, 그래. 한창때와 비하면 많이 낡은 건물이긴 하지. 그러니 당장 뛰어 들어가고 싶지 않아 보인다 해도 이해는 가네. 하지만 최소한 지붕은 멀쩡하잖나. 이런 날씨에는 이 정도도 감지덕지란 말일세."

이리아나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리아나가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문소리가 들려왔다.

"이리. 단델라이온. 들어와."

시인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

집안엔 수프 냄새가 가득했다.

딕스트라는 이리아나와 단델라이온을 촛불이 밝혀진 식탁으로 안내했다. 단델라이온은 딱 봐도 첩보원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딕스트라의 몸은 평소보다 굳어 있었고, 원래 움직일 때 보여주던 강한 리듬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바뀐 것은 딕스트라뿐만이 아니었다. 잠시 전만 해도 소리를 지르며 기운이 넘치던 이리아나는, 문지방을 넘자마자 기가 꺾인듯 곧장이라도 주저앉을 기세였다.

딕스트라는 국자로 수프를 저은 다음 그릇에 나누어 담고 식탁에 올려놓았다.

"몸 좀 데워." 딕스트라는 이렇게 말하고는 수프를 먹기 시작했다.

단델라이온은 숟가락으로 수프를 휘저었다.

"수프로 시작하는 것도 좋지." 단델라이온이 말했다.

"무슨 얘길 하는 거지?" 딕스트라가 말했다.

"옛 생각이 나서 그래. 생선 수프였어. 오래전 일이지. 길가에서 말이야. 밀바, 카히르, 셀락의 아들 녀석과 같이 송사리와 꼬치고기를 잡았지. 마침 야채도 있었고, 솥도 찾은 게 있었어... 레지스가 향신료를 내놨고, 우린 카히르가 입던 사슬갑옷을 거름망으로 썼어. 심지어 게롤트까지 요리를 거들었지. 참 많은 걸 배운 날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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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바: 명사수
밀바가 붉은 사슴보다 큰 사냥감이나 갑옷 입은 사람을 노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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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히르 디플린
날개로 장식한 투구 아래로 번뜩이는 그의 눈이 보였다. 타오르는 불길로 그의 손에 들린 검날이 붉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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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락 디플린
황제 폐하... 지금까지 철저히 무시당하던 집사가 입을 열었다. 용서하십시오. 하오나 제 아들... 카히르는...

레지스 (Marta Dettlaff).png
레지스
어떤 자들은 날 괴물 취급했지. 피에 굶주린 흉물이라고.

리비아의 게롤트 (Marek Madej).png
리비아의 게롤트
세상을 구하는 데 그런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망하게 두는 게 낫겠군.

딕스트라가 눈을 껌뻑였다.

"여기서 뭘 배우고 싶어서 그러는지 알 수가 없군. 이건 그냥 양파 수프야."

이리아나가 수프 그릇을 밀어냈다. 첩보원은 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이리. 와줘서 고맙다." 딕스트라가 말했다.

"이리라고 부르지 말아요."

"알았다."

이리아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에서 멀어졌다.

"오는 게 아니었어요." 이리아나가 말했다. "단델라이온... 하려던 일, 마저 하세요. 그리고 당장 떠나죠. 저는 밖에 있을게요."

시끄러운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고, 지붕 어딘가에 벼락이 떨어져 크게 부서지고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인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진심이야?"

"뭐, 어쩔 수 없겠네요. 위층에서 기다릴게요. 하지만 부탁이니까... 서둘러 주세요."

딕스트라는 아무 말 없이 위층으로 올라가는 이리아나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이리아나가 문을 닫자, 시인은 둘이 너무 오래 고통받지 않도록 본론부터 말하기로 했다.

"그..."

"다 알고 있어." 첩보원이 말했다. "아이센그림이 보고를 받았거든."

"그럼 어떻게 할지 생각도 해놓은 건가?"

"말했잖아. 우린 증거가 필요해."

"증거는 없어. 있더라도 이미 다정한 교수형 집행인 호에 실려서 코비어까지 흘러갔겠지."

"그럼 자네한테 문제가 생긴 거지."

"딕스트라, 엄청난 추리력이야. 놀라 자빠질 뻔했지 뭔가. 첩보원의 수장이라 불릴만한 통찰력인걸."

"입 닫아. 생각 좀 해야겠어."

위층에서 비명이 들렸고, 뒤이어 무언가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이어졌다. 단델라이온이 눈을 깜빡이기도 전에, 딕스트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첩보원의 손에서는 제리카니아산 단검이 번뜩이고 있었다.

방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간 딕스트라와 단델라이온은, 바닥에 앉아 있는 이리아나를 볼 수 있었다. 이리아나는 앞에 놓인 그림 위에 몸을 숙이고 숨죽여 흐느끼고 있었다.

단델라이온은 딕스트라의 팔 밑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이리아나 곁에 간 다음, 무릎을 꿇고 이리아나를 안아주었다.

이리아나가 던져버린 그림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코가 두드러진 남자가 있었다. 이 집의 전 주인인 듯했다. 남자의 옆에는 한 여인과 소녀가 자세를 잡고 있었다. 남자의 아내와 딸일까? 시인은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다 동작을 멈췄다.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단델라이온은 그림을 놓고 이리아나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자네 집이었나?"

"예전에는요." 이리아나가 대답했다. "우리 집이었죠. 그런데 저 돼지가 집을 빼앗고 아버지를 드라켄보그로 보냈어요."

"그 남자는 네 아버지가 아니야." 딕스트라가 말했다.

이라아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는 당신 같은 돼지가 흉내도 낼 수 없는 분이셨어. 내가... 불륜으로 생긴 자식인 걸 알았을 때도 변치 않으셨다고."

"딕스트라..." 단델라이온이 말했다. "...자네가 이리아나를 쫓아냈었나?"

첩보원은 허리띠에 단검을 꽂아 넣고 어깨를 으쓱였다.

"누굴 쫓아내고 그런 게 아니야. 저 아이 어머니의 남편, 그러니까 반 트로프케 백작이 케드웬 정보부와 손을 잡았었어. 왕실 의회 의원이었기 때문에 국가 기밀에 접근할 수 있었고, 결국 기밀을 폭로하는 대역죄를 범했지. 대역죄에 해당하는 형벌은 재산 몰수에 사형이야."

이리아나가 눈물을 훔치며 몸을 일으켰다.

"어머니는 몇 번이고 말했어. 당신과의 동침은 인생 최악의 실수라고 말이야. 그리고 나도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어. 난 빌어먹을 실수로 태어난 몸이라고 생각했다고. 하지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날 그렇게 대하지 않았어.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교수대로 보낸 거야. 바로 당신이. 네가 죽인 거라고, 이 돼지 새끼야!"

딕스트라는 고개를 푹 숙였다. 다시 입을 연 딕스트라의 목소리는 지쳐있었다.

"내가 죽인 게 맞다. 사실이야. 공식적으로는 말이지."

"그건 무슨 얘기야?"

"드라켄보그에서 대역죄인을 처형하던 그 날,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어. 반 트로프케 백작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의를 받은 거지. 그렇게 백작은 르다니아를 떠났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방안에는 침묵만이 이어졌다. 지붕과 창틀에 떨어지는 빗소리만 울려 퍼졌다. 한참 후, 이리아나가 입을 열었다.

"살아 계세요?"

"모르겠다. 그럴지도."

"왜 말 안 해줬어요?"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이제 어쩌라고요? 고맙다고 말하면 되나요?"

"그러면 좋지. 하지만 기대는 안 한다. 그래도 최소한 미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이리아나는 슬쩍 그림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부서진 액자 조각을 들고 손안에서 만지작거렸다.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이리아나가 말했다. "그래도 5분 정도... 저와 얘기할 기회는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

식탁으로 돌아온 이리아나는 그릇을 잡고 말없이 수프를 입에 넣었다. 시인은 헛기침을 했다.

"그럼 당장 급한 문제 얘기로 돌아갈까. 어때?" 단델라이온이 말했다.

"증거." 딕스트라가 말했다. "말했잖아. 증거를 찾으라고. 안 되면 만들든지."

"대체 뭘 어떻게 하라고? 미안한데, 난 시학 교수야. 정보 요원이나 쓸 수 있는 막대한 자원 같은 건 없어. 고작 도서관 대출증이 전부라고."

"그러면 자네한테 문제가..."

"딕스트라, 제발 부탁인데 문제 생겼다는 말만 내뱉을 거면 조용히 해. 진짜 못 참겠다고! 경고하는데, 자꾸 이러면 자네 가지고 발라드를 써버릴 거야."

첩보원은 입을 다물었다. 이리아나는 수프를 마저 먹고, 더 달라는 듯 그릇을 밀어내고 숟가락으로 톡톡 쳤다.

"왜 이렇게 야단인지 아직도 모르겠네요." 이리아나가 빵을 뜯어, 밑바닥에 남은 수프에 적시며 말했다. "학교 건물이 불탔어요. 그게 뭐가 대순데요?"

단델라이온은 이리아나를 바라보았다. 단델라이온은 방금 목격한 태도의 변화 때문에 놀라지 않았다. 살면서 온갖 촌극을 겪어봤고, 그 경험 속에서 공통분모를 찾을 생각도 없었다. 고통을 받아도 금방 잊고 빗물처럼 털어낼 수 있는 사람도 많이 만났었다. 이리아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래드클리프와 일할 때, 불나는 건 일도 아니었어요." 이리아나가 말했다. "래드클리프가 살던 구역은 집값이 폭락하곤 했죠. 매주 한 번은 불이 났었거든요. 보통은 실험 직후에 말이에요. 그래서..."

단델라이온의 입이 열렸다.

"래드클리프!" 단델라이온이 소리쳤다. "그거야! 이리아나, 자네는 천재야!"

"네?"

시인은 손가락을 뚜둑거렸다. 그리고 극적인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후 하는 숨소리와 함께 식탁 위의 촛불 하나를 껐다. 단델라이온은 몸을 앞으로 숙이며, 거의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딕스트라와 이리아나도 단델라이온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양파 수프를 사이에 두고 모인 세 명의 비밀 결사단과 같은 모양이었다

"잘 들어." 단델라이온이 말했다. "이렇게 하는 거야..."


챕터 11

저녁에 되고 비가 내리자, 대학을 감싼 자욱한 연기가 가라앉았다.

캠퍼스는 북적이고 있었다. 이터널 파이어의 사제들과 르다니아 병사들이 서로에게 무어라 외치며 명령을 내리고 있었고, 식량이 실린 수레가 진흙탕 여기저기를 덜컹거리며 굴러다녔다. 성문에 모인 교수와 학생들은 입조차 열지 못하고 자신들의 세상이 무너지는 걸 바라봤다

단델라이온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창문에 이마를 기댄 채 한숨을 내쉬었지만, 슬픔을 느끼기도 전에 계단 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단델라이온은 우울감을 떨쳐내고, 손바닥으로 뺨을 감싸며 책상 뒤에 앉아 생각하는 남자 흉내를 냈다. 지금까지는 이런 자세를 취해 성공적으로 학생들을 속여올 수 있었다.

문이 열리고 라눌프가 들어왔다. 라눌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마치 교수에게 질책받기 위해 불려온 학생처럼 존경심을 비추면서도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단델라이온만큼이나 착실히 자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절 보자고 하셨다고요, 교수님."

"그래, 그랬지, 라눌프." 단델라이온이 책상에 올려진 양피지를 만지며 말했다. "잘했더군."

코비어인은 종이를 받아 펼쳐보았다.

"제... 기말 논문이네요?"

"그래. 잔 드 사눌리에 작품 속에 묘사된 신트라 시대를 아주 흥미롭고 탐구적으로 분석했더군. 솔직히 말해서 정말 감명 깊었네. 자네는 패스야."

라눌프는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양피지 더미를 바라보고는, 자신의 양피지를 돌돌 말아 가방에 집어넣었다.

"군대와 교단이 대학을 장악한 상황에도... 교수님은 논문을 채점하고 계시네요? 정말 놀랍군요, 교수님."

"뭐가 놀랍지?"

"음, 일단 아직도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까? 머나먼 북쪽으로 가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래, 마음속에서 승리감이 끓어오르겠지...

시인은 팔을 넓게 펼치며 답했다.

"학기가 끝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남아있더군. 도서관 대출증도 처리해야 하고... 자네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론시우스는 철두철미한 남자라네. 책 한 권을 돌려받을 수만 있다면 코비어 지하 감옥 깊은 곳까지라도 찾아올 위인이지. 그래서 휴가를 취소해야만 했네, 시작은 참 좋았는데 말이야."

"괜한 소리는 치우시죠. 이제 다 끝났습니다."

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델라이온은 이런 대화의 끝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이 남아있음도 잘 알고 있었다. 단델라이온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이 문제에 한 가지 해결책이 있습니다." 라눌프가 말했다. "아마 교수님도 알고 계시겠죠. 액수를 말하세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당신이 온다는 걸 알고, 란 엑제터에 있는 친구들이 꽤 입맛을 다시더군요. 그게 당신의 지식이 가진 가치입니다. 그 친구들은 공짜로 얻을 수 없다면, 기꺼이 돈을 낼 겁니다. 그러니까 한 번 더 말하죠. 액수를 말하세요."

"얼마를 준다 해도 날 돈으로 살 순 없네."

"그럼 돈 말고, 다른 건 어떻습니까...? 가질 수만 있다면... 기꺼이 불길에라도 뛰어들 만한 그런 것 말이죠."

"이를테면?"

라눌프는 다리를 꼬고 양손을 맞잡았다.

"이를테면 옥센푸르트죠. 아, 모든 걸 없던 일로 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제 친구들이 도와준다면, 몇몇 변화가... 희석될 순 있겠죠."

"솔깃한 제안이네만, 내 한물간 지식이 자네 친구들에게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군."

"누가 지난날의 소문 따위를 신경이나 쓴답니까? 저흰 지금 새로운 것에 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코비어인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부두에서 당신과 함께 있던 그 엘프... 철의 늑대, 아이센그림 파올리타나죠? 얼마 전부터 그 어느 첩보원과 함께 다니더군요. 이들에게 르다니아는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 친구들이 이들을 보호하려고 하는 겁니다."

창문 밖에서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델라이온은 이 침묵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궁금했다.

"내일까지 답해주시죠." 라눌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어깨에 휙 걸치며 말했다. "딕스트라를 넘기면 도와드리겠습니다. 함께 옥센푸르트를 구하는 겁니다."

*

"진짜로 하시게요?"

이리아나가 연설을 하기 위해 옷장에서 대학 토가를 꺼내 걸치는 단델라이온의 옆에서 말했다.

"자네는 이미 자네의 마법을 다 부렸지. 이젠 마지막 손길만 더하면 돼."

"아버지... 아니, 딕스트라가... 왜 이 계획에 동참했는지 이해를 못하겠어요. 지금은 몸을 사려야 할 때라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성적인 선택이 아닌걸요."

"자네를 위한 거겠지."

이리아나는 당황한 듯 시선을 돌리고는, 급하게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도 역겹지 않으세요?"

"왜지?"

"우리는 옳은 일을 하고 있어요. 검열관 말처럼요. 진실을 따르고자 하면, 우리가 이겨야 한다고요. 그런데 뒤로는 적과 거래하고 음모를 꾸미고 있잖아요."

"나는 시인이라서 그런지, 그렇게 보이진 않는군."

"그러신가요?"

"허구는 종종, 적절하게 전달된다면 진실에 보탬이 될 수도 있다네. 빛을 밝힐 수 있는 법이지. 좋은 이야기, 그러니까 핵심을 찌르는 이야기는 진실의 늘어놓는 이야기보다 상황을 더 효과적으로 보여주기도 하는 법이네."

"완전히 헛소리네요, 단델라이온 교수님."

바드는 어깨를 으쓱한 뒤, 소매를 바로잡고 조심스럽게 늘어진 천의 주름을 폈다.

"그럴지도. 그건 그렇고, 나 괜찮아 보이나?"

"정말 교수님처럼 보이네요. 흰머리 덕분에 더 진중해 보이고요."

"자, 그럼 가지. 고발장도 전달해야 하네."

단델라이온은 문 안의 커튼을 치우고 긴 계단을 올라 강단에 다가섰다. 강당을 가득 채운 학생들은 음울한 침묵에 빠져있었다. 단델라이온은 살면서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었지만, 자신의 무덤을 파는 역할은 맡아본 적 없었다.

벽에는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외투를 입은 르다니아 병사들이 일렬로 기대고 서 있었다. 이들은 다른 종류의 침묵에 빠져있었다. 바로 무관심, 다년간의 군기잡힌 생활에서 우러난 충직한 침묵이었다. 검열관은 코메스 루이나드 사법국장에게 몸을 기울이고,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음유 시인으로서 생활을 했던 단델라이온은 침묵을 깨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적절한 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우리가 여러분을 실망하게 했습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아주 굳건한 첫 문장이었다.

"여러분은 현명한 자들에게 가르침을 구하러 이곳에 왔습니다. 하지만 인제 보니, 여러분이 교수들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교수들 역시 이 미친 세상에 자신이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죠. 다만 나이가 있는 탓에 관절염에 시달리며 얼굴에 주름살만 늘어났을 뿐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전 이 불쌍한 사람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루 이틀 만난 게 아니거든요."

학생들 사이에서 키득거리며 웅성대는 소리가 퍼졌고, 침통했던 분위기가 조금 가벼워졌다.

"저는 대학이 책을 보관할 장소가 필요했거나, 책을 많이 읽은 심심한 노인들이 쓰일 곳이 없어서 탄생한 거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이 틀렸습니다."

단델라이온은 눈을 돌려 이리아나를 찾으려 했지만, 군중 속에서 이리아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전 옥센푸르트를 떠날 겁니다. 그리고 이 교수 토가가 더 잘 어울리며, 술을 좀 덜 마시는 누군가에게... 이 고전 시학부를 넘기고자 합니다. 즉, 이 자리는 이 낡은 건물에서 제가 배운 교훈을 여러분에게 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뜻입니다."

단델라이온은 말을 멈췄다. 극적인 효과도 있었지만, 사실 첩보원 활동 때문에 대본을 준비할 시간이 없어 즉흥 연설을 하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첫눈에 진실이 드러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여러분은 처음 발견한 답을 받아들이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해야 하죠.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탐구심이 이 옥센푸르트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도록 하십시오. 그럼 가장 호기심 넘치는 자들이 이 대지를 물려받게 될 것입니다."

"헛소리는 이제 그만하게, 레텐호브," 근처에 서 있던 학장이 씩씩대며 말했다. 단델라이온은 학장의 말을 무시했다. 그리고 겨우 이리아나를 찾아냈다. 이리아나는 정문 옆 경비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가르침에 대해 커다란 본보기가 된 제 학생, 라놀프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학생을 가르쳐야 하는 입장인 제가, 오히려 가르침을 받게 되다니... 부끄럽기 그지없군요."

단델라이온의 눈이 라눌프의 눈과 맞닿았다. 코비어인은 팔짱을 낀 채 기둥에 기대어 있었다.

"라눌프 로이엘발트. 란 엑제터에서 온 젊은 시인, 라눌프는 진정한 애국자입니다. 그래서 코비어 정보국의 신병 모집 장교가 문을 두드렸을 때도 거절하지 않았으며, 옥센푸르트 대학에 방해 공작을 펼치라는 명이 떨어졌을 때도 기꺼이 소매를 걷어붙였죠."

강당 안의 웅성대던 목소리가 커졌다. 그리고 마치 산허리를 타고 내려오는 산사태처럼 점점 불어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꼿꼿하게 서 있던 병사들이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몇은 할버드를 들고 출구를 막아섰고, 몇몇은 군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우린 망했어요, 친구 여러분. 누군가 교묘하게 우리 사이의 불화를 부추겼으며, 결국 우리는 우리 손으로 옥센푸르트를 파괴하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이 씁쓸한 교훈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합니다."

군중 사이에서 고음과 소란이 퍼져 나와 강당을 집어삼켰다. 단델라이온은 미소 지었다. 훈련을 거친 단델라이온의 목소리도 이 소음을 뚫고 나갈 수 없었다. 하지만 단델라이온은 이미 전하고자 하는 말을 모두 전한 뒤였다.


챕터 12

코메스 루이나드는 검의 무게에 축 처진 허리띠 뒤에 엄지손가락을 스윽 문질렀다.

"폐하께서 불쾌해하십니다. 르다니아 사무국 직원들은 이곳에서 교육받습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사무국 직원의 수가 줄어드는 이런 상황에, 왕국의 눈으로 보기에 대학에서 노닥거리는 시간은 사치일 뿐입니다. 전 순조롭게 개혁을 완료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레텐호브 당신은 폭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엔, 여기 모두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왕께서는 왕국 내에 외국 정보 요원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이 없으시단 말입니까? 코비어 요원이 북부 최고의 대학을 망쳐놓고 있단 말입니다. 르다니아 왕관에 박힌 보석이..."

"물론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선정적인 정보가 사실이라면 말이죠."

검열관이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터널 파이어가 옳은 길로 인도하리라 믿습니다."

코메스는 검열관에게 의심스러운 눈길을 던지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검열관은 진중한 사람으로 유명했다. 종교적인 진부한 표현을 쓰는 시시한 자가 아니었다.

"뭔가 아는 게 있습니까, 검열관?"

"저 말씀입니까? 전혀 없습니다. 전 그저 신의 섭리를 믿을 뿐입니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라눌프를 앞에 세운 두 명의 병사가 서류 뭉치를 든 부관 한 명과 함께 들어왔다.

"교수의 집에서 찾은 건 이게 답니다. 숨겨진 칸 같은 건 없었습니다."

"마릇장 아래에도 없었나?"

"예."

라눌프가 동정심을 얻으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레텐호브 교수님께서는 심각한 망상에 사로잡히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맹목적인 비난 또한 우리 대학에 대한 깊은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부디 너무 가혹한 처사는 피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격이 날아왔다. 라눌프는 비틀거리다가 촛대를 넘어뜨리며 벽에 부딪혔고, 넘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다가 태피스트리를 찢고 말았다.

단델라이온은 허공에 손을 털며 아픔을 달랬다.

"아야." 단델라이온이 씩씩대며 말했다. "이거 정말 만족스러운데? 게롤트가 왜 자꾸 이러는지 이제야 알겠네."

라눌프는 단델라이온에게 증오에 찬 눈길을 던지고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뒤 턱을 어루만졌다. 검열관은 한숨을 내쉬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병사들도 어찌할 바를 몰라 지휘관을 흘끗 쳐다보았으나, 코메스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서류를 확인해."

부관은 가져온 서류 더미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라눌프는 무고한 학생 연기를 하며 서류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건 제가 라바사의 소네트를 필사한 겁니다. 이건 학장실로 보내는 편지들이고요. 글쓰기 수업 기말시험, 교양 과목 시간에 쓰는 천문도, 그리고 이건... 레텐호브 교수님이 가르치시는 고전 시학 과목 기말 논문이고요."

코메스 루이나드의 인내심은 점점 고갈되고 있었다. 서류를 훑어보던 부관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 갑자기 표정을 바꾸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을 꺼냈다.

"이것 좀 보십시오, 국장님."

서류에 적힌 문단을 훑어보기 시작한 코메스의 관자놀이 위 핏줄이 불룩해졌다.

"B 백작은 글레비징엔 도발에 관한 정보를 대가로 장관에게 5크라운을 받았다. 정보관 G와 그의 상급자가 백작의 보고가 사실임을 확인했다."

코메스는 서류를 다시 부관에게 넘겼다.

"기말 논문이라 하지 않았나?"

코비어인은 뭍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입을 떡 벌렸다.

"말도 안 돼." 라눌프는 부관의 손에 들려 있던 서류를 낚아채며 말했다. 한 장씩 꼼꼼히 살펴보며 서류를 넘기던 라눌프의 손이 점점 빨라지더니, 이내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분명... 분명 무슨 마법 같은 걸 부린 겁니다. 래드클리프의 위장 주문이라든가..."

"위장 주문이라..." 무관심한 태도로 라눌프를 지켜보던 검열관의 목소리가 활기를 띠었다. "흥미롭군. 계속 말해보게..."

라눌프는 자신을 둘러싼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봤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아군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라눌프는 단델라이온에게 존경심과 비슷한 무언가를 비추며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리곤 입술이 두려움에 일그러졌고, 얼굴마저 돌처럼 굳어버렸다.

"코비어 대사와 얘기를 좀 하고 싶군."


에필로그

단델라이온에게 남은 짐은 고작 작은 보따리 하나에 들어가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연구실 문을 닫은 단델라이온은 어깨에 류트를 매고, 막 잠에서 깨어나는 마을의 골목을 힘차게 걸어 나섰다.

도시의 관문을 지날 때쯤, 단델라이온은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근처 바위에 앉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옥센푸르트의 지붕을 바라보았다. '작별 인사를 하지 않은 게 잘한 일일까.' 잠시나마 고민했던 단델라이온은 곧 지난 몇 년간 해왔던 인사면 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막 자리를 뜨려는 찰나, 어디선가 단델라이온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관문에서 급하게 뛰어오고 있었다. 뛰어오는 사람은 몇 걸음마다 폴짝 뛰며 손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시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달려오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려 애썼다.

"이런, 맙소사." 시인은 탄식했다.

"교수님! 레텐호브 교수님! 단델라이온 교수님!"

"마스터 알론시우스."

마침내 뜀박질을 멈춘 늙은 사서는 허리를 숙여 양손에 무릎을 올리고는 기침을 토해냈다. 알론시우스의 등에는 단델라이온의 봇짐 크기 정도 되는 여행 가방이 있었다.

"어디... 어딜 가시는 겁니까?" 사서가 물었다.

시인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입안에서 풀잎을 굴리며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나도 모르겠네." 단델라이온이 답했다. "중요한 건 여정이지, 목적지가 아닐세."

"흠."

"그러는 자네는? 자네도 여행 가방을 들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나이에 옥센푸르트를 떠나 모험의 부름에 답하기로 한 건가?"

사서가 미소와 함께 답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사서가 말을 이었다 "가능성은 어때 보입니까?"

"형편없이 낮지."

"그럼 안심하셔도 됩니다. 전 노트위드 목초지로 가는 길이거든요. 제 여동생, 게르트루드가 거기서 농장을 합니다. 매년 벨레타인이 끝나면 방문하곤 하죠. 저희 가족 전통이기도 하고요."

단델라이온이 바위에서 폴짝 뛰어 내려오면서 질겅질겅 씹던 풀잎을 뱉어냈다.

"노트위드 목초지라..." 단델라이온이 말했다. "괜찮군."

"예?"

"아무것도 아닐세, 마스터. 생각해보니 내 길도 그쪽으로 향할 것 같은데, 함께 여행하지."

*

수레바퀴가 진흙탕에 빠졌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망루병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잠시 멈칫대다 있는 힘껏 수레를 밀었다. 곧 바퀴는 진흙탕에서 빠져나와 다시금 단단한 땅 위로 올라왔다.

"정말 고맙구려, 착한 병사들."

병사들은 자랑스러운 표정과 함께 손을 비볐다. 그리고 곧, 이들이 왜 그리 도와주려 안달이었는지 알 수 있는 말을 던졌다.

"고맙다는 인사 대신에 한 병만 주쇼, 할멈. 저 멀리서부터 술병 부딪히는 소리가 나던데?"

"아아. 뒤에서 아무거나 집어 가시게."

"이거... 이건 뭐지?"

"맛이 첨가된 보드카라네."

"그건 우리도 압니다. 이 상자에 대해 말하는 거요."

"옷감을 양복점에 가져가던 길이었다네. 난 카펫을 거래하거든. 여기, 이 옆에 팻말도 있지."

"팻말 따위는 알 바 아니고. 밀수품이 없는지 안을 좀 확인해 봐야겠는데."

"그러시게."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의 뚜껑이 열렸다.

"문제없군, 살펴 가쇼."

산느는 말을 채찍질했다. 병사들의 목소리가 멀어지자, 상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드카를 그냥 저렇게 줘도 되나?"

"애초에 저렇게 쓰려고 가지고 온 거야. 드라켄보그까지 가려면 아직도 망루를 몇 개는 더 지나야 해. 저 보드카들이 성으로 당신을 들여보내는 데 유용하게 쓰이겠지."

수레는 바퀴 자국을 남기며 고요한 황야와 외로운 나무들 사이로 천천히 굴러갔다.

"산느?"

"왜?"

"왜 날 돕는 거지?"

"돈을 냈으니까."

"거절할 수도 있었잖나. 내가 당신한테 잘해준 것도 아니고."

"뭐, 날 또다시 르다니아에 넘기겠다고 협박할지도 모르잖아."

"아니, 그건..."

"됐어, 그냥 놀리는 거야."

"그럼 그만 놀리고 대답을 해줘."

"그러는 당신은 왜 성으로 들어가려는 거지?"

"말했잖아. 난 오리 루벤을 찾아야 해. 내 친구의 친구지."

"현상금을 노리는 거야? 아니면 협박당했나?"

"아니. 디엔 아에르. 그냥 옳은 일을 하는 거야.'

"그런 명료한 답은 참 오랜만에 들어보네. 그럼 이번엔 나도 그냥 따라나선 거라 치자고."

헤브카르는 병을 열더니, 보드카를 한 모금 삼켰다.

"누구든 시작이 필요한 법이잖아, 늑대." 산느가 말했다.

*

태양 빛 아래에서 바라본 집은 조금 다르게 보였다.

이리아나는 추억의 흔적을 찾기 위해 끌 자국이 있는 집을 힐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리아나가 무언가를 찾기도 전에, 딕스트라가 밖으로 나와 이리아나를 안으로 초대했다.

이리아나와 딕스트라는 자리에 앉았다. 딱딱한 의자가 이리아나의 등을 감쌌다. 이리아나의 움직임에선 긴장감이 엿보였다.

"고마워요." 이리아나가 말했다. 이렇게 말한 이리아나의 입에는 이상한 맛이 맴돌았다.

"뭐가?"

"알잖아요. 당신이 준 서류요."

"그냥 오래된 르다니아 정보국 보고서야. 옥센푸르트에 그런 건 널리고 널렸어."

"그게 없었다면 라눌프를 제거할 수 없었을 거예요."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구나. 하지만 아직 중요한 문제가 남았지."

늙은 첩보원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리본이 달린 열쇠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네가 이 집을 가져가야지." 딕스트라가 말했다.

"설마 이 집을 저한테 돌려준다고, 그냥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로 생각한 건가요?"

딕스트라는 손으로 맨머리를 쓸었다.

"내가 옥센푸르트에 왔을 땐, 너한테 도움이 필요할 줄 알았다." 딕스트라가 말했다. "잘못 생각했던 거지. 그만큼 널 잘 몰랐었고."

"그럼 지금은 잘 아시고요?"

"그때보다는. 그리고 네게 뭐가 필요한지도 알 것 같구나."

"이런 게 아빠 노릇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정말 죄송하지만, 당신은 절대..."

"난 아버지가 될만한 그릇이 아니야, 이리아나. 하지만 네 아버지 찾는 걸 도와줄 순 있지."

이리아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눈앞에 놓인 열쇠를 가만히 바라봤다.

"생사도 모른다고 했잖아요."

"그건 사실이었어. 난 반 트로프케 백작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연줄을 동원하면 알아낼 순 있을 거야. 그렇게 시작하자꾸나."

바람결에 만의 봄기운이 실려 왔고, 햇빛이 방안을 눈부시게 가득 채웠다. 이리아나는 눈을 찡그렸다.

"대가로 원하는 게 있나요?"

"하. 용서를 구하거나 화해하자고 말하기 참 좋은 타이밍이로군. 그렇지만... 그렇게 하기엔 문제가 있어."

이리아나는 열쇠를 챙겼다. 쇠가 손에 닿는 느낌은 불쾌했고, 열쇠에 달린 리본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그래도 이리아나는 열쇠를 꽉 쥐었다.

"왜죠?"

"왜냐하면, 내게 있는 아주 많은 미덕과는 별개로... 나한텐 내 삶을 더더욱 힘겹게 하는 한 가지 결함이 있기 때문이지." 말을 마친 딕스트라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평생 뭘 훔쳐본 적이 없어."

*

단델라이온은 모닥불에서 물러난 뒤 류트를 조율하기 시작했다. 알론시우스는 담요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단델라이온을 흘끗 바라보았다.

"연주하실 건가요?"

"발라드에 쓸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네. 이미 멜로디랑 가사는 완성했고, 제목만 있으면 되는데..."

"무슨 내용이죠?"

"한 용감한 여자아이에 관한 이야기라네. 그 여자아이가 용감무쌍한 바드의 도움을 받아 사악한 어둠의 힘으로부터 세상을 지켜내고, 음유 시인의 가슴에 다시 한번 불꽃을 지핀 이야기지."

"아아. 도서관에서 책을 훔친 얘기군요?"

"그게 대체 무슨..."

"단델라이온 교수님. 훌륭한 연기자이신 건 알고 있었지만, 거짓말엔 정말 소질이 없으시군요."

"흠. 그래도 책 얘기는 생략해야겠어. 다른 부분이랑 잘 안 어울리거든."

사서는 담요를 치우고 단델라이온 곁으로 다가갔다.

"좋은 제목이 생각났어요." 알론시우스가 말했다.

"뭐지?"

"음, '교양 과목' 어떠신가요?"

"좋은데, 뭔가가 부족해. 흠... 어디보자... 아, 그래. 그렇지."

모닥불의 불씨가 검게 그을리며, 장작에서 타닥타닥하는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단델라이온은 장화음을 연주하며 손을 풀었다. 그 소리에 만족한 단델라이온은, 줄을 손으로 감싸 쥐고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말했다.

"좋아. 잘 들어보게나, 마스터."



이후 단델라이온은 이 글의 제목을 발라드에 붙인 것으로 추측됨


단델라이온 스토리 노드:
여타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단델라이온은 아름다운 것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침 이슬에 바스러지는 햇빛을 바라볼 때, 꾀꼬리의 청아한 노랫소리가 들릴 때, 혹은 여름 바람에 흩날리며 바스락대는 갈대 소리가 들려올 때면 감상에 젖어 들었습니다... 다만 그에게 최고의 황홀감을 안겨다 주는 것은 가녀린 허리에서 풍만한 둔부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곡선이었습니다.

단델라이온에게는 수십, 아니 수백 명에 달하는 연인이 있었습니다. 사랑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평등의 원칙을 지켰다 할 수 있습니다. 존경받는 공작부인도, 보잘것없는 세탁부도, 단델라이온은 모든 여성을 사랑했습니다.

분노로 벌게진 얼굴을 한 사내들이 살기를 띤 채 단델라이온을 쫓아다니는 모습은 그리 놀라운 광경도 아니었습니다. 겁에 질린 음유시인이 도망 다닐 때면 마을의 자애로운 여인들이 그를 숨겨주곤 했습니다... 그렇게 같은 일이 반복 또 반복되었습니다.

그런 단델라이온도 운명의 상대를 만났습니다. 그 많은 추문과 염문, 그리고 그 속에서 상처받은 영혼들을 뒤로한 채 마침내 단델라이온에게도 일생일대의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프리실라. 단델라이온만큼 뛰어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와 대적할 만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여성 음악가였습니다.


단델라이온은 시인이자 음유시인으로서 이름을 날렸지만 사실 다른 재주도 많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노비그라드에서 선술집을 운영했고 옥센푸르트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정보원 활동을 시도한 적도 있습니다. 물론 애국심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단델라이온에게 첩자 활동이란 이성을 유혹할 때 사용할 화젯거리를 하나라도 더 늘릴 수단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르다니아 정보부에 전달했던 보고 내용을 살펴보면 그리 유용한 정보도 아니었을뿐더러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정확성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단델라이온의 주장과는 달리 그가 정보부와 안보부에 크게 기여한 바는 없는 듯합니다.


시기스문드 딕스트라 스토리 노드:
시기스문드 딕스트라는 날카로운 통찰력과 담대한 야망을 품은 남자로, 평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르다니아 정보부의 수장 자리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배신을 당해 섭정 위원회와 왕국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딕스트라처럼 상황 판단이 빠르고 진취적인 남자에겐 이런 실패조차 새로운 기회일 뿐이었습니다. 딕스트라는 범죄로 가득한 노비그라드 지하 세계의 잠재력을 알아보고는, 시기 루벤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빠르게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딕스트라는 자유도시의 취약 지역에 행동 강령을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려는 목적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