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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7 23:51
날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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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단 행동을 해야 하는 곳이란 휴가가 목전에 있다 하더라도 내키는대로 떠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주둔지로 돌아와 해산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철제 의자에 앉아 휴가를 가라는 허락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앉아있는 골든 워리어스의 대원들이 초조했다. 더러 성질을 참지 못하고 의자를 내내 끼걱거리며 등을 뒤로 젖히고 손톱을 뜯거나 다리를 달달 떠는 놈들도 있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은 루스터만 무관심한 눈으로 호건 대령의 말을 듣는다.

통상적인 주의사항과 파병 이후 주어지는 장기 휴가에 대한 명령조의 내용 전달이 끝나자마자 바닥을 끄는 의자의 소리가 시끄러웠다. 급할 것도 없어 다른 녀석들이 먼저 나갈 수 있도록 간단하게 인사를 받아주던 루스터에게 캠벨이 다가왔다. 캠벨은 문 밖으로 나가기 위해 북적한 인파를 뚫고 그에게 걸어온다. 문 너머로 비행기 탑승 시각에 늦을 수도 있다며 달려가는 소리마저 들렸다. 캠벨은 검지를 구부려 얇은 직사각형 렌즈를 끼운 안경을 슬쩍 올렸다.



“대위님.”



헐렁하게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은 루스터가 고개를 까딱였다.



“이번 휴가는 늦게 나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응, 맞아. 나가기 전에 정리해둘 게 있어서 천천히 가보려고.”



그 때 플리가 다가온다. “이봐, 루스터.” 마치 루스터를 기다렸던 것처럼 온 플리는 루스터의 팔뚝을 퍽 치고는 그의 어깨를 끌어 안는다.



“휴가 끝나고 보자.”


“그래. 잘 보내고. 가족들한테 내 안부인사 전해줘.”


“그럼. 너도 심심하면 아무 때나 전화, 하지 말아라. 절대 하지 마. 거기서도 지긋지긋한 얼굴 보기 싫으니까.”



플리의 말에 루스터가 실없이 웃었다. 그러자 플리가 캠벨을 가리킨다.



“캠벨 너도 절대 연락하지 말고. 너네 얼굴이라면 지겨울 만큼 봤으니까 나는 휴가 기간 동안 무조건 비행기 모드 켜놓을 거야. 아니지. 내가 지금 또 비행이라고 한 거냐? 비행의 ‘비’ 자도 안 꺼내야지. 다들 휴가 잘 보내고 와라.”


“말이 많아. 빨리 가보기나 해. 잘 다녀와.”


“잘 다녀 오십시오.”



느리게 주머니에서 손을 빼어 슬렁슬렁 흔드는 루스터와 달리 캠벨은 플리에게 각 잡힌 인사를 한다. 떠나기 직전 두 사람의 어깨를 각각 끌어안고 뒷목을 주무르던 플리가 떠나고 나서야 두 사람은 미팅룸을 나설 수 있다.

해산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공항으로 달려가기 위해 미리 짐을 들고 왔던 다수의 부대원들과 달리 홀가분한 루스터는 그들이 향한 방향과 반대쪽으로 걸어간다. 조금은 어수룩하게 말린 어깨와 등을 보던 캠벨이 그의 뒤를 쫓는다.

루스터가 캠벨이 쫓아오는 기척을 느끼고 슬쩍 고개만 내려 묻는다.



“너는? 넌 안 가냐?”


“저는 비행 시간을 여유롭게 잡아놔서요. 관사에 들려서 짐을 다시 챙겨서 나갈 생각입니다.”


“그래? 이번에 비행기 표 잡는 게 어려웠다고 다른 애들은 말이 많던데, 너는 잘 됐나봐?”


“네. 저는 비행기 표 뜨자마자 예약을 걸어놨으니 휴가 직전에 티켓을 구한 분들과는 다르죠.”



캠벨의 대답에 실소를 터뜨린 루스터가 주머니에 꽂아둔 손을 꺼냈다. 그가 찌뿌등한 등을 펴며 천장으로 높이 팔을 뻗더니 하품을 했다.



“대위님은 언제 휴가 가실 생각이십니까?”


“일단 서류 작업하는 거 봐서.”



루스터가 별 의미 없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다 대답한다.



“서류요? 이번 파병 때 SAAF (센티넬 능력 적용 비행/ Sentinel–Ability–Applicatory–Flight) 훈련 관련해서 보고서 작성하시는 겁니까? 그건 이미 다 끝난 것 아녔습니까?”


“맞아. 돌아오는 길에 얼추 다 작성했는데 추가 서류 제출해달라고 공문이 날라온 게 있어서 말이야.”



대답을 들은 캠벨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또 늦게 나가시면 안 됩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것처럼 루스터가 어깨를 으쓱인다. 그가 별다른 말 없이 허공에 양 손바닥을 띄웠다.



“제가 이러실 줄 알고 미리 말씀 드리는 겁니다. 제발 그냥 남들 나갈 때 같이 나가세요.”



루스터는 심드렁하게 제 뒷목을 주물렀다.



“캠벨.”


“예.”


“네가 아직 짬밥이 모자라서 뭘 모르나 본데 이런 것도 일종의 꼼수란다.”


“무슨 꼼수요?”


“휴가를 늘리는 꼼수.”



캠벨이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어디 더 말해 보라는 식으로 그가 루스터를 응시했다.



“느긋하게 부대원들 아무도 없는 관사에서 서류 작성이나 적당히 하면서 1, 2 주 때우다가 빈둥거리고, 사실상 휴가나 다를 바 없는 시간을 업무하는 것처럼 보내다가 남들 휴가 절반이 지났을 때부터 공식 휴가를 쓰는 거지.”



캠벨이 인상을 찡그렸다. 루스터보다 한참 어린 소위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진다. 그걸 보고 신난 루스터가 앞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너도 나중에 연차가 더 쌓이고 나면 쉬려고 온갖 꼼수를 생각해내게 될 텐데, 이건 네 상관으로서 내가 주는 팁이야. 나중에 꼭 써먹으렴.”


“팁이 맞긴 합니까?”


“그럼.”



캠벨이 입을 다물자 루스터가 휘파람을 불었다. 좀전에 의미없이 흥얼거렸던 콧노래 대신 항모에 있던 동안 다른 부대원이 틀어놓아 질리도록 들었던 팝송의 멜로디를 읊는다.



“그것 참 감사하네요.”



캠벨의 시큰둥한 대답에 루스터가 휘파람을 멈추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까딱이는 목울대를 따라 휘파람 소리가 휜다.



“언젠가 써먹을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온다면 꼭 써보겠습니다.”



앞니로 아랫입술을 살짝 베어문 루스터가 샐쭉하게 웃었다. 그게 얄미웠던 캠벨이 루스터에게 멈췄던 잔소리의 마지막 한 마디를 기어코 한다.



“나중에 꼭 써볼테니 이번 휴가 때는 제발 제 때 부대 밖으로 나가시고요. 그리고 제발 그 노래 좀 그만 부세요. 아주 지겹단 말입니다.”



그래도 루스터가 노래를 멈추지 않자 캠벨이 앓는 소리를 낸다. 그가 귀를 틀어 막아도 루스터는 제 뒷통수에 깍지를 껴 받치고 걸었다. 손목의 시계를 확인한 캠벨의 걸음이 루스터를 앞서서 빨라진다. 그의 뒤를 느릿하게 따라 두 사람이 관사에 도착했을 때 캠벨은 성큼성큼 계단을 두 칸씩 밟아 빠르게 윗층으로 향했다.

루스터가 같은 층에 도달했을 때 캠벨은 미리 싸두었던 짐을 이미 들고 나온 채였다. 그가 가방에서 볼캡을 꺼내 머리에 꾹 눌러썼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잘 쉬고 3 주 뒤에 봐.”


“네. 대위님도 여기에 너무 오래 계시지 말고 나가서 바깥 공기도 쐬고 하세요.”


“너는 잔소리가 너무 많아.”



루스터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린다.

“정말 가볼게요.” 루스터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올린 캠벨이 다시 관사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잠시 입술을 달싹였던 루스터가 말했다.



“캠벨.”


“예, 대위님.”


“고마워.”



아리송한 루스터의 말에 캠벨이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3주 뒤에 뵐게요.”



갓 눌러 쓴 볼캡을 벗어 잔머리와 안경을 다시 정리한 캠벨이 어깨를 누르는 배낭을 추켜 올렸다.



“인스타그램으로 계속 지켜 보고 있을 거에요.”



누가 상관인지 분간이 안 가게 단도리를 한 캠벨에게 루스터가 손을 흔들었다. 돌아서서 볼캡을 눌러 쓴 캠벨로부터 나직한 한숨이 들려왔다.










*

깊게 닫혔던 눈꺼풀을 느지막히 들어올린 루스터는 핸드폰을 열어 인스타그램에 들어갔다. 오랜만에 그의 인스타그램 피드 상단이 번쩍번쩍하다. 동그란 프로필에 둘러진 분홍색과 노란색의 색띠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차례로 들어가보자 늦은 항공편을 예약해 피로한 행색으로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를 내내 기다리는 모습이기도 했고, 주둔지 근처의 가족이 이미 마중을 나와 어느 프랜차이즈 식당에 버거를 먹으러 간 얼굴도 보였다. 애인에게 줄 꽃을 미리 사버렸는데 비행기에 가지고 탑승할 수 없었다는 소식과 2년이 조금 넘은 시간 동안 자신의 얼굴을 잊었다가 알아채고는 몸을 타오르는 고양이같은 짧은 영상들이 올라왔다. 루스터는 아직도 빛에 적응하지 못한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꿈뻑이다가 핸드폰의 잠금 버튼을 눌렀다.

다시 잠에 들어보려 해도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아직도 졸음이 채 가시지 않았음에도 루스터는 불편하게 몸을 뒤척였다.

이런 것들을 부러워하기에는 그에겐 너무도 많은 시간이 지났다. 집으로 돌아갔을 때 만날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부터 휴가란 그에게 불편한 것이 되었다. 차라리 파병 복무 기간 중에는 휴가랄 것도 없이 일반 직장인들의 주말처럼 부대 내에서 교대로 짬짬이 쉬었다가 업무에 복귀하면 되니 그만이었다.

버지니아 주립대를 함께 졸업한 친구들은 그와 달리 정계에 진출하기 위해 비서 노릇을 하느라 바쁘거나 행정 공무원이 되어 루스터의 스케줄에 맞춰 시간을 내기도 쉽지 않았다.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일반 입대를 한 그와는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과 거리가 멀어진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누구도 탓할 수 없이 나이가 들며 선택하는 기로에 따라 갈라지는 삶의 방향이 달라진 것 뿐이다.

이제는 그의 소셜 미디어 창을 더 많이 차지한 동료들의 틈바귀에서 그들과는 또 다른 종류의 캠프에 들어가 유세를 위해 올려놓은 기부 홍보 목적의 쇼츠 영상을 본 루스터가 피식 웃었다. 한 때는 그렇게 클럽에 갈 때마다 함께 했던 대학 동기가 이제는 번듯한 차림새지만 누렇게 내려앉은 눈두덩이를 하고 플래카드를 흔들었다.

초조하게 엄지 주변의 거스러미를 앞니로 뜯던 루스터가 다시 핸드폰을 놓았다. 누구를 부러워해서 될 일도 아니었고 부러울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음이 헛헛해 루스터는 다시 뒤척였다. 얼마나 잠에 들었는지 창문으로는 짙푸른 밤의 빛이 들이친다. 그는 몸을 옆으로 돌리고 팔을 끌어 모았다. 가위자 모양으로 가슴 위를 지르는 팔을 제 품에 더 끌어당겨 안았다. 질 좋은 수면을 취하기엔 녹록치 않았던 파병지에서나 빨리 잠에 들게 하기 위해 했던 응급처치였다. 거기에서는 모두가 이렇게 잠에 들었다. 억지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내리 누르고 피로에 몸을 맡겨 수마 속으로 자신을 던져야 했다. 그런데 그것이 이곳의 루스터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루스터는 반대편의 비어있는 침대를 본다. 눈을 얇게 뜨면 자동적으로 눈꺼풀이 달싹거리며 시야를 더욱 흐렸다. 그러면 몸의 평형을 유지하는 기관을 교란시켜 마치 바다에 떠있는 것처럼 몸이 일렁인다. 그게 실질적으로 감각 기관에 작용되는 것인지 그만의 착각인지는 알 길은 없었지만 끝없는 상념을 차단하기에는 도움이 됐다.










*

본토에 상륙한지 하루가 꼬박 지나고 나서야 루스터는 침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일상적인 루틴에서 고작 하루만의 일탈에 진흙처럼 긴장이 풀린 몸은 흐느적거리며 멋대로 움직였다. 루스터는 욕실로 가서 시커멓게 가라앉은 얼굴에 세수라기보단 물칠을 한다는 것이 적합하게 연거푸 물을 끼얹었다.

그는 듬성듬성 올라온 수염을 여러차례 쓸어 보았다. 파병 기간에 가르쳤던 타지의 생도들의 놀림에 못 이겨 밀었던 콧수염은 다시 길러볼까 싶었지만 당장 새로 기르자니 모양새가 우스웠다. 주둔지에 있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들을 마주쳤을 때 멀끔한 모습을 보이는 게 낫다는 판단으로 그는 단단한 거품을 만들어 턱에 올렸다. 중간의 기르는 과정만 남들에게 보이는 것이 싫었기에 수염 정도는 휴가를 나가서 조용히 격리되어 기르면 될 것이리라.






원래도 씻는 시간이 짧았지만 물이 부족한 곳에 있다 보니 더욱 단축된 샤워 시간으로 금세 욕실을 나온 루스터는 짐 가방에 쑤셔 넣어뒀던 노트북을 꺼내어 걸었다. 흰색 티셔츠 위로 입은 베이지색 셔츠의 깃이 팔락였다. 그가 걷는 길에 간혹 세게 불어온 돌풍같은 바람에 셔츠 깃이 깨끗하게 면도된 턱을 찰싹이기도 했다.

루스터는 비어있는 손으로 제 손안에 들어온 바람을 쥐었다. 무형의 잡히지 않는 자연적인 힘은 당연하게도 그의 손 주름 사이로 스르르 도망친다. 바람이 불어와 보이지 않는 힘이 그의 손끝에 파동을 일으킬 때마다 루스터는 그곳에서의 경험들을 떠올렸다.

그가 있는 세계에서는 더 이상 불필요하기 때문에 미개하다고 폄하했던 힘이 파병지에선 유용했다. 생도들을 가르치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에게는 익숙치 않은 구형 전투기에 올라 타, 기름칠이 잘 되어있었지만 그가 타는 것만큼 신형 전투기처럼 날 수 없는 기체의 조종간을 밀 때마다 루스터는 새로움을 느꼈다.

지금까지 그에게 방해가 되었던, 그 자신을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던 힘이 그곳의 하늘에서는 그 어떤 것보다 당당했다. 힘의 주인이 가진 자의로 억압되었던 힘을 개방해 선회 구간에서 속력이 늘어지는 기체의 날개를 밀어내어 손바닥 뒤집듯 뒤집으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추진력을 받아 가속했다. 그건 비행에 오르기 직전까지도 망설이던 자신의 숨통을 틔워주는 일이었다.

비록 그 자신의 능력만으로 지상에서는 날 수 있는 게 아니었지만, 비행 기체에 탑승해 힘을 쓰는 건 마치 루스터 자신이 새가 된 것 같은 자유로움을 느끼게 했다. 누군가를 교육하기 위해 여유를 갖고 오른 상공에서 촉박함 없이 자유자재로 필요에 따라 힘을 이용해 기체를 움직이는 건 그의 상상을 상회하는 일이었다.

루스터는 줄곧 SAAF 훈련을 기피했고 원하면 신청할 수 있었던 교육 기간조차 외면했었다. 그럼에도 그런 그의 고지식한 고집을 단 한 번의 비행만으로 바꿔놓을 수 있을 정도로 황홀했다. 마치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는 자유, 하지만 그 자신이 방만하게 질주하는 말 그 자체가 된 것처럼 상쾌했다. 투명한 막으로 닫힌 캐노피 안에서 감미로운 바람이 맴돌아 그를 하늘 높이 띄웠다. 호건 대령이 지상에서 무전을 칠 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그는 단 한 번의 비행에 처음 맛 본 달콤한 자유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귀향길의 항모에서도 루스터는 종종 갑판에 올랐다. 수병 시절 갑판에서 그를 맞이한 바람은 매몰차고 서러웠지만 이제는 감회가 새로웠다. 무엇에 중독이 된 사람처럼 루스터는 종종 갑판 위로 달려 올라갔다. 특별히 위험할 것 없는 상황이라 갑판에 나가 볼 수만 있다면 그는 갑판에 서서 쏟아지는 별을 눈에 담았다.

하지만 그는 이것이 위험한 자유라 생각했다. 본국에 돌아오면 어차피 다시는 쓸 일 없는 한 때의 일탈이라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한 순간 가냘픈 실마리처럼 그의 손 안에 잡혔던 자유의 한 끝자락을 놓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머릿속에서도 그의 두개골 안 뇌를 비우고 헛바람을 가득 채운 것처럼 소용돌이가 일었다. 손가락 끝에서는 그 어떤 때보다 자신의 몸처럼 움직였던 조종간이 뚜렷했다.

캠벨에겐 휴가를 늘리기 위한 꼼수라고 했지만 실상은 숨길 수 없는 해방에 대한 갈망을 억제하기 위해 유예 기간을 준 것 뿐이란 걸 루스터도 알았다. 결국 자료실에서도 그 감각을 잃지 못한 루스터가 랩탑의 뚜껑을 덮었다. 절전 모드로 돌아간 랩탑은 바깥에 있는 로고의 조명이 점멸되며 여짓 끝내지 못한 자료를 숨겨준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루스터는 가방을 들춰매고 바깥으로 나간다. 정처 없이 걸으며 어디든 그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을 찾는다. 골든 워리어스로 부대를 이전한지 얼마 되지 않아 파병을 떠났음에도 대학 시절을 보냈던 곳은 제 2의 고향같아 낯설지 않았고, 평소의 그가 입던 군장에 비하면 한참 가벼운 랩탑이 든 가방은 어깨를 짓누르는 듯 하다.

가로등이 켜진 해안가를 따라 루스터는 걷는다. 불꽃놀이를 하면 안 된다는 안내가 적힌 해안가에서 경고판을 무시한 채로 스틱형 폭죽에 불을 붙이고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박수를 치며 동영상을 찍는 가족들이 있었다. 루스터는 그 또한 지나친다. 해변 옆 인도는 잔 모래가 신발 밑창 아래로 자박였고 해 진 줄 모르는 갈매기들이 불나방처럼 날았다. 어느 관광객인지 주민인지 모를 누군가의 손에 쥔 핫도그를 노리고 부리를 들이밀며 기회를 엿본다. 루스터는 그 또한 지나간다.

그리고 그가 한적하고 조용한 곳을 찾는 동안 루스터가 걷고있던 인도 반대편의 펍 하나에서 갑자기 우레처럼 함성이 터져 나온다. 왁자지끌한 소리에도 루스터는 움찔하며 놀라지 않는다. 그곳의 유리창 안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다가 무엇에 끌린듯이 루스터가 시끄러운 펍으로 향한다.

적막한 곳을 찾던 것과 다르게 이 시끄러운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아무도 자신에 대해 신경쓰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의 그에게는 그런 게 필요했다. 루스터는 잠시 길에서 멈춰 오는 차가 없는 지 확인하고 길을 건넜다.

펍에 들어간 루스터가 옆의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고 바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잔을 닦던 직원이 앞에 섰다.



“뭐 드릴까요?”


“스미노프 샷 세 잔 하고, 버드와이저 하나요.”



대수롭지 않게 주문을 한 그의 앞에 금방 샷 잔 세 개가 깔린다. 직원은 멈추는 법 없이 줄 세워놓은 작은 유리잔에 연달아 보드카를 붓고 자리를 비운다. 그가 맥주를 가져오기 전에 루스터가 빠르게 잔을 비웠다. 직원이 돌아왔을 때 이미 세 개의 잔이 모두 비워졌다.



“샷 3 개, 더 추가할게요.”




병을 따서 주둥이에 흰색 냅킨을 뾰족하게 감아 세워놓은 버드와이저를 내려놓은 직원이 카운터 밑에서 스미노프를 다시 꺼냈다. 아까와 동일한 방식으로 잔이 투명하게 차오르고 루스터는 연거푸 술을 비웠다.

도수가 높은 보드카로 취할 정도는 아니지만 따끈한 열기가 올라왔다. 그의 등 뒤로 경쾌한 목소리들이 소란스럽게 울렸다. 하지만 그곳과 자신이 앉은 자리는 마치 별세계인 것처럼 루스터는 맥주병의 냅킨을 벗기고 입에 주둥이를 댔다.

웅웅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가 차가운 병을 잡은 채로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에 갈색 눈이 어디를 보는지 모르게 낮게 가라앉아 목재 가구의 무늬를 셌다. 간혹 그의 앞에서 조금 비껴난 곳에 선 바텐더와 직원들이 등 뒤의 무리들이 하는 행동에 함께 웃기도 했다. 루스터는 단숨에 병을 비우고 새 것을 시킨다.

가게를 뒤흔들며 새로운 웃음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무심코 귀를 막으려다가 루스터는 바 위로 손을 붙였다. 눈에 띄는 행동을 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기묘했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그는 생사가 오가는 곳에 있었는데 여기는 너무, 너무 평화로웠다. 아마 그가 평생을 가도 잊을 수 없는 얼굴들에게 떨어진 참상이 별개의 세계로 가는 문을 여닫기만 하면 사라지는 것처럼 허상이 되었다. “저기요.” 루스터가 손을 들었다. 한 눈을 팔고있던 바텐더가 그를 보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린다. 재차 손을 흔들자 루스터를 본 직원이 다가온다.



“여기 스미노프 한 병 주세요.”



보드카를 아예 병째로 시켜버린 루스터를 경계하던 직원은 그가 군복을 입고 있다는 것에 불신과 안도를 섞어 훑어 보더니 새 병을 꺼내어 준다. 병 뚜껑을 돌리자 빨간색의 라벨이 까드득하며 부숴지는 소리를 내고 병이 열렸다. 필요 없는 두 개의 잔을 밀어 보낸 루스터가 남은 잔에 보드카를 채웠다.






몇 병째인지 모르게 시간을 하릴 없이 보냈을 때, 어느 시점부터 자꾸만 그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꽂혔다. 뭔가 그가 아는 듯 하면서도 모르는 목소리였다. 루스터는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술기운이 올라 무거워진 눈꺼풀을 들썩였다. 이상하게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으면서 모르는 것 같은 목소리가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술에 겨워 숫제 바에 엎드리다시피 한 루스터는 고개를 뒤로 돌아보려다 참는다. 설령 그가 아는 상대가 있다 하더라도 이런 상태에서 안면식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병을 쥔 그의 팔이 끄떡끄떡 흔들리자 보다 못한 직원이 루스터에게 말을 건다.



“저기, 저기요.”



루스터가 대답 대신 듣고있단 시늉을 하기 위해 보드카 병목을 흔들었다. 지렛대처럼 병의 밑면을 상판에 대고 거의 다 비워진 길다란 병이 느린 그네처럼 움직였다.



“이봐요. 들어가서 자요.”



“예에.” 늘어지는 대답으로 루스터가 말한다. 그의 손이 포로처럼 붙들었던 병을 천천히 놓아주고 상체를 일으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마를 짚은 눈 앞이 빙글거렸다. “어차피 곧 있으면 마감이니까 정신 차리고 들어가서 자시라고요.” 루스터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직원의 말에 또 머리를 흔들었다. 왁스로 올려놓지 않았던 곱슬머리가 이마로 흘러내렸다. 그 때 루스터 가까이로 누군가 다가와 선다.



“저 쪽 테이블 계산할게요.”



아까부터 이상하게 귀에 꽂혔던 목소리였다. 그 말에 루스터를 내쫓기 위해 그의 앞을 지켰던 직원이 혀를 차고는 몸을 돌렸다.

눈꺼풀이 아래 점막에 닿으면 자동적으로 올라오는 기계라도 된 듯이 몽롱하게 눈을 깜빡이던 루스터도 상체를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였다. 기우뚱하게 넘어간 몸으로 호기심을 참지 못한 루스터가 카운터 옆으로 선 잿빛 금발의 남자를 본다. 그가 아는 사람이 맞았다.














탑건2 루행
2023.04.03 07:4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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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왜 안와?...ㅠㅠㅠㅠ 세엔세ㅠㅠㅠㅠㅠ 그래도 기다릴게.....
[Code: 5519]
2023.04.10 16:3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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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어디쯤 오고 있어? ..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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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3 06:3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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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미국도 따뜻하지..?ㅜㅜ
[Code: 168f]
2023.04.23 11:5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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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아직도 기다리고 있어…
[Code: 87d8]
2023.04.27 19:48
ㅇㅇ
도라와센세.....ㅜㅜㅜㅜㅜㅜㅜ
[Code: 237b]
2023.05.01 22:5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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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나는 지박령이야..
[Code: 5c55]
2023.05.06 04:1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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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그래서 언제오는 거야?
[Code: 268e]
2023.05.14 21:5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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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보고싶어ㅠㅠ
[Code: 3379]
2023.05.14 22:1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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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보고싶어요ㅠㅠㅠㅠ
[Code: 20d5]
2023.05.21 19:2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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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오고 있지..? 나붕키를 잊지만 말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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