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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7 09:28

근데 강징만 비밀이 있는 게 아니고....
 

여인은 진흙과 핏물에 얼룩진 옷자락을 걸친 채 크게 휘청거리며 거친 숨결을 내뱉었다. 쏟아지는 비를 가르며 방향도 모른 채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정신없이 내달린 끝에 그녀가 도착한 곳은 나무 기둥마다 세월의 금이 가득한 낡고 버려진 절이었다. 절은 사람이 머문 흔적조차 아득한 옛날에 멈춘 듯, 뜯긴 기와 사이로 비가 줄줄 새어내리고 있었다. 곳곳에 하얗게 엉겨 붙은 거미줄은 사방을 뒤덮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삐걱이는 문짝 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마치 지금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지만, 여인에게는 그 정적이 오히려 안도감을 주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함은 그녀를 추격에서 벗어나게 해줄 은신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비에 젖어 뺨에 찰싹 달라붙은 머리칼을 무심히 털어내며, 여인은 깊게 들숨과 날숨을 이어갔다. 가빠지는 호흡을 겨우 추스르며 몸을 가누려 애썼다. 고꾸라질 듯 기운이 다 빠진 몸이었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힘겹게 발을 내딛으며 절 안쪽으로 들어선 그녀의 시야에 어슴푸레한 글자가 들어왔다. 명부전(冥府殿). 비에 젖은 나무판자에 새겨진 그 세 글자는 짙은 먹물이 번져 나간 듯 검고 선명했다.

썩은 나무 문을 밀어 열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쪽은 촛불 하나 없이 어둠이 짙어 절 안은 죽은 공간 같았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는 것이 없고, 발소리가 나도 되돌아오는 메아리가 없었다. 그녀의 코끝에 스며든 것은 짙은 습기와 오래된 나무 썩은내, 그리고 불길의 잔재, 탄내였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순간 "와지끈!" 하는 천둥 소리와 함께 번개가 하늘을 찢었다. 섬광이 절 내부를 하얗게 밝히는 순간, 천장의 한쪽이 힘없이 무너져내면서 가려져 있던 낡고 때 묻은 불상의 얼굴이 드러났다. 단단히 굳어진 표정의 지장보살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옥에 떨어진 모든 중생을 구제할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지닌 지장보살이었다
 

"당장 지옥으로 끌려가야 할 것 같군..."

그녀는 자조 어린 웃음을 흘렸다. 비에 젖어 넝마가 된 옷은 몸에 달라붙었고, 머리칼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물줄기는 이마를 타고 흘러내려 눈가를 스치고 턱 아래로 떨어졌다. 
. 차가운 물줄기는 이마를 타고 흘러내려 눈가를 스치고 턱 아래로 떨어졌다.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을 만큼 거센 비를 피해 몸을 돌리자, 갑작스레 어깻죽지에서 강렬한 통증이 불길처럼 치솟았다. 통증의 중심에서는 유독 피가 끈질기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검붉은 피는 팔을 타고 흐르더니 손끝에까지 이르러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그녀의 서서히 어깨로 향하니 어깻죽지에 박힌 화살이 눈에 들어왔다. 검붉은 피가 줄줄 흐르는 게 독화살이 분명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화살대의 나무결을 더듬었다.

단단히 박힌 화살촉이 어깨뼈를 깊이 찌르고 있었다. 날카로운 감각이 너무나 명확히 전해져, 여인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이대로 두면 독이 온몸으로 퍼질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순간, 가슴이 세차게 조여들고 심장은 폭주하듯 격렬히 뛰었다. 온 힘을 손끝에 집중해 화살대를 다시 움켜쥐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화살대의 단단한 감촉이 소름처럼 몸을 뒤덮었고, 참으려는 신음이 어금니 사이로 터질 듯 새어나왔다. 이를 악문 힘이 너무 강해 어금니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화살대가 약간 흔들리는 순간, 뼈가 긁히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동시에 눈앞이 하얗게 번쩍이며 고통이 몸을 완전히 휘감았다. 뚝—,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빠져나왔다.

압박이 풀리자, 대신 통증이 전신을 집어삼켰다. 여인은 피가 줄줄 흐르는 어깨를 부여잡으며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어깨는 불타는 듯 뜨거웠고, 고통은 위장을 뒤틀었다. 결국 참아왔던 헛구역질이 목구멍을 뚫고 거칠게 터져 나왔다. 몸을 웅크리며 고통을 견뎌 보려 했지만, 차가운 바닥에 닿은 이마는 얼음처럼 싸늘했다. 도망치는 동안 짓누르던 모든 고통이 이제야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시야는 서서히 어둠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몸은 서늘해졌고, 한기와 열기가 뒤엉키며 묘한 이질감을 만들어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듯 어지러웠다. 정신을 붙잡으려 주먹을 꼭 쥐었지만, 손끝의 감각마저 희미해졌다.

그때였다. "끼익—" 굳게 닫혀 있던 절의 문이 천천히 열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인은 본능적으로 검 손잡이를 잡으려 했지만, 고통과 탈진으로 손가락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흐릿한 시야 너머로 순간 번쩍이는 강렬한 빛이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다. 어둠 속에서 노란빛을 띠는 두 눈동자가 뚜렷하게 보였다. 밝고 강렬한 금빛이었다. 그것은 사람이 가질 수 없는 눈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빛나는 그 눈은 날카롭고 비현실적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흰 털로 뒤덮인 거대한 짐승이 문 안에 서 있었다.

그것은 짐승 같았지만, 짐승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그 존재는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신비와 위압감을 동시에 뿜어내고 있었다. 여인은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이 상황이 현실일 수 있을까? 피로에 절어가는 의식 속에서도 그 눈동자의 금빛만큼은 계속 시야에 아른거렸다.

요수라면 사악한 기운이 감돌았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존재에게서는 어떤 기운도 감지되지 않았다. 산짐승처럼 보였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절을 지키는 영험한 영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갔지만, 확신하기에는 부족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는 그저 묵직한 존재감으로 그녀를 압도할 뿐이었다. 겨우 몸을 일으킨 그녀는 비틀거리며 검을 들어 올렸다. 마지막 남은 기운을 쥐어짜내듯 검을 휘둘렀다. 둔하고 힘없는 움직임이었기에 피할 거라 예상했지만, 날카로운 검날이 짐승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짐승의 옆구리에서 붉은 피가 천천히 뚝뚝 떨어졌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으나, 분명한 상처였다.

짐승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낮고 깊은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공기 중에 소름이 돋는 진동이 퍼졌고, 커다란 송곳니가 드러나며 짐승의 위압감이 한층 고조되었다. 진흙탕을 밟고 있음에도 소리 없이 다가온 짐승은 단번에 그녀의 검을 입으로 물어채더니, 멀리 내던져 버렸다. 검이 손에서 떨어져 나가는 충격에 그녀는 균형을 잃고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몸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어깻죽지의 화살 상처에서 피가 다시 울컥 솟아났다. 그녀의 뺨이 차가운 진흙탕 바닥에 닿았다. 의식이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세상이 점점 멀어지며, 차갑게 식어가는 자신의 몸을 느꼈다. 이렇게 짐승에게 물어뜯겨 허무하게 끝나는 최후라니. 그녀는 눈을 감으며 마지막 절망을 삼켰다. 그러나 그 순간, 등 뒤로 따뜻한 온기가 서서히 스며들었다. 그녀를 감싸는 부드러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눈부시게 새하얀 털이었다. 짐승이 그녀를 물어뜯는 대신, 자신의 털로 그녀를 덮고 있었다. 그녀는 반항할 힘조차 없었다. 그대로 털에 얼굴을 묻으며 점점 강해지는 온기를 느꼈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몸이 조금씩 풀어지며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의식은 서서히 끊어지기 시작했다. 어둠 속으로 잠기듯 천천히, 그러나 평온하게.


 

**

 

 

 

한참을 사경을 헤매던 끝에, 이제는 기억에서조차 흐릿해져 버린 오래된 추억이 서서히 떠올랐다. 오랜 시간 동안 꿈조차 꾸지 못하는 그녀에게 이 광경은 무척 생경했다. 연꽃 내음이 은은히 스며드는 호수 한가운데, 유유히 떠 있는 나룻배 위에 기댄 자신이 보였다. 나룻배 맞은편에는 피리를 연주하는 사내와 연방을 서리하는 여인이 있었다. 물결에 잔잔히 흔들리는 배와 함께 그들의 웃음소리가 물비늘 위로 흩어졌다. 참으로도 그립고, 그리웠던 이들의 모습이었다.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으나, 이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의 줄기는 뺨을 타고 천천히 흐르며 가슴에 스며들었고, 그와 함께 서글픈 통증이 가슴을 찔렀다. 이토록 온화하고 따뜻한 기억이 떠오른다는 것은, 살아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경계에 발을 들였음을 의미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이 따스한 기억이 꿈이라는 사실이 더욱 서글프고 잔혹했다. 분명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인데 차마 부르지도, 손을 뻗지도 못하였다. 다가가지 못하고 찰나를 지켜보는 것만이 허락된 추억이었다. 그리운 이들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 풍경이 눈앞에서 사라질까 두려워,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그런데 멈추지 않고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헛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따뜻했고 생생한 촉감이었다. 순간 폐부가 찢기는 것 같은 고통과 함께 눈이 번쩍 뜨였다. 쿨럭거리는 숨결에 붉은 덩어리가 튀어나왔고, 피가 다시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피는 역류해 눈과 코로까지 흘러내려, 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뿌옇고 따가운 눈을 비비려 하였으나, 누군가 손을 붙잡아 이를 막았다.

 

상처가 덧납니다.”

 

낮고 단단한 저음이 고요한 공간에 울렸다. 뿌옇고 흐릿한 시야 속에서 두 노란 눈이 더 밝게 빛났다. 그녀가 묻기도 전에 차가운 물수건이 눈을 감쌌다. 눈과 코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주는 손길이 섬세했다. 여전히 쿨럭거리며 숨을 고르지 못하는 그녀의 등을 쓰다듬고 두드리는 손길도 다정했다. 흰 털이 아니라, 묵직한 숲 향이 은은히 풍기는 흰 장포가 어깨 위로 덮였다. 털이 아닌 살이 맞닿는 온기가 느껴졌다. 팔이 그녀를 감싸안자, 그녀는 빠져나가는 온기를 붙잡고 싶다는 듯 그 팔을 꽉 부여잡았다.

 

도대체 누가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제대로 뱉어지지 않았다. 목소리 끝에 담긴 떨림은 희미한 불안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뿌연 시야 속, 선명하게 빛나는 노란 눈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눈은 짐승의 본능도, 인간의 연민도 아닌, 무언가 알 수 없는 존재의 고요한 응시였다. 마치 어둠 속에서 오랜 세월 동안 기다리던 자가 드디어 만난 상대를 지켜보는 듯한,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그녀를 꿰뚫어보았다.

 

**

 

 

 

 

 

해시가 한참 넘어 어둠이 짙었지만, 한실에 조그마한 불빛이 켜져 있었다. 방 안의 기운은 묘하게 무거웠다. 뒷짐을 지고 서 있던 남희신이 몸을 돌려 들어서는 남망기와 마주했다. 형제의 두 눈이 노랗게 밝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들의 눈빛만은 선명했다. 초승달처럼 옅은 곡선을 그리던 한 쌍의 눈이 천천히 접히며 남희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망기, 고생 많았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다.”

 

남희신은 남망기를 자리에 앉히고 자리에 앉았다. 그에게서 풍기는 향이 평소의 백단향과는 달랐다. 더 묵직하고 오래된 절의 향이었다. 남망기는 미세한 차이를 놓치지 않았고 고개를 살짝 돌려 남희신을 바라보았다.

 

형장, 출타하셨다 돌아오신 겁니까?”

조금 전에 돌아왔다.”

절에 다녀오신 겁니까?”

 

남희신은 눈을 가늘게 뜨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래, 절에 다녀왔단다.”

 

남망기는 더는 묻지 않고 눈을 내리깔았으나 피진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남희신이 그 모습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러는 망기 너도 절에 다녀온 것 같구나.”

 

남망기는 잠시 뜸을 들이다 짧게 대답했다.

 

그저, 비를 피해 잠시 머물렀을 뿐입니다.”

 

남희신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제 동생이 말하지 않는 것을 들추고 싶지 않았고, 저 또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쉬이 말할 수 없었다. 그보다 지금은 남망기를 은밀히 보냈던 일의 경과를 듣는 게 더 시급했다. 남희신의 노란 눈이 고요하게 빛났다.

 

**

 

 

남희신이 남망기에게 전한 부탁은 예상보다도 복잡한 실타래였다. 전해들은 내용은 이러했다. 방계 장로의 자손 중 하나가 능구 수련에는 뜻을 두지 않고 향락에 탐닉하다 끝내 속세로 쫓겨난 자가 있었다. 장로의 지원이 끊기고 수진계와도 연을 끊은 그는 홀로 상단을 차려, 수진계를 흉내 낸 물품을 거래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처음에는 법기를 모방한 장난감이나 효험이 거의 없는 부적을 파는 데 그쳐 눈에 띄지 않았고, 남희신 또한 그가 명백히 수진계의 비법을 유출하지 않는 한 관여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상단의 규모는 어느 날 갑자기 눈에 띄게 확장되기 시작했다. 속세의 가문들이 앞다투어 상단에 패물을 바치고, 부유했던 한 가문은 결국 전 재산을 탕진한 끝에 소가주였던 아들이 노비로 팔려 가고, 가주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을 맞았다. 조사를 거듭한 끝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상단주는 고소의 이름을 빌려 약초를 독점적으로 유통하고 있었다. 그 약초는 운심부지처 뒷산에서만 자라는 귀한 식물이었으나, 효능이 뛰어난 만큼 중독성 또한 강해 속세의 가문들을 파멸로 이끌고 있었다.

남희신은 이 사태를 간과할 수 없었지만, 고소의 명예가 걸린 만큼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이에 남망기가 은밀히 조사에 나서 상황을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남망기는 바로 근방의 야산으로 향해 기척을 죽인 채 상단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그날 밤, 상단의 창고와 본채에서 갑작스러운 불길이 치솟았다. 폭음이 울려 퍼졌고, 이어지는 비명 소리가 밤 공기를 뒤흔들었다. 불길 속에서 검과 화살이 번뜩이며 날아다녔으니, 누군가 상단을 습격한 것이 명백했다.

예기치 못한 사태에 남망기는 머뭇거릴 겨를도 없이 피진을 움켜쥐고 상단 안으로 발을 들였다. 혼란과 공포로 가득한 상단 내부는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장정 수십 명이 투견까지 동원해 뒤쫓았음에도 침입자의 종적은 찾을 수 없었다.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남망기의 눈에 들어온 것은 불길에 휩싸이지 않은 텃밭이었다. 그곳은 겹겹의 부적 결계로 보호받고 있었고, 결계 안에는 약초들이 고스란히 자라나 있었다. 불길 속에서도 타지 않는 부적과 약초라니. 남망기는 피진을 휘둘러 결계를 깨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약초뿐 아니라, 법기 하나가 땅에 묻혀 있는 듯 은은한 영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법기는 바로 '호쇄옥(濩灑玉)'이었다. 호쇄옥은 무엇보다 몸이 좋지 않았던 남망기의 어머니가 차고 다녔던 영험한 영기가 흘러나오는 패옥이자 기산의 고소 토벌시에 잃어버린 유품이었다.

분노에 찬 남망기는 법기를 손에 쥔 채 상단의 내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상을 밝히기 위해 상단주를 붙잡으려 했으나, 그를 맞이한 것은 이미 목이 떨어져 나간 차디찬 시신뿐이었다. 목덜미는 단칼에 깨끗하게 잘려 있었다. 매끈하고 예리한 단면은 침입자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남망기는 시신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절단면에서 특이한 흔적을 발견했다. 검은 잔재가 묻어 있었는데, 이는 단순히 불에 그을린 자국 같으면서도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남긴 흔적이라기보다, 무언가의 잔재 같았다. 게다가 절단면 위로 희미하게 남아 있는 붉은 선은 독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었다. 남망기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그 자국을 조심스레 닦아내며 독을 채취했다. 그가 손수건을 살피며 눈을 가늘게 좁히자, 한층 더 깊어진 의문이 그의 이마에 드리웠다. 단순한 칼날의 흔적을 넘어서는, 설명할 수 없는 삿된 기운이 이 흔적에 서려 있었다. 기이한 기운이 방 안을 은은히 감돌고 있었다. 남망기의 목적과는 무관하게, 침입자는 상단주와 깊은 연관이 있는 자임이 분명했다.

남망기는 심상치 않은 예감을 느끼며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근방의 산길로 이어진 검붉은 핏자국을 발견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자취를 따라갔다. 산길 끝에서는 장정들의 목소리와 투견의 날카로운 짖음이 뒤섞여 울려 퍼지고 있었다. 횃불을 든 장정들은 사방을 비추며 침입자의 흔적을 찾고 있었지만, 곧 쏟아진 비에 횃불이 꺼지면서 그들의 기세도 점차 꺾였다.

비가 땅을 적시며 피의 자국을 씻어냈지만, 남망기의 감각은 여전히 그 잔류를 포착하고 있었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그의 시야는 더욱 또렷해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 사이로 노란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의 눈동자는 서서히 가늘어지며 달빛 아래에서 변화를 일으켰다. 흰 털이 피어오르듯 돋아나고, 뼈와 근육이 일그러지며 거대하게 변형되었다. 손발에서 길고 날카로운 발톱이 자라나 땅을 움켜쥐었고, 그의 형상은 점차 인간의 것을 벗어나 늑대의 위용을 띠었다.

남망기는 완전히 늑대로 변모했다. 달빛에 비친 그의 모습은 은은하면서도 서늘한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 날카로운 이빨과 금빛으로 번뜩이는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드러났고, 짙은 비와 어둠마저 그의 존재를 감추지 못했다. 그는 거대한 늑대의 형상으로 천천히 어둠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

 

 

 

 

피 냄새를 좇아가던 남망기가 도착한 곳은 오래되고 버려진 절이었다. 달빛 아래 낡은 기와와 갈라진 나무 기둥이 음산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가장 안쪽에서 더욱 진하게 풍겨오는 피 냄새에 이끌린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 안에는 상상했던 강적이 아닌, 찢겨진 옷과 비에 젖어 가냘픈 몸이 드러난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의 몸 여기저기에는 깊이 베인 상처가 선명했고, 피는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쓰러지지도 않고 검을 든 손으로 위태롭게 흔들리며 서 있었다. 여인은 비틀거리는 몸으로 남망기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것은 방어라기보다 마지막 남은 기운을 쥐어짜는 몸부림에 가까웠다.

남망기는 검이 날아드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분명 피할 수 있었으나 남망기는 피하지 않았다. 옆구리가 스치며 피가 흘러내렸으나, 이유도 모른 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 느끼는 기이한 고동이었다. 마치 그의 심장이 스스로 깨어나 무언가를 부르짖는 듯 거칠게 요동쳤다.

그는 자신의 장포를 벗어 여인에게 걸쳐주었다.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몸을 품에 안자, 차갑던 몸에서 서서히 열기가 돌기 시작했다. 여인은 악몽에 시달리는 듯 작은 신음을 흘렸고, 눈물은 끊임없이 그녀의 붉어진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남망기의 가슴을 적시는 그 눈물은 이상하게도 그의 심장을 더욱 거칠게 뛰게 했다.

남망기는 무의식적으로 품 안에서 패옥을 꺼내 들었다. 고소의 법기, 호쇄옥(濩灑玉). 잃어버린 어머니의 유품으로, 푸른빛을 띠며 은은한 영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빛을 바라보는 순간, 그의 가슴속에는 무거운 갈등이 스쳐갔다. 이 법기는 되찾아 운심부지처에 보존해야 할 귀중한 유산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패옥에서 여인에게로, 그리고 다시금 패옥으로 옮겨졌다. 어머니의 온기가 담겨 있던 이 패옥을 잃었던 날의 기억이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랐다.
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복잡하게 얽힌 감정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잃어버린 유산이 제자리를 찾는 것보다 지금 그의 품 안에서 위태롭게 숨을 이어가는 생명이 더 중요했다. 남망기의 손은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패옥을 여인의 손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차가운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낄 때마다 그의 가슴에는 설명할 수 없는 묵직함이 번졌다. 어머니의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여인은 그의 품에서 가늘고 작은 숨을 내쉬며 살아가려는 몸부림을 이어갔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절 안에 맴돌았으나, 동이 트며 서서히 붉은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불상 아래로 드리워진 붉은 기운이 서늘한 어둠을 몰아냈다. 어둠이 가시고 아침이 오는 진리처럼, 생명이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치를 남망기는 거스를 수 없었다. 그녀를 이대로 두고 가는 것은 결코 옳은 처사가 아니었다. 데리고 가야 하는가, 심문해야 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맞는 걸까. 남망기는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것이 답답하게 했다

그러나 생명이 살고자 몸부림치는 법칙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갑작스럽게 여인의 몸이 크게 떨리더니 거친 기침이 터져 나왔다. 곧이어 눈, 코, 입에서 선혈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남망기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녀의 옷자락에 선혈이 스며드는 것을 보며 그는 순간 숨을 멈췄다. 손끝에 느껴지던 미약한 떨림은 이제 그의 가슴 속에서 거대한 파도가 되어 몰아쳤다. 그것은 분노인지, 슬픔인지, 혹은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상처가 덧납니다.”

 

힘겹게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킬는 여인에게 남망기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그녀가 피 묻은 손으로 더는 움직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남망기는 품 안에서 자신의 손수건을 꺼냈다.  천천히 젖은 손수건을 펴서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 위에 덮었다. 차갑게 식은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잠깐 그를 보았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점점 생명이 꺼져가는 느낌이 뚜렷했다. 몸이 식어가는 감각이 서서히 팔다리로 퍼지는 걸 보면서, 이러다가는 그녀가 먼저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머릿속을 스쳤다. 남망기는 축 늘어진 그녀를 품에 안고 나갈까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여전히 근처에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추격대의 위험이 마음에 걸렸다. 더구나, 이 몸이 거친 도주를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결국 한숨을 뱉고 의원을 데려오기 위해 홀로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몇시진 뒤 의원과 함께 다시 절로 돌아왔을 때, 내부는 고요에 잠겨 있었다. 남망기는 천천히 문을 밀어 열었다. 불상 아래를 감싸던 떠오르는 해의 붉은 기운은 자취를 감추었고, 서늘한 기운만이 묵직하게 깔려 있었다. 남망기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절 안에는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발끝으로 바닥을 조심스레 눌러보니, 검붉은 선혈이 바싹 말라 굳어 있었다. 그녀의 흔적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

 

 

 

 

 

 

여인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절의 내부가 아니었다. 나무 기둥이나 불상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자, 자신의 몸이 온통 붕대로 감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묵직한 통증이 몸 구석구석에 스며 있었고, 코끝을 찌르는 약초 냄새가 지독했다. 사방을 둘러보니 피물이 가득 고인 양동이와 피로 얼룩진 영견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약초 더미와 함께 놓인 물건들을 보고 여인은 여기가 의원의 거처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정신이 흐릿한 상태에서도 경계심이 잔뜩 일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금세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억눌린 신음이 새어나오자, 그 순간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셨습니까.”

 

서글서글한 인상의 사내가 다가왔다. 허나, 눈에 익은 가문이나 문장의 표식은 보이지 않는 낯선 얼굴로 방심할 수 없었다. 여인은 이내 경계의 기운을 가득 품은 목소리로 낮게 물었다.

 

“...누구십니까.”

 

사내는 여인의 날 선 기색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예상했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신이 이 고을의 의원이라고 밝혔다.

 

절에 약초를 캐러 갔다가, 쓰러진 당신을 보고 모셔왔습니다.”

 

여인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리가 없어 의문이 가시지 않아 한참을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사내는 여인의 심중을 읽기라도 한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근처에서 보따리를 가져와 풀어 보였다. 보따리 속에는 온갖 약재와 산과 절에서 캔 듯한 약초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절에는 예전부터 스님들이 기른 영험한 약초가 많아 가끔 들릅니다.”

 

사내가 담담히 말하였지만, 여인은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못한 채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팔에 힘을 주자 온몸에 통증이 퍼져 나갔고, 몸은 금세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이를 지켜보던 사내가 다가와 여인의 팔을 부드럽게 붙잡고 침상에 기대게 해주었다.

 

상처가 덧납니다.”

 

단호한 목소리에 여인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녀의 얼굴에 약간의 당혹이 서렸다. 사내의 눈빛은 차분했으나, 단단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여인의 눈이 천천히 사내를 향했다. 그녀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이내 눈동자가 좁게 가늘어졌다. '그 말' 그녀의 머릿속에 어렴풋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절 안에서 들었던 바로 그 말이었다. 단순한 말이었지만, 같은 문장이 똑같이 떠올랐기에 가슴 한켠이 서늘하게 식어갔다. 굳게 다문 여인의 입술이 이내 무겁게 열렸다.

 

".....그때 절에 있었던 자가 당신입니까?“

 

사내의 미소가 희미하게 흐려졌다. 그가 대답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곧 닫았다. 얼굴에는 미묘한 기색이 떠올랐다.

 

"저는 그때 그곳에 없었습니다. 그저지나간 자의 흔적을 본 것일 뿐이지요."

 

여인의 시선이 그를 뚫어지게 노려보다 숨을 고르며 천천히 물었다.

 

절 안에다른 사람은 없었습니까?”

 

사내의 미소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퍼석한 기운이 서려 있는 미소였다. 그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갔을 땐 그쪽 혼자뿐이었습니다.”

 

여인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의아함이 스며들었다.

 

정말로아무도 없었습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낮고 조심스러웠다.

, 그랬습니다. 다만

 

사내의 시선이 강징의 옆에 놓인 물건으로 향했다.

 

이건, 그곳에 놓여 있더군요.”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피로 물든 흰 장포와 호쇄옥(濩灑玉)이었다. 낯선 법기가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흰 장포는 여인의 시선에 단번에 걸려들었다. 여인은 눈을 부릅떴다.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손을 뻗어 흰 장포를 움켜쥐었으나, 손끝이 떨렸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고소의 것이었다. 그녀의 목덜미에 스산한 소름이 돋았다. 여인은 숨을 내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잘못됐다그녀의 속삭임이 방 안에 희미하게 울렸다. 사내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이곳은 외진 곳이라 사람이 잘 찾아오지 않는 곳입니다. 몸부터 회복하는 게 먼저일 테지요.”

 

그의 목소리는 나긋했으나, 그 말에 왠지 알 수 없는 여운이 남았다.

 

독이 몸에 퍼지고 있었습니다. 살을 째고 독을 빼냈으나, 완치된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급소로의 중독은 막았으나, 이 독은 배합을 알아내지 않으면 쉽게 풀 수 없습니다. 당분간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여인은 짧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고맙소.” 그녀의 목소리는 기운이 빠져 있었다어지러움이 몰려오고, 을 더는 지탱할 수 없어 다시 침상에 쓰러졌다. 사내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을 영견으로 닦아주었다. 그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어리석은 짓이었지.”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으나, 그 안에는 자조가 가득 배어 있었다.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사내의 시선이 희미하게 흐려졌다. 무겁게 떨구어진 눈꺼풀 너머로, 그 시선이 향한 곳은 그녀의 손에 쥐어진 호쇄옥이었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으며 눈길은 다시 흐트러짐 없이 고요해졌다. 어딘가에서 바람이 새어 들어온 듯, 짧은 찰나의 흔들림만을 남긴 채, 호쇄옥은 고요히 그녀의 손 안에 남아 있었다.

 

**

 

 

 

 

운심부지처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남망기의 심사는 편치 않았다. 발끝이 마룻바닥에 닿는 감각마저 묵직하게 느껴졌다. 남희신을 대면하기 전까지 그는 줄곧 고심했다. 평소라면 남희신에게 숨김없이 따르고 모든 것을 솔직히 대했으나, 이번만큼은 입을 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가.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내보여야 하는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실타래가 엉켜갔다.

 

약초는 모두 회수했습니다.”

 

남망기는 말끝을 한 번 삼킨 뒤 이어갔다.

 

상단은 호쇄옥으로 약초를 길렀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법기는 도중에 분실하였습니다.”

짧은 숨을 고른 뒤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시일 내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남희신의 시선이 천천히 남망기를 향했다. 그의 빛은 결코 가볍지 않았고, 시선은 마치 얇은 장막을 뚫고 속을 꿰뚫어보는 듯했다. 시선이 거두어지지 않아 남망기의 어깨에 알 수 없는 무게가 얹힌 듯했다. 얼굴에 담긴 표정은 분명 온화했으나, 쉽게 해독할 수 없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선연히 떠오른 표정은 갈등이 얽혀 있는 듯 묘하게 흐릿했다.

 

상단이 불타고, 상단주가 목이 잘려 죽었다고 들었다.”

 

남희신의 목소리는 여전히 온화했으나, 그 나긋함이 오히려 서늘하게 퍼졌다.

 

망기, 네가 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어찌 된 일인지 연유가 알고 싶구나.”

 

남망기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올렸다. 얼굴은 감정의 흔들림 없이 올곧았으나, 피진을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손등 위로 선명히 드러난 핏줄이 서서히 부풀어올라 굳건한 의지를 드러냈다.

 

상단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불길이 치솟고 있었습니다.”

 

남망기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확고했다.

 

침입자는 오로지 상단주만을 죽이고 떠났습니다. 다른 것은 건들지 않았습니다.”

 

남희신은 말없이 남망기의 말을 들었다. 무겁고 길게 흐르는 침묵 속에서도, 남희신의 시선은 여전히 남망기를 놓지 않았다. 침입자에 대한 남망기의 태도는 두둔에 가까웠으나 남희신은 이를 묻지 않았다. 충분히 더 물을 수 있었으나, 그저 침묵으로 넘겼다남망기는 피진을 더 깊이 움켜쥐었다. 불분명한 정체의 침입자, 분실된 호쇄옥, 그 모든 것들이 실타래처럼 엉켰다. 사태는 해결되기보다는 더 깊고 어두운 미궁 속으로 흩어지는 듯했다남희신은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그의 손이 남망기의 손등 위에 가만히 내려앉았다. 도드라진 핏줄 위로 남희신의 손가락이 조용히 눌렸다. 그 움직임에는 질책도, 위로도 없었으나 묘한 무게감이 있었다. 손끝이 살짝 눌리며 흐르는 기운이 남망기의 피부에 스며드는 듯했다.

 

망기야.”

 

남희신의 목소리는 부드럽고도 낮게 가라앉았다.

 

무리하지 말고, 네 선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된단다.”

 

남망기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 형장.”

 

남희신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는 책상 위에 다시 손을 올리며, 손가락으로 가볍게 서책을 두드렸다.

 

낯선 이를 쫓는 것은 네게 맡기겠다.”

 

남희신의 목소리는 더없이 조용했으나, 깊이 파고들었다.

 

호쇄옥은 내가 찾겠다.”

 

남망기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희신을 바라보았으나 그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다.

 

종주로서의 책임이 있으니.”

 

남희신의 미소가 서서히 번졌다.

 

더불어, 형제는 함께 걸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 말에 남망기는 단단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시선이 탁상 위에 펼쳐져 있는 고서에 잠시 머물렀다. 서책의 너덜너덜해진 가장자리와 노란빛으로 바랜 종이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고서의 한 구절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심맥을 잠재우는 법과 혈의 흐름을 끊는 지침.' 우연히 펼쳐진 것인지, 일부러 열어둔 것인지 알 수 없었다남망기의 시선이 머무는 것을 느낀 남희신은 아무 말 없이 고서를 천천히 덮었다. 얇은 책장이 닫히며 공기 중에 희미한 절 향이 퍼졌다. 그 순간의 소리는 유난히 길게 울리는 것만 같았다.

짧은 침묵이 흘렀고, 남망기는 이내 고개를 숙이며 단정히 대답했다.

 

, 형장.”

 

**

 

 

 

 

 

 

사흘간 사경을 헤매던 여인은 나흘째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마치 모든 일이 아지랑이처럼 희미한 꿈 같았다. 그러나, 콧속을 찌르는 지독한 약초 냄새와 온몸을 옥죄는 통증이 이곳이 현실임을 뚜렷이 인지하게 했다침상의 이불을 천천히 걷어내자 온몸에 감긴 붕대가 눈에 들어왔다. 붕대 곳곳에는 검붉은 피가 스며든 자국이 선명했다. 팔부터 어깨, 허리, 다리에 이르기까지 감기지 않은 곳이 없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늑골이 조이는 듯한 통증이 따라붙었다몸을 일으키려 하자 머리가 핑 돌았다. 그녀는 침대 기둥을 붙잡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손끝에 힘을 주고 바닥을 짚어 겨우 몸을 일으켰으나, 발을 내디딜 때마다 전신의 근육이 단단히 뭉쳐 있었다. 마치 쇠사슬로 묶인 듯,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온몸에 새겨진 고통은 단순한 부상이 아니라, 그간의 고난을 증명이라도 하듯 깊고 끈질겼다. 게다가 무언가가 몸 안에서 꿈틀대며 내장을 짓누르는 듯한 기분에 그녀는 가슴께를 눌렀다. 차가운 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망신스러운 꼴이군."

그녀는 스스로를 책망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마침 의원이 약탕기에서 달인 약을 들고 들어왔다. 의원의 눈이 천천히 그녀의 움직임을 좇았다.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걷는 그녀의 걸음은 비틀거림이 섞여 있었고, 얼굴에는 진한 피로가 묻어났다. 의원은 안쓰러움이 깃든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많이 회복되셨군요. 무리는 하지 마십시오. 걷는 것만으로도 큰 진전입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약을 받아들었다. 짙은 약초 향이 코끝을 찔렀다. 그녀는 약을 한숨에 들이켰다. 약의 쓴맛에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이내 입을 닦고는 의원을 향해 가볍게 포권하며 말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후일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의원은 느릿하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갚을 필요는 없습니다."

 

여유로운 음성이었다. 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유 없는 친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가 내뿜는 온화한 말투는 알 수 없는 수법의 일환처럼 느껴졌고, 그녀는 그것에 의존할 수도 없었으며,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여인은 고이 정리된 짐과 검을 집어들었다. 가슴께로 전해지는 묵직한 무게에 잠시 숨을 고르는 듯했으나, 곧 발걸음을 내디뎠다.

 

"지금 당장은 보은할 수 없으나, 반드시 다시 찾아와 갚겠습니다.“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숨소리는 다소 거칠었다. 의원은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등을 돌린 채였다. 의원이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한 기색을 보였으나, 그녀는 기다리지 않았다. 문을 밀어 열고 밖으로 나섰다. 발걸음은 단호했으나 어딘가 불안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그녀의 조급함을 드러냈다. 조급한 여인과 다르게 의원은 문틀에 느긋이 기대어 있었다.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혈자리가 막혀 있어, 당분간 변면술(變面術)은 사용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강 종주님.”

 

문 밖으로 나선 강만음의 거친 발걸음이 순간 멈추었다. 숨을 들이쉬는 소리마저 조용히 끊겼다. 강만음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눈동자에 당혹, 분노, 그리고 불안과 불신이 겹겹이 어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사내를 향했다. 눈동자가 떨렸다. 흔들리는 감정은 분명히 억누르고 있었으나, 그 억눌림의 틈새에서 벗어나려는 노기가 서렸다.

 

……, 대체 누구냐.”

 

강만음의 손이 천천히 허리춤으로 향했다. 검집을 잡은 손이 무겁게 떨리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것은 곧 단단한 결단으로 바뀌었다. 검이 서서히 빠져나오며 공기를 가르자 서늘한 금속음이 공간을 스쳤다. 차가운 칼날 끝이 사내의 가슴께를 곧게 겨눴다. 마치 그 자리에서 숨을 꺼내려는 듯한 날카로움이었다. 가슴께를 겨눈 칼끝 앞에서 의원은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미소를 지으려는 입가가 천천히 일그러졌다. 웃음의 흔적은 사라졌고, 복잡한 감정이 얼굴을 스쳤다. 순간, 눈동자 깊은 곳에 잠시 흔들림이 비쳤다. 흔들리던 시선은 여인의 날 선 얼굴을 비추더니, 이내 허공으로 흘렀다. 그 눈길이 허공의 어디에 멈춘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는 듯한 묘한 기색이었다.

 

 

 

 



 

*변면술(變面術) 은 육체의 본질을 왜곡하고 외형을 뒤바꾸는 술법으로, 성별을 포함한 신체적 특징을 자유자재로 변형하는 비술이다. 그러나 단순히 얼굴을 바꾸는 변장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변장은 껍질을 바꾸는 것에 불과하지만, 변면술은 뼈와 근육, 피부, 혈맥, 음양의 속성까지 교란하는 술법이다.

이 술법의 기원은 오래된 고서에조차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으며, 귀도(鬼道)와 사도(邪道)의 기법에 가까운 술법으로 여겨진다. 운용할 수 있는 자는 극히 드물며, 거대한 대가와 고통을 수반하기에 세가에서도 이를 터득한 자는 손에 꼽힌다. 변면술을 익혔다고 해서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매번 사용할 때마다 육체와 정신에 큰 부담을 주어 몸과 마음을 서서히 망가뜨린다고 전해진다. ()과 양()의 균형을 강제로 전복시키며, 신체의 구조를 무너뜨린 후 재조립하는 것과 같으며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본성"을 뒤틀어 바꾸는 것이다.

변면술의 대가는 단순한 체력 소모를 넘어서 신체와 정신의 훼손으로 이어진다.



망기강징ts 희신강징ts XX강징ts


아아아주 옛날에 비슷한 무순 쓴 적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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