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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5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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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다병이 친부가 보낸 첩자면 어캄


연화루ㅅㅍ





진실을 말해주겠다는 선고도 의도는 악의적이었다. 방다병의 뿌리를 흔들고 혼란에 빠트렸다. 출생의 비밀을 가벼이 여기고 쉽게 입을 놀리는 삼촌을 앞으로도 아버지라 부를 일은 없으리라 예상하면서도 그뒤로 방다병에게 묘한 그늘이 생겼다.

무공 연습차 몇 차례 들렀던 선고도는 이상이에 대한 증오심을 숨기지 않았다. 지독히도 끓어올랐다. 방다병 머릿속엔 본적도 없던 얼굴이 그의 말에 따라 오만하고 이기적으로 그려졌다.

어느 날 검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는 저에게 가벼운 목검을 건네던 하얗고 다부진 손. 그가 이상이였다. 남일에 간섭하고 나서기를 좋아하며 오지랖이 하늘을 찌른다던 선고도의 말이 떠올랐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동해대전으로 이상이가 실종된 후 몇 해가 더 지났다. 아주 오랜만에 선고도가 즐거운 듯 웃었다. 이연화라 이연화.
다시 마주한 그가 이상이란 게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근육이 빠져 가늘어진 외형과 속내를 능숙하게 감추는 표정. 교묘하게 자신의 도움을 유도하는 행동을 보며 누가 사고문 문주를 떠올릴 수 있었을까.

선고도의 예상이 맞아떨어진 건 딱 하나였다. 이연화는 그 누구도 옆에 두지 않으려 할 테고 방다병 너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 이연화 옆을 기웃댄 결과로 몇 번을 볕 좋은 허허벌판 아니면 그늘진 나무 아래에서 정신을 차렸다. 방다병은 몸을 일으키며 헛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독약을 타서 먹이는 게 덜 귀찮지 않나 싶어서.

꽤 오래 혼자 지내온 그에게 온기 섞인 사탕발림 같은 말을 툭툭 던졌다. 친구. 아주 좋은 명분이었다. 고의로 차가운 말을 내뱉는 이연화에게 상처받은 눈빛을 보여주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 상처가 깊어 보일수록 이연화가 편히 잠들지 못할 밤은 길어질 터였다.

죽음을 곁에 두며 사는 이연화는 예상했던 모습과 사뭇 달랐다. 풍문으로 들려오는 그의 행적들도 선고도가 되뇌던 얘기와 온도차가 있었다. 방다병은 더 알고 싶지 않아 눈과 귀를 닫았다.
치명적인 독에 중독돼 남은 생을 선고도 시신 하나 찾겠다며 애쓰는 이연화를 보며 방다병은 처음엔 우습게 여겼고 그 뒤론 조금 짜증이 일었다.

제법 먹을만하던 음식이 이연화 상태가 악화되며 점차 입안을 겉돌았다. 줄곧 그의 음식을 맛보며 가볍게 핀잔을 날리던 방다병이 굳어지는 얼굴을 애써 감추며 웃었다. 이연화, 우리 세상에 존재하는 음식이나 먹을 순 없을까? 말하자 이연화가 눈을 내리뜨며 미소 지었다. 그는 곧잘 다병의 말에 부드럽게 웃곤 했다.

방다병은 자신을 구하려고 이연화가 본인 정체를 더 이상 감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서운함으로 포장해 독설을 퍼부었다. 아마 그는 몇 날 며칠을 앓아누웠을 테지. 차라리 지쳐서 더이상 선고도를 찾지 않는 게 나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다시 만난 이연화는 생기가 한 줌 더 빠져나간 것 같았다. 밤이 되자 한독으로 떨어대는 몸을 몇 겹의 이불로 감싸 끌어안았다. 그의 정신이 어디쯤 헤매고 있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해가 뜨고 정신이 든 이연화는 기어코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본인의 증상을 넘기려 했다. 방다병은 그의 의도대로 속아주기로 했다. 잠 한숨 들지 못하고 눈앞이 아득해진 이유를 굳이 찾지 않으려 애썼다.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이연화가 진실에 한 발짝 다가설 때마다 선고도의 기분은 구름 위로 솟아 넘실댔다. 결국 이연화가 무덤을 도로 파헤쳐 선고도의 생존을 알게 되자 선고도의 인내심은 바닥났다. 한시라도 빨리 그와 마주해 진실을 까발리고 싶었다. 세상에 널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언제고 올 날이었다. 이날을 위해 선고도가 방다병을 이연화 곁으로 보낸 것이 아니던가. 협박이나 강제가 아니었다. 아주 오랜 시간 그의 증오가 옮은 탓이겠지.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이연화는 말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선고도와 방다병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눈엔 눈물이 고이다 실핏줄이 터지고 악다문 턱이 미세하게 떨렸다. 고개를 두어 번 저은 그의 칼날이 선고도를 향했다가 조용히 거둬졌다. 한숨을 토해내듯 내뱉은 이연화 손에서 검이 떨어져 나갔다.

이유를 묻지도 탓하지도 않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의 분노는 고요했고 절망은 무겁게 방다병 어깨를 짓눌렀다. 멀리 산 넘어 아무것도 없을 허공을 건너보던 이연화는 아주 잠깐 허탈한 듯 웃었다. 선고도는 눈치채지 못할 만큼 찰나였다. 드디어 이상이를 밟고 일어섰다며 호탕하게 웃어젖히던 선고도는 금세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굳어버렸다.

가파른 절벽 위 아무 낌새도 없이 점차 뒤로 물러나던 이연화가 바람처럼 절벽 아래로 사라졌다. 동시에 방다병이 반사적으로 튕겨나간 탓이었다. 선고도가 붙잡으려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만큼 거리낌 없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선고도는 어느새 홀로 남겨져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멍하니 서있었다.

조금 전까지 선고도 옆 우두커니 서있던 방다병은 한순간도 이연화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었다. 차라리 그가 윽박지르며 저주를 퍼부었으면 좀 나았을까. 선고도의 웃음 소릴 들고 있자니 역해서 속이 울렁였다.

안개가 짙었다. 그가 점점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단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한순간 그의 몸이 크게 휘청이며 허공에 다다랐을 때 거짓말처럼 시선이 마주쳤다. 그 눈엔 어째서 원망 한 톨 담겨있지 않은 건지. 울분으로 차올라야 마땅한 표정엔 온전한 슬픔만이 자리했다. 이런 그를 어떻게 홀로 저렇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답은 하나였다. 조금이라도 빨리 내 손에 그가 닿기를 바라며 팔을 뻗었다.
발이 공중에 뜨고 거센 바람이 온몸을 휘감았다. 마침내 그에게 손끝이 닿았다. 마른 등을 양팔로 감추듯 품 안에 안았다. 평온히 감겼던 이연화 눈이 느릿하게 떠지자 염치없게도 안도의 웃음이 나왔다. 눈물마저 날아가고 처음으로 그를 편히 안아보는 순간이었다.




연화루 증순희성의 슌시츼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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