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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주, 약송란이 왔습니다.”
“그래?”
“약재상이 하는 말이 관리하기 보통 어려운 게 아니라 하니, 수사를 시켜 빨리 보내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강징은 부사가 하는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뜬금없이 이 편으로 보내진 창약 덕분에 강징은 금릉의 부상을 알게 되었다. 물론 금종주는 어찌 그리 체통도 없고 조심성도 없냐는 외숙의 꾸지람을 면치 못했다.
금여란은 약관도 훌쩍 넘은 나이에 어린애처럼 꾸중을 듣고는 투덜거렸지만, 돌아온 강징은 조카의 흉한 상처에 남몰래 근심했다.
남희신이 왜 약을 제게 보냈는지는 몰랐지만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자신이 하도 금릉을 싸고 도니까 여기서 요양이라도 하는 줄 착각했던 모양이라고.
아무튼 답례를 해야 했다.
그가 보낸 약은 정말로 신통하게 잘 들어서 금릉의 상처는 단 며칠만에 고름이 멎었다.
금릉은 사내에게 이깟 흉이 대수요, 하고 심한 상처에도 태평했으나 아이적부터 보아 왔던 고운 피부에 흉터가 남는 것이 속상했던 강징은 크게 마음이 놓였다.
고소 남씨가 어떤 귀한 약재를 썼을지는 짐작도 가지 않았지만 아무튼 금품이 아니기에 비싼 물건으로 갚는 것도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고심하던 강징은 운몽 지역에서만 나는 희귀한 약재와, 남희신의 취향을 고려한 난화분. 그리고 마침 철이 되어 생산한 연꽃차를 준비했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전해야 할 지가 문제였다.
강징은 난감해하며 꼬박 하루를 고민했지만, 결국에는 선물들을 챙겨들고 직접 고소로 향했다. 



남희신은 강징이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는 말에 하던 일도 내려놓고 맞이하러 나갔다.
정자에 다과를 준비하라는 그의 말에 강징은 조금 당황스러웠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두 사람은 높게 경치가 내려다보이는 정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해는 따사롭고 바람이 선선한 좋은 날씨였다. 운심부지처의 이름답게 아래편에 안개구름이 자욱하게 깔려 그야말로 선경을 바라보는 듯했다.
흔히 하는 인사치레가 오간 뒤, 남희신은 찬찬히 강징을 훑어보았다.
다행히 근래 특별히 야위거나 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새삼 돌이켜 보면 강징은 사일지정 중에 살이 많이 내려 딴사람처럼 변했었고, 그 후로 오랜 세월 동안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소 수학 때의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보니 좀더 선이 둥글고 풋풋했던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금종주의 상처는 차도가 있었습니까?”
“예. 택무군께서 보내 주신 약의 효과가 탁월하더군요.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세 명의 의원이 갖가지 약을 써도 소용이 없더니...”
“상처를 입힌 요괴의 특성 때문입니다. 그 요괴의 손톱에 당하면 반드시 독을 중화시키기 위해 써야 하는 약재가 있습니다.”
보통은 그런 말을 들으면 어떤 독이며, 어떤 약재를 썼다는 건지 궁금해 할 테지만 강징은 캐묻지 않았다. 사실 강징이 질문을 하기를 예상했던 남희신이 말을 끊자, 두 사람의 사이에는 그대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고 보면 삼독성수가 누군가와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오래전, 위공자와 운심부지처에서 투닥거리던 모습이 가장 편안한 모습이 아니었을지.
무어라도 말을 꺼내지 않을까, 남희신은 조금 더 기다렸다. 그러나 강징은 눈을 내리깐 채 그저 가만히 인내하는 것 같았다.
늘상 긴장감이 팽팽한 상태였던 그가 고요하게 앉아 있으니 어쩐지 기운이 없어보이기까지 했다.
“몸소 이까지 오신 이유가, 단지 저에게 감사를 하기 위해서입니까?”
그 말에 움찔, 강징의 몸이 바늘에라도 찔린 것처럼 생기를 되찾자 남희신은 왠지 뱃속에서부터 치미는 듯한 생경한 악의를 느꼈다. 마치 거슬리는 호적수를 패퇴시키는 순간에 예상했던 승리감 대신 덮치는 불쾌한 안타까움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강징은 순식간에 돌변한 남희신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이를 꾹 물었다.
“경황이 없어...”
말을 하다 말고 강징은 다시 한번 턱에 힘을 주었다.
“...지난번 불쾌하게 해드린 일을 사과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이 사람이 실수했다 생각하시고 잊어 주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치자 강징은 고개를 들어 똑바로 남희신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마치 도전이라도 하는 것처럼 강한 시선을 받은 남희신은 그만 단속할 틈도 없이 매우 무례한 느낌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것은 맹세코 고의가 아니었다. 
곧바로 얼굴이 붉어진 강징이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괜히 시간을 빼앗아서 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래도 뻣뻣하게 공수하는 일만은 잊지 않은 강징은 남희신이 뭐라할 틈도 주지 않으려는 듯 급한 걸음으로 길을 내려갔다. 
남희신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빠른 속도로 멀어져가는 강징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를 위해 선을 긋는 태도를 보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와 마주앉아 차를 마신 일부터, 아주 급소를 공격하는 것처럼 찔러버린 일까지. 일이 왜 이렇게 흘러가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남희신은 정자에 앉아서 한참 동안 바람을 더 맞고 있었다. 그러다 지나가던 하인이 보이자 불러서 강종주의 선물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이윽고 고소 남씨의 약술사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약재들과, 난꽃 화분이 앞에 놓였다.
잎과 똑같은 연녹색의 꽃잎을 지닌 난꽃은 남희신의 취향에 꼭 맞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는 희귀한 화초보다도 물그릇 가득 피어나는 꽃송이에 더 마음이 갔다.
은은한 연꽃이 개화하는 차를 풍경처럼 그윽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그 향기가 삼독성수에게서 나는 향과 닮은 것을 깨달았다.
의도한 것일까?...
...아니, 그의 성격에 그럴 리 없겠지.
무모하고 주변머리 없는 부분만은 피도 섞이지 않은 그의 사형과 꼭 닮았으니까.
남희신은 작게 미소지으며 찻잔에 차를 부어 입가로 가져갔다.
찻물의 향기가 입술을 적시며, 생소한 맛을 전했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 그로부터 스스럼없는 기쁨을 받아들이는 것이 대체 얼마만의 일인지.
마치 조그마한 새가 굳어 있던 심장을 콕콕 두드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치도록 가속을 하여 쏜살같이 연화오로 돌아온 강징은 하지 않아도 될 일들을 앞서 마구 해치우고는, 그러고도 잠자리에 들 때까지 진정을 하지 못했다.
역시 그는 불쾌했던가 보다. 하긴 사람이라면 그렇겠지. 남들처럼 힘들어하기도 하고, 욕심도 있는 사람이라고 자기 입으로 얘기했으니까.
이제는 정말로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 되겠다, 다시는 그와 단 둘이 되지 말고 단단히 거리를 두자.
강징은 좋지 않은 기분을 억누르며 애써 마음을 굳게 먹으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며칠 후, 남희신이 차와 서신을 보냈다.
저자에 팔아도 될 정도로 훌륭한 필체가 담긴 서신을 수차례 읽으며 숨은 진의를 알아보려 했으나 강징은 미간의 주름만 점점 깊어질 뿐이었다.
편지에는 당신이나 금종주나, 오래 사귀어 온 사이에 도움을 주는 거야 당연한 일인데 너무 귀한 선물을 받아 면목이 없다. 별 것 아니지만 정성을 담았으니 양해를 바란다는 둥, 흠 잡을 곳 없는 예의바른 말들 뿐이었다.
강징은 그가 손수 키운 차가 들었다는 고풍스러운 목함을 뚫어져라고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만인이 아는 택무군이라 하면 그답게 너그러운 태도겠지만, 사실은 그렇게 살가운 사람도 아니라면서.
사실은 귀찮게 여기고 있으면서.
어쩌면 저에게 속내를 보였던 일이 후회되어서 덮어보려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마침내 강징은 결심한 듯 상자를 열고 잘 포장된 꾸러미를 차례로 벗겨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세심하게 물온도를 조절해서 끓여낸 차는 기품이 있으면서도 톡 쏘는 향을 지니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거절하던 남희신을 방불케 하는 향에 강징은 차를 입술까지 가져갔다가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아니라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온화한 남희신, 누구나가 알고 있는, 곧 등선이라도 하는 게 아닌가 모두가 우러러 보던 택무군을 보고 반했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쯤 마음이 식어가야 이치에 맞을 텐데, 오히려 더 불타오르는 건 대체 어떤 연유인지.
성급하게 고백해버린 뒤, 그것을 없었던 일로 되돌리는 것마저도 실패해버리고.
이제는 어떻게도 손쓸 도리가 없어 뜨거운 감자처럼 속을 태우는 감정에 매일 매일을 시달릴 뿐이었다.
강징은 길게 한숨을 쉬고는 게으른 아이처럼 옷을 다 입은 채 침상에 올랐다. 아직 뜨겁게 김을 피워올리는 다기도, 남희신이 친필로 쓴 서신도 외면해버리고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그나마 겨울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혹한의 계절이 오면 모임이 줄어드니 그를 만나지 않아도 되고, 한편으론 일도 한가해져서 이따금씩 술로 마음을 달랠 수도 있을 것이었다.



*



우연히도 남희신을 다시 볼 일이 없는 채 겨울로 접어들자 강징은 정말로 심하게 술을 마셔대었다.
독하게 일처리를 하는 것에 습관이 들렸던 것뿐, 운몽 강씨도 강성해진 지 오래라 마음만 먹으면 놀고 먹기만 한대도 아무 지장이 없었다. 
종주가 된 후 처음으로 일손을 놓아버리고, 그래도 별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강징은 한 번 해이해져버리니 떠도는 기분을 갈무리하기 어려웠다.
부사는 강징이 전에없이 일을 끊어버리고 술독에 빠져 지내자 영문을 몰랐다. 몇 번 중요한 일로 귀찮게 했더니 알아서 하라고 무섭게 성을 내어서 다시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너무도 오래 참았고, 심하게 견뎌왔던 탓이리라. 강징은 취하면 취할 수록 억눌러 두었던 괴로움이 죄다 풀려나며 더 많은 술을 붓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가끔씩 희미하게 이성이 돌아오면, 이대로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한량처럼 드러누워 술잔만 기울이던 강징을 침소 밖으로 끌어낸 것은 뜻밖에 날아든 한 장의 편지였다.
며칠째 눈발이 날리는 고약한 날씨에 청담회를 연다는 고소 남씨의 초대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