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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1 23:08


오질 말 것을 그랬나.
선문 백가 중에서도 핵심 인물들만 모이는 종주회에,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강징은 후회하며 산길을 올랐다.
하필이면 다른 곳도 아닌 그의 본진, 운심부지처.
잠시 멈추어 짙푸른 녹음 사이에 묻혀 있는 선부를 바라보자, 이 곳에서도 참 많은 일을 겪었다 싶었다.

“어서 오십시오.”
강징은 평소의 오만하고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그러나 남희신은 여상하게 인삿말을 건넸다. 부드러운 그의 얼굴에는 우려했던 경멸이나 부자연스러운 벽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강징이 익히 아는, 누구나가 알고 있는 택무군의 모습이었다.
강징은 안도하는 한편으로 허전해지는 마음에 한숨을 쉬고, 대청으로 들어섰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강징의 상념은 저 먼 곳을 떠돌고 있었다. 절대로 남희신이 있는 쪽을 바라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야말로 온 신경이 그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강징은 정말로 알고 싶었다. 미칠 듯한 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희신의 그런 모습을 본 것이 무척 충격이었으므로.





지금 와서 돌이켜 보아도 강징은 자신이 후회를 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주워담기를 거부한 것도 자신이었다.
족히 이십여년을 알아온 사람이 별안간 가슴 속 깊이 꽂혀, 어쩔 줄 모르고 앓아왔던 게 고작 1년 가량의 일.
위무선처럼 눈 감고 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면 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같은 지위에 몸담고 있는 그를 강징은 시도 때도 없이 만나야 했고, 만나기만 하면 애써 다 꺼뜨렸다고 생각했던 불씨에 불이 붙으며 거세게 타오르곤 했다.
결국에 고백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건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을 정도로 절박해서였다. 이대로는 멀쩡하게 삶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물론 거절당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그래서 거절을 당해, 이 마음을 꺾고 싶은 것이 목적이었다. 
남희신을 방문하며, 강징은 방어적인 마음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하나에서 열까지 세고 있었다. 
아무리 그라도 다소 거리끼는 느낌은 막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심히 동요하지 않으며, 온화하게 거절하겠지.
그렇게 예상하면서도 심장이 터질듯 두근거렸던 강징은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미안합니다만, 당신과 저는 합이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남희신이 저런 표정을 짓는 사람이었던가? 아무리 그라도 역시 불쾌함을 느낀 것인가. 당황하는 강징에게 그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남들 앞에서는 여유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사실 저는 그렇게 느긋한 사람이 아닙니다. 착한 사람도, 따뜻한 사람도 아닙니다. 
...살아오며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 때문이 아니라, 제가 본디 강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무척 지쳐버렸습니다. 그러니 정인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지만, 만약 생긴다 해도 이런 삭막한 마음을 달래주고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으면 합니다.”
남희신이 제 마음을 받아들이는 기행을 했다 해도 이보다 놀라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강징의 놀란 시선을 맞받아보는 남희신의 눈빛은 직선적이었고, 서늘하고, 표정은 굳어 있었다. 
본 적 없는 모습, 상상도 못했던 발언들.
심지어 강징이 소매 속에 숨기고 있던 약을 쥔 손가락을 가늘게 떨자, 그가 가볍게 콧숨을 들이마시더니 말했다.
“...명단초입니까? 단기간 동안의 기억을 상실하도록 만드는 약재.”
그 말에 강징은 더욱 놀라며 소매를 등 뒤로 말아 감추었다. 
이 또한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강징은 남희신이 거절하는 말을 듣자마자, 차에 약을 타서 그의 기억을 깡그리 지워버릴 계획이었다.
심지어 남희신은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강종주. 이 정도로 겁쟁이신줄은 몰랐는데요.”
지독하게 꼬집어 말하는 독설.
강징은 물론 창피했다.
같은 사내에게 연정을 고백하는 수치심, 게다가 매몰차게 거절당하는 수치심.
그라면 부드럽게 거절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지 않았다면, 그의 기억을 지울 거라 해도 감히 고백할 용기를 못 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야멸차게 거절을 당하고도, 놀라움이 수치심을 상쇄시키고 훨씬 상회하는 기분이었다.
“저에게 거절을 당하면 약을 먹일 셈이었군요.”
“......”
“궁금합니다만, 제가 받아들일 경우도 생각하신 겁니까?”
강징은 이를 악물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군요.”
잠시 눈을 내리깔았던 남희신이 이내 소매를 받치고 손을 내밀며 말했다.
“좋습니다. 제가 기억을 잃어버리길 원하신다면, 먹어드리지요.”
하지만 강징은 이상한 눈빛으로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남희신의 손은 피부빛과 마찬가지로 희고 손가락이 아름다웠지만, 사내답게 크고 마디가 시원스러웠다. 이어서 겁도 없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강징은 이전까지와는 다른 느낌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남희신의 얼굴은 표정이 강해지자 짙은 눈썹이 두드러져 보였고 눈빛도 무척이나 독해 보였다.
마치 다른 사람으로 돌변한 것 같았다. 수십년간 한결같은 모습만 보아왔던 강징은 괴리감을 수용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리고는,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이 얼굴을 또 누가 본 적이 있을까.
고소 남씨는 매우 절제된 행동을 강요하는 가문이었다. 어쩌면 그의 가족도, 지기조차도 본 적이 없는 게 아닐까.
내가 강한 척 버텨왔던 것처럼 당신도 그리했다면, 딱딱하게 웅크린 그와 같은 무표정을 대체 누가 파내었을까.
명경지수처럼 흔들림 없고 강한 당신이 사실은 힘들고 지쳤다는 얘기를, 또 누구에게 했을까.
마침내 강징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가 같은 사내라는 이유로 거절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강징이 깨달은 것은 홀린 듯 연화오로 돌아오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회의장의 분위기는 조금 이상했다.
아마 이 일이라면 삼독성수가 서슬이 퍼래서 덤벼들 거라고 사람들이 예상하는 가운데, 기이하게 조용한 모습으로 앉아 있기만 하니. 저러다 단번에 터뜨리려는 건 아닐까, 은근하게 긴장감이 돌며 그래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득을 다투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고소 남씨는 본래 추한 다툼은 일삼지 않기에, 남희신은 천천히 차를 마시면서 강징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절대로 이 편을 보지 않으니 조심할 필요도 없었다.
겉보기에는 괜찮아 보였다. 너무 말이 없긴 하지만, 그저 평소처럼 시무룩하니 심기가 불편한 듯 보이는 정도였고. 강징의 미세한 동요는 그의 비밀을 아는 남희신만이 알아챌 수 있는 정도였다.
아마 상처받았겠지. 내내 내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러나 사실은 남희신도 내내 강징을 생각하고 있었다.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평소 친하지도 않았던 그를 상대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소리를 길게 늘어놓고.
단지 한 마디,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만 하면 끝날 것을.
아니면 그가 지니고 있던 약을 먹는 것도 괜찮았을 터인데.
관음묘 사건 후, 남희신은 몇 년 동안이나 폐관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며 방황했다. 사람들 앞에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 건 이제 1년이나 될까말까 했다.
강징에게 말했던대로, 남희신은 정말로 지친 상태였다.
세상은 다시금 평화를 되찾았지만 그뿐이었다. 
그에게는 연인도, 부인도 없었으며 몇 안 되는 지기들마저도 마지막 하나까지 다 잃어버렸다.
남희신은 가슴이 답답해질 때면 감정을 숨기기 위해 습관적으로 떠올리게 된 미소를 머금고 찻잔을 쓰다듬었다.
금광요가 죽었으니, 이제는 자신의 미소에 공허함이 어린다 해도.
알아봐 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2023.05.12 05:5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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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우리 강종주님을 왜 찼냐ㅠㅠ
[Code: c885]
2023.05.12 19:10
ㅇㅇ
모바일
안돼ㅠㅠㅠㅠ거절하지마 차이지마ㅠㅠㅠㅠㅠㅠ어나더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6892]
2023.05.21 23:05
ㅇㅇ
모바일
차이다니ㅠ 이렇게 시작을 하는 것도 좋다!!!
[Code: 035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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