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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05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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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키는 고개를 한 쪽으로 기울인 채로 잠든 샘을 내려다 보았다. 그는 어두운 방 안에서도 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제 시력에 감사했다. 약기운에 느려진 심박과 호흡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그는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던 임무를 재개했다. 그의 핸들러를 악몽에서 지키는 일. 샘의 눈을 마주할 수는 없었지만 잠든 모습을 보는 건 괜찮았다. 그건 그와 제임스에게 순식간에 다시 익숙한 일이 되었다. 그는 눈 앞에 누워있는 남자의 반듯한 이마를, 그 아래 눈썹을, 굳게 닫힌 눈꺼풀을, 광대뼈가 만드는 그림자와 코 끝에서 인중으로 거기서 따라 이어지는 입술산과 입술의 모양을 관찰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완전히 기억해야만 했다.
기척을 감추는 건 버키의 특기야. 나 정도나 간신히 느낄 수 있을 정도일까. 만약 자네한테 그 기척이 느껴진다면.. 버키가 그걸 원하기 때문이겠지.
스티브의 나직한 목소리를 떠올리자 짧은 고통이 목울대 어딘가를 스쳐 지나갔다. 녀석을 슬프게 했어. 그건 버키가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 중 하나였고, 그럼에도 지금까지 너무나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는 일 중 하나였다. 버키는 끝이 보이지 않는 속죄의 리스트에 또 하나를 추가해야 했다.
관찰 대상의 눈에 띄지 않는 사각지대에 있는 것, 그림자에 녹아드는 것은 그의 본능에 가까웠다. 제임스 뷰캐넌 반즈는 반 세기 이상을 암살자로 살았지만, 그 전에도 실력 있는 스나이퍼였다. 만약 솔져가 제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면 그는 그가 살아낸 고통에서 진작에 해방되었을 터였다. 버키는 마음만 먹으면 샘이 관찰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게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굳이 스스로의 그림자를 거두지 않은 채로 샘을 쫓았다. 가끔 기척을 느낀 샘이 눈을 들어 시선의 주인을 찾아 두리번거릴 때, 스티브를 향해 그 감시의 눈길에 대해 불평의 손짓을 할 때, 제임스는 심술난 어린애 같은 표정을 하고 웃었다. 너도 날 찾아야지. 너도 나 때문에 애타해야지. 멍청한 짓인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엉망이었던 재회 이후, 버키는 샘과의 대면을 피하면서도 계속 그를 쫓았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는 샘이 제 시야를 벗어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버키는 샘의 눈을 기억했다. 그가 어떤 표정으로 제임스를 보았는지, 만화와 퍼즐에 열중한 제임스를 보고 웃던 그 눈이 얼마나 다정한 빛을 띄었는지, 어두운 방 안에서 제임스가 샘을 가질 때 그 눈이 어떻게 흐려지고 또 빛났는지... 그 눈이 저를 모르는 사람처럼 보는 것을 제임스가 과연 참아낼 수 있을까? 시시때때로 뭔가를 박살내고 싶은 충동에 버키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를 악물었다. 그는 온 집중을 다하여 샘의 일거수 일투족을 쫓았다. 그의 표정이, 몸짓이 제임스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 얼마나 같은지, 얼마나 다른지 비교하고 재어보고 감탄하기를 반복했다. 제임스는 당장이라도 샘을 다시 제 것으로 만들고 싶어 안달을 내면서도, 그를 향한 배신감에 쉴새없이 몸부림 쳤다. 버키는 눈 앞에 샘을 두고 그 충동을 억제할 자신이 없어 잠든 모습을 지키는 것으로 타협했다.
샘.
샘 윌슨.
버키는 입엣말로 샘의 이름을 연신 혀 끝에서 굴렸다. 차마 목소리를 내어 부를 수는 없었다. 그의 이름은 혀 끝에서 달디 달았다. 꿈을 꾸는걸까? 샘이 어둠 속에서 입술을 달싹였다. 오래 전 그가 샘의 솔져였을 때, 샘은 밤마다 많은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제임스는 지나간 과거에서 샘을 구할 길이 없어 그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제임스는 어느 날부터 샘의 울부짖음에 그 자신의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느꼈던 기이한 만족감을 기억한다. 혹시나 하는 기대에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샘의 침대 맡에서 밤을 지새우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의료실 문 밖에 기대앉아 쪽잠을 잔 것이 어느새 닷새였다. 버키는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으로 자리를 지켰다. 그는 내내 침대 시트를 피와 살로 이루어진 손으로 꽉 쥐고 있었다. 샘이 뒤척일 때마다 시트로 전해지는 움직임을 쫓았다. 그의 손이 쥐고 있는 침대 시트와 멀지 않은 곳에 샘의 손이 가지런히 뉘여있었다. 버키는 그 손을, 마디가 굵은 손가락을, 단정하게 정리된 손톱을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손목 안 쪽에 몇 번이고 굵게 가로진 흉터를 보았다. 그가 모르던 흉터였다. 본 적 없는 흔적이었다.. 어느새 창 밖이 흐리게 밝아오고 있었다. 곧 샘이 눈을 뜰 것이다. 버키는 소리 없이 방을 나섰다.
문 밖에는 스티브가 서 있었다. 버키는 이미 그의 기척을 알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았다. 스티브는 걱정으로 미간을 모으고 있었다. 버키가 익히 잘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스티브를 걱정하기’는 그의 인생 내내 할 일 목록 상단에 위치해 있었고, 그건 스티브에게도 마찬가지일테였다. 버키는 슬며시 차오르는 죄책감을 애써 무시하려 했다. 눈을 내리깐 스티브가 입을 열었다.
“버키.. 넌 잠을 좀 자야 해.“
”잊었나 본데 스티브, 우린 일주일 정도는 안 자도 괜찮아.“
”그런 소리 말고 거울 좀 봐. 네 꼴이 어떤지 알아?”
꼴이 엉망이라는 점은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버키는 샘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샘이 다시 없어질까 두려웠다. 지금 스티브와 대화하는 이 순간에도 그는 닫힌 문 너머 그의 숨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정신을 반쯤 빼둔 상태였다. 이런 상태로 기지를 떠날 수 있을 리 없으니 당연하게도 그가 맡고 있던 모든 임무는 벨로바와 그의 팀이 대신하고 있을 터였다. 버키는 잔뜩 화가 났을 옐레나의 표정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샘과 얘기는 해봤어?”
“무슨 얘기.”
버키는 짧게 대답했다. 그는 함께 있는 스티브와 샘의 모습을 떠올렸다. 샘은 스티브가 마치 오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웃었다. 그는 스티브의 앞에서 경계를 내려놓았다 자신을 보았을 때는 그렇지 않았으면서. 버키는 샘의 굳은 표정, 당황한 눈을 떠올리고 다시 한 번 목을 조이는 것 같은 불안을 느꼈다. 버키는 제가 어린애처럼 구는 것을 알았지만 쉽게 자신을 추스릴 수 없었다. 스티브와 함께 있으면 항상 그랬다.
“버키, 샘에게 말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
“..기억도 못하는 사람한테 무슨 말을 해.”
“그래도 그는 알아야 해. 샘은 그가 누굴 위해 목숨을 걸었는지 알 권리가 있어. ..너도 이제 알잖아. 샘이 널 위해 목숨까지 버리려고 했다는 걸.“
버키는 입을 다물었다.
샘을 다시 만난 첫 날, 버키가 스티브의 멱살을 쥐고, 정신이 나간 것처럼 샘을 껴안고 흐느낀 날, 스티브는 늦은 밤 의료실 문 앞 복도를 서성이는 버키를 찾아왔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몇 번이나 버키에게 사과했고, 버키는 그의 사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스티브를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를 잃을까봐 두려웠다고 고백하는 스티브에게, 여전히 그를 잃을까 두려워 하는 스티브에게, 그 곧고 푸른 눈 앞에서 버키는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버키는 스티브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 해도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저 스티브에게 가만히 말했다.
“다신 나한테.. 아무 것도 숨기지 마.”
“그럴게, 버키. 약속할게.“
스티브는 지켜지지 않을 약속을 입에 담았고, 버키는 그걸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 일을 뒤로 했다.
잠시 버키가 생각에 빠진 사이, 스티브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작은 쪽지를 내밀었다. 깔끔하게 두 번 접힌 정사각형의 종이였다.
“샘이.. 전해달래.”
“...샘이?“
버키는 그저 그 하얀 종이 쪼가리를 멍하니 내려다 보았다. 방금 전까지 내려다 보던 샘의 손이 그 작은 종이를 눌러 접는 모양이, 손톱으로 접힌 부분을 꾹꾹 누르는 모양이 눈에 선했다. 스티브는 미동 없는 버키의 손을 끌어당겨 쪽지를 쥐어주었다. ”샘도 널 걱정하고 있어.. 우리 모두.“ 스티브는 가느다란 한숨을 쉬었다. 그의 미간이 한층 더 좁혀들었다. ”그리고.. 프로젝트 센트리가 실재한다는 걸 알게 됐어. 어쩌면.. 유의미한 결과를 얻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버키는 제 귀를 의심했다. 발렌티나가 솔져 프로젝트의 실패 후 통제 가능한 초인체 창조에 골몰했다는 사실은 반란군 내에서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그들은 그녀가 정말로 통제 가능한 신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을 정도로 미치광이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위험한 인물이니 다시는 어떤 비슷한 프로젝트도 시도할 수 없도록 연구소와 관련자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것은 그녀 산하의 기관을 직접 체험한 버키를 비롯한 소수의 주장이었지만... 프로젝트 센트리라고?
“뭐?”
”네가 최근에 회수한 코어에 관련 내용이 있었어. 냇이 해독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쉽지 않아서, 와칸다에 도움을 요청해야 할 것 같아.“
“왜 그걸 이제야 말해?”
저도 모르게 스티브를 성난 눈으로 쳐다본 버키는 금세 고개를 돌렸다. 빤히 시선을 되받아치는 푸른 눈에 그 자리에 있을 리 없는 책망이 섞여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발 저린다는 게 이런 거겠지. 다시 마주한 스티브는 익숙한 염려 섞인 다정한 눈빛으로 버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만간에 모두 바빠질거야. 그러니까..“
스티브가 그의 어깨를 꽉 쥐었다. 단단한 손아귀였다. 모든 것을 잃은 뒤에도 버키를 그 자신으로 존재하게 한 손길이었다.
”너무 오래 걸리진 마. 우리는.. 난 네가 필요해.“
그 말을 남긴 스티브는 훌쩍 자리를 떴다. 그는 어두운 복도 끝으로 금발이 잔상을 남기며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남겨진 버키는 복잡한 심경으로 쪽지를 내려다 보다가 천천히 접힌 자리를 폈다. 짧게 갈겨쓴 문장이었지만 익숙한 글씨체였다. 버키가 익히 알고 있는, 마지막 글자의 끄트머리를 길게 빼는 특유의 필체. 눈의 표면이 순식간에 뜨거워지는 것 같아 버키는 눈을 꽉 감았다. 글씨가 감은 눈 안의 번쩍이는 시야의 가장자리를 따라 천천히 유영했다.
나도 숨바꼭질 좋아하지만 만나서 얘기하는 게 어때?
중요한 걸 잊은 것 같은데, 네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
S. 윌슨
다음 며칠 내내 스티브와 샘은 버키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지만, 스티브는 버키가 샘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샘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담담한 표정으로 정해진 훈련의 세트 수를 채운 뒤 옆에 놓인 수건으로 가만히 땀을 닦았다. 딱히 볼만한 풍경은 없었지만, 그는 자꾸만 창 밖을 내다보았다.
[Code: 8af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