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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0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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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순환하며 꽃바람이 몰아쳤다.
운심부지처에서 앓아 누웠던 돌발사건 후에 다시 만난 남희신은 전과 같은 온건한 태도로 돌아가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아무튼 다행으로 생각되었다. 고소 남씨의 주인을 마냥 피해다닐 순 없는 노릇이니, 이제 내 마음만 접으면 되리라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강징은 남희신의 부드러움이 점점 도를 지나쳐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난릉 금씨로부터 청담성회 초청장을 받은 강징은 늘 하던 버릇으로 하루 일찍 금린대에 도착했다.
그래도 더이상 조카의 일에 감놔라 배놔라 하지는 않는다.
요 몇년 동안, 금여란은 씩씩해 보이는 젊은 가주로 성장했다.
부유한 배경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난릉 금씨보다는 외숙과 고소 남씨 문하생들, 그리고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이릉노조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그는 다채로운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결벽적인 느낌으로 콧대를 세우는 것은 금씨의 내력인 듯했고, 욱하며 예민한 기질은 외숙을 닮은 듯하고, 모가 나게 굴다가도 결국은 인정에 지고 마는 마음은 모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건지 모른다.
“외숙, 반주는 하지 말아요. 이따 회의장에서 훨씬 좋은 술을 선보일 테니까요.”
금릉이 강징의 조반상에 놓인 술병에 흘긋 눈길을 던지며 말했다.
그 술병은 아침상에 멋대로 놓인 것이지, 강징이 청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려던 강징은 무언가 말을 더 얹고 싶어하는 금릉의 눈빛을 보고 헛기침만 삼켰다. 삼독성수가 술독이 올라 운심부지처에서 몸져 누웠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져 금릉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다.
소문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금릉이 알기로 외숙은 술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언제든지 중요한 일이 생기면 자신의 안위 따위는 불쏘시개처럼 희생시켜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인간이 술을 마셨다면 대체 무슨 근심이 있는 건지 걱정스러웠고, 그냥 앓아누운 거라면 건강에 문제가 있는지 걱정스러웠다.
강징을 살피는 금릉의 기색은 아직도 큰 가문의 주인다운 노련함은 없어 의심과 근심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 서투름과, 투정부리듯 저만 보면 삐죽대던 태도가 사라진 것에 강징은 가슴이 뻐근해왔다. 나름 무게를 잡고 의젓한 모습에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껏 돌보아 왔던 어린아이가 영영 사라져버리고 말았다는 상실감에 허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투연청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을 때, 강징은 저도 모르게 술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원래부터 술은 즐기지 않았고, 지난 겨울에도 취하기 위해 들이부었던 것뿐 맛이라곤 몰랐다. 그러나 금릉이 자신있어 하던 술은 잘 모르는 강징이 보아도 훌륭한 느낌이었다. 잔을 쥐고 있기만 해도 체온을 타고 은은히 퍼지는 향이 그윽한 동시에 독하여 기분이 몽롱했다.
어쩌면 이것도 위무선이 어디선가 발굴해낸 보물이 아닌가. 아니라 해도 조만간 그의 입에 들어가고 말거라는 생각에 강징은 피식 쓴웃음이 나왔다. 벌써 취기가 상당히 오른 상태였다.
어쨌든 청담회는, 특히 난릉 금씨의 청담회는 전전 주인의 영향으로 예의바른 모임이라기보다는 연회에 가깝다는 인식이 강했기에 술을 마신다고 흠이 되지는 않았다. 그가 술을 마시는지 물을 마시는지 알아챌 정도로 관심을 기울일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반은 취기로, 반은 자조적인 감정에 젖어 느슨해진 강징은 느닷없이 내리꽂히는 말소리에 전신이 뾰족해졌다.
“또 술을 드시는 겁니까?”
어느덧 텅 비어 있던 집회장이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남희신이 곁에 서서 그 큰 키를 굽혀 들여다보고 있었다.
“...택무군.”
강징은 떨떠름하게 응수하며 자세를 바로잡고는, 술잔을 내려놓았다가, 손가락을 갖다대고 만지작거리며 마실까말까 무척 신경이 쓰였다.
...아니, 그런데 내가 왜 저 사람의 눈치를 봐야 하지?...
강징은 눈살을 찌푸리며 술잔을 쥐고 단숨에 비워버렸다.
하지만 호쾌함도 아주 잠시, 남희신이 그대로 곁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던 술이 걸려 콜록콜록 기침을 해댔다.
멀리서는 남희신이 자리에 앉는 것을 본 금여란이 당황하며 여종을 불렀다.
곧장 날씬한 맵시의 여종이 다가와서 술상을 찻상으로 바꾸어 놓는 동안 남희신은 그답게 고상하며 여유 있는 태도로 앉아 있었다.
강징은 이제 맛도 음미하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털어넣고만 있었다.
남희신이 말했다.
“요즘도 술을 많이 드십니까?”
강징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릉도 그렇고, 도대체 나는 술꾼으로 낙인이 찍혀버린 건가?
하지만 술을 마시고 남의 집에서 앓아눕는 추태를 보였으니, 스스로 돌아봐도 변명할 말이 없었다.
“...많이 먹지는 않습니다.”
“다행이군요.”
남희신의 응수에 강징은 역시 할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그가 가문의 주인다운 한담을 이어가기 시작하자 강징은 그가 옆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을 알고 뜨거운 숨을 토했다.
어쩔 수 없이 대꾸를 해주며, 어쩔 수 없이 그를 바라보고 또한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흔들렸다.
별안간 그가 심장 속 깊이 들이꽂혔던 순간도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어딜 가든 회담의 주최자들은 고소 남씨의 자리에 주의를 기울인다. 가풍에 의해 술이나 고기를 자리에 올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남희신이 담백하게 차려진 자리에 앉으면 그 곁에는 으레 청하 섭씨가 자리를 잡았고, 그로부터 대칭으로 떨어진 자리에 운몽 강씨와 난릉 금씨가 앉는 것이 수순이었다.
그런데 그 날의 강징은 잡생각에 정신이 팔려서 남희신의 곁에 앉는 실수를 해버린 것이었다. 본래의 암묵적인 배치가 잘못 앉은 이를 나무랄 정도로 굳게 정해진 건 아니지만, 거듭 이어져왔던지라 백의의 곁에 자리한 화려한 자색 장포가 뚜렷한 의식이 없는 사람들의 눈에도 어색하게 비쳤다.
이윽고 얼굴을 찌푸린 채 사색에 잠긴 강징을 본 섭회상은 별 생각 없이 다른 자리로 가버렸고, 먼저 앉아 있던 금여란과 제법 익숙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강징이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였다.
주위를 둘러본 그는 속으로 크게 놀라 건너편에 눈길을 주었지만 금릉과 섭회상은 자기들의 얘기에 빠져 쳐다보지도 않았다.
사실은 별 일도 아니건만, 그만큼 강징이 4대 세가의 친분 구도를 신경쓰고 있다는 증거였다. 게다가 강징은 괜시리 남희신이 어려웠다. 본래부터 그는 서열이나 권위에 약한 성격이었고, 이유없는 친절을 마음 편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으며, 특히 관음묘에서 그의 앞에서 추태를 보이고 난 후에는 더욱 그랬다.
그런데 그 때의 남희신은 마치 강징의 주의력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 왔다.
마치 원래 이 곳에 앉았어야 할 사람인 섭회상 혹은... 그 누군가를 대하는 것과 꼭같이 상냥한 말투였다.
그 태도는 당황하고 있는 강징의 무렴을 남김없이 감싸안아 주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때에, 강징은 그토록 잘났다는 택무군의 미모를 난생 처음으로 인식했다.
수선인답게 불혹이 넘은 나이에도 싱싱한 젊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말액 아래로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은 머리가 눈처럼 하얀 의복 위로 드리워졌다. 베일 듯 날렵하게 흘러내리는 콧날과 턱의 선은 입술에 닿는 백옥 자기가 무색할 정도였다.
마음에 상처를 입어 전보다 야윈 모습이 오히려 섬세하게 깎아낸 듯, 다시 다듬은 조각처럼 아름다움을 발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조각상이 돌아보며 한없이 다정한 시선을 보낼 때, 강징은 그만 혼을 다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그 순간을 돌이켜 보며 강징은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이제 와서 차로 바꾸는 것도 우스울 것 같아 자꾸 술만 들이부었다.
한동안 강징의 마음 속에서 겉껍데기에 불과한 남희신의 그런 모습은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이순간 곁에서 단정하게 말을 거는 그가 꼭 그 때와 같이 고상하고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마치 첫사랑이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랄까.
강징은 그에 대한 마음을 버리고자 했고, 그런 노력이 효과를 보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저 모습이 남희신의 진실도 아니고,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란 것도 아는데.
아니, 그 심연 같은 속을 다 파헤쳐본 적이 없으니,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질이 나쁜 인간일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그가 다정한 미소를 짓기만 하면, 어리석은 마음은 곧바로 시작지점으로 돌아가 처녀처럼 속을 태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강징이 건성으로 말장단만 맞추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남희신은 한결같은 태도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끝없이 긴 시간이 흘러 간신히 청담회가 시작되자 강징은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언가 열변을 토하는 가주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던 남희신이 돌아보며 말했다.
“정히 폭주를 하실 거라면 제가 참견할 입장은 아니지만. 이따 보내 드리는 약탕을 챙겨 드십시오. 효과는 일전에 운심부지처에서 확인해 보셨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가 물끄러미 강징을 바라보았다.
그 속을 헤아릴 수가 없는 강징은 그의 눈빛이 무척 이상하게만 보였다.
그 때 문득 강징의 머릿속에, 차가운 금이 그이는 것 같은 불쾌한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이 사람이 지금... 나를 동정하고 있는 건가?
남희신은 무척 다정하게 권하고 있었지만, 강징은 얼굴이 차갑게 굳어지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쓸모가 있기는커녕 독에 가까웠지만, 강징은 자존심 하나로 지탱해 온 사람이었다. 가족도, 지기도, 가문도, 하늘도 땅도 몽땅 잃어보았지만 감히 누가 저를 동정하도록 놔둔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어 처음으로 마음을 준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이 그 동정이라니.
더 이상은 목마름도 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코가 시큰하며 무언지 어린애처럼 서러운 감정이 북받칠 것 같아서 이를 아득 물고는, 턱을 돌처럼 굳히고 앞만 바라보았다.
남희신이 몇 번 더 말을 걸었지만 강징은 쳐다보지도 답을 하지도 않았다.
며칠 후 남희신이 말했던대로 여러 가지 약재를 보내왔으나 강징은 가만히 바라보다가 돌려보내라고 명했다.
이후로 남희신과 마주치는 강징의 태도에서는 냉기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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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심부지처에서 앓아 누웠던 돌발사건 후에 다시 만난 남희신은 전과 같은 온건한 태도로 돌아가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아무튼 다행으로 생각되었다. 고소 남씨의 주인을 마냥 피해다닐 순 없는 노릇이니, 이제 내 마음만 접으면 되리라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강징은 남희신의 부드러움이 점점 도를 지나쳐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난릉 금씨로부터 청담성회 초청장을 받은 강징은 늘 하던 버릇으로 하루 일찍 금린대에 도착했다.
그래도 더이상 조카의 일에 감놔라 배놔라 하지는 않는다.
요 몇년 동안, 금여란은 씩씩해 보이는 젊은 가주로 성장했다.
부유한 배경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난릉 금씨보다는 외숙과 고소 남씨 문하생들, 그리고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이릉노조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그는 다채로운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결벽적인 느낌으로 콧대를 세우는 것은 금씨의 내력인 듯했고, 욱하며 예민한 기질은 외숙을 닮은 듯하고, 모가 나게 굴다가도 결국은 인정에 지고 마는 마음은 모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건지 모른다.
“외숙, 반주는 하지 말아요. 이따 회의장에서 훨씬 좋은 술을 선보일 테니까요.”
금릉이 강징의 조반상에 놓인 술병에 흘긋 눈길을 던지며 말했다.
그 술병은 아침상에 멋대로 놓인 것이지, 강징이 청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려던 강징은 무언가 말을 더 얹고 싶어하는 금릉의 눈빛을 보고 헛기침만 삼켰다. 삼독성수가 술독이 올라 운심부지처에서 몸져 누웠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져 금릉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다.
소문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금릉이 알기로 외숙은 술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언제든지 중요한 일이 생기면 자신의 안위 따위는 불쏘시개처럼 희생시켜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인간이 술을 마셨다면 대체 무슨 근심이 있는 건지 걱정스러웠고, 그냥 앓아누운 거라면 건강에 문제가 있는지 걱정스러웠다.
강징을 살피는 금릉의 기색은 아직도 큰 가문의 주인다운 노련함은 없어 의심과 근심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 서투름과, 투정부리듯 저만 보면 삐죽대던 태도가 사라진 것에 강징은 가슴이 뻐근해왔다. 나름 무게를 잡고 의젓한 모습에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껏 돌보아 왔던 어린아이가 영영 사라져버리고 말았다는 상실감에 허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투연청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을 때, 강징은 저도 모르게 술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원래부터 술은 즐기지 않았고, 지난 겨울에도 취하기 위해 들이부었던 것뿐 맛이라곤 몰랐다. 그러나 금릉이 자신있어 하던 술은 잘 모르는 강징이 보아도 훌륭한 느낌이었다. 잔을 쥐고 있기만 해도 체온을 타고 은은히 퍼지는 향이 그윽한 동시에 독하여 기분이 몽롱했다.
어쩌면 이것도 위무선이 어디선가 발굴해낸 보물이 아닌가. 아니라 해도 조만간 그의 입에 들어가고 말거라는 생각에 강징은 피식 쓴웃음이 나왔다. 벌써 취기가 상당히 오른 상태였다.
어쨌든 청담회는, 특히 난릉 금씨의 청담회는 전전 주인의 영향으로 예의바른 모임이라기보다는 연회에 가깝다는 인식이 강했기에 술을 마신다고 흠이 되지는 않았다. 그가 술을 마시는지 물을 마시는지 알아챌 정도로 관심을 기울일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반은 취기로, 반은 자조적인 감정에 젖어 느슨해진 강징은 느닷없이 내리꽂히는 말소리에 전신이 뾰족해졌다.
“또 술을 드시는 겁니까?”
어느덧 텅 비어 있던 집회장이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남희신이 곁에 서서 그 큰 키를 굽혀 들여다보고 있었다.
“...택무군.”
강징은 떨떠름하게 응수하며 자세를 바로잡고는, 술잔을 내려놓았다가, 손가락을 갖다대고 만지작거리며 마실까말까 무척 신경이 쓰였다.
...아니, 그런데 내가 왜 저 사람의 눈치를 봐야 하지?...
강징은 눈살을 찌푸리며 술잔을 쥐고 단숨에 비워버렸다.
하지만 호쾌함도 아주 잠시, 남희신이 그대로 곁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던 술이 걸려 콜록콜록 기침을 해댔다.
멀리서는 남희신이 자리에 앉는 것을 본 금여란이 당황하며 여종을 불렀다.
곧장 날씬한 맵시의 여종이 다가와서 술상을 찻상으로 바꾸어 놓는 동안 남희신은 그답게 고상하며 여유 있는 태도로 앉아 있었다.
강징은 이제 맛도 음미하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털어넣고만 있었다.
남희신이 말했다.
“요즘도 술을 많이 드십니까?”
강징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릉도 그렇고, 도대체 나는 술꾼으로 낙인이 찍혀버린 건가?
하지만 술을 마시고 남의 집에서 앓아눕는 추태를 보였으니, 스스로 돌아봐도 변명할 말이 없었다.
“...많이 먹지는 않습니다.”
“다행이군요.”
남희신의 응수에 강징은 역시 할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그가 가문의 주인다운 한담을 이어가기 시작하자 강징은 그가 옆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을 알고 뜨거운 숨을 토했다.
어쩔 수 없이 대꾸를 해주며, 어쩔 수 없이 그를 바라보고 또한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흔들렸다.
별안간 그가 심장 속 깊이 들이꽂혔던 순간도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어딜 가든 회담의 주최자들은 고소 남씨의 자리에 주의를 기울인다. 가풍에 의해 술이나 고기를 자리에 올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남희신이 담백하게 차려진 자리에 앉으면 그 곁에는 으레 청하 섭씨가 자리를 잡았고, 그로부터 대칭으로 떨어진 자리에 운몽 강씨와 난릉 금씨가 앉는 것이 수순이었다.
그런데 그 날의 강징은 잡생각에 정신이 팔려서 남희신의 곁에 앉는 실수를 해버린 것이었다. 본래의 암묵적인 배치가 잘못 앉은 이를 나무랄 정도로 굳게 정해진 건 아니지만, 거듭 이어져왔던지라 백의의 곁에 자리한 화려한 자색 장포가 뚜렷한 의식이 없는 사람들의 눈에도 어색하게 비쳤다.
이윽고 얼굴을 찌푸린 채 사색에 잠긴 강징을 본 섭회상은 별 생각 없이 다른 자리로 가버렸고, 먼저 앉아 있던 금여란과 제법 익숙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강징이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였다.
주위를 둘러본 그는 속으로 크게 놀라 건너편에 눈길을 주었지만 금릉과 섭회상은 자기들의 얘기에 빠져 쳐다보지도 않았다.
사실은 별 일도 아니건만, 그만큼 강징이 4대 세가의 친분 구도를 신경쓰고 있다는 증거였다. 게다가 강징은 괜시리 남희신이 어려웠다. 본래부터 그는 서열이나 권위에 약한 성격이었고, 이유없는 친절을 마음 편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으며, 특히 관음묘에서 그의 앞에서 추태를 보이고 난 후에는 더욱 그랬다.
그런데 그 때의 남희신은 마치 강징의 주의력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 왔다.
마치 원래 이 곳에 앉았어야 할 사람인 섭회상 혹은... 그 누군가를 대하는 것과 꼭같이 상냥한 말투였다.
그 태도는 당황하고 있는 강징의 무렴을 남김없이 감싸안아 주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때에, 강징은 그토록 잘났다는 택무군의 미모를 난생 처음으로 인식했다.
수선인답게 불혹이 넘은 나이에도 싱싱한 젊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말액 아래로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은 머리가 눈처럼 하얀 의복 위로 드리워졌다. 베일 듯 날렵하게 흘러내리는 콧날과 턱의 선은 입술에 닿는 백옥 자기가 무색할 정도였다.
마음에 상처를 입어 전보다 야윈 모습이 오히려 섬세하게 깎아낸 듯, 다시 다듬은 조각처럼 아름다움을 발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조각상이 돌아보며 한없이 다정한 시선을 보낼 때, 강징은 그만 혼을 다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그 순간을 돌이켜 보며 강징은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이제 와서 차로 바꾸는 것도 우스울 것 같아 자꾸 술만 들이부었다.
한동안 강징의 마음 속에서 겉껍데기에 불과한 남희신의 그런 모습은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이순간 곁에서 단정하게 말을 거는 그가 꼭 그 때와 같이 고상하고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마치 첫사랑이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랄까.
강징은 그에 대한 마음을 버리고자 했고, 그런 노력이 효과를 보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저 모습이 남희신의 진실도 아니고,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란 것도 아는데.
아니, 그 심연 같은 속을 다 파헤쳐본 적이 없으니,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질이 나쁜 인간일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그가 다정한 미소를 짓기만 하면, 어리석은 마음은 곧바로 시작지점으로 돌아가 처녀처럼 속을 태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강징이 건성으로 말장단만 맞추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남희신은 한결같은 태도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끝없이 긴 시간이 흘러 간신히 청담회가 시작되자 강징은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언가 열변을 토하는 가주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던 남희신이 돌아보며 말했다.
“정히 폭주를 하실 거라면 제가 참견할 입장은 아니지만. 이따 보내 드리는 약탕을 챙겨 드십시오. 효과는 일전에 운심부지처에서 확인해 보셨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가 물끄러미 강징을 바라보았다.
그 속을 헤아릴 수가 없는 강징은 그의 눈빛이 무척 이상하게만 보였다.
그 때 문득 강징의 머릿속에, 차가운 금이 그이는 것 같은 불쾌한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이 사람이 지금... 나를 동정하고 있는 건가?
남희신은 무척 다정하게 권하고 있었지만, 강징은 얼굴이 차갑게 굳어지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쓸모가 있기는커녕 독에 가까웠지만, 강징은 자존심 하나로 지탱해 온 사람이었다. 가족도, 지기도, 가문도, 하늘도 땅도 몽땅 잃어보았지만 감히 누가 저를 동정하도록 놔둔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어 처음으로 마음을 준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이 그 동정이라니.
더 이상은 목마름도 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코가 시큰하며 무언지 어린애처럼 서러운 감정이 북받칠 것 같아서 이를 아득 물고는, 턱을 돌처럼 굳히고 앞만 바라보았다.
남희신이 몇 번 더 말을 걸었지만 강징은 쳐다보지도 답을 하지도 않았다.
며칠 후 남희신이 말했던대로 여러 가지 약재를 보내왔으나 강징은 가만히 바라보다가 돌려보내라고 명했다.
이후로 남희신과 마주치는 강징의 태도에서는 냉기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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