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연갤 - 중국연예
- 중화연예
598110825
view 1538
2024.06.24 20:41
전편 https://hygall.com/597995513
기산 온씨를 무너뜨린 후, 기산의 온씨 아닌 가문들은 기를 펴지 못했다.
아직까지도 전후의 앙금이 남아 있어 기산 출신의 사람들은 감히 권세를 펼치려 하거나, 그런 낌새를 내비치지 못했다.
이번 기산의 모임을 주도한 가문도 무척 태도가 조심스러웠다.
청담회나 사냥회가 기산에서 열리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으니, 불온한 마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한편으로는 손님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정성을 기울이는 것 같았다.
찌는 듯한 무더위를 뚫고 하늘 위를 날아온 손님들이 하나 둘씩 내리자 지상에서는 시원한 물을 퍼온다, 차를 나른다 하며 수십 명의 하인들이 숨차게 뛰어다녔다.
아무튼 대단히 부유한 가문이긴 하여, 별실은 하나같이 두꺼운 목재로 마루를 깔았고 군데군데 대나무가 채워져 바깥과는 별세상으로 느껴질 정도로 시원했다.
세도가 당당한 운몽 강씨가 안내받은 곳은 한 떼의 수사들이 함께 머물러도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큰 건물 한 채였다.
강징은 잠시 차를 마시다가 산책을 갔다 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보통 이럴 때에는 얼른 남희신부터 찾아가서 약속된 일을 해치우는 것이 수순이었지만, 근처의 숲길로 들어가더니 떠들썩한 사람 소리로부터 하염없이 멀어졌다.
제법 길이 번듯하다 싶더니 잉어가 노니는 커다란 연못이 나왔다. 연못가에는 몇 개의 대나무 의자도 놓여 있었다.
묵묵히 잉어떼를 바라보고 있던 강징은 불현듯 남희신이 나타나 곁에 서도 놀라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연못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남희신이 몸을 돌리자 강징도 그의 뒤를 따라갔다.
고소 남씨의 거처도 강징의 것 못지 않은 규모의 건물이었다.
하지만 십여 명이 넘는 사람을 데리고 온 운몽 강씨와는 달리 두세 명의 수사가 정자에 앉아 한가롭게 부채질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안으로 들어간 남희신이 손짓하자, 청소하던 하인이 물러가고 호젓한 공간에 둘만 남았다.
“제가 드린 숙제 때문에 고민하시는 겁니까?”
아마 물어보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정곡을 찔린 듯한 느낌이 든 강징이 불편한 숨소리를 흘렸다.
“그래서, 답은 찾으셨나요.”
마음을 돌리는 게 아주 늦어서 고민할 시간이 고작 하루밖에 없었던 강징은 겨우겨우 쥐어짜낸 생각 하나가 있긴 했지만, 이게 답이 될까 스스로도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남희신이 재촉하듯 바라보자 다른 수가 없었다.
“...솔직히, 남종주. 사람 속만큼 알기 어려운 게 없는데, 믿으라 한다고 믿을 수가 있겠나요.”
“그래서요?”
“그러니까...”
“......”
“당신은 저의 약점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네. 그래서요?”
우물쭈물하던 강징은 동요없는 남희신이 문득 얄미워져 째릿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말투에 오기가 스며들었다.
“그러니까, 당신도 저에게... 뭔가 약점을 알려주시거나. 혹은 귀한 물건이라도 맡기셔야 공평해지지 않을까요?”
제 귀로 들어도 옹색한 대답을 내뱉으며, 강징은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웃을 줄 알았던 남희신은 오히려 정색을 했다.
하긴 그가 나에게 빚진게 뭐가 있다고. 너무 무례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릴 했나? 하고 거북해지려는 강징에게 남희신이 말했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
아니, 뭐, 정말로??
강징은 제가 말해놓고도 제정신이냐는 듯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남희신이 말했다.
“좋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고민해볼 차례군요.”
전혀 납득할만한 대화는 아니었지만, 일단 제 차례는 모면했다 싶은 느낌이 들자 이 일로 오래도록 고민했던 강징은 숨이 놓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곧이어 남희신이 손을 내밀자 움찔했다.
“지, 지금? ...여기서요?”
이제 도착한 참이고, 장소도 낯설고. 그리고 금방 내가 들어가는 걸 다들 봤는데 그건 괜찮을까?...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계산이 스치는 강징에게 남희신이 말했다.
“사실은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겨서, 오후의 청담회가 끝나면 돌아가야 합니다.”
“그럼 내일 있는 야유회는 불참하신다는 겁니까?”
“야유회 정도는 망기에게 맡겨도 치레는 충분할 테니까요.”
남희신은 천연덕스럽게 말을 꾸며 대며, 더이상은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다. 이대로는 강징이 각성하기 전에 제 쪽이 어찌 변할지 모를 것 같았다.
낮부터 남희신의 품에서 잠이 든 강징은 아슬아슬하게 청담회 직전이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청담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곁으로 따라붙은 남희신이 작게 말을 건넸다.
“일이 잘 해결되었다는군요. 그래서 저 대신 망기를 보내기로 했으니, 나중에 제 방으로 오십시오.”
기습당한 듯 놀란 눈을 들었던 강징이 이내 주변을 의식하며 표정을 가라앉혔다.
“나중이라니... 밤중에 말입니까?”
바로 지금 여름 해가 저물고 있으니, 저녁 식사를 하고 나면 아주 어두워질 것이 뻔했다.
“네. 마침 잘 된 셈이지요.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마친 남희신이 강징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앞서 걸어가 버렸다.
-아니, 아까는 일찍 돌아가야 한다고 해서 그것-수면 치료-을 미리 해치웠더니, 단 몇시진도 안 되어 말을 바꾼다고?
적이 의심스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고소 남씨의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 확인할 수도 없었다.
건물로 돌아와 정성이 넘치다못해 호화로운 저녁상을 받은 후, 강징은 한참 동안 가부좌를 틀고 연공을 하다가 일어났다.
연이은 일정에 피곤했음인지 밖에는 나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남의 눈을 피해 어둑한 지대를 전전하며 고소 남씨의 별채로 향했다.
함광군만 없다면 다른 수사들의 눈을 속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정문으로 들어갈 수는 없어 건물의 뒤편으로 돌아갔다.
남희신이 거처하는 3층의 창문에는 돌출된 곳이 없었기 때문에 강징은 한껏 땅을 차고 날아오른 다음 바로 창을 밀어젖히며 뛰어들었다.
“...실례합니다.”
별안간 기별도 없이 뛰쳐들어왔지만 남희신은 마치 그가 문을 통해 들어온 것처럼 여상하게 맞이했다.
야밤이라 그런지 아무래도 강징은 기분이 싱숭했다.
“지금 시간이 이러한데... 까닥하면 아침까지 자버리는게 아닙니까?”
“그럼 오히려 좋지요. 염려 말고 푹 주무십시오.”
남희신이 말했다.
사실, 일전에 낯선 사람에게 들킨 후로는 강징도 담이 조금 커진 것 같았다.
그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얼른 수인화를 하자, 남희신은 팔 위로 튀어오른 강징을 안고 침상으로 갔다.
유체 상태라 그런지, 수인으로 변한 강징은 주의력이 낮아졌으므로 그가 침상으로 이동하는 것도, 그럼에도 정복 차림인 것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침상이라 해도 남희신은 평소와 다름없이 단정하게 앉아 강징에게 온 정신을 쏟았다.
이윽고 꾸벅꾸벅 졸던 강징이 눈을 감아버리자 남희신은 조심스레 손을 얹고 잔잔하게 뛰는 박동을 느껴 보았다.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자신이 던진 문제가 묵은 상처를 건드리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는데, 괜찮은 모양이었다고.
아직 수인 상태가 별달라진 건 없지만 우선 잡은 목표에는 순조롭게 다가가고 있었다.
수인 상태로 경계심 없이 잠이 드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고, 대화를 나눌 때에도 제법 편안하고 스스럼없는 느낌이 들었다.
남희신은 달이 기울어질 때까지 꼼짝 않고 앉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강징이 깨어나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조심스레 뒤로 누웠다.
혹여나 잠이 들었다가 떨어뜨리지 않도록, 누운 가슴 위에 안전하게 강징을 올리고는 손바닥으로 살며시 감싸 안았다.
그리고 다음날.
남희신은 짤막하게 내지르는 비명 소리에 잠이 깨었다.
기민한 그가 바로 정신을 차리며 몸을 일으키자, 코 앞에 알몸이 된 강징이 허겁지겁 얇게 접힌 이불을 끌어모아 몸을 가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고양이가 아닌 인간 상태의 강징이었다.
강징은 기절할 정도로 놀라 체면을 생각해 볼 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렸더니 자신이 남희신의 가슴 위에 머리를 얹고 있었다. 그거야 익숙한 일이었지만, 곧장 그의 몸 위를 더듬는 손이 사람의 것이 아닌가!
꽥 소리를 지르고, 그 소리에 남희신이 일어나자 강징은 더욱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정신없이 몸을 가릴 것을 찾아 마구 잡아당기고, 뒤로 도망가는 한편으로는 침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혼비백산했다.
그러나 기가 막히는 짧은 시간동안 남희신은 이미 침착함을 되찾고 있었다.
그가 겉옷을 벗어 어설프고 난폭하게 천을 둘러 어깨가 빼꼼 나온 강징에게 덮어주었다.
“진정하십시오. 아무 것도 보지 못했으니.”
금방 알몸인채 똑바로 눈이 마주친 것을 거짓말로 덮으면서도 남희신은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연이어 그가 말했다.
“의도치 않게 수인화가 풀렸다는 건, 그만큼 당신의 긴장 상태가 완화되었다는 겁니다. 좋은 현상입니다.”
강징은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남희신의 장포까지 덮여서 몸은 다 가렸다. 더불어 언제나처럼 중립적이며 의원다운 그의 태도가 위안이 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한 침상에 알몸으로 있는 상태를 편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이윽고 남희신이 침상 밖으로 나가자, 강징은 옷을 입을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려는 줄로만 알고 기다렸다.
그러나 남희신은 밖으로 나가는 대신 강징의 옷가지를 챙기더니 건곤대에 넣는 것이었다.
“벌써 밖에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당신이 지금 이 방에서 나가는 건 이상하게 보일 겁니다.”
강징은 기가 막혔지만 광선을 보니 아침 시간을 꽤 넘긴 게 사실인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고양이로 돌아간 강징은 남희신이 손을 뻗자 얼른 그의 소매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남희신이 그 목덜미를 잡더니 팔에다 단단히 끼고 꼼짝도 못하게 감싸안았다.
따가운 여름 햇빛이 들이치며 두런대는 사람 소리가 커지자, 강징은 기겁하여 머리를 남희신의 가슴에 처박고 움직이지 않았다.
남희신이 운몽 강씨의 거처로 가서 귀를 기울여 보니, 아마도 강징의 방이 있을 위층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본 후 가볍게 날아올라 안으로 들어가니 반질반질한 복도가 나왔다.
이윽고 커다란 방 앞에 선 남희신이 문을 살짝 열고 몸을 숙이자, 품에서 튀어나온 강징이 빛과 같은 속도로 달려가버렸다. 남희신은 문 바로 안쪽에다 건곤대를 살짝 놓아주고는 같은 경로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일찍부터 시작된 무더위에 나다니는 사람들이 머리를 가리며 불평을 해대고 있었다.
그러나 천천히 걸어서 되돌아가는 남희신의 입가에는 선선한 바람을 맞는 것 같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나중에 운몽으로 돌아온 후.
택무군이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뜬소문이 흘러흘러 연화오까지 와 닿자, 강징은 머리를 짚었다.
분명 그는 성심껏 도와주고 있는 것이고, 그의 말대로 날이 갈수록 드러나는 변화도 확실했지만.
아무도 모르는 민망한 감정을 둘 곳 없는 강징은 공연히 그가 얄미워져, 기회만 된다면 꿀밤이라도 먹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희신강징
기산 온씨를 무너뜨린 후, 기산의 온씨 아닌 가문들은 기를 펴지 못했다.
아직까지도 전후의 앙금이 남아 있어 기산 출신의 사람들은 감히 권세를 펼치려 하거나, 그런 낌새를 내비치지 못했다.
이번 기산의 모임을 주도한 가문도 무척 태도가 조심스러웠다.
청담회나 사냥회가 기산에서 열리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으니, 불온한 마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한편으로는 손님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정성을 기울이는 것 같았다.
찌는 듯한 무더위를 뚫고 하늘 위를 날아온 손님들이 하나 둘씩 내리자 지상에서는 시원한 물을 퍼온다, 차를 나른다 하며 수십 명의 하인들이 숨차게 뛰어다녔다.
아무튼 대단히 부유한 가문이긴 하여, 별실은 하나같이 두꺼운 목재로 마루를 깔았고 군데군데 대나무가 채워져 바깥과는 별세상으로 느껴질 정도로 시원했다.
세도가 당당한 운몽 강씨가 안내받은 곳은 한 떼의 수사들이 함께 머물러도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큰 건물 한 채였다.
강징은 잠시 차를 마시다가 산책을 갔다 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보통 이럴 때에는 얼른 남희신부터 찾아가서 약속된 일을 해치우는 것이 수순이었지만, 근처의 숲길로 들어가더니 떠들썩한 사람 소리로부터 하염없이 멀어졌다.
제법 길이 번듯하다 싶더니 잉어가 노니는 커다란 연못이 나왔다. 연못가에는 몇 개의 대나무 의자도 놓여 있었다.
묵묵히 잉어떼를 바라보고 있던 강징은 불현듯 남희신이 나타나 곁에 서도 놀라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연못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남희신이 몸을 돌리자 강징도 그의 뒤를 따라갔다.
고소 남씨의 거처도 강징의 것 못지 않은 규모의 건물이었다.
하지만 십여 명이 넘는 사람을 데리고 온 운몽 강씨와는 달리 두세 명의 수사가 정자에 앉아 한가롭게 부채질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안으로 들어간 남희신이 손짓하자, 청소하던 하인이 물러가고 호젓한 공간에 둘만 남았다.
“제가 드린 숙제 때문에 고민하시는 겁니까?”
아마 물어보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정곡을 찔린 듯한 느낌이 든 강징이 불편한 숨소리를 흘렸다.
“그래서, 답은 찾으셨나요.”
마음을 돌리는 게 아주 늦어서 고민할 시간이 고작 하루밖에 없었던 강징은 겨우겨우 쥐어짜낸 생각 하나가 있긴 했지만, 이게 답이 될까 스스로도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남희신이 재촉하듯 바라보자 다른 수가 없었다.
“...솔직히, 남종주. 사람 속만큼 알기 어려운 게 없는데, 믿으라 한다고 믿을 수가 있겠나요.”
“그래서요?”
“그러니까...”
“......”
“당신은 저의 약점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네. 그래서요?”
우물쭈물하던 강징은 동요없는 남희신이 문득 얄미워져 째릿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말투에 오기가 스며들었다.
“그러니까, 당신도 저에게... 뭔가 약점을 알려주시거나. 혹은 귀한 물건이라도 맡기셔야 공평해지지 않을까요?”
제 귀로 들어도 옹색한 대답을 내뱉으며, 강징은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웃을 줄 알았던 남희신은 오히려 정색을 했다.
하긴 그가 나에게 빚진게 뭐가 있다고. 너무 무례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릴 했나? 하고 거북해지려는 강징에게 남희신이 말했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
아니, 뭐, 정말로??
강징은 제가 말해놓고도 제정신이냐는 듯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남희신이 말했다.
“좋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고민해볼 차례군요.”
전혀 납득할만한 대화는 아니었지만, 일단 제 차례는 모면했다 싶은 느낌이 들자 이 일로 오래도록 고민했던 강징은 숨이 놓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곧이어 남희신이 손을 내밀자 움찔했다.
“지, 지금? ...여기서요?”
이제 도착한 참이고, 장소도 낯설고. 그리고 금방 내가 들어가는 걸 다들 봤는데 그건 괜찮을까?...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계산이 스치는 강징에게 남희신이 말했다.
“사실은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겨서, 오후의 청담회가 끝나면 돌아가야 합니다.”
“그럼 내일 있는 야유회는 불참하신다는 겁니까?”
“야유회 정도는 망기에게 맡겨도 치레는 충분할 테니까요.”
남희신은 천연덕스럽게 말을 꾸며 대며, 더이상은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다. 이대로는 강징이 각성하기 전에 제 쪽이 어찌 변할지 모를 것 같았다.
낮부터 남희신의 품에서 잠이 든 강징은 아슬아슬하게 청담회 직전이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청담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곁으로 따라붙은 남희신이 작게 말을 건넸다.
“일이 잘 해결되었다는군요. 그래서 저 대신 망기를 보내기로 했으니, 나중에 제 방으로 오십시오.”
기습당한 듯 놀란 눈을 들었던 강징이 이내 주변을 의식하며 표정을 가라앉혔다.
“나중이라니... 밤중에 말입니까?”
바로 지금 여름 해가 저물고 있으니, 저녁 식사를 하고 나면 아주 어두워질 것이 뻔했다.
“네. 마침 잘 된 셈이지요.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마친 남희신이 강징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앞서 걸어가 버렸다.
-아니, 아까는 일찍 돌아가야 한다고 해서 그것-수면 치료-을 미리 해치웠더니, 단 몇시진도 안 되어 말을 바꾼다고?
적이 의심스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고소 남씨의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 확인할 수도 없었다.
건물로 돌아와 정성이 넘치다못해 호화로운 저녁상을 받은 후, 강징은 한참 동안 가부좌를 틀고 연공을 하다가 일어났다.
연이은 일정에 피곤했음인지 밖에는 나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남의 눈을 피해 어둑한 지대를 전전하며 고소 남씨의 별채로 향했다.
함광군만 없다면 다른 수사들의 눈을 속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정문으로 들어갈 수는 없어 건물의 뒤편으로 돌아갔다.
남희신이 거처하는 3층의 창문에는 돌출된 곳이 없었기 때문에 강징은 한껏 땅을 차고 날아오른 다음 바로 창을 밀어젖히며 뛰어들었다.
“...실례합니다.”
별안간 기별도 없이 뛰쳐들어왔지만 남희신은 마치 그가 문을 통해 들어온 것처럼 여상하게 맞이했다.
야밤이라 그런지 아무래도 강징은 기분이 싱숭했다.
“지금 시간이 이러한데... 까닥하면 아침까지 자버리는게 아닙니까?”
“그럼 오히려 좋지요. 염려 말고 푹 주무십시오.”
남희신이 말했다.
사실, 일전에 낯선 사람에게 들킨 후로는 강징도 담이 조금 커진 것 같았다.
그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얼른 수인화를 하자, 남희신은 팔 위로 튀어오른 강징을 안고 침상으로 갔다.
유체 상태라 그런지, 수인으로 변한 강징은 주의력이 낮아졌으므로 그가 침상으로 이동하는 것도, 그럼에도 정복 차림인 것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침상이라 해도 남희신은 평소와 다름없이 단정하게 앉아 강징에게 온 정신을 쏟았다.
이윽고 꾸벅꾸벅 졸던 강징이 눈을 감아버리자 남희신은 조심스레 손을 얹고 잔잔하게 뛰는 박동을 느껴 보았다.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자신이 던진 문제가 묵은 상처를 건드리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는데, 괜찮은 모양이었다고.
아직 수인 상태가 별달라진 건 없지만 우선 잡은 목표에는 순조롭게 다가가고 있었다.
수인 상태로 경계심 없이 잠이 드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고, 대화를 나눌 때에도 제법 편안하고 스스럼없는 느낌이 들었다.
남희신은 달이 기울어질 때까지 꼼짝 않고 앉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강징이 깨어나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조심스레 뒤로 누웠다.
혹여나 잠이 들었다가 떨어뜨리지 않도록, 누운 가슴 위에 안전하게 강징을 올리고는 손바닥으로 살며시 감싸 안았다.
그리고 다음날.
남희신은 짤막하게 내지르는 비명 소리에 잠이 깨었다.
기민한 그가 바로 정신을 차리며 몸을 일으키자, 코 앞에 알몸이 된 강징이 허겁지겁 얇게 접힌 이불을 끌어모아 몸을 가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고양이가 아닌 인간 상태의 강징이었다.
강징은 기절할 정도로 놀라 체면을 생각해 볼 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렸더니 자신이 남희신의 가슴 위에 머리를 얹고 있었다. 그거야 익숙한 일이었지만, 곧장 그의 몸 위를 더듬는 손이 사람의 것이 아닌가!
꽥 소리를 지르고, 그 소리에 남희신이 일어나자 강징은 더욱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정신없이 몸을 가릴 것을 찾아 마구 잡아당기고, 뒤로 도망가는 한편으로는 침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혼비백산했다.
그러나 기가 막히는 짧은 시간동안 남희신은 이미 침착함을 되찾고 있었다.
그가 겉옷을 벗어 어설프고 난폭하게 천을 둘러 어깨가 빼꼼 나온 강징에게 덮어주었다.
“진정하십시오. 아무 것도 보지 못했으니.”
금방 알몸인채 똑바로 눈이 마주친 것을 거짓말로 덮으면서도 남희신은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연이어 그가 말했다.
“의도치 않게 수인화가 풀렸다는 건, 그만큼 당신의 긴장 상태가 완화되었다는 겁니다. 좋은 현상입니다.”
강징은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남희신의 장포까지 덮여서 몸은 다 가렸다. 더불어 언제나처럼 중립적이며 의원다운 그의 태도가 위안이 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한 침상에 알몸으로 있는 상태를 편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이윽고 남희신이 침상 밖으로 나가자, 강징은 옷을 입을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려는 줄로만 알고 기다렸다.
그러나 남희신은 밖으로 나가는 대신 강징의 옷가지를 챙기더니 건곤대에 넣는 것이었다.
“벌써 밖에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당신이 지금 이 방에서 나가는 건 이상하게 보일 겁니다.”
강징은 기가 막혔지만 광선을 보니 아침 시간을 꽤 넘긴 게 사실인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고양이로 돌아간 강징은 남희신이 손을 뻗자 얼른 그의 소매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남희신이 그 목덜미를 잡더니 팔에다 단단히 끼고 꼼짝도 못하게 감싸안았다.
따가운 여름 햇빛이 들이치며 두런대는 사람 소리가 커지자, 강징은 기겁하여 머리를 남희신의 가슴에 처박고 움직이지 않았다.
남희신이 운몽 강씨의 거처로 가서 귀를 기울여 보니, 아마도 강징의 방이 있을 위층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본 후 가볍게 날아올라 안으로 들어가니 반질반질한 복도가 나왔다.
이윽고 커다란 방 앞에 선 남희신이 문을 살짝 열고 몸을 숙이자, 품에서 튀어나온 강징이 빛과 같은 속도로 달려가버렸다. 남희신은 문 바로 안쪽에다 건곤대를 살짝 놓아주고는 같은 경로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일찍부터 시작된 무더위에 나다니는 사람들이 머리를 가리며 불평을 해대고 있었다.
그러나 천천히 걸어서 되돌아가는 남희신의 입가에는 선선한 바람을 맞는 것 같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나중에 운몽으로 돌아온 후.
택무군이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뜬소문이 흘러흘러 연화오까지 와 닿자, 강징은 머리를 짚었다.
분명 그는 성심껏 도와주고 있는 것이고, 그의 말대로 날이 갈수록 드러나는 변화도 확실했지만.
아무도 모르는 민망한 감정을 둘 곳 없는 강징은 공연히 그가 얄미워져, 기회만 된다면 꿀밤이라도 먹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희신강징
[Code: 93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